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트
- 감독
- 이용수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심달기
오래전 인간은 손으로 사냥을 하고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도구를 찾기 전까지 오랜 시간 그랬다. 한 쌍의 포크와 나이프가 입과 손 사이를 벌려 그 안에 식탁이라는 문화의 공간을 형성하기까지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폭력과 야만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그렇게 천천히 문명화의 과정을 밟았다. 미술가 안규철은 「손, 인간의 조건」이라는 글에서 한 인간의 생애 역시 인류의 문명화 과정과 닮아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젖을 떼고 처음 배우는 숟가락질은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기 위한 첫 규범이 된다. 숟가락질은 학교에 들어간 후 글씨를 쓰고 셈을 하는 방법과 때리거나 훔쳐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학습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그 지난한 훈련의 과정을 거쳐 인간은 손과 입 사이, 몸과 세상 사이의 “여백”을 얻는 것이다. 여백은 당연히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양육자에게 아이란 무엇보다도 밀착해 먹여 키워야 할 과제로서 존재하는 대상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난항을 겪는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존재만으로 자연스레 양분을 공급받다가 모체로부터 떨어져나온 뒤부터 자력으로 생명을 유지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밥을 먹는 행위는 독립된 주체로 홀로 선다는 것의 가장 원초적인 은유인지도 모른다. <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은 이 행위를 매개 삼아 모녀라는 관계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조망하는 영화다. 십여 년 전, 열다섯 살 채영은 섭식장애 진단을 받고 병동에 입원했다. 치료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거식증이 지나가자 폭식증이 찾아왔다. 엄마 상옥은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병의 근원을 이해하고자 씨름하는 시간을 보냈다. 김보람 감독은 원래 섭식장애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진행하다, 오랜 시간 섭식장애를 앓은 당사자인 채영을 만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이어트와 외모 강박이라는 익숙한 문법으로 이 질환을 읽으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거둔다. 대신에 채영 스스로 말하는 몸의 역사와 마음의 변화에 집중하며, 딸 채영과 엄마 상옥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루기로 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섭식장애라는 표면적 징후 대신에, 삶의 밑바닥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내면의 문제, 즉 가족이라는 복잡한 실타래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채영과 상옥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 오랜 시간 서로 말하지 않고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카메라 앞에서 우연히, 어쩌면 카메라 덕분에 비로소, 조금씩 꺼내어진다. 섭식장애를 처음 앓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채영은 당시에 두려움이나 고통보다는 온몸으로 확신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음식을 거부하거나 폭식을 하거나 구토를 하는 행위를 가장 적극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행위로 여겼다는 것이다. 상옥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는다. “각본을 수백 가지는 써봤는데 지금 네가 말한 각본은 참 뜻밖이네.” 젊은 시절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상옥은 1990년 이후 더 이상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역으로 이주해 대안학교의 사감으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데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다. 학교 특성상 그곳은 채영을 학교 구성원들과 함께 키우는 공동양육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관람할 무렵 나는 우연찮게도 비비언 고닉이 쓴 『사나운 애착』을 읽고 있었다. 평생에 걸친 어머니와의 애증을 다룬 이 자전적 에세이는 뉴욕 브롱크스가에 위치한 가난한 이민자들의 다세대주택을 배경으로 한다. 저자가 일평생 보고 자란 것은 엄마를 포함한 이웃 여성들의 삶이었다. 고닉은 타인들과 밀착된 그 어린 시절이, 그리고 벗어나고자 했으나 어느새 거울이 되어버린 엄마의 이미지가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채영 또한 남달랐던 유년 시절의 환경을 의미심장하게 복기한다. 채영은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서, 특히 그러한 공동체의 삶으로 자신을 이끈 엄마 상옥을 통해서 일찍이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한 환경이었다. 상옥은 주변을 돌보느라,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집중하느라, 어린 채영의 곁에 있어주지 못할 때가 잦았다. 세월이 흘러 카메라 앞에 선 채영은, 엄마가 상정한 기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막연한 불안이 자신을 오래 괴롭혔음을 털어놓는다. 당신의 삶이 실패였음을 인정하길 원했었다는 날선 말을 뱉은 후였다. 섭식장애를 앓는 환자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성별화된 질병이라는 점에서 이 현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 『명랑한 은둔자』를 쓴 캐럴라인 냅 역시 자신의 삶을 추락시킨 알코올 중독과 섭식장애를 어머니와의 관계에 연결 지어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러한 서사와 종종 조우하는 것이 아마도 완전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 여성의 삶에서 매 순간의 선택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의 표명이자 실패이기 때문이다. 