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의 잿빛고백
- 감독
- 이필립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은빛, 정선경, 이수민
1. 이 영화는 단 한 명의 인물만 등장하는 영화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해역에 위치한 세이블 섬에서 40여 년간 살아온 환경보호 활동가 조이 루커스가 그 주인공이다.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시절 이 작은 모래섬의 흑백 사진을 보고 매료된 루커스는 1974년 세이블 섬의 바다표범을 연구하는 팀에 자원해 현장 보조원 겸 요리사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후 유실되어가는 사구를 복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섬과 육지를 오가다, 1982년부터는 아예 거처를 옮겨 대부분의 시간을 섬에서 보내게 된다. 루커스는 섬의 생활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동료들이 모두 철수한 뒤에도 혼자 남아 세이블 섬의 거주자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루커스의 일상은 여러가지 반복적인 일들로 채워져 있다. 파도에 쓸려온 해양쓰레기를 수집해 분류하고, 동물의 똥에 든 이물질의 성분을 분석하고, 죽은 말의 발굽이나 곤충의 표본을 채집해 박물관에 보내기도 한다. 섬에는 500여 마리의 야생마가 서식하고 있는데, 루커스는 야생마들을 구분하려고 공책에다 말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다. 그려 넣고 보니 얼굴이 모두 달랐다. 이름 없는 야생마들이지만, 이들은 루커스의 공책 속에서 하나하나 고유한 개체로 호명된다. 공들여 관찰하고 기록한 덕분에, 섬의 말이 없어지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어느 구역으로 이동했는지, 왜 이동했는지도. 성큼성큼 거닐며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는 루커스의 행동은 마치 손바닥 속을 헤아리듯 섬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연, 무모한 도전들로 이루어진 낮, 낮이 물러간 뒤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외로운 밤, 고립을 자처하기 위해 포기해야 했을 삶의 또 다른 부분들. 그러나 영화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한 회고 또한 생략한다. 조이 루커스는 그저 과거의 어느 날 섬에 당도했고, 섬에 적응하며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내가 첫 문단에 쓴 내용들도 대부분 나중에 구글링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사실 카메라가 호기심을 가지고 비추는 것은 인물의 생애나 환경보전의 당위적 서사보다는 섬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순간들, 루커스의 손이 빚어내는 일상의 이미지들이다. 이를테면 햇살 좋은 날 창문에 걸어 놓은, 쓰레기 조각들로 만든 예쁜 모빌 같은 것. 2.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쓰레기에 관한 영화다. 세이블 섬의 해안으로는 매일 수많은 쓰레기가 파도에 실려온다. 루커스는 해변에 나가 수거해온 쓰레기를 깨끗이 씻고 햇볕에 말려 종류별, 소재별, 브랜드별, 색깔별로 분류한다. 루커스가 수행하는 연구는 북대서양에 떠 있는 이 외딴 섬의 느리고 미세한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먼 곳에서부터 해안가로 밀려오는 자본주의적 삶의 파편들을 관찰하고 집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무풍선에 인쇄된 이름과 문구, 깡통과 플라스틱 뚜껑 따위에 달린 라벨, 각종 파티 및 행사의 흔적과 평범한 가정의 소비 품목들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색깔과 소재가 유행하고 있고, 어떤 단어가 지갑을 열게 만들며, 무엇이 사람들을 즐겁게 또는 슬프게 만드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해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김지혜 환경과학연구자의 논문 「해양쓰레기와 함께 세계 짓기」를 읽으면서 다시금 < 고독의 지리학 >이 내게 남긴 파문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최근의 해양쓰레기 연구는 해양쓰레기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없애야 할 문제적 사물 혹은 단순한 골칫거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삶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인류세 이후의 이 ‘얽혀 있는 삶’ 속에서, 인간은 인간 이외의 것들과 작든 크든 혼종의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세계가 바다로 연결되어 있기에 해양쓰레기가 특정 지역의 문제일 수 없듯이, 세이블이라는 작은 영토 위에서도 생명체들은 잎맥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식물 모두가 플라스틱 쓰레기, 유출된 석유, 침식작용과 같은 지형의 변화와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조이 루커스도 이제 그 일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섬에 흘러 들어왔다가 섬과 함께 나이가 들어 어느새 할머니가 된 그의 머리칼은 바람에 나부끼는 섬의 억새와 똑같은 은빛이다. 어떤 장면들은 아무 대사도 없이 그저 이 은빛의 일렁임과 반짝임만을 담고 있다. 바람과 태양은 섬 안의 모든 것에 공평한 손길을 준다. 화면이 한 컷 한 컷 넘어갈 때마다 섬이 살아 숨쉬는 하나의 생태계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 보인다. 죽은 말의 몸 위로 바람이 분다. 루커스가 그 사체를 해변에 묻어준다. 그러면 토양으로부터 양분을 얻어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그 풀을 또 다른 말이 뜯어먹는다. 영화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드러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들리게 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 딱정벌레가 걸어가는 소리. 