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화신룡교
- 감독
- Leung Chung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진보련, 하가구, 진취란, 등요휘, 왕강, 남보아
<순교자>는 유현목 영화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기독교반공문예영화다. ‘기독교·반공·문예’는 당시 정권과 순치되고 나아가 권장되었던 요소들이어서 일견 검열에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상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보부의 공식적인 검열 단계는 비교적 수월히 통과했지만 국방부, 중앙정보부, 내무부, 문교부의 개입이 이어졌다. 어떤 면에서는 국책과 순치되는 영화였기 때문에 관계기관들이 더 간섭하려는 면도 있었다. 또한 이 영화는 <7인의 여포로> 이후 국가가 영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통제하려던 분위기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엘리트들의 의견 역시 중요한 벡터로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순교자>를 둘러싼 논란과 검열 과정은 검열 관계기관들의 역학을 비롯해 <7인의 여포로> 이후 검열의 변화, 그리고 이로 인한 갈등이 당대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계층을 통해 봉합되는 국면을 드러낸다. <순교자>의 검열과정: 상영허가증 발급 이후 국방부, 정보부, 문교부, 내무부가 개입하다 1965년 3월5일 제작사(극동흥업)는 공보부에 <순교자> 영화 제작을 신고한다. 3월 20일에 “정부시책과의 관계-저촉 사항 없음”이라는 전제 하에 시정사항 4개가 지적되며 제작신고가 수리된다. 이후 영화가 완성되어 중도에 제작권한을 양도받은 합동영화주식회사 명의로 6월 10일 ‘영화상영허가신청서’가 제출된다. 6월 15일에 “보안상 유해로운 점 없음”이라는 검열의견서가 작성되고, 대사 1개처를 삭제하는 조건으로 6월 16일에 ‘영화상영허가증’이 발부된다. 그런데 상영이 허가된 6월 16일에 국방부에서 화면 1개처를 삭제하고 대사 1개처를 수정하라는 전언통신문을 보내온다. 공보부에서는 이미 영화상영허가증을 발부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고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18일 공보부 영화과 계장이 기안한 내부 결재 서류에 의하면 화면 1개처 삭제를 추가 제한사항으로 승인하지만, 이미 녹음이 끝난 뒤라 대사 수정은 불가능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방화 <순교자> 심사 의견 처리”라는 제목의 부전지에는 <순교자>는 “군사극영화가 아니고 종교극영화”로 “국방부 후원은 군장비 후원”이었고 공보부에서 “국방부에 심사 요청한 바가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에 결국 6월 18일 공보부는 국방부에 직접 “수정사항을 업자 측에 통보하시고 수정토록 조치”하라는 전언통신문을 보낸다. 공보부와 국방부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그림 1) 전언통신문: 국산극영화 “순교자” 심사의견 처리 검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순교자>가 아카데미극장에서 상영중이던 6월 22일에 중앙정보부는 “보안상 유해로운 것이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삭제 후 상영토록” 하라고 공보부에 통보한다. 그 내용은 화면 3개처와 대사 3개처를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지적에 대해서는 공보부가 보다 긴장하는 기색이 서류에서도 감지된다. 6월23일 ‘방화 <순교자> 제한조치의견 처리’라는 제목의 서류에서 중앙정보부를 CIA라고 칭하며 “토의가 요하다고 사료되옵기 공람하고 회신은 추후 기안”하는 것으로 처리한다. 그러면서 ‘참고사항’으로 “검열 당시 CIA 파견 검열관”이 “보안상 유해로운 점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내용을 부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6월 15일 합동검열에 중앙정보부가 참여하여 “보안상 유해로운 점 없다”는데 동의해 놓고 뒤늦게 다른 소리를 하는 것에 대한 난감함이 묻어난다. 1964년 중앙정보부의 입장 번복으로 감독이 구속되었던 <7인의 여포로> 사건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냥 반공영화가 아니라 ‘기독교반공문예영화’였다. 6월 26일에 공보부는 이 영화가 “세계 각국에서 다량 발매된 재미교포” 작가의 소설에 충실하였다는 점과 “당초 귀부와의 합동검열 당시 합의된 바” 있으며, “귀부 추가제한요구를 집행하는 경우에 예견되는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현행대로 상영토록” 하겠다는 의견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다. (그림 2) 방화 “순교자” 제한조치 요청에 대한 회신 이로써 국방부와 중앙정보부의 사후 검열은 일단락된 듯한데, 아직 등급을 정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6월 17일에 합동영화주식회사가 ‘학생관람허가신청서’를 공보부에 접수한 뒤 6월 26일에 문교부 측에서 제한사항 없이 ‘고등학생 이상’에 관람을 허용해도 된다는 의견을 공보부에 통보한다. 그런데 7월 2일에 문교부가 입장을 바꾸어 군인의 방에 걸린 태극기가 표준형이 아니므로 표준형 태극기로 화면을 수정해야 고등학교 이상 관람을 허용한다는 의견을 보낸다. 