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영상] 어두운 성장을 그린 밝은 영화〈파수꾼〉- 윤성현 감독
- 제작년도
- 2011
초점이 맞지 않은 침침한 화면으로 치도곤을 당하는 한 소년이 보인다. 폭행을 가하는 패거리들 가운데에서 피해자를 무자비하게 두들기는 가해자의 얼굴도 희미하게 드러난다. 폭행에 가담하진 않고 있지만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가해자로 보이는 두 소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피아 구분이 불분명한 혼란 상(像)은 앞으로 우리들에게 제시될 사건의 성격을 말해준다. 내레이션(Narration)이라는 관점에서 < 파수꾼 >(2011)은 복합적 서사 라인의 겹침과 교차, 미궁에 빠지는 인과율, 내레이션의 시간 조작이라는 현대적인 스토리텔링 장치들에 의해 운항된다. 다성적인 기원을 갖는 인간 행위의 본질에 가까이 가기 위해 이 영화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캐릭터들이 각자의 스토리를 갖도록 자율성을 부여한다. 앞과 뒤의 서술 내용이 서로를 배반하는 플롯은 서술 주체들의 입장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삽화들을 교차하면서, 부딪히고, 순환하는 관계를 묘사한다. 간단하게 정의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이 인물들의 삶에 비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연출자 윤성현은 단일하게 정의할 수 없는 인간 행위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무질서하게 배치된 것처럼 보이는 쇼트와 신, 시퀀스들의 관계를 유기적인 사슬로 엮는다. 한국의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십대 드라마는 외부인이나 교사의 관점을 포함하여 청소년의 행태를 극화함으로써 국가 시스템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관찰은 정형화된 스토리 패턴에 종속되는 스테레오타입화된 십대 캐릭터를 앞세우는데 모든 사건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다. 주인공은 대개 결손 가정 출신이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쉼터이자 사춘기 이후 악몽의 온상인 학교와 가정의 중층적인 모순을 드러내려 한다. <파수꾼>은 십대 드라마의 클리셰를 부분적으로 차용하면서 이와 본질적으로 갈라선다. 장르의 전형을 뛰어넘는 성취는 명백한 인과관계에 의해 성립되는 십대 드라마의 서사 관습에 도전하는 것이다. <파수꾼>은 한 명의 프로타고니스트에 의해 주관(主管)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複數)의 인물들이 교대로 플롯을 끌고 가며, 시간은 선형성을 도외시한 채 과거와 현재를 어지럽게 오가고, 연대기적 인과관계의 전복을 통해 전통적 스토리텔링의 유습으로부터 탈피하고 있다. 요컨대 플롯이 추구하는 목표 내지는 관객들이 던지는 질문은 국면에 따라 종류를 달리 하고 그때마다 화자가 교체되면서 목표와 질문의 깊이도 달라진다. 서술 주체가 변경될 때마다 내레이션은 미스터리를 해소하고 이야기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기차 선로 마냥 미스터리의 해결은 단일한 결과로 귀결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야심찬 <파수꾼>의 서사는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주인공 기태(이제훈)의 죽음을 추적하는 일종의 탐정 스토리에서 최초로 탐정 역할을 맡은 인물은 희생자의 아버지(조성하)이다. 도입부에 관객들은 미스터리 장르의 관습과 규범에 따라 기태의 아버지가 죽음의 비밀을 밝혀 갈 탐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희준(박정민)을 만난 이후부터 그의 소임은 끝난다. 현재의 탐사자이자 질문자인 아버지는 기태의 죽음과 관련한 피상적인 사실만을 제공할 뿐이다. 누가 죽었는가라는 질문에 답이 내려진 이후 그는 서사의 동력을 상실한다. 그때까지 가해자로 보였던 기태가 죽었다는 사실로부터 가해자는 왜 죽음에 이르렀고, 피해자는 그로부터 도피하였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행한다. 덩달아 죽음의 미스터리에 대해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희준, 동윤(서준영)에게 초점이 이동한다. 플롯의 효과가 랜덤의 배열이 아니라 치밀한 내레이션의 작용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 질서와 논리에 주목해야만 한다. 기태를 가학적인 악마와 속 깊은 친구로 번갈아 보여주는 도입부의 플래시백은 이 장면이 누구의 관점에서 전달되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간 혼란스럽다. 하지만 기태의 죽음을 둘러싸고 희준과 동윤이 용의자로 좁혀지는 순간, 진실이 밝혀지는 것 같다. 죽은 친구의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소년들은 말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때문에 비난을 피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두 소년은 기태와 친했던 적이 없다고 부인하거나 다른 친구들이 기태를 더 잘 안다고 질문을 회피한다. 영화의 서사 전개, 갈등과 대단원은 도입부에 제기된 쟁점에 종속된다. 