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
- 감독
- 오세현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윤제문, 김태훈, 김지성, 윤예림, 서은지, 문정웅, 서정식, 허동수, 김주연, 이은주, 임유리, 바다, 이병훈, 윤나은, 한동희, 양천식, 채영신, 이면주, 임성신, 배명선, 장형순, 나다윤, 변재환, 양광섭, 이민재, 이성호, 전원철, 정우석, 유시아, 나경묵, 유상기, 신성수, 송해성
중국 태생의 조선족 감독 장률은 문화적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뤄왔다. < 경주 >(2014)와 < 춘몽 >(2016)의 경쾌한 비트에 이어 장률은 < 후쿠오카 >에서 다시 한번 이국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 타자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 <후쿠오카>의 주인공들은 다른 장률 영화의 인물들처럼 경계에 선 사람들이다.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제문(윤제문)은 헌책방의 거의 유일한 단골인 당돌한 괴짜 소녀 소담(박소담)의 제안으로 함께 후쿠오카로 떠난다. 사실 후쿠오카로 간 제문의 목적은 대학 시절 막역한 선후배 사이였지만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탓에 28년간 연락을 끊었던 선배 해효(권해효)를 만나기 위해서다. 후쿠오카에서 작은 술집을 경영하고 있는 해효와의 만남, 그리고 후쿠오카 시내를 배회하며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세 사람을 둘러싼 이야기가 표면적인 줄거리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이러한 줄거리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트릭들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다. 이러한 트릭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서사는 여러 갈래로 재해석이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사랑’이라는 주제 아래 놓여있으며,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의 시간’이라는 규칙을 따르는 이야기의 전개 구조와 캐릭터들은 때로 휘어지고 뒤틀리며, 합쳐졌다, 갈라진다. <후쿠오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꿈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영화이다. 도입부에서 제문은 헌책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홀연히 나타난 소담은 그에게 뜬금없이 후쿠오카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녀의 제안에 어처구니없어하던 제문은 환청처럼 선배 해효의 타박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지인에게 전화해 해효가 후쿠오카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 지하의 어두컴컴한 책방을 나오고, 서사의 무대는 곧바로 후쿠오카의 거리로 건너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생뚱맞은 캐릭터 소담, 현실에서는 들릴 리 없는 해효의 목소리가 제문을 후쿠오카로 이끌었고, 이후 영화의 전개 속에서 세 사람 모두에게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판타지와 현실, 혹은 꿈과 현실을 오가는 이야기의 속성은 후쿠오카에 두 사람이 도착하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후쿠오카는 어떤 곳인가? 영화감독 장률은 후쿠오카아시아영화제의 의뢰를 받아 이 도시를 무대로 한 영화를 연출하게 되었지만 후쿠오카는 이곳의 지역성과는 큰 상관성이 없다. 이성의 논리로 접수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공간으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후쿠오카에서 세 사람, 특히 소담은 어찌된 영문인지 언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그녀의 존재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 보인다. 소담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나고, 후쿠오카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중국인과 각자의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한 상황을 제문과 해효는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소담은 적대감을 씻어내지 못하고 서먹서먹한 제문과 해효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면서, 두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계속해서 이끄는 현실 세계 바깥의 초월적 존재처럼 보인다(제문은 소담을 한마디로 또라이라고 정의 내리면서도 신기가 있다고 말한다). 