달팽이가 기어가는 소리. 평소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사실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던 그 소리들이 ‘영화음악’의 지위를 부여받고 무대에 오른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소리를 작곡한 것은 달팽이라는, 그 귀엽고도 엄연한 사실. 카메라는 섬 위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소중하게 담는다. 그러니 이 영화에 한 사람만 등장한다는 말은 고쳐 쓸 필요가 있다. 해초, 달팽이, 회색 바다표범, 수달, 박쥐, 야생마, 야생마의 똥, 잔디, 언덕, 해안의 모래알, 어둠이 내리면 검은 모래 장판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별들, 그리고 삶과 죽음, 모든 것의 순환을 품고 있는, 언젠가는 그 자신도 흔적으로 돌아갈 모래섬. 이들 모두가 이 섬의 주인이고,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3.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오물을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라 불렀다고 한다. 쓰레기란 그 형태와 성질이 그대로이더라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거나 함께여야 할 존재들과 함께 있지 않는 순간부터 쓰레기로 규정되는, 이질적인 상태의 사물인 것이다. 그런데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이 루커스 역시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다. 멀쩡한 대학 시간 강사 일까지 그만두고 혈혈단신 섬으로 들어가 평생을 모래 위의 동식물들과 함께 보낸다는 게 평범한 삶의 경로는 아닐 테니 말이다. 이상하게도 지난해 본 영화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에 관한 영화가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사로잡힌 사람. 무언가에 천착하다 못해 그 대상에 자신의 삶이 거의 겹쳐지다시피 한 사람. 이를테면 얼어붙은 설산으로 돌진하다 실종된 사람(알피니스트: 마크-앙드레 르클렉), 또는 폭발하는 용암을 쫓아다니다 화산재에 뒤덮여 죽은 사람(불 속의 연인: 카티아와 모리스 크래프트를 위한 진혼곡). 빙벽, 설산, 파도, 용암, 번개에 대한 제어할 수 없는 매혹은 사실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거나 대단히 위용 넘치는 경관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세이블 섬에서도 나는 비슷한 종류의 이끌림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죽음이라고 하는, 언어로 내뱉고 나면 너무나 간단해지고 마는, 우리 삶에 내재한 비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침식작용 같은 것을, 짐작건대 루커스는 섬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홀리듯이, 혹은 저항하듯이, 그 세계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영화에서 두 개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대비 또한 인상적이다. 해안 가까이에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순환 속에 계속해서 새롭게 나타나는 인공물질과 분해 불가능한 플라스틱들이 있다면, 섬 안쪽에는 시간의 비질을 고스란히 받으며 천천히 소멸해가는 사물이 있다. 루커스가 정착 초기에 나무를 잘라 짓고 그 안에서 살았던 옛집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낡고 거의 무너져내려 지금은 뼈대만 남은 쇠락한 풍경이 되었다. 폐허를 훑는 카메라의 시선에 몇 줄기의 바람이 걸린다. 텅 빈 집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바람은 말없는 증언자, ‘문명’이라는 세계 또한 유한하다는 사실을 이따금 상기시켜주는 존재 같다. 세이블 섬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영화란 그런 것 아닐까? 언젠가는 소멸할 무언가를 붙잡아 기록하겠다는 환상. 그 진심. 4. 그래서 다시 쓰자면, 이 영화는 시선에 관한 영화다. <고독의 지리학>을 한평생 환경 보존에 헌신한 여성의 이야기로 읽으면 영화는 아주 건전한 두 시간짜리 자연(혹은 인물) 다큐멘터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매혹당한 두 인간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편이 더 좋다. 그러면 이 고요한 산책과도 같은 시간 속에 소리없이 들끓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또한 보인다. 러닝타임 내내 화면에는 루커스의 앞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최대한 조용히 뒤를 따를 뿐 앞지르거나 섣불리 말을 걸어 돌려세우지 않는다. 그러다 딱 한 번 정면으로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이 있다. 루커스가 아직 20대였던 시절, 누군가의 캠코더로 촬영된 과거의 한 순간이다. 모래가 유실되어가는 섬을 지켜야 한다며 열정적으로 발언을 하던 젊은 루커스는 인터뷰어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잠시 카메라를 응시하다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섬을 사랑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장면이 있다. <고독의 지리학>이 전주영화제에서 국내 첫 상영되었을 때, 영화가 시작하기 전 젊은 여성의 얼굴이 스크린에 떴다. 재클린 밀스 감독이 보내온 인사 영상이었다. 감독은 말했다. “이 영화는 정말 애정으로 만든 작업입니다.” 두 개의 하릴없는 고백을 지구 반대편에서 수십 명이 컴컴한 동굴에 모여 앉아 지켜보고 있는 광경. 그건 확실히 조금 이상한 감동이었다. 재클린 밀스 감독은 네 살 때 뉴스를 보고 루커스와 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들을 담은 영화를 일평생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볼 때마다 매혹 그 자체만이 아니라, 매혹당한 사람에게 매혹당한, 기록자의 생에 대해서도 곱씹어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부지런히 쫓고 수집하고 잘라서 정성스레 이어붙이는 작업에 대해서. 직접 돌진하는 대신에, 몇 겹의 렌즈와 필터와 녹음기를 경유해 이 불가해한 세상을 대면하고 이해하려 하는 삶의 한 방식과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앞에 선 한 무리의 ‘우리’에 대해서. 여기에 이르면 <고독의 지리학>이라는 난해한 제목도 모종의 설득력을 얻는다. 고독은 외따로 떨어진 홀로의 감각이고 전혀 지리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 감각과 조우한 영화는 필연적으로 어딘가로 향한다. 섬을 구석구석 훑고, 섬을 한 바퀴 돌고, 이윽고 섬을 떠나, 스크린의 표면을 뚫고, 영화의 바깥으로 기나긴 별자리를 만든다. 그 허구의 지표 위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사람은 별자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의 점들은 이상하게도 전혀 고독하지가 않은 것이다.