그리고 7월 6일에 내무부 치안국 보안과에서 ‘학생관람불가’ 의견을 공보부에 보낸다. 7월8일 공보부에서는 문교부와 내무부의 의견을 종합하여, 등급은 ‘미성년자관람불가’로, 문제가 된 태극기 화면은 표준형 태극기로 수정하여 필름과 대본까지 다시 제출하라고 제작사에 통보한다. <7인의 여포로> 사건, 유현목, 그리고 <순교자> 당시 정부의 정책 방향에 거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영화가 이렇게 수난을 겪게 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영화 한 편을 두고 문화 담당 기관은 물론 국가안보, 치안, 교육을 담당하는 복수의 행정기관들이 검열에 참여하였다는 데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해 국책에 부응하는 영화라고 해서 검열을 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간섭하려는 기관이 많았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또한 <7인의 여포로> 사태 이후 중앙정보부가 영화 통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5.16쿠데타 직후에 설립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 내내 전방위적으로 권력을 강화해간다. <7인의 여포로> 사태는 영화계에서 하나의 변곡점이 된 사건이었고 <순교자>는 그 여파 속에서 검열을 받은 것이었다. 여기에 당시 기독교계의 반응은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였다. 유현목 감독은 자서전에서 <순교자> 개봉 당시 상영을 앞두고 기독교계가 반발했다고 회고한다. 목사들이 문공부장관을 찾아가 영화에서 신목사(김진규)가 ‘신은 없다’고 말하는 대목을 문제 삼으며 상영금지를 호소했다는 것이다. 개봉한 이후에도 기독교계의 반대는 계속되어서 지방 상영극장 앞에서는 신자들이 입장을 막기도 했다고 말한다. 1) 당시 신문을 보면 기독교계가 일방적으로 반대만 한 것은 아니고 찬반이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된 것은 영화만이 아니라 원작소설부터였다. 1964년 영문으로 출간된 『순교자』(The Martyred) 2) 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남한에도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소설 속 목사들의 죽음이 거룩한 순교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국내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김은국 작가를 “20세기의 가롯 유다”라고까지 비난했다. 유현목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화하자 큰 화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에 대한 비난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목사들이 공산당 앞에서 신을 부정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을 증언하는 인물이 북한군 소좌라는 것이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분단 이후 남한 개신교와 반공 이념의 강력한 결속이 ‘배교와 이단’의 판단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도 “현대 기독교의 문제를 제시하고 기독교적인 고민을 심화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목사들―문익환(한국신학교), 변선환(이화여고 교목), 김광우 목사 등―이 있었다. 3) 또한 언론에서도 “성직자의 고독을 묘파” 4) 한 “중량감 넘치는 역작” 5) 이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그러던 7월 13일에 유현목 감독은 돌연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다. 1965년 3월 23일에 ‘은막의 자유’ 6) 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본부 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이 뒤늦게 말썽이 된 것이었다. 7) 공안 검찰은 <순교자>뿐만 아니라 <오발탄>(1961)과 <잉여인간>(1964)도 용공적이라고 판단하여 유현목 감독을 소환했다고 전한다. 8) <7인의 여포로>의 이만희 감독에 이어 또 다시 영화감독이 반공법으로 입건되는 데 대해 영화계는 물론 보수언론에서도 우려스러워했다. 9) 이와 같은 논란 속에서 <순교자>는 더욱이 문제작이 되었고, 영화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다. 1965년에 베니스영화제에 처음으로 5편을 출품했는데, 그 맨 앞에 <순교자>가 놓였다. 10) 1965년 『실버스크린』 6월호에서는 “세계명작을 영화화한 영화예술의 극치”로 <순교자>를 소개한다. 11) 그리고 9월호에서는 종전에 영화학도들을 위해 연재해오던 학술적인 코너 3개를 합쳐 “내일의 영화인을 위한 쎄미너”라는 지면을 만들고 개봉된 영화 중에서 문제작 한 편을 골라 집중적으로 분석 검토하는데, 그 첫 번째 텍스트로 <순교자>를 선정한다. 1965년 말에 가면 <순교자>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평가는 “종교논쟁까지 불러일으켰던 작품”으로 “테마는 휴머니즘”으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유현목 감독은 공보부에서 주관하는 대종상 감독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유현목 감독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계속되어 1966년 1월 서울지검은 반공법 위반에 음화제조 혐의(<춘몽>)를 더해 유현목 감독을 불구속 기소한다. 1967년 3월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고, 음화제조에 대해서는 벌금 3만원 형이 확정되기까지 법적 논란은 계속된다. 