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 감독
- 김정현, 방한빈, 이도훈, 안병관, 정시연, 손석호, 황지민, 김정선
- 제작년도
- 2017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필름이 유령처럼 배회하다 떠난 자리를 상속받은 것은 극장이다. 영화가 디지털화되는 과정에서 필름의 쇠퇴는 곧 영화의 죽음이라는 담론이 있었고, 그 서사의 효력이 다하자 극장의 위기론이 부상했다. 오늘날 극장은 베일을 두른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나 지난날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그와 동시에 DVD, 불법 다운로드, 스트리밍 플랫폼에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하는 유령과 같다. 어떤 이들은 극장에서의 유일무이한 영화 관람 경험이 사라지면 그때의 영화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경고한다. 그들은 극장이 영화의 위기와 죽음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하지만 극장의 경험을 포함하는 과거의 영화 경험을 상속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동시대 영화 관람 경험은 모순적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연속적인 것과 단절적인 것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모양새가 나타나고 있다. 극장에 앉아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를 바라보던 과거의 관람 방식은, 오늘날 노트북, 태블릿 PC, 핸드폰과 같이 이동과 휴대가 편리한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관객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모니터에 출력된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람 방식으로 바뀌었다. 프란체스코 카세티(Francesco Casetti)는 자신의 책 『뤼미에르 은하계 : 도래하는 영화를 위한 일곱 개의 핵심어(The Lumière Galaxy: Seven Key Words for the Cinema to Come)』(2015)에서 이런 변화를 영화의 재배치 (relocation)라고 부른다. 그는 영화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새로운 기기를 통해서 재활성화 또는 재목적화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 영화를-넘어서는-영화의 경험 ’과 ‘ 영화로-회귀하는-경험 ’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여전히 영화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동시에 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재배치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관객의 실천 에 있다. 단순히 영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영화가 우리에 의해 구성되는 방식과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영화의 위치가 달라져도 영화에 대한 관객의 감각과 기억이 남아 있고, 이전과는 분명하게 달라진 영화를 기존의 영화처럼 바꾸어 놓기 위한 관객의 실천이 있다면, 여전히 영화는 영화적인 어떤 것으로 존속할 수 있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극장이 아닌 장소에서도 극장의 경험을 복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지털 기기로 영화를 관람하면서 모니터의 밝기를 조정하거나 스피커의 볼륨을 조정하여 최대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와 유사한 관람 환경을 구축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오늘날 관객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극장과 같은 곳에서 보장되는 몰입의 환경, 즉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관객을 지킬 수 있는 실존적인 버블(existential bubble)을 스스로 구축할 수 있다. 이처럼 관객은 영화를 둘러싼 달라진 환경을 수리함으로써 본래의 영화적 경험을 복원한다. 카세티에 따르면, “영화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했고 새로운 조건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포기 하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로 인하여 영화는 재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카세티(좌)와 앙드레 고드로, 필립 마리온(우)의 저서 (사진: “ The Lumière Galaxy ”, “ The End of Cinema? ”, Columbia University Press) 극장은 다른 자리에서 다른 경험과 함께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앙드레 고드로(André Gaudreault)와 필립 마리온(Philippe Marion)이 『영화의 죽음?: 디지털 시대의 위기 속 매체(The End of Cinema?: A Medium in Crisis in the Digital Age)』(2015)에서 제시한 ‘영화의 이중 탄생 (cinema’s double birth)’이라는 개념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영화는 역사적으로 여러 위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반복했다. 