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 감독
- 임권택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MTM, 문혜지, 김명곤, 오정해, 김규철, 신새길, 안병경, 최동준, 최종원, 강선숙, 주상호, 이인옥, 유명순, 김경란, 박예숙, 정미경, 조학자, 이석구, 유형관, 김기천, 방은미, 고동업, 박길수, 손영호, 송영탁, 권호웅, 이은숙, 오연실, 윤혜영, 조영재, 김유경, 김송, 고승유, 김지훈
영화에서 오마주(homage)라는 말은 누벨바그 세대와 함께 도착했다. 그들은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학습’했고, 그런 다음 자신들이 경배하는 위대한 거장들의 영화에 대한 존경을 자신의 영화에 담기를 원했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첫 장면, 미셀과 그의 애인이 파리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은 로셀리니의 < 이탈리아 여행 >의 첫 장면이다. 영화 장면 안에 등장한 오마주는 영화사에 시네필 세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누벨바그 세대가 존경을 바쳤던 대부분의 거장들이 영화가 태어난 1895년과 거의 동시에 태어났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들은 문법을 만들었고, 개념을 발명했으며, 과학이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하나의 역사, 하나의 전통, 임권택 을 시네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에게 아마도 가장 낯설게 들리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들이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영화를 보기 위해 거리를 떠돌 때 임권택은 영화를 찍으면서 길거리와 세트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임권택은 취미에서 시작한 영화감독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직업감독이었다. 하지만 임권택의 1960년대 영화들에서 불규칙하지만 반복해서 마주치는 이상한 명단이 있다. 오마주를 바치는 것만 같은 영화들. 리메이크라고 하기에는 원작이 너무 희미하고, 그저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하기에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흔적을 남겨놓은 영화들. < 남자는 안 팔려 >와 빌리 와일더의 < 뜨거운 것이 좋아 >. < 바람같은 사나이 >와 존 스타제스의 <황야의 칠형제>.(그때 임권택은 <황야의 칠형제>의 원본인 <칠인의 사무라이>를 아직 보지 못했다) < 30년만의 대결 >과 존 포드의 < 아일랜드의 연풍 >. 게다가 그 영화들과 원작을 연결시켜 질문할 때마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셨다. “그때 그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본 거에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나는 그 대답을 하시는 순간의 표정에서 기쁨의 시간을 읽는다. 그 대답에서 임권택 감독님은 자신의 영화를 뒤로 밀어버리고 그 바탕에 있는 밑그림으로서의 영화, 아마도 기억 안의 원(原)텍스트라고 불러야 할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기원에로 거슬러 올라갔다. 영화를 본다는 경험, 임권택은 영화를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벨바그 세대는 앙드레 바쟁의 지도를 받았고, 앙리 랑그루아의 프로그램으로 고전을 보았으며, 서점에서 수많은 영화서적을 구할 수 있었다. 임권택은 첫 영화를 1962년에 찍었다. 그때까지 그는 단 한 권의 영화책도 읽을 수 없었다. 영화를 만드는 법을 배움. 배운다는 문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어떻게 배울 것인가. 학교 바깥에서 영화를 배운다는 문제. 혼자서 스스로 영화를 배운다는 문제 앞에 서야 했을 때 임권택은 (고전이 아니라) 개봉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갔다. 그가 좋아한 영화들, 자기가 감탄한 장면들. 하지만 제한적인 목록. 임권택은 그때 한국전쟁이 막 끝난 다음 폐허와 다름없는 서울에 있었다. 한 가지 사실을 환기시켜 주겠다. 그때 아직 남한에는 텔레비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무도 임권택에게 영화에서의 미학적 문제에 대한 질문의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때 임권택은 무엇이 영화에서 가치 있는가, 에 관한 질문을 정식화시킬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정반대의 자리에 있던 하이데거와 아도르노는 거의 동시에 예술에서의 진리, 라는 질문을 서로 다른 빙식으로 제기하였다. 누벨바그 세대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지도자 앙드레 바쟁이 귀도 아리스타르코와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은 주제인가 형식인가를 놓고 논쟁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사회적 내용과 주제에 우선하는 미학적 형식의 기준. 영화에서의 질문의 위계질서. 이 논쟁은 아마도 하나의 강령이 되었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임권택은 새로운 영화의 시작과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었다. 그 안에 들어왔지만 수수께끼와 같은 질서들. 쇼트의 접속. 왜 어느 순간에는 기적 같은 경험을 안겨주는데 어느 자리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이 문제가 단순하게 시나리오나 대사, 연기의 결함이나 부족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의 내재적 시청각 기호들의 오작동으로 귀결될 때 이 예술은 세계의 무질서에 대해 항상 자기의 질서, 세계와의 사이에서 가져보는 자기의 규칙, 세계와 영화를 연결하는 순간 사이의 연결의 미학에로 이어지는 질문에 이끌렸을 것이다. 임권택의 질문. 그때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을 찾았다. 왜 어떤 영화는 나를 즐겁게 만들고 어떤 영화는 그렇지 않은가. 그 즐거움은 무엇인가. 즐거움의 즐거움, 즐거움의 정체. 정체의 이면. 이면의 질서. 질서의 규칙들, 그 즐거움은 어떻게 이루어져있는가. 심지어 임권택은 그런 영화중의 한 편을 프린트를 구해서 그 즐거움의 순간을 프레임 단위로 들여다보았다. 그때는 영화를 손 안에 넣을 기회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 텔레비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도 편집실에서 릴을 걸어놓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 영화중의 한 편이 조지 스티븐스의 웨스턴 <세인>이었다. 임권택은 이 영화에서 맛 본 즐거움의 체험을 몇 번이고 말했다. 1956년 11월 2일에 서울에 개봉한 영화. (그때는 대도시에 먼저 개봉한 다음 프린트가 지방 소도시로 배급되었다) 임권택이 정창화 의 연출부를 할 때였다. 1953년 파라마운트가 테크니컬러로 제작한 < 셰인 >은 웨스턴의 영화사에서 < 하이 눈 >과 함께 고전 웨스턴의 시대를 끝내고 이 장르를 변덕스럽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셰인>에게 찬사를 바쳤고(미국 영화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는 웨스턴사상 베스트 10에 선정했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 탄식을 했다. 앙드레 바쟁은 이 영화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는 <셰인>을 ‘쉬르 웨스턴(Sur-western, 이 정의를 휴 그레이는 영어로 옮기면서 ‘Super western’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이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박상규는 이 표현을 ‘초(超)웨스턴’으로 옮겼다. 쉬르레알리슴(超現實主義)에서 가져온 접두어일 텐데 또 다른 오해의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발음’으로 옮겼다)’이라고 불렀다. 바쟁은 이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쉬르 웨스턴’들은 고전 웨스턴들과 달리 자신이 웨스턴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이 장르 바깥에서, 이를테면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그리고 심리적이거나 정치적인, 혹은 다른 미학적이거나 에로틱한 무언가. 말하자면 이 장르 바깥으로부터 무언가를 가져와 자신의 수치를 정당화시키고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라고 공격하였다. (‘웨스턴의 진화’) 여기서는 <셰인>을 공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반대로 바쟁은 <셰인>을 공격하면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매혹에 대해서 어떤 찬사의 글보다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먼저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셰인>은 1889년 존슨 카운티 전쟁, 혹은 와이오밍 평원 전쟁으로 알려진 개척민과 토지 소유주들 사이에서 벌어진 유혈참극에서 느슨하게 가져온 이야기이다. <셰인>보다 본격적으로 이 소재를 다룬 영화는 마이클 치미노의 < 천국의 문 >이다. 가난한 개척민 마을에 허름한 차림에 점잖고 예의바른 총잡이 한명이 찾아든다. 셰인이라는 이름의 남자. 아무도 이 사람을 알지 못하고 그 자신도 과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이 낯선 남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이 마을의 조 스타렛이다 그는 가난하지만 정숙한 아내 마리안과 어린 아들 조이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걱정은 토지 소유주 라이커와 그 일당이 계속해서 이들이 힘들게 개척한 땅에서 쫓아내려는 것이다. 라이커와 그의 일당이 폭력을 행사할 때 과묵하고 조용한 셰인은 숨겨져 있던 그의 솜씨를 보여준다. 조이는 그 모습을 보고 셰인을 영웅처럼 존경하고 조의 아내 마리안도 자신도 모르게 이 남자에게 이끌린다. 그걸 셰인도 알지만 모른 척 한다. 라이커는 개척민들을 몰아내기 위해 쌍권총 총잡이 잭 윌슨을 고용한다. 검은 옷을 입은 이 사내는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을 해치운다. 라이커는 조 스타렛에게 대결을 하자고 제안하지만 셰인이 대신 그 자리에 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총을 뽑아 잭 윌슨과 라이커를 해치운다. 셰인은 거기까지 쫓아온 조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와이오밍 평원 저편으로 떠난다. 어린 소년 조이가 멀어져가는 셰인을 향해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 중의 하나를 외친다. “돌아와요, 셰인” 평원의 메아리. 바쟁은 <셰인>이 신화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바쟁에게 웨스턴은 비극의 윤리학이었다) 이 영화에서 셰인은 성배를 찾는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 중의 한명인) 것처럼 보이며, 게다가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그저 신비로운 복장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웃듯이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셰인>을 매혹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놓쳤다. 신화와 비극의 거리. 신비로운 주인공. 나는 거기에 이 주인공의 특징을 한 가지 더하고 싶다. 아무런 목표가 없는 주인공. 바쟁의 표현을 빌린다면 불가능한 목표에 이르기 위한 무한정한 방랑. 대지를 떠돌아야 하는 ‘나그네’(‘Wanderer’는 '산책자‘가 아니다)의 멜랑코리. 그래서 이 주인공은 무엇보다 우울하다. 이 우울한 주인공은 목표가 없기 때문에 종종 우유부단하게 보인다. 그 우울한 우유부단이 보는 쪽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안고 있는 슬픔. 왜 세계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라고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한 고난의 슬픔에 머물 때, 거기서 발생하는 세계와 나 사이의 불화. 그 불화하는 세계가 역사에 기대어 있을 때 그 역사의 무게 아래에 눌려 찌그러지지 않기 위해 거기서 물러났을 때, 그래서 그 불화에 들어서지 않기 위해 그 입구를 스스로 차단했을 때, 나는 역사의 시간 안에서 삭제되는 것이다. 그때 경험하는 우울한 우유부단은 세상 안에 있으면서 역사 바깥에 놓여있는 자리, 이것도 아니면서 저것도 아닌 (아감벤이 쓰는 표현을 빌리면) 시시한 자리에 가는 행위의 제스처이다. 임권택에게 <셰인>과 (펠리니의) <길>은 보는 쪽의 자리에서만 말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같은 영화이다. 어쩌면 둘 중 한 쪽, <셰인>과 < 풍운의 검객 > 중 어느 한 편만을 보았다면, 그래서 다른 한 쪽을 줄거리만으로 알고 있다면 다른 한 편이 잘 떠오르지 않을 만큼 두 편의 영화는 멀리서 쳐다보는 서사가 아니라 그 안에서 들여다보는 장면의 디테일에서 서로 겹친다. 한 가지 사실을 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임권택은 처음부터 조선시대 사극을 자신의 영화적 무대로 삼았다. 이미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에서 사도세자와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 그리고 정조의 이야기를 궁궐 안을 무대로 실타래처럼 얽은 이야기를 풀어헤치고 묶으면서 고유한 유형의 매듭으로 고유한 장소를 만들어냈다. 분명히 임권택은 조선시대 사극의 대가인 신상옥 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임권택은 늘 겸손하게 그건 내가 연출부를 했던 정창화 감독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리고 그건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모든 인물들을 감싸 안는 정념의 연쇄고리들은 전적으로 임권택의 것이다. 하지만 <풍운의 검객>은 이상하게도 <망부석> 혹은 < 십년세도 >에서 보여주었던 조선시대 사극의 사료적 근거가 반사하는 것만 같은 장소의 질서, 인물들 사이의 위계질서. 질서가 빚어내는 운명, 그 안에서의 복종과 같은 역사와 서사 사이의 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둘 사이의 친화성이 희미해졌다. 그 유사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조선시대는 기괴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워졌고 그 대신 거의 절대적이었던 질서의 체제, 그래서 숨 막힐 것처럼 촘촘하게 그 곁에 연이어 이어 붙여놓았던 제도의 고유한 거리들의 일부가 사러지거나 거의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여기에 들어선 것은 조선시대 바깥에서 온 것 같은 인물의 등장이다. 이따금 전시하는 거의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는 무술. 왜 여기에 왔는지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화 안에서도 설명하지 않)는 인물. 길을 잃지 않기 위한 가이드로서의 줄거리. 하지만 <풍운의 검객>은 줄거리의 독후감과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의 감상의 디테일 사이의 간극이 이상할 정도로 큰 영화라는 걸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조선시대. 왕은 병석에 누워있고 간신들이 날뛰고 있는 시절.