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감독
- 크리스토퍼 휠든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로렌 컷버슨
웹소설 원작 애니메이션의 유행 근래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행하는 장르라고 하면,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소위 ‘이세계(異世界)물’을 들 수 있다. 그것도 그냥 이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고전적인 이세계물(현재의 지구 및 우리가 사는 우주와는 다른 세계, 말하자면 판타지 세계[ex. <반지의 제왕>]이거나 다른 우주나 엄청난 먼 미래를 그린 SF 세계[ex. <스타 워즈>]를 다룬)이 아니라 (주1) , 주인공이 ‘현실 세계’에 있다가 이세계로 가는 형태의 작품이 유행하고 있다. 현실 속에서 이세계로 간다는 내용은, 원래부터 소위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라 불리우는 스토리텔링의 기본 구조에서는 아주 일반적인 형태다.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란 주인공이 자신이 사는 세계(집, 나라 등)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구조를 가진 스토리를 뜻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성장’하기 때문에, 일종의 성장소설이란 측면도 갖고 있다. 이런 작품이라면 가까이는 < 나니아 연대기 >(앤드류 아담슨, 2005)도 있을 것이고, 더 거슬러올라가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겠으며, 실은 단테의 <신곡>도 바로 현실 세계에서 이세계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인 것이지 않은가. 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나 구약성경의 요나 이야기, 메소포타미아의 설화 <길가메시 서사시> 등도 전부 이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의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지금 유행하고 있는 이세계물은 이세계에 갈 뿐 현실 세계로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아서 못 돌아온 것일 수도 있고, 또 현실로 돌아오는 작품도 있기는 하다.) 라이트노벨 원작 애니메이션이 유행했던 1990~2000년대까지는, 예를 들어 <슬레이어즈>(애니메이션은 1995년부터)라든지 <마술사 오펜>(애니메이션은 1998년부터)을 비롯한 ‘판타지 세계’를 그린 작품이거나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시리즈(애니메이션은 2000년),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애니메이션은 2006년부터), <듀라라라!>(애니메이션은 2010년부터),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애니메이션은 2010년부터)에 이르기까지 현대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많았다. 이세계로 가는 작품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앞서 언급했던 정도까지 서양의 고전이 아니더라도, 일본에도 1971년 <전국 자위대>를 비롯하여 이세계나 과거의 시간대로 ‘가는’ 작품은 많이 있었다) 2010년대 웹소설의 유행 이후로는 이세계물이 워낙 많아졌기 때문에 훨씬 더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소설을 발표한다는 것이 주류화된지가 워낙 오래 된(1990년대 초반 PC통신 시절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한국에서는 소위 ‘이고깽’(이세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을 치는 내용)이라 하여 현대인이 이세계에 가서 활약한다는 내용은 일본 웹소설의 유행보다 훨씬 앞섰다. 일본에서도 학생이 이세계로 가는 것은 애니메이션 <성전사 단바인>(1983년)이나 소설 <황금박차 - 이차원 기사 카즈마>(1988년) 등 많이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인터넷에서 발표되는 작품에 이세계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오래 전부터 반복되는 유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이세계물’이라면 게임 속의 세계로 가는 <소드 아트 온라인>과 <로그 호라이즌>, 게임형의 판타지 세계로 가는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이나 <오버 로드>, 밀리터리 취향의 세계(?)로 가는 <유녀전기>, 판타지 세계로 가는 <무직전생>이나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 중에는 이세계로 가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엄청난 능력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그냥 이세계로 가기만 할 뿐 어느 정도 수련과 노력을 해서 주인공이 성장하여 적절한 능력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일본에서 ‘난 강해――!(오레 츠에에에)’물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에서도 전통적으로 대본소용 판타지소설 중 일부를 가리키는 소위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의 약칭)물에서도 ‘먼치킨’이라 불리운다.