영화의 이중 탄생은 영화가 기술적으로 한번 그리고 제도적으로도 다시 한번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탄생이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는 사운드의 도입, 텔레비전의 발명, 비디오 기기의 보급, 디지털화와 같은 기술적 발전 속에서 위기와 변화를 겪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영화의 탄생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 아직 영화의 탄생이 완료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는 영화의 탄생에 있어서 가장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극장의 이중 탄생, 즉 극장 문화의 제도적 안착은 영화사 초기 30년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유랑, 정착, 성전의 세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다. 1) 유랑 의 단계: 19세기 말, 카메라와 영사기의 발명과 함께 등장한 영화는 카페, 놀이공원, 박람회, 보드빌, 장터와 같은 곳을 전전하면서 일시적으로 상영되는 문화적 이벤트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2) 정착 의 단계 : 1905년을 전후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작은 상점을 개조하여 만든 극장인 니켈로디언(Nickelodeon)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영화만을 위한 공간이 생겼다. 상설영화관으로서의 니켈로디언은 30석 내외의 좌석을 갖추고, 5센트의 입장료를 책정했고, 주 고객은 노동 계급이었다. 3) 성전화 의 단계 : 1920년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인종, 성별, 세대를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의 좌석, 화려한 외관과 실내 장식, 주차장과 매점과 같은 편의시설을 갖춘 영화 궁전(movie palace)이 등장한다.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영화 궁전이 오락을 숭배하는 공간이면서 고단한 현실로부터 달아나려는 관객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도피처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 궁전이 정신적으로 거주할 곳을 잃은 자들을 포용하는 성격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곳을 ‘집 없는 자들을 위한 안식처’라고 불렀다. (좌) 1908년부터 1914년까지 5센트의 입장료를 받고 운영되었다고 기록된 캐나다의 “Comique movie theatre” (우) 미국 텍사스 샌 안토니오에 위치한 극장 “Majestic Theatre”. 스페인의 지중해풍 양식을 반영해 1929년에 지어졌다. (사진: “ Front of Comique movie theatre ”, City of Toronto Archives / “ The Venues ”, Majestic & Empire Theaters) 이런 역사적 사실은 크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극장이 영화의 유일한 경험이 아니라 여러 가능한 경험 중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극장의 경험은 영화의 역사와 대중의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단단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지시한다. 디지털화 이후 영화는 더 이상 극장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극장은 영화의 경험을 위한 유일한 장소는 아니지만 영화적 경험의 회귀를 발생시킬 수 있는 근원적 장소이자 여러 영화적 경험이 참조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극장의 경험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이미 여러 비평가와 이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은 건축적 공간, 각종 기계 장치, 그리고 관객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구체적으로 그 경험은 극장이라는 건축적 공간이 외부의 자극을 차단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밀폐된 공간,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으로 구성된 기계적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세계, 그리고 좌석에 기댄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욕망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자신의 최근 저작인 『스크리닝 공포(Screening Fears)』(2023)에서 영화관 특유의 스크린 경험을 “ 투사/방어 복합체 (projection/protection complex)”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투사/방어 복합체는 기계적, 심리적, 사회적 장치들로 구성된 것으로, 물리적으로 폐쇄된 공간을 통해서 관객을 현실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스크린의 투명한 이미지를 통해서 관객을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투사/방어가 하나의 짝을 이룬다는 것은 영화적인 경험이 현실과의 연결/분리의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과 같다. 이 모순은 관객의 심리적 요구와도 무관하지 않다. 