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사영화시대
- 감독
- 문무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이업동, 이영애
한국영화사의 비평세대는 비평의 ‘주체’와 ‘주요비평담론’, 그리고 ‘비평매체’와 이들을 둘러싼 영화산업의 역사적 맥락 등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1950년대는 한국영화사에서 비평집단의 조직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활동은 미미했지만 1950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출발한 ‘영화평론가협회’를 필두로 전후비평이 시작되었고, 1957년 일간지 연예담당 기자들을 중심으로 ‘시네펜클럽’이 결성되었으며 1950년대말에서 1960년대초는 ‘일간지 영화평의 최전성시대’였다. 樹( 임영 ), 雄(임영웅), 秀(최일수) 明( 이명원 ), 湖( 호현찬 ), 振(김진찬), 植(신우식), 軒(황운헌), 英( 정영일 ) 등 신문에 고정란을 두고 자신의 이니셜을 새겼던 이들은 영화비평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일간지 중심의 저널리즘 비평은 본격적 담론을 이끌어내기엔 한계가 있었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중흥과 함께 <신영화>, <영화세계>, <국제영화>와 같은 영화잡지들이 발간되면서 비평지면이 늘고, 비평적 실천의 대상인 한국영화 자체도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영화와 지면(매체)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비평은 텍스트중심의 비평보다는 위기에 봉착한 영화계의 현실을 진단하고 정책제언을 하는 시평이나 인상비평이 많았다. 국산영화 면세조치 이후 해마다 제작면에서의 양적 급증이 있었지만, 산업적으로나 제도적, 기술적으로 미비한 상태에서 전후의 공백을 메우고 세계영화의 흐름에 조응하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했다. 전후 한국사회 곳곳에 세계주의, 실존주의가 확산되던 이 시기에 유두연 은 한국영화 부흥의 허약한 ‘이면’을 강조하며 ‘한국영화 위기론’(경향신문 1956년 상반기/연말 결산 연재기사)을 역설하고, 네오리얼리즘을 모델로한 ‘코리안 리얼리즘’을 주창했다. 1950년대 활발한 활동을 했던 몇몇 비평가들( 허백년 , 오영진 , 이봉래 등)과 마찬가지로 그는 일본의 대학에서 서구문학이론을 전공했고, 30여편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 유혹의 강 >(1958)으로 감독데뷔 후 총 8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조춘 > 1959, < 카츄샤 > 1960 등). 이전 시대의 비평가들과는 다르게 전후 평론가들은 전근대적 한국영화를 비판하거나 문제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다가 연출 및 제작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두연은 군정청 예술과 근무나 조선영화사 간부 이력에서 드러나듯 시스템이나 정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았다. 그는 국제영화제 진출을 문화교류나 예술성 획득의 측면에서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협소한 내수시장의 한계를 해외시장의 개척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예술과 산업의 균형발전 시각에서 일찌감치 접근했다(경향신문 1955년 1월 23일 ‘영화의 예술?상업성’). 또한 유두연은 당대의 사회현실을 반영한 “오리지날 씨나리오에 의한 현대극영화”가 위기의 한국영화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주장하며 빠른 템포의 현대극 멜로물을 주로 만들어 ‘전후 멜로드라마의 초석을 닦은 작가’로 평가되기도 했다. 1957년 2월 <영화세계> 특집이었던 ‘코리안 대 이타리안리즘의 비교’(필자: 유두연 , 허백년 , 황영빈 )는 ‘코리안 리얼리즘’이 네오리얼리즘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굴절 및 변용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네오리얼리즘을 매개로한 코리안 리얼리즘이 이전 시기 한국의 리얼리즘 담론전통과 어떤 지점에서 개념적, 이데올로기적 단절의 선을 긋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국의 네오리얼리즘 수용시기가 이미 사조자체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던 195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 시카와 로셀리니의 초기작(< 자전거도둑 >, < 무방비도시 > 등)을 선택적으로 정전삼아 수용하는 과정 속에서 비평가들이 이상적으로 상정했던 ‘한국적’이고도 ‘새로운’, 또한 ‘로컬’하면서도 ‘글로벌한’ 리얼리즘의 모습이 드러난다. 