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영상] 정보석, 이 공연으로 인해 제 마음을 치료할 수 있었다
- 제작년도
- 2011
홍상수 감독의 영화 < 오! 수정 >(2000)에는 의미와 맥락을 추정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많다. 소(小) 제목이 부여된 5개의 장으로 구성된 플롯에서 2장 ‘어쩌면 우연’과 4장 ‘어쩌면 의도’의 3일째(번호 ‘3’이 붙어있다)에 해당하는 삽화에 등장하는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이 대표적이다. 그저 지나가는 여인에 불과하여 관객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이 여인은 2장과 4장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타난다. 2장에서 재훈(정보석)과 수정(이은주)이 호프집에 있는 시간, 영수는 유니콤 서울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박 기사와 출근 문제를 두고 크게 언쟁을 벌인다. 이어서 재훈과 수정의 술자리에 합류하기 위해 영수가 호프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직후, 이 여인은 영수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간다. 4장에서는 수정이 호프집을 나와 머플러를 매고 유니콤 서울 프로덕션 사무실로 이동한 직후 바바리 코트 여인이 나타나 호프집 안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영수가 호프집으로 들어가고(2장), 수정이 호프집에서 나와 시야에서 사라진 뒤(4장)에도 이 여인이 호프집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우직하게 기다려준다. 시간과 기억의 차이를 매개로 하여 유희하는 <오! 수정>의 플롯에서 이 성명불상의 여인은 시간을 나타내는 기호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영수와 수정의 시간이 교차하는 좌표 위에 이 여여인이 서 있다.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 보다 더욱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은 요리사이다. 이 인물은 1장 ‘온종일 기다리다’와 5장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에 등장한다. 1장에서 우이동의 호텔방에 있는 재훈이 침대 위에서 잠이 든 쇼트에 이어 누군가의 시점을 암시하는 듯한 부감 쇼트가 뒤따른다. 호텔의 노상 주차장을 찍은 이 기울어진 구도의 쇼트에서 요리사는 프레임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을 향해 사선으로 난 길을 따라 이동한다. 그의 이동 경로와 속도에 맞춰 카메라는 틸트-업하면서 요리사가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야기가 종결되는 5장에서 요리사는 다시 나타난다. 1장에서와 동일한 구도의 쇼트에서 이번에는 프레임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걸어 내려온다. 즉, 요리사가 이동하는 형상은 두 장안에서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어떤 중요성도 부여되지 않은 것 같은 이 남자는 왜 두 번씩이나 등장하는가. 스토리나 인물, 사건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비 서사적인 존재로, 어떤 극적 기능도 담당하지 못하는 잔여로 그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시간과 기억을 조각내고 나란히 그것을 대조하도록 디자인한 <오! 수정>의 내레이션 전략에 의해 기능을 부여받은 에이전트이다. 요리사가 프레임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향하는 이미지와 걸어간 길을 다시 되밟아 오는 이미지는 1장과 5장에 나란히 놓여 두 개의 시간을 종합하도록 한다. 여기서 요리사는 1장의 표제를 장식하고 있는 ‘온종일’이라는 시간의 층위를 함축한 정보-기호가 된다. 1장에서는 재훈이 택시를 타고 우이동 호텔방에 들어가 수정에게 전화를 거는 행위가 묘사되는데, 이 시간은 하루 중 이른 아침에 해당한다. 전날 재훈은 수정과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짝을 이루기’ 위한 충동에 사로잡혀 너무 일찍 호텔에 도착했다. 조급한 마음에 잠을 많이 자지 못한 재훈은 호텔방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고 그 시간 요리사는 노상 주차장을 걷고 있다.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요리사의 쇼트는 따라서 이른 아침 자신의 일터인 호텔 식당을 향해 출근하는 모습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5장에서는 마침내 수정이 호텔에 당도하여 재훈과 ‘짝을 이루고’, 두 사람이 미래를 기약하는 듯한 삽화가 기술된다. 한 번도 섹스를 한 적이 없다는 수정의 고백에 환희에 젖는 재훈의 이전 반응에 비추어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는 5장의 메시지는 남자의 아둔한 믿음을 희화화한다. 섹스를 한 후 침대 시트 위에 묻은 수정의 피를 욕실 안에서 씻어내면서 재훈과 수정이 나누는 미신을 주제로 한 대화에 이어 요리사의 쇼트가 삽입되어 있다. 1장에서의 묘사와 차이는, 요리사가 향했던 식당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5장에는 없으며 주차장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요리사의 쇼트 뒤에 수정이 호텔방 창문 앞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처리된 쇼트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1장에서는 시선의 주체가 모호하지만 5장에서는 시선의 주체가 암시된다. 