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최괄은 희빈 문소이와 함께 왕이 별세하면 문소이가 낳은 아들 달지를 왕위에 옹립하기 위해 자객들을 보내서 왕자들을 차례로 제거한다. 어느 날 밤 어린 왕자를 해하려는 순간 복면을 쓴 검객이 나타나 그들을 물리친다. 그 무렵 한양 주막가에 자신을 방갓이라 칭하는 나그네가 한 명 나타나 뛰어난 무술 솜씨를 보여준다. 그의 무술을 높이 평가한 달지는 그를 자신의 수하에 둔다. 그런 방갓을 보고 달지가 관심을 기울이는 기생 연화가 연모하는 마음을 품는다. 방갓은 최괄의 집에 매달린 초롱에 화재를 일으킨 다음 몰래 빠져나가 옥에 갇힌 영의정 김종성의 딸 난실을 구한다. 그때 우연히 그걸 달지의 집을 방문한 연화가 보게 된다. 난실은 자신을 구해준 방갓에게 감사의 뜻으로 자신의 노리개를 건네주면서 연모하는 마음을 품는다. (기이한 우연과 사건이 겹친 다음) 달지는 방갓이 자신을 방해하려는 목적을 지녔음을 알고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 최괄은 방갓이 무술이 뛰어남을 알고 또 다른 무술의 고수인 백운선생을 부른다. 한편 연화는 방갓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난실에게 끌린다고 오해하고 그가 난실과 은거하고 있는 산 속의 암자를 달지에게 알려준다. 달지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백운선생이 방갓을 찾아냈을 때 알게 되는 것은 방갓이 백운선생의 제자라는 사실이다. 백운선생은 방갓이 살생을 일삼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꾸짖는다. 스승의 부름 앞에 제자는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다음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해였음을 연화가 백운선생에게 알리고, 백운선생은 감옥에 갇힌 방갓을 구한다. 백운선생은 상소문을 올려 최괄과 문소이가 역적모의를 했음을 알리고 다시 떠나지만 달지에게 죽음을 당한다. 방갓은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여기고 연화와 난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막아선 달지를 물리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갓을 지켜보던 소년은 떠나가는 방갓의 등 뒤에서 큰 소리로 부른다. “아저씨” 하지만 그 소리는 바람소리에 묻힌다. 방갓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분명히 <풍운의 검객>은 <망부석> 혹은 <십년세도>로부터 멀어졌다. 아쉽게도 나는 그 사이에 놓인 < 영화마마 >, < 왕과 상노 >, < 닐니리 >, < 청사초롱 >을 (네가 프린트가 사라져서) 보지 못했다. 네 편의 영화. 나는 그 영화들을 건너뛰면서 상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단절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태도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설명해도 <풍운의 검객>은 조선시대에 머물고 있다. 장르로서 반복 안의 차이. 그리고 디테일에서의 차이 안의 반복. 그 안에서 일부 인물들은 그들 자신이 놓여있는 시대에 복종하고 있지만 일부 인물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 부정은 저항이 아니라 억압된 것을 인정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의 어떤 결과가 자유를 얻게 된다, 라는 프로이트의 설명을 고스란히 따라 가보고 싶게 만든다. 나는 여기서 앙드레 바쟁의 웨스턴에 대한 견해를 뒤집어 다시 세우고 싶다. 왜 그럴 필요가 있는가. 바쟁은 쉬르-웨스턴의 영화들을 공격하면서 이 영화들이 자기가 놓여진 시대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냉전시대의 매카시 ‘레드 페이퍼’를 알리바이로 삼는 것으로부터 이 장르를 구해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나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과도하게 뒤집어 쓴 알리바이. 하지만 영화가 자기의 책임, 모순, 법적인 제도, 복잡한 층위에서 요구하는 정치적인 상황, 경제적인 관계, 그 안에서 하나의 통일을 부여하려는 예술의 전투 혹은 타협, 그 전투 혹은 타협의 주관적인 결정과 객관적인 한계, 그 모든 것의 결정으로서의 역사를 형식의 일시적인 진공상태로 정지시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제 자리로 돌아간 영화. 나는 재빨리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고 싶다. <풍운의 검객> 안의 새로운 인물들, 가까스로 세워놓은 배경을 어지럽히는 행동들, 이 행동이 만들어내는 사건. 그것들은 임권택이 이제까지 복종했던 조선시대 사극에 대한 하나의 시험이다. 어떤 시험? 임권택에게 할리우드 영화들, 그 중에서도 웨스턴 영화들, 그 중에서도 (바쟁의 분류에 따르면) 쉬르-웨스턴들은 이상적인 유토피아 모델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극 모델 안에서 웨스턴 영화를, 쉬르-웨스턴을, <셰인>을 진행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라는 하나의 시험. 그 둘은 겹쳐놓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 둘은 서로 공존 가능한 것일까. 그 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그러나 어딘가에서 닮은 것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모방은 탐색이다. 무엇에 대한? 유사한 기호들.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라는 시험. 하지만 이건 위험한 시험이다. 왜냐하면 서로 완전히 다른 배경의 무대는 그것이 작동되기 시작할 때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때려 부술 지도 모른다. 이 폭력적인 접근의 교집합. 이때 교집합의 자리에 놓인 주인공은 이유 없는 자신의 고난 앞에서 아무 것도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우유부단해지고 그 공허한 행위 속에서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러 관점에서 다시 정의내릴 수 있는 <풍운의 검객>은 이 수수께끼의 검객 방갓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연성을 놓고 질문을 하면 의문이 떠오른다. 방갓은 왜 한양 한 복판에 나타난 것일까. 그는 왜 어린 왕자와 옥에 갇힌 난실을 구하는 것일까. 왕자도, 난실도 그가 누군지 모른다. 그는 왜 목숨을 걸고 최괄과 희빈 문소이의 음모를 방해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시나리오에는 있다. 방갓은 수문장 손호관의 아들 손용운으로 그의 가족이 최괄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어린 나이에 혼자 살아남은 다음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 방갓의 모든 행위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로 옮기면서 방갓의 사연, 차라리 손용운이라는 인물 자체를 삭제시켜 버렸다. 우리는 끝까지 방갓의 사연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추론은 그 스스로 내내 쓰고 다니면서 자신을 ‘방갓’이라고 부르는 모자를 통해 희미하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삿갓과 달리 방갓은 부모의 상(喪)을 당한 상제가 외출을 할 때 쓰는 모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누구도 방갓에게 부모의 상을 당한 슬픔에 대해서 위로하거나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모자는 내용 없는 기호로 그와 함께 내내 머문다. <풍운의 검객>에는 대사가 없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이를테면 최괄의 하인들, 달지의 부하들. 장안의 오가는 백성들. 하지만 방갓을 쓴 사람은 방갓뿐이다. 그럼으로써 방갓은 그 모두로부터 방갓을 분리해내는 기호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두 번째 특별한 점. 방갓은 자기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 약속은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물론 살인에 대해서는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 같은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여기서 방갓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살인의 위협을 가하는 경우에도 그를 물리치거나 무력화시킬 뿐 거기서 멈추는 그 자신과의 약속에 있다. 그 약속이 스승 백운도사와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 뒤에 방갓을 에워싼 달지의 수많은 부하들의 칼과 맞서야 할 때, 그래서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칼등 대신 칼날을 휘둘러야 했을 때, 그때 그 자리에 나타난 백운도사의 입을 통해서이다. 이 약속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영웅의 조건. 단지 뛰어난 무술과 빼어난 지략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서 방갓에게 선과 덕을 요구한다고 말하면 그건 요점을 놓친 것이다. 영웅이 영웅이 되는 순간은 그가 시련이라는 시험을 통과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이다. 임권택은 이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에 틀림없다. 그의 주인공들은 종종 이 시련을 통과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신체의 일부를 상실하거나 부서졌다. 그 시련은 점점 혹독해졌으며 임권택의 ‘다찌마와리’ 액션 장르영화 시기에는 잔혹함을 넘어서서 (상황에서) 기괴하고 (감정적으로) 굴욕적이며 차라리 거기서 멈춰 서서 그 과정 자체에서 어떤 기쁨을 누리는 것만 같은 도착으로까지 밀고 나아갔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이 과정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심지어 1970년대 새마을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운동의 지도자로 거듭 나기 위해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아마도 이 과정의 가장 복잡하고 기이한 정식화는 이청준의 원작 소설을 빌려 한(恨)을 품어야만 더 높은 예술의 경지에 이룰 수 있다는 판소리 예술가들에 관한 두 편의 영화 < 서편제 >와 < 천년학 >일 것이다. 나는 이미 반복해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밀고 나아갈 것이다. <풍운의 검객>에서 임권택은 이 질문을 아직 정식화시키지 않았다. 대신 주인공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조선시대 안에 어떤 틈을 만들어내고 있다. 차라리 주인공을 조선시대로부터 소외시키면서 장르와의 사이를 분리시키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주인공 방갓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고 영웅이 되면서 그 자신에게 충만하면 할수록 조선시대는 점점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풍운의 검객>은 (바쟁의 정리에 의지해서 말하자면) <셰인>이 웨스턴에서 한 것을 조선시대에 대해서 하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은 자기가 시작했던 무대를 자기의 방법으로 부정하는 중이다. 방갓은 이 공허한 무대에서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기호들 사이를 오가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걸고 무언가를 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그걸 왜 하는 지 끝내 알지 못한다. 무언가, 라는 행위와 왜, 라는 이유, 사이의 간극에서 방갓은 영웅의 시련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만 그 시련의 대가는 그에게 무의미한 조선시대로부터 거의 우주적인 텅 빈 영화 바깥의 세계에로 어떤 선택의 여지없이 다시 떠나야한다는 운명적인 결론이다. 그때 이 우주는 어둠 속으로 무엇이든지 집어삼켜버린 다음 소멸시켜버리는 심연에 다름 아니다. 임권택은 영웅적인 죽음대신 차라리 여기서 영웅적인 소멸을 선택한다. 죽음과 소멸 사이의 간극. 이 절망적인 매혹, 나는 아무 것도 세상에 남기지 않고 사라버리고 싶습니다. 세상이 내게 부여한 임무가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그걸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호의 밤. <풍운의 검객>에서 영웅적인 과정은 사실상 소멸 앞에서의 잠시 동안의 머뭇거림이다. 하지만 세 번째 특별한 점에 비교하면 두 번째 특징은 아무 것도 아니다. <셰인>에서 셰인은 마리안이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마리안과의 로맨스를 외면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호의를 베풀어준 그녀의 남편 조 스타렛과의 우정 때문이다. 물론 마리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제스처를 노출시킬 뿐이다. 좀 더 복잡한 설명도 있다. 셰인은 이 마을에 머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단지 이 마을뿐만 아니라 어떤 공동체에도 머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마리안이 아닌 누구와의 로맨스도 거절했을 것이다, 라는 가설이다. 왜 웨스턴의 주인공이 광야(wildness)에서 공동체에 왔다가 다시 광야로 떠나가는지에 관한 긴 이론이 있다. 하지만 그 이론은 우리의 논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세 번 밖에 총을 뽑지 않는 <셰인>은 셰인과 마리안과의 감정적 긴장에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서 웨스턴이라기보다는 로맨스 멜로드라마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풍운의 검객>도 로맨스에 더 가까운 (일종의) 기사도 서사이다. 처음에는 방갓이 달지의 아흔 아홉 칸 대궐 같은 저택에서 벌이는 신출귀몰하는 지략과 음모의 모험극처럼 시작하지만 이 서사 안으로 연화와 난실이 들어오자 갑자기 두 여자가 방갓에게 보내는 정념의 로맨스로 바뀐다. 연화는 방갓을 보자마자 그가 이 서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달지가 그녀에게 보내는 관심을 외면한다. 난실은 방갓이 그녀를 옥에서 구하자마자 처음 보는 그에게 자신이 품고 있던 노리개를 건네주면서 (연인들 사이에 나누는) 정표로 삼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방갓을 사이에 두고 난실과 연화는 사랑, 질투, 분노, 원망, 하여튼 그녀들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서로 경쟁적인 로맨스의 감정을 조금도 숨길 생각 없이 드러내놓고 신호를 보낸다. 이때 방갓은 둘 사이의 선택에서 어떤 고민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둘 중 누구도 선택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방갓은 그녀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면서 항상 친절한 태도로 대하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로맨스의 신호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는 둘 중 누군가에게 실망을 시킬까 두려워 거짓 거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거절하는 척 하는 사랑. 