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지미
- 감독
- 정소영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전용길
침체 속에 거둔 70년대 이후의 수확 1970년대 이후의 양상은 1960년대와 비교할 때 양이나 질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점은 황정순이 <팔도강산>(배석인, 1967) 류의 국책영화에 기용되면서 그동안 호흡을 맞춰온 김승호 대신 희극배우 김희갑이 그 자리를 메웠다는 사실이다.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김수용, 1970),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등이 그런 예다. 노부부가 일본에 사는 아들의 초청을 받아 엑스포70 세계박람회를 관람(<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하거나, 전국 각지에 있는 자식들을 찾아 유람 여행하는 동안 변화된 한국의 발전상을 에피소드에 끼워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달라진 제작 환경 아래서 황정순은 1970년대에 비극적인 수절의 이면을 그린 <홍살문>(변장호, 1972) 등 60여 편에 출연했다. 60년대에 비해 절반가량 줄어든 실적이다. 속편 등 유사 기획으로 작품성보다는 흥행 위주의 영화가 대세인 가운데 아들을 국가대표 골게터로 키웠으나 신장염을 앓게 되자 콩팥까지 이식해 주는 <어머니의 영광>(김기, 1973)의 생선장수, 벙어리 청소부 아들과 4남 2녀의 손자, 손녀들까지 돌보는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조문진, 1978)의 헌신적인 할머니,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불목의 위기를 화해로 풀어내는 <장마>(유현목, 1979)의 외할머니 등 여러 형태의 모성애를 보여 주었다. 이 가운데 연기력이 가장 돋보인 것이 유현목 감독의 <장마>였다. 화면을 줄곧 적시는 지루한 장맛비 속에 외손자와 나누는 콩깍지의 교감, 설움조차도 발효시킨 푸념 조의 독백은 선율처럼 느끼게 했다. 황정순 최고의 연기라 할 수 있다. [사진] 영화 <장마>에서 황정순과 김신재(오른쪽) 1980년대 이후의 출연작은 <피막>(이두용,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여자의 함정>(이경태, 1982), <가고파>(곽정환, 1984), <88 짝궁들>(서윤모, 1984), <장남>(이두용, 1984) 등 10여 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이두용 감독의 <피막>과 <장남>에서의 연기가 관심을 끈다. <피막>에서는 장손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 하는 강인한 노마님의 모습이, <장남>은 핵가족시대 노인의 소외감이 묻어나는 표정연기가 일품이었다. [사진] 영화 <장남>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김일해 황정순은 이렇게 연극무대에서 다듬은 특유의 발성과 응집력을 무기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열녀문>(신상옥, 1962)으로 대표되는 한은진과 쌍벽을 이루며 1960년대 전후의 한국영화계에 대들보 역할을 했다. ‘탱크’라는 말을 들으며 다진 연기력 황정순은 1925년 8월 2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서 난산 끝에 10남매 중 일곱 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산모는 몸이 약한 마흔이 넘은 고령자였다. 딸이 백일이 지나 건강을 되찾자 황씨 일가는 시흥을 떠나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정순이 세 살 때,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익사체가 되어 돌아오는 큰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채무까지 짊어지고 험한 품팔이 일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어렵게 들어간 인천 박문여자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정순은 이 무렵 프랑스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탐정소설 <아르센 뤼팡>에 빠졌다. 신출귀몰하는 괴도신사의 이야기다. 그러나 열네 살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본 ‘타잔’ 영화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황정순은 어느새 배우지망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울에 사는 사촌 언니(황금순)를 믿고 가출한 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로 찾아갔다. 무턱대고 졸라 얻어낸 것이 대사 없이 처녀들 사이에 끼어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산송장>의 행인 역이었다. 1940년이었다. 그동안 딸의 ‘광대 짓’을 극구 말리던 노모도 제물에 지쳤는지 묵인했다. 그 사이 2차세계대전이 터졌다. 극단 ‘호화선’(1941년)의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못가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해방 후에는 중앙방송국 전속 성우(1945년)가 되었다. 