유두연이 1954년 네오리얼리즘을 소개하던 글(‘영화기법의 신경향: 네오 레아리즘에 관하여’)의 경우에서도 다큐멘터리적인 방법론이나 스타일적 요소보다는 “전후의 긴박한 사회정세에 대한 영화작가의 현실직시 정신”이나 이태리문화의 전통적 특질에 기반한 “지방주의”에 주목했던 것은 본격적 논의라 할 수 있는 3년 후의 ‘코리안 리아리즘 단상’과도 연결된다. 유두연 은 영화예술에 있어 리얼리즘을 외형적인 측면(방법론, 스타일)과 내면적인 내용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외형적 리얼리티에 대한 논의는 “카메라 렌즈의 리얼리티”로서 간단히 전제하고 “이타리안 리얼리즘의 작가정신에 대한 동경”을 한국영화의 “주류적” 성격인 리얼리즘담론과 연관짓는다. 그는 일제시대 나운규 의 < 아리랑 >, 이규환 의 < 임자없는 나룻배 >의 저항정신과 해방 후 < 자유만세 > < 마음의 고향 > 등에 산발적으로 계승되던 리얼리즘의 전통을 전후의 한국영화가 상실한 상태에서 이태리 작가들처럼 “코리안 리아리즘도 오늘의 현실(“네오적”)과 대결하는 인간의 진실을 내용으로 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한국영화의 주류적 성격을 “레지스땅스 의식과 로칼 칼라의 스타일”로 규정한다. 또한 그는 지방주의와도 연결되는 로칼 칼라 스타일은 한국영화의 국제적 진출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한국적인 동시에 세계, 이것이 궁극의 목표이고 영화의 마음이요 예술의 마음일 것”) 이렇듯 유두연 이 제창한 코리안 리얼리즘은 네오리얼리즘을 동경했던 전후 비평가들의 세계화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이상적 담론이자 대안이었다. 그러나 코리안 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한 저항의 ‘내용’을 포함했으되 다른 제 3세계 국가들에서처럼 유물론적 방법론이나 미학, 정치적 실천 및 운동 등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또한 네오리얼리즘 감독 중 급진적 맑시스트였던 비스콘티의 작품은 수입이 금지된 채 데 시카와 로셀리니의 일부 작품들이 수용되고 상찬된 것에는 전후의 비평들과 리얼리즘 담론이 이전시기 한국의 좌파 리얼리즘을 배제시키고 선택적으로 계승한 것과 유사한 한계가 드러난다. 비평의 장에서 이러한 (우파) 민족주의적 리얼리즘 담론의 지배는 1960년대로 가면서 더욱 고착화된다. / 글: 이선주
나오미 의 연기 활동 기간은 2년 6개월에 불과했다. 영화배우로서 결코 긴 세월은 아니었다. 그래서 당사자인 나오미나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팬들 모두 추억의 그림자가 길다. 1971년 일세를 풍미했던 스타 신성일 이 제작, 감독한 영화 < 연애교실 >에 신영일 과 함께 주연으로 데뷔, 한창 배우 활동이 무르익어 갈 무렵인 1973년 가을 충무로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재미동포 사업가인 최명광 씨와 결혼했다. 그녀의 갑작스런 은퇴에 대해 영화계난 팬들은 아쉬워 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나오미는 그때의 심경은 의외로 담담했다고 술회했다. 미국에 있는 나오미는 전화 통화에서 '결혼 때문에 영화를 떠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싫어져서 결혼을 택했다. 그무렵 내가 의도한 대로 영화 일이 풀리지 않아 실망했고 영화가 싫어져서 결혼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오미는 1973년 최무룡 의 소개로 최명광을 만나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그해 10월 미국으로 가서 6개월 동안 사람됨을 살펴본 후 그 다음해 결혼했다. 당돌하면서도 섬세한 행동이었다. 나오미 는 1971년 < 연애교실 >로 화려한 데뷔를 했다. 이 영화는 서울 국도극장 개봉에서만 10만 3천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흥행 성공이었다. 1970년대로 돌입하면서 한국영화는 TV수상기의 보급 확산과 저질 국산영화의 생산 과잉으로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침체기로 들어갔다. 1971년에 제작된 국산영화는 총202편이었는데 그 중 서울 개봉관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겨우 7편에 불과했다. 최고 관객 동원 국산영화는 < 내일의 팔도강산 >으로 15만 명이 고작이었다. 