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사 왕서방
- 감독
- 조명화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곽무성, 조인선, 문성웅, 오은주, 진가개, 현길수, 한태일, 장계룡, 국정환, 김욱, 남포동, 황국주, 이백, 길다로, 임해림, 한국남
영화는 인연이다. 영화의 경계가 얇아지고 구분이 모호해지는 요즘 부쩍 그런 생각에 자주 잠긴다. 어떤 영화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2023년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 괴물 >이 그랬다. 나는 이 영화를 칸영화제에서 한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국내 개봉 뒤 마지막으로 한번, 총 세 번에 걸쳐 극장에서 만났다. 공교롭게 <괴물>은 하나의 사건을 세 가지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이야기다. 안팎으로 묘한 인연과 기시감에 사로 잡힌다. 하나의 사실이 어떤 경로를 경유하여 나에게 당도하는가. 영화는 결과를 산출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에 이르는 과정을 구태여 복기하는, 비유하자면 지나간 길의 얼룩을 다시 더듬어 본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다르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괴물>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영화였지만 여러 번 보면서 빠져들었던 건 나에게 당도하는 사실들의 미묘한 차이들을 비교하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이미 수 많은 평자들의 빼어난 분석들이 다 완료된 지금, 이 영화를 새삼 되돌아보며 딱 맞춰지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 복기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분석이라기 보다는 인상의 차이를 비교하는 쪽에 가깝다. 다시 말해 영화 안팎의 (개인적인) 경험과 불순물들이 함께 섞여 들어간 기억의 기록이다. 세 번의 만남, 두 가지 감상, 하나의 얼룩 칸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괴물>은 대수롭지 않은 영화였다. 전작 < 브로커 >에 대한 실망감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는데, 경쟁작 중 제일 먼저 상영한다는 걸 알고 난 뒤 그저 그런 범작일 거라 판단했다. 대부분 초반에 상영되는 경쟁작들은 신인의 작품이나 수상권에서 먼 경우가 있는지라 멋대로 판단하고 영화의 최초 시사를 보지 않았다. 함께 간 다른 기자가 보고 온 뒤 영화에 대한 흥분과 열기를 전해주었고 뒤늦게 표를 구해 극장에 갔다. <괴물>은 나의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를 여지없이 부수어 주었고 뒤늦은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여기까진 평범한 반성의 이야기. 정작 의아했던 건 영화에 대한 기자들의 평가가 대체로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당 수 평자들이 ‘고레에다의 새로운 드라마와 안정된 연출’정도로 박한 평가를 내렸다. 박한 평가의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많이 본 소재와 구성이라는 점이었다. 형식적으로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 라쇼몽 >의 영향 아래 놓인 영화라는 단편적인 인상이 지배적이었고, 내용적으로는 작년에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루카스 돈트 감독의 < 클로즈 >와 종종 비교되기도 했다. 요약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흥미롭긴 하지만 (그가 늘 그랬듯이) 무난하고 깔끔한 결과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평이었다. 영화를 막 보고 나온 뒤 심장이 두근거리던 입장에선 얼핏 이해가 가면서도 납득은 되지 않는 반응이었다. 올해 칸영화제의 수상 결과는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만한 것이었는데, 무엇보다 <괴물>의 각본상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연출’보다는 사카모토 유지의 ‘이야기’가 도드라진다. 사카모토 유지는 이 영화가 본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여러 번 밝혔다.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겪었던 일이다. 신호가 빨간불이어서 멈췄는데 내 앞에 트럭이 한대 있었다. 그런데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는데도 한참을 꼼짝하지 않는 거다. 이상해서 경적을 몇번 울렸다. 잠시 뒤 트럭이 움직이고 나서야 휠체어에 탄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트럭은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그때 사정도 모르고 경적을 누른 게 내내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내가 알지 못한 채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었다가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했다.”(씨네21 1433호, 괴물>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 인터뷰 ‘어쩌면 진실은 이야기 바깥에’ 중) 범상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통찰. 영화를 향한 상찬도 딱 그정도에 그쳤던 것 같다. 찜찜한 의문을 뒤로 한 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만난 영화는 전혀 다른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개인적인 인상으로 작년 부산에서 가장 뜨거웠던 영화 중 하나는 <괴물>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아역 배우들이 내한한 게 열기를 달구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미나토와 요리 역을 맡은 쿠로카와 소야, 히이라기 히나타 배우는 의도를 초과하는 존재감을 스크린에 새겨 넣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놀라운 마법(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재능)은 어린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는 방식에 있다. 