일련의 과정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검찰이 중앙정보부와 함께 문화예술까지 재단할 수 있는 상위의 공권력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해 둘 것은 이런 가운데 <순교자>는 미국에 첫 수출되어 상영된 영화 13) 가 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매개로 한국전쟁과 인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 속에서 국내 공권력의 역학 밖에서 움직이는 힘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로 인한 박정희 정권과 기독교계의 충돌은 1970년대에 들어서며 본격화된다. 1) 유현목, 《영화인생》, 혜화당, 1995, 151-152쪽. 2) Richard E. Kim, The Martyred, George Braziier Inc., N.Y.C., 1964. 3) <기독교계에 순교자 파문>, 《동아일보》, 1965.6.29. 4) <[새영화] 성직자의 고독을 묘파>, 《경향신문》, 1965.6.19. 5) <[영화평] 중량감 넘치는 역작>, 《조선일보》, 1965.6.20. 6)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3.24.; <은막의 자유」, 《조선일보》, 1965.3.25. 7) <영화감독 유현목 씨 입건>, 《경향신문》, 1965.7.13. 8)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7.14. 9) <만물상>, 《조선일보》, 1965.7.15. 10) <<순교자> 등 다섯 작품 베니스영화제에 출품>, 《동아일보》, 1965.9.14. 11) <[이달의 문제작] 세계명작을 영화화한 영화예술의 극치>, 《실버스크린》, 1965년 6월호, 114쪽. 12) <[지상콘테스트 200자 시리즈(완)] 청룡상에 출품된 영화들-순교자>, 《조선일보》, 1965.11.28. 13) <영화 <순교자> 미에 첫 수출>, 《동아일보》, 1966.7.21.; <미주 등서 일제상영>, 《조선일보》, 1966.7.21.
<춘몽> 촬영 현장, 감독 유현목과 배우 박수정.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다 1965년 초 <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이만희, 1965) 사건으로 이만희 감독이 옥고를 치르고 반공법 위반 혐의 조사가 진행되며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도중 또 하나의 검열 관련 사건이 발생했다. 1965년 3월 23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한 ‘은막의 자유’라는 세미나에서의 유현목의 발언이 문제 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현목 은 헌법 제14조 에 의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후진국이면서 ‘미묘한 사정’에 처해있는 나라의 국민은 아니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며 당대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와 같은 발언이 정권 당국자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이 문제가 되었다. 또 이를 즈음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로서 반공사상을 보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제공․주입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일련의 반공법 위반혐의 사태는 이러한 때의 변화에 대해서 외면했거나 아니면 편협적인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애국행위라 해둠이 옳을 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정치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그래서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반공이라면 언제까지나 영화예술의 차원을 높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영화예술의 차원 높은 표현의 수단을 빌지 않고 국시를 최고로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1 - 유현목,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 3. 24.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운운이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의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된 정황 을 겨냥하고 있음은 누가 보더라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특히 “반공을 국시로…” 운운의 발언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1965년 초 반공법 위반 혐의로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상영이 중지되고 감독이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독이 투옥된 첫 번째 사례다. 발표 후 3개월 반이 지난 7월 13일 유현목은 서울 지검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문제 삼은 대목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였다. 