관객은 영화 속 세계와 연결되거나 그 세계에 몰입 하고 싶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영화가 제시하는 환영을 거부 하고 자신이 실제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꿈을 꾸면서 영화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이중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카세티는 계보학적인 관점에서 영화가 아닌 것에서도 투사/방어, 즉 관객인 우리를 스크린 속 세계와 연결하면서도 분리하는 이중의 경험이 나타난 역사적 사례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이전(pre-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판타스마고리아는 숨겨진 영사기의 빛을 통해 죽은 자의 이미지를 안전하게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한 경우이다. 그리고 영화-이후(post-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화상 채팅과 같은 오늘날의 디지털 버블은 타인과의 접촉 없이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각각의 매체적 경험은 극장과 스크린을 매개로 여기와 저기의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영화적 경험과 친연성을 갖는다. 카세티는 이러한 계보학적 접근을 통해서 영화의 탄생과 발전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식처를 갖길 바라는 대중의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한 영화적 경험 속에서 극장은 현실의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대피소로, 스크린은 현실에 대한 모의실험을 매개하는 장치로, 영화 이미지는 현실에 대한 예방주사로 존재한다. 만약, 카세티가 말하는 영화적 경험의 기원적, 본질적, 근원적 속성이 관객의 실천과 함께 역사적으로 회귀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제기되는 극장의 위기론이 지나친 기우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설령 극장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극장의 경험은 유령처럼 우리에게 상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장이 없는 자리에서도 극장은 유령처럼 나타나 관객인 우리의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여전히 영화적이라고. 이도훈(영화평론가) l 대학에서 미디어, 대중문화,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느리게 보고, 느리게 쓰지만, 꾸준히 영화와 관련된 비평과 연구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단독 저서 『이방인들의 영화 : 한국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2023) 집필, 독립영화, 에세이영화, 포스트-시네마 등과 관련된 학술 논문 집필.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현장’에서 탄생했다. 얄라셩, 노동자뉴스제작단, 푸른영상, 바리터 등이 제작한 초기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민중, 노동, 농촌, 학생, 여성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현장을 촬영하고, 기록하고, 전파했다. 이 흐름은 4대강 사업, 강정해군기지, 세월호 참사, 밀양 송전탑 등의 현장에서도 이어졌다. 한편으로, 90년대 중순 비디오 캠코더의 보급으로 강화된 기동성에 힘입어 보다 다양한 주제의 다큐멘터리가 등장했다. 빌 니콜스의 분류에 따라 ‘수행적 다큐멘터리’ 라 부를 수 있는 최진성, 이마리오, 경순 등의 작품들, 혹은 다큐-픽션이라 명명할 수 있을 윤성호 등의 작품들이 등장했다. 이전의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의 연출자들이 기록자이자 관찰자의 위치를 고수했다면, 이들 작품은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주관적으로 풀어낸다. 김응수의 < 초현실 >(2016)과 < 오, 사랑 >(2016), 이원우의 단편 작업들처럼 에세이영화,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 사이에서 활동한 감독들의 작품 또한 이것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 있다. 디지털이, 더 정확히는 인터넷이 우리의 삶 속으로 깊이 침투한 이후의 현장은 새로이 변화하고 있다. 여전히 물리적인 공간을 요구한 운동이 지속되고 있지만, 모종의 결속력과 행동력을 생산하는 것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다. 팬데믹 이후 전개된 메타버스에 관한 논의 대부분은 이미 사회운동은 물론 소통, 유희, 거래, 창작 등 수많은 활동이 온라인에서 전개되고 있었음을 망각한 채 진행되었다.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현장은 알록달록한 스킨의 아바타를 매개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다음 카페, DC인사인드, MMORPG 게임, 유튜브, 틱톡, 스카이프 등의 모습으로 이미 존재해왔다. 이 새로운 현장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을까? 물론 박윤진의 < 내언니전지현과 나 >(2020)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인터넷을 접해왔고 그곳에서 공동체를 만들어낸 이들의 이야기. 이 영화는 그것을 흥미롭게 그려낸 사례 중 하나다. 다만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현장을 현실과 등치시키며 엮어내고 있지만, 새로운 현장 자체를 탐구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이 글에서는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현장을 탐구하는 두 명의 작가를 다루고자 한다. 먼저 소개하고자 하는 이는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2019)와 < 들랑날랑 혼삿길 >(2021)의 홍민키다. 