그의 카메라는 사실의 일부분을 무난한 방식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따르지만 그가 포착하는 대상은 현실에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빛난다. 단지 예쁘고 잘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시절에만 허락된 반짝임을 찾아내고 원석 그 자체의 생동감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방식은 재능과 감각이라는 헐렁하고 추상적인 단어 이외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마침 올해 부산에 < 아무도 모른다 >의 야기라 유야 배우가 <간니발> 홍보 차 방문해 있었기 때문에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올해 부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많은 설명을 쏟아냈다. 몇몇 멘트들은 배우들과 함께 하는 자리이기에 더욱 의미 있는 발언들도 있었다. 다시 본 <괴물>이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의도를 초과하는 장면들이었다. 소년들이 사실 어떤 관계였고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했는지, 이야기의 전모를 알고 난 뒤 다시 보는 어른들의 시점은 어딘가 절박하고 애처롭다. 진실을 오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여기에 진실 따윈 없다. 싱글맘 사오리(안도 사쿠라)와 담임 선생 호리(나가야마 에이타)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이야기 역시 각각의 진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진실찾기의 추리에 매달리는 대신 매 순간 장면에 맺히는 시점의 가능성에 공을 들인다. 한 마디로 모두 진심으로 절박하다. <괴물>의 다중시점은 카메라의 본질적인 한계를 증명한다. 진실은 없다. 우리가 목격하는 건 사실의 조각일 뿐이다. 정확히 진실이란 이야기 바깥 혹은 사건과 사건 사이에 깃드는 가능성에 가깝다.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괴물>은 그 소년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이야기의 전체 그림이 무엇인지를 추리하는 이야기의 구성에 홀리지 않고 각각의 인물들이 순간에 집중한다. 어떤 이야기인지 전체 꼴을 알고 있음에도, 아니 알고 있기에 각 인물들이 느꼈을 절박한 감정들이 더욱 진심으로 다가온다. 진창에서 미나토를 찾아서 함께 걸어오는 장면에서 사오리, 아니 안도 사쿠라의 몸짓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전체를 초과한다. 미나토와 사오리가 나란히 선 뒤 걷는 이 장면은 지금 포착되고 있는 것에 온 힘을 쏟는다. 매 순간의 진실들을 포착하는 시선. 그렇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시선의 한계를 인지한다. 부분을 전체로 호도하지 않을 수 있는 태도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순간 <괴물>은 사카모토 유지의 이야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시선으로 무게추를 이동한다. 아니 애초에 영화는 그 자리에 헐거운 장면들을 느슨하게 꽂아둔 채 있을 뿐, 이동한 건 내 마음이다. 두 번째 본 <괴물>은 결국 어떤 자리에서든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고레에다의 시선의 영화였다. 나를 되돌아보고 너를 상상하는 시간 마지막으로 2023년 끝자락, 겨울 한복판에서 <괴물>을 다시 본다. 다시 말하지만 정교한 이야기나 안정감 있는 구성, 빼어난 연기는 이미 설계도 수준으로 자세히 해설되어 있다. 이 글은 미처 닦아내지 못한, 어쩌면 영영 닦이지 않을 내 마음 속 얼룩에 대한 묘사다. 칸에서 영화를 보자마자 동료와 의견이 갈린 지점은 엔딩에 대한 해석이었다. 동료는 마지막 장면이 소년들의 완벽한 순간을 그리는 플래시백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소년들의 죽음 이후를 보여준다고 받아들였다. 폭우 이후 미나토와 요리는 함께 세상을 떠났고,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두 사람만의 낙원으로 떠난 모습이다. 의도 했건, 무지했던 현실은 두 소년을 여러 방식으로 밀어냈고 두 사람만의 아지트를 찾아낸 소년들의 시간은 거기서 멈췄다,고 생각했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엄마 사오리와 호리 선생이 아지트를 발견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비가 갠 장면의 연결 방식, 날이 갠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소년들을 잡아주는 희뿌연 장면의 톤까지 명백히 사후세계를 묘사한다고 받아들였다. 왜 소년들을 죽여야만 했는지를 묻는다면 다양한 답변도 가능할 것이다. 왜 끝을 비극으로 마무리했어야만 했는지를 묻는다고 해도 설명할 논리들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세 번째 다시 본 날, 그것이 죽음과 이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이 이야기가 누가 괴물인지 찾거나 책임을 묻기 위한 진실 찾기 게임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건 변해가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절박한 얼굴,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의 황망한 얼굴, 세상 해맑게 서로를 마주보는 소년들의 화사한 얼굴이다. 그리고 마치 이야기의 벽을 깨는 듯한, 세상 바깥에서 들려오는 듯한 트럼펫 소리와 교장 선생님의 헤아리기 힘든 얼굴. 이것들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연결할지는 결국 스크린 앞에 앉은 내 몫이다. 문득 아직도 이야기의 빵부스러기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세 번을 마주한 뒤에야 손을 털고 일어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영화가 진실의 씨앗을 심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1년에 걸친 만남 끝에 어느덧 거울이 된 영화 <괴물>을 마주하며 이야기 바깥, 프레임 바깥, 나의 바깥을 그려본다. 2024년 <괴물>을 되돌아보며 너를 상상하는 힘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 실감한다. 비가 갠 뒤 뽀샤시하고 포근해 보이는 소년들의 낙원, 그곳에서의 힘찬 뜀박질을 뒤로 한채 극장 바깥으로 나선다. 아직 겨울이다.
