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union2012][힘내라MBC]릴레이인터뷰17- 영화배우 정찬
- 제작년도
- 2012
< 수업료 >( 최인규 , 방한준 , 1940)는 종소리로 시작하고, 흥겨운 농악을 마지막에 배치한다. 주인공 영달 ( 정찬조 )은 <애마진군가> 노래를 부른다. 종소리 전 오프닝 크레디트 시퀀스에선 오케스트라 연주가 배경음으로 나오고, 아이들이 공을 차며 내는 함성이 종소리에 연이어 들린다. 이러한 “음향경(사운드스케이프 soundscape)”은 규율과 군가와 카니발의 병치와 이접이라는 그로테스크 무드를 조성한다. 마을 농악대의 신명 들린 소리가 이런 음향경의 구성을 끝부분에서 전환시킨다. 교실에서 학생들에 내는 소음까지 더하면 영화는 소란과 함성, 군가를 마지막 농악으로 슬쩍 전환시키는 셈이다. 서사를 끌고 가는 것은 3개월 밀린 수업료다. 내야 할 것을 아직 내지 않았거나 내지 못한 미납 상황. 주인공이 초등학교 4학년이고 아픈 할머니는 지불 능력이 없고 장사하러 마을을 떠난 부모도 기별이 없다. 궁핍한 아동이 처한 이러한 상황은 쉽게 눈물로 얼룩질 수 있다. 소위 “친일국책영화” <수업료>는 그러나 눈물 이상의 것을 영화에 주입한다. 아동 영달은 “고귀”하다. 할머니( 복혜숙 ) 끼니를 챙기느라 자신은 밥을 굶는다. 효심이 지극하다. 애 어른이다. 이 영화에서 고귀한 것은 영달만이 아니다. 주 공간인 수원의 풍경과 장소, 자연이 고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영달과 할머니가 살고 있는 누추한 초가집 뒤 우아한 가지를 내린 소나무 두 그루 , 키 큰 나무들로 은성한 언덕, 수려한 그림자, 그리고 내지 일본의 거울 이미지로서의 제국 외지, 반도 학교의 질서, 집단체조 하는 학생들에게 보내는 영달의 경탄의 시선 등이 미장센의 우아한 기조다. 가난과 고귀의 이러한 이중주는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과 조선의 지정학적 이분법인 내지와 외지를 견지시켜 주지만 동시에 위계적 비대칭성에 부딪힌다. 영화에서 혼용되는 국어(당시는 일본어)와 반도어(조선어)는 내선어, 내선일체를 이루는 듯하지만, 일본 내지에서 검열의 문제등으로 <수업료>의 개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종화는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내선일체 구호와는 달리 조선인 소학교는 일본 내지의 학교와 달리 의무교육이 아니라는 점이 이 영화가 제출한 모순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인 교사의 배려의 근간에는 내지와 외지의 의무 교육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선교환의 기획 영화로서의 <수업료>는 일본 영화인들을 시나리오, 음악, 배우 등으로 기용 내지 수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내선교환이 내지 상영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나, 이 영화가 시도하는 것은 외지 조선의 풍속을 담은 지역성의 매핑과 재현이다. 내지를 위해 외지를 조망하고 지역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수업 시간 마을의 빨래터, 거리의 금붕어 장사, 영달의 부자 친구 한옥의 실내 . 무엇보다도 수원의 풍광과 수원에서 평택으로 갈 때의 신작로, 골목길들. 내지를 위한 외지의 동형성과 이국성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고귀함’의 속내다. 영달이 처한 상황은 궁핍하나, 주변, 통과하는 장소, 목적지의 장소들은 아름답고 풍속은 온화하며 사람들은 온정적이다. 영달의 가난은 오히려 이 식민지의 예외적 사례로 제시되며, 일본인 담임선생과 조선인 이웃( 김신재 ) , 친척의 도움으로 이 문제는 해결된다. 내지와 외지, 제국과 식민지의 문제는 영화 초반부 4학년 교실의 제국 일본과 조선의 지도, 조선 전도 등이 보여질 때 강조된다. 영달이 수원에서 평택으로 갔다가 다시 수원으로 돌아오고, 아버지, 어머니( 문예봉 )가 장사 때문에 마을을 떠났다 귀환할 때, 그 이동성이 일본 제국 지도의 외지 조선의 동역학(kinetics)이라면, 이러한 운동이 동시 녹음 영화 <수업료>에서 마을 농악대의 몸짓, 소리에서 폭발하거나 수렴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내/외, 제국/식민지의 비대칭성이 사운드와 이미지의 벡터와 변곡점을 슬쩍 전환해내는 것이다. 아니면 외지, 마을 공동체의 에너지까지도 중일 전쟁, 대동아 전쟁으로 포섭물인가? 원작에 있던 전쟁 이야기가 영화에서 지워지면서, 해석은 전환으로 갈 수 있다. >> 수업료 VOD 보러가기 <<
완전 범죄는 있다 2018년, 내게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 암수살인(暗數殺人) >( 김태균 )이었다. ‘보이지 않는 숫자’는 모든 정치의 열쇠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대표적인 숨겨진 범죄(hidden crimes)다. 신고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범죄라는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문제, 보지 않으려는 문제, 왜 어떤 문제는 드러나고, 어떤 문제는 덮어지는가, 어떤 문제는 문제로도 상정되지 않는가. 누구는 보호받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의 살인은 과실치사인데(폭력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다가 피해 여성이 사망하는 경우), 어떤 사람의 살인은 교묘히 계획된 범죄인가(남성의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를 행사한 여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누가 정하는가? 