요리사가 근무하는 식당은 1장에서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서 출발하여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것인지를 추론할 수 있다. 요리사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1장과 5장에서의 두 쇼트를 종합하면 재훈은 ‘출근에서 퇴근까지’ 수정을 기다린 셈이 되고, 비로소 ‘온종일’이라는 지속된 시간의 형상이 완결된다. 재훈이 호텔에서 온종일 수정을 기다렸다는 명시적 증거가 이 요리사인 것이다. 서사 정보를 제시하는 홍상수의 방식에는 특별함이 있다. 홍상수는 구조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긴요한 정보-기호들을 은폐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어떤 기능도 부여받지 못한 행인이나 아낙네, 사물들이 인상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요리사와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 오프닝에 프레임의 앞을 가로질러 가는 약수 물통을 끄는 여인, 한식당 ‘큰기와집’의 주방 아주머니, 재훈과 수정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의 주인, 재훈의 벤츠를 모는 김 기사 등이 이런 존재들이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프레임의 앞과 뒤를 서성이면서 미스터리를 자아낸다. 혁신적인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이들은 발견을 기다리는 보물과 같은 존재들이다. <오! 수정>의 흑백 이미지는 이들을 위한 조력의 형식이다. 흑백은 동일한 세팅 위에서 차이를 감지하는데 요긴한 스타일 상의 전략이다. 요리사와 바바리 코트 여인은 그 차이를 선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이미지 특성에 따라 구분된다. <오! 수정>은 버려지는 디테일을 중심으로 한 혁신적인 내러티브의 꼴을 보여준다. 그것은 스토리텔링의 유습화된 권력 관계로부터 떠밀려 있던 사소한 것들의 위력, 그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성립되는 대안 서사의 한 유형이다. 홍상수는 쇼트의 형태를 결정하는 구도와 앵글, 프레이밍, 거리, 크기 등의 조형적 요소들이 어떻게 서사 정보에 대한 관객의 인지작용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시험하기 위해 구조를 활용한다. 여기서 홍상수는 조각난 쇼트를 조립하여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관객들에게 엄청나게 큰 책임을 지운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 걸어서 하늘까지 >라는 제목에서 노래 가사가 먼저 떠오르는 건, 당연한 반응이다. “눈 내리는 밤은 언제나, 참기 힘든 지난 추억이,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둔 너를 생각하게 하는데…” 가수 장현철이 주제가를 불렀고, 최민수 와 김혜선 이 모닥불 앞에서 눈물 흘리며 키스하는 명장면을 남긴 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1993)가 있었다. 최민수는 거칠지만 깊은 순정을 가진 남자를, 김혜선은 그런 남자가 차마 다가설 수 없을 만큼 순수한 여자를 연기했다. 한 집에서 친남매처럼 자란 남과 여. 경찰에게 쫓기는 소매치기의 비루한 인생. 이들 앞에 나타난 모든 걸 다 가진 남자. 여자를 살리기 위한 남자의 비극적인 희생 등의 테마로 당시의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작품이다. 하지만 이보다 1년 먼저 나온 영화 <걸어서 하늘까지>도 있었다. 두 작품 모두 소설가 문순태가 1979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드라마와 영화에 깃든 감정의 결은 상당히 다르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이렇다. 드라마 속 물새의 죽음에서 비장함과 감동을 느꼈다면, 영화 속 물새의 죽음은 당황스럽다. 한집에서 자란 드라마의 남과 여와 달리, 영화의 물새( 정보석 )와 지숙( 배종옥 )은 일(?)을 하다가 처음 만난다. 경찰에 잡힐 뻔한 지숙을 구해준 물새는 그녀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독고다이보다는 식구를 갖는 게 낫지.” 물새의 조직원들은 모두 황새, 앵무새, 촉새, 참새 등의 별명을 갖고 있는데, 지숙은 ‘날치’란 이름을 얻는다. 한 식구가 된 이들의 팀플레이는 꽤 멋스럽다. 소매치기에 대한 영화적인 매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손기술, 그런 손기술이 더하고 더해지는 팀플레이, 무엇보다 사람을 직접 공격하는 범죄에 비해 보는 이의 죄책감이 덜한 범죄라는 점에서 말이다. 심지어 이들의 일상은 꽤 낭만적이며 가끔은 따뜻하다. 일당 중 한 명인 꼬마는 어느 날 지숙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누나 오늘 참 이쁘다. 왕조현 같애.” 그런데 이들의 발목을 잡는 것도 그놈의 낭만이다. 지숙은 어느 날 호텔에서 정만( 강석우 )의 지갑을 훔친다. 지갑에는 상당한 액수의 돈과 등록금 고지서가 함께 들어있다. 지숙은 자신 때문에 이 대학생이 공부를 못하게 될 거란 생각에 지갑을 돌려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만이 지숙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이때 지숙을 좋아하고 있었던 물새는 정만을 증오하게 된다. 물새는 지숙을 사랑하지만, 지숙은 정만에게 끌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하고, 그녀가 멀어질수록 정만은 집요하게 다가간다. 물새는 정만이 지숙을 갖고 놀다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만은 그런 남자가 아니다. < 걸어서 하늘까지 >는 < 게임의 법칙 >과 < 본투킬 > 등을 연출한 장현수 감독의 데뷔작이다. 