즉, 도입부에서 결과(기태의 죽음)를 먼저 제시함으로써 이것이 내러티브의 모든 국면을 관장하도록 설정하였다. 기태가 희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 먼저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기태에게 마음을 주기 어렵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전환되면서 보다 진실에 가까운 기태의 입장(폭력의 원인과 그 내면)이 드러나는 식인데 이 대목에 이르러 관객은 그를 동정하고 깊이 이입하게 된다. 이 순간부터 화자의 교체와 더불어 오인의 매설, 수정은 이 구조의 핵심 의제로 떠오른다. 고전적 내레이션의 경우 단선적인 갈등의 유도와 해결이 일반화된 반면, <파수꾼>은 핵심 사건과 갈등이 다중적인 흐름으로 유도되고 있으며, 이러한 내레이션 전략은 사소한 오해와 차이가 누적되어 붕괴하는 관계라는 주제를 견인한다. 질문의 이행과정에서 정보, 심리의 전개 방향을 분명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고전적 내러티브 구조와 달리 이 영화는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지점을 그윽하게 감춘다. 기태의 죽음과 연관된 인물들이 서로 공유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정보는 관객에게 공유됨으로써 누적된다. 그러나 관객들 역시 죽음의 원인을 완벽하게 알았다고 하기는 힘들다. 이는 기태와 희준, 동윤의 스토리를 거의 균등하게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관계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설득력 있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희준과 동윤은 기태의 아버지를 매개로 하여 기태와의 과거를 회상하지만 이는 아버지에게 이야기한 것을 토대로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내용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경험이 자신의 입장에서 나열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서사의 끝에는 말끔한 미스터리의 해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희준이 기태와 함께 보낸 시간을 회상할 때 카메라는 소년들이 공유하는 유쾌함과 웃음을 가까이에서 포착하지만 그들 사이에 심연이 형성됨에 따라 점차 정적인 제스처로 변한다. 친구의 얼굴 사이에서 카메라의 이동은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서로 마주보고 위치할 때 멈춘다. 멈춤과 경직은 지속되고 곧 메울 수 없게 된다. 이 균열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희준과 재호(배제기)가 기태의 콤플렉스인 모성의 부재를 입에 올렸기 때문인지, 짝사랑하는 보경이 기태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 희준이 질투하는 것인지, 세정(이초희)에 대한 풍문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든 것이 묘연하다. 기태는 회피하는 희준에게 짜증을 내고 절친을 때리는 것으로 좌절감을 표출한다. 또는 희준은 기태가 자신을 위협하는 방식을 싫어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친구인 척한다. 희준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동안에도 기태의 죽음에 대한 이유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소년들은 어른, 작중 인물, 관객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세계 안에서 말하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파수꾼>은 미묘하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소년들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정신분석적, 사회학적, 전지적 관점을 지양한다. 여러 갈래의 관점이 교차하는 이 영화의 구조는 만족할만한 결말, 명쾌한 진실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해석하는 것이 기껏해야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은 퍼즐 조각의 조각난 그림들일 때 더욱 그렇다. 윤성현은 십대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영화적 언어로 효과적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감독이다. 욕설 외에 1분 동안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잘 되지만 다음 장면에서는 완전히 남이 된다. 흔해빠진 십대 성장드라마에 독창성을 부여한 것은 이야기의 형식이 이야기의 성격을 결정하도록 한 스토리텔링의 효과이다. 탐색의 주체가 봉착한 딜레마를 강조하는 조각난 비선형 구조는 악마의 모습으로 등장한 소년이 수줍고 연약한 아이로 귀환하여 위력적으로 마음을 휩쓸고 가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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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의 시간 >( 윤성현 , 2020)에 담겨있는 ‘영화’들에 관하여 영화가 시작하면 두 명의 양아치가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면서 네가 내 옷을 몰래 입었네 마네를 가지고 말씨름을 한다. 