전투기 편대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화면을 횡으로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비행기의 놀라운 속도감은 꼬리의 연기로 배가된다. 자욱한 운해가 화면을 송두리째 채우고 있다. 은빛 동체의 전투기들 저 아래로 지상은 까마득하게 검붉은 지형으로 보인다. 동체에 선명히 찍혀 있는 ‘R(epublic).O(f).K(orea). AIR FORCE’. ‘대한민국 공군’의 위용을 자랑하며 세 대씩 삼각편대를 구성한 9대의 비행기가 화면의 전방으로 날아 들어와, 가로질러 후방으로 빠져나갈 때 속도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공기와의 마찰음 사운드가 이를 청각적으로 확장시킨다. 그 위에 울려 퍼지는 주제가.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이 경쾌한 행진곡풍의 주제가는 곧 대한민국 공군의 공식 군가로 채택될 터이다. < 빨간 마후라 >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 순간의 신상옥의 야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성공한 색채 공중촬영”, “속도감 있고 박력 넘치는” 화면이라는 1964년 당시 <빨간 마후라>에 부여되었던 평가는 정말로 이 영화의 모든 것으로 보인다. 신상옥 은 한국 전쟁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에서 전혀 새로운 공중촬영을 위해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가용자원을 동원한 것 같다(참고로 공군을 소재로 한 최초의 한국영화는 1954년 홍성기 가 감독한 영화 < 출격명령 >이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공군 파일럿이라는 삼각관계의 멜로드라마와 전우애를 그리고 있는 이 영화에서 공중촬영은 아직 시도되지 못하고 있었다.) 공군의 전면적인 지원으로 공중촬영을 달성해내고 있는 이 영화는 당시 일반적인 영화 한 편당 사용되던 필름 양의 무려 4배에 해당하는 8만 자를 사용하였으며(이중 절반이 생소한 공중촬영의 ‘시험’ 촬영에 소용되었다), 특별히 10배 줌 렌즈가 사용되었고, 고속촬영을 위해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고속촬영기를 빌려왔다. 이로써 < 성춘향 >(1961) 이래 컬러 시네마스코프라는 당대의 영화적 세계표준시를 성공적으로 시험하고 있던 이 테크놀로지스트는 비행기라는 대상이 보여주는 속도와 높이를 화면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과연 <빨간 마후라>가 선사하는 것은 칼라 시네마스코프 공중촬영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시각적 쾌감이다. 화면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아찔한 활공. 그것들은 종종 급강하하며 폭탄을 투척하고 다시 떠오르는데, 정찰기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된 이 장면들은 비행기-카메라와 대상인 전투기의 속도라는 이중의 움직임-속도 속에서 놀라운 쾌감을 선사한다. 속도와 높이를 탑재한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사물들이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지상의 대공포가 하늘을 향하여 포탄을 발사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간단하게 지상의 사람과 사물들을 제압한다. 덧붙이자면 신상옥은 한국전에서 한국 공군의 활약상을 그려내는 이 영화에서 소위 역사적 고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영화의 전투기는 F-86이고, 클라이막스에서는 미그기와의 공중전이 감행된다. 실제로 F-86 제트기는 한국전 당시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였으며(한국 공군의 주력은 P-51 머스탱. F-86은 전쟁 이후 3년이 지나서 한국 공군에 도입되었다), 한국 공군의 인적 물적 자원하에서 공중전은 불가능했다. 참고로 고지전으로 상징되는 지상의 지리한 공방전과 별개로 한국전에서 미군은 전쟁 초기부터 단 한 번도 제공권을 상실한 적이 없었다. 승패의 불확정, 휴전으로 잠정 종결된 이 전쟁을 다루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부분이 미공군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일정 부분 이로부터 기인한다. 즉, 공군 표상 속에서 이 전쟁의 이미지는 승리로 어필될 수 있었다. 1964년의 시점에 보여지는, 한국전 당시 F-86을 타고 지상 폭격과 공중전을 치러내는 대한민국 공군이라는 이 ‘소망적’ 형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백해 보인다. 그것은 한국전 당시 미공군이 수행하던 역할을 한국 공군으로 치환시킴으로써, 강력한 (동시에) 현대적인 대한민국의 남성성을 과시한다. 그런데, 이 명백한 표상 전략은 한국 전쟁영화라는 맥락 속에서 조금 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에서 미군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전략은 1961년 < 5인의 해병 >(김기덕)이 한국전쟁을 다룬 최초의 전쟁영화로 자리매김한 이래 한국 전쟁영화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법으로 제시되었다.