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 비단 웹소설 원작이 아니더라도 이런 먼치킨형 주인공, 즉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특징적으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 역시도 21세기 이전에 그런 주인공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만화잡지 「소년 점프」의 인기 만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는 2014년부터 연재를 시작했고 2016년부터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미도리야 이즈쿠.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지만 어떤 기회를 통해 무척 강한 능력을 손에 넣은, 어떻게 보면 무협소설에서 ‘기연’을 얻는 주인공만큼이나 주역스러운 설정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미도리야 이외의 주요 인물 중에, 정형적이라 할만큼 ‘고전적 주인공’의 특징을 가진 캐릭터가 두 명이나 나온다. 소꿉친구였던 라이벌 바쿠고와, 새롭게 만난 라이벌 토도로키다. 오만한 성격에 다혈질처럼 보이는 바쿠고, 냉정한 성격이면서도 부모님 때문에 비틀린 의지와 고민을 갖고 있는 토도로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사정을 듣고서는 그에게 “만화였다면 주인공이다”라는 ‘메타 발언’(정작 주인공은 미도리야니까)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만약 과거였다면 주인공은 바쿠고이거나 토도로키였을 텐데, 2010년대의 소년만화 독자들은 더 이상 단순한 고전적인 형태의 ‘주인공 캐릭터’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미 2010년대의 젊은이들은 대개 ‘보릿고개’나 ‘전쟁’, ‘공해병’이나 ‘진폐증’을 겪을 일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히려 그들에겐 ‘자살’이나 ‘왕따’가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고 괴로운 병이라면 ‘아토피’라든지 ‘공황장애’, ‘백신 거부주의로 인한 홍역’ 같은 것일 수 있겠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된 것이 21세기 이후의 일인 것만도 아니라는 말이다. 지역적 차이는 있겠으나 사실 이미 1990년대에도 픽션 속에서 ‘열혈 주인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한국에서도 <열혈강호>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은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해 있었고, 순정만화에서도 비슷한 변화를 볼 수 있었다. 일본만화에서도 1980~90년대의 주인공들, 예를 들어 손오공·사쿠라기 하나미치·미츠하시 타카시·우에스기 타츠야(앞에서부터 <드래곤볼><슬램덩크><오늘부터 우리는><터치>)는 그 이전 1960~70년대 ‘근성물’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했던 주인공 인물형이다. 또 같은 시대의 켄시로·사에바 료(<북두의 권><시티 헌터>) 등은 ‘난 강해――!’물에 그대로 해당될만큼 ‘처음부터 강한 주인공’이다. 물론 이런 작품과 캐릭터를 무조건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맨처음 언급한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만 하더라도 2010년대 작품 중에서는 오히려 드물게도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주인공이었다. 하다못해 <시티 헌터>의 사에바 료도 끊임없이 사격 연습을 하는 장면이 작중에 나오고,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은 여러 스승들에게 수업을 받거나 강한 중력 하에서 수련을 하는 등 충분한 노력을 보인다. <슬램 덩크>에서도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전형적인 ‘노력없이 강한’ 척을 해야 하는 불량 학생 출신이었음에도 나중에는 농구라는 스포츠를 인정하면서 ‘풋내기 슛’을 연습하여 이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작품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 정도일 뿐, 아무리 그렇더라도 후대에 거의 희화화될만큼 말도 안되는 ‘노력(?)’을 하는 1960년대 스포츠근성물이나 슈퍼로봇물인데도 작품 전반 거의 4분의 1 가까이까지 주역 로봇이 제대로 등장하지 않거나 싸우지 않고 오직 주인공이 파일럿으로서의 연습과 스파르타 훈련만을 받는다는 독특한 로봇애니메이션 <혹성로보 단가드A>(국내 방송 제목은 <날아라 스타에이스>) 같은 경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1980년대 중후반 이후의 작품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이라 함은 진짜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전 작품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노력하거나 노력을 하더라도 그 노력하는 장면을 거의 그리지 않는 식으로 처리되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 이런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의 유행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요즘 젊은이는…” 운운하는 비평도 자주 보지만, 물론 ‘요즘 젊은이들’ 때문에 그런 주인공이 유행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분석의 태반이 너무 상황을 단순화시킨다는 생각은 든다.