구제 옷을 훔쳐 외국으로 넘기는 브로커 형을 통하면 300벌 정도를 팔았을 때 100불은 벌 수 있을 거라 말하는 장호( 안재홍 )와 “가오 떨어지게 그지 새끼도 아니고 남이 입던 옷을 으트케 팔어?”라며 불평하는 기훈( 최우식 )의 대화를 보여주던 카메라는 이들이 편의점 문을 나설 때 따라 나가서는 거리 풍경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훑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출발하면 퉁퉁탁탁거리는 음악과 함께 영화의 타이틀이 화면에 박힌다. 나는 이 첫 시퀀스에서 이미 <사냥의 시간>이란 영화를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된다고 본다. 장호와 기훈이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친구 준석( 이제훈 )의 출소 날에 마중을 나가는 이 첫 시퀀스는 비유하자면,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빠져드는 터널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신이다. 이 영화는 앞으로 망해버린 미래 도시의 을씨년스러운 거리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며, 그 거리의 주인공들은 ‘스투시’와 ‘슈프림’을 즐겨 입는 양아치들이 될 것이란 사실을 끝내 주는 사운드와 미술로 꾸며서 보여준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이렇게 용감한 오프닝 신을 가진 한국영화를 보지 못했다. 편의점에서부터 장호와 기훈을 따라 나선 카메라의 움직임은 <칠드런 오브 맨>에서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가 커피를 사서 카페를 나서다가 폭탄이 터지는 장면과 유사하다. 두 사람이 준석을 만나러 교도소까지 가는 와중에 보여주는 길거리 풍경에는 <아키라>가 상상하며 담아낸 2019년의 망해버린 도쿄 거리의 이미지와 <공각기동대>의 홍콩과 상하이 뒷골목을 섞어 만들어낸 이미지, <증오>에 등장하는 파리 외곽 상트르 레비뉴의 낡은 아파트 이미지 등이 뒤섞여 있다. 윤성현 감독이 제시하는 미래 도시 서울의 이미지는 수많은 서브컬처 이미지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화로 신속하게 빠져들도록 의도한 이 오프닝 신이 되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이 영화를 스마트폰이나 모니터, TV로 관람한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방식대로 이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들지 못한 것 같다. (이야기가 아닌) 내가 지금 뭘 본 것인지, 이미지를 믿지 못한, 혹은 속지 않은 관객은 아마도 다음 신에서는 귀를 의심하게 됐을 것이다. 원화 가치가 폭락해 수중에 지니고 있던 화폐가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리고, 도모할 미래 역시 불투명한 상황에서 준석의 무리들은 범죄를 모의했다 실패한 전력이 있다. 그 책임을 준석 혼자 떠안고 감옥에 다녀왔으며 이제 이들은 또 다른 범죄를 구상한다. 캐릭터의 상황을 묘사하는 이 클럽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직설적이고 낯간지러운 대사를 주고받는다. 이를테면 하와이를 닮은 대만의 어떤 섬에 가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 20만 불만 있으면 아는 형님이 소개해준 대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장사로 한 몫 잡을 수 있다는 말, “야 거기 가서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 지옥에서 벗어나서.”라는 준석의 대사를 들을 때 아마도 추정컨대,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그저 허황된 것들을 휘황찬란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7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눈과 귀를 모두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펼쳐진다. 그런데 나는 <사냥의 시간>이 공개된 후 지난 몇 주간 이 오프닝 장면을 10번도 넘게 돌려봤다. (어떤 스피커를 보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가슴을 울리는 프라이머리의 음악과 허공을 헤매는 듯한 카메라워크, 그리고 직설적인 대사가 만들어내는 조화는 나의 눈과 귀를 모두 만족시켜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보는 중인데 <사냥의 시간>의 오프닝은 말그대로 키치적이다. 나는 진지한 몰입을 스스로 거부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이 판타지의 세계로 손쉽게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었다. <사냥의 시간>은 동화에 가깝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신이 용감하다고 느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를 지옥에 갇혔다고 여기는 순진한 악동들이 끔찍한 범죄를 모의하는 오프닝. 