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오롯이 한국군의 힘으로 내부를 지켜내는 이 문법을 통하여 한국 전쟁영화는 전쟁영화의 본원적인 정치성을 노골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적과 동지를 가르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슈미트) 위에서 어떻게 내부의 공동체를 창출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 한편, 이 공동체를 위해 죽어간 자들의 희생을 상기시킴으로써 구체적이고 심정적인 결속으로 나아가는 애도의 공동체 형성과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빨간 마후라> 이전의 두 편의 성공적인 한국 전쟁영화 <5인의 해병>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은 ‘한국군’과 ‘희생’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하여 대한민국이 어떻게 한국전쟁을 이 정치공동체의 원천적 장소로서 내러티브화하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을 한국군‘만’의 전쟁으로 부각시킬 때, 현재의 이 국가가 이들의 죽음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를 공고히 하고자 할 때 여기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필연적인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 전쟁이 ‘내전’인 한에 있어서 제기되는 적의 이중성과 관련된 문제. 그러니까 이 적은 적이자 또한 ‘형제’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바로 이 문제와 직면했다. 인민군의 양민학살 ‘이후’로부터 시작하는 (그럼으로 인민군의 형상을 비껴가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적의 자리에 중국군을 둠으로써 내전이 야기하는 심리적 딜레마를 해소하고자 한다. 산등성이를 가득 메운 중국군이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며 벌판으로 밀려 내려온다. 롱 숏의 사이즈는 이들을 절대다수의 숫자로만 인식하도록 만든다. 참호 속 아군의 맹렬한 사격으로 달려오는 적들은 번번히 쓰러지지만 저 숫자를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에서 감지되는 것은 보병적 전투의 무력감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죽음들은 <5인의 해병>의 희생 서사를 반복하며, 동일한 공동체의 활성화에 기여하지만 저 쉴 새 없이 밀려들어오는 적을 상대로 한 전투의 무력감은 <5인의 해병>과 달리 이 희생에 기초한 그 어떤 승리의 예감도 봉쇄시키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이를 상쇄시킬 것인가? 1964년의 <빨간 마후라>는 이 순간 한국 전쟁영화가 봉착한 문제에 대한 아마도 가장 ‘탁월한’ 답변으로 보인다. 앞질러 말하자면 그것은 오로지 이 영화가 공군의 영화, 폭격기 조종사의 시점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보병의 무력감은 지상을 향한 공중에서의 폭격이라는 절대적인 위치의 비대칭성을 통하여 상쇄된다. 비행기가 점유하는 고공의, 속도를 동반한 시선. 이 속도와 높이 속에서 보병적 감각의 무력감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속도와 높이는 필연적으로 사람과 사물의 고유성의 상실이라고 할만한 것을 동반하는 것이다. 시선의 위치는 너무나 높고, 너무나 빨라서 저 아래 있는 사물들은, 사람들은 거의 분간되지 않는다. 사물들과 사람들이 그 개별성을 상실할 때, 그것이 그저 추상적인 덩어리로 인식될 때 감정은 얼마나 이입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를, 혹은 그녀를 분간할 수 있는가? 그 혹은 그녀의 얼굴을, 몸을 볼 수 있는가? 만약 볼 수 없다면 당신에게 그 혹은 그녀의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미를 갖는가, 혹은 그저 무의미한 덩어리에 불과할 뿐인가? 오늘 ‘괴뢰군’이 숨어있는 자신의 고향을 폭격한 조종사는 폭격을 당한 자들 중에 당신의 친척이, 아는 자들이 있지는 않겠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모르죠, 있었는지도.” <빨간 마후라>가 내전이 야기한 그 어떤 심리적 얼룩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조종사의 대답은 그 어떤 과장도 없이 솔직하고 담백한 것이다. 그의 위치에서 지상의 얼굴들이란 이미 식별 불가능하다. 이 순간 적의 얼굴을 둘러싼 딜레마는 원천적으로 해소된다. 그리고 곧이어 조종사는 이 냉담함을 통해 더 높은 사명으로 가닿는다. “그러나 저는 슬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슬퍼하기 전에 이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찌 되든 싸움에 이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빨간 마후라>는 한국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그 어떤 영화보다 밝고 명랑하다. 슬픔도, 탄식도, 체념도 없는 이 세계는 누군가의 언급처럼 거의 ‘찬란’해 보일 지경이다. 그것은 ‘모르죠’라는 저 언급이 보여주고 있는바, 얼굴, 개별성, 구체성의 상실을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구현해낸 스펙터클의 핵심일 것이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내전인 한에 있어서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심리적 부하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영화이다. 그것은 오직 하늘을 나는 자의 시선을 획득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이 시선은 조망하는 시선이자, 편재하는 시선이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자는 빠른 속도와 높이를 획득한다. 높이 속에서 사물들과 사람들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그것은 그저 지형이 된다. 속도 속에서 사물들과 사람들은 빠르게, 거의 순식간에 뒤로 밀려가며 사라진다. 