극동의 무적자
- 감독
- 최인현
- 제작년도
- 1969
- 출연
- 남궁원, 남정임, 허장강, 이대엽, 최성호, 김동원, 방성자, 윤미라, 성소민, 추석양, 이성섭, 최창호, 김주오, 지용남, 임성포, 이영, 황백, 권오상, 김영인, 안태섭, 신찬일, 김홍규, 나일, 황인철, 주일몽, 조덕성, 최준, 임해림, 최병철, 윤일주, 송일근, 김은옥, 김웅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흔히 ‘망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말 전설적인 망작이 되어 오래도록 ‘제일 망한 영화’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컬트로 재정의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에는 망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 ‘망했다’라고 평가되는 지점이 후대에는 묘한 매력이 되어 이를 즐기는 팬들에게 숭앙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할리우드 영화 역사에서 < 인천(오! 인천) >(테렌스 영, 1981, 이하 <오! 인천>)은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천문학적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개봉 이후 비평계와 대중 양쪽 모두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했고, 제3회 골든 라즈베리상 최악의 작품상을 수상하며 그 명성에 정점을 찍었다(최악의 작품상 외에도 최악의 남우주연상, 최악의 감독상, 최악의 각본상 등 4관왕에 올라 모름지기 당해 연도 최악의 영화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이 글을 통해 섣불리 <오! 인천>을 컬트로서 재평가하려 하거나, 혹은 그럼에도 영화팬들에게 감히 시간을 들여 한 번 즈음 볼 만하다고 추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피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피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는 오직 <오! 인천>을 둘러싼 외부적인 기록들, 그리고 여기에 참여했던 한국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영화로 기록된 이 작품이 한국영화계에 몰고 온 변화와 그것이 이후 한국영화들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도 역대급의 제작 규모 처음 <오! 인천>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는 1978년 3월 신문기사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남궁원 , 윤미라 *주 1 등 20여 명의 배우가 출연하고, 미국의 원웨이프로덕션과 일본의 동보영화사가 제작에 참여하며 각본은 <그린베레>(존 웨인, 레이 켈로그, 1968), < 프렌치 커넥션 >(윌리엄 프리드킨, 1971)의 원작자인 로빈 무어와 폴 사베지가, 감독은 < 서부로 가는 길 >(앤드류 V. 맥라글렌, 1967), <철인들>(앤드류 V. 맥라글렌, 1969)과 같은 서부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앤드류 V. 맥라글렌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렇게 5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는 영화는 그러나, 5월이 한참 지나도록 촬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7월이 되자 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왔다. 기술협조를 하기로 한 일본의 동보영화사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든가,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는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촬영 개시를 지연시킨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당시 각색을 담당했던 로빈 무어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대해 “2시간 안에 담아내기에 너무 방대한 이야기였다. … 등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 다른 작가들이 투입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주2 결국 1978년 5월에 촬영에 들어간다던 영화는 무려 1년을 더 기다려 1979년 5월, 새로 영입한 감독이 한국을 방문하며 다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교체된 감독이 무려 테렌스 영이었다. 테렌스 영은 국내에서 ‘007 시리즈’로 명성이 나 있는 감독이었다. 한국에서는 1965년에 < 007 제2탄 - 위기일발 >(테렌스 영, 1963)이 007 시리즈 가운데 가장 먼저 개봉했다. 실제 007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트렌드에 민감한 수입업자들은 서둘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 007 살인번호 >(테렌스 영, 1962)를 수입해 개봉했을 정도였다. 테렌스 영이 감독한 마지막 007 시리즈 < 007 썬더볼작전 >(테렌스 영, 1965)이 국내에 개봉하고도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테렌스 영은 여전히 국내에 다수의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영화 촬영을 위해 방한한 테렌스 영 감독이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6.25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 한국이 공산당에 침략당했다는 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리게 될 것(《경향신문》 1979.5.5)”이라는 발언을 한 이후, 북한에서 《로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이 영화가 “악랄하게 중상모독, 헐뜯는 반동 내용(《경향신문》 1979.5.16)”이라고 비난하며 제작 중지를 요구해왔다. ‘테렌스 영’이라는 스타 감독의 참여에 더해 친한(親韓)적인 그의 발언,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게 화제성을 확보하면서 <오! 인천>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뒤이어 해외 출연진도 속속 명단이 발표됨과 동시에 배우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물론 제일 관심을 끄는 것은 과연 누가 ‘맥아더 장군’의 역할을 맡을 것이냐였다. 놀랍게도 그 역은 영국의 영화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돌아갔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 햄릿 >(로렌스 올리비에, 1948), < 헨리 5세 >(로렌스 올리비에, 1944), < 리차드 3세 >(로렌스 올리비에, 1955) 등 셰익스피어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영화의 주연을 맡아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배우이고, 1947년에는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으며(국내 신문기사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를 지칭할 때는 꼭 올리비에 ‘경’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빅터 플레밍, 1939)와 < 애수 >(마빈 르로이, 1940),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엘리아 카잔, 1951) 등의 작품으로 국내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던 비비안 리의 연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그가 ‘맥아더 장군’의 이미지에 잘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로렌스 올리비에’가 그 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로 이 영화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공수해온 장비와 동원된 스태프, 엑스트라의 스케일이 또 한 번 한국 측 스태프들과 언론, 촬영현장을 구경하러 온 시민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시 촬영 현장의 분위기와 이 영화의 규모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 신문 기사와 구술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6.25 당시 피난민들의 행렬을 재현한 촬영 현장(《동아일보》 1979.9.5) 테렌스 영 감독을 비롯해서 로런스 올리비에 경,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등 세계 정상의 배우들이 우리나라에 몰려와 촬영 중인 영화 <오! 인천>은 스태프 캐스트 못잖게 엄청난 물량 작전으로 계속 화제를 뿌리고 있다. … 현역미군 등 5백명의 엑스트러와 탱크 4대, 장갑차 2대 등이 출연한 서울탈환 장면은 당시 서울 거리와 가장 비슷한 인천 신포동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 지난 6월 28일 촬영을 시작한 영화 <오! 인천>은 용인 민속촌을 비롯하여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강원도 횡성비행장, 경북 왜관, 인천, 서울 등을 돌며 제작됐다. 이중 6.25 당시 낙동강 철교 폭파를 재현한 촬영에는 피난민 차림의 엑스트러 1천 3백명, F86 등 전투기와 탱크들이 동원돼 13일 동안 6대의 카메라에 담았다. *주3 인천에서도 폐기된 수인간(水仁間) 미니열차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고 영흥도에 3천만원을 들여 등대를 세우기도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모습은 인천 제2부두에서 촬영됐는데, 군함 12척과 상선 10여척이 동원돼 장관을 이뤘다고. … 이 영화는 당초 1천8백만 달러(90억원)의 제작비가 계상되었으나 제작기간의 지연 등으로 이미 3천5백만 달러(1백75억원)가 투입됐단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물량이 동원된 이 작품에는 6명의 주연급 배우(남궁원 포함)와 테렌스 영 감독이 쓸 캠핑카 8대, 토일렛카, 링컨 컨티넨털 승용차, 지프 2대가 미국에서 운반됐다. 캠핑카는 침대와 화장실, 식당과 에어컨 장치가 돼 있어 촬영현장에서 주연 배우들이 쓸 수 있도록 했다. 또 높이 10m까지 올라가는 크레인 카도 제작자인 이탈리아인 기사가 직접 가져와 운전하기도. 이밖에 진행을 위해 1백30대의 차량이 국내에서 동원되고 영화에 등장할 40년대식 승용차 6대,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에 쓰던 차와 동형의 크라이슬러, 그리고 탱크, 장갑차, 소제(蘇製) 무기 등이 미국에서 옮겨져왔다. 칠순의 로런스 올리비에 경을 비롯해서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데이비드 젠슨(TV영화 <도망자> 주연), 리처드 라운트리,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 등 세계적인 배우를 포함, 한국인 1백명, 미국인 50명, 영국인 30명, 이탈리아인 30명, 일본인 30명 등 스태프가 참가한 이 영화는 인적 구성에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짙게 띠고 있다. - “<오! 인천> 로케 한창, 엄청난 물량작전 한국동란 재현(《경향신문》 1979.9.14.) ” 그때 내가 <오! 인천>을 보고, 카메라가 아홉 대가 다 뭐냐하면, 다 파나비전 카메라예요. 아리플렉스가 아니라. 미국에서 원 파나비전 카메라, 제일 좋은 카메라예요! ( 구중모 , 2015, 212쪽) *주4 그때 하얏트 호텔 2층 일체를 썼죠. 그때 뭐 복사하는 데도 있었고, 뭐 신기하게 여겼죠. … 우선, 이 장비가, 장비가 많아, 양이.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현대적인 장비. 특히 낮에 라이트를 킨다는 게, 이건 못 보던 거거든. ( 김호길 , 2016, 116쪽) *주5 그때 150대의 차가, 그러니까 자동차 배차하는 거 있잖아요? 배차요원을 홍콩에서 데려왔어요. 현장에서 차 관리하는 애가 스무 명. 또 뭐 관리하는, 여하튼 식당이 있잖아요? 식당이 두 팀. 얼마나 웃기냐면요,하얏트 호텔에서부터 문산까지 온다고 생각하면, 시내는 500미터, 긴 거리는 1키로마다 깃발을 꽂아놔요. 잊어먹을까봐. 한 팀이라도 늦게 나오면 안되잖아요. … 엄청난 돈이에요. 은행 차가 쫓아, 현장에서 줘. 