우리들이 로맨스 소설에서 이미 읽은 냉담한 실패를 목표로 한 사랑의 거짓 제스처. 거절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의 변주들). 방갓이 이 로맨스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서사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서사 바깥에서 누군가 (이를테면 집에서 기다리는 그의 아내) 방갓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며. (그래서 어딘가를 가야하는 도중에 벌어진 일에 말려든 것이 아니며) 거기에 또 다른 계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알고 보니 이 일은 왕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임무였다, 라는 이중 플롯) 아무 것도 숨기지 않은 두 여자의 속마음. 무조건적인 정념. 오히려 삼각관계에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일관되고 단조롭게 설명할 수 없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진행되는 방갓의 거절은 오히려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걸 먼저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때 어떤 로맨스도 받아들이지 않는 방갓의 선택은 그의 적들에게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약속과 결합하면서 그가 ‘나그네’라기보다는 불가에 입문한 승려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풍운의 검객>에서 불교의 어떤 기호도 발견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런 가르침을 내린 방갓의 스승 백운도사도 스님이 아니다. 이때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두 여자, 난실과 연화의 대조적인 사회적 신분이다. <풍운의 검객>의 무대가 조선시대라는 것을 환기시키겠다. 난실은 영의정 김종성의 무남독녀 영애이다. 조선시대에 시기별로 그 지위가 변하였으나 (<풍운의 검객>은 정확한 연대를 표기하지 않았다) 한때 의정부 최고의 자리였으며 그 아래 좌의정과 우의정을 두고 조선의 국사를 결정하던 자리. 그 지위의 근대적인 번역은 갑오개혁에 이르러 고종의 명에 따라 영의정을 총리대신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봉건제 왕권국가에서 임금 바로 아래의 관직.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딸. 연화는 그녀가 아무리 호사스러운 장안의 기방(妓房) 여주인이라 할지라도 유교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기생의 신분이다. 우리는 ‘춘향전’에서 서예와 가무에 능한 성춘향은 어머니가 기생이지만 그녀는 엄연히 기방에 등록하지 않은 여염집 규수인데도 기생의 딸이라는 이유로 남원 사또 변학도에게 술시중을 들지 않는다고 불려가 고초를 당하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방갓이 두 여자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는 선택은 그 둘이 반대의 자리가 아니라 비대칭의 위치에 있다. 여기서 조선시대는 임권택의 영화 안으로 이상한 우회를 거쳐 회귀한다. 내면화된 조선. 오른 쪽에는 난실이 있다. 영의정 김종성의 가문이 지금은 최괄과 희빈 문송이의 음모로 화(禍)를 당하고 난실이 한양 바깥으로 쫓겨나 그녀의 몸종처럼 데리고 다니는 어린 소년과 지내고 있지만 그 음모를 밝히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면 난실은 다시 명문가의 자리에로 되돌아갈 것이다. 지금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해 방갓은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게 <풍운의 검객> 서사의 전부이다. 이때 이 서사의 무대로서의 역사는 감정의 세계가 아니라 왕조차 복종해야하는 질서에 지배받고 있는 국가이다. 무대는 배경에서 멈추지 않고 그 서사의 토대라는 더도 덜도 아닌 근거의 지평을 인정해야 한다. 영화가 끝난 다음, 그러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의 첫 번째 장면을 떠올려보자. 지금 한양 바깥 산속 암자에서 지내는 처지이지만 난실이 다시 복권하고 원래의 자리에 갔을 때 방갓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없다. 난실은 지금이 예외의 상태이지만 방갓에게 원래의 자리라는 것은 없다. 나그네의 자리. 일시적인 잉여의 위치.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고, 양반은 사회의 기득권을 소유하고 있는 계층이었으며 그들을 천민들과 분리하였다. 난실은 그 중에서도 최고위층의 사대부 집안, (한 번 더) 그 중에서도 영의정의 자식이다. 난실이 방갓을 허락한다 할지라도 그녀의 (어쩌면 남아있는) 가족, 가족의 친척들, 그녀가 되돌아온 사대부, 그들을 둘러싼 선비들, 그 모두를 구성하는 신분사회인 조선은 방갓이 그들 사회에 진입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관한 사극영화의 멜로드라마 서사들. 양반집 따님, 혹은 남편을 잃은 과부가 하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맞이하는 비극에 관한 이야기들. <풍운의 검객>은 방갓이 난실의 로맨스 제안을 받아들이면 마지막 장면 디음 장면은 정확하게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멜로드라마 영화를 반복하는 비극의 첫 장면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왼 쪽을 볼 차례이다. 이때 연화는 난실의 반대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은 옆이 아니라 위와 아래의 자리에 완강하게, 거의 불변의 위치에서, 사회적 조건 아래, 고정된 상태로 머물 것이다. 조선시대에 기생은 신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천민에 해당했다. 물론 기생들 사이에서도 다섯으로 나뉜 등급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으뜸인 일패기생(一牌妓生)은 임금 앞에서만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달지를 상대하는 연화는 문무백관만을 상대하는 이패기생(二牌妓生)이었을 것이며, 이패기생 중에는 가무와 서예로 한양 장안에서도 그 명성이 드높은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신분이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조선은 유교의 원리가 가치였던 사회였다. 남녀유별, 남녀칠세부동석, 의 가치아래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권하는 여자들은 유교라는 텍스트를 난잡하게 만들고 올바른 도덕적 삶에 대한 타락의 사례가 되었다. 도덕은 유교에서 명령이다. 나는 똑같은 가정을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방갓은 난실대신 연화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이상한 장면. 방갓은 난실의 노리개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연화의 기방을 찾는다. (그런데 이게 위험을 무릅쓸만한 일인가) 연화는 그때 자기를 보고 싶어 찾아온 것으로 오해하고 방갓에게 안겨 자기의 속마음을 고백한다. 이때 방갓은 매장하게도 난실의 노리개를 찾으러 왔다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방갓의 태도에 관한 질문, 이 방문을 통해서 방갓은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표면적인 진정한 목표는 (이 이중적인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노리개가 아니라 연화를 실망시킴으로써 그녀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론. 가장 단순하게 그 행위가 다른 남은 선택인 난실을 위한 것이라면, 혹은 반대로 연화를 실망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감정을 바꿔놓기 위해서라면, 어느 쪽을 향하건 사랑의 퍼포먼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방갓은 어느 쪽도 선택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이 공허한 방문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이때 방갓을 둘로 찢어서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방갓은 자시니 난실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인 연화에게도 향한다. 방갓은 정말 연화를 받아들일 마음으로 자신의 진정한 상대는 연화라는 대상에게 일시적인 판단을 했을 수 있다. 그래서 난실의 노리개는 핑계이며 연화와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여기에 왔(을 수 있)다. 그런데 마치 방갓의 속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화는 흠모하는 자기 마음을 고백한다. 만일 그런 마음으로 여기에 왔다면 방갓은 왜 그 고백을 거절하는가. 여기에 도착하는 전까지 방갓에게 연화는 어떤 대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도착하여 고백을 듣는 순간 어떤 대상이 연화가 되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서로 완전히 다른 자리라는 것이다. 도착하기 전까지 연화는 대상이긴 하지만 방갓이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였다. 그러므로 연화는 방갓에게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연화가 자신을 방갓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이라는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순간 연화는 즉시 단순하게 사랑의 감정에 고정된 존재로 축소된다. 그러므로 질문은 단순해진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왜 여기서 질문은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가 아니라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고 옮겨진 것일까. 로맨스 서사의 무대가 조선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다시 번역하면 당신은 기생인 나를, 천민인 나를, 유교의 가치 아래 세상 사람들이 경멸하는 나를, 그런 나의 연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로 옮겨질 수 있다. 방갓이 거절하는 것은 연화가 아니라 연화가 놓인 사회적 위치이다.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나그네인 방갓이 그걸 거절할만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지금 당신이 이 선택의 남은 절반을 잠깐 잊은 것이다. 신분사회의 로맨스. 난실과의 일시적지만 이 맹목적인 로맨스는 방갓을 상상할 수 있는 (하지만 임금을 제외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려놓는다. 방갓은 영의정 김종성의 딸 난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방갓은 두 개의 선택 사이에서 (셰인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 태도에서는 별 차이 없이) 우유부단해진다. 어떤 우유부단? 난실의 사랑을 받을 때 방갓은 그 사랑의 대상의 자리에 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뒤로 물러나고, 연화의 사랑을 받을 때 방갓은 자신이 난실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부터 내려갈 생각이 없기 때문에 뒤로 물러난다. 이때 이 두 개의 뒤로 물러남이 비대칭의 이유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방갓이 어떤 계산도 없이 로맨스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 방갓은 조선시대 안에서 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산의 비대칭이 방갓을 우유부단한 슬픔에 빠지게 만든다. 이것이 방갓의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 사이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선택 이후의 선택은 방갓이 조선시대로부터 완전히 물러나는 것이다. 임권택은 퇴각의 마지막 자리에 <셰인>과 마찬가지로 클라이맥스를 배치하였다. 셰인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전문적인 해결사인 총잡이 잭 윌슨과 대결을 벌인다. <셰인>에 매혹된 관객은 누구나 이 마지막 대결 장면을 언급한다. <풍운의 검객>에서 가장 공들인 장면은 방갓과 달지 사이의 단 한 번의 마지막 대결 씬이다. 이미 최괄과 희빈 문소이는 백운도사가 올린 상소문으로 연화석상에서 나라의 명을 받고 대역 죄인으로 포도청 금부(禁府)에 의해 구금되었으며. 방갓은 난실과 연화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길을 떠나던 중이었다. 떠나가는 방갓을 따라온 건 난실을 모시던 어린 소년 시종과 그 자리에서 구금을 피해 달아난 달지뿐이다. 물론 시종 소년의 역할은 영화 내내 거의 존재감이 없다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방갓과 달지의 대결을 바라보는 증인의 시선으로서의 역할, 말하자면 <셰인>에서 셰인과 잭 윌슨의 대결을 바라보는 증인의 존재이자 신화를 완성시키는 임무를 가진 마리안의 어린 아들 조의 자리이며, 그런 다음 떠나가는 방갓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의 존재로서 거기 있는 것이다. 총에서 칼로 바뀐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대결, 웨스턴 영화의 마을 중심에 자리한 술집 바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등성이 들판에로의 이동.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단지 산등성이 언덕 풀밭을 흔드는 정도를 넘어서서 들판 전체를 흔드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바람과 함께 어디에선가 안개가 몰려온다. 화면은 일부가 정도로 짙은 안개. 바람결에 그 안개가 사방을 덮는다. 안개를 제외하면 이상할 정도로 이 장면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1943년에 만든 첫 영화 < 스가타 산슈로(姿三四郞) >의 마지막 대결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 마디로 굉장한 시퀀스. 물론 임권택은 그때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영화는 1998년 10월 20일 일본대중문화 개방정책에 따른 허가까지 한국에 수입이 금지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1967년은 극장이 아니면 영화를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고, 임권택은 해외에 1978년에 처음 나가보았다. 하지만 단지 들판에서 바람이 분다는 설정에서 멈추지 않고 방갓과 달지가 서로 마주보는 장면의 구도 일부는,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심지어 본 적도 없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첫 영화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씬의 디테일은 임권택 스타일의 특별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씬이 <풍운의 검객> 전체로부터 마치 떨어져 나온 다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오직 여기서만 씬 전체에서 장소의 위와 아래, 그 장소와 관계하는 기후의 변화와 그것이 서사에 관여하여 만들어내는 미장센의 효과, 그 안에서의 동선의 이동과 그 동선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으로 이루어지는 몇 겹의 배치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단조롭던 이 영화의 동선과 장소의 배치는 오로지 이 장면만을 위해서 마치 숨겨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마도 방갓이 달지와 마주치는 장면은 소년의 시선의 위치 때문에 산등성이 언덕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달지는 떠나는 방갓을 멈춰 세운다. “이봐, 결판을 내야지” “싫다” “그건 네 생각이고, 어차피 너와 나는 끝장을 봐야하는 입장이다” “싫다,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웃기지마라” 그리고 달지가 칼을 뽑아든다. 