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은 비단 요즘 유행일 뿐만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무협지에선 과거에도 자주 볼 수 있던 유형이다. 하물며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화 시대로 거슬러올라가 보더라도 다들 ‘노력없이 강한’ 것 아닌가? 과거엔 그것을 혈통이나 타고난 능력(신의 아들이라느니 천손이니)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스로마신화나 <삼국유사>를 보아도 그런 인물은 등장하고, 앞에서 말한 <길가메시 서사시>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 길가메시가 등장인물로 나오는 작품이 <Fate/stay night>를 비롯한 <페이트> 시리즈이다.) 따라서 이런 주인공의 유행이 비단 21세기 이후 서브컬처의 특징이란 식으로 말하기는 어렵고,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세계물의 유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시당초 어떤 한두 가지 사안을 특정 시기의 ‘특수성’으로 설명하는 담론은 대개 거기에 어긋나는 사례로 인해 금새 반박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렇지만 ‘과거와 달리 21세기에만 이런 특징이 드러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단다면, 분명히 현 세대 서브컬처의 큰 유행으로서 이세계 전이와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이란 흐름을 짚을 필요는 있다고 보기에 이 글을 썼다. 여기까지 판타지와 SF의 관계, 이세계물과 노력없이 강한 주인공의 유행, 라이트노벨과 웹소설에서의 이세계물이 갖는 차이, 시대에 따른 주인공상의 변화 등 간략하게나마 몇 가지 사인에 대해 다루어보았다. 이 이상의 내용은 다른 기회로 돌리겠으나, 이런 변화를 바탕에 두지 않고서는 2010년대의 만화/애니메이션 계열 서브컬처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웹소설의 이세계물도 지겹다는 반응이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적지 않기 때문에, 이 장르의 유행이 당장 없어지진 않겠으나 2020년대에는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주1) SF의 경우, 설정에 따라서는 현재의 인류가 먼 우주로 나아가 외계인을 접하거나 혹은 워낙 먼 미래가 되거나 갑작스러운 기술 발전으로 우주 전체를 누빌 수 있게 된다는 내용 등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있는데, 어쨌거나 그 어느 쪽이든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는 다른 ‘이세계(異世界)’를 그린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판타지와 다를 바가 없다. 작품의 방향성이 마법과 연금술이나 과학이냐 하는 차이점일 뿐. 또한 이때 ‘과학’이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과학, 즉 빛보다 빨리 달릴 경우의 물리 법칙을 상상해서 만들어낸다거나 비(非)탄소계열 생명체를 상상해서 만들어내는 등 범위를 너무 벗어나는 내용을 그릴 경우를 생각해보라. 그런 SF가 마법이나 연금술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판타지라고 해도 그 세계관 내에서는 합리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작품도 많고, 그렇기에 완전히 동떨어진 상상만의 판타지 작품은 판타지라는 장르 안에서도 여러 단계로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서구권을 대표하는 SF잡지의 제목이 <The Magazine of Fantasy & Science Fiction>였던 것 아니겠나. (그나마도 1949년 창간 당시의 잡지 이름은 <The Magazine of Fantasy>였다. 2호 때부터 ‘Science Fiction’이 추가된 것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는 지난 시절 유행했던 멜로드라마의 감정적 흐름을 딛고 조금씩 변화하는 중이었다. 전통 신파의 줄기에 미묘하게 균열이 생긴 것이다. 195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던 감정 주도적 드라마의 원형은 새로운 10년을 맞아 사실적이고도 사회 반영적인 태도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은 틈새의 움직임은 서서히 우리 영화 전반으로 확대되어 갔다. 영화 < 마부 >( 강대진 , 1961)의 주인공 춘삼( 김승호 )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소개하는 지표적 인물이라 부를 만한 캐릭터다. 가업을 이어서 마부로 살아가는 이 인물은 홀로 자식 넷을 건사하며 겨우 살림을 꾸려간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변화하는 도시 ‘서울’에서 그는 기어이 살아남고자 한다. 그가 도시의 하층부를 끈질기게 헤매는 것은 모두 ‘가족’ 때문이다.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끈질긴 생명력의 뿌리를 지금 내려야만 한다. 춘삼의 다섯 가족은 그렇게 가난하지만 암울하지는 않은,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일상을 이어간다. 