은행 차가 다녔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럼 스태프들한테 시간 당 현찰로 줘버려요, 엄청난 돈을. ( 박광남 , 2023, 112~113쪽) *주6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서 촬영된 다리 폭파 장면의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중앙청 앞에서 진행된 서울 탈환 장면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통일교, 그리고 영화에 쏟아진 혹평들 특히, 당시 <오! 인천>에 참여했던 국내 스태프들은 구술에서 공통적으로 외국에서 온 스태프들이 하얏트 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사용했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울 하얏트 호텔은 이 영화가 촬영되기 1년 전인 1978년 7월에 개장한 5성급의 미국 체인 브랜드 호텔이었다. 평소 한국영화 촬영을 다닐 때 “5천원짜리 여관방에서 댓 명이 한 방을 쓰는” *주7 환경에 익숙해져 있던 충무로 스태프들에게 최신식 시설이 갖춰진 호텔을 촬영 기지로 쓴다는 것은 꽤나 인상 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촬영을 끝낸 촬영팀에게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촬영팀의 출국을 앞두고, 하얏트 호텔의 숙박비 22,327,000원을 지불하지 못해 촬영 기자재 등의 유체동산에 대한 가압류 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물가를 생각했을 때, 2천여만 원이라는 금액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몇 백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에서, 외국인 출연자들의 주급을 매주 헬리콥터로 실어나르고, 스태프들의 일당 지급에 은행차까지 동원해가며 그때 그때 현찰로 지급하는 등 제작비를 쓰는 데에 아낌이 없던 영화 제작사가 호텔 숙박비를 내지 못해 가압류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자금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며칠 뒤 제작사와 호텔 측이 합의에 도달하며 가압류 기간이 연기되었다는 짧은 기사로 이 사건은 정리가 되었고, 촬영팀도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 인천>를 둘러싼 구설들은 끊이지 않았다. 먼저 한국 체류 당시 테렌스 영의 손목시계와 필름 1,345피트(당시 시가로 350만원 상당)를 도난맞은 사실이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그러나 끝내 범인도 잃어버린 물건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에 이미 모든 촬영을 다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개봉과 관련하여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다가, 1981년 2월에는 이성구 감독이 재편집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 와중에 5월에는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미국의 상류층 인사들을 모아놓고 <오! 인천>의 비공개 시사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런데 시사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케네디센터 주위에서 통일교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며, 영화에 대한 가타부타 평가는 없이 모든 관심이 ‘통일교’에만 쏠려버렸다. 비슷한 시기 국내에서도 <오! 인천>을 둘러싼 아주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1년 8월 4일 용산구 원효로에 살던, 일명 ‘원효로 보살’로도 알려진 70대 노파가 그녀의 양녀⋅가정부와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평소 유명 정치인들의 점을 봐주거나 복을 빌어주며 고위층과 인맥을 형성한 바 있고, 이를 통해 큰 부를 쌓았던 윤 노파가 살해당한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윤 노파의 <오! 인천>에 대한 투자 여부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주8 이렇게 <오! 인천>에 대한 관심은 작품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는 자꾸 그 주변부로 옮겨가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관심이 이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개봉해서 흥행만 잘 된다면 이까짓 구설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대중에 영화가 공개된 것은 프랑스 칸에서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제작사 측은 칸국제영화제에서 “25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영화 제목이 새겨진 키트 등을 나눠주고 16일 시사회가 끝난 후 호화파티를 열었는데 구매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았다(《조선일보》 1982.5.19)”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신문 기사는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외면당한 원인을 통일교와 연관 짓고 있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 문제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해외 영화시장에서 전혀 판매되지 않았고, 1982년 9월 17일 미국 내 상영만이 힘겹게 성사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혹평 일색이었다. 급기야 통일교 측에서는 영화제작팀 이름으로 《뉴욕타임즈》,《워싱턴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LA타임즈》, 《뉴스 월드 인 뉴욕》, 《워싱턴타임즈》 등 6개 일간지 전면광고를 통해 “미국 기자와 평론가들이 <인천> 영화 자체의 가치는 평가하지 않고 이 영화의 특별후원자로서 문선명 목사의 이름만 강조하고 있는 데 대해 서글픔을 느낀다”라며 “영화 <인천>의 예술적 가치를 객관적 입장에서 냉정히 평가해줄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촉구(《동아일보》 1982.10.5)”했다. 그러나 영화 <오! 인천>의 흥행 실패를 통일교와의 연관성에서만 찾는 것은 오히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럼 처음 제작 때부터 그토록 큰 대중적 관심을 끌어모았던 <오! 인천>은 왜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던 것일까? <벤허>보다 (제작비가) 더 많이 들었다고 그랬어, 그 작품이, <오! 인천>. 근데 한국에서 상영 못한 거는 뭐냐 하면 너무 북한을 우상화 시켰다는 거야, 영화를. 그래서 안된 거예요. (구중모, 2015, 216쪽) 영화가 안 되는 이유는 … 정치적인 거예요, 그게. 국방부에서 3일 공연을 했어요, 국방부에서만. 그래 그 시대에 그거야, 이북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공연 못하게 한 거예요. 그거 잘했으면 문선명이 자기 일대기를 하겠다고 그랬다고. … 다 영화제작사에서 잘못한 거야. 일개 장교가 비행기 타고, 한국에 들어올 때 이승만 대통령 등때기 탕탕치고 하는데, 그렇게 푸대접을 하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은 사실 아니거든. 한국의 국익이 상하지. 그래서 나라에서 공연 못하게 했는데. 미국에서도 안 됐어. 전혀 안 됐어요. 한 일주일 하고 문 닫았어. (박광남, 2023, 154쪽) <오! 인천> 제작 당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던 박광남은 이 영화가 국방부 내에서 시사회가 이루어진 이후, 한국에서의 영화 상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만약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 영화를 본 국방부 관계자들은 북한에 대한 미화는 둘째 치고, 일부 장면에서는 적군보다 더 나빠 보이는 데다가 *주9 전쟁 장면 내내 인민군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민중들보다도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한국군의 모습을 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화 속에 드러난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나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고증 실패를 모두 눈 감아 준다고 하더라도 앞서 이야기했던 구설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인 영화를 국내에서 상영하겠다고 나서는 업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무려 4,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대작 영화는 조용히 사라졌다(IMDb 기준, 이 영화를 통해 벌어들인 총수익은 52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중 오프닝 수익이 230만 달러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여기서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같은 해 1천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영화 < 이티 >(스티븐 스필버그, 1982)는 미국 내에서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8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한국영화계에 <오! 인천>이 남긴 것들 하나의 작품으로서 <오! 인천>이 가진 수명은 여기에서 끝이 났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이 영화는 또 다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그 영향력을 이어갔다. 먼저 당시 <오! 인천>에 참여하면서 충무로 스태프들은 소품⋅의상⋅특수효과 등에 쓰일 재료들을 한 곳에 모아놓을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오! 인천> 촬영 이후 생긴 촬영 소품과 재료들을 같이 관리할 곳이 필요했다. 그때 <오! 인천>에서 재료를 내가 많이 받았거든. 그걸 그냥 활용했으니까. …<오! 인천>이란 영화, 그거 끝나고 인저 삼우회를 결성해가지고, 의상⋅효과⋅소품 해가지고 뚝섬에 큰 창고 건물을 직접 얻어 가지고 그걸 나눠서 썼는데, 1980년도에 큰 화재가 나면서… (김호길, 2016, 103쪽) 그때 어디냐면 뚝섬. 거기 우리 불났어. (웃음) 완전히 탔어. 의상도 완전히 타버리고. 의상하고 우리하고 창고를 하나로 같이 있었거든. 그때 <오! 인천>에 갖다 놓은 물건도 있었구나. 거기 사다리 같은 거, 그 좋은 것들이 몽창 다 탔어. 무기도 몽창 타고. 화약은 거기 안 뒀거든. (박광남, 2023, 127쪽) 구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창고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촬영 소품과 의상, 효과 재료들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당시 충무로 인력들이 <오! 인천>에 참여하며 배웠던 것들이 함께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 한국의 전쟁영화,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나 규모가 큰 영화를 촬영할 때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최대한 살려 활약했다. 이게 촌길에 철조망이 깔려 있으니까 우체부가 자전거 끌고는 못 가는 거야. *주10 “책임지겠습니다. 지나가세요.” 그랬지. 그게 뭐냐 하면은 가짜 철조망이거든. 제가 만든 거예요. 그게 79년도 <오! 인천>이라는 영화 때문에, 거기서 그걸 배운 거야. 이렇게 해서 만드는구나. … <프로페셔날>인가? 전쟁터 나오는 장면에서 라스트가 막 가다가 철조망에 걸려 죽는 게 있어요. ‘야, 저거 되게 아팠겄다. 이렇게 어떻게 했을까’ 했는데, 바로 그런 거야. 그래 인제 79년도 <오! 인천> 영화를 하면서 배운 게 많았고. (김호길, 2016, 133~134쪽) 상륙작전 하는데, 카메라 아홉 대가 필요한 거예요. 거기서 그런데, 헌팅을 가서 어떻게 했냐면, 봐요. 거기서 뭘 배웠냐? 카메라 아홉 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거를 하루종일 하는 거야. A카메라 이렇게 부감대로 놓고, B카메라 하나, 둘 막 바꿔놓는데, 한국사람 같으면 그걸 연출을 못해. … 한국에서 만약에 이걸 동시녹음을 하게 되면 한 달은 더 찍어야 돼. 그런데 하루에 딱 끝나는 거야, 그날에. 예행하고 정식촬영할 땐 하루에 다 끝나더라고. 또 중요한 게 뭐냐, 폭탄이 터지는데 걔들은 각도를 다 살려놔요, 터지는 각도. 