비행기에서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무정한’ 시선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 시선을 획득한 순간 이 영화는 1960년대의 한국 전쟁영화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냉전 아시아의 문화장이라고 할만한 곳에서 통용가능한 이미지-상품으로 기능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빨간 마후라>는 대만에서 거의 붐이라 할만한 현상을 만들어냈고(신상옥에 따르면 대만 국책영화를 이끌었던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은 그에게 이런 영화를 한 편 만들어줄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홍콩, 싱가폴, 태국 등지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둬들였으며, 일본 극장(쇼치쿠 계열)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첫 번째 한국영화로 기록되었다.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가 이룩해낸 공중전 스펙터클의 기념비적 이미지는 냉전 아시아에서 통용되는 시각적 보편성의 한 전형이 되었다. 이 지점이 <빨간 마후라>가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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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을 찍는다는 것 “하스미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실 최근에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요. 숏을 찍을 때, 한 컷을 찍을 때 어느 정도의 힘을 들이는 게 좋을까 하는 겁니다. (중략) 영화는 숏이 생명이지요. 제가 가진 기술이란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 외에 제가 잘하는 게 없는 거죠. 그렇지만 숏으로 어디까지 승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에요.” “열심히 숏을 찍으려는 노력은 어디까지 전달될까요.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채로 두는 게 좋은 건지, 억지로라도 알아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은 건지 항상 고민됩니다.” 올해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인 『영화 장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책은 일본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와 그의 제자이자 일본 영화계의 작가주의를 대변하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그리고 아오야마 신지가 나누는 긴 대담집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일본 영화 내 영향력은 대단했다. 70-80년대 그가 대학에 개설해 강의했던 “영화 표현론”은 영화를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고, 그의 평문들은 젊은 영화광들에게 거의 교본처럼 낭독되었다(심지어 그의 글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당시 이 수업을 통해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가 영화계로 입문하였다. (나는 이 두 감독에게 도대체 하스미 시게히코의 강의 방식과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열광했는지 물은 바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쇼트를 발견하고 그것이 어떻게 영화 속에 구축되는지, 그 구성원리를 발견했던 방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최근에 만났던 구로사와 기요시 역시 쇼트의 원리에 관해 이야기 했다. 경제적이고 기술적으로 가능한 쇼트를 통해 영화의 의미와 형식을 축적해 나가는 방법들, 그것은 그가 현재 일본 대학에서 영화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영화 장화』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담은 때론 당혹스러우리만치 담대하고 솔직하다. 그들이 존경해마지않는 감독과 작품들에 대해서는 찬탄과 동경을 쏟아내지만, 반면 그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영화와 감독들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과 조소를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에 관한 날카로운 시선과 언어들을 가진 이들의 거침없는 이 대화는 오래전, 스승과 제자로 만나 긴 시간을 함께해온 이들이 나눌 수 있는 아주 사적이고 주관적인 취향의 고백이자, 이론과 현장을 넘나들며 체화되고 정립된 영화 존재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들, 변화하는 영화의 위상과 환경에 대한 불안과 매혹을 모두 포함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다 불현듯, 가장 겸손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자신의 오랜 스승에게 새삼 진지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쇼트를 만든다는 것.” 무려 사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들고 고민해왔던 세계적인 거장에게도 영화는 여전히 변화와 질문으로 가득 찬 모호한 대상인 것이다. 숏을 찍을 수 있는 자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를 당연히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고 칭한다. 단순히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컷들이 아니라, 의미와 형식을 갖춘 가장 영화적인 언어를 구축할 수 있는 예술가인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는 분명 그만의 언어와 모드가 존재한다. 설혹 크레딧을 보지 않고 마주하게 된 영상이라 할지라도, 보는 순간 ‘기요시의 영화구나, 내적 불안과 위기를 파고드는 기묘한 세계가 곧 시작되는구나’를 알아보게 하는 그런 영화적인 언어들이 있다. 