차이와 배제, 범주를 둘러싼 권력과 지식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는 말은 생각보다 심오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완전 범죄는 머리 좋은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암수살인처럼 피해를 파악할 수 없는 범죄가 완전 범죄다. 신고도, 시신도, 증거도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유일한 증인은 범인이다. 미제 사건도 아니고 범죄 자체가 가시화되지 않은 경우, 그것이 완전 범죄다. 하룻밤에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가정폭력으로 혹은 성 산업에 종사하다가 사망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강남역 사건은 드러났을 뿐이다. 암수살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이주자, 난민, 노약자, 빈곤층, 노숙자, 여성 등 취약 계층이 대부분이다. 글쓰기나 인문학 강의를 하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지식과 지식인의 개념이다. 다른 문제에 비해 이 이슈는 자신 있게(?) 대답하는 편이다. “지식의 개념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지식인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모르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르는 것을 모르는데...” 지식인의 개념보다는 지식인에게 필요한 태도를 묻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식인이나 예술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사명이나 역할이 아니다. 윤리에 대한 추구와 지향.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자세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지식은 공부하고 조사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딘가에 있어서 찾아지는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각이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다. 시각이 지식을 드러나기 하므로 지식은 발명(making)되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시각이 앎을 결정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 색깔에 달려 있다. 등록되지 않는 죽음 영화 <암수살인>의 미덕은 윤리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형사 영화는 범인과의 심리 게임이나 액션(폭력), 스릴러를 강조한다. 주제는 남성들 간의 승부이고, 피해자(주로 여성과 어린이)는 그들의 대결이 가능하도록 기능하는 도구다. 그런 영화 중에서 가장 웰메이드를 꼽으라면 < 살인의 추억 >( 봉준호 , 2003)이 될 것이다. <암수살인>은 반대 입장을 취한다. 등장인물은 형사와 범인이지만, 서사의 흐름은 철저히 피해자 중심이다. 또한, 이 영화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다루고 있다. 이로 인해 <암수살인>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 ‘되었다’. 이 지면에서 굳이 언급하자면, 당대 한국의 남성 영화감독 중에서 시대의 윤리, 재현의 윤리를 가장 고민하는 이는 이창동 감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윤리성은 실화를 바탕 하는 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범죄자 강태오( 주지훈 분)는 김형민( 김윤석 분) 형사에게 진부한 대사를 던진다. “당신은 나 못 이겨”. 형사는 진부하지 않게 받는다. “내가 너를 이겨서, 뭐 할 긴데?” 그는 이기고 지는 것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런 장면을 두고 “진짜 이겼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역시 승부의 관점이다. 인간의 생명을 두고 승부가 중요한가? 형사의 관심사는 범죄자와의 심리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피해자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있다. 때문에 (실화와 달리), 김형민은 재소자 강태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불법 행위도 불사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대립 구도가 사회운동에서도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적’과의 싸움, 이기는 것에 무게를 두는 반면 어떤 이들은 피해자를 지원하고 그들의 상황을 더 걱정한다. 물론, 피해는 사회 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전자의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피해자는 사회운동의 명분, 증거로 전락하게 된다. 피해자를 ‘앞세우거나 동원하는’ 사회운동가, 페미니스트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의 변(辨)은 한결같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긴 이야기다.) ‘완전 범죄’라는 표현은 가해자의 관점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완전 범죄는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 된다. 사람이 범죄의 대상이 된 현실이 완벽하다는 말인가. 논리적으로도 넌센스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은 완벽했다”는 말이 가능한가? 