한국 특수효과들은 그걸 다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그러면 거기서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여기 카메라가 안 보일 거 아니냐고, 응? *주11 고런 머리를 다 써놨어요. 그러니 아홉 대라는 게 말이 쉽지 이걸 연출자가 계산을 할 정도면. (구중모, 2015, 212~213쪽) < 용가리 > 할 때 몸에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데, 실제 화약이 안 좋아서 막 불이 붙기도 하고 그랬어요. *주12 <오! 인천> 할 때 보니까 미국사람이 완벽하게 하는 거, 미국사람들이 와서 터득을 했어요. 터득하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그거를 다시 응용을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많이 습득을 했죠. … <오! 인천>이란 영화, 외국사람 특수작업 같이 했기 때문에 많이 배웠고, 저희도 많이 응용했고. 저 나름대로도 그 사람들 기술 플러스 우리 기술을 어느 정도 포함시켜서 더 좋게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보기도 하거든요. ( 이문걸 , 2006, 40쪽) 그러나 이들의 구술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들이 약 20여 년(구술 시기에 따라 길게는 40년)이 흐른 뒤에도 <오! 인천> 촬영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에야 많은 한국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그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거나 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1979년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오늘날 블록버스터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영화에 참여하며, 할리우드의 기술과 시스템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그들만의 경력이다. 그리고 이때 참여한 스태프들이 모두 <오! 인천> 이후 더 많은 한국영화 촬영현장에 불려 다니며 1980~1990년대 내내 활동했다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저희가 <오! 인천>에서 영화발전에, 특수효과에 많이 발전시켰다고 자부합니다.(12쪽) … 한국영화계가 <오! 인천>이라는 거를 하기 위해서 차량이라든가 기동력이라든지 이런 거를 많이 배웠어요. 어떻게 보면 영화는 상영되지 못해도, 영화 개념적으로 많이, 영화 바뀐 것이, 제작자 바뀐 것이 <오! 인천>이지 않았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문걸, 2006, 21쪽) ※ 인용 구술 (인용된 페이지는 각 구술 뒤에 표기) 심혜경,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이문걸 편[특수효과⋅소품⋅미술]』, 한국영상자료원, 2006. 배수경,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 한국영상자료원, 2015. 이정아, 『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 한국영상자료원, 2016. 남기웅,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박광남』, 한국영상자료원, 2023. *** 주1. 윤미라는 후에 출연을 거부했다. 그리고 윤미라가 연기하기로 했던 배역은 리디아 레이(Lydia Lei)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에 참여했던 배우 남궁원의 구술에 따르면 당시 한국 측 출연 배우들은 직접 테렌스 영을 만나 오디션 비슷한 것을 봤는데, 이때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주2. “<Inchon> Trivia”, IMDb, < https://www.imdb.com/title/tt0084132/trivia/?ref_=tt_trv_trv >. 주3. 신문 기사에서 상술한 장면은 경북 왜관에서 촬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해당 장면은 1950년 6월 28일에 있었던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다룬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술자들 역시 기억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 장면을 ‘한강 다리 폭파’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촬영기사로 참여했던 구중모의 구술에서는 테렌스 영이 원래 이 장면 촬영을 위해 실제 제3한강교를 폭파시키고 싶어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 있는 다리를 폭파시킨 뒤 촬영했다고 말했다. (배수경,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 2권 김정란 이남기 구중모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5, 215~216쪽.) 주4. 구술자 구중모 는 <빨간 마스크의 여인>(김인수, 1971)을 통해 데뷔하여 <티켓>(임권택, 1986),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 등의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였으며, 1986년에는 <씨받이>(임권택)로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15년 <합작영화> 주제사를 통해 <오! 인천>에서 한국 측 촬영팀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주5. 구술자 김호길 은 1960년대 연출부로 영화계 입문하여, 1968년 임권택 감독의 <몽녀>를 시작으로 한국영화에서 소품 담당 스태프로 일했다. <오! 인천>에서도 소품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6. 구술자 박광남 은 1950년대 후반 영화계에 입문, 1960년대 본격적으로 특수효과 스태프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부터는 CF, TV드라마, 연극,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특수효과 전문가로 활약했다.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7. 이정하,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73쪽. 주8. 사건의 내용이 다소 복잡한데, 당시 재판을 받던 피의자가 경찰에 의한 강압적인 수사와 고문이 있었으며, 자신의 자백은 모두 이 고문으로 인한 것이었다며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피의자의 결백에 대한 근거로 피해자의 사망시각이 중요한 쟁점이 되었는데,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찰이 주장하는 사망시각에 피해자가 <오! 인천>의 한국 제작총괄이었던 박경도와 원웨이프로덕션의 대표 이시이 미츠하리를 만났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피의자 측에서는 윤 노파가 <오! 인천> 제작에 20억의 거액을 투자했고, 이를 통해 한국 측 상영권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원웨이프로덕션 측에서 증인으로 나왔던 박경도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부정하며, 그들이 윤 노파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영화가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고, 흥행이 될 수 있도록 불공을 부탁드리고자’ 했으나, 약속한 날 윤 노파는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한 채 이시이 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주9.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인도교 폭파 장면이다. 미군 장교의 부인이 자신의 차량 안에 한국인 어린이와 소녀들을 가득 태우고 다리를 빠져나가는 도중,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다리를 폭파시킨다. 끊어진 다리 끝에 걸린 차량 안에서 모두 무사히 구출되기는 하지만, 이것도 주위 피난민과 미군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주10. 영화 <뽕>(이두용, 1985)을 촬영할 당시 뽕밭에 친 철조망을 보고 마침 촬영장 쪽을 지나가던 우체부가 자전거를 멈추고 섰다는 의미이다. 주11. 어떤 각도에서 폭탄이 터져도 9대의 카메라 중 어느 카메라에도 다른 카메라가 잡히지 않도록 구도를 잘 맞춰놓았다는 의미이다. 주1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촬영 당시 사람의 몸에 작은 화약을 넣고 터트려 총에 맞는 듯한 효과를 내야 했는데, 그 기술이 부족해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괴수 용가리> 촬영 때는 일본의 특수효과 기술자들을 초대해 함께 작업을 했었는데, 본문과 이어지는 구술에서 일본 특수효과 기술자들도 ‘미니어쳐’ 전문가들이라 당시에는 작은 화약을 활용한 특효 기술을 잘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구술자 이문걸 은 박광남과 함께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여기서는 장황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먼저 < 아내들의 행진 >의 포스터를 잠시 보아주기 바란다. 한 여성이 보기에도 힘겨운 돌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번쩍 들어 마치 자신의 아이를 안기라도 하듯 그런 자세로 서 있다. 그녀의 옷매무새가 벌어져 그 사이로 브래지어가 젖가슴을 가까스로 가리고 있고 치마를 걷어 올려 무릎 위 허벅지가 드러나 보이지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이 그림의 디테일 어디에서도 성적인 자극을 주는 유혹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고 약간 거만하게까지 느껴진다. 건강함. 하지만 과장된 건강함. 약간 두텁게 칠해진 위에 다시 덧칠한 것이 분명한 터치도 그런 인상을 더 한다. 게다가 전체를 검붉은 색으로 물들인 색채가 약간 위압감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온통 불타오르는 듯한 힘, 그 사이를 뚫고 비치는 서광. 붉은 어둠, 혹은 암흑 사이로 내비치는 어떤 계시. 종종 종교적인 그림들에서 마주한 맹목적인 희망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차라리 두렵다고 할까. 그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 주변을 에워싼 인물들에 비해서 필요 이상으로 큰 비례로 그려진 모습이 위압감을 주면서 단지 주인공이 아니라 아마도 그녀 주변 인물들을 이끄는 지도자라는 표지를 전달한다. 마치 괴물처럼 큰 주인공.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이다. 다소 기괴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이 거대한 모습. 그녀는 주변의 얼굴조차 눈 말고는 윤곽이 거의 뭉개져 버린 듯한 한 무리의 사람들에 비하면 또렷한 얼굴의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하지만 내 시선을 끄는 것은 구태여 선명하게 그린 팔꿈치와 무릎 사이로 마치 빠져나올 듯이 버티어선 뼈마디이다. 그녀는 지금 노동을 하는 중이라는 것을 하여튼 보여주고 싶어 한다. 나는 두 개의 지시어를 하나로 합쳐보고 싶다. 노동 지도자. 바로 오른쪽에는 영화를 설명한다기보다는 왠지 그녀를 설명하는 것만 같은 인상을 주는 카피가 그녀와 똑같은 자세로 위에서 아래로, 세로로 내려써서, ‘證言에 이어 내놓은 汎國民映畵!’ 라고 달려있다. 이때 포스터를 보는 우리가 불려가는 카피 안의 자리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에워싼 얼굴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주변의 여자들이다. 汎國民 映畵, 라는 이상한 말. 여기에는 동원의 명령이 담겨있다. 국민이라는 당신, 그런 다음 국민으로 (재)통합하기. 汎, 이라는 강력한 명령. 마치 그 명령을 가시화하기라도 한 것 같은 견고딕의 서체. 그 아래 굵은 먹글씨 풍으로 쓴 제목 <아내들의 行進>. 행진이라는 말에 담겨있는 서사의 시각적 알레고리.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이 포스터 위에 놓여있는 제목의 서체에는 조각난 상형문자의 비의적 순간들이 이어지는 어떤 연속이 놓여있다. 어떤 영웅적 서사의 오작동. 이 표현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싶다. 어떤 영웅. 