더러운 독기로 보자면, 물새는 <게임의 법칙>의 용대와 ‘맞짱’이 가능하다. 물새는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하겠지 싶은 악당이 아니다. 그는 지숙을 사랑하지만, 그녀에게도 비열하다. 지숙에게 상처를 받을 때면, 자신만을 바라보는 또 다른 여자 오덕자( 송옥숙 )를 찾아가 위로를 강요하기도 한다. 분명 장현수 감독에게 물새는 <게임의 법칙>의 용대를 상상하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단, 용대가 가지고 있던, 나름 유쾌해 보이기도 했던 허세의 기운을 물새에게 찾을 수는 없다. 배우 정보석은 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더해놓는 한편, 물새의 신경질적인 기질을 더 도드라지게 묘사한다. 그가 연적인 정만에게 주먹을 날리거나, 지숙에게 큰소리를 지르며 떼를 쓰는 모습들은 자기 파괴적으로 보일 정도다. 영화 개봉 당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보석은 “이전 작품에서는 주로 이성적인 인물이 대부분이서 가면을 쓸 수 없었고, 인위적으로 연기해야 했으며 인간미가 결여되어 허점이 많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내 감성에 가깝게 욕구를 폭발시켰다”고 말했다. ‘폭발’이라는 말이 맞는 듯 보인다. 드라마의 물새가 장렬히 산화했다면, 영화의 물새는 끝내 외롭게 폭발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새로운 인생을 살려고 했던 지숙은 자신이 외면했던 소매치기 일당들의 음모로 과거를 들킨다. 지숙의 정체를 알게 된 정만은 흔들리고, 또한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지숙을 위해 돈을 구하려던 물새는 사람을 죽인다. 사랑하는 여자는 떠났고, 경찰이 뒤쫓는 상황에서 물새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때 물새의 선택은 1990년대 당시로써는 매우 영화적인 선택이었겠지만, 물새는 그리 영화적인 느낌으로 자살하지 않는다. 모든 걸 내려놓는 표정이었던 드라마의 물새와 달리, 영화의 물새는 아직 미련이 많아 보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술을 마시며 자신을 말리려는 지숙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그녀를 방 밖으로 밀어낸 후, 다시 손을 떨며 술을 마신다. 영화의 초반부, 물새는 자신의 부하와 구역을 뺏어간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며 엄포를 놓았었다. 하지만 진짜 자살을 결심한 순간, 물새가 혼자 있는 방안에서 느껴지는 건 그의 슬픔과 두려움, 후회, 짜증이 뒤섞인 피로감이다. 물새는 매우 아픈 얼굴로 기어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그는 정말 힘들게 죽는다. 제발 누가 자기 대신 자기를 죽여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이렇게 죽는다는 표정이다. < 걸어서 하늘까지 >를 드라마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영화 <걸어서 하늘까지>를 봐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의 감정이다. 당시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이토록 아프게 자살한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P.S < 걸어서 하늘까지 >는 장현수 감독의 데뷔작이지만, 지금 와서 다시 보면 이 영화의 각색을 맡았던 곽지균 감독의 작품들이 먼저 연상된다. 정보석 과 배종옥 의 만남에서 < 젊은날의 초상 >(1991)의 이영훈과 윤점숙이 떠오르고, 정만을 연기한 강석우 의 모습에서 < 겨울 나그네 >(1986)의 민우가 기억나는 것이다. (장현수 감독은 < 젊은 날의 초상 >의 조감독이었으며 각색에도 참여했었다.) 물새와 지숙, 정만 등 세 남녀가 엮인 심리적인 갈등 또한 그의 영화들에서 본 듯한 감정이다. 고 곽지균 감독은 7년 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걸어서 하늘까지>를 보다가 그의 영화들을 떠올린 지금도 5월이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 감독의 새 영화를 보고 나서 그/그녀의 이전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언제나 처음 보는 것과는 다른 일일 것이다. 특히, 홍상수 의 영화가 그렇다.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일관성 때문이다. ‘반복’은 그의 개별 영화들의 구성 원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영화들 사이를 잇는 창작의 원리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들은 소급적인 ‘반향효과’를 통해서 더욱 두터워지고 깊어진다. 근 20편에 이르는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단계를 설정하는 일, 그리고 그의 영화들 사이에서 걸작과 태작을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 보인다. 그의 모든 개별 영화들은 단 하나의 연작 중 일부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끊임없이 단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이항적 대칭 구조’의 형식을 취한 홍상수의 신작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를 보고 나서,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던 그의 초기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그 ‘반향효과’를 음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그의 세 번째 작품인 < 오! 