피해가 퍼펙트 했다? 영화에서는 “암수살인이 한 해 200건”이라는 대사가 나오지만, 이 숫자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법무부 장관도 알 것이다. 경찰이 인지한 사건만 이 정도라는 것이다. 실제는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실종 사건에서 남겨진 이들의 고통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확인하는 문제다. 기다리는 이들의 고통. 이들은 고통이 끝나길 원한다. 여기서 딜레마는 그것은 범인만이 알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수사 기관이 파악하지 못한 범죄를 범인이 자백하는 조건으로 형량 거래가 이루어지거나 이 영화에서처럼 형사가 자기 돈을 써가며 범인과 적극적으로 협상한다. 요컨대 <암수살인>은 고통, 가시성, 윤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상업 영화로서 성공했다는 점은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봤다. 암수살인의 피해자가 사회적 약자라는 점, 피해자의 신분이나 언론의 관심도에 따라 사회적 자원(수사)은 다르게 분배된다는 현실. 용의자만 유전무죄가 아니다. 안전 역시 사회적 공공재이기 때문에, 잠재적 피해자들도 유전무죄다. 등록되지 못한 피해 정찬의 소설집 『새의 시선』(2018년, 문학과 지성사)에 수록된 단편 ‘등불’은, 세월호에 승선한 사람 중에 명단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에 탄 모든 이들의 리스트를 확보하고 있는가? 세월호에 몇 명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가. 만일, 운임이 없어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아이와 함께 배에 탄 가난한 여성이 있다면? 이제 세월호 사건의 정확한 피해자 숫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미등록된 자의 죽음. 역사도 우주도 저 하늘의 별도, 그 어디에도 흔적 없는 죽음이다. 무지가 권력인 사회에서, 소수자를 함부로 하는 사회에서, 시민권의 의미가 좁은 사회에서는 누가 인간이고 성원권을 가졌는지는 언제나 논쟁거리다. 태아는 생명권, 선거 연령, 동성애자의 숫자, 인터 섹스(間性), 누군가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는 투쟁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진실이다. 우리는 통계를 통해 현실을 아는 것이 아니다. 통계는 그 사회가 합의한 개념에 따라, 그에 맞는 수준의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예를 들어 무엇이 폭력일까. 무엇이 위계일까. 가해자, 피해자, 조사자의 개념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학교폭력이든 가정폭력이든 군대 내 폭력이든 실태 조사가 어렵다. 이런 일들은 부지기수다. 통계를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통계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나는 (『한국기지촌여성인권운동사』를 쓴 적이 있어서) 주한미군 기지에 관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당황한다. 통상, 기지(bases)의 개념에는 다양한 ‘시설’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a military base, camp, post, station, yard, center, homeport facility...) 이는 번역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이처럼 팩트는 단 한 번도 팩트일 수 없다. <암수살인>은 고통, 지식, 권력의 문제를 연결한다. ‘통찰’을 뜻하는 영어 ‘insight(in + sight)’는 “눈을 감아야 새로운 것이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을 잠시 잊거나 상대화하지 않으면, 새로운 지식은 절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절충’을 가장 싫어한다. 여성주의 지식이나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적 저항이 큰 이유는 이 때문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과 연결된 문제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과 협상할 수는 있지만 양립할 수는 없다. 환경운동은 발전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모든 인식이 당파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때부터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상은 매 순간의 긴장을 요구하는 만만치 않은 삶이다. <암수살인>에서 내가 좋아하는 몇 장면. 처음 두 남자가 비 오는 자갈치 시장을 걷는다. 바로 다음, 칼국수 집 장면은 화면 밖으로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경찰서나 관공서에 박카스류를 사 들고 오는 민초들, 실종자 할머니 역의 허진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그지 맹크로(거지처럼)” 같은 부산 사투리(서울말도 사투리지만)는 중독성이 있었다. 6년간에 걸친 감독의 필드웍은 이 속도의 시대에도 창작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음을 일깨운다. 김윤석 배우의 형사 영화를 모두 보았지만 비슷한 장면이 거의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는 < 천하장사 마돈나 >( 이해준 , 이해영 , 2006)다. 