또한 그가 그간 감독한 < 오발탄 >(1961), < 잉여인간 >(1964), < 순교자 >(1965) 등 일련의 영화 역시 문제가 되었다. *주2 이러한 검찰의 입장 발표로 인해 유현목은 반공이 한국의 국시임을 부인한 감독으로 이후까지 유명해졌다. 당시 원문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검사가 인용한 이 워딩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당시 기사의 축약본에서 유현목은 반공이 국시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고, 이후 판결문 역시 검찰의 논고 내용을 인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검찰 측이 문제를 과장하기 위해 인용문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검찰이 근거로 삼은 법규는 반공법 제4조 (“찬양 고무 등”)였는데 이는 이만희 감독에게 적용되었던 조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이 입건을 발표한 시기가 상당히 절묘하다. 반공법 위반과 함께 음란죄로 동시에 기소될 유현목의 연출작 < 춘몽 >(1965)이 개봉 중이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춘몽>의 검열과정 유현목의 연출작 <춘몽>은 일본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 자체가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포함하는 문제작이었다. 애초 유현목은 이 영화의 파격적 노출 수위가 부담되어 거절하였으나 표현상의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제작사 측의 설득으로 결국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3 치과에 들렀다 잠이 든 남성이 꿈속에서 병실에 있었던 여성이 치과의사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녀를 구해내고자 하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과 노출,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실험성으로 주목받았다. 그 검열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이 영화가 일본영화 <백일몽>의 번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있는 <춘몽>의 서류철 에 포함된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라는 내무 보고 문서를 통해 보건대 남아있는 제작신고 서류 이전(1964년 12월)에 이미 “일본인 원작 ‘백일몽’ 제작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듬해 1965년 1월 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반려되었다. 아마도 일본 원작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5년 2월 16일에 원작을 개작한 후 <춘몽>으로 제목을 바꾸고 제작신고가 되었으나 4월 22일 공보부는 다시 <백일몽>의 표절이라는 점과 내용이 비속하다는 점을 들어 반려하였다. 이에 제작사는 “전위적인 영화 표현”이라는 작품의 취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열네 군데의 수정 사항을 기재한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공보부는 제작신고를 수리하였다. 영화 완성 후 본편의 검열신청은 1965년 5월 1일(접수는 5월 24일)에 이루어졌다. 본편 검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5월 26일에 있었던 초심에서 중앙정보부는 이 영화에 대한 재심을 판정했고, 5월 31일 재심에서 역시 허가를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공보부 자문위원회는 3개처 제한 후 상영허가를 하면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6월 5일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244조 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공보부는 “본 작품이 외설이라 판단되는 부분을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 후, 상영을 허가했다. (좌)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백일몽>의 표절, 내용의 비속으로 제작신고를 반려한 문서) (우) "방화 '춘몽' 상영허가 경위" (<춘몽>의 본편 검열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내부 문서) 음란죄로 기소되다 지난한 검열과정을 거친 <춘몽>은 마침내 1965년 7월 3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가 개봉 중인 7월 14일 유현목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1966년 1월 4일 검찰은 유현목을 반공법 위반뿐 아니라 음화반포(혹은 제조) 혐의까지 더하여 기소하기에 이른다. *주4 한 감독이 반공법과 음란조항 위반으로 동시에 기소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는 이만희에 이어 두 번째, 음란죄로 기소된 것은 첫 번째 사례였다. <춘몽> 개봉 당시 신문광고(《조선일보》, 1965. 7. 2.) 