춘삼을 주축으로 가족들의 이야기가 영화 <마부>의 중심이 된다. 그가 수원댁( 황정순 )과 소박한 연애를 하는 사이,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큰 아들 수업( 신영균 )과 허영에 부풀어 시행착오를 겪는 둘째 딸 옥희( 엄앵란 ), 그리고 출가했지만 소박맞아 집으로 쫓겨 오는 큰 딸 옥례( 조미령 )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이어진다. 이들과 비교해서 막내 대업( 김진 )의 이야기는 소소한 편이다. 꾸준히 작은 말썽을 일으키지만 이 아이가 ‘사건’이라 부를 만한 큰일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사춘기 막내아들에 대해 생각하며 영화에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스크린의 문이 열리자마자, 대업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인도하는 흰 토끼 마냥 정신없이 관객들을 ‘마부의 집’이란 토끼굴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모티브는 중요해 보인다. 좀도둑질과 자전거의 빠른 속도로 시작되는 세부 세계로의 인도, 말하자면 황홀한 인트로 시퀀스를 통해 관객들은 지극히 사회반영적인 드라마 <마부>를 꿈꾸면서 볼 수 있게 된다. 확실히 1960년대의 서울, 변화하는 이 도시의 주인을 자처한 것은 영화 <마부> 속의 캐릭터들이 아니다. 차라리 도시의 진짜 주인은 새롭게 나타난 자본가들, 과거에는 말을 소유했지만 이제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그들에 더 가깝다. 반면 우리 주인공들은 도시 한편에 보이지 않은 채 뒤덮여서 살아가고 있다. 작은 방에 모여서 아버지와 딸은 등을 맞대고 잠을 청하고, 등불 하나가 켜진 책상 앞에서 큰 아들은 밤새 공부한다. 이들의 내면에는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서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영화가 이들 각자의 소망을 성취해 보여주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서 비로소 숨통이 트일만한 작은 성취가 있긴 하지만, 이 사실이 그토록 원했던 개인적인 소망의 완성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소박한 해피엔딩이 한국적 따스함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보아야 한다. 시작과 결말의 역설, 어찌 보면 이 패러독스야말로 당대 한국형 멜로드라마가 말하고자 내면의 진짜 중심인지 모른다. 춘삼의 에너지, 미래를 향한 자양분이 되고자 하는 그의 율동, 현실적이지 않은 긍정의 원천에 대해 생각한다. 밥상에 마주앉은 춘삼의 가족들을 보면서 문득 우리 정서의 근원으로서 ‘한국인의 밥심’을 떠올린다. 천천히 트랙 인되며 드러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표정, 그들이 공유하는 수북한 밥 한 그릇의 무게는 그 자체로 영화의 표상처럼 느껴진다. 수원댁과 김서기( 김희갑 )가 나눠먹는 한 그릇 국수의 질감 역시 마찬가지다. 춘삼이 수원댁에게 몰래 건네는 떡고물의 부피와 더불어 극장에서 나온 뒤 휘적거리는 국밥 뚝배기 등 이 모든 물체들이 정서의 감각을 향유한다. 밥 한 그릇 나눠줄 수 있을 정도의 행복감, 딱 그 만큼의 성취가 어쩌면 영화 <마부>가 지향하는 해피엔딩의 깊이인지도 모른다. 서구화되는 서울의 표면을 파헤친 결과 드러나는 한 그릇 끼니의 정서, 이가 바로 앨리스가 찾아낸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마음을 점령하는 ‘한국적 해피엔딩’의 만족감, 그 실체는 영화 <마부>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실마리가 서서히 이어져서 한국적 리얼리즘의 줄기가 된다. 이토록 건강한 육체의 따스함, 그 시작은 배우 김승호의 작은 얼굴이지만 모두의 손을 거치는 흙으로 빚은 국그릇의 질감과 만나 리얼리즘의 심상은 정확히 관객의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같은 시기 만들어진 다른 영화들, 이를테면 유현목 의 < 오발탄 >(1961)과 <마부>를 비교하면 그 차이점은 좀 더 명확하게 보일 것이다. <오발탄>이 지닌 멜랑콜리한 사실성의 깊이에 비교해서, 영화 <마부>의 신파적 로망스는 가볍고 평범하며 그래서 마음 편한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이중적이기에 회피할 수 있는 상상력의 깊이, 딱 그만큼 시대의 불안은 상쇄된다. 1961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받은 ‘한국영화 최초의 유의미한 국제 영화제 수상’이란 은곰상의 성취는 그 훈장으로 여겨도 될 것 같다. 진짜 한국에서 존재하고 작동하는 사람들의 속마음, 그 따사로운 근원을 <마부>는 쫓는다. >> 마부 VOD 보러가기 <<