방갓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갓을 벗는다. 그런데 그런 다음 그 둘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산 비탈길 아래로 위치를 옮긴다. 마치 위에서 소년이 내려다보기에 좋은 위치로 옮겨야한다는 듯이 그렇게 이동한다. 이때 화면을 채우는 것은 갑작스러운 바람소리이다. 조금 전까지 평화롭던 이 산등성이에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단지 장르의 약속 이상으로 그 바람이 너무 세고 큰 규모로 불기 시작하기 때문에 기이하고 심지어 초현실적인 감흥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때 이 대결장면은 임권택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어떤 스타일? 이 대결 장면이 2분 40초에 이르는데도 임권택은 서로를 마주보는 방갓과 달지 사이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찍은 쇼트를 마주보게 만든 다음(shot_reverse shot) 둘 사이만을 번갈아 오갈 뿐이다. 이 대결에서 달지가 칼을 휘두르는 찰나의 순간은 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방갓은 마지막 순간 단 한 번 칼을 휘두를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방갓은 그 한 번으로 달지의 양쪽 무릎을 베어 그를 땅에 무릎 꿇게 만든다. 임권택은 이 씬에서 액션의 디테일 대신 서로 마주보는 시선의 교환, 그때마다 위치를 옮겨 찍은 카메라의 위치와 구도, 무엇보다도 바람소리와 화면을 덮치는 것만 같은 안개로 진행한다. 최소의 액션. 이때 씬의 진행에서 위계질서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 디테일들 사이의 위계질서. 이때 임권택이 거기서 찾은 디테일은 서사의 안쪽으로부터 말 그대로 표면, 영화라는 표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영화의 표면, 영화라는 표면. 표면의 광경. 광경의 디테일에 관한 방법론. 나는 거의 멈춰 서다시피 이 마지막 씬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임권택은 분명히 거기서 무언가 새로운 기쁨을 발견했다. 마치 마지막 씬의 기쁨을 위해서 이미 만든 영화의 전부를 바꿔도 상관없다는 것만 같은 태도. 임권택의 1960년대 영화를 설명할 때 대부분 고통의 감정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본 것은 분명히 기쁨의 정념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고통 안에 숨어있던 기쁨을 끌어내려고 애쓸 것이다. 물론 기쁨이 비가시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매번의 쇼트라는 양태 안에 담겨있는 속성의 표현이라면, 그래서 그 표현이 영화를 견디게 해주는 실존적인 상태라면,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서 정념의 형상에 관한 설명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실패를 무릅쓰고 이 형상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거듭 되돌아올 것이다. 그걸 해낼 수 있다면 임권택 영화에서 거의 다루어진 적이 없는 디테일을 경유하여 정념의 형상에 관한 표현의 순간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198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던 장르를 꼽는다면 ‘종교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멸종된 건 아니다. 최근 < 일사각오 >(권혁만, 2016) 같은 영화가 소박한 흥행을 거두었고, 김수환 추기경(< 바보야 >(2011)),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의 의자 >(2011)), 옥한흠 목사(< 제자, 옥한흠 >(2014) 등 종교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울지마, 톤즈 >(2010)나 < 소명 >(2009)처럼 오지의 성자들에 대한 작품도 있다. 다른 건 소속된 리그다. 최근 종교 관련 작품들이 다양성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면, 1980년대의 종교 영화는 메인 스트림 안에 있었다. 이 영화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당시로선 큰 흥행인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했으며, 사극일 경우 거대 예산이 들어간 대작이었다. 특정 종교의 역사, 인물, 교리 등을 테마로 삼는 종교 영화는 1980년대 상업영화의 한 축이었으며, 비록 그 종교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강한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 가톨릭, 불교는 물론이고 증산도를 다룬 < 화평의 길 >( 강대진 , 1984), 무속을 소재로 한 < 피막 >( 이두용 , 1981) < 무녀의 밤 >( 변장호 , 1982) < 불의 딸 >( 임권택 , 1983) < 태 >( 하명중 , 1986) < 업 >(이두용, 1988) 등이 이어졌고, 수련을 통한 초능력을 다룬 < 단 >( 김행수 , 1986)이나 사이비 종교에 대한 < 백백교 >( 최영철 , 1993) 등도 있었다. 1980년대 이전에도 기독교와 가톨릭을 다룬 종교 영화들은 있었다. 그 영화들은 사극, 전쟁 영화, 반공 영화 등에 걸쳐 실존적 철학과 이념적 갈등과 역사적 사실 등을 다루었다. 유현목 감독의 < 순교자 >(1965) 최하원 감독의 < 새남터의 북소리 >(1972) 이성구 감독의 < 악마의 제자들 >(1974)과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1973) 당대 종교 영화 트렌드의 중심은 기독교였다. 조짐은 1970년대 말부터 있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주요작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기독교 영화의 붐이 일기 시작했던 걸까? 이것은 당시 기독교의 부흥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5일 동안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대회엔 전국 각지의 크리스천이 300만 명 이상 모였다. 이후 1974년엔 김준곤 목사의 엑스플로 대회가 있었고, 1977년엔 민족 복음화 성회, 1980년엔 세계 복음화 성회, 1984년엔 선교 100주년 대성회 그리고 88 세계 복음화 대성회 등이 이어졌다. 이 시기 뉴스에서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운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접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1980년대 중반에 오면 ‘1,000만 기독교인’이라는 자체 집계가 발표된다. 이른바 ‘대부흥의 시대’였다. 자고 나면 교회가 생겨나던 시절, 기독교 영화에 대한 잠재적 수요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이때 < 사랑의 원자탄 >(강대진, 1977)이 포문을 열었고 뒤를 이은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임원식 , 1981)는 서울 관객 20만 명 이상을 동원한 흥행작이었다. 다음 해 < 죽으면 살리라 >(강대진, 1982) < 하늘 가는 밝은 길 >( 김성호 , 1982)이 나왔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신앙을 실천했던 손양원 주기철 안이숙 등이 주인공이었던 이 영화들은 한참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 기독교인들에겐 일종의 교재였다. 실화 영화로서 이 작품들이 지닌 이분법적이고 감정적이며 극적인 감수성은 절절한 간증이 되어 신도들의 가슴을 쳤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였다. 최하원 감독은 < 초대 받은 사람들 >(1981)과 < 초대 받은 성웅들 >(1984)를 내놓는다. ‘천주교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초대 받은 사람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약 15만 5,000명의 서울 관객을 모은 흥행작. <초대 받은 성웅들>은 ‘천주교 조선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며 서울 대교구의 지원으로 제작되었다. 최인현 감독의 < 소명 >(1984)도 200주년 기념작. 이 작품들은 이승훈 김대건 이벽 등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올 시기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그린다. 특히 1984년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며 가톨릭의 열기가 뜨거웠던 해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주요 종교 영화들의 중심 테마는 순교와 박해였다. 이 영화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 하드고어에 가까운 표현을 하기도 했다. <사랑의 원자탄>은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해방 후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그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들였다. (상단 오른쪽)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로 결국 옥사한 그의 이야기는 <하늘 가는 밝은 길>과 <일사각오>로도 영화화되었다. (하단) 최하원 감독의 <초대 받은 사람들>과 <초대 받은 성웅들>.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오던 시기 겪었던 박해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처럼 1980년대 초 기독교와 가톨릭이 이끈 종교 영화의 열풍은 종교적 이벤트와 신도의 양적 성장을 토대로, 억압 받았던 수난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영화들의 만남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 영화들을 통해 기독교와 가톨릭은, 신분제 사회와 식민지 체제에서 평등 사상과 민족 정신을 주장하고 지켰던 종교로서 일종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흥미로운 건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사례다. 원래는 1977년에 제작되어 개봉 예정이었지만, 유신 정권은 이 영화에서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다.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신사 참배에 저항하는 주기철 목사(신영균)의 모습을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으로 여겼던 모양. 그래서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던 영화는 198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고, 큰 흥행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종교 영화들이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전진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의 한국영화는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 시기 충무로는 산업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떠오르던 종교 이슈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큰 흥행은 자극제 역할을 했고(이 영화는 속편이 기획되기도 했다), 무산되긴 했지만 <정의가 나를 부를 때> <빛을 마셔라> <이천석 목사> 등도 제작될 예정이었다. 기독 영화인들의 모임도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모이기 시작한 그들은 1976년 ‘새롭게 하소서’라는 공연으로 연예인 선교의 단초를 마련했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는 개런티 없이 참여하기도 했다. 신영균 고은아 를 비롯 최민수 의 어머니인 강효실 , < 예수 천당 >( 홍의봉 , 1991)의 이영후 , 그리고 임동진 문오장 구봉서 곽규석 윤복희 (가수) 송도영 (성우) 등이 대표적 인물. 한편 종교적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감독들도 등장했는데 복음주의적 입장의 강대진 감독은 <사랑의 원자탄>과 <죽으면 살리라>를(그런데 1984년에는 증산도에 대한 <화평의 길>을 연출하기도 했다), 실존주의적 입장의 유현목 감독은 < 사람의 아들 >(1981)과 < 상한 갈대 >(1984)를, 선교적 입장의 홍의봉 감독은 < 휴거 >(1990) < 천국의 비밀 >(1990) < 예수 천당 >을 내놓았다. 여기서 1980년대 종교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이장호 감독과 이동철(본명 이철용) 작가다. 그들은 한국 종교 영화에 본격적으로 ‘민중’의 개념을 가져왔다. 기독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찬송가였다. 이 영화들의 OST는 대부분 찬송가 멜로디의 변주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다 해방을 맞이해 극적으로 살아난 안이숙의 이야기인 <죽으면 살리라>. 가수인 윤복희가 주인공을 맡아,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들려준다. 이 시기 기독교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는 ‘회개’였다. <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에서 최자실 목사는 빈민촌에서 교회를 세우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킨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무당( 김을동 )이 회개하는 대목이다. 이동철 원작의 < 꼬방동네 사람들 >은 빈민촌의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그 중엔 고물 장수 목사가 있다. 그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 과부춤 >은 천민 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를 이야기한다. 부흥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교회의 모습이 풍자된다. 그 시작은 <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2)였다. 안요한 목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청준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신의 부름을 받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종교적 체험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한 인물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한국 종교 영화가 담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도시 빈민의 모습이다. 