여성이 되기를 꿈꾸는 뚱뚱한 씨름 선수( 류덕환 분)의 아버지로 나오는데, 그는 상흔이 가득한 얼굴로 학대를 대물림한다. 상처 입은 남자가 아들에게 휘두르는 폭력. 나는 그의 ‘루저 한국 남성’ 연기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변호사 역의 김중기 배우는 오십대 초반인데, 아주 젊게 나온다. 택시 안의 구토물을 닦아내는 여성 노동자들의 일하는 장면. 강태오‘도’ 하지 않는 노동이다. 구토기와 눈물이 동시에 나왔다. 영화를 본 이들은 그 식사 장면을 기억하리라. 두 명의 형사(김윤식, 진선규 )가 포크레인 기사에게 ‘애원’하는 장면은 굉장한 기시감이 들었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일도 아닌데 늘 손해를 보면서 남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일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영화에서처럼 상관, 후배, 검사, 가족... 그러니, 이들의 인생은 늘 “미안하고 죄송하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일은 혼자 못하기 때문에 주변에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
‘기차 영화’ < 오리엔트 특급살인 >처럼 기차를 무대로 한 영화들은 하나의 장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공간 자체가 내용을 장악한다. 출발과 도착, 한 방향으로 계속 달리는 기계, 체인으로 연결된 차량들, 사건이 벌어지고야 마는 화장실, 마지막 칸, 물러설 수 없음, 절대로 왔던 길(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 기차 영화는 대개 불온하다. 스릴, 총싸움, 살인, 범인 잡기……. 기차 밖도 마찬가지다. 나가봤자 허허벌판이다. 좁은 공간에서 무기는 효율성이 다르다. 어떤 무기가 유리할까. 분명한 것은 기차 칸에서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다. 전통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은 결국 무기전”이라고 하지만, 기차 안에서는 첨단 무기가 승부를 결정짓지 않는다. 코앞의 단도나 야구 방망이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소지품이 무기가 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기차의 가장 큰 의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데 있다. 철도와 기차는 근대 자본주의의 기본 인프라이자 근대성을 상징한다. 기차는 물자 수송과 인간의 이동,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기차 시간은 정확해야 한다. 승객은 제시간에 기차에 승차해야 한다. 10초도 늦어서는 안 된다. 숨이 차도록 기차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우리 자신도 경험했다. 비행기의 지연 출발, 착륙은 흔한 일이지만 기차는 그렇지 않다. 기차를 놓쳐본 이들은 알 것이다. 인간이 아직 하늘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지상은 장악 가능했음을 의미한다. 기차 시간의 정확성은 한 사회의 발전과 기술, 질서를 의미한다. 에릭 홉스봄이 적었듯이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가 시간에 왔다”(나중에 이 말은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되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기차로 시작된 근대 근대 전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절멸전(絶滅戰), 대량 학살인데, 이는 인간의 의지(will)가 인간성을 어디까지 변형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히틀러가 자살 직전 마지막에 한 말은 “이것이 내 의지다!”이었다. 우리의 개발 독재 시대의 슬로건 역시 “하면 된다.”였다. 지금도 “하면 된다”고 하는 이들이 없진 않지만, 인간의 의지는 질주하는 자본주의 구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안다. 인생은 해도 안 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인간의 의지, 불굴의 의지, ‘그놈의 의지’……. 나는 인간의 의지가 개인과 사회를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저, 사는 만큼만 생각하면 된다. 홀로코스트. 하나의 질서만 유일한 진리가 되는 보편성(uni/versal)의 폭력이 실제로 실현된 대량 학살이다. 프리모 레비의 시 「기차는 슬프다」는 이를 정확히 표현한다. 첫째 연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 더 슬픈 게 있을까? /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짧은 기간이지만, 인간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근대적 사고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 개념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다. 인간(백인 남성)은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하여 미래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구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적 진보(progress)의 개념이다(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와는 다르다). 단수(單數)의 시간.