퍼포먼스와 영상설치 작업을 중심으로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홍민키 작가의 작품 중 두 작품은 인디포럼을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두 작품 모두 전시를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었지만, 미술계에서 생산된 여러 작품이 다큐멘터리 혹은 실험영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영화제에 유통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영상작업을 여럿 선보여온 홍민키의 작품이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는 서울 도심 위를 날아다니는 가상의 공중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토론회다. ‘망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된 망원동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살아온 주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홍민키의 얼굴 위에 주민들의 얼굴을 딥페이크 기술로 합성한 뒤 그들의 음성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더불어 SNS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은 망리단길의 지금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인스타그램 타임라인의 이미지를 스튜디오에 둥둥 떠다니게 한다. 수해를 입었던 기억부터 조만간 사라질 거품으로 느껴진다는 이야기, 동네에 새로 생겨난 ‘힙한’ 카페에서 중년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는 증언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온라인과 SNS라는, 물질적인 현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세계는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가? 장소성을 지니지 못하는 온라인 공간은 존재하는 장소를 어떻게 뒤바꾸어 놓는가?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는 ‘망원동’이라는 장소가 ‘망리단길’(을 비롯해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전국 곳곳의 공간들)이라는 비(非)장소, 즉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 이 되어가는 현상의 기록이다. 동시에, 이러한 현상에 그 무엇보다 깊게 관여하고 있는 것이 SNS 타임라인이라는 독특한 비장소를 통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것과 유사한 성질을 지닌 가상의 스튜디오, 토론회, 딥페이크로 합성된 얼굴, 아바타로 만들어진 특파원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커밍아웃한 게이인 홍민키 감독이 친형의 결혼이라는 상황을 맞이해, 게이인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관해 가족들에게 직접 질문한다는 내용의 <들랑날랑 혼삿길>은 얼핏 이 주제와 관련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형, 형수, 아버지, 어머니, 시장어른 등 가족과의 인터뷰, 대중교통을 타고 가며 지인과 영상통화 하는 홍민키, 그리고 집에서 애인과 촬영한 영상 등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된다. 이 중 가족들의 인터뷰는 각자의 방에서 줌(ZOON)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한 것만 같다. 하지만 인터뷰의 내용에 따라 통신이 불안정해 화면이 끊긴다거나, 액자가 넘어진다거나 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다. 자세히 보면 이 화면은 실제 공간이 아니라 가상화면이다. 홍민키와 지인의 영상통화는 세일러문과 보라돌이 캐릭터를 각자의 얼굴에 덧씌운 채 진행된다. 전자의 공간은 온전히 ‘집’인 것처럼 보이는 가상의 공간이며, 후자의 공간은 완전히 개방된 공공의 공간인 것 같지만 퀴어인 두 사람은 얼굴을 감추어야 한다. 홍민키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어떠한 후가공도 없는, 집에서 애인과 촬영한 영상뿐이다. 세 가지 층위는 한국의 가족제도 내에서 퀴어의 존재가 가지는 지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령 가족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화상회의 프로그램은 그것이 지닌 물리적 거리감을, 가상공간의 디자인은 그럼에도 존재하는 모종의 친밀감을 형상화한다. 스마트폰을 통해 원하는 캐릭터의 얼굴을 쓰고 영상통화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온라인 공간은 얼핏 모두에게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인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는 동일한 화면 위로 살포되는 동성애 혐오적인 온라인 삐라를 보여준다. 온라인이라는 가상은 정체성의 표현을 열어주었으며,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퀴어와 호모포비아 모두 동일하다. <들랑날랑 혼삿길>은 이성애를 전제하는 가족제도 내에서 퀴어의 위치에 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각자의 정체성이 표출되며 복잡한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 온라인 공간에 관한 스케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점에서 홍민키의 두 작품은 온라인과 현실이 상호적으로 주고받는 영향의 복잡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홍민키가 온라인 공간의 특징들을 그래픽과 딥페이크 등으로 재현했다면, 정여름의 두 작품은 직접 그 속으로 들어간다. <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2020)은 증강현실 모바일게임 [포켓몬 고](2016)에서 출발한다. 