처음 이 영화를 접하게 되었을 때 영화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왜 이영화가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영화가 최근만 해도 < 택시운전사 >( 장훈 , 2017)가 나왔고 이전에도 이미 여러 형태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등 많은 작품이 나온 데다 역사적으로도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된 지가 수십 년이 지났는데 과연 어떤 새로운 시선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극영화도 아닌 다큐멘터리라면 극적 장치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도 많지 않고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혀 경험하거나 가까이 접할 수 있었던 세대도 아닌 젊은 감독의 작품이라니…….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이 의문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게 된 첫 번째 계기이자 믿음은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작이라는 사실이었다. 영화제의 권위에 기대겠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 영화제가 지금까지 보여준 영화선택의 숨결과 강고한 시선을 믿었고 심사위원뿐 아니라 수많은 영화제 관계자와 또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의 지지라는 것에서 나름의 객관성을 부여 받은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극우논객으로 잘 알려진 지만원씨가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 특수군이 적극 개입해 활동했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1988년 광주청문회부터 이미 진실이 상당부분 밝혀졌고 5.18특별법도 제정되었고 쿠데타의 장본인인 전두환이 20여 년 전 사형선고까지 받은 마당에 새삼스레 저런 억지 주장을 하는 근거가 뭔지 참으로 황당한 궁금증이 생겨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법원이 지만원씨에게 2억 원이 넘는 명예훼손 손해배상금을 피해자들에 지급하라고 판결이 나 이 부분은 완전히 허위사실임이 입증되었지만 여전히 유튜브 등에 이런 가짜뉴스가 넘치고 있고 이를 믿는 이들이 또 다시 전파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 이러한 허위사실로 유포자가 손해배상금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것에서 악의적 역사팔이가 얼마나 해로운가는 역으로 증명되었지만 유수의 대기업을 비롯해 국가정보원까지 이런 매체에 광고가 실리고 있으니 과연 이 영화 < 김군 >( 강상우 , 2018)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 지가 더 궁금해 졌다. 또한 지만원씨가 주장한 바로 그 김군이 북한 특수군이 아니라는 사실은 취재 초기 이미 강상우 감독도 알았다고 하니 그는 그 이후 김군이라는 제명으로 이 영화를 어떻게 전개했을 지에 대한 의문도 깊어졌다. 영화의 내용은 극히 간단하다. 포스터에 보이는 바로 그 신원미상의 인물인 김군이 누구인지 그는 왜 거기에 있었는지 등을 알아보겠다는 젊은 감독의 패기가 무려 4년이나 이어지면서 이 영화가 완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만원씨의 광주민주화운동 북한 특수군 개입설이라는 대립항이 나오면서 영화가 좀 더 긴장감을 가지게 된 것도 웃픈 현실이지만 영화는 이를 증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면에서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 십분 발휘되었다.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많은 이들이 왜 시민군이 되어야 했던가를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이렇게 절실하게 담아낸다는 것은 어떤 영화적 재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자 범인들이 만들어가는 역사라는 그 평범한 진리를 체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인터뷰이이자 주인공이자 또 다른 김군이었던 이들은 계엄철폐나 독재타도와 같은 거대 담론을 주장한 것도 아니고 군부의 정치가 한국사회에 끼쳐온 폐해에 대해 사회과학적 인식으로 무장한 지식인들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했던 이들이 자신의 이웃과 시민들이 군부에 무참히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고 인간 본연의 의로움과 정의로움으로 떨쳐 일어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을 <김군>은 보여주고 있다. 감독 역시 김군이 누구인가를 꼭 밝혀내겠다기보다는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그 시대를 살아간 김군이라는 보편적 시민에 대해 다가간 듯하다. 이것이 영화적 성취로 이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과 빵과 김밥을 나누어주고 먹던 풍경이나 그 살벌한 상황에서도 그저 같이 다니고 서로를 위하던 모습이 너무 좋았다는 어느 시민군의 말처럼 인간이라면 응당 느껴야할 자연스런 감정과 선한 정서가 그 시대 김군으로 상징되는 광주정신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난 역사적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에게도 <김군>이 와 닿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적어도 오늘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상반된 주장과 철학을 가진 사람들도 평화롭게 시위를 벌일 수 있을 정도의 성숙한 민주주의의 토양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광주민주화운동에 깊은 고마움을 표시해야한다. 다시 평범함을 빌어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시민군이 당시 공포보다는 행복감을 느꼈고 시위에 참여한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지만 그 이후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고 취직도 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에서 <김군>은 우리에게 뭉클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아울러 거창한 장치나 높은 제작비가 아니라 단순하고 집요하고 깊이있는 작가정신이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준다는 극히 당연한 그러나 지금의 영화제작환경에서는 그렇지 않아 보이는 진실을 영화 <김군>은 말하고 있다.