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적 시간관과 단수의 주체가 시간의 기준을 제시한다. 개별적 인간의 상황마다 ‘10분’의 의미가 다를 수 있는데, 백인 남성 비장애인의 시계를 중심으로 삼아 객관적 시간 개념이 설정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처럼 행복한 시간과 지루한 시간은 그 길이가 다르다. 고문당하는 10분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같겠는가. 시간은 척도가 아니라 경험이다. 농촌의 시간과 도시의 시간은 다르다. 장애인의 시간과 비장애인의 속도는 다르다. 이런 차이가 무시되고 누군가의 시간이 기계적으로 설정되고(시계), 사람들은 속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발전, 추격, 100미터 달리기, 문명과 야만, 최연소의 성취... 물론 가장 끔찍한 ‘야만’은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the spatialization of historical time). “한국은 미국의 80년대다.”라는 식으로 각 지역의 발전 차이를 문명화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서구를 기준으로 놓고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국제 사회의 위계를 만들어, 이는 인종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설국열차 근대성의 교과서, < 설국열차 > 봉준호 감독이 타고난 재능과 훈련, 지성을 모두 갖춘 예술가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 만들기를 ‘마스터’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의 첫 장편영화 < 플란다스의 개 >를 가장 좋아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무정형의 영화다. 패턴이 없다. 걸작이라는 얘기다. 영화는, 그 영화에서 화제가 되었던 ‘김뢰하처럼’ 생겼다. 이후 < 살인의 추억 >, < 괴물 >, < 마더 >, <설국열차>, 레오 카락스, 미셀 공드리와 함께 한 옴니버스 영화 < 도쿄! >(일본의 히키코모리를 다루었다)까지, 봉준호는 소위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그는 위 영화들에서 근대성의 주제들을 섬세하게 공들여 변주한다. 좌우를 초월한 남성 연대(그런 면에서 <살인의 추억>과 <설국열차>가 가장 비슷하다), 괴물적 모성, 오염 메타포,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구조적 파국. 특히 숙주(宿主)와 기생충. <괴물>의 영어 제목은 ‘The Host’였다. 2019년 <패러사이트(para/site, 영어 어원으로는 같은 장소에 있다는 의미, 우리말은 ‘기생충’)>를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니, 연작의 완성인 셈이다. 숙주와 기생충은 대립하는 생물이 아니라 공존 관계다. 앞서 말한 그의 영화들은 모두 근대성의 공식에 충실하다. 원작 탓일까. <설국열차>가 가장 노골적이다. 나는 그 영화를 어떤 ‘어른’을 모시고 봤는데, 옆자리에서 나는 다음 장면을 중계했다. 한 장면만 빼고, 다 ‘맞추었다’. 그는 내가 “천재”이거나 영화를 두 번 보았다고 주장했다. 나는 단백질 바(bar)의 원료가 바퀴벌레인 것도 알았다. 바퀴벌레는 영양이 풍부하고, 깨끗하며, 물 한 방울만으로도 몇 달 동안 생존이 가능한 강력한 생명체다. 단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에 오염의 매개체여서 사람들이 질색할 뿐이다. 내가 예상치 못한 장면은 공동체와 리더십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부정의와 연관이 있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에게 지도자의 역할이 요구되자, 그는 사양한다. 공동체를 위해 투쟁하다 장애인이 된 사람도 있는데, 온몸이 멀쩡한 자신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반대다. 이곳은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상이용사’든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든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 그들은 ‘재수 없는 피해자’이거나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다짐케 하는 반면교사이거나 ‘민주화 운동 경력을 팔아 국회의원을 노리는 이들’이다. 반민특위서부터 일상화된 한국의 부정의한 일상의 근대사다. 한국은 살아남는 것, 더 잘사는 것이 유일한 가치인 나라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생존자는 소녀, ‘흑인’ 소년, 동물(곰)이다. 이들은 근대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희망을 상징한다. 지구의 미래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구를 망치는 데 앞장선 이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미래의 희망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은, 현재를 주도하는 주체의 타자라는 얘기다. 한국의 녹색당에서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탈핵을!”이라는 구호에 대해 고등학생 당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어른’ 당원들은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등학생들은 왜 자신들을 현재의 동반자가 아니라 어른의 관점에서 ‘미래’로 정의하느냐며 항의했다.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구호는 “지금, 당장, 우리 모두를 위해 탈핵을!”