나는 영화에서 이런 형식의 포스터를 사회주의 체제아래에서 만들어진 국영 제작소의 영화들을 위한 다른 수많은 예를 알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아내들의 행진>은 잘 알려진 것처럼 새마을운동을 홍보하기 위해 (문화공보부 산하기관 중의 하나인) 영화진흥공사에서 만든 국책영화이다. 자본주의 근대화를 위해서 시작한 새마을운동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민들을 계몽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이 시기의 수많은 프로파간다 대중선동 문화 중의 하나였던 영화중의 한 편. 그저 영화 한 편. 그런데 이 포스터는 이상할 정도로 이 체제가 불온시하고 콤플렉스에라도 걸린 것처럼 창백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증오하고 적으로 삼아 내부에서 고발하고 외부에서 대치 중이었던 이데올로기의 문화적 양식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포스터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화 취향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자도 아니며 제3공화국의 연구자도 아닐뿐더러 이 세대에 속하지도 않는) 내가 여기서 제한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영화에 관한 자신의 견해나 취향에 대한 인터뷰를 한 적이 없으며 영화에 관한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다. 아마도 국가 지도자 중에서 영화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저서로 남긴 유일한 예는 김정일 북한 전 국방위원장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북한영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참고문헌을 통해서 저서의 존재를 알고만 있을 뿐이지 그 내용을 알지는 못한다) 이건 사회주의에서도 드문 일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톨스토이에 관한 문건을 남겼으며 고리키와는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인민을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영화에 대해서는 별다른 글을 남기지 않았다. 에이젠슈테인의 < 이반 대제 일편 >을 보고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스탈린은 1950년 언어학과 마르크시즘에 관한 짧은 테제를 썼지만 (이 글은 미셀 페쉐를 경유하여 알튀세 학파에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 영화에 대해서 문건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건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이다. 감옥에서 영화를 볼 여유가 없었던 그람시는 대중들의 동의를 끌어내야 하는 헤게모니의 진지전에서 거의 영화를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람시가 영화를 언급한 건 1916년 8월 26일에 발표한 “연극과 영화”가 전부이다. (그리고 그 글에서 어떤 영화제목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람시는 영화보다는 대중들의 전선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소설, 단테의 「신곡」 중 ‘연옥’편,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을 연구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 다음 그람시는 감옥에 갔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영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영화에 관한 글을 쓰진 않았(던 것 같)다. 지도자와 영화, 국민영화. 나는 단순하게 파시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차적 간극에 대한 약간의 설명. 내가 < 아내들의 행진 >을 처음 본 것은 새마을운동이 막 시작되었던 이 영화의 개봉 시기인 1974년 5월 16일 주변이 아니라 그로부터 한참을 더 지나 새마을운동이 민관유착에 의한 부패의 온상이 되고 난 다음 비판에 직면한 새마을 중앙본부가 새마을 중앙협의회로 변신을 꾀하던 1987년 무렵이었다. 나는 오로지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를 위해서 이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다. 처음 개봉했을 때 국제극장 앞을 지나면서 간판을 본 기억도 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새마을운동은 그때 음산한 희망의 (거짓된) 약속이라는 걸 모두들 알면서도 애써 침묵을 지켰다. 몇 가지 구호를 외우면 언제든지 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는 도덕 과목 같은 것이었고 그렇게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시험에서 문제를 풀어낸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어긋남의 지루한 동요 속에서 모두들 새마을운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새마을 국책영화 <아내들의 행진>을 그 자리에 위치 지은 다음 곧바로 잊어버렸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 족보 >를 통해서 임권택을 발견한 다음에도 그 이름과 <아내들의 행진>을 금방 연결시키지 못했다. 내가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순서대로 작품 연보를 정리할 때였다. 그런 다음 <아내들의 행진>을 (비디오로) 처음 보게 되었다. 먼저 줄거리를 소개할 필요를 느낀다. 지순은 성공적인 새마을운동을 이룬 마을에서 지도자인 오빠와 함께 자란 다음 아직 새마을운동을 시작하지 않은 가난한 마을 한밭골로 시집을 온다. 이 마을에서 우여곡절 끝에 지순은 마을 아낙들을 중심으로 가난의 원흉이었던 장마철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한 방죽을 세우면서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고 그녀들의 노력에 감복한 남편들도 함께 힘을 모아 버려진 농지를 개간하여 부자 마을이 된다. 자, 여기까지는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나를 당황시킨 것은 마지막 시퀀스 전체였다. 갑자기 기습이라도 하듯이 방향을 틀어서 이 마을에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만수댁의 남편이 무장공비가 되어 돌아온다. 영화는 새마을 영화에서 반공영화로 어리둥절하게 바뀐 다음 잔인무도한 공비들의 만행과 국군장병들의 용감한 대처 끝에 일망타진하는 장면을 보여주더니 갑자기 끝나버린다. 나는 처음에 비디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에 다시 되돌아가서 문제의 장면부터 반복해서 보았다. 영세한 산업이었던 비디오업체들은 종종 필름 릴을 뒤죽박죽으로 섞거나(< 삼포 가는 길 >의 ‘악명 높은’ 비디오) 때로 90분 테이프의 길이에 맞추어서 제멋대로 영화를 자르거나, 그래서 갑자기 끝나거나, 때로 서로 다른 영화 릴이 엉키고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한편의 제목 아래 이어 붙였다. 하지만 <아내들의 행진>은 외형적으로 (화질이 너무 나쁘다는 문제를 제외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너무 이상해서, 하지만 조심스럽게, <아내들의 행진>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결국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서 임권택 감독님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때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돌려받았다. “그거는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이 넣으라고 해서 들어간 거요, 미치는 거예요, 거기를 박정희 대통령이 넣자고 그런다고, 절대로 넣어야 된다고 그러잖아. 나는 계속, 계속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냐고 해도 소용이 없어”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책에는 질문의 반복이라 누락되어 있지만 그때 나는 대답을 듣자마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반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영화를 본 건가요?” “그러니까 다 찍은 영화에다가 그런 이야기를 덧붙이라고 말을 한 거겠죠. 원래 시나리오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니까” 잠시만 멈춰보자. 나는 단순하게 여기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월권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폭력적이며 잘못된 처사이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벌어졌고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그저 비난을 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거기에 더 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 전 대통령은 < 아내들의 행진 >을 보았고 (아마도) 몹시 마음이 들었다. 그를 감동시켰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무언가 여기에 결핍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몹시 위험한 가설을 세워보고 싶다. 참 훌륭합니다. 하지만 여기엔 무언가 빠진 게 있어요. 이 영화가 단지 새마을운동을 계몽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말고 더 밀고 나아가 반공 이데올로기까지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해서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왜 그 둘은 하나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된 둘이 아니라 둘 각자의 결핍을 채운 하나가 되는 것일까. 영화감독은 그 둘을 서로 다른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지도자는 그 둘이 하나를 둘로 나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의 이념에 대한 하나의 결정적 판본 역할. 하지만 아직 덧셈이 필요하다. 상황을 계산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 4월 22일 한해(寒害)대책을 세우는 자리에서 ‘새마을운동’이라는 정책을 꺼내 들었다. 그는 지금 이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김대중은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한 힘겨운 상대였으며 그가 내세운 ‘청년기수론’은 해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마음을 움직였다. 게다가 공화당은 눈에 보이게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었다. 그해 5월 6일 새마을 사업추진방안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 국가 단위의 근대화 개혁을 시작하라, 는 이 정책적 명령은 정치적으로 근대적이라기보다는 봉건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백성들을 계몽하라. 그들을 깨어나게 해서 더 큰 잠에 빠져들게 하라. (지젝이 아도르노를 빌려 설명했던) 억압적 승화. 이듬해 4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가까스로 김대중을 이겼다. (이 선거에 대한 후일의 역사적 평가에 따르면 부정선거의 개입에 의해서, 라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그걸 판단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바깥의 일이다) 모든 일이 평화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선되자 내린 결단은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새마을운동과 국가계엄은 거의 평행해서 진행되었다. 이것은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새마을운동은 그것의 취지에 머물지 않고 그것의 과정을 함께 보아야만 한다. 