웨스 크레이븐 감독이 영화관 체험을 어둠과 빛이 교차하며 시작되는 부두교 주술사의 환각적 제의에 비유하듯(영화관에 드리워진 어둠 사이로 스크린에 빛이 투사되는 순간, 부두교 주술사의 제의가 시작될 때 비현실적 사태를 기대하는 참여자의 흥분이 시작되는 것과 흡사하다고 비유하는 것),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는 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는 묘한 매혹과 설렘, 긴장과 공포를 수반한다. <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予兆 散歩する侵略者 劇場版>(2017)의 오프닝도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 하스미 시게히코와 구로사와 기요시의 표현대로 ‘숏을 찍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붉은빛의 철제 안전망이 둘러진 공동주택의 현관 앞 계단. 안전망 저편으로는 도시 외곽의 주택들이 보이고, 이내 한 여성이 계단을 올라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측면으로 비춘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는 것. 기요시 영화에서 ‘문이 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만지는 행위’(접촉)와 더불어 가장 큰 사건의 추동 행위로 쓰인다) 다음 컷은 현관 입구에 놓인 켤레의 남성 구두, 그리고 조금 전 실내로 들어선 그녀의 발과 다리.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영화 속 여성은 남성 신발을 통해 집안에 남편이 귀가해 와 있음을 알아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의 다음 컷. 이 쇼트야 말고 첫 번째 붉은 철제 안전망이 드리워진 현관 밖 전경을 포착한 장면과 더불어 기요시의 영화적 이미지와 카메라 움직임 모든 것을 망라한다. 기요시의 많은 영화에서 그러하듯, 집안 내부는 여러 격자로 구분되어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열린 창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의해 마치 생명을 지닌 듯 텅 빈 공간에서 너울거리는 커튼의 형상. 창밖에서 비추는 부드러운 햇살과는 대조적으로 죽은 듯이 가라앉은 실내 분위기. 이 화면 내 공간 안으로 현관을 통과한 여성이 거실로 들어와 집 안을 살피다 문득 뒤쪽 커튼 너머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남편을 부른다. 이때 프레임 외부 공간을 향한 그녀의 시선과 몸짓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한 듯 잠깐 멈춘 채 지속되고,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화면 밖 공간으로 빠져나간다. 이때까지 관객은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 뒤,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여 (흡사 유령적 시선처럼) 그녀가 머물러 응시했던 시점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던 커튼 너머의 공간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남자가 있다. 매우 천천히 그러나 불길한 기운을 암시하며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을 통해 발견되는 남자의 형상은 빛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그림자와 더불어 기괴하고, 그것은 흡사 기요시의 전작 < 회로 >(2001)에서 목격했던 유령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벽이나 난간에 서 있다 얼룩으로 변하며 유령이 되어갔던 형상들). 잠시 뒤, 멈춰 선 화면 안으로 여성이 다시 들어와 남자의 뒷모습을 길게 바라본다. 유령과도 같은 존재감으로 움직이는 카메라가 운동과 정지, 시선과 응시를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요시가 시작하는 이 새로운 영화적 세계에서, 저 남자에게 이미 무언가 사건이 도래했으며 여자는 이 짧은 순간에 그 모든 불안을 감지했음을 알게 된다. (기요시의 이러한 쇼트에서 카메라의 시선과 움직임은 할리우드 고전기에 구축된 제도적 재현 양식으로서의 촬영과 편집의 비가시적 메커니즘처럼 인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카메라의 유동적 시선과 위치의 전능성을 가시화하며, 영화적 디제시스와 관객, 그 사이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며 내레이션을 전개하고 분위기를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 여자가 한참이나 남자를 말없이 응시하고 나서야, 뒤늦은 대답을 하며 뒤돌아서는 남자는 조금 전의 이상한 기운과는 달리 금새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아내를 맞이한다. 여자는 남편의 응답을 듣고서야 방향을 돌려 현관 옆에 있는 주방으로 건너간다. 카메라는 천천히 그녀의 동선을 쫓아 그녀가 주방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을 비춘다. 조금 뒤 남편이 그녀 곁을 지나 화면 밖 방안으로 빠져나가면, 조금 전 밝은 테라스와는 대조적인 어둠에 가라앉은 주방 안 그녀 모습 좌측으로 천천히 이 영화의 타이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가 제시된다. 타이틀이 사라지면 여자는 문득 하던 동작을 멈춘 채 의심 어린 시선으로 남편 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테라스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곤 남편이 서 있던 자리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었을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는 길게 비춘다. 이때 시작되는 그녀의 내레이션, “그것은 정말 사소한 위화감으로 시작되었다” 기요시의 전형적인 롱테이크 쇼트라 할 수 있는 이 세 번째 컷은 아파트 실내 공간을 좌우와 전후경으로 구분하는 카메라 워킹, 테라스의 밝은 빛과 주방과 복도의 어두움, 등장인물의 생명력 있는 움직임과 죽은 듯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정지된 순간의 대비. 아파트 외부 공간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음들(외화면 소리, 그러나 논리적 근거가 없는 소리들까지 망라하는 기괴함. 기요시는 외화면 공간의 소리 활용에 대해 질문하자 인과론적 출처가 없는 소리들을 영화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즐긴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가령 현장의 스텝들이 실수로 자아내는 소리들, 엔지 사운드, 건물 밖에서 영문 모르게 들려오는 기계음 같은 소리들을 그는 녹음하여 보관하고 영화에 삽입하며 재창조하는 것이다)과 내화면 사운드를 조율하며 그로테스크하고 언캐니(uncanny 두려운 낯설음)한 기요시 특유의 영화적 세계를 안내한다. 