채영과 상옥의 회고는 세대를 넘어 할머니의 시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돌이켜보면 몸과 마음을 억압당하는 시대를 살았던 채영의 할머니도 먹은 것을 스스로 게워내곤 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기 몸 하나밖에 없어서였다. 환경과 시대는 달라도 세상과 불화하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라는 최전선 위에서 부대끼고 고전하는 과정은 서로 닮아있다. 괴로운 기억도 날선 말들도 공동의 식탁 위에 올려지고 난 뒤에는 조금쯤 무게가 가벼워진다. 성인이 된 채영은 일을 하러 호주로 떠나고 상옥은 딸의 진정한 독립을 응원한다. 흥미롭게도 채영이 선택한 일은 타인을 위한 식사를 만들고 식탁을 준비하는 일이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누군가 낯선 이를 먹이는 일이고, 다른 존재가 무사히 일상을 유지하도록 돕는 일이다. 채영은 자신에게 요리란 조금 더 괜찮은 사람, 조금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말한다. 그 일 앞에서 도전과 실패를 감행하며 삶을 다시금 써 내려가는 채영의 모습은, 회복의 과정이란 결코 자기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실감케 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조용히 듣는 귀의 역할을 고수하기에 함부로 진단을 내리지도, 첨언하거나 평가하지도 않는 미덕을 지녔다. 그러나 고민과 결단의 순간들을 짐작하게 하는 편집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족사를 다루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흔히 취하는 전략에 비추자면 이 이야기는 사적인 정보를 무척 적게 말한다. 다큐멘터리가 결국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로 시선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그러한 선택과 집중이 이 영화를 여성들의 내면세계에 관한 보다 섬세하고 집요한 연구에 가깝게 만드는 것 같다. 재밌는 건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 어딘가 투명한 물음표가 계속 따라다닌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 피의 연대기 >와는 무척이나 다른 형식과 화법을 가졌는데도 그 인상만은 두 작품이 궤를 같이하는 느낌이다. 그건 영화가 지닌 시선이 정제되고 흐트러짐 없는 ‘서술자’의 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물을 대하는 카메라는 조용하지만 존재감이 꽤 있다.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때로는 갈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이야기를 듣는다. 신중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그 특유의 시선 때문에, 카메라가 관찰과 기록의 도구가 아니라 함께 질문하며 답을 구하는 ‘동행자’의 역할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실 이 카메라의 미묘한 존재감은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중요한 요소로 배치된다. 촬영 초반 일대일 상담에 응한 채영은 아직 카메라의 존재가 어색하고 낯설다. 지금 감정이 어떠냐고 인터뷰어가 거듭 묻자 채영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편함이 드러난다. 이 시퀀스는 의도했든 아니든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근본적인 고난, 상처를 지닌 타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해야 하고 환부를 들추어야만 하는 어려움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김보람 감독의 영화에는 그 어려움을 딛고 개진해 내는 힘 또한 있다. 영화를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 좋은 질문이 있는 한 카메라도 있고, 이 카메라가 언젠가는 양쪽 모두에게 답을 줄 것이라는, 어떤 믿음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영화가 완성되고 공개된 이후, 채영은 GV에서 영화를 통해 깨달은 사실 하나를 이야기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상옥의 눈빛이 그렇게 애틋한 줄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을 보아왔지만 스크린을 통해 새롭게 자각하게 된 엄마의 시선이다. 딸은 그 시선을 경유해 자신의 얼굴 또한 새롭게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중간에는 인서트컷으로 수영장 물속에 잠겨있는 채영의 얼굴이 잠시 등장한다. 이 이미지는 그가 최근 쓴 자서전 『이것도 제 삶입니다』의 표지로 사용된 사진이기도 하다. 눈을 감은 채영의 얼굴이 사뭇 편안해 보인다. 모녀 관계란 엄마의 뱃속에서 하나였던 두 몸이 별개의 개체로 분리된 직후부터 시작되는 분투의 여정이다. 채영은 이제 스스로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짐으로써, 새롭게 자각한 얼굴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숨쉬는 법을 배우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엔딩은 채영과 상옥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간단하게 차린 제사상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명복을 빈 뒤 상을 맞들고는 거실로 옮긴다. 죽은 부모를 위한 제사상은 살아있는 두 모녀의 아침식사를 위한 식탁으로 역할이 바뀐다. 이 식탁을 내리사랑의 은유로 읽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에 식탁이, 어쩌면 둘 사이의 공간이, 그렇게 언제든 임시적인 거처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가 그러하듯이, 식탁은 두 타인의 사이에 잠시 어떤 공간을 마련해준다. 너무 크고 거창하지만 않다면, 둘러앉은 이들이 이렇게도 차려보고 저렇게도 차려볼 여지가 있다면, 식탁은 예절과 격식의 자리만이 아니라 적당한 환대와 우정의 자리도 될 수가 있다. 네모난 식탁을 사이에 두고 채영은 상옥과의 관계에 대해 잠정적 결론을 내려본다. “평행성도 좋지, 나란히 가는 거니까.” 평행선이 그려지는 곳에서 두 존재는 억지로 겹치거나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에 서로를 두고서 오랫동안 같은 방향을 향해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비비언 고닉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지탱해줄 튼튼하고 평평한 식탁 같은 것. 어떤 가족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사랑이나 헌신이 아니라, 바로 그런 중간지대의 존재다.