만일 누군가 반대를 한다면 그는 새마을운동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그는 ‘빨갱이’가 될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고작 20년에 불과하며 여전히 분단 상태가 계속되고 있으며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지속적으로 간첩들이 일상생활에 침투하여 활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무장공비들이 휴전선을 넘어오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이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인 키부츠에서 가져온 모델이라고 생각했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이 운동이 소련의 강제이주 집단수용소에 가까운 콜호즈와 비슷한 것으로 보았다. 1972년 3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마을을 직접 시찰하기 시작했다. 모범적인 사례들. 그해 4월 2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직접 ‘새마을 노래’ 가사를 작사하고 작곡했다. 다소 지루하겠지만 당신에게 ‘새마을 노래’ 가사를 불러주겠다. (일절)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후렴)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이절)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후렴) (삼절)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 (후렴) (사절)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드세 (후렴) 적어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이 가사는 새마을운동에 관한 가장 짧은 형태의 아포리즘처럼 이루어진 강령이자 정감의 언어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메시지일 것이다. 이 설명을 읽고 당신은 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웃을 수 없었다. 이 노래는 국민 누구나 외어야 하는 가사였으며 일상생활의 행동 지침이자 반복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복음이었다. 무조건적인 추종만을 요구하는 노래. < 아내들의 행진 >을 보고 나면 다소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단지 새마을 정책의 이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 가사를 고스란히 서사 안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새 아침이 반복적으로 밝아오고 마을의 새 삶은 농한기에 집에서 게으른 아침을 보내던 마을 사람들이 미처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데서 전환을 맞는다. 옛 마을의 지표는 초가집이고 새 마을의 지표는 형형색색의 슬레이트 지붕이다. 한밭골은 길이 좁아서 리어카를 새로 장만해도 그걸 사람들이 둘러메고 동네에 들어서야 한다. 그런 마을을 새 마을로 만드는 시작은 먼저 이 마을 여인네들의 부녀회를 조직한 다음 그녀들에게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강령을 전파하는 것이다. 잘 살 수 있다. 부자가 될 수 있다. <아내들의 행진>에서 이 말은 일종의 마법의 언어이다. 이 말 앞에서 어떤 다른 반대도 힘을 잃고 만다. 여러분, 새 조국의 미래를 향한 행진 앞에서 다른 한가로운 주장을 할 시간이 없답니다. 민주주의라니요. 이 영화에서 모든 결정은 선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단 한 번도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지도자의 명령처럼 내려진 가사를 전달하는 영화. 그러면서도 신기하게 이 영화에는 ‘새마을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비디오 판본)무장공비와 함께 돌아온 남편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 아내들의 행진 >의 어떤 장면에 그렇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 다양한 차원에서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몹시 은밀하고 종종 사소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걸 짐작하는 것은 바보 같은 추론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오로지 결핍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생각이다. <아내들의 행진>의 마지막 시퀀스에는 먼저 판본의 문제가 있다. 내가 본 비디오 판본은 새마을운동이 성공하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던 날 한밭골 새마을운동 부녀회의 회장직을 맡았던 과부 만수댁 집에 한국전쟁에서 납북된 이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남편이 한밤중에 돌아오면서 이 기괴한 시퀀스가 시작한다. 약간의 부언 설명이 필요하다. 새마을운동을 전파하려는 새댁 지순은 부녀회를 조직하면서 자신이 아직 어리고 한밭골 주민들도 잘 알지 못한다면서 만수댁을 추천한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시나리오에서 만들어진 인물의 배치이다. 한밭골은 아내들이 여전히 구습에 매여 있고 그래서 가정에서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마을이다. 만일 누군가 나서서 부녀회 회장을 맡는다면 (이 영화의 장면에 따르면) “북어와 아내는 사흘 걸러 매질을 해야 한다”고 남편들끼리 모여 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마을 어른들은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가르치는 마을에서 줄거리에 매우 번잡하게 그녀가 남편을 설득하는 과정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없는 아내가 필요해졌고 만수댁이라는 과부가 만들어졌다. 그런 다음 만수댁이 왜 과부가 되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생기자 남편이 납북된 인물이라는 설정이 동원되었다. 이 영화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촬영되었고 이야기에 구체적인 지명을 기입하지는 않았지만 등장인물들은 모두 호남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호남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한 최대 빨치산 조직인 남부군이 활동하였으며, 망실공비로 인한 결손가족은 호남 전역에서 드문 사례가 아니라는 계산이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수댁은 납북된 날을 남편의 기일로 삼아 제사를 지내고 아직도 그의 실성한 노모가 살아서 아들이 언제 오느냐고 묻곤 한다. (하지만 이 제사 장면이 남편이 돌아오는 설정 이후에 보충 촬영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임권택 감독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답으로 처음부터 일관하고 있고, 현재 남은 시나리오는 심의대본이기 때문이다) 돌아온 남편은 다른 무장공비들과 함께 만수댁에게 밥을 차려달라고 한 다음 곧 한밭골을 떠날 생각이다. 하지만 이미 집은 국군에게 포위된 다음이며 만수댁은 그 위급한 상황에서 남편에게 자수를 권유한다. 지순의 남편은 위험을 무릎 쓰고 양손을 들고 집으로 다가오면서 “여기가 아제의 고향이요, 어디를 또 가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라고 자수를 설득한다. 지순 남편이 다가오자 위기를 느낀 무장공비들이 지순 남편에게 총을 쏘고 그 틈을 타서 만수댁 남편은 그들을 일거에 쓰러트린 다음 재빨리 아내와 문 바깥으로 탈출하여 국군들이 포위한 논두렁까지 달려가다가 그만 총을 맞는다. 다음 장면은 만수댁 부부의 장례식 장면이다. 여기까지가 비디오 판본이다. (또다른 판본)혼자 돌아온 남편 그런데 이번에 영상자료원에서 제공받은 스크리너는 이 시퀀스 전체가 전혀 다른 판본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새마을운동이 성공하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던 날 한밭골 새마을운동 부녀회의 회장직을 맡았던 과부 만수댁 집에 한국전쟁에서 납북된 이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남편이 한밤중에 돌아오면서 이 기괴한 시퀀스가 시작한다. 이때 내가 본 비디오 판본과 달리 여기서는 남편이 혼자 집을 방문한다. 그는 사흘을 굶었다고 말한 다음 저녁상을 먹고 나서 바로 집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방에 누워있는 노모를 본 다음 마음을 바꾸고 자수를 결심한다. 그래서 한밤중에 만수댁 손에 이끌려 경찰서에 자수를 하기 위해 달려간다. 그런데 길목에서 기다리던 무장공비 무리들과 마주친다. 그들은 남편의 의도를 눈치채고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만수댁마저 잔혹하게 죽인다. 그 둘은 어둠 속에서 죽어가면서 두 손을 꼭 쥔다. 무장공비 무리들의 행방을 더는 알 수 없고 장례식 장면으로 이어진다. 갑자기 장례를 하다말고 지순은 두 손을 움켜쥔 다음 우리들은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라고 외친 다음 아내들을 이끌고 새마을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행진한다. 두 번째 판본은 여기서 끝난다. (좀 더 난처한 것은 현재 소장본은 영화가 모두 끝난 다음 내가 이미 말한 비디오 판본이 다시 그 뒤에 붙어있다) 나는 새로운 판본 앞에서 좀 어리둥절해졌다. 그 둘은 내용은 다르지만 결국 하려는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둘을 두 가지 판본으로 찍어야 할 필요가 왜 생긴 것일까.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훨씬 훌륭한 것도 아니다. 둘 중 어느 쪽이 극장 개봉 당시에 사용된 프린트일까. 어떻게 두 가지 판본이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일까. 둘 다 임권택 이 연출한 것일까, 아니면 둘 중 하나를 (어쩌면) 제작 프로듀서를 한 정진우 가 찍은 것일까. 우리는 정진우가 감독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는 이미 < 증언 >을 제작하면서 영진위의 요구에 따라 임권택이 다음 영화를 찍고 있는 동안 수정 제작본을 위해서 일부 장면을 별도로 연출하고 편집하였다. < 아내들의 행진 >은 <증언>에 이어서 영진위가 제작하고 정진우가 제작 프로듀서를 한두 번째 영화이다. 그런데 둘 중 어느 쪽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선택한 판본일까. < 아내들의 행진 >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성공적인 새마을운동을 해냈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당신이 힘들여 일구어낸 마을을 언제 ‘빨갱이’들이 침투하여 망쳐놓을지 알 수 없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 문제를 덧셈으로 생각하는 대신 뺄셈으로 놓고 원래의 판본으로 되돌아가 이 기괴한 마지막 시퀀스를 삭제하고 다시 보면 즉각적으로 이상한 질문과 부딪치게 된다. 임권택 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것만으로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영화감독과 지도자의 차이가 시작되는 것일까.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단지 반공 드라마가 더해진 것이 아니다. 이 마지막 시퀀스가 당신을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것은 명랑한 승리만으로 가득 찬 계몽극을 갑자기 비극으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만일 <아내들의 행진>을 진정으로 심미적인 관점으로 다가간 사람은 임권택이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영화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물론 임권택이겠지만 이 이야기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어쩌면) 박정희 전 대통령일 지도 모른다. 만일 이 표현이 불편하다면, 이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진심을 다해서 온전하게 껴안은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일 지도 모른다, 고 수정해도 괜찮다. 자신의 이념을 실현한 영화. 말하자면 그에게 <아내들의 행진>은 스탈린에게 < 이반 대제 일편 >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퀀스를 삭제하면 이 영화는 새마을운동의 인정 미담과 승리에서 멈출 것이다. 