서울 개봉관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국산영화 7편 중 신성일 이 감독한 <연애교실>과 <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 2편이 차지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역시 나오미, 신영일 주연으로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13만 5펀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에는 서울 개봉관에서 5만 명의 관객만 동원해도 제작자는 희색이 만면했는데 13만 명이란 관객 동원은 대단한 흥행 성공이었다. 나오미 가 데뷔작에 이어 계속해서 서울 개봉관에서만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신성일 이란 브랜드 이미지 후광과 나오미, 신성일 청춘 콤비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 때문이라고 나는 진단한다. 신성일은 스타의 후광을 안고 감독으로 전환하면서 제2의 신성일, 엄앵란 을 탄생시켜 배우 공백기를 채우려 했는지 모른다. 나오미, 신영일 을 콤비 청춘스타로 내세운 신성일의 영화적 전략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 성공 뒤에는 영화의 시대적 상황이 작용했다고 본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영화는 전성기의 황금시절이 끝나고 걷잡을 수 없는 불황의 쇠퇴기로 접어든다. 뿐만 아니라 1971년에는 그동안 5년간 한국영화계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문희 , 남정임 , 윤정희 의 첫 번째 트로이카 중 문희와 남정임이 결혼으로 은퇴함으로써 여배우 판도에 혼돈과 공백이 생긴다. 두 정상 여배우의 갑작스런 결혼과 은퇴로 한국영화계는 이들을 대치할 여배우 인적 자원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국산영화 제작계는 극심한 불황에 돌입한 터여서 더블 팁의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1971년에서 1975년 사이는 한국영화사에서 상징적인 여배우 공백기였다. 문희, 남정임은 은퇴해서 첫 여배우 트로이카 체제는 붕괴되고 윤정희만 외롭게 남았으며, 제2기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운 유지인 , 정윤희 , 장미희 는 1975년 전후해서 데뷔했기에 그 중간 4~5년은 여배우 공백기로 무수한 여배우들이 꿈을 안고 데뷔했지만 포말 스타로 사라지고 말았다. 유지인 은 1974년 < 그대의 찬손 >( 박종호 감독), 정윤희 는 1975년 < 욕망 >( 이경태 감독), 장미희는 1976년 < 성춘향전 >(박태원 감독)으로 데뷔했다. 유지인, 정윤희 , 장미희 세 여배우는 제1기 트로이카인 문희 , 남정임 , 윤정희 의 살인적인 경쟁과 폭발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1977년부터 그런대로 각축전을 펼쳐갔다.그 공백기에 가장 화려한 데뷔의 팡파레를 울린 여배우가 나오미 였다. 흥행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그나마 데뷔작이 서울 개봉관에서 10만 명이 관객을 동원했기에 3년도 채 안된 연기생활 동안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과도기에 활동했던 나오미로선 불운이었다. 그리고 영화적으로 힘든 상황의 시기였기에 그녀는 영화계에 실망하고 영화게 싫증을 느껴 일찍 스크린을 떠날 결심을 했는지 모른다. 나오미 는 본명이 정영일(鄭英一)로 1951년 5월 29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향은 목포 인근 굴비로 소문난 영광이지만 나오미가 태어나기 전부터 목포에서 정미소를 했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정미소와 양조장을 하면 행세께나 하는 부자였다. 집안이 부유한 탓인지 형제가 많았다. 모두 열남매로 6남 4녀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고향인 목포에서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서울 덕성여고로 진학했다. 집에서 서울에 집을 사놓고 오빠 언니부터 고등학교는 서울로 보냈다. 나오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운동을 좋아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때까지 육상선수였다. 달리기, 허들, 높이뛰기 종목은 소년 체전이나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날씬하고 몸이 날렵하다는 소릴 들어왔다. 오빠와 언니들이 많아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기가 살아 사내아이들과 대등하게 놀았다. 