이 영화가 음화반포(제조)죄 혐의를 받은 구체적인 정황은 영화를 제작할 당시 신인 여배우를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만들어 그녀의 뒷면을 촬영, 음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혐의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했다. 촬영 당시 신체의 앞부분은 가린 상태였고, 뒷모습의 누드를 담은 6초 정도에 해당하는 이 분량은 검열 신청 전 이미 감독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5 즉 이 장면은 대중은커녕 검열관에게까지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검찰은 징역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유죄 취지로 구형한다. 판결은 1년이 지난 1967년 3월 15일 내려졌는데,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유죄 취지로 벌금 3만원을 선고하였다. 반공법 위반 부분에 대해 법원은 “①유피고인의 연설내용이 적성국가를 이롭게 할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었고 ②영화 「7인의 여포로」에 대해서도 어느 특정 장면을 지적한 것이 아니며 단지 예술가의 일반자세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반공법 위반죄를 물을 수 없다”라고 판시했던 반면, *주6 음화반포(제조)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유죄의 취지를 밝혔다. 이 영화는 상대방 여자에게 폭행, 린치, 전기고문 등 가혹한 행위를 하여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현상을 보고 또 이와 같은 행위를 당하고 남녀가 서로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얻는 것을 그린 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변태성욕자에게 기어 완전 나체로 달아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므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양식에 비추어 정상인에게 이상한 성적 자극을 주고 수치, 혐오의 감정을 일으키게 함에 족하다고 인정된다. 헌법에서 보장된 학문•예술 및 표현의 자유도 헌법 제32조가 정한 공공복리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이 범위를 벗어난 권리행위는 권리 남용에 해당하여 헌법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주7 - 서울형사지법 판결, 1967년 3월 10일 선고. 이 판결에 대해 당시 언론을 비롯한 법조계와 예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가 된 장면을 검열 전에 삭제했다면 그것은 음화 반포로 볼 수 없고, 촬영 당시 불과 10여 명의 스탭 앞에서 나체로 여배우가 등장했다고 했던 점 역시 음란물의 전시에 해당할 수 없으며(제243조 관련), 해당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해도 검열 전 삭제된 이상 그것은 완성품인 영화라 볼 수 없으므로 음화 제조라 볼 수 없다(제244조)는 것이다. *주8 이에 검찰과 유현목 감독은 공히 항소하였고, 항소의 결과는 다시 2년이 훌쩍 지난 1969년 10월에 나왔다. 당시 항소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반공법에 대해서는 역시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영화예술에서도 예술성과 음란성이 양립될 수 없으며 아무리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라도 음란성이 있을 때는 외설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취지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주9 비록 선고유예이긴 하지만 유죄가 판결된 것이다. <춘몽> 중 한 장면 반공과 음란의 결합 “은막의 자유” 세미나 발표와 <춘몽>을 엮은 이 사례는 한 재판 대상에 반공과 음란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한 별개 사건에 대한 병합 재판의 사례일까? 아니면 일정한 연관관계에 의해 검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일까? 굳이 음모론의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세미나 발표의 불온성을 문제 삼고 싶었던 검찰의 입장에서 해당 사건만으로 사법적 처벌이 내려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슷한 시기의 <춘몽>에 대한 음란죄를 함께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검찰은 이러한 『춘몽』에 대한 판결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유감독을 반공법 위반으로 다루다가 우연히 인지하여 부산물(?)로 기소했던 것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산물인 반공법 위반 부분이 무죄가 되었으니 시무룩… - “춘몽의 일장춘몽, 음화라고 유죄판결 나오게 된 사연”, 《신아일보》, 1967. 3. 16. ‘주산물’과 ‘부산물’을 나누고 있는 위 인용문은 당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권당국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말하자면 반공법을 비롯한 사상 혹은 사회적 문제는 정권당국이 ‘주’되게 관심을 가진 영역, 풍속은 ‘부’수적인 관심을 가진 영역이라는 의미일 터다. 