유튜브에 ‘< 시실리 2km > 명장면’이란 검색어를 넣어보자. 임창정 과 우현 이 ‘나이’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창정이 연기한 양이가 우현이 맡은 조직의 막내 해주에게 나이를 묻는다. 해주는 ‘개띠’라고만 말한다. 양이는 그를 1982년생, 1970년생으로 추측하다가 둘 다 아니라는 말에 “앞으로 나에게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화를 낸다. 해주는 “왜요?”라고 묻는데, 이때 양이는 “그럼 니가 94냐?”라며 신경질을 부린다. 흘리듯 들리는 이 대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우현의 얼굴 때문에 꽤 웃기다. '성숙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나이’를 연결 짓는 이런 유머는 <시실리 2km>를 연출했던 신정원 감독의 신작 <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 >에서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이번에도 ‘94년생’이 언급된다.) 이 장면에서 피식 웃고 나서야 새삼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이 꽤 오랜만에 보는 신정원 감독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목부터가 신정원 감독의 전작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서 ‘죽어도 죽지 않는다’란 설정은 기괴한 긴장감과 웃음을 터트린다. 엄청난 신체 능력을 가진 외계인이 그런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인간도 그런다. 언뜻 별 특이할 게 없어 보이는 설정이다. 그런데 신정원 감독의 영화에서는 죽여도 죽지 않는 인간이 딱히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가 왜 죽지 않았는가를 아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특별한 설정이 된다. <시실리 2km>에서 권오중 이 연기한 석태가 겪는 ‘죽음의 연대기’를 돌이켜보자. 변기에 뒤통수를 부딪혀 쓰러진 그를 모두가 죽은 줄 안다. 그런데 안 죽어서 삽으로 쳤더니 쓰러졌길래 또 죽은 줄 알았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그는 애타게 구조신호를 보내는데, 하필 머리에 못이 박혀서 또 죽은 줄 알았다. 이번에는 땅에 묻었는데, 그래도 그는 살아난다. 어디에도 그가 왜 죽지 않았는 가란 설명은 없고, 관객도 그걸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지 석태의 끈질긴 생명력과 그보다 더 끈질긴 불운이 <시실리 2km>의 웃음을 이끄는 리듬이었을 뿐이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서 죽지 않는 인간의 불운은 인공지능 스피커와 스타일러 덕분에 더 밀도 높은 긴장감과 웃음을 주고 있다. 신정원 감독의 영화가 가진 또 다른 특징은 관객의 예상과 상관없이 ‘불쑥’ 등장하는 순간들이다. <시실리 2km>에서 귀신이 된 송이( 임은경 )가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르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서트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로는 < 차우 >에서는 포수 천일만( 장항선 )이 가른 멧돼지의 배에서 커피믹스 봉지가 나오는 장면을 최고로 꼽는다. 백만배( 윤제문 )가 자신의 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또 백만배가 변수련( 정유미 )과 우유와 연양갱 등을 나눠 먹는 장면 등이 모두 딱히 이야기의 흐름과는 상관없지만, 키득거리게 되는 장면이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도 이런 순간은 곳곳에 있다. 죽은 연인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뜬금없이 흘러나오는 ‘<모래시계> 혜린의 테마’, 주인공 남편의 쉬지 않는 여성 편력을 설명하다가 등장하는 ‘3만 원어치의 경유를 마시는 장면’, 잠시 기억을 잃은 인물이 반복하는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요?’란 대사. 정교한 계산으로는 배치할 수 없는, 그저 ‘어쩌다 하필 그 자리에 놓여 있다’고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이 신정원 감독이 영화가 가진 개성이다. 종합하자면, 신정원 감독의 영화는 너무 뻔뻔해서 뻔뻔하다고 지적할 생각조차 나지 않는 뻔뻔함의 영화다. <시실리 2km>에 나온 마을 주민들의 캐릭터와 흡사하다고 할까?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치기’ 위해 일부러 라면 국물을 들이켰던 그들의 모습처럼 신정원 감독의 영화에서는 가장 뻔뻔한 순간에 가장 크게 웃을 수 있다. 그래서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의 아쉬운 부분 또한 ‘뻔뻔하지 못한’ 순간들이다. 외계인의 존재 이유와 그들의 목적을 설명하는 ‘지구 외 생명체 검역 관리소’ 같은 설정이 꼭 필요했을까? 왜 굳이 그들을 등장시켜 외계인과의 한 판 액션을 벌이게 했을까? <차우>에서 ‘백백교’ 교주의 죽음을 멧돼지와 연결시켰던 것처럼,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도 더 뻔뻔하게 외계인을 이용했다면 어땠을지. 그랬다면 <시실리 2km>와 <차우>를 보았던 그때처럼 웃었을 것 같다.