그녀의 본격적인 활동은 6.25 직전 극단 ‘신협’의 <뇌우(雷雨)> 공연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물꼬를 튼 연극 활동은 6,25 때 대구로 피란 온 ‘신협’의 <자명고>(1951. 1, 대구)와 <햄릿>(1951. 9, 대구), <맥베드>(1951. 10, 마산) 등에 출연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뒤이어 <은장도>(1953, 시공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5, 시공관) 등의 무대에 섰고, 56년에는 중앙국립극단 전속 단원이 되었다. 이즈음에 출연한 작품이 제1회 공연작 <원술랑>과 제2회 공연작 <뇌우(雷雨)>였다. 두 연극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5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명(1955년 기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는 두 연극에서 김유신 장군의 아내 지소 부인과, 노씨 집안의 하녀로 들어간 사봉 역을 맡았다. 특히 젊은 나이로 노파 역까지 소화한 <원술랑>의 지소 부인 역은 관객들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햄릿>(1957, 시공관) 등 여러 작품에서 공연한 바 있는 김동원은 몸을 아끼지 않은 그녀의 열정을 보고 단원들은 ‘탱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2003, 태학사, 188쪽) 고 했다. 황정순이 1949년 영화 <파시>에 출연한 후 6년 동안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 그녀는 이미 신접살림을 하는 새댁이었다. 1953년 3년의 열애 끝에 의사 이영복과 결혼했다. 이와 함께 이날 한꺼번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얻었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하지만 결혼 30년 만에 남편이 먼저 가버렸다. 그의 연기를 받쳐준 것은 무대 경험을 통해 축적한 발성법과 육체언어로 인식한 연기동작, 투철한 직업의식에 따른 작품해석과 성격분석이었다. 이례적으로 현대적인 풍모와 카리스마를 보여준 <육체의 고백>의 서구적인 ‘밤의 여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삶의 질곡과 모진 풍상을 겪은 억척스런 아내이거나 엄격하면서도 인자한 어머니, 가난하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는 서민적인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사진]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황정순 황정순은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 2006년 여배우로서는 처음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나 이후 발병한 치매로 고생하다가 2014년 2월 17일 아흔 살의 나이로 400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46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거두었다. * 연도별 출연 편수는 통계에서 빠진 부분이 있을 것으로 판단돼 증가될 수 있음.
<미워도 다시 한번>을 다시 읽는다 한 편의 ‘최루성 멜로’가 던진 파문 수출 목표 10억 달러의 문턱에서 온 나라가 생산증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1968년, 군소영화사를 통폐합하고 영화산업을 기업화하려한 정부 시책에 영화계는 양극화되었고 영화인들의 불만도 누적되어 갔다. 그런데 그해 여름, 정소영 이라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감독이 군소영화사에서 만든 영화 한 편이 영화법 개정 요구에 불씨를 댕겼다. 그 영화가 바로 1968년도 최고의 흥행작이자, 그때까지 신상옥 의 < 성춘향 >(1961)이 보유하고 있던 한국영화 사상 최대 관객동원 기록을 깬 < 미워도 다시 한번 >이다. ‘최루성 멜로드라마’의 대명사가 된 이 영화는 1960년대 관객에게조차 매우 익숙한 플롯을 전개한다. 애인 김신호( 신영균 )가 유부남인 줄 몰랐던 유치원 교사 전혜영( 문희 )은 시골의 본처가 남매를 데리고 상경하자 임신 사실을 숨긴 채 묵호로 귀향한다. 바닷가에서 노동하며 홀로 아들 영신을 키웠으나 아이가 아버지를 찾는 나이가 되자 혜영은 아들의 장래를 위해 신호에게 맡긴다. 그러나 낯선 환경, 서먹한 ‘큰’ 어머니, 의붓형의 괴롭힘,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영신의 마음은 병들어간다. 어느 날 하교 후 무작정 엄마에게 가려다 길을 잃은 영신은 폭우가 쏟아지는 밤거리를 헤매다 돌아온다. 아이를 잃어버린 줄 알고 피가 마르던 신호는 대문간에서 잘못했다고 비는 영신을 때린다. 모질게 아들을 때어놓고선 걱정되어 그 곁을 맴돌아왔던 혜영은 영신이 맞는 모습을 보고는 “제가 길러야겠다는 걸 뼈아프게 느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아들을 데리고 묵호로 떠난다. 눈물의 공감대: 출세와 교육열 이토록 익숙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속편, 3편, 4편까지 만들어진 데다 1981년과 2001년에 리메이크되기도 한 것은 그 어딘가에 한국인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선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등장인물들의 출신과 직업이다. 