이는 당대에 사상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졌던 반면 풍속에 대한 검열은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있었다는 검열 연구자들의 인식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두 주제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풍속에 대한 통제는 사상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거나 구실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효과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은막의 자유”와 <춘몽>의 병합 사례라 할 것이다. 검열은 최종적으로 인적 통제를 통해 완성된다. 검열의 최후의 수단이자 목표는 창작자를 향해 있다. 그것은 단일 작품에 대한 검열과 달리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사건의 유죄 판결 이후 동료인 김수용 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 판결이 있은 이후 표현에 많은 심리적인 제한을 받게 되어 부득이 예술적으로 필요한 러브신이나 나체 면의 제작이 위축될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주10 그러나 이러한 위축은 유죄를 선고받은 음란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주1. 이 기사에 실린 내용은 발표문의 원본이 아니라 축약본이다. 주2.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발표”, 《동아일보》, 1965. 7. 14,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 7. 14, “만물상”, 《조선일보》, 1965. 7. 15 등. 주3. “인터뷰, 40년만의 감개무량한 복원, <춘몽>의 유현목 감독”, 맥스무비, 2004. 7. 29. 주4.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음란죄의 근거로 삼았던 조항은 형법 제243조(음화등의 반포)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감안컨대 음화 등의 제조를 규정한 244조 역시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 243조는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44조는 “전조의 행위에 공할 목적으로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주5.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열 전 삭제했다는 기사와 나일론 네글리제를 입힌 같은 신의 다른 대체 장면을 썼다는 기사가 병존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정황 서술의 구체성을 감안할 때 아마도 후자가 진실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주6. “영화 춘몽 음화로 판결, 유현목 감독에 벌금 3만원 선고”, 《한국일보》, 1967. 3. 16. 주7. 김재훈, 「음란성 개념 변화에 관한 연구: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100쪽. 주8. “영화 춘몽의 법 적용 시비, '공개 전 삭제... 유죄론 보기 힘들어'”, 《조선일보》, 1967. 3. 21. 주9. “춘몽은 '외설영화', 유현목 감독 선고유예”, 《서울신문》, 1969. 9. 25. 주10. “법 이전의 검열기구 활용을, 표현에 심리적인 제한”, 《동아일보》, 1967. 3. 18.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날의 국가정보원, 80-90년대 국가안전기획부의 전신이자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핵심 권력기관, 수많은 민주인사들에 대한 고문으로 악명높았던 곳. 바로 중앙정보부다. 그런데 국가안보라는 거창한 임무를 수행하던 이곳이 영화검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 심지어 공식적이고 제도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던 사실은 그저 원로영화인 몇 분들의 증언으로 전해져 왔을 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 영상자료원이 검열서류들을 공개한 후에야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는 못했다. 이 글은 그 예비적인 시도로, 중앙정보부가 영화검열에 참여했던 역사와 방식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대 초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한 검열 개입 필자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선에서 볼 때, 중앙정보부가 검열서류에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는 < 오발탄 >(유현목, 1961)의 재검열 문서다. <오발탄>은 1961년 4월에 개봉하였으나, 5.16쿠데타 직후 상영중지가 되었다. 이후 7월 20일 재검열을 거쳐 상영중지가 공식화되는데, 이때 재검열의 주체 중 하나로 처음으로 중앙정보부가 등장하는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것이 1961년 6월이니, 한달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오발탄>에 대해 “치안면에 있어서 역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다분 내포하며 현 시국으로 보아서 상영불허함이 가하다고 사료됨”이라 밝혔다. 