인식( 임형국 )이 출근을 준비하는 사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송광자)와 딸 소진( 권잎새 )은 ‘사물 맞추기’ 놀이를 한다. 날마다 반복되는 이 게임에서 한 사람은 반복을 인식하지만, 다른 사람은 매번 잊어버린다. 그래서 이 행위는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 단순하지만 고통스러운, 그럼에도 견딜 만한 일상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러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 태진의 물건을 어머니가 끄집어낸다. 기억하는 자와 기억하지 못하는 자의 갈등이 서서히 고조된다. 어느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지만, 어떤 이는 피해자가 되고 또 다른 이는 처형자의 위치에 오른다. 기억이 침범한 내면의 경계는 인물 사이의 골을 파고든다. 누군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인물들 각자의 내면에 한숨으로 남을 뿐이다. 처음에는 몇몇 장면의 연출이 아쉬웠다. 정면 원쇼트의 대화 표현은 어색했고, 리듬감 없이 등장하는 인서트도 거슬렸다. 그런데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내게 있어 장병기 감독의 < 할머니의 외출 >(2019)은 마음에 남아 뭉글뭉글 떠오르는 영화였다. 그러던 중에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다. “처음에는 컬러라고 생각하고 촬영한 작품이다. 그런데 편집을 마친 뒤 화면을 보는데 처음의 의도를 화면이 가리는 것 같았다.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10월의 가을 화면이 영화와 안 맞았다.” 계속될 수 없는 게임을 인지하게 된 남자 주인공의 체념을 영화는 흑백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의 선택에 동의하게 됐다. 영화 속 모든 모티브는 ‘과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아들의 ‘운동화 한 짝’이 그렇다. 이 물건의 등장으로 울음을 터트리는 자는 없다. 이미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절대 옅어질 수 없지만, 영화는 ‘슬픔’이나 ‘애정’ 같은 진부한 단어로 이 감정들을 꾸미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는 클리셰가 없다. 불같이 화를 내는 인물도 없고, 감정에 취하는 자도 없다. 진짜 아픈 감정이 그렇게 천천히 바깥으로 드러난다. 일상에 기대어서, 흘러가는 사건을 관망하며 영화는 아픈 기억을 어루만진다. 죽음에 이르는 예고 역시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현재’라는 틀에 갇혀, 인물들의 마음이 도덕적인 딜레마에 휩싸인다. 잠재적이고 가상적인 감정이 시간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남자 주인공에게 이야기가 집중되는 구성은 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가정이 모두 그로부터 시작된다. 말 그대로 이 인물은 ‘인식’하는 자이다. 뜨겁고도 무거운 가을의 온도가 그를 거쳐 형상화된다.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남자는 존재하고 있다. 만일 <할머니의 외출>이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수채화였다면, 영화가 품은 시간의 뼈대는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회하여 산만하지 않은 방식으로, 영화는 흑백의 그림자를 내민다. 폭발적 내면을 보여주지 않고서도, 달콤한 시간을 끄집어내지 않고서도, 관객들은 그저 선험적으로 무해하고 관조적인 감상에 이른다. 때문에 이 작품은 시간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무언가의 회귀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집중한다.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할머니의 상황에 대해 아버지는 딸에게 전화 너머로 설명하는 중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바라보지 않아도 전달되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깨닫는다. 영화에 드리워진 암흑의 실루엣은 어느새 새벽을 향한 밤의 그림자가 되어 있다. 현실이란 악몽에 덧입혀진 어설픈 레이어는 이제 곧 벗겨질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구도 옳지 않은 자는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간혹 실수하고 공황에 빠지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영화의 결말은 그렇게 가느다란 희망과 만난다. 예민한 주인공이 약한 숨을 내쉬고, 단호한 ‘생략’이 모든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우리 주변을 떠돌던 일상의 어두움은 극복될 것이다. 이 결말을 딱히 아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가 품은 모호한 형상은 사실 우리들 자신과 몹시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