별 의미 없는 20만 불이란 숫자. 인생 역전을 모의하면서 펼쳐 놓는 너무나도 소박한 하와이 같은 대만의 섬 이미지. 윤성현 감독이 꾸며 놓은 서브컬처 기반의 환상 동화 첫 페이지를 2020년의 관객들은 상당히 낯설어 하는 듯하다. 2019년, 윤성현 감독을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그가 후반작업과 편집 중인 <사냥의 시간>을 소개하며 해준 말도 기억한다. 그날의 대화 주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헬조선’에 대한 문제의식, 데뷔작 < 파수꾼 >(2010) 이후의 두 번째 윤성현 영화라는 어떤 기대를 배반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향한 애정에 대해 그는 꼼꼼하게 설명했다. <사냥의 시간>에서 윤성현 감독은 헬조선에 관한 문제의식을 이미지로 표현한다. 영화 내내 준석이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과거 범죄가 뭐였는지, 이들을 추격하는 한의 사정이 무엇인지, 준석과 상수( 박정민 )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파수꾼>의 한 장면을 재현하듯 하는지 등등 저간의 사정을 알 길이 없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 순진무구한 청년들이 탈주극을 벌이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거대한 조직의 보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순간의 핏빛 안개가 곧 헬조선이다. 또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의 차이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파수꾼>을 감독 윤성현이 가져가야 하는 방향이나 테두리로 생각했던 것 같다. <파수꾼>은 어찌 보면 내 안에 없는 재료를 가지고 나를 바꿔가며 만든 작품이다. 남자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파수꾼>의 연장선상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정서적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파수꾼>이 현미경같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라면 <사냥의 시간>은 현상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이 영화의 현상 체험은 윤성현 감독이 좋아하는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기인한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일본 만화 <베르세르크>와 <아키라>를 꼽는 그는, <파수꾼> 이후 한동안 사이버펑크 영화를 준비하다가 <사냥의 시간>으로 선회했다. 추격자 한과 준석 무리의 대치를 통해서 그는 <매드맥스>와 <터미네이터>를 오마주한다. 준석이 친구들에게 도박장을 털자고 꼬시면서 “다 잘될 거야.”라고 말하는 부감숏에서는 저 멀리 화려하고 거대한 빌딩들이 만들어내는 마천루의 이미지가 펼쳐진다. 그 위에는 네온사인을 내건 애드벌룬이 하나 둥둥 떠다닌다. <블레이드 러너>가 상상하며 꾸몄던 영화 속 2019년의 도시 풍경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사냥의 시간>에서 가장 마음을 뒤흔든 이미지는 예고편에도 잠깐 등장하는 장면인데 이 무모한 범죄를 모의하고 나서 준석 무리가 창고에서 총을 테스트해보는 장면의 이미지다.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청년들은 서로 총구를 겨누며 웃고 떠들지만 며칠 뒤면 그들의 인생은 세상에서 처음 겪는 끔찍한 악몽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면서 마지막으로 콩알만한 행복에 겨워하는 순간. <시티 오브 갓>과 <고모라>의 이미지가 <사냥의 시간>에도 담겨있다. <사냥의 시간>을 둘러싼 이미지의 재료가 무엇이 됐건 관객은 어색한 가짜라며 충분한 거리두기를 지켰다. “내 시간을 사냥당했다”며 댓글을 토해내던 관객들이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하는 극장 시스템에서 이 영화를 봤다면 어땠을까. 그 압도적이면서 디테일이 뛰어난 총격 소리와 음악에 지금보다는 더 빠져들 수 있었을까. 안개 자욱한 도시의 뒷골목, 사방이 꽉 막혀 미로 같은 지하 주차장, 더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항구의 끝자락이 지닌 을씨년스러운 이미지를 대형 스크린에서 봤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마블과 블록버스터의 시대에, 그리고 하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OTT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냥의 시간>에 대해서는 언제든 더 길게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다. 그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영화적 향수로 가득한 레퍼런스 영화 리스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사냥의 시간>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이미지의 재료에 관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돌파구는 그렇게 간단히 열리지 않았다. 