이후 <오발탄>은 1963년까지 상영정지 상태에 처하게 된다. 정보부가 영화검열에 개입한 최초 사례로 추정되는 <오발탄> 재검열 문서 다만 <오발탄>은 특수한 사례로, 아직은 정보부의 영화검열이 일상적이거나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전수조사를 해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략 1961년 9월경이 되면 정보부가 빈번하게 검열에 개입하는 것을 서류로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확인한 첫 사례는 < 붉은 두목 >(이영, 1961)이라는 반공영화의 본편 검열서류이다. 이후 정보부는 주로 국가 안보와 결부된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검열자로 참여했다. 1962년 영화법 제정 후 제작신고라는 이름으로 시나리오 검열이 점차 (준)제도화되면서, 정보부는 본편뿐 아니라 시나리오 검열에까지 관여하게 된다. 이들 영화가 국가 안보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앙정보부의 개입이 정당화되었던 것일 텐데, 역으로 보자면 중앙정보부가 관심을 가짐으로써 반공영화가 국가의 안보 이익을 해치거나, 나아가 불온한 영화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 *주1 사건일 것이다. 당초 공보부와 정보부의 합동 검열에서 이 영화는 소수의 제한사항만으로 통과되었으나, 이후 정보부의 입장 번복으로 영화 상영이 중단되고 반공법 위반으로 감독이 구속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검열 후 돌연 <7인의 여포로>의 상영보류를 지시한 중앙정보부의 서류(전언통신문) 반공영화만이 중앙정보부가 개입하는 장르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임원식·나봉한, 1964)와 < 춘몽 >(유현목, 1965)의 사례를 들 수 있겠다.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는 내용상의 불온성이 문제가 되었다기보다는 제3공화국의 초기 위기를 낳은 한일협정 반대 시위라는 시국상황과 관련되어 영화의 반일적 톤이 민감하게 포착된 것으로 보인다. 서류에 따르면 이 영화는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1964년 12월, 공보부 검열을 마쳤으나 돌연 1965년 3월 6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중앙정보부가 추가 검열사항을 전달함으로써 검열 결과가 변경되었다. 이에 관해 신상옥 감독은 중앙정보부가 개봉을 반대했으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개봉이 가능해졌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의 검열이 반드시 서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춘몽>이 형법에 저촉되는 영화이므로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하라는 내용의 정보부 전언통신문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의 경우 그 맥락상 정보부의 개입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란, 외설이 문제가 된 <춘몽>의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 영화의 검열에 참여한 정보부는 “자학적 변태성향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 국민 여론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 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할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제244조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 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정보부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공보부는 문제 장면의 대폭 삭제 후 상영허가조치를 하였지만, 이후 감독 유현목 은 음화제조반포죄로 기소되어 유죄 취지의 판결(선고유예)을 받기에 이른다. 안보나 사상이 아닌 풍속 문제의 영화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이유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면 관계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유현목 감독이 반공죄로 투옥되었던 이만희 감독을 옹호한데 대한 보복성 조치로 이해되고 있다. 상시적 검열자가 되다(1968년 말~ ) 1968년 말에 접어들게 되면 중앙정보부의 영화검열 참여 방식이 전환된다. 개봉되는 모든 영화에 대한 상시적인 본편 검열자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정보부의 본편 검열이 제도화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0월 5일에 검열에 합격한 < 일본인 >(김수용, 1968)의 경우에는 기존 방식대로 검열이 이루어졌으나, 10월 15일 시행된 < 수전지대 >(김수용, 1968)의 검열서류에서는 정보부의 영화검열의견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10월 중순(늦어도 11월 초순)경부터 정보부가 검열에 참여하는 관행이 시작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수전지대>의 정보부 영화검열 의견서(삭제 대상으로 명시된 "집단 난투장면") 현재 시점에서 중앙정보부가 상시적인 검열자로 등장하게 되는 구체적 배경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김신조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납북사건과 같은 1968년의 안보적인 위기 상황, 1968년 7월 말 공보부가 문공부로 전환되었던 행정체제의 개편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새로 개편된 체제에 따라 상시 검열은 정보부 외 내무부(치안본부)와 주무부처인 문공부 세 곳이 담당했다. 