영화 속 한 에피소드에서 해효의 가게 단골손님인, 10년간 단한번도 말을 하지 않았던 남자가 곧 한국어로 말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 같은 말이 현실로 이루어지면서, 소담의 말은 두 사람에게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진실을 알려주는 힘을 지니게 된다. 소담은 제문과 해효에게 할 것과 갈 곳을 제안하고, 두 사람에게 그녀의 제안이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임을 암시하며 그들의 여정을 앞서 인도한다. 그리고 소담은 그 여정 속에서 제문과 해효가 처음부터 매우 닮은 한 쌍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소담은 두 사람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다가서게 만들며, 종래는 한 쌍의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두 사람은 이토록 서로 닮아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둔 연적으로, 사랑의 아픔 탓에 무려 28년간 서로 왕래 없이 지내는 선후배로 묘사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두 사람은 영원한 진공상태에 놓인 사랑의 시간에 갇힌 동일한 영혼처럼 보인다. 무려 28년이 지났음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동시에 사귀었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순이라는 여인에게 몰입해있다. 두 사람이 각각 머물고 있는 헌책방과 후쿠오카는 모두 한때 순이가 머물던 공간이었고, 두 사람은 30년 가까운 물리적 시간에 아랑곳없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윤동주의 시 두 편 ‘자화상’과 ‘사랑의 전당’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자화상’에서 제 3자로 묘사한 그 사나이가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제문과 해효는 마치 거울처럼 서로의 모습을 비추고 있으며, 엄혹한 세상 속에서 윤동주 시인이 떠올렸던, 찰나이자 영겁처럼 느껴지는 사랑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사랑의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현실의 시공간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어린아이 같은 상태로 후쿠오카를 배회한다. 두 사람, 어쩌면 한 사람의 의식 속에 존재할 사랑의 전당은 앞과 뒤가 이어진 띠처럼 모든 것이 되돌아오고, 사라졌던 것이 홀연히 다시 나타나는 그런 꿈과 같은 곳이다. 현실의 시간과 공간이 의미를 잃고, 모든 것이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되는 곳. 영화의 전개에 따라 후쿠오카는 현실의 지리적 공간이 아닌 모두의 의식 속에 데자뷔처럼 존재하는 공간이 된다. <후쿠오카>는 인물 중심의 긴 테이크에 집중하는 표류하는 내러티브와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과거에 대한 느린 폭로라는 점에서 장률의 전작들과 유사하다. 장률의 모든 영화는 장소가 주는 영감, 인상에 기초하고 있고 장소의 성질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그의 접근방식을 구체화한 인물이 소담이다. 소담은 자신이 다국어를 구사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중국의 고전 소설 ‘금병매’를 들먹인다. 후쿠오카의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에펠탑을 닮은 소담의 가방을 비롯해 곳곳에서 상징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낯선 장소의 맥락 속에서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과 기승전결을 통해 과거에 대한 실마리가 서서히 드러난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 곁에 있는 존재들, 기원과 역사를 추정하기 힘든 저 존재들의 현신인 소담은 유령이다. 유령적 존재들의 만남을 서사화한 영화의 마지막 신은 다시 헌책방으로 돌아온다. 홀로 낮잠을 자던 제문에게 소담이 말을 걸었던 그 어둑한 책방은 영화의 시작을 열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후쿠오카에서 소담이 건 전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책방에는 제문과 해효가 각기 따로 떨어져 구석 자리에 앉아있다. 이제 그 책방에서 소담은 사라지고, 남겨진 사람은 제문과 해효다. 두 사람이자 한 사람인 이 어리석은 사랑의 포로는 인간의 뇌를 닮은 듯 구불구불하고 미로 같은 책방, 마치 달처럼 보이는 둥근 조명 불빛 속에 어슴프레 남겨져 있다. <후쿠오카>는 장률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종종 드러났던 꿈의 시공간을 본격적으로 유영하는 작품이며, 어쩔 수 없이 과거 지향적인, 관념 속에 존재하는 ‘사랑’이라는 주제가 왜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지 탐색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돌아갈 수 없지만 결코 벗어날 수도 없는 ‘사랑’ 이야기는 인간사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자 예술 작품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후쿠오카>는 순수하게 돌아보고 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 괴물 >(2006)은 서울 도심의 한강에서 거대한 돌연변이 생물이 나타나 사람들이 붐비는 공원을 날뛰다가 여중생을 꼬리에 움켜쥐고 납치하는 기둥 설정 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장르에 대한 성공적인 전복의 사례인 < 살인의 추억 >(2003)과 마찬가지로 장르의 꼴을 갖추고 있는 <괴물>에서 봉준호는 괴수영화의 관습을 이용하여 현대 한국의 사회, 정치적 현실을 다룬다. 