극장 개봉 대신 OTT 서비스 넷플릭스를 돌파구로 선택한 < 사냥의 시간 >( 윤성현 , 2020)은 "넷플릭스를 통해 190여 개 국에 단독 공개한다"는 보도자료가 나온 지 꼬박 한달 간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4월 23일(목), 드디어 관객을 만났다. 지난 3월 23일(월)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를 통해 단독 공개된다는 보도자료가 도착한 날부터, 과정이 매끄럽지 않을 조짐은 있었다. 넷플릭스의 보도자료가 도착한 뒤, 여섯 시간 만에 콘텐츠판다가 ‘이중계약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고, 그날 저녁 8시 다시 리틀빅픽쳐스가 ‘이중계약 주장은 허위’라고 강한 반론을 제기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팽팽한 공방을 예고했다. 결국 콘텐츠판다는 이미 해외 판권이 팔린 국가에서는 넷플릭스로 영화를 상영할 수 없도록 하는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4월 8일(수) 법원은 콘텐츠판다의 손을 들어줬다. 현재의 '코로나19' 상황이 리틀빅픽처스가 주장하는 '계약해지가 가능한 천재지변'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4월 10일(금) 오후 4시 공개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넷플릭스는 영화 공개를 보류했다. 결국 4월 16일(목) 리틀빅픽쳐스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며, 콘텐츠판다에 사과를 구합니다"라는 입장문을 발표해 깊이 머리 숙였고, <사냥의 시간>은 전세계 넷플릭스 구독자와 만나게 됐다. 우여곡절을 차지하더라도 <사냥의 시간>이 극장 대신 넷플릭스를 선택한 건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코로나19 여파로 극장 관객 수가 1/10 수준으로 급감하고, 극장도 1/3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 차일피일 개봉일을 미루던 영화들이 <사냥의 시간>을 새로운 롤모델로 삼진 않을까. 극장에는 사람이 없지만, OTT 서비스에는 언제든 '새로운 콘텐츠'를 볼 준비가 되어 있는 시청자가 기다리고 있다. 기약 없는 기다림만큼 무서운 고문도 없지 않은가. 2020년 상반기 개봉 예정인 30여 편의 영화 중 <사냥의 시간>과 같은 돌파구를 택하는 영화가 등장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일부에선 (극장 대신 OTT 서비스 공개가) “충분히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목소리도 들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반기 개봉을 계획했던 영화들은 다시 극장 문이 열리고 관객들이 극장으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사냥의 시간>에 관한 법원 판결이 나기 전, <더 스크린>이 취재한 개봉 예정 영화 관계자들은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지금은 지켜볼 뿐이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사냥의 시간>처럼 OTT 서비스로 직행할 가능성은 적다는 입장을 전했다. “다들 모든 옵션을 고민하고 있겠지만, 현재 개봉이 밀린 영화들은 모두 극장 개봉을 전제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이 중요” “가능성이 큰 작품들을 극장에서 관객에게 제대로 선보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OTT 서비스 직행 가능성이 적을 것으로 전망했다. 현실적인 상황도 걸림돌이 많다. 한국 영화 기대작은 개봉 전에 해외 마켓에 소개되어 선판매되는 경우도 많고, OTT 플랫폼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프로세스 역시 검증된 바 없기 때문이다. <사냥의 시간>의 경우 넷플릭스가 영화 제작비와 이미 소진한 마케팅 비용을 보전하는 방향으로 판권 계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즉, 흥행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 적자를 막기 위한 선택이다. 한 제작사 대표는 “(이미 해외 다수 국가에 판권이 판매된) 대형 영화의 경우엔 OTT 서비스가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입장을 대신했다. 또한 영화 관객 수에 따라 수익이 결정되는 극장 상영 방식과 OTT 서비스의 수익 정산 방식이 다른 것도 현실적 제약이다. 다행히 두 달 가량 강력하게 진행된 물리적 거리두기의 결과로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가 확연히 줄어들고, 개인 방역이 일상화되면서 극장들도 조금씩 관객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극장 문을 닫았던 멀티플렉스 극장들도 4월 29일(수)부터 전체 상영관을 정상 운영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관객 호응이 좋았던 재개봉 영화 상영에 이어, ‘마블 히어로 영화 특별전’을 진행 중이다. 