안요한(이영호)은 시력을 잃은 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판자촌에 교회를 세우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모습은 이동철 작가 원작인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인)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도 등장한다. 영화에는 리어카를 끌며 고물 장사를 하는 목사( 송재호 ) 캐릭터가 있는데, 그는 ‘꼬방동네’(빈민촌) 사람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대형화와 함께 중산층화를 겪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소외 당한 자들에 대한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민중 교회가 등장했는데, 이런 흐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 매체가 바로 영화였다. 이런 시각은 창녀촌을 배경으로 한 < 밤을 기다리는 해바라기 >( 엄종선 , 1982) 같은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의도하지 않게 드러나기도 했고, 김진홍 목사의 빈민 선교 이야기인 < 새벽을 깨우리로다 >( 이기원 , 1990)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김수형 , 1982)은 한국 대형 교회의 상징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최자실 목사(송도영)의 일대기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이장호 감독, 이동철 원작의 <과부춤>(1984)은 본격적인 종교 영화는 아니지만, 당대 한국 기독교를 적나라하게 풍자한 수작이다. 광적인 부흥회, 돈에 눈먼 목사, 교회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신도 등 <과부춤>은 ‘천만 기독교인’ 시대의 이면을 들춘다. 이 영화는 단순한 기독교 비판에 그치지 않고, 종교 없인 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멘털리티를 보여주며, 그 이면엔 ‘가난’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세상에 대한 당대 기독교 영화의 관심은 불교 영화와도 일맥 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 만다라 >를 시작으로 1980년대 불교 영화는 끊임없이 속세와 종교적 깨달음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중광 스님의 이야기인 < 허튼 소리 >(김수용, 1986)를 비롯해 <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임권택, 1989) < 우담바라 >( 김양득 , 1989)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정지영 , 1991) 그리고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배용균 , 1989)까지 이 시기 불교 영화엔 사바 세계에 대한 미련과 번민이 있다. 종종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습에 갇히기도 하지만(유난히 비구니 캐릭터가 많았던 건 그런 이유일까?), 관념적 화두에 머물지 않고 세상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이후 임 감독은 <비구니>를 만들려 했지만, 촬영 도중 중단되어 결국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법난 이후 불교계와 정권은 갈등을 빚었고, 그 와중에 조계종은 이 영화의 제작을 반대하여 결국 중단 사태까지 간 것. 이후 감독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비구니>의 한을 풀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을 넘어, 세계 불교 영화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를 전후로 충무로에 잠깐 불교 영화의 붐이 일었다. 실존주의자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 이문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이 시기 종교 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는 초월적인 기적의 순간을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초대 받은 사람들>에서 정혜(원미경)의 가슴에 십자가 빛이 새겨진다. 1980년대 종교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군사 정권의 군홧발 아래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전두환에게 달려가 조찬 기도회를 열어주었고, 불교계는 10.27법난(1980년)을 겪으며 초토화되었다. 가톨릭은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 기복 신앙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고, ‘종교 과잉’과 ‘사이비’의 시대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 카오스 속에서 ‘영적 상품’으로 기획된 종교 영화들은 전반기엔 기독교 영화가, 하반기엔 불교 영화가 중심을 이루며 1980년대를 장식했다. 하지만 1990년대 기획 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 영화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기업 자본에게 ‘종교’는 매력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부활한 건 2010년 전후 즈음. 몇 편의 다큐멘터리가 다시 신앙과 선교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후 주기철 목사에 대한 <일사각오>를 비롯 < 신이 보낸 사람 >( 김진무 , 2014) < 로마서 8:37 >( 신연식 , 2017) < 산상수훈 >(유영의, 2017) 등의 극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1. 1990년대에 영화의 매혹에 빠져들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정성일이라는 평론가를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그를 인지하게 된 것은 잡지 「로드쇼」를 통해서였다. 잡지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편집자들의 짧은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렸는데, 늘 사진 속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편집 후기에서는 영화보다는 음악 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 남자가 정성일이었다. 90년대 초, 내가 다니던 근처의 대학에서 정성일 평론가가 강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몰려갔다. 강당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없었고, 객석의 반응도 그닥 열광적이지 않았다. 강연의 마지막 즈음 U2의 어떤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며 독특한 영상기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조차 반응이 없었다. 그때 정성일 평론가는 치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여기 오신 분들은 U2보다 김수희를 들으시나 봐요.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학생들은 그제야 쑥스럽게들 웃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날 밤은, 임권택 감독의 < 길소뜸 >(1985)에 나왔던 롱테이크, 신성일 이 누웠다가 일어나며 프레임에서 사라지다 들어오길 반복하는 그 장면을 충격적으로 목격한 날이기도 했다. 그 강연 이후, 몇몇 학생들은 정성일 평론가와의 뒤풀이 자리에 갔다고들 했는데 소심했던 난 그냥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 후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이 있었고 「키노」가 있었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해 화질이 엉망인 VHS를 보며 영화에 대한 갈증을 채우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희생 >에 2만 5천 명의 관객이 들고, 영화 전문 잡지가 계속 쏟아져 나오던 그때로 시간은 마냥 흘러갔다. #2. KMDb 영화글의 편집자로서, ‘한국영화걸작선’에 정성일 평론가의 글을 받기 위해 수년간 연락했지만, 늘 불발되었다. 그는 거절하며 언젠가 한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글 연재를 하고 싶다는 답을 해온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성일 평론가는 임권택 감독의 전작 리뷰를 KMDb에서 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 ‘한 감독’이 임권택 감독이라는 것은 놀랍지 않았지만, 전작 리뷰 옵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때부터 자료원 안에는 담당자들이 꾸려졌고, 정성일 평론가와 몇 번의 만남을 가지며 여러 가지 협의 및 사전 작업을 끝냈다. 현존하는 임권택 감독 영화의 리스트가 만들어졌고, 그 영화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도 강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012년 11월 5일, ‘서문’을 시작으로 이 연재는 시작되었다. 당시 칼럼 오픈 이벤트도 있었는데, 우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연재가 모두 끝나고 거나한 쫑파티를 하자, 그리고 이벤트에 당첨된 사람들을 그때도 초청하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에는 대략 4년 정도 후면 그 파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의 야심보다 빨랐다. 그 시간 속에서 처음 칼럼 제목이었던 ‘임권택x101’은 < 화장 >(2014)의 제작으로 ‘임권택x102’로 바뀌었고, 미보유 영화가 새로 발굴되어 써야 할 글이 늘어나기도 했다. 여러 인터뷰가 비평 글 사이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임권택 감독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술되었다. 그러면서 작은 임권택의 우주는 스스로 생명을 가진 듯 점점 넓어졌다. 정성일 평론가는 매번 거대한 원고를 넘겼다. 도저히 한 호흡으로 읽히지 않아 퇴근길 전철 안에서 나머지 원고를 읽으며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갸우뚱 하며, 때로는 다시 읽어야겠다며 가방 안에 원고를 주섬주섬 다시 넣었던 그 원고들을 편집하고 참조할 이미지를 준비해 온라인에 올렸다. 그리고 다음에 쓰일 영화를 인코딩했다. 그렇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프로젝트가 어느덧 절반에 다다르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이 인터뷰는 편집자인 내가 정성일 평론가에게 제안했다.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환기시키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전히 주요한 이유다. 독자는 인터뷰를 통해 절반이 지나간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장면 ‘#1’을 지나온 어떤 사람이 두 번째 장면 ‘#2’을 거치며 그저 정성일 평론가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가, 실은 이 인터뷰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음을 알아챌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인터뷰이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 인터뷰의 두 번째 이유가 된다. 유성관_ 2012년 11월 5일, KMDb에서 ‘임권택x102; 정성일, 임권택 을 새로 쓰다’ 칼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모두 43개의 글을 연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들은 34편의 임권택 감독 영화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은 35번째 영화 < 그 여자를 쫓아라 >가 업데이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칼럼을 시작했던 2012년 기준으로 현존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모두 76편이었습니다만 지금은 2015년 연합영화공사 한규호 대표의 자료를 수집하면서 < 전장과 여교사 > 한 편이 더 늘어나 77편이 되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신 지 3년 5개월의 시간이 흐른 셈인데요,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그 정도의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대략 대장정의 절반에 도달한 지금, 필자로서 간단한 소감을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성일_ 무엇보다 먼저, 이건 내가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가졌던 프로젝트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상충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맨 처음에 내가 제안을 했을 때도,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성관_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그 자체의 두려움이었던 건가요? 정성일_ 그렇습니다. 시작을 한다면 끝을 봐야 한다는 것인데, 중간에 힘들다고 중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었죠. 일단 시작하면 나로선 많은 것들을 중단하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 프로젝트는 영상자료원의 도움이 없이는 진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쪽 손으로는 (이미 진행 한) 임권택 감독의 전작 인터뷰를, 또 다른 손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전작 평론을 갖고 싶다는 건,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떨치기 힘든 욕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떤 비평가도 한 사람에 대한 전작 비평을 쓴 적이 없었죠. 하지만 저는 이 일을 누군가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비평 프로젝트는, 존경해마지않는 하스미 시게히코 평론가조차도 하지 못했는데, 그도 오즈의 전작 비평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그걸 한국에서 해보고 싶었던 거였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내 배움을 검토하는 자리도 되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도 매우 간절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사실 맨 처음 생각으로는 3년 4개월이 지난 이 시기 즈음에는 연재가 거의 다 끝날 것으로 생각을 했죠. 하지만 진행하면서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어떤 영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도 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런 활동이 저로서는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힘이 된 것이죠. 