미군 기지를 발원지로 하는 환경 사고의 산물인 괴물은 미국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쉽게 읽히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더 복잡한 그림이 드러난다. 납치된 소녀 현서(고아성)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경제 기적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박씨 집안의 구성원이다. 현서의 가족은 느리지만 헌신적인 아버지 강두(송강호)와 강변 매점을 강두와 함께 운영하는 할아버지 희봉(변희봉)으로 구성돼 있다. 결정적인 순간 얼어붙는 버릇이 있는 양궁 선수 이모 남주(배두나)와 한때 급진주의자였으나 지금은 실직한 주정뱅이인 삼촌 남일(박해일)도 있다. 국가는 이 가족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괴물의 공격이 있은 후 정부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숙주라며 가족을 비롯한 괴물과 접촉한 모든 사람을 격리한다. 하지만 강두는 괴물에게 납치당한 뒤 한강을 따라 배치된 미로 같은 하수구에서 노숙자 소년과 함께 숨죽이고 있는 현서의 전화를 받는다. 박씨 가족 일행은 아둔한 병원의 통제 시스템을 벗어나 현서를 찾기 위한 자경단의 여정을 시작한다. <괴물>은 장르와 양가적 관계를 구현한다. 봉준호는 괴수 장르의 발전 도상위에서 자신의 영화를 할리우드와 더 밀착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괴물의 충격적이고 갑작스러운 등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위기에 처한 여러 인물들의 예상치 못한 용감한 행동으로 절정에 이르는 고전 괴수영화의 시각적, 서사적 관습을 따른다. 스토리는 전국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무대, 즉 수도 서울의 상징인 한강변을 배경으로 한다. 시각효과 스튜디오 오퍼니지와 협력한 할리우드 수준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퀄리티 이면에 놓인 봉준호의 야심은 괴수영화와 슬랩스틱 코미디의 관습이 충돌하는 장르의 미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노란색 방호복을 입은 방역 요원이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강두에게 총알이 한 발 남았다는 말을 들은 희봉이 아들이 총알의 수를 잘못 세었다는 것을 깨닫고 괴물에게 최후를 맞는 장면 등에서 이런 충돌이 가시화된다. 봉준호는 괴물의 실체를 초반에 드러내거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괴물의 입에서 빠져나온 현서가 가족의 간청에 화답하지 않고 비극을 맞이하는 가슴 아픈 장면 등에서 할리우드 주류 장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장르의 관습을 전복한다. 봉준호는 장르 관습의 조각들을 한국적 문맥에 맞게 배열하는, <살인의 추억>에서 시작한 연출 전략을 이어간다. 가장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 중 하나는 클라이맥스, 거리 시위대와 진압 경찰이 격렬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강두의 가족들이 한강변의 노숙자(윤제문)와 함께 괴물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는 신이다. 정치적인 함의가 강력하게 폭발하는 이 장면에서 노숙자는 남일이 배낭을 벗어 던지고 불타는 화염병을 던질 준비를 하는 동안 괴물의 목구멍에 휘발유를 붓고 병이 손에서 미끄러져 발밑에 부딪히자 놀란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때 남주가 활을 들고 나타나 절묘한 타이밍에 화염이 이는 화살을 괴물의 입을 향해 발사하고 강두는 쇠파이프로 괴수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이 장면이 강렬한 이유는 할리우드의 장르 관습과 한국의 역사적 현실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불덩어리가 되어 쓰러지는 괴물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은 괴수 영화의 전형적인 관습 아래 있다. 괴물을 처단하는 공격의 수단은 너무나 한국적이다. 배낭을 멘 청년이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은 민주화시대를 통과한 한국인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선명한 도상은 1980년대 민주화 시위부터 2000년대 초반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한 미선이, 효순이 사건, 세계화 및 자유무역 반대 시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젊은이들이 참여했던 20여 년간의 거리 시위를 환기한다. 