그다음은 그래서, 라는 다음 단계에 대한 질문과 과정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밀고 나아가 무장공비들이 한밭골에 침투하여 만수댁을 죽음으로 이끌 때 갑자기 이 모든 과정은 다른 차원에로 도약하듯이 이끌린다. 이제까지 이 모든 역경을 딛고 지순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공적인 마을을 이룬 부녀회 회장 만수댁에게 요구되는 지도자의 마지막 단계는 예기치 않은 비극적 사건을 통해 죽어서 이 승리를 더 이상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이지만 조연)인 만수댁이 이제 진정한 지도자(이자 주인공)의 자리를 어떤 권력다툼 없이 지순에게 운명적으로 양보하는지에 관한 슬프지만 아이러니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만수댁이 차지했던 위치를 부언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지순이 한밭골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호의를 베푼 사람이며, 지순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려 들자 모두가 적대감을 보일 때도 가장 먼저 그녀에게 협조를 시작한 인물이다.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결국 성공하긴 했겠지만) 훨씬 가혹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만수댁은 지순과 한밭골 새마을운동 사이의 매개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사실상 그녀가 차지할 자리는 공백이 되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 이 애도의 장면에 감정만이 넘쳐날 뿐이지 어떤 성찰도 없는 것은 삭제의 항목에 관한 질서를 재조정하려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죽 쌓기 이 질문을 완전히 다른 자리에서 질문해보고 싶다. 모든 새마을운동 이야기는 긍정되어야만 하며 새마을운동에 관한 모든 영화는 성공적인 결론을 맺어야만 한다. < 아내들의 행진 >은 계엄 하에 놓인 국가에서 만들어진 국책영화이며 모든 부정적인 언사는 금지된 영화이다. 그러므로 새마을운동의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가 비극으로 귀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 바깥의 지도자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제안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을 체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영화감독이 영화 안에서 하지 못한 것을 지도자가 현명하게 해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읽고 있다면 당신은 내 말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아내들의 행진>은 새마을운동의 페티시즘에 가까운 계몽영화이다. 모든 등장인물은 목적론의 결론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그 과정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제한된 공간. 시간적인 차단. 여기서 하나의 모델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명령. 이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이때 이 모델에는 텅 빈 시간이 음산하게 감돌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지금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공허한 자리에, 말 그대로, 어떤 비유도 없이, 마치 강제부역을 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불려 온 것이다. 새마을이라는 낯선 마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난 다음, 그러니까 8년 후에 임권택이 찾아간 낯선 마을을 다룬 < 안개마을 >을 떠올려보면 둘 사이의 간극은 더 멀리 느껴질 것이다. 핵심은 <아내들의 행진>에서 영화감독이 가졌던 영화와 모델 사이의 거리를 지도자는 그 자신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가진 거리의 상실이다. 이때 지도자는 이야기 안에 비극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있다. 내게 시련이 필요합니다. 혹은 비극 없이 이야기는 여전히 부족한 결핍상태에 놓여있다고 믿습니다. 아직 부족합니다. 당신들은 남한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시련은 거기가 아니라 다른 데 있습니다. <아내들의 행진>은 장마만 시작하면 강물로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죽을 쌓아올렸을 때 이미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무슨 할 이야기가 더 남았나요. 지순이 시집오고 다음 1시간 39분의 지점,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가 방향을 틀었을 때 지순은 마치 친정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이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만수댁 남편의 귀환은 무언가 이야기가 더해졌다기보다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여기에 덧붙여진 것처럼 보인다. 흔히 진부한 영화들에서 마주치는 것처럼 이미 한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두 편의 영화. 그러나 이것은 미학적 선택이 아니다. 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만수댁 남편의 시퀀스를 보고 있으면 몹시 불길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지순이 내내 시련을 겪기는 하지만 <아내들의 행진>은 단 한 순간도 그녀의 운명 때문에 보는 우리를 긴장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는 승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불해야 할 노력을 기울이면 어떤 오차도 없이 거기에 대한 응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아니, 기대보다도 훨씬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외양을 갖추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새마을운동의 법칙이 작동하는 어떤 변수도 없는 말끔한 세계이다. 이때 만수댁 남편이 갑자기 이 안전한 법칙의 세계를 일순간에 뒤흔드는 얼룩의 삽입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끝내 이 과잉하는 장면이 반대로 결핍하는 모델의 약점을 비로소 완성하여 입체적인 이념의 공간에로 도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지도자의 뜻을 (비판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시퀀스는 이야기 전체의 균형을 완전히 망쳐놓을 뿐만 아니라 가까스로 이루어놓은 승리의 감흥조차 깨트려버린다. 핵심은 거기에 있다. 지도자는 망쳐놓아야 할 뿐만 아니라 깨트려야 한다고 믿는다.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이 시퀀스가 요점에서 빗나가기는커녕 거의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던 이 모델의 세계에 언제든지 오류가 작동할 수 있는 현실감각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당신은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현실감각이라니요. 이건 그저 모델 옆에 다른 모델을 덧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답니다. 도식적인 설명. 새마을운동은 수없이 많은 승리를 재생산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 승리란 얼마나 약한 것이며 또한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승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국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국가에로 재통합한 다음 그 하위개념에로 재위치 시키는 확대재생산의 수순. 얼마든지 반론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나아가보고 싶다. 나는 영화감독과 지도자가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먼저 말하고 싶다. 그래요, 이 모델은 이미 충만해있어요. 그런데 왜 지도자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시나요. 지도자는 그렇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고 싶어 한다. 그건 말이죠, 너무나 성공적인 이 모델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도둑맞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로부터? 우리들의 성공을 질투하는 북한으로부터. <아내들의 행진>의 마지막 시퀀스는 승리에 대한 염려이다. 이것이 이 이상한 시퀀스의 불길함이다. 이제 막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오직 모델 안에서의 승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도둑질당할까 염려하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환상 안에서만 맺어진 (거의 도착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착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염려는 이루어내고, 도둑질 당하고, 되찾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바라보고 싶은 지도자가 새마을운동의 승리를 즐기는 방식이다. 그러니 이 염려는 미처 이루지도 못한 승리를 앞서는 결과에 대한 도둑질의 걱정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자크-알랭 밀레는 좀 더 멋지게 표현했다. 향유의 도둑질. 지순이 도착한 마을의 황폐한 풍경 (비디오 판본)새마을운동 후의 마을 물론 여기서 임권택 이 운동의 동력에 질질 끌려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 아내들의 행진 >을 보면서 임권택이 새마을운동에 반대하기는커녕, 혹은 조롱하기는커녕, 그저 마지못해 진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종종 진심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과 수없이 마주쳤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 요화 장희빈 >을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장르적인 발견과는 상관없이) 그 자신에게는 거의 추락하듯이 다찌마와리 액션활극과 무국적 만주웨스턴, 쇼브라더즈 무협영화를 카피한 무국적 무술영화들로 이어지던 목록에서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면서 나타난 단절의 순간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이에 존재하지만 사라진 도서실의 빈칸인 < 잡초 >를 염두에 두고 있다. 아마도 <아내들의 행진>은 <잡초>로부터 그리 멀지 않는 자리에 놓여있을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임권택은 <아내들의 행진>을 찍은 다음 (< 장군의 아들 >을 예외로 하면) 두 번 다시 다찌마와리 영화에로 돌아가지 않았다. 또한 만주웨스턴이나 무국적 무협영화를 찍지도 않았다. 이 장르영화들은 물론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어떤 결단. <아내들의 행진>은 임권택에게 어떤 결사적인 방어선 같은 영화이다. 그는 여기 머물지 못한다면 영화 안에서 더 이상 자신이 견뎌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내들의 행진>에는 이따금 임권택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몹시 아름다운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에 매달린 비평들은 그 아름다움을 미처 보지 못했을 것이다. 혹은 보았다 할지라도 몹시 불편했을지 모른다. 거기 어른거리는 파시즘의 자동인형들의 그림자. 하지만 <아내들의 행진>은 임권택을 전혀 다른 의미의 맥락 안으로 이끈다. 나는 한국영화에서 등장인물 모두가 예외 없이 호남 방언을 사용하는 영화를 그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당신은 임권택이 호남영화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기 영화 세계 속에서 넓혀온 것을 생각해야 한다. 