그런 과정 속에서 사실상 앞으로 쓰일 글에서 나의 비평의 내면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흥미진진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내 견해에 대해 고스란히 카피하는 과정이라면 지루했겠죠. 하지만 과정 안에서 비평의 내면이 새롭게 활동하는 힘을 느낄 때 나로선 이 글을 쓰는,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는 배움을 청하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배움을 청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유성관_ 그렇다면 이 질문이 꼭 나올 수밖에 없겠습니다. 왜 임권택 감독인가요? 정성일_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의미는... 이렇게 생각해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과정을 통해 영화를 처음 사랑하고, 반복해서 보면서 배움을 청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이해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며 얻는 배움은 잡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에 관련된 책, 영화와 관련이 없더라도 그 책을 보조하는 철학, 사회학, 인문학, 역사 배경 등의 자료를 찾게 됩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영화를 보다가 책에 가까이 가는 순간, 이론과 불장난을 벌이게 되어있습니다. (그 이론과의 사투가) 영화에 대한 지식을 구하는 것처럼 전도되기 시작하고, 그다음부터는 이론들이 이 비평가의 영화에 대한 견해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이건 굉장히 나쁜 상황이란 것을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알았습니다. 내가 너무 감사한 것은, 내 나이 20대 중반 시절, 그때가 80년대였다는 것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구조주의, 기호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등이 거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지만, 이것에 대해 나의 선배 중에서 그것들을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들은 고스란히 그걸 책에서 배운 것이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의 모든 것들을 깨달은 것 같은 이론적 도구를 가지고 영화를 난자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가 죽었다는 것. 매번 그런 어떤 허망한 느낌이 들었었을 때에, 정말 운 좋게, 저로서는 세월이 훨씬 지난 후에야 운이 좋았음을 깨달은 거지만, 임권택 이라는 감독과 인터뷰를 하게 된 것입니다. 1987년. 이 임권택 이라는, 오로지 영화를 만들어 온 경험만으로 영화에 대한 배움을 청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새롭게 혁신시켜나간 감독. 하지만 이것에 대해 나를 만날 때까지 그 누구와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죠. 이 어린 유치하기 짝이 없었던 애를 만날 때까지 말이죠. 아무도 그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고, 본인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그는 원시림 상태였습니다.(웃음) 만약에 그 당시 임권택 감독이 수많은 인터뷰로 굉장히 숙련된 상태였다면 난 많은 도움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원시림을 완전히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영화라는 것이 말하자면, 너무나 간단한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것, 즉, 창작이라는 과정의 예술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책으로는 틀림없이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들. 임권택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 자신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에게 영화와 이론이 뒤집혔던, 전도되었던 관계가 제자리를 찾게 된 겁니다. 나는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기 전과 후가 있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 후에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영화감독을 만나는 것이 나의 임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임권택 감독을 만나 후, 왕가위, ‘키노’를 만들면서 만났던 홍상수와 김기덕, 그리고 부산에서 만났던 지아장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전주영화제를 하면서 처음 사람으로 만났던 후 샤오시엔, 그다음에 만나게 되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그리고 왕 빙까지. 이 과정은 전적으로 임권택이라는 배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이상한 말이지만, 왕 빙 다큐멘터리, < 천당과 밤의 안개 >(2015)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임권택 감독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임권택이라는 한 영화감독의 세계로 들어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이유라면, 또 하나의 공적인 이유가 있는데, 이 글을 써나가면서 한편으로 내 글의 목표 중 하나는, 1962년 후의 한국영화사, 혹은 1962년 이후의 한국 근대사를 다시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글의 숨은 나의 욕심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연대기적으로 쓰지 않는다, 가 처음부터 원칙이었죠. 작년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갔을 때 장 프랑소와 로제가 똑같이 지적해줘서 너무 기뻤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권택 전작 회고전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이 한국영화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만희라는 위대한 감독의 이름을 알고 있고,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이라는 위대한 이름도 알고 있지만, 그 감독들은 특정한 시기에 위대한 감독들이었다. 오직 임권택만이 완전히 다른 시대를 오로지 자신의 방법을 통해 그 시간을 경유하여 온, 말하자면 한국이 한국전쟁을 끝내고 근대화가 시작된 그 시점에서부터 21세기까지 건너온 유일한 이름이다. 그의 작품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동시에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것이자 한국 영화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완전하게 동의했습니다. 이 글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임권택뿐만 아니라 한국영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한국영화사에 대한 나의 입장이 어떤 것이며, 한국영화에 대한 한 비평가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여기에 기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의 서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에 개방하기’로 새로 쓰기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곳의 글은 우리가 흔히 읽어 온 일반적인 비평 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에 걸맞게 서문에는 또한 ‘비평의 변주’라는 대목도 있는데요, 한 마디로 필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 연재 안의 ‘글’이란 무엇일까요. 정성일_ 명백하게 이 글들은 텍스트 비평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처음부터 피하고 싶었던 것이죠. 한 편의 영화를 미학적으로 평가하고, 영화 안에서 영화에 대한 네트워킹을 찾아내며, 그 영화에 한정 지어진 방법을 찾아내는 것으로는 임권택 감독 영화의 세계, 한국영화사 속에서 임권택 감독이 갖는 위치, 그리고 그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한국영화사의 지도를 배회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임권택 감독을 정의할 때 쓰는 방법 중 하나인데, 누군가 임권택 감독은 어떤 감독이냐 질문할 때, 난 “이 사람은 시행착오의 대가”라고 답변합니다. 이 점이 임권택 감독 영화의 가장 위대한 점 중 하나입니다. 모든 감독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특히 만일, 자기를 혁신시키려는 노력이 자기의 예술의 방법론이 아니었다면 60년대의 수많은 범작들 속에서 70년대로 넘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70년대의 국책영화로부터 80년대의 마스터로 올라오지 못했을 겁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 말합니다. 60년대 영화의 많은 작품들은 형편없습니다. 나쁘죠. 하지만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영화는 앞의 영화에서 못한 무언가 한 가지는 더 한 영화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임권택 감독의 모든 영화는 일종의 전 미래시제입니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그렇게 했어야 할 것인데, 라는 걸 포함하는 영화라는 의미입니다. 과거의 경험 없이는 이 영화는 없는 것이죠. 앞의 영화의 절대적인 반성 없이는 다음 영화는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이 영화의 실패만이 이다음 영화에 대해 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쪽으로 열릴지는 앞 영화만으로는 알 수가 없죠. 어떤 영화에 5개의 실패가 있었다고 칩시다. 그중 무엇이 가장 뼈아픈지는 당장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쪽 방향으로 가리라 생각했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쪽으로 나갈 때가 있는 겁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면, 같은 영화를 두 번 만드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내면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렇다는 말이죠. 앞에서 못 한 걸 뒤에서 반드시 합니다. 여기에서 잘 안 된 게 저쪽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세 번, 네 번 건너뛴 다음에 다섯 번째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1981년 임권택 감독은 < 만다라 >를 찍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하나였겠죠. 원작은 소승불교를 가던 법운이 대승불교를 가는 지산을 닮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던 임권택 감독은 마지막에 원작 소설을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가는 사람은 절대로 대승불교로 못 간다는 것이죠. 이건 그냥 소승불교를 가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소승불교의 길을 남성적인 길이라 이해하고, 대승불교의 삶을 여성적인 세계로 이해한 후, 이걸 < 아제아제 바라아제 >(1989)로 옮겨오게 됩니다. 또 다른 예. 모든 사람들이 성공작이라 생각하는 < 서편제 >(1993)를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 실패작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그걸 < 천년학 >(2006)으로 다시 찍습니다. 임권택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서편제>는 다시 보기가 두렵다. 이유는, <서편제>는 그 영화를 찍을 때 내가 판소리를 너무 몰랐다. 그래서 온통 내가 몰랐다는 것만 보인다.” 하지만 < 춘향뎐 >(2000)을 찍은 후에는 <천년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영화는 전 미래시제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한편으로는 지나간 시간을 영화가 끌어안는 한편, 미래를 향해 자신의 영화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죠. 나는 그 방법론을 어떻게 해서든지 비평 안에서 정식화시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정식화의 과정이 이론적 방식이 아니라 비평의 방식으로 제시하고 싶은 비평가의 소망이 있는 겁니다. 유성관_ 이 칼럼의 글을 읽다 보면 혹은 평론가님의 특정 영화에 대한 강연을 듣다 보면 영화에 대한 견해, 글 자체가 또 하나의 창작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정성일_ 고마운 표현이죠.(웃음) 혹은 과분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들이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있겠죠. 나는 비평의 방법론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의 방법론도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영화에 대한 평가의 수정뿐 아니라 방법론에 대한 수정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다지 눈여겨볼 이유는 없겠지만, 내가 썼던 비평 글은 예전 글과 비교해보면 그간 많이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소망하는 바는, 나의 비평이 그 영화와 닮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소망이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유성관_ 영화와 닮은 비평이란 무엇일까요? 정성일_ 그걸 정식화시켜놓으면 바로 그곳으로 떠나야겠죠. 개념화하거나 도구화한다면... 그건 이론이 해야 할 일이지 비평이 할 일은 아닐 겁니다. 유성관_ 이론가와 비평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정성일_ 발터 벤야민이 한 말을 빌리자면, 한 편의 작품이 타오르는 장작과 같은 것이라면 이론가들은 장작과 타고 남은 재만이 관심이겠지만 비평가들은 타오르는 불꽃의 신비로움 그 자체만이 관심인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를 하면서 지금까지 좋았던 것, 혹은 아쉬웠던 것, 뜻밖의 보람 같은 것, 이를테면 굉장히 의외의 사람에게 잘 읽고 있다는 고백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정성일_ 의외의 고백이라면, 이 비평을 잘 읽었다는 중국 영화 비평가나 일본 영화 비평가를 만났을 때입니다. 그럴 때는 이 사람이 어떻게 한글을 읽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인데 말이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생각보다 넓게 읽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죠. 