신호, 혜영, 신호의 아내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인물들이다. 농촌 출신인 신호는 회사를 다니면서 박사논문을 집필하던 중에 혜영을 만났고 지금은 제약회사 사장이다. 즉, 그는 물려받은 재산이 아닌 전문지식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부자이고 그의 출셋길은 교육으로 인해 열린 것이다. 어촌 출신인 혜영은 유치원 교사였지만 신호로 인해 중산층 가정부인이 되는 루트에서 밀려나 가난한 미혼모가 되었다. 친정아버지에게서 소 판 돈을 꾸어 서울 살림을 시작한 신호의 아내는 남편의 출세로 상류층에 진입했지만 사생아의 존재는 그동안 그녀가 가꾸어온 안락하고 모던한 가정을 뒤흔든다. 다음으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은 왜 혜영이 8년간 숨겨왔던 아들의 존재를 지금에야 알리고 신호에게 양육을 요구했는가이다. 당시의 민법이 현재와 달랐음을 고려해야 한다. 사생아인 김영신이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김신호의 호적에 올라야 하고 그러자면 본부인에게도 그 존재를 알릴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에서 언급되지 않아 오늘날의 관객은 유추하기 어렵지만 60년대의 관객이라면 이미 미혼모가 아이를 데리고 친부를 찾았을 때 자연스레 연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묵호로 아들을 데리고 떠난 혜영이 속편에서 신호에게 알리지 않고 서울로 되돌아온 이유도 오로지 영신에게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하고픈 욕망 때문이었다. 요컨대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에서 갈등의 원천은 그 이전의 멜로드라마처럼 삼각관계보다는 자식교육에 있었던 것. 따라서 이전의 멜로드라마라면 본처를 악녀로 설정했을 터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남편의 사생아를 키워야 하는 본처가 겪는 고통도 최루성 장면의 일부를 이룬다. 고도경제성장기의 멜로드라마 호주제가 2007년까지 유지되었고,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사전에 등재되어있으며, 대학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이 나라에서 <미워도 다시 한번>은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볼 가치가 있는 영화다. < 마부 >( 강대진 , 1961)에서 사양길에 접어든 마부의 의젓한 장남으로 고시에 합격한 신영균은 고도경제성장기의 초입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자수성가한 테크노크라트로 변신했다. 그의 공부를 뒷바라지 했던 문희는 한때 인텔리였지만 한순간에 가난한 미혼모로 전락했고 자식만이 유일한 희망이기에 통곡하며 어린 아들을 더 나은 가정으로 떠나보낸다. 스무 밤만 자면 온다던 엄마를 기다리던 영신이 자전거를 사 온 아버지를 붙잡고 “자전거 안 가질래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학교 안 갈래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한테 데려다줘요.”라고 흐느끼는 장면은 지금도 우리의 눈물샘을 지그시 누른다. 이 영화가 오랜 세월 그토록 많은 관객에게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한 신파적 감수성 때문이 아니라 교육이 유일한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된 양극화된 사회의 비애를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 미워도 다시 한번 VOD 보러가기 <<
< 맨발의 청춘 >( 김기덕 , 1964)에 대한 평론과 연구는 이미 차고 넘친다. 1950~60년대 한국영화와 대중문화사에 대해 한 마디 얹으려면 피해갈 수 없는 영화가 < 자유부인 >( 한형모 , 1956), <맨발의 청춘>, < 미워도 다시한번 >( 정소영 , 1969)이고, 그런 만큼 논문과 평론 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청춘영화의 본격적 출발, 신성일 ‧ 엄앵란 콤비의 시작, 방황하는 밑바닥 청춘의 울분과 좌절, 과장되게 미국화하여 전시된 화려하고 발랄한 질감 등, 이 작품에 새삼스레 한 마디 말을 더 얹을 필요가 없을 정도다.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에 국한해도 <영화천국> 18호에 수록된 이길성의 글 「 한국 청춘영화의 아이콘, 레전드가 되다 」 같은 충실한 글이 이미 있다. 그런데 각도와 폭을 좀 달리해서 보면 좀 다른 것들이 보인다. 1964년이란 시기이다. 대중예술 작품의 인기는 해당 작품 하나의 극본과 연출의 완성도, 배우의 매력, 혹은 유통 과정에서의 우연 등 다양한 요소에 좌우된다. 하지만 전후를 함께 살펴보면 그 작품이 인기 있을 만한 조짐이 이미 한두 해 전부터 축적되고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한 시점에 그 작품이 놓인 경우가 많다. <맨발의 청춘> 역시, 한 해 전에 일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 청춘교실 >( 김수용 , 1963)‧< 가정교사 >(김기덕, 1963)라는 전조가 있었고, 더 길게 보면 전쟁 중 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이 청년기를 맞으며 자기 세대 얘기를 시작하는 전 세계적 현상이 유럽‧미국에서 일본의 태양족까지 차근차근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한국에서 1964년은 더 생각할 지점이 있다. 