이러한 시위 중 상당수가 억압적인 군사정권을 지지하거나 점령군의 부당한 지위를 남용하고, 신(新) 자유주의 경제 의제를 추진한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저류에는 뚜렷한 반미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활과 화살을 든 남주의 이미지에는 한국의 여성 양궁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싹쓸이해 온 국가적 색채도 담겨 있다. 괴물과 미국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이 장면들은 글로벌한 미국인-타자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치적 주장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것은 노숙자, 실직자, 정치적 액티비스트, 삼류 운동선수 등 사회적, 경제적 주변성과 실패한 인물들을 통해 한국성을 표현하려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봉준호는 국가의 대리인이 아닌 이들을 도덕적으로 정당한 한국성의 구현으로 지지한다. 범죄 드라마가 아닌 괴수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표면적 범죄와 심층적 범죄라는 <살인의 추억>의 구조를 이어받는다. 납치와 실종의 상황은 <괴물>에서 반복되는데 괴물은 내러티브에 구조를 부여하는 장치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초점은 아니며 실제로 괴물은 플롯이 전개되는 동안 점차적으로 중요성을 상실한다. 흥미로운 것은 대도시의 표면 아래 숨겨진 현서를 찾는 가족의 여정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자리한 범죄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박씨 일가가 관료 조직과 자본에 얼키고 설키면서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의 상징물인 한강 다리 아래를 전전할 때 그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고 그저 경멸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부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존재에 대해 거짓을 말하고, 경찰은 현서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병원은 현서를 찾기 위해 격리를 해제하지 않으며, 강변을 소독하는 방역 요원들은 쉽게 뇌물에 굴복한다. 남일은 급진주의 액티비스트 시절의 정치적 이상을 고액 연봉과 교환한 친구 뚱게바라(임필성)에게 배신을 당한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경제적 성공을 연상시키는 고층 빌딩 꼭대기에 있는 통신회사 사무실에서 뚱게바라는 휴대폰 추적을 통해 현서의 위치를 찾아내지만 카드빚을 갚기 위한 신고 포상금을 노리고 경찰에 남일을 신고한다. 이러저러한 삽화들을 통해 봉준호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환상을 야유하고 경제적 기적을 돌연변이 괴물로 재탄생시켜 근대화를 얻기 위해 지불한 사회적, 도덕적 비용의 크기를 가늠하고자 한다. <괴물>이 폭로하고자 하는 가장 높은 단계의 범죄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이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프롤로그는 돌연변이 생물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 장면은 주한미군 사령부이자 서울 중심에 위치한 용산 미군기지(이곳 근처에 현재 한국 정부가 터를 잡았다는 사실도 기이한 반향을 불러온다)의 영안실을 배경으로 한다. 미국인 영안실 의사가 한국인 부하 직원에게 포름알데히드 병을 하수구에 버리라고 명령하고, 소극적으로 항의하던 부하는 이내 순순히 복종하여 수백 병의 독극물을 싱크대에 쏟아 붓는다. 이 장면은 고전 공포영화의 클리셰인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더 미묘한 공포는 부하가 미친 과학자의 명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불안을 조성하는 이 장면은 자국민에 극도로 해로울 수 있는 범죄를 종용하는 미국의 명령에 순응하는 한국 정부의 종속성을 재현한다. 한 병원 장면에서 기괴한 방호복을 입은 미국 관리가 한국인 의사에게 강두의 뇌를 뚫으라고 명령하는데 이 가학적이고 비논리적인 행위를 한국인 의사는 묵묵히 수행한다. 이와 같은 장면들은 괴물이 자연이나 과학, 심지어 미국의 군사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종이라는 정치적 태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주장한다. 괴물을 만드는 것은 미국인 영안실 의사가 아니라 한국인 조수이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인 ‘숙주’는 미국에 기생하는 한국의 지위를 가리키면서 심오한 범죄의 본질을 암시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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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 시실리 2km > 명장면’이란 검색어를 넣어보자. 