수정 >에 대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오! 수정 >은 표면적으로는 5개의 소제목이 붙은 장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그 안에 동일한 과정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기억 사이의 대비가 함축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영화다. 재훈( 정보석 )과 은주( 이은주 )는,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합(수정, 또는 결혼)’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 세계 속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커플이자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인 커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 시민 케인 >이나 < 라쇼몽 > 같은 ‘기억의 모호성’을 다루는 영화들의 계보 안에서 이 영화를 받아들였고, 전작인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과 < 강원도의 힘 >(1998)에 비해 좀 더 귀엽고 밝아진 인물들을 홍상수 영화에서 나타나는 어떤 변화의 징후로 읽었다(부정과 냉소에서 긍정과 유머로의 이행). 하지만 ‘반향효과’ 안에서 본 <오! 수정>은, 그 첫인상이라는 것이 일종의 오해, 또는 절반의 이해에 불과했던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오! 수정>은 ‘기억의 모호성’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영화도 아니었고, ‘낭만적 해피엔딩’의 영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두 남녀 사이의 기억의 차이는, 홍상수가 이항적 대칭 구조를 만들어 내기 위해 동원하는 다른 많은 이항들(가령, 서로 같은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경유하는 두 인물, 서로 다른 공간-분위기에 놓인 한 인물, 현실과 꿈 등) 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귀엽고 밝아진 인물들 역시 낭만적 낙관의 반영하는 거울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인 성찰을 위한 거울이었다. 무엇보다 분명해진 것은, 홍상수 의 일부 영화(특히, 초기영화)에서 나타나는 ‘이항 구조’가 사실은 처음부터 ‘n항 구조’에 이르기 위해 취한 방법론적 선택이자 제약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이후 영화에서 나타나는 삼항 구조나 옴니버스 형식과 같은 다양한 형식적 변주는, 어떤 질적인 변화라기보다는 이 ‘이항 구조’의 양적인 확장에 더 가까운 것이다. 홍상수에게 ‘구조’란, 역설적이게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구속이다. ‘불안’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집중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놓은 틀이다. 이 제약에는 서사형식으로서의 ‘구조’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들어내는 미장센의 스타일적 요소들(가령, 고정쇼트, 미디엄쇼트, 롱테이크 등)도 포함된다. 홍상수는 스스로 설정해 놓은 이 제약 안에서 ‘우연’을 기다리고, 마주친 우연에 따라 ‘즉흥연주’를 한다. 특정한 ‘공간-분위기’와 ‘배우-인물’이 조우하는 순간, 그의 반복되는 즉흥연주가 시작된다. 홍상수는 그 자유(우연의 수용)와 즉흥연주를 “어떤 당위나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 어차피 선택인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가 벗어나고자 하는 그 ‘당위나 나쁜 습관’은 세상의 그것(상식과 통념)이자 동시에 영화의 그것(관습적 재현 양식)이다. 대개는 ‘불륜관계’를 포함하는 남녀 사이의 다양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의 줄거리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TV 드라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그 줄거리 안에 결코 ‘법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데뷔작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에 예외적으로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불륜’ 때문은 아니었다). 홍상수는 그가 발견하고 재구성해가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서, 굳이 법정에 서지 않아도 그 인물들의 내면에서 언제나-이미 작동하고 있는 어떤 ‘법의 힘’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하고 저항하고 있다. < 오! 수정 >의 밝고 귀여운 인물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적 방법은 가부장제의 법이 작동하고 있는 일상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이지만, 그의 근본적인 영화적인 화두는 그 법의 외부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어떤 삶’의 지평에 다다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홍상수 영화의 본질은 ‘일상의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삶의 리얼리즘’에 있다. 홍상수는 언젠가 그것을 “완전한 구체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