해방촌에 사는 감독은 게임을 플레이하던 중 용산 미군기지 내의 포켓스탑을 발견한다. 포켓스탑은 아이템을 보급받을 수 있는 게임 내 장소로, 이는 실제 세계의 공공시설, 역사적 장소, 기념비 등을 기반으로 위치 지어지며 다수의 플레이어가 선택한 장소가 지정된다. 게임 내에서 포켓스탑을 터치하면 실제 장소의 사진이 등장한다. 감독은 이를 통해 한국인 대부분이 출입할 수 없는 용산 미군기지 내부를 탐색한다. <그라이아이>는 그렇게 발견한 용산 미군기지 내의 제국주의, 전쟁, 자본주의, 미국과 관련된 기념비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온라인에서 발견한 연관된 푸티지들과 엮어낸다. 이는 [포켓몬 고]라는 게임이 현실의 지리학 위에 게임의 지리학을 세워 놓는 특징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 나아가 이 영화에는 감독이 직접 촬영한 영상이 부재한다. 오로지 게임을 녹화한 화면과 온라인에서 발견한 푸티지들만이 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여름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설계된, 반대로 내부에서는 그곳이 ‘용산’이 아니라 ‘미국’처럼 보이게끔 설계된 용산 미군기지라는 곳을 탐험한다. 보이지 않게끔 은폐된 가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용산 미군기지를, 더욱 가상의 공간인 온라인을 통해 그곳을 가리고 있던 유무형의 장막을 걷어내는 작업인 셈이다. 정여름의 두 번째 영화인 <긴 복도>(2021)은 직접 미군기지 안으로 들어간다. 국내에 반환된 미군기지 중 하나인 원주의 캠프 롱(Camp Long)에서 직접 촬영된 이미지가 이 영화의 절반을 차지한다. 다른 절반은 과거 캠프 롱의 PX에서 일했던 한 인물의 일기와 사진, 그리고 구글맵 이미지 등이다. 흥미롭게도 미군이 철수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구글맵에 남아 있는 여러 흔적, 이를테면 ATM이나 PX의 위치가 찍혀 있는 지도는 <긴 복도>의 주인공인 탐정을 혼란스럽게 한다. 현실의 공간에는 미군이 철수하고 남은 폐허 상태의 건물만이 남아있지만, 온라인 상의 지도에는 여전히 기지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오로지 탐정이 온라인 지도를 들여다볼 때에만 존재하는 기지는 그 자체로 탐정 앞에 현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지도라는 매체를 통해 유사-현전(pseudo-presence)할 뿐이다. 우리는 온라인 상의 정보들이 우리의 앞에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은 그것은 매체를 통해 현전할 뿐인 정보, 텍스트, 이미지들이다. 즉 멀리 있는 대상이 실제로 가까이에 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체를 통해 그렇게 느낄 뿐이다. <긴 복도>의 탐정은 유사-현전한 미군기지의 좌표를 통해 과거에 그곳에서 일하던 이들을 추적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대신 그가 찾아낸 것은 마찬가지로 온라인 상의 좌표로써만 현전하는 세계 곳곳의 미군기지들, 미군기지 내의 ATM이나 PX, 은행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의 흔적뿐이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이 실제 세계 위에 세워진 은폐된 공간을 온라인으로 탐험하는 작업이었다면, <긴 복도>는 오로지 온라인을 통해서만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추적하는 탐정물이다. 두 가지 작업은 얼핏 각자의 방식으로 미군기지라는 대상을 탐색하는 것만 같지만, 그와 동시에 오로지 온라인이라는 가상적 공간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곳을 가시화하려는 작업이다. 때문에 ‘탐정물’의 형식을 차용하는 <긴 복도> 또한, 현재에 비가시화된 과거인 철수한 미군기지를 되짚어보는 다큐멘터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홍민키와 정여름의 작업들은 온라인을 새로운 현장으로 인식하고 그곳을 경유한 사유를 풀어낸다.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의 인스타그램 타임라인, <들랑날랑 혼삿길>의 화상회의 프로그램,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의 모바일 게임, <긴 복도>의 온라인 지도는, 얼핏 실재하는 현실과 상관없어 보이는 온라인 공간이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준다. 홍민키의 두 작업은 그것이 현실과 얽혀 주고받는 영향을, 정여름의 두 작업은 오로지 온라인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현실의 여러 가지 지표들을 탐구한다. 이러한 다큐멘터리들이 지금 등장한다는 것은 ‘메타버스’를 비롯한 여러 담론이 작품으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생의 대부분에서 온라인을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활동 영역으로 여겨온 이들이 온라인을 새로운 현장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 1) 빌 니콜스, 「다큐멘터리 입문」, 이선화 역, 한울아카데미, 2018, p.76 2) 이도훈 평론가는 이러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을 각각 "현장-기반의 다큐멘터리"와 "현장-전유의 다큐멘터리"라 명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도훈, "현장을 전유하는 다큐멘터리: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가 현장과 결합하는 방식", 「현대영화연구」, 한양대학교 현대영화연구소, 44호, 2021, p.125~150. 을 참고하라. 3) 마르크 오제, 「비장소」, 이상길, 이윤영(역), 아카넷, 2017, p.97. 4) 심혜련, "매체적 현전 시대에서의 공간과 지각의 문제에 관하여", 「계간 시청각 4호」, 서울: 시청각랩, 2019, p.24.