하지만 나의 좀 더 큰 소망은 넓게 읽히기보다 오래 읽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연재가 끝난 다음에도, 혹은 내가 세상에 있지 않은 시간 후에도 임권택 감독을 연구하는 비평가, 이론가들, 혹은 맛보기 시작하는 시네필들이 참고할 수 있는 좋은 기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글이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좀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만.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좋았던 점은... 견해가 바뀔 때입니다. 어떤 영화를 다시 보고, 그 영화를 다시 생각하면서... 이를테면 이런 거죠. 예전에 영화를 봤었을 때는 인터뷰를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비평을 쓰기 위해서 볼 때는 그 목적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나의 자리가 옮겨가면서 이 영화를 다시 바라보게 될 때 그 영화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할뿐더러 견해 자체가 바뀌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한 편으로는 신나다?(웃음) 그와 동시에 지금 연재의 절반이 지나왔는데, 벌써 다시 쓰고 싶은 글이 있다는 것은 아쉬움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걸 어쩌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연재가 거의 끝나갈 즈음, 문득 이 글로 바꿔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유성관_ 그런 영화에 대한 글은 바꾸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같이 두는 게 좋을까요? 정성일_ 얼터너티브 버전?(웃음)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성관_ 편집자로서는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올라갔던 글이 언제 올라갔다는 것과 그리고 새로 쓴 글이 몇 년 후 언제 올라갔다는 것까지 모두 기록에 남는 것이니까요. 그 자체가 평론의 아카이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선 모두 살아남는 것은 어떨까 하게 되네요. 이미 현재도 그런 글들이 있다는 거지요? 정성일_ 물론 있지요. 유성관_ 어떤 영화인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정성일_ 아직은 비밀입니다.(웃음) 현재 읽은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이번에 낭트와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가서 그런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다시 보게 된 겁니다. 그때 갑자기 아, 이 영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바꾸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성관_ 잘 알겠습니다. 그 영화에 대한 새로운 글은 다시 기다리는 거로 하고, 연재 기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웃음) 평론가님이 늘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는 글 안에서 참조되는 영화 캡처 이미지가 동영상이었으면 하는 것이었는데요. 정성일_ 그렇죠. 나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스틸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동영상 참조가 가능하다면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기술적인 이유, 저작권의 이유, 제작비의 이유... 등등이 있을 테니까요. 유성관_ 저희도 저작권만 해결된다면, 물론 힘은 들겠지만 충분히 할 수는 있습니다. 정성일_ 그런데 이렇게 짧은 동영상에 대해서도 꼭 저작권 협의가 필요한 걸까요? 비상업적이고 학술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허문영 평론가의 ‘존 포드 이야기’ 쪽에서도 아쉬워할 것 같은데 말이죠. 유성관_ 평론가님도 지금은 숏바이숏 글을 잠시 멈추신 상태이지만, 허문영 평론가의 ‘존 포드 이야기’에서도 한 장면에 대해 길게 언급하는 장면은 많지 않습니다. 아무튼 평론가님이 다시 숏바이숏을 분석하는 글이 올 것을 대비해 저희 쪽에서도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평론가님이 아까 인터뷰 중에 말씀하시길, 하스미 시게히코도 오즈 영화의 전작 리뷰를 하지 않았다 하셨는데, 혹시 다른 평론가의 전작 리뷰 사례가 있는지요? 정성일_ 이론가들은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보드웰이 오즈의 전작을 리뷰했죠. 작품별로. 보드웰은 에이젠슈타인도 그렇게 설명했고요. 유성관_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인터뷰 말고 리뷰를 쓴 적은 없었나요? 정성일_ 인터뷰만이죠. 인터뷰라면 나도 진즉에.(웃음) 유성관_ 그러고 보니 요즘 사놓고만 있다가 미뤄두고 있었던 책, 「트뤼포」를 평론가님이 ‘영화천국 48호’ 시네필 특집 글 ‘10권의 책’에서 가장 첫 책으로 언급해주신 김에 이제야 꺼내서 읽고 있습니다. 정성일_ 앙투안 드 베크와 세르주 투비아나가 쓴 그 책, 굉장히 빨리 읽히지 않나요? 정보량도 만만치 않고. 그 책을 읽다 보면 그 당시 영화 컬처 전체를 알게 됩니다. 전기는 그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만 아는 게 아니라, 씨네 클럽부터 시작해서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들 그 후의 고다르, 리베트, 샤브롤, 바쟁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비평의 흐름, 영화의 흐름, 누벨바그의 전체적인 흐름까지도 딱 잡히는 책입니다. 굉장히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성관_ 그 책을 읽으면서 눈에 뜨인 것이 있었는데, 트뤼포가 작가정책을 가져가면서, 그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야지 개별적인 작품에 대해 혹평한다든가 하는 것은 지양한다는, 이를테면 아벨 강스의 <악의 탑>에 대해서는 굉장히 실망했지만, 그 당시 트뤼포는 ‘아르’지를 통해 <악의 탑>을 옹호하면서 아벨 강스에 대해 작가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론가님이 이 칼럼을 진행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_ 감사합니다.(웃음) 유성관_ 어떤 작품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정말 없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전작 비평’이기 때문에 그런 영화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밖에 없죠. 그런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정성일_ 정직하게 말해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에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는 없습니다. 60년대 영화를 볼 때 느끼는 점이죠. 허문영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도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는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 60년대 영화도 나쁜 영화는 나쁜 영화다.”라고 이야기했고, 나의 대답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나쁜 영화입니다. 하지만 나쁜 영화이기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는 영화인 거죠. 즉, 이 사람의 영화에서 이런 나쁜 점들이 이 사람의 어떤 서명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나쁜 측면이 임권택이 남겨 논 한국영화사의 서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쁜 것에 대해 내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임권택의 나쁜 습관 혹은 한국영화사가 임권택 영화에 침입하여 남겨놓은 나쁜 상처, 그리고 그런 것들이 영화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잘 설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빴던 60년대 한국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비평의 방법론을 내가 여기서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여기에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큰 배움이 하나 있는데, 브레히트가 했던 말 중, “좋은 옛날에서 시작하지 말고, 나쁜 현재에서 시작하라.”라는 게 있습니다. 이 말이 정확히 적용되는 건 아니겠지만, 변주해서, 나쁜 임권택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때만, 훌륭한 임권택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난 임권택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왜. 좋은 임권택의 영화 속에 나쁜 임권택이 동거하고 있음을 지금 나는 이제 명백히 알 것 같습니다. < 취화선 >에는 60년대 임권택이 있습니다. 혹은 < 서편제 >와 < 하류인생 >에도 나쁜 임권택이 있어요. 굉장히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걸 감추고, 한편으로는 변형시키고,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 임권택 감독은 여러 가지 훌륭한 테크닉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젠 뭐가 있는지 보이고 있어요. 그게 보이지 않았던 유일한 영화는 오직 < 춘향뎐 > 뿐이었습니다. 그건 완전히 과거로부터 끊어내고 다시 찍은 영화에요. 그래서 <춘향뎐>은 임권택 영화 중 예외 중 예외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최고 걸작을 완전히 예외의 영화로 찍은 겁니다. 그래야만 최고의 걸작을 찍을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그러한 영화적인 경험을 통해 영화 전체를 통과하고 있는 하나의 어떤... 딱히 개념어로는 제시할 수 없지만, ‘그 무언가’가 거기 있습니다. 그 불길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이 저의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에게 넘겨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결론을 갖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그 무언가’를 해명하는 것이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유성관_ 임권택 감독이 어떤 감독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시행착오를 거친 감독이라고 소개한다 하셨는데, 가장 걸작은 과거와 모든 것을 끊어 낸 단 한편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정성일_ 그런 점이 흥미롭죠. 그래서 < 춘향뎐 >을 처음 봤을 때는 쇼크였습니다. 완전히 다른 영화를 들고 왔을 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심지어 <춘향뎐>을 맨 처음 봤을 때 비평가로서 이 영화를 무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어요. 이건 예외. 임권택 에는 두 개의 영화가 있다는 거죠. 그의 모든 영화와 <춘향뎐>. (웃음) 유성관_ 이 연재를 통해 평론가님은 임권택 감독, 안성기 배우, 영상자료원의 장광헌 당시 자료서비스부장, 송길한 작가, 허문영 평론가, 봉준호 감독으로 인터뷰를 이어왔습니다. 작년, 2015년에는 아쉽게도 유일하게 인터뷰가 진행되지 않은 해였습니다. 현재 예정 중인 인터뷰이가 있다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성일_ (이미 이야기가 된) 강수연 배우를 만나야 하는데, 부산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라 지금은 진행할 상황이 아니죠. 김홍준 감독 역시 인터뷰할 계획인데 < 서편제 > 즈음에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직 <서편제>는 다룰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좀 더 뒤로 미뤄두고 있습니다. 그다음...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에게 배움을 청했던 한국영화 감독을 한 명 더 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예전에 봉준호 감독과 인터뷰 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말씀이시죠? 정성일_ 그렇죠. 그다음에... 허문영 비평가와 마찬가지로 임권택 감독에게 배움을 청했던 영화 평론가 중에서 누군가와 대화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염두에 둔 사람이 있는지요? 정성일_ 현재로써는 없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사실 안타까운 점은, 이청준 작가가 곁에 있었다면 인터뷰를 했을 텐데 하는 생각.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 안타깝죠. 또 잘 성사될는지는 모르겠지만, < 개벽 >을 쓸 즈음에, 도올 김용옥 선생을 인터뷰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그분을 뵙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며, 임권택 감독이 한 기간 동안 이 철학자를 일종의 멘토로 여겼고, 많은 철학자의 사유 방식을 배워왔기 때문에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할 거로 생각해요. 만년필을 가지고 가야 하나?(웃음) 유성관_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김용옥 선생과 인터뷰하면 좋고 재미있겠습니다. 하지만 담당자로서 녹취가 걱정되긴 합니다.(웃음) 정성일_ 그 외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유성관_ 저도 딱히 없지만, 이 전에 이야기 나왔던 임권택 감독에 대해 관심이 많은 젊은 비평가들과의 대화에 관심이 있습니다. 정성일_ 누가 있을까요? 유성관_ 그게 누군가라는 게 여전히 잘 잡히지 않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임권택 이라는 감독에 대해 관심이 있는 평론가를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보면 참 희한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성일_ 임권택 감독을 어려워하는 것도 있을 겁니다. 유성관_ 편집자로서, 허문영 평론가와의 대화, 그리고 ‘영화천국’ 대담을 통한 김홍준 감독과의 대화가 대단히 인상적이어서 그런 대화를 또 듣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앞으로 그런 대화가 또 있길 바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대화 중에 < 춘향뎐 > 이야기도 나왔고, < 만다라 >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와 같이 우리가 흔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 걸작이라는 영화, 혹은 널리 알려진 영화들 대부분이 아직 이 연재를 통해 쓰이지 않았습니다. 정성일_ 일부러 뒤로 배치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 영화들이 이어지는 선을 쳐다볼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 만다라 >를 쓴 다음에는 반드시 그다음에는 < 아제아제 바라아제 >를 쓸 겁니다. 