‘성장영화’라고 하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보편적인 스토리 진행 방식이 있다. 고난과 역경을 겪는 등장인물이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한 후에, 무사히 다음 생애 주기로 진입하여 비로소 예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성장영화의 한 기준점으로 자리 잡은 이 독립영화는 어떨까. 어느새 개봉 10주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영화 < 파수꾼 >( 윤성현 , 2011)에 대한 비평과 담론은 꾸준히 생성되고 있다. 특히 청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영화가 등장하면 <파수꾼>과 비교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절차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어느덧 우리나라 청소년 성장영화의 대표작이 되어버린 이 영화가 사실 우리가 익히 알던 성장영화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구타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파수꾼>은 곧이어 삭막한 아파트가 늘어선 전경을 비추며 영화의 진행이 밝지만은 않을 것을 암시한다. 아들 기태의 갑작스러운 자살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 아버지의 시점에서 희준, 동윤의 시점으로 이어지는 플래시백 구조를 통해 영화는 등장인물 각각의 미세한 심리 변화에 주목한다. 지금은 충무로를 대표하는 젊은 피들이지만 당시에는 풋풋한 신인이었던 배우들의 날 것 그대로의 연기는 모두가 거쳐왔으나 망각하고 있었던 그때 그 시절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기존 성장영화의 철칙과 달리, <파수꾼>의 아이들은 상처는 단지 상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온몸으로 역설한다. 한 소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추적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영화는 결국 명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 채로 끝이 난다. 세 소년이 어긋난 소통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 입고, 또 상처 입힌 자국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나의 성장기는 본의 아니게 <파수꾼>과 함께였다. 기태, 동윤, 희준 세 친구보다 어렸던 중학교 3학년, 그들과 같은 나이였던 고등학교 2학년,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거쳐 비로소 성인이 된 지금. 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관람 시기에 따라 <파수꾼>은 변해왔던 내 나이만큼이나 다른 느낌을 안겨주었다. 열여섯 살의 나는 교실 내부의 보이지 않는 서열화를 매우 싫어하였기 때문에 반 친구들 위에서 군림하려 드는 아이들을 기피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의 내가 기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희준에게 이입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열여덟의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중재자’ 역할을 하던 아이였다. 그러므로 기태와 희준의 갈등으로 걱정하는 동윤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희준 같은 중학생이자 동윤 같은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두 인물처럼 당시에는 기태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다시 본 <파수꾼>의 소년들은 학창 시절의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생각보다 희준은 강인했고, 동윤은 위태로웠으며, 기태는 여렸다.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나와 달리, ‘어른’의 문턱을 넘은 현재의 나는 비교적 넓은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지러운 핸드헬드의 화면 속에서 기태와 희준, 희준과 동윤, 그리고 동윤과 기태는 야구공을 통해 이미 색이 바래버린 서로의 마음을 뒤늦게 전하고 있었다. 영화 초반에 관객들은 자살한 인물이 당연히 물리적 폭력의 피해자인 희준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영화는 가해자인 기태를 자살의 주체로 제시하며 관객을 혼돈에 빠뜨린다. 소위 ‘일진’으로 불리는 서열의 최상위권 기태에 비해 희준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기태의 눈빛은 흔들리는 반면 희준의 눈빛에는 강단이 서려 있다. 뺨을 맞고 머리채가 잡히는 인물은 희준이지만 어째서인지 기태가 아파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희준은 자신의 ‘자존심’을 알음알음 건드리는 기태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소통을 일방적으로 단절함으로써 기태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기태는 희준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유도,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도 몰랐기 때문에 결국 신체적 폭행을 통해 희준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를 입힌다. 