한국 독립영화는 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태동하였다. 서울영화집단과 서울영상집단, 민족영화연구소, 노동자뉴스제작단, 장산곶매와 같은 단체들은 소형영화, 작은영화, 민중영화와 같은 분류의 영화들을 내놓았다. ‘독립영화’라는 명칭이 PD(민중민주)와 NL(민족해방) 사이에서 나름대로 중립적인 용어였기 때문에 무난히 수용되었다는 견해 1) 가 있을 정도로, 초기 한국 독립영화는 반독재 투쟁 및 민주화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 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민주화운동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연이어 들어서며 민주화운동은 완전한 결실을 맺은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면의 그늘 또한 존재한다. 반독재투쟁이 한참이던 시기 촬영된 < 상계동 올림픽 >(1988)의 풍경은 < 그들만의 월드컵 >(2002)에서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제도적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한국 사회는 경제, 노동, 인권, 소수자 등의 문제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IMF 외환위기 극복, 경제성장, 한류 등으로 되는, 소위 ‘국뽕 서사’의 이면에는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이 놓여 있다. 외환위기 극복 이후의 일상적인 출근길, 희망과 낙관을 품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여전히 산재하는 문제들을 주목한 이강현의 < 파산의 기술記述 >(2006)과 같은 작품은 그것을 선구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사진작가 홍진훤의 첫 다큐멘터리 작업이라 할 수 있는 < 멜팅 아이스크림 >(2021)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최신의 작업 중 하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창고에서 ‘수해필림’이라고 적힌 의문의 필름 뭉치가 발견된다. 당시 현장을 기록하던 사진 집단들을 찾아가 이 필름의 흔적을 따라가며 복원을 시도한다.” 홍진훤의 기존 작업을 잘 모르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과거의 사진을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에 관한, 작가보다는 아키비스트의 지위를 지닌 이의 작업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영화는 수해를 입어 필름 위의 유광제가 녹아내릴 위기에 처한 사진들을 복원하는 한편, 사진을 찍었던 이들이 기억하는 당시에 관한 인터뷰를 담아낸다. 더 나아가, 홍진훤은 ‘미디어 참세상’ 아카이브에 있던 2000년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및 이주 노동자 투쟁 현장이 담긴 이미지를 포개어 놓는다. 사진에 담긴 ‘민주화운동’, 2000년대의 투쟁현장, 그리고 인터뷰와 사진 복원이 벌어지는 현재, 이 영화에는 세 개의 시간축이 공존하고 있다. 세 개의 시간축을 몽타주하는 <멜팅 아이스크림>은 “수해필름의 복원”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민주화운동의 시간을 기념비적인 것으로 추켜세우지 않는다. 민주화운동 당시 각각 민족사진연구회, 사진통신, 사회사진연구소에서 활동했던 박승화, 서영걸, 이정용의 인터뷰는 민주화운동 시기의 영웅담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A컷’을 얻는 것에 몰두하게 된 자신과 동료들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반독재투쟁이라는 추상적인 말”에 매몰된 민주화운동 속에서 계급과 경제의 문제는 뒤편으로 사라졌고, “반독재는 알지라도 경제는 모르는” 이들에 의해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는 가속화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영웅들이 대통령을 지내던 시기의 투쟁들은 맹렬하게 짓밟혔다. <멜팅 아이스크림>이 인용하는 2000년대 초중반의 투쟁 현장 푸티지들은 폭력과 욕설과 절규와 눈물로 가득하다. <멜팅 아이스크림>에서 복원되는 사진은 민주화운동 투사들의 영웅적인 모습이 담긴 A컷들이 아니다. 과거의 기록을 들춰보고 복원하려 할수록, 이미지는 필름에서 지워진다. 이미지가 지워진 필름은 그저 투명할 뿐이다. 영화의 인터뷰이들은 386세대의 민주화운동이 그러한 성질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기록을 들춰볼수록 그것은 투명한 공백이 된다. 수해로 훼손된 필름은 녹아내린 물감이나 아이스크림처럼 이미지를 뭉개버린다. 비디오 캠코더와 저화질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2000년대의 투쟁현장 또한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이 그대로 노출되는 ‘깍두기 현상’으로 가득하다. 열화된 이미지들, 열화된 기록들은 필름에서 이미지가 지워지듯 공백으로 돌아간다. 홍진훤 감독은 촬영감독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동상을 “최대한 이상하게”, “녹아내리듯 그리고 추락하듯”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말했다. 2) 과거의 영웅들이 담긴 이미지가 흘러내린 공백엔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차별, 우경화 등이 새겨진다. 2000년대의 투쟁현장이 담긴 푸티지들의 일그러진 영상은 영화 후반부로 향할수록 점점 선명한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이것은 민주화운동 영웅들의 이미지 밑에 잠들어 있던 공백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그 공백은 현재까지도 진행되는, 당시와 같으면서 다른 투쟁을 일으킨다. 