그다음 < 개벽 >은 어떤 순간에 딱 끊어내면서 쓰게 될 것이고, 그리고는 < 취화선 >을 쓰게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짝패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혹은 이제까지 없었던 방식의 글 중 이런 방식도 있을 겁니다. 한 편의 영화를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1부, 2부, 혹은 3부로 나눠 쓰는 영화가 나올 것입니다. <취화선>의 경우는 그 영화 자체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영화에 164회 차 촬영 중 90여 회 차를 참여했기 때문에 현장에 있었던 임권택 감독의 인상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있을 겁니다. 세 번째 글은, <취화선> 이 영화는 절대적으로 임권택 감독 자신에 대한 자서전입니다. 그래서 그 영화 속의 대사를 통해 예술가에 대한 태도를 재구성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취화선>을 그러한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임권택이라고 하는 한 예술가가, 장승업이라고 하는 한 예술가를 반추시키면서 자신의 예술관을 어떻게 설명했는가에 대한 글 역시 진행될 겁니다. 유성관_ < 취화선 > 외에도 이렇게 몇 가지 다른 버전의 글이 올라올 가능성이 있을까요? 정성일_ < 춘향뎐 >도 그럴 것입니다. 그 영화도 한 번에 설명하기엔 중층적인 영화라, 두 개의 글이 짝패를 이루면서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쓰일 것 같습니다. 이 칼럼이 인터넷으로만 남을지, 책으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책이 만들어진다면 <춘향뎐>에 대한 글은 두 개의 버전을 쓰고, 하나의 버전은 오른쪽에, 또 하나의 버전은 왼쪽에 배치하는 편집을 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안 그래도 이 칼럼에 대해 책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필자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성일_ 이거 전집 수준이 아닌가요(웃음). 보낸 원고 중 100매가 넘는 원고가 꽤 있는 거로 압니다. 유성관_ 맞습니다. 분량이 적다고 해도 80매, 90매인데, 텍스트의 절대적인 양보다도 글에 첨부된 이미지들도 어떤 식으로 편집되는 게 맞는가 하는 게 의문입니다. 평론가님은 책이 나온다고 하면 동의하는 건가요? 사실 처음에는 전적으로 온라인 프로젝트였습니다. 정성일_ 맞습니다. 그래서 매수와 관계없이 쓴다는 거였죠. 하지만 이건 내가 절대적으로 종이 세대이기 때문에, 종이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종이로 옮겨 졌으면 좋겠어요. 이는 절대적으로 자료원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 자료원의 입장도 포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의 마지막 영화는 뭐가 될까요? 정성일_ < 화장 >입니다. 실은 <화장> 직전의 영화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 짝코 >. 임권택 감독의 많은 지지자들이 뽑는 영화들의 최고 걸작은 < 만다라 >와 < 서편제 >이잖아요. 다음 세대의 임권택 감독의 최고 걸작은 <짝코>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음 세대에게 보내는 저의 러브레터?(웃음) 유성관_ < 짝코 >는 5년 후에나 그 글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정성일_ 그 영화는 명백히, 임권택 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임권택 감독다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어떤 정수가 담겨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임권택 영화의 상처와 모순, 문제와 힘과 가능성, 그 모든 어떤 복잡한 것들이 한 편으로 모여있는 것을 들자면, 그게 < 짝코 >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낭트에서 개막작은 <짝코>였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고, 결국 두 행사 모두 <짝코>로 시작했습니다. 유성관_ 이 칼럼에 국한된 질문은 아니지만, 꼭 듣고 싶은 답변이 있습니다. 평론가님의 글에 대해 변치 않는 질문이 있는데, 어렵다. 혹은 읽기 힘들다, 왜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써주지 않느냐, 는 말을 오랜 시간 합니다. 이에 대해 평론가님은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정성일_ 그분들은 실망스럽겠지만, 그런 지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내 글이 잘 읽히고, 잘 전달되고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글이라는 건 그 사람의 의식, 생각의, 좀 멋있게 말하자면 사유를 기록하는 흔적이라 생각합니다. 흔적을 읽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글은 그 사유를 카피하는 것이고, 카피의 과정을 통해 이 사람의 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흐름을 읽어 나가는 것이지, 이 글 자체가 사유와 동떨어져서 문법 자체와 수사학의 번들거림에 종속되는 것은 일종의 분장이라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것보다 어떤 대목들은 명백하게 나 자신의 글이 비문이란 걸 아는 대목도 있습니다. 물론 주어가 두 개, 이런 문장들은 고치지만, 애매하게 비문인 그런 문장들이 있어요. 이런 문장들이 문제가 되는 거로 생각하는데, 어디서 끊어 읽는가에 따라 비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나의 판단은 하나입니다. 이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생각했었던 그 사고에 대한 기록인가, 그 문장 구조 자체가 그렇다고 판단되면 내버려두는 쪽입니다. 나중에 나의 글을 읽어볼 기회가 있을 때, 내가 왜 이렇게 썼지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런 문장을 통해 아, 이래서 내가 이렇게 썼구나, 하는 환기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울퉁불퉁한 모퉁이들을 글에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독자들이 이런 글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독자는, 그걸 읽는 게 목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가장 실망스러운 독자는, 글을 통해 정보를 갖고자 하는 독자들입니다. 그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실망스러운 독자는 지식을 갖고자 하는 독자들입니다. 한편으로는 내 마음속에 그런 독자들로부터 내 글을 방어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 정보를 갖고 가고자 하는 독자들을 실망시키고, 지식을 갖고 가고자 하는 독자들을 좌절시키고 싶은, 대신 내가 사고하고 있는 것을 쫓아와서 아, 이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독서의 방법론을 가져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언제든지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걸 공유하고 싶은 것이고 그 과정만이 나의 글 쓰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나의 문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인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음에도 나의 뇌의 구조를 알 수 있도록, 글이 카피해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임권택 전작 리뷰 연재를 통해 어떤 글은 쓰는 데 보름 이상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유성관_ 몇 년간 KMDb에서 ‘영화글’이란 섹션을 유지하면서, 요즘 영화에 대한 글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독자가 남아있는가, 혹은 영화에 대한 글을 생산하는 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으며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라는 고민을 늘 합니다. 영화 글이라는 것이 그럼에도 지속되어야 하는 게 맞다면, 왜 그런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정성일_ 이 질문은 글에 대한 역사 쪽에서 보는 것이 훨씬 더 걸맞은 대답이 될 것입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보죠. 영화에 대한 비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모두들 말하고 있지만 그 표현과는 정반대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영화 비평가의 글을 싣고 있는 지면이 줄고 있는 것이지 영화에 대한 글은 폭발하고 있습니다. 온갖 블로그, SNS에서 영화에 대해 쓰지 않는 사람이 없고, 영화를 보면 쓰고 싶어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쓰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겠죠. 즉 남의 글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줄어들고 있다는 문제의 핵심은 어쩌면 글 자체라기보다는 플랫폼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플랫폼은 그 콘텐츠를 올바로 전달하는가, 네트워킹을 하는가, 그 플랫폼들이 그걸 읽고자 하는 사람들을 목표로 정확하게 도달하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KMDb도 그걸 성실하게 운영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이런 홈페이지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이렇게 플랫폼을 정성스럽게 운영하는 것뿐 아니라, 온라인 속에서 글을 원하는 사람들과 올바르게 접속하는 일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핵심이 아닐까요? 반격이랄까?(웃음)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영화아카데미 학생들도 KMDb를 몰라요. 영상자료원 홈페이지가 있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상영일정만 보고 나오는 게 다인 거죠. 영화학교 학생들도 홈페이지를 모를 정도라면, 홍보를 좀 더 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유성관_ 갑자기 제 쪽으로 이야기가 넘어온 것 같은데 플랫폼에 대해서는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웃음)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한 것,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에 대한 남이 쓴 글을 읽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고, 또 영화에 대한 글이 폭발하고 있다고 해도 SNS에 쓰는 짧은 영화 인상 낙서들이 범람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한 지금, 여전히 진지하고 긴 영화에 대한 글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성일_ 저는 SNS를 통한, 전적으로 인상에 의지한 메모도 훌륭한 영화평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런 평이 섬광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남들보다 먼저 시사를 보고 나와 으시대는 잡담을 셈에 포함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여전히 영화를 본다는 체험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 영화를 본 시간의 리듬을 어떻게 옮기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영화에 관한 훌륭한 글을 읽으면서 종종 위대한 비평가들이 그 리듬을 온전히 구현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비평이 때로는 영화에 완전히 안기거나 혹은 반대로 품어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영화평은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들 때 정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혹은 보고 싶게 만들어야 합니다. 영화평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는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건 영화에 다가가는 방법의 기술입니다. 차리리 이렇게 대답하면 어떻겠습니까. 한정 없이 글이 길어질 때 그건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 같은 것입니다. 유성관_ 마지막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또 다른 움직임 중 하나가 영화독립잡지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겁니다. ‘아노’는 이미 오래되었고, 유운성 평론가가 발행한 계간지 ‘오큘로’는 막 1호가 발간되었고, ‘캐스트’라는 독립영화 잡지가 크라우드 펀딩 중이며, 여성 영화를 주제로 하는 ‘세컨드’라는 독립잡지 또한 준비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에 대한 저널이, 독립잡지이지만 예전보다는 활발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정성일_ 종이 잡지를 만든다면, 웹도 서버가 돈이 들기도 하지만, 종이는 바로 종잇값, 인쇄비, 배포에 관련된 비용, 정기 구독자 관리 등, 첫 호를 만들 땐 잘 못 느끼는데, 그게 지나가면 반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창고비 까지도 장난이 아니게 됩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개인이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죠. 진심으로 잡지는 많이 팔리는 게 목표가 아닌, 오래 팔리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유성관_ 평론가님은 ‘키노’ 이후 종이 잡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정성일_ 늘 하고 있죠. 지금 현재도. 유성관_ 어느덧 마지막 질문입니다. 오늘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누군가 궁금하다고 추가해 준 질문인데 저 역시도 궁금합니다. 비평가로서 영화를 볼 때, 오늘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제가 인사차 여쭤봤던 질문 “최근에 보신 영화 중 좋은 영화가 있었나요?”에 대해 한숨 쉬며 “없었죠” 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혹은 60~70년대의 부서진 한국영화들을 계속 봐야만 할 때, 혹 비평가로서 내상을 입지는 않으신지요? 정성일_ 물론 상처를 받습니다. 유성관_ 그럼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십니까? 정성일_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임권택 감독의 몇몇 영화를 봅니다. < 짝코 >랄지, < 춘향뎐 > 같은 영화를 또다시 보며 일종의 상처를 해독한 달까요.(웃음) 유성관_ 일종의 영화 해독제인 셈이군요. 정성일_ 정말 그렇습니다.(웃음) 2016년 3월 29일, 북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