예조와 산보 발터 벤야민의 근대적 주체, ‘산보자’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공연된 바 있는 미에카와 모토히로의 동명 작품 < 산책하는 침략자 散歩する侵略者>(2017)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개념을 상실하는 인간을 통해, 인간의 본질, 불안과 해방에 관한 은유와 풍자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은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과도 잘 맞닿아 있다. 그러나 원작을 각색하기보다는 스스로 시나리오를 써왔던 그의 작품 성향대로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 시리즈는 오롯이 그만의 작가주의적 세계 안으로 흡수되어 재창조되었다. 특히 전작 <산책하는 침략자>가 외계인들의 개념 수집과 살상, 침략과 그 후의 과정까지 묘사된다면,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전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다른 인물들을 중심으로 침략의 예조(징조)와 과정, 그리고 침략 직전까지의 과정을 이면화처럼 제시한다. 전작이 침략자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예조>는 발생하지 않은 사건, 혹은 드러나지 않은 실체를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지구 여성의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전작은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 존재에 대한 개념적 이해 과정이라면, <예조>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회피하거나 방어하자고 하는 인간 내부의 불안과 공포, 윤리적 갈등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작품은 큰 틀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영화이다. ‘언어’라는 외부적 질서를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주체성을 학습하며, 동물적인 생존 본능으로 위기에 반응하는 인간들은 때로는 소멸해도 무방할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존재이며, 또 때로는 치명적인 자기 결함과 트라우마, 불안과 공포로 점철된 나약한 존재이고, 또 때로는 외계의 타자조차 감화시켜내는 사랑과 공존의 존재이자, 윤리적 존재이기도 하다. 언어와 주체성, 자아와 타자, 의식과 무의식 등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 기호학의 기본 개념을 영화적인 사건으로 묘사한 듯한 이 작품에서 외계인들이 수집하는 기본 개념이 가족, 소유, 자아, 노동, 과거, 미래, 공포 그리고 사랑으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게임을 통해 주체 혹은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기요시 영화에서 이미 낯설지 않다. 그의 걸작인 1997년작 < 큐어 CURE, Kyua >에서 우리는 이미 언어와 목소리라는 권력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공포와 욕망, 불안과 적대를 끄집어내며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했던 기요시의 테마를 본 적이 있다. 정신의학을 공부하다 초월적 능력을 지닌 극 중 연쇄살인범 마미야는 빛과 목소리를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그들 내면의 억압된 적대를 폭력과 살인으로 끄집어낸다. 그와 동시에 윤리적 갈등을 제거한다. (<큐어>에서 최면에 걸린 인간들은 억압된 불만을 끄집어내 살인을 저지르고도 윤리적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큐어>의 명장면 중 하나는 경시청에서 경찰 간부와 마미야가 벌이는 설전이다. 마미야는 자신을 비난하며 취조하는 경찰간부에서 반복적으로 ‘당신은 누구인가?’를 질문한다. 경찰 간부(오스기 렌. 이번 영화<예조>에서는 후생성 간부로 출현해 외계인과 비슷한 심문을 벌인다.)는 그 질문에 자신의 직함과 이름을 대지만, 마미야는 지속적으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현대 사회에서 누구나 자신을 설명하며 이름과 직함을 대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의 본질적인 자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예조>에서 외계인들은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는 방법으로 <큐어>에서의 그것처럼 언어적인 목소리의 권능을 이용한다. 빛과 목소리를 통한 질문들, 그리고 무력하게 응답하고 순응하는 인간. 특정 개념이 상실된 이후 대부분 인간들은 오늘날 인간 사회의 ‘정상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행위와 불안 혹은 해방적 쾌감을 맞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보태어, <예조>는 외계인들의 가이드로 활동하는 자들의 윤리적 불안을 역시 중요한 테마로 다룬다. 개념을 빼앗을 대상을 선정할 수 있는 권력. 그러나 그 선택 능력은 이내 타인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죄의식이 육체적 통증으로 발현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언캐니와 유령 그리고 영화 <예조>의 초반부, 주인공 예츠코의 공장 동료가 그녀에게 불쑥 이상한 이야기를 꺼낸다. 집에 유령이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면 안 되는 존재, 그런데 늘 곁에 머무는 존재, 얼핏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 공포스러운 존재가 집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예츠코는 다음 날 동료의 집을 직접 방문하게 되고, 동료가 유령이라 지칭했던 존재가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동료는 ‘가족’ 개념을 빼앗긴 이 영화 서사의 첫 번째 희생자이다. 