공백이었던 계급, 경제, 노동, 소수자의 문제는 2022년에도 여전히 산재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공백 위로 행인들의 모습이 담긴 슬로우모션과 다양한 이유로 투쟁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삽입한다. 이 음성은 2021년 하반기 총파업에서의 음성이다. 팬데믹 시기에 물류를 책임진 화물연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보건의료노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공백을 채우는 새로운 투쟁으로 새로운 세계가 기록된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공백 없는 운동이 가능할까?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촛불혁명을 거쳐온 지금 무언가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지난 5년간 투쟁현장을 기록하고 < 골목의 이야기 >(2016), < 피와 재 >(2016), < 례 >(2018) 등을 만들어온 다큐멘터리스트 권순현의 단편영화 < 농몽 >(2020)은 그러한 인상을 풀어놓는다. 이는 지난한 투쟁의 결과에 대한 반성과 소회라기보단 그 과정에서 느낀 복잡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에 가깝다. 권순현은 "‘현장’은 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며, "현기증 속에서 나는 그 어떤 사건도 그 어떤 사물의 위치도 제대로 그려낼 수 없었"고, "(지난)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모두 망향의 기록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3) <농몽>은 이 모든 것을 겪은 이후, 그리고 촛불혁명 이후 감독 스스로가 느낀 공허함에 관한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자기연민과 자기비하로 가득하다. 감독은 A, B, C라 명명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낸다. 함께 투쟁한 사람, 2008년 촛불시위를 제안한 사람,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 감독의 내레이션은 세 사람의 말과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끌어온다. 촛불은 2008년 당시 20대였던 A의 ‘팔뚝질’을 대체하는 사회운동의 장신구일 수도, 더 큰 민주주의 같은 것을 꿈꾸었으나 자초한 논란으로 인해 실패해버린 B의 바람이 담긴 무언가일 수도 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2016년의 촛불은 평화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시위 당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선 이들은 이 시위가 무엇보다 '평화'시위일 것을 주장하며 기존의 운동권으로 불리던 이들이 전개하던 투쟁 방식에 반대한다. 그때의 '평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제도 조선소의 투쟁을 기록하던 감독은 그곳에 위장취업할 것을 제안받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위장취업에 실패한 것에 안도한다. 얼마 뒤 조선소에서 크레인 붕괴사고가 발생하고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는 다시 한번 안도한다. C는 크레인 붕괴사고를 겪었다. 그의 트라우마 앞에서 감독은 안도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력을 동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의 투쟁에 대한 폭력이 전도된 것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촛불을 들고 평화시위를 주장하며 거리에 나서는 행위는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연대임과 동시에 시위현장에서의 폭력을 시야에서 치워버리고자 하는 모순적인 행위다. 투쟁현장을 기록하던 감독이 느끼는 자기모순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농몽>은 투쟁현장과 방식에 대한 불쾌감과 반항, 혐오를 담은 영화가 아니다. 촛불혁명 이후의 회고담 같은 것은 더욱 아니다. 학생운동이 종말을 맞이하고 모든 것이 망해버리거나 끝나버린 것 같은 순간 현장으로 향한, 노동자도 운동가도 아닌 위치에 서있으면서 투쟁현장에 뛰어든 어떤 사람의, 다소 질척이는 자기고백이다. <농몽>이라는 자기고백은, 그 결은 조금 다르지만 <멜팅 아이스크림>이 보여준 공백 이후의 세계와 공명한다. 공백 이후의 세계, 한쪽에서는 승리의 서사를 써내려 가지만 다른 한쪽에선 항구적인 투쟁 속으로 사람들이 내던져지는 세계, 이 세계는 마치 모든 사람의 기력이 소진되길 기다리는 지옥인 것만 같다. 물론 두 영화가 그 지옥에 머물고자 하는 냉소에 파묻힌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러한 냉소를 딛고 일어나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하는 작품은 더더욱 아니다. <멜팅 아이스크림>과 <농몽>은 녹아내린 시대와 소진된 마음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들이며, 이 이야기들이야 말로 그 이후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 1) Young-a Park, Unexpected aliances: Indiependent Filmmakers, the State, and the Film Industry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4, p.50(이도훈, "이름의 부재와 경험의 빈곤", 「독립영화」, 한국독립영화협회, 제49호, 2020에서 재인용). 2) 홍진훤, "서신교환: 장윤미X홍진훤, 「마테리알」, 7호, 마테리알, 2022, p.48. 3) 권순현, 「2021 독립영화 쇼케이스」, 한국독립영화협회, 2022, p.158~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