고향으로 가는 먼 길, < 짝코 >. 자기를 부르는 고향의 소리, < 서편제 >. 혹은 고향의 역사, < 태백산맥 >. 그리고 사모곡, < 축제 >. 아마도 호남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판본이라고 할 < 춘향뎐 >. 그런 다음에도 거기 남은 것을 다시 찾으려는 < 달빛 길어올리기 >. 하지만 아직은 이상할 정도로 표준어로만 이루어진 영화들. 한국영화에서 한 편의 대중영화가 방언으로만 이루어진 < 친구 >가 2001년에야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물론 등장인물 중의 누군가 호남이나 영남 방언을 사용하는 수많은 예가 있다. 그때마다 주인공은 표준어의 세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방언은 마치 봉건적인 세계, 혹은 미처 근대화되지 못한 지역(에서 온 사람)에 대한 청각 기호처럼 사용되었다. 때로는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 혹은 공산괴뢰군을 지역적으로 분리시키거나 단순하게 편을 가르기 위해서 (함경도와 평안도 사이를 별 구별 없이 평양 방언으로 통일하여) 대사로 차별화시켰다. <아내들의 행진>은 호남방언으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여기서 이상하게도 지순(과 그녀의 오빠)만이 표준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고향은 어디인 것일까. 문득 편지를 쓰면서 떠올리는 지순의 고향에 대한 기억(flash_back)에 따르면 그녀도 다른 농촌에서 자라서 이 마을로 시집을 온 것인데 그녀(와 그녀 오빠)의 말에는 어떤 방언도 묻어있지 않다. 마치 지순이 받은 교육이 그녀의 방언을 탈색한 것만 같은 말을 들려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순과 한밭골 사람들 사이를 개화(開化)와 몽매(蒙昧)로 분리하는 도식을 세우지만 그 둘 사이가 예민하게 긴장을 불러일으키거나 어떤 대립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순의 표준어가 여기서는 그녀를 고립시키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무엇보다도 임권택은 지순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별로 우리를 설득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한밭골로 전통혼례의 가마를 타고 시집오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가마 안의 지순은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다음 그녀를 따라온 오빠가 다음 날 안개 낀 새벽에 동생의 시댁과 인사도 없이 떠나면서 남기는 말은 미안하다, 는 표현이다. 시집간 여동생에게 왜 미안하다는 말을 한 것일까. 이 말은 마치 이제부터 시작될 여동생 지순의 고난과 시련에 대한 불길한 예고처럼 들린다. 그런데 왜 지순은 이 마을로 시집을 온 것일까. 오빠와 지순의 남편이 절친한 친구 사이도 아니며 그렇다고 시댁과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다. 여기엔 이상하게도 어떤 설명도 없다. 게다가 이 한밭골은 지순에게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고장이다. 영화 중간에 지순이 남편에게 고향 오빠를 만나보라는 말을 듣고 다녀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임권택은 이 마을로 시집온 지순과 남편 사이의 첫날밤을 찍지 않았다. 그런 다음 영화 전체에서 그 둘 사이의 내밀하게 사적인 다정한 순간을 단 한 장면도 찍지 않았다. 마치 지순은 한밭골에 새마을운동의 임무를 가지고 온 사람처럼, 정말 첫 장면만 삭제한다면 시집을 왔다기보다는 파견된 것처럼, 그래서 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개인적인 그 어떤 기쁨도 버린 사람처럼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에만 매달린다. 이야기가 지순의 활동을 따라가긴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아내들의 행진>의 동선은 산만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인물들이 아니라 풍경이다. 황폐한 풍경. 하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이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서진 산하. 그런데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긴 일제강점 하의 무분별한 벌목과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빨치산을 소탕한다고 무자비하게 잘라낸 나무들. 오랜 시간을 타향에서 보낸 다음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기대하는 추억 속에 자리 잡은 풍경의 형상들이 부서지고 사라져버린 것을 확인할 때 품는 분노가 <아내들의 행진>의 전반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텅 비어버린 추억. 임권택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걸 지키지 못한 고향의 남겨진 이웃에 대한 분노. 그 지경이 된 내가 살아온 땅의 역사. 하나의 세계가 사라져 버렸뇩?상실에 대한 탄식. 그때 거기 그것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한 채 그저 고향에 머물며 살아가는 현재의 이들에 대한 깊은 미움을 숨기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흉악하고 이득을 눈앞에 두고 교활하며 종종 비겁하고 폭력적이며 대부분 완고하고 그들의 무지가 때로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데도 임권택은 그들에게 어떤 연민을 품지 않는다. 하나의 예. 이웃의 어린아이가 급성 폐렴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순이 알려주지만 (그런데 의사도 아니며 진료도 하지 않고 그저 한 눈으로 쳐다본 다음 그녀는 병명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돈이 없어 병원에 가보지 못한 채 마을 어른 김 첨지의 민간요법에 의존해서 일시적인 경기로 판단하고 방치하는 바람에 가엾게도 생명을 잃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말을 할 뿐 거의 무관심하게 다루고 있다. 아이가 아픈 장면과 그 아이가 시신이 된 장면은 서로 떨어져 있으며 그 둘 사이에 전혀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마치 그 아이의 생명을 잊은 것처럼 보이다가 되돌아왔을 때는 이미 죽은 다음이다. 한밭골에서 부서진 것은 풍경이지만 망가진 것은 이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종종 마을이 아름답긴 하지만 대부분 정감 없이 찍혔으며 마을 사람들은 단지 무지할 뿐만 아니라 계몽되기 전의 그들은 종종 폭력에 자주 의지하거나 너무 쉽게 노출된다. 만일 이 모든 것이 그저 이야기에 걸쳐 서 있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별로 우리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내가 단절이라고 부른 것은 이상한 방식으로 여기서 장소와 인물들을 연결시키는 대신 집합의 형식으로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네마스코프는 반복해서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다. 아직 카메라가 멈춰 서서 (< 만다라 >에서처럼) 바라보고 있지는 않지만(long_take) 이미 인물들의 배치는 그럴 준비를 하고 있다. 반원형을 만들면서 앉아있는 인물들. 그때 2.35 사이즈를 위해서 수평으로 늘어선 배치를 보고 있으면 (물론 아직 임권택 은 보지 못했지만 끈질기게 그를 아시아 영화의 전통 안으로 다시 위치 지으려는) 서방세계 비평가들이 그를 미조구치 겐지의 그림자 아래 있다고 설명할 때마다 우리들은 오히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거기 있다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고작 5년의 차이를 두고 만들어진 동시대의 영화 < 오하루의 일생 >과 < 거미둥지의 성 >에서 동일한 일본 가옥 구조 안에 앉혀놓은 무사들의 배치의 차이를 떠올려보라. < 아내들의 행진 >은 단지 장르 안에서 쇼트의 체계를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돌이키려는 시도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화 시스템을 좌표상의 영도(degre_zero)에로 되돌려 놓으려고 스스로에게 부과한 어떤 제한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제한? 그렇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일단 이렇게 앉혀 놓으면 편집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걸 나누기 시작하면 앞의 장면들 전체가 무효가 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이렇게 배치하면 누가 누구를 보는지 시선의 방향이 그 자체로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임권택이 누구보다 잘알고 있고 누구보다 능수능란하게 진행해온 세계. 그런데 그걸 중단하기 위한 구도를 여기서 자기 손으로 스스로 만들어낸다. <아내들의 행진>은 임권택의 영화에서 형식적으로 무언가를 잡아 뜯어내듯이 버리면서 새로운 관계를 짝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 영화 이전 임권택의 영화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무대가 농촌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핵심이다. 임권택은 스타일을 발명하는 대신 스타일이란 그 영화가 머무는 세계 안의 형식과 조응하는 매개라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이 스타일을 통해서 의미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임권택에게 <아내들의 행진>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이 이야기가 농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기 때문이다.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 잡초 >를 제외하면) 장르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서 영화를 찍은 건 53번째 영화인 <아내들의 행진>이 처음이다. 그가 배우들과 스태프를 이끌고 농촌으로 간 것은 언제나 조선 가옥이 서 있고 주변에 별다른 근대건물이 없어야만 하는 사극이거나 수많은 엑스트라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때로 건물들을 폭파시켜야 하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었다. 조건과 상황 안에서의 농촌. 그러므로 거기에는 거기 살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냥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이제까지 임권택은 농촌을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도시 사람인 것처럼 청춘영화를 찍었고, 갑작스러운 전후 서울의 근대화 과정 그늘에서 자라난 폭력과 희생을 다루었고, 이따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애환처럼 연출했다.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추억. 그렇다면 어떻게 되찾아야 할까. 그곳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한국전쟁이 놓여있다.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폭력적인 시간의 흔적들. 존재했던 것들의 소멸. 고향 사람들의 삶이 변해버렸고 풍경은 부서져 버렸다. 거기서 더 이상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때 임권택은 무엇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정확하게 여기서 영화감독과 지도자는 서로 갈라진다. 되찾아야 할 시간과 도래해야 할 시간.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설명해야 할 것이다. < 아내들의 행진 >은 이제까지 임권택 이 만들어본 적이 없는 형식의 영화이다. 그건 이 영화가 교육의 영화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당신은 <아내들의 행진>이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책영화라는 사실 때문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떠올리면서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반론을 위해서 푸코를 따라 칸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대신 맞은편에 브레히트의 교훈극에 관한 배움에 따라 고다르가 만든 교육의 영화들을 가져다 놓을 생각이다. 