그 해에 주목할 만한 대중문화의 새로운 흐름이 솟아오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간지 시대의 시작, 민영 TV의 본격화 등 여러 매체 환경이 변화한 것도 이 해인데, 작품 경향으로 보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계기로 트로트가 부활한 것이다. 대중가요사 시작 이래 한 번도 제1주류 양식의 자리를 내준 적이 없던 트로트는, 1961년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인기로 몇 년 간 확실한 침체를 보였다. 그 사이 제1주류 양식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미국풍 가요인 스탠더드팝, 그 중에서도 손석우 작곡의 명랑하고 반듯한 질감의 작품들이었다. 1964년을 계기로 트로트가 다시 부활하고, 스탠더드팝 역시 최희준이 부른 주제가 <맨발의 청춘>(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이 몰아온 어두운 뒷골목 냄새 풍기는 재즈 분위기의 작품이 부상하는 변화를 보인 것이다. 대중가요계에서 1964년 부상한 이 두 가지 흐름은 완전히 상반된 경향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손석우 노래가 주도하던 모범생처럼 건전‧명랑한 분위기가 아닌, 어둠과 절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1960년부터 1963년까지를 주도했던 건전하고 명랑한 가족 멜로드라마(‘ 김승호 영화’라 할 만한)가 주춤거리면서, 어두움과 절망이 깃든 <맨발의 청춘> 같은 청춘영화가 부상한 것과도 비견될 만하다. 영화계에서도 < 모녀기타 >( 강찬우 , 1964) 같은 복고적인 신파적 영화가 함께 부상하고 있었으니 사실 가요계와 비슷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청소년 취향과 성인 취향 양쪽에서 모두 몇 년 동안 잠복되었던 어두운 절망‧퇴폐 같은 감성이 이 해에 일제히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즈음에 대중의 사회심리가 바뀔 만한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게 옳다. 1960년대 초에 영화와 가요계에서 모두, 과거의 어둡고 퇴폐적이던 흐름을 청산하고 명랑하고 반듯한 질감의 작품이 인기를 끈 것은 확실히 4‧19와 5‧16,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시작 등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정도 정부의 통제가 개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억지스러운 관제적 건전성과는 확연히 다르게, 대중 스스로 기꺼이 동의한 건전‧명랑‧희망의 질감이 1960년대 초의 작품에는 넘쳐난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다 되어 가고 정치까지 바뀌면서 사람들은 ‘허니문 현상’의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63년에 군정이 끝나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 후 1964년에 박정희의 민정 제1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제 대중의 심리에서도 몇 년 간의 허니문의 거품 희망이 서서히 꺼지면서 잠복되어 있던 절망‧불안‧소외감‧퇴폐 같은 감성이 다시 부상하게 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50년대로 되돌아 간 것은 아니다. 세상살이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거품이 조금 가라앉았을 뿐 여전히 오랫동안 힘을 발휘했다. 1950년대의 자유주의와 화려함이 전후의 엉망진창 한국사회에서 풍기는 허무주의의 냄새를 품고 있다면, 1960년대 <맨발의 청춘> 속의 주인공 두수는, 비록 좌절되었을지라도 진정한 사랑과 계층상승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꿈을 지니고 있는 ‘신데렐라 맨’이었다. 물적‧성적 욕망의 질감 역시 1950년대의 <자유부인>이 보여주는 그것이 아니었다. 영화 <자유부인>이 ‘두루뭉술하게 서양적인’ 질감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맨발의 청춘>은 신성일의 청바지와 트위스트김의 스윙댄스, 화면 뒤로 흐르는 색소폰의 재즈 연주와 프로레슬링, 현대적이고 실용주의적 디자인의 미국대사관 건물에 이르기까지 확연히 미국적 질감을 과시한다. 대중가요계에서도 그랬다. 1964년에는 한국 최초로 록그룹의 음반이 두 장이나 출시됐다. 차중락‧윤항기 등의 키보이스, 신중현이 이끄는 애드훠의 음반(<빗속의 여인> 수록)이 그것이다. 서수남‧하청일이 이끄는 컨트리뮤직 그룹인 아리랑부라더스의 음반(<동물농장> 수록)도 이 해에 나온다. 물론 이것들이 다 흥행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방향성은 분명하다. 1960년대는 이렇게 두 번째 시기로 넘어가고 있었고, 바로 그 지점에 <맨발의 청춘>이 위치한다. 그리고 1960년대의 세 번째 시기로 넘어가는 즈음에 < 미워도 다시한번 >이 놓여있다. 한국영화사의 ‘대박히트’ 작품은 이렇게 한국현대사와 기막힌 조응을 보여주고 있다. <맨발의 청춘> VOD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