이전의 주체와 비교할 때, 문공부(주)와 내무부(부)에 정보부가 추가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세 주체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1970년대 문공부의 영화검열 담당 직원이었던 이남기 의 증언을 참고할 수 있다. 근데 그 검열관 구성은, 국산영화 경우에 대개 인제 과장하고 국산영화 담당 사무관하고 그 실무자까지 들어가요. 에. 들어가서, 그러고 인제 외부에서는 인제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청소년과에서 파견된 이 검열관들이. 그래서 문공부하고 중앙정보부하고 그 저 치안본부하고 결국 세 개 기관이 맡아 전담하게 되죠. 그리고 인제 ... 안기부(정보부의 착각)에서 온 분들은 주로 인제 국가안보에 그 위해, 저해요인 같은 거. 우리가 남북분단 된지도 참 오래됐지만은 이런 긴장관계에 있으니까북한을 찬양한다든지, 요즘 어떤 세태하고는 전연 틀렸죠, 그 당시는. 그 엄격히 영화든 처리할 때니까. 그 북한 찬양 이런 문제. 그러고 인제 치안본부 청소년과에서 나오는 거는 결국 인제 청소년의 유해여부, 이런 걸 인제 보고. 그리고 요즘도 그 하지만은 청소년 그 관람 등급가부 이런 걸 주로 결정하게 되고. 그러고 그 유해성 저 윤리성, 이런 문제도 그때는 상당히 그 시기에는 엄격히 다뤘어요. - 채록연구 배수경,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 한국영상자료원, 2015, 147-148쪽, 강조는 필자 즉, 사상 및 안보에 관한 사항은 중앙정보부, 미성년자 보호(미성년자 관람가부 판정 포함)에 관한 사항은 치안본부가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공부는 전반적으로 검열 진행과정을 조율하고, 의견을 종합하여 제작사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공윤의 본편 검열 이후(1979년 4월~ ) 약 10년 이상 유지되었던 본편 검열 체제는 1979년 4월, 문공부가 본편 검열권을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에 이관함으로써 변경된다. 공윤의 1기 영화 심의위원은 20인 이내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심의위원 17인은 공윤위원장의 추천에 따라 문공부 장관이 위촉였고, 3인은 당연직으로 구성되었다. 이 당연직에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의 검열관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체제는 1980년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히 어느 시점에 종료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료의 미비로 확인되지 않는다. 보완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1979년 7월 24일, < 간첩잡는 똘이장군 >(김청기, 1979) 공연윤리위원회 위원별 검열의견서 중 하나. 검열자 임광수는 중앙정보부 검열위원이었다. 요컨대 중앙정보부는 1961년 설립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20여년간 영화의 검열자였고, 특히 1968년 하반기 이후에는 상시적으로 영화 검열에 참여했던 가장 중요한 검열자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정보기관이 영화검열에 제도적이고 상시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당시 정부가 대국민 선전전을 광범위하게 수행했고, 영화의 대중 영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초기에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만 관여하던 정보부가 1968년 말 이후 모든 영화의 본편 검열에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이 시기 국가 안보라는 것이 단순히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화가 다루는 국민의 일상에까지 확장해 가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는 1970년대 유행했던 “총력안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부기해 둘 사항이 있다. 간혹 검열서류에서 CIA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검열자료 연구 초기, 필자를 포함 관련 연구자들이 이를 미국의 정보부로 오인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CIA가 언급된 다양한 검열자료들을 볼 때, CIA는 KCIA(중앙정보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차후 연구를 통해 보다 분명히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 주1.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되어 1965년에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