이제 뻔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일은 그만하고, 진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속 먹방 장면이나 감상해보자. 사실 애니메이션 속 먹방은 그 가짓수가 일만 오천육십 개까지나 되니(세어 보진 않았지만 하여튼 엄청 많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밀가루’에 관련된 먹방만 감상해보겠다. 첫 번째 이야기해 볼 애니메이션은 바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이다. 나는 사석에서 지브리 스튜디오를 ‘셰프 지브리’라고 부르곤 한다. 마치 감각 있는 셰프가 그날 날씨와 제철재료들을 고려하여 선보이는 ‘오늘의 추천 요리’ 메뉴처럼,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의 먹방에서는 작 중 분위기와 상황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요리 메뉴를 선보인다. 먼저, 밀가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애니메이션인 < 마녀배달부 키키 >를 감상해보자. <마녀배달부 키키>는 꼬마 마녀 키키가 빵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소동을 담은 따뜻하고 귀여운 성장 드라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키키가 화덕에서 파이를 굽는 부분인데, 그 파이의 모양이 적잖이 낯설었다. 생선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청어 파이’였기 때문이다. 이 청어 파이는 모두에게 몹시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는지, 지금도 청어파이, 즉 생선 파이는 영국의 괴랄한 미식 문화를 조롱하는 의미로 통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셰프 지브리의 탁월한 센스를 엿볼 수가 있다. 생선 파이는 사실 역사가 오래된 영국 전통 요리다. 신선한 생선을 구하기 어려운 영국의 서민층들이 조리해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하튼 영국 서민들의 전통 홈 푸드인데, 현재는 여기저기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마녀배달부 키키>의 청어 파이 역시 마찬가지 신세다. 손녀의 파티에 따뜻한 파이를 보내주고자 했던 할머니가 오븐이 고장 난 상황에서, 오래된 화덕을 수리하는 고생(물론 고생은 키키가 다 하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키키에게 넉넉한 금전적 보상을 해주었지 않은가?)을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구워낸 것이지만, 신세대 손녀에게는 문전박대를 당한다. 셰프 지브리의 특기인 ‘상징’이 빛나는 대목이다. 키키의 눈빛을 보면 맛있게 먹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움직이는 성안, 하울의 식사는 어떨까? 베이컨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개척자들의 필수아이템이었다. 여행 작가이자, 개척자인 랜스포드 헤이스팅스는 1845년, 오리건을 향하는 이민자들에게 150파운드(약 68kg)의 베이컨을 필수적으로 챙겨가라고 조언했다. 개척자들은 매일 아침으로 커피와 베이컨을 먹고, 저녁엔 베이컨 기름을 빵이나 비스킷에다 발라 먹었다. 1) 그 유명한 베이컨&달걀의 유행은 사실 하울이 원조가 아니다. 그 역사는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이어트가 필수덕목인 이 시대에야 고열량인 이 조합은 사실 죄책감까지 불러일으키지만, 1920년대에 ‘베이컨&달걀’은 아주 ‘건강하고 가성비 좋은’ 아침식사였다. 그야말로 피로와 긴장에 찌든 여행자들에게 걸맞은 고영양 메뉴인 것이다. 게다가 셰프 지브리는 베이컨 기름으로 모든 조리를 해결한다. 올리브유나 향료같은 많은 부재료들을 챙겨 다니기 어려운 여행자들에게 아주 요긴한 재료다. 다만 계란 후라이를 저렇게 예쁜 ‘써니 사이드 업’으로 만들려면 약불로 인내심있게 구어야 하는데, 저렇게 화력이 센 불에 조리하니 타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뭐, 보기 좋기는 했다. 이 부분에서 서론에서 말했던 애니메이션 속 먹방 장면의 장점이 빛을 발한다. 왜 밀가루 이야기를 하다말고, 고지방 고단백 메뉴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겠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베이컨과 달걀과 함께 식탁 위에 나란히 놓여있던 빵, 깜빠뉴다. 절대 사심으로 베이컨&에그를 끼워 맞춘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약간 그래요. 뭐 어쨌든… 이 고열량, 고단백의 조합의 목 멜 듯한 기분은 탄수화물이 녹여준다. 깜빠뉴는 오래 보관하기 쉽고, 재료가 단순하고 맛이 담백하여 어느 메뉴와도 잘 어울린다. 식사빵이라는 카테고리답게 묵직하고 든든하다. 여러모로 먼 길을 떠날 때 아주 적합한 메뉴다. 사실 ‘베이컨과 에그 게다가 단순 탄수화물인 빵’은 비만 인구 상승에 힘을 실어줄 조합이기는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막강한 적과 싸워야하는 하울 무리에게는 더없이 걸맞은 메뉴였다. 이번엔 일본을 벗어나, 영국의 훌륭한 스튜디오로 넘어가 보자. 아드만 애니메이션은 <월레스와 그로밋> < 치킨 런 > < 플러쉬 > < 아더 크리스마스 > < 허당 해적단 > < 숀더쉽 > 등 정말 재미있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대거 제작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아드만의 애니메이션들은 진짜로 웃기고, 재밌다. 그리고 먹음직스럽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먹방으로써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장점들을 고루 갖출 수 있다. 만져질 것처럼 생생하면서도 오버액션도 ok. 멋진 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월레스와 그로밋>을 살펴보자. 월레스는 발명가이자 빵집사장이다. 그로밋은 그가 기르는 강아지. 