이다. 자신들을 타자화하지 말라는 얘기다. <설국열차>나 녹색당의 ‘어른’들은, 타자를 정의하고 보호하는 주체는 성인 남성임을 자임한다. 그들은 재현의 주체이지, 재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10대들은 말한다. “우리는 당신의 미래가 아니야, 당신의 관점에서 우리를 정의하지 마” MB 시대의 ‘조현오’가 만들어낸 좀비, < 부산행 > 스티브 연이 출연한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걸어 다니는 시체)>는 내게 난독 증을 일으킨다.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지칭하는 말 중에, ‘리빙 데드(living dead, 살아 있는 시체)’가 있는데, 죽을 만큼 고통스러우나 죽지 못하는, 그래서 자살만이 치료인 이 병의 특성을 표현한 단어다. 우울증과 좀비 상태는 삶과 죽음의 중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좀비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의 반영이다. 괴로운 상태지만 죽지는 않는.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끔찍한 상태는 없다. ]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아름다운 좀비 영화도 많다. 나는 좀비 영화 중에서 조시 하트넷이 나오는 2007년작 <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30 Days of Night)>를 가장 좋아한다. 아메리카 최북단 도시인 알래스카의 배로우는 매년 겨울이면 30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화면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어둠과 추위 때문에 더욱 아늑해 보이는 도시, 카페들, 좀비가 나타날 때마다 흰색 눈 위에 뿌려지는 선연한 붉은 피, 눈 내리는 거리의 가로등……. 영화를 보다 보면 30일이 지나서 해가 뜰까 봐 걱정일 정도다. 그런데 대개의 좀비 영화는 신체 변형의 공포를 활용한다. 피와 근육이 질척인다. 좀비를 두 종류로 나뉜다면 무한 증식하는 좀비와 그 숫자가 그대로 유지되는 좀비다. 감염, 오염, 흡혈 따위로 증식하는 좀비 영화에서는 극소수만 남게 된다. 최근 좀비 영화를 신자유주의 체제의 생존 법칙과 연결하여 분석하는 소위 ‘좀비 사회학’이 인기인데, 인간은 모두 좀비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을 보면서 이명박 시대를 이렇게 비판할 수 있는 영화가 또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행>에서 좀비가 되는 방식은 오염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 그럴 힘도 없다 - 상대방을 나랑 같은 처지로 만드는 것이다. MB 시대의 정신을 체화한 ‘MB 캐릭터’는, 이 영화의 최고 악역( 김의성 분)이 아니다. 그는 평범한 생존자다. 문제는 그 이상(以上)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MB 시대의 대표적 모델은 전 서울 경찰청장 조현오 씨다. 그가 저지른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등은 MB가 ‘지시’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MB는, 아예 그런 문제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다. 이 사건들은 조현오 개인의 과잉 충성의 결과였다. MB 캐릭터의 특징은 최소한의 근대적 인간관을 갖추지 못한 데다, 실력은 없으면서 셀럽 욕망이나 권력욕에 미친 사람들이다. 진보 진영과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다. 무식과 뻔뻔함은, 이들이 장착한 최고의 만능 아이언맨 슈트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실력이 있으면 굳이 비윤리적이지 않아도 되는 능력주의 사회다. 이들은 실력이 없으므로 한편으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편으로는 극도로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들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은 인생의 낭비다. 이 시대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약자가 사는 방식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최고의 자살률은 수치심을 버린 자들이 휘두른 자상의 결과다. 인사불성(人事不省) 상태에서 부끄러움 없는 사람의 활기(活氣)는, 그 자체로 흉기다. 한 마디로, 지금 이곳은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다. 정의는커녕, 의리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 평범한 사람도 오염된다. 오염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한국 사회를 기차 안에 압축해 두고 모두가 나쁜 사람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는 과정이 이보다 현실적일 수 있을까. 다시 쓴다. 이 영화는 보통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과정을 그린, 몸서리쳐지는 영화다. 다른 선택은 없다. 오염의 주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주인공 공유 나 마동석 도 구원받지 못하며, 나쁜 세력의 승리에 제단에 바쳐진다. 이 영화에서도 부정의에 오염되지 않을 두 명만 남겨준다. 역시 여성( 정유미 )과 아이( 김수안 )다. 이 영화를 부성 영화로 보는 것은 넌센스다. 스테이션 에이전트 < 스테이션 에이전트 >의 ‘난쟁이’ 그는 타자인가, 진정한 친구인가 <스테이션 에이전트(The Station Agent>(2003)의 주인공 핀은 내가 꿈꾸는 삶을 산다. 