덕성여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공예과로 진학했다. 1970년 한국일보가 주최한 미스 영 인터내셔널 대회에 출전, 2등으로 입상했다. 평소에 미인대회에 출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오빠가 적극적으로 권해서 용기가 생겼다. 나오미가 배우가 된 것도 이 미인대회 출전이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스 영 인터내셔널 대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신성일 이었다. 그리고 그후 신성일은 < 연애교실 > 제작, 감독을 하기 앞서 주연할 남녀 배우를 공모했다. 나오미 는 응모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만날 기회에서 신성일 의 눈에 들어 픽업된 것이다. 미인대회 심사위원으로 심사할 때 나오미를 눈여겨 두었는지 모른다. 비교적 쉽게 영화에 데뷔한 나오미는 데뷔작 흥행 성공이라는 행운까지 따랐다. 배우가 된 나오미는 대학을 중퇴하고 배우 활동에 전념했다.(나오미란 예명은 그 당스 이스라엘 혼성 듀엣이 부른 히트송 '꿈속의 나오미'에서 따온 것이다.) 데뷔작 < 연애교실 >과 두 번째 작품 <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을 신성일 감독으로 히트한 후 흥행 배우라는 날개를 달고 다른 감독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키 163cm, 적은 얼굴에 검고 인상적인 눈의 서구적인 마스크, 보호본능을 일으킬 정도로 가날펴 보이는 날씬한 체격의 나오미는 한국의 오드리 햅번이란 칭송을 들었다. 동양적이라기 보다는 서구적인 체취를 발산하는 나오미는 종래와 다른 새로운 이미지의 청춘상을 보여 주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나오미가 데뷔할 때는 제1기 여배우 트로이카가 와해되는 시기로 그들과 다른 이미지의 여배우 형이 나타날 것을 영화계나 관객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나오미가 영화계 안팎의 이런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켰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시기에 데뷔한 신인 여배우 중에서는 가장 근접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 가치를 나오미 본인 스스로 적극적으로 개발했으면 배우로서 대성할 수 있었을 텐데 중도에서 하차한 것이 자못 아쉽다. 그래서 그녀를 관망한 추억의 그림자는 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무룡이 소개한 최명광을 따라 미국으로 가서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나오미 는 아들 셋을 낳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행복하게 살았다. 1974년 결혼해서 15년 만인 1989년 남편이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때부터 나오미는 아들 셋을 열심히 키우면서 아들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행복으로 알고 살아왔다. 남편이 가고 없는 빈 자리의 공백이 컸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나오미는 남편 사망 후 1992년 한국에 나와 SBS-TV에서 드라마 <가을여자>에 출연하기도 했다. 아들 셋이 이젠 성년이 되어 미국과 한국을 자유스럽게 왕래하면서 욕심없이 살아가고 있다. 장남은 29세로 사업을 하고 있고 차남은 27세로 작곡을 하고 있고 3남은 한때 한국에 나와서 가수 활동을 했으나 지금은 미국에 들어가 대학에 다니고 있다. 나오미는 '이제는 영화에 애정이 솟아나 출연하고 싶지만 내 나이에 맞는 배역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요즘 제2의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다는 한국영화가 너무 특정 연령층에 편중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 한국영화계 안팎이 정치계보다 더 세대 간의 갈등이 심하고 독점이 편중되어 있는 것 같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51년 5월 29일 전남 목포 출생 홍익대 공예과 중퇴 1973년 10월 결혼과 함께 은퇴 <주요 경력> 1970년 MISS영 인터내셔날 대회 2등 1971년 신성일 감독 < 연애교실 > 데뷔 <수상 경력> 72년 '인기상', '신인상' 등 다수 <주요 작품> 연애교실 , 벽속의 남자 ,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 , 사랑하는 아들딸아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