하지만 이 강아지 그로밋이 월레스보다 약 두 배가량 현명하다. (하긴 역마살 붙은 것 마냥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동네를 휘젓는 이웃집 개도 집만 잘 찾던데, 10년 산 동네에서 한번 낯선 길로 가보자고 했다가 돌아오는 길을 한참 헤맸던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둘은 아무리 바빠도(사실 별로 바빠 보이지도 않지만) 늘 시간을 내어 치즈&크래커와 홍차를 즐긴다. ‘빵이냐 죽음이냐’ 편에서, 파이엘라는 늘 정시에 티타임을 즐기는 월레스의 습관을 이용하여 살인을 계획할 정도로 그들에게 티타임은 무척 중요한 의식이다. 사실 이런 문화는 영국인이라면 아주 익숙하다. 영국인들의 티타임 사랑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도버해협을 건너는 기차 안에서도 전용 도기로 애프터 눈 티를 즐겼다고 하며, 영국의 유명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환상의 세계에서도 티타임은 빠지지 않는다. 이런 영국인의 홍차사랑에 대한 결실은 현재 티타임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찻잎들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찰스 그레이 백작의 이름을 딴 ‘얼그레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같이. 영국이 구움 과자 분야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이 ‘차사랑’에 원인이 있다. 음식문화가 취약하다고 정평이 난 영국도 비스킷, 스콘 등 티타임에 곁들일 메뉴를 개발하는 데에는 꽤나 열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인류 최고의 발명가는 사랑이라고 했던가. 월레스와 그로밋이 여기에 곁들이는 비스킷 역시 지극히 영국적인 과자다. 비스킷은 1588년 스페인과 영국이 영불해협에서 맞붙었던 전투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었다. 해전 시 배에 실을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어 칼로리가 높지만 가볍고 부피가 작아야 했는데, 비스킷이 그에 딱 걸 맞는 메뉴였다. 영국군은 최대한으로 수분을 없앤 딱딱한 비스킷을 있는 대로 보관해 둔 덕에 굶주릴 일없이 전쟁에 임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세계최강이라 자부하던 스페인 함대는 몰락했고, 영국은 세계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2) 어쨌거나 월레스와 그로밋의 티타임은 달로 향하는 우주 비행선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용감한 개척자들은 출발하기 직전까지 티타임 도구들을 챙기기 바쁘다. 바삭하고 퍽퍽한 비스킷에 부드러운 치즈를 곁들인 티푸드에 맛있는 홍차,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 즐기는 티타임이라니, 우주 한가운데 더없이 영국적인 풍경이다. 위 거론한 예시들 말고도 애니메이션 속 먹방에 대한 이야기는 밤새도록 나누어도 모자람이 없다. 언젠가 또 기회가 닿는다면 < 너의 이름은. >의 팬케이크 이야기나, < 검정고무신 >의 크림빵에는 생크림이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크림의 비밀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애니메이션 속에도 현실 세계 만큼이나 먹음직스러운 이야기들이 가득 숨어있다. 행복한 이야기다. 먹는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답게 나의 첫 데뷔작도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했던 음식 만화(<삶은 토마토>)였다. 주로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나 상황들이 스토리의 전부다.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는 게 별건가 싶다.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밥먹기’를 원하며,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들이 ‘식사자리’에서 거론된다. 나는 애니메이션 속 등장인물들이 먹고 마시는 게 좋다.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진중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허기짐을 느껴, 혹은 기운이 달려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순간 거리를 두고 감상하던 이야기들이 삶의 차원으로 넘어온다. 게다가 음식 만화를 연재하며 먹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 즐겁지만, 번거로운 일임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빼버려도 상관없는 먹방 장면을 굳이 삽입한 애니메이션 감독에게는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기까지 한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이 더 먹고 마셨으면 좋겠다. 더 많이, 더 맛있게, 더 오버액션으로 먹어주면 좋겠다. 언젠가 여러분, 제가 엄청나게 맛있게 먹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거 거든요? 얼마나 맛있게 먹나 한번 보러와 주세요. 어설픈 글을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나도 난생처음 칼럼이라는 걸 써본 기념으로 오늘은 맛있는 걸 좀 먹어야겠다. 1)『아침식사의 문화사(Breakfast: A history-Heather)』 (헤더 안트 앤더슨 저, 니케북스, 2016) 참조 2)『양과자 세계사』(요시다 기쿠지로 저, 비앤씨월드, 201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