서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던 그들의 관계는 각자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어그러져버렸다. 기태는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 했지만 사과에 미숙했고, 희준은 이미 지나간 인연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않는 아이였다. 완고한 희준에게 기태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중한 자신의 야구공을 던져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기태의 자살 이후, 희준은 ‘무슨 일인지 나한테 얘기 안 해도 돼. 그래도 네가 기태 아버님은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동윤에게 기태의 야구공을 건넨다. 기태가 자살한 것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기태 아버지께 사건의 전말을 말씀드리는 책임을 동윤에게 전가함으로써 희준은 기태의 진심을 결국 외면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리 마음을 닫아버리는 방식은 희준이 아픔으로부터 본인을 보호하는 행위이기에, 우리는 동윤에게 야구공을 내미는 희준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한다. 기태나 동윤과 달리, 희준은 적어도 자기 자신은 지킬 줄 알았던 파수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윤은 기태와 이야기를 나눴던 식탁에서 희준이 ‘회피’한 기태의 진심을 집어 들게 된다. 동윤과 기태 사이의 틈이 점점 더 벌어지게 된 이유에는 그들의 대화 방식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두 소년은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처럼 말을 주고받는다. ‘야, 네가 뭘 아냐?/ 모르니까 물어보잖아.’, ‘그냥 좀 넘어가. 설명 못 하는 일도 있잖아.’와 같은 모호하고 불완전한 문장을 남발하며 그들은 소통 없는 대화를 반복한다. 이는 동윤의 회상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동윤과 기태의 대화와 상당히 대조적이다. ‘없어질 것에 목매지 마라’라는 충고를 해주는 동윤에게 기태는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비참해져도, 너만 알아주면 돼’라는 신뢰의 말을 건넨다. 서로가 진실한 말로써 소통할 수 있는 사이였다는 것을 동윤은 조금 늦게 깨닫는다. 세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담긴 유일한 공간이었던 기찻길에서 동윤은 기태를 회상(어쩌면 상상)하며 ‘누가 최고야?’라고 묻는 기태에게 ‘그래. 네가 최고다, 친구야.’라는 늦은 대답을 전한다. 희준이 애써 회피한 기태의 진심을 간직하고 있던 동윤은, 그것을 다시 기태에게 건네주며 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을 ‘후회’한다. 영화는 아이들이 성장의 다음 단계로 무사히 진입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끝을 맺는다. 한 아이는 죽었고, 한 아이는 회피하고, 한 아이는 후회하는 모습만을 남겨둔 채로 엔딩 크레딧은 무심히 올라간다. 한 인터뷰에서 기태가 죽은 결정적인 이유에 관한 질문에 기태 역의 이제훈 배우, 동윤 역의 서준영 배우, 희준 역의 박정민 배우 모두 ‘나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전부 충분히 이해되는 대답이다. 기태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잘못된 방식으로 관심과 애정을 갈구한 죄가 있고, 동윤은 ‘너만 없었으면 돼’라는 말로 기태를 무너뜨린 죄가 있으며, 희준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너무 일찍 마음을 닫아버린 죄가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라는 기태의 질문은 애초에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년들보다 더 성숙하고 완전한 존재라고 자부했던 성인 관객들은 기태의 물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유일한 어른이자 진실을 알고 싶어했던 기태의 아버지가 결국 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로 남은 것처럼, 아이들이 파국에 이를 때까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관객에게 <파수꾼>은 ‘어른’과 ‘성장’은 동의어가 아니라고 말하며 우리의 가슴을 후벼판다. 고통과 성장이 필수 불가결한 관계가 아님을 역설(力說)하는 이 영화는 역설(逆說)적이게도 한국 성장영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동안 여러 매체에 등장한 청소년들은 대부분 ‘어른이 되기 전 단계’로서의 어리숙한 이미지로 소비되었지만, <파수꾼>은 ‘청소년기’를 아동기에서 성인기 사이의 순간적인 이행기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시기로서 세밀하게 다룬다. 이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성인으로 무사히 자라기 위해 도약을 꿈꾸는 미성년의 이야기가 아니다. <파수꾼>은 모두가 충분히 아팠지만 세월 앞에서 잠시 잊어버린 그 시절을 생생히 돌이켜보는 경험을 제공함과 동시에, 상처는 그저 상처일 뿐이라며 아프고도 성장하지 못했던 희준, 동윤, 혹은 기태였을 우리를 덤덤히 위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