재개봉이 흔치 않은 디즈니의 이례적인 결정에는 5월 개봉작 해리슨 포드 주연의 <콜 오브 더 와일드>,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의 <언더 워터>를 극장 상영하기 위한 ‘관객 마중물’ 전략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 기생충 > 흑백 버전도 4월 29일(수) 극장 상영 일정을 확정했다. 상반기 개봉 예정이었던 한국 영화들도 조심스럽게 5월 이후 개봉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논의하고 있으나 개봉 일정을 공지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다. 마케팅 일정을 고려하면 시간이 많지 않은데, 자꾸 개봉이 밀리는 모양새라면 관객들도 김이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 여름 이전 개봉을 준비하는 영화사 제작자의 고민이다. 본격적인 한국 극장 해빙기는 올여름, 7~8월이다. 한국 영화계 쇄빙선 역할은 천만 감독들의 신작 세 편이 맡았다. ‘좀비 천만 영화’ < 부산행 >의 스핀오프 속편 연상호 감독의 <반도>가 여름 개봉을 확정하고 예고편 공개 등 마케팅을 시작했다. <반도>의 제작사 레드피터 이동하 대표는 “물론 상황을 주시할 수밖에 없지만, 계획대로 진행 중이다”라고 여름 개봉을 확인했다. “해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름 시즌 개봉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국가별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지켜보고 있다. 예고편도 공개하기 어려운 상황인 국가도 있다.”라며 한국 상황보다 해외 개봉을 오히려 변수로 꼽았다. 한국 최초로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를 선보이는 윤제균 감독의 <영웅>도 올여름 개봉을 확정하고 예고편, 포스터 등을 공개했다. 뮤지컬 초연 공연부터 10여 년 간 안중근 역할을 연기해 온 배우 정성화가 영화에서도 안중근 역을 맡아 연기와 노래를 함께 소화한다. 작품의 메시지와 시기성을 고려해 7~8월 개봉이 유력하다. 현재 촬영을 종료하고 후반 작업 중인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도 여름 개봉이 목표다. 배급사 롯데컬처웍스 관계자는 “여름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만 시장 자체가 예년과 비교해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면 여름 방학도 짧아질 것이고. 그래서 개봉 배급 일정은 탄력적으로 전략을 짜고 있다”라며 올해 여름 시장이 예년과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전망했다. 조성희 감독이 연출하고 송중기, 김태리, 진선규, 유해진이 합류한 첫 SF 블록버스터 <승리호>도 여름 개봉을 놓치지 않을 계획이다. 시장의 보편적 회복 탄력성을 고려한다면 빠른 회복을 기대할 수도 있다. 매년 2억 장의 영화표가 판매되던 한국 극장 시장이 코로나19라는 강력한 외부적 요소로 위축된 만큼, 코로나19 종식에 이어 여름 대형 신작들이 공개된다면 한껏 눌러 두었던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관객 수가 폭증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어제와 완전히 다른 오늘이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수많은 ‘플랜 A’는 ‘플랜 B,C,D’로 변경되었다. 코로나19가 ‘극장이냐, OTT 서비스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위협하며 극장을 말살시키는 원흉처럼 느껴졌겠지만, 실은 위협보다는 백신으로 여기는 편이 적절하다. 전 세계 극장이 문을 닫고, 오프라인 활동이 일시 정지된 ‘미증유’의 현재는 냉정하게 짚어보면 새로울 게 전혀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변화 속도가 현기증날 만큼 빨라졌을 뿐, 재택근무, 원격 수업, 배달 산업, OTT 서비스는 이미 대세였다.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확산되고 삶의 모습이 혁신적으로 바뀐다는 ‘4차 산업 혁명’이 우리의 준비 상태와 무관하게 코로나19라는 광범위한 테스트베드를 통해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직접 몸을 이동해 오프라인 공간에 모이지 않고도 일을 하고,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경험하기 전엔 몰랐던 이점도 있다는 걸 체험해버렸다. 한편으론 ‘온라인 연결’이 절대 채우지 못할 오프라인 경험이 얼마나 귀중한 지도 뼈저리게 확인했다. 극장에서 볼 이유가 분명한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그럴 필요를 찾지 못한다면 경험한 바대로 극장이 아닌 플랫폼에서 보는, 관객의 선택은 단호하고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원망도 들고, 안타깝긴 하지만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이라는 가정은 쓸모없다. 동시에 온라인인가 오프라인인가, ‘모 아니면 도’ 식의 양자택일 예측도 쓸모 없다. 지금 더 중요한 질문은 영화와 극장 모두가 ‘최신 영화를 가장 빨리 보여주는 플랫폼 경쟁력’, ‘극장 홀드백’같은 독점적 안전망이 약해진 상황에서 ‘각자의 생존 무기는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여유가 길지 않다. 코로나19보다 더 두려운 건, 이미 각성해 버린 관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