동네에 버려진 기차 한 칸이 그의 집이다. 관리해야 할 물건이 없는 간소한 삶. 우리에게도 익숙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장애인(난쟁이)’ 배우, 피터 딘클리지(Peter Dinklage)와 폴 벤저민(Paul Benjamin), 퍼트리샤 클라크슨(Patricia Clarkson)이 나온다. 토머스 매카시(Thomas McCarthy) 감독의 <스테이션 에이전트(역장)>는 그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각본상(감독이 직접 썼다)과 관객상을 받았다. 조용한 마을, 평범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핀을 좋아한다. 그와 차를 함께 마시고,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가족과 싸우고 연인과 헤어지고 갈 곳 없는 이들이 간혹 그의 기차 칸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핀은 마음씨 좋은 신부님, 의지할 수 있는 마을의 상담자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다. 왠지 나는 성별과 ‘외모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역할에 강하게 동일시했다. 나는 꼭 그였다. 나도 핀과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과 ‘같지 않다’. 그는 마을의 살짝 외곽, 숲 근처에 살고 있다. 그의 존재는 궤도 밖에 있다. 마을 사람(여성)들은 그를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먼저 그를 찾지, 그가 먼저 원하는 경우는 없다. 만일 그가 먼저 사람들을 원한다면, 관계의 법칙은 깨질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무언가 결핍이 있는 존재이고,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동경해 본 적이 없다. 주변 지인들은 내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해준다’. 그러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그들과 동급이 아니다. 나 역시 어떤 부분에서 ‘장애인’이어서, 그들 인생의 경쟁 상대가 아닌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핀(역장)을 편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과 같을 수는 없는 사람들, 자기 기준에서 ‘차이(모자람)’가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외이며, 편안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타자(他者, the others)라고 부른다. 타자는 억압받기도 하지만, 유사 종교적 존재로 존중받기도 한다. 지배와 피지배, 속(俗)과 성(聖),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서 모두 후자이되, 긴장이 덜하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이 만든 타자지만, 사람들은 그를 낭만화하고 신비화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타자의 위치에서 탈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의 관계 원리는 ‘나는 너와 다르고, 그것은 내가 결정한다’이다. 장애인으로 규정당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느 정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그들의 규범에 괴로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과의 차이의 문제를 글로 쓸 수도 있다.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이니까. 감독들은 왜 다들, 그토록 주체인가 근대성이라는 기차는 처음부터 균불등 발전을 의미했다. 이제는 불균등 발전은 극단의 양극화를 넘어, 지구 자체가 망하게 생겼다. 트럼프 같은 인간도 패닉 룸(반공호)을 잃을 판이다. 기존의 근대성을 고수하면 모두가 망한다는 진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자국의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아프리카 땅을 마구 사들이는 중국, 전쟁주식회사는 의뢰인에게 돈 대신 받는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는다. 가만히 앉아서 물과 식량을 잃는 사람들, 매일 매일의 내전, 피 묻은 다이아몬드, 녹아버리는 거대한 빙하, 죽은 고래 몸 앞에 든 80킬로그램의 비닐, 바다 위에서 사라지지 않은 스티로폼 부표, 고용 없는 성장……. 이제 기차는 계속 달릴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이제까지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던 여자, 아이, 자연, 장애인들을 기차 밖에 살게 하거나 생존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은 진정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여성과 아이, 동물은 오염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 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주체의 전복과 파괴, 변형이 상상력이다. 작품마다 자신을 부수는 소설가 정찬은 그의 걸작 「슬픔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 외부 필진의 원고는 영화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