세르주 다네의 그 유명한 명제. “스크린이라는 칠판” 임권택의 교육의 영화는 세 번째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임권택은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 배움을 청해가는 방식을 취했다. 단지 그것은 주제에서 배움을 가져오거나 소재를 알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임권택이 그것을 영화로 담기 시작할 때 그것의 모든 지식들이 영화 안의 기호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임권택은 거기서 다시 시작하였다. 나는 아는 것이 없으며 배운 것이 없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서술은 그의 전진이 되었다. 낯선 지식들. 이것은 저것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일까. 이것과 저것은 왜 대립하는가. 질문이라는 형식. 그 형식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의 리듬. 그는 스님의 만행길을 따라가면서 소승불교를 배우고(< 만다라 >) 그리고 번갈아 대승불교를 배웠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 그런 다음 자신에게 내린 무병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찾아 나선 중년남자를 따라가며 무속신앙을 배웠다. (< 불의 딸 >) 임권택은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일백년 전 조선말 막 근대가 시작되었을 때 도망치고 또 도망치면서도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상을 전했던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의 포교활동을 따라가면서 인본사상을 배웠다. (< 개벽 >) 임권택은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는 이제 남도 소리를 따라 다시 유랑을 떠났다. 당신을 부르는 소리. 고향의 소리. (< 서편제 >) 그리고 또 떠났다. (< 천년학 >) 그런 다음 조선화의 마지막 대가 오원 장승업을 따라가면서 배움을 청했다. (< 취화선 >) 그는 멈추지 않았다.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종이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 달빛 길어 올리기 >) 임권택의 영화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향한 교육의 영화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내들의 행진>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마치 벤야민이 <아내들의 행진>을 만들 때의 임권택을 위해서 쓴 것만 같은 테제로 마지막 문장을 대신 하겠다. ‘역사철학 테제’ 18개 테제에 관한 부기 B. “시간으로부터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했던 점술가들은 확실히 시간을 동질적 시간으로도 체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과거의 시간이 어떻게 기억을 통하여 체험되어졌던가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중략)” (계속) 1974년 111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영화진흥공사 각색 신봉승 , 윤삼육 촬영 변인집 조명 최원근 편집 김창순 음악 한상기 김희라 윤미라 윤양하
오랜 친교를 해온 내가 본 조 감독은 깔끔한 신사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늘 자상하고 이타행의 모범을 보여주며, 지금까지의 영화작업을 천직으로 살아온 멋쟁이이다. 자신의 작품을 과대포장이나 과시하지도 않는 영화라는 화려함 속의 고고한 청자와 같은 분이다. 음력 1935년 11월 5일생으로 제물포고, 건국대학교 정외과에서 수학한 조 감독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 침향 』의 김수용 ,『 애 』의 이두용 감독과 더불어 분단의 아픔을 그린 신작 『 만날 때까지 』로 원로감독으로 융숭한 대접(?)과 칭송을 받았다. 급변하는 영화환경 속에서도 투철한 작가정신과 창작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그는 『만날 때 까지』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임권택 감독이 타인의 시나리오로 작품의 완성도를 가늠하고 있을 때 조문진은 시나리오 창작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70여 편의 시나리오, 다수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그의 작품들은 약 45편에 이른다. 이중 일부는 보관되어 있고 이미 필름의 존재조차 모르는 작품들도 있다. 제1회 도쿄 국제영화제는 12편의 초청작 중 하나로 그의 『 언제나 타인 』을 선정했다. 이작품은 비경쟁부문에서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로 선정되었다. 이미 제6회 대종상에서 각본상을, 김지미 · 김희라 가 신인상을 탄 동년, 『 언제나 타인 』으로 제6회 백상예술상 감독상에 빛나는 그는 충무로 도제 시스템의 전형적인 본보기로 기록된다. 『 장군의 수염 』으로 유명한 이성구 감독 밑에서 2년, 김수용 감독 밑에서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조연출 생활을 한, 조 감독은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들 1969년 딸의 留學病을 모티프로 한 『 포옹 』으로 데뷔, 69년에만 『 젊은 여인들 』,『 새색시 』,『 명동나그네 』,『 죽어도 그대 품에 』,『 여자의 모든 것 』,『 언제나 타인 』,『 남편 』을 내놓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후 70년에 『 분노 』,『 여자이기 때문에 』,『 약속은 없었지만 』, 71년에 『 말썽 난 총각 』,『 내 아들아 』,『 속 두아들 』,『 내 아내여 』,『 두 딸의 어머니 』,『 처복 』,『 지금은 남이지만 』의 소프트 멜로, 가족과 가정의 이면을 묘사하는 전형을 고수하고 있었다. 김수용 감독 밑에서 20여 편의 조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 임해온 그는 주로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영화연출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화창작 관습은 영화 스승인 김수용 감독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그가 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회귀』가 당선된 것도 김수용 감독의 영화감독으로서 문학성 강조의 탓도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은 신분상승을 꿈꾸며 여성을 유린하는 멜로 드라마 『 언제나 타인 』(20회 에딘버러영화제에 출품), 판이한 생활공간을 가진 두 형제의 이해공간을 그린『 두 아들 』,1920년대 충남 양반 가문의 비극을 그린 시대물 『古家』를 들 수 있다. 그는 곽지균 같은 감독을 대표적 조감독으로 두면서 그의 감정선을 전수하고 있었다. 이외에 심재석 , 한덕규 , 김수형 , 양병간은 그와 작업을 같이한 조감독들이다. 그가 꿈 꾸어온 영화들은 데뷔작 『 포옹 』에서 보여주는 명쾌함이나, 빌리 와일더의 『 아파트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 챨리 채프린의 일련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세태풍자와 인간 가치를 따스한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현역감독 중 40편이 넘게 자신의 창작 시나리오로 연출한 감독은 한국영화사에 거의 없다. 그만큼 문학성을 앞세우는 그가 작가다운 작가로 부상한 영화는 『 만날 때 까지 』이다. 당시의 영화제작 현실이 어떠했건 조감독이 비난 받을 부분도 여러 면에 걸쳐있다. 그의 멜로, 반공, 문예, 시대, 청소년물등은 1)한국적 멜로드라마나 코미디 등의 장르 발전에 역동적·예술적 접근으로 기여하지 못한 점 2)작가주의영화를 표방했지만 실험성이나 부문별 심층연구에 심혈을 기울이지 못한 점 3)도제 시스템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점 4)가족이나 가정의 진보적 풍경이나 비전을 과감하게 보여주지 못한 점등은 지적 받을 부분이다. 로버트 알트만 이나 조지 쿠커의 실험성이나 오손 웰스의 탐구정신, 데이비드 린의 클래시칼한 분위기를 제쳐두고 한국 영화의 생산에 몰두한 결과는 대부분의 충무로 감독들의 경우처럼 결국 후회스러운 부분으로 나타났다. 당시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술작업 보다는 호구지책으로 영화를 방편으로 삼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작, 단기제작, 여러 장르 섭렵은 영화창작의 밀도를 떨어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전성기가 불경기로 크로스 오버되는 70년대의 감독은 작가정신의 고매함이나 영화의 예술성을 고려할 시·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검열의 공포는 단순한 소재를 요구하게되었고 결국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고리를 갖고 있었다 . 이런 가운데 생산된『 무릎꿇고 빌련다 ,72』『 엄마결혼식 ,73』『 신설 ,74』『 호기심 ,74』『 올챙이 구애작전 ,74』『 황홀 ,74, 김승옥 의 『무진 기행』을 영화화한 작품』『 어린 시절 ,74』『 빗속의 여인들 ,76』『 고가 ,77』『 슬픔은 파도를 넘을 때 ,7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78』『 과부 ,78』『 학을 그리는 여인 ,79』『 황토기 ,79』『 두 아들 ,81』『 내일 있는 청춘 ,82』『 설마가 사람잡네 ,85』『 젊은 밤 후회 없다 』는 암울한 시대의 음영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90년대 들어 탄생한 『 아들과 연인 ,92』과 『 만날 때까지 ,99』는 비교적 안정되고 여유가 있는 가운데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환경 탓에 영화감독협회장과 공륜심의위원을 거친 그가 부르짖는 말은 영원한 현역이다. 『아들과 연인』은 사돈이 될 부모님들이 애인인 경우를 설정한 것이고,『만날 때 까지』는 북에서 휴전선을 넘어 온 기억 상실 청년을 자식으로 생각하는 아버지 후보와의 재회를 그린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서 활약했던 배우들을 작품 제작 순으로 살펴보면 신성일 , 윤정희 , 김창숙 , 고은아 , 신영균 , 전양자 , 남정임 , 김희갑 , 남궁 원 , 김동원 , 한은진 , 박암 , 이낙훈 , 김순철 , 박노식 , 문 희 , 최남현 , 김진규 , 강부자 , 송 해 , 전계현 , 노주현 , 황정순 , 최무룡 , 문정숙 . 하명중 , 태현실 , 장동휘 , 김희라 , 신일룡 , 방희 , 홍성우 , 신 구 , 김추련 , 한인수 , 윤미라 , 황 해 , 도금봉 , 김상순 , 윤일봉 , 이대근 , 정혜선 , 민지환 , 선우용녀 , 조미령 , 현 석 , 이덕화 , 안소영 , 선우 일란 , 하재영 , 윤양하 , 나영희 , 강석현 , 이상아 , 김혜선 , 이재룡 , 박근형 , 조용원 , 양택조 , 김인문 등 화려한 스타 군과 만날 수 있다. 영원한 현역 감독,조감독이 있는 한 우리는 영화계의 또 다른 중심 축을 갖고 있는 셈이다. 가족과 인간, 고향이 살아 숨쉬는 인간미 넘치는 차기 작품을 기다려 본다. 장석용 (영화평론가, 중앙대강사) / 2002년 <프로필> 1935년 11월 5일 인천 출생 1967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회귀'로 당선 1970 < 포옹 > 각본, 감독으로 감독 데뷔 1971 < 언제나 타인 > 동경 제1회 국제영화제 입선 공개 상영 1988 영화감독협회 회장 1989 미국영화직배 반대 투쟁위원장 1991 공연윤리위원회 영화심의위원 1994 청주대학교 강사 1996 영상작가교육원 강사] 1998 영상등급물 위원회 영화심의위원 작품명 1970 포옹 / 남편 / 분노 / 여자이기 때문에 / 약속은 없었지만 1971 말썽난 총각 / 두아들(속) / 내 아내여 / 처복 / 지금은 남이지만 1972 무릎꿇고 빌련다 1973 엄마결혼식 1974 신설 / 호기심 / 올챙이구애작전 / 황홀 / 어린시절 1976 빗속의 여인들 1977 고가 1978 슬픔은 파도를 넘을 때 /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 과부 1979 학을 그리는 여인 1981 두 아들 1982 내일있는 청춘 1985 설마가 사람잡네 1986 젊은밤 후회없다 1992 아들과 연인 1999 만날 때까지 등 47편 시나리오 100여 편, 소설집 '조문진 단편소설집', '재벌의 문' '조문진 시나리오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