임창정 과 우현 이 ‘나이’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창정이 연기한 양이가 우현이 맡은 조직의 막내 해주에게 나이를 묻는다. 해주는 ‘개띠’라고만 말한다. 양이는 그를 1982년생, 1970년생으로 추측하다가 둘 다 아니라는 말에 “앞으로 나에게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화를 낸다. 해주는 “왜요?”라고 묻는데, 이때 양이는 “그럼 니가 94냐?”라며 신경질을 부린다. 흘리듯 들리는 이 대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우현의 얼굴 때문에 꽤 웃기다. '성숙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나이’를 연결 짓는 이런 유머는 <시실리 2km>를 연출했던 신정원 감독의 신작 <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 >에서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이번에도 ‘94년생’이 언급된다.) 이 장면에서 피식 웃고 나서야 새삼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이 꽤 오랜만에 보는 신정원 감독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목부터가 신정원 감독의 전작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서 ‘죽어도 죽지 않는다’란 설정은 기괴한 긴장감과 웃음을 터트린다. 엄청난 신체 능력을 가진 외계인이 그런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인간도 그런다. 언뜻 별 특이할 게 없어 보이는 설정이다. 그런데 신정원 감독의 영화에서는 죽여도 죽지 않는 인간이 딱히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가 왜 죽지 않았는가를 아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특별한 설정이 된다. <시실리 2km>에서 권오중 이 연기한 석태가 겪는 ‘죽음의 연대기’를 돌이켜보자. 변기에 뒤통수를 부딪혀 쓰러진 그를 모두가 죽은 줄 안다. 그런데 안 죽어서 삽으로 쳤더니 쓰러졌길래 또 죽은 줄 알았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그는 애타게 구조신호를 보내는데, 하필 머리에 못이 박혀서 또 죽은 줄 알았다. 이번에는 땅에 묻었는데, 그래도 그는 살아난다. 어디에도 그가 왜 죽지 않았는 가란 설명은 없고, 관객도 그걸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지 석태의 끈질긴 생명력과 그보다 더 끈질긴 불운이 <시실리 2km>의 웃음을 이끄는 리듬이었을 뿐이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서 죽지 않는 인간의 불운은 인공지능 스피커와 스타일러 덕분에 더 밀도 높은 긴장감과 웃음을 주고 있다. 신정원 감독의 영화가 가진 또 다른 특징은 관객의 예상과 상관없이 ‘불쑥’ 등장하는 순간들이다. <시실리 2km>에서 귀신이 된 송이( 임은경 )가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르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서트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로는 < 차우 >에서는 포수 천일만( 장항선 )이 가른 멧돼지의 배에서 커피믹스 봉지가 나오는 장면을 최고로 꼽는다. 백만배( 윤제문 )가 자신의 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또 백만배가 변수련( 정유미 )과 우유와 연양갱 등을 나눠 먹는 장면 등이 모두 딱히 이야기의 흐름과는 상관없지만, 키득거리게 되는 장면이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도 이런 순간은 곳곳에 있다. 죽은 연인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뜬금없이 흘러나오는 ‘<모래시계> 혜린의 테마’, 주인공 남편의 쉬지 않는 여성 편력을 설명하다가 등장하는 ‘3만 원어치의 경유를 마시는 장면’, 잠시 기억을 잃은 인물이 반복하는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요?’란 대사. 정교한 계산으로는 배치할 수 없는, 그저 ‘어쩌다 하필 그 자리에 놓여 있다’고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이 신정원 감독이 영화가 가진 개성이다. 종합하자면, 신정원 감독의 영화는 너무 뻔뻔해서 뻔뻔하다고 지적할 생각조차 나지 않는 뻔뻔함의 영화다. <시실리 2km>에 나온 마을 주민들의 캐릭터와 흡사하다고 할까?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치기’ 위해 일부러 라면 국물을 들이켰던 그들의 모습처럼 신정원 감독의 영화에서는 가장 뻔뻔한 순간에 가장 크게 웃을 수 있다. 그래서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의 아쉬운 부분 또한 ‘뻔뻔하지 못한’ 순간들이다. 외계인의 존재 이유와 그들의 목적을 설명하는 ‘지구 외 생명체 검역 관리소’ 같은 설정이 꼭 필요했을까? 왜 굳이 그들을 등장시켜 외계인과의 한 판 액션을 벌이게 했을까? <차우>에서 ‘백백교’ 교주의 죽음을 멧돼지와 연결시켰던 것처럼,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도 더 뻔뻔하게 외계인을 이용했다면 어땠을지. 그랬다면 <시실리 2km>와 <차우>를 보았던 그때처럼 웃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