친숙하지만 낯선 존재, 이 언캐니한 공포는 1950년대부터 숱하게 변주되며 만들어진 < 신체 강탈자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의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형상은 같지만 분명 다른 존재, 돈 시겔로부터 시작되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서 외계인에게 가족의 신체를 강탈당한 사람들은 영문 모를 이질감과 친밀감(언캐니. 두려운 낯섬. 분명 같은데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이 주는 공포) 속에서 존재의 불안과 공포를 훨씬 크게 체감한다. 이러한 설정은 <예조>에서 비슷하게 변주된다. 어딘지 익숙하기 때문에 더 큰 공포. 예츠코의 동료가 ‘유령’이라고 단정한 그것은 기요시 영화의 공포를 연장한 개념이기도 하다. 예전에 진행됐던 기요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유령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영화 속에서 유령을 표현할 때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죽음은 현실세계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바로 옆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죽음은 결국 세계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라는 픽션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까 영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현실적이면서 현실에는 없는 것이, 바로 죽음과 영화의 양면성이다. 유령은 죽음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령이라는 것의 어려운 문제는 그것이 인간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즉 인간이 죽어서 유령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연장으로서 유령이 존재하는 가.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은 길지 않다. 죽고 난 유령이야말로 사실은 인간의 본질일 수 있다. 그래서 유령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고 진정한 본질이다. 또 사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 자신을 유령으로 결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과연 인간을 유령으로 상상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결국 나에게 유령이란, 영화의 존재론이자 인간의 존재론을 고민하게 만들고 출발하게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로프트> 상영 후 나눈 인터뷰) 그의 이러한 유령적 세계관은 <예조>의 후반부, 외과의사 마카베의 신체를 빌어 존재했던 외계인이 죽음 직전에 하는 대사에서 다시금 드러난다. 이미 타인을 살해하면서 공포와 죽음이 연관되어 있음을 터득한 그는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오는구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하지만 죽음은 언제든 바로 옆에 있어. 이건 운명이야. 받아들이자”라고 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인간-죽음-유령--영화는 긴밀하게 연결되는 실체이다. <산책하는 침략자>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모두는 기요기가 최근 가장 다루고 있는 ‘사랑’의 테마를 관철시키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기요시와 러브스토리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는 확실히 < 해안가로의 여행 岸辺の旅 >(2015)에서부터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인간 존재의 힘으로서 ‘사랑’을 묘사한다. 산책 시리즈 모두 결국 인류를 구원하거나 혹은 죽음 앞에선 개인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는 유일한 원천은 사랑이라고 그는 피력한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감상주의나 낭만이 아니라,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기요시 감독이 느끼는 책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발언(그가 왜 <밝은 미래> 이후 더 다크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나빠지는 사회에 대한 불안을 언급했다)은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소유 개념을 빼앗긴 히키코모리 청년과 가이드가 광장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하는 연설 내용, 즉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장면과 겹쳐진다. 그러나 영화 속 군중들은 이내 그러한 연설을 외면하고 무시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극 중 캐릭터들 혹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인류의 공존을 위한 사랑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편의 장대한 지구 종말 서사로 구축된 개념적 SF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개별적 사건을 추적하던 그간의 미시적 스릴러 서사를 넘어, 장구한 인류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로 확장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상상하는 모든 것을 디테일하게 시각화하는 디지털 영화의 전능적 시대에, 여전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재현할 수 없는 것, 영화적인 시간과 공간의 창조능력,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화의 존재론적인 언어, 쇼트의 개념과 한계를 사유하는 감독의 흥미롭고 실험적인 인류학 에세이는 여전히 흥미롭고 매혹적이며 원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