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잉 업
- 감독
- 장민기
- 제작년도
- 2002
- 출연
- 차린, 신영웅
사진: " REMEMBERING DAVID BORDWELL "(Rataj-Berard 촬영), NYU Tish School of the Arts 지난 2월 29일에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David Bordwell)이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였다. 영화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보드웰이라는 이름이 낯설 수는 없다. 이론과 비평 및 영화사를 넘나들며 공저를 포함한 20여 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으며 한국에도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다. “영화 연구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는 영화의 내적 구조와 위상을 밝히는 일에 중요한 이론적 거점 노릇을 해왔다. 영화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는 것은 새삼스럽겠지만, 내게는 좀 더 각별한 편이다. 그의 책을 번역했다는 인연 말고도 여러 면에서 빚을 졌기 때문이다. 현대소설에서 영화로 전공을 바꾸면서 ‘문학적’ 틀이라는 자기 한계와 맞닥뜨려야 했던 내게 그의 책들은 영화형식의 독자성을 알려준 요긴한 길잡이였다. 최고의 영화 교과서라 일컬어지는 『영화예술(Film Art: An Introduction)』(1979)은 영화가 예술로서 갖는 위상에 눈 뜨게 했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규범과 다양한 스토리텔링 패러다임을 논한 『영화의 내레이션(Narration in the Fiction Film)』(1985)은 영화적 서사가 작동하는 내적 논리와 양식들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영화 스타일의 역사(On the History of Film Style)』(1997)는 제작 관행 및 기술과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변화해 온 영화 스타일의 다양한 양상들을 접하게 했으며 『포스트-이론: 영화학의 재구성(Post-Theory: Reconstructing Film Theories)』(1996)을 통해 영화가 관객을 끌어들이고 감정을 유도하는 구체적인 과정들을 알려주었다. 그 외에도 할리우드와 유럽, 아시아의 중요 감독들에 관한 그의 저작은 시대와 지역이라는 조건에 따라 다르게 현현하는 영화 스타일의 세계로 안내했다. 데이비드 보드웰의 저서 중 일부(개정판 포함) / 사진: " Books ", David Bordwell's website on cinema 다루는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그의 작업에서 공유되는 것은 영화의 예술성에 대한 옹호이다. 그에게 있어 영화는 자기만의 형식과 원리를 지닌 예술이며 영화의 예술성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 속에 존재한다. 그는 영화의 세부를 형성하는 규범과 원칙을 밝혀내어 영화가 예술형식으로 자리할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 스펙터클을 예술적 표현의 형태로 읽어내었다. 이러한 작업들의 지층에, 영화연구는 텍스트를 통한 사유가 우선되어야 하고 텍스트의 역사를 통해 정신의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책을 보면 그것을 쓴 사람이 보인다. 그는 어려운 이론적 용어로 독자를 현혹하거나 현란한 지식을 과시하지 않는다. 거대한 이론적 틀에 의지하여 영화현상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경향에 매 순간 저항했다. 그의 논의는 텍스트를 직접 분석하여 얻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지식에 의거한다. 스스로 형식주의자이기를 고집하며 고전적 정전을 찾는 일에 전념할 때에도 우선시한 것은 실제 분석이었다. 수많은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 검토에 기반하여 영화의 내적 질서를 벼리어내고, 그것과 관계하며 구성되는 지역적이고 역사적인 다양한 나이테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일에 몰두해왔다. 당연히, 다루는 영화들의 방대함에서 보드웰의 저작들은 가히 압도적이다. 더구나 그가 주요 저서를 썼을 때는 지금처럼 손쉽게 영상 자료를 얻을 수 없던 상황이었다. 스캔 기술은 물론이고 홈 비디오도 없던 시절에, 영화의 이미지들을 선명한 상태로 책에 담기 위해 어두운 극장이나 편집실에서 실제 필름을 스틸 카메라로 직접 촬영하고 보정하는 데 쏟았던 엄청난 노고에 관한 목격담도 전해진다. 영화형식의 비밀을 푸는 작업에 그가 기울인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막대한 시간을 투자하여 영화들을 분석하고 그 결과물을 명징한 언어로 전달함으로써, 직접 보고 확인한 것만이 지식으로 쌓일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학자라 할 수 있다. 사진: " A Celestial Cinémathèque? or, Film Archives and Me: A Semi-Personal History ", David Bordwell's website on cinema 2002년 11월에 지근거리에서 그를 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영화학회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강연을 했던 그는 엄정한 이론가나 날카로운 비평가라기보다는 영화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찬 시네필에 가까워 보였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엄밀한 분석을 펼쳐내었지만 그러한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게 들떠 있는 소년마냥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알아차린 ‘놀라운’ 영화형식의 세계를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다는 에너지로 가득한 그의 모습을 보며 느낀 것은, 그의 책들이 보여주는 정확성과 치밀함이 개인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간의 작업들이 지적 관심을 넘어서 영화에 바치는 우회적인 방식의 애정 고백임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시네필적인 열렬함을 잃지 않으면서 영화를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는 균형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론이 조화롭게 만날 수 있음을 보여준 꽤 예외적인 영화학자로 그는 내게 기억되어 있다. 영화를 향한 그의 사랑의 농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었던 듯하다. 1973년부터 2004년까지 일하던 대학 강단을 떠난 이후에 오히려 블로그나 비디오 에세이, DVD 컬렉션 등으로 반경을 넓히며 더욱 생산적으로 활동했다. 디지털 기술의 고속 성장으로 영화의 존재 방식이 더욱 복잡해지는 상황에서도 보드웰은 영화형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누락시키지 않으면서 영화 매체의 변화 가능성을 꾸준히 탐문해 왔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영화를 논한 학자들은 많다. 그러나 한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오랜 기간 영화를 향해 열정과 수고로움을 쏟은 정도와 깊이에 있어서는 보드웰을 능가할 자가 없어 보인다. 눈을 감기 며칠 전에도 자신의 블로그( davidbordwell.net )에 글을 썼을 만큼,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화와 함께 있었다. 영화가 당면했던 사회현실적인 조건과 문화적 위상에 주된 관심을 두게 되면서 한동안 그의 책들을 열어보지 않고 있던 차에 그의 부고를 접하게 되었다. 그처럼 독보적인 ‘영화주의자’를 다시는 만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허전함을 지울 길 없다. 늦었지만 그에게 존경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1976년, 전 덴마크영화박물관 본부 앞에서, 데이비드 보드웰. 사진: " A Celestial Cinémathèque? or, Film Archives and Me: A Semi-Personal History ", David Bordwell's website on cinema 마지막으로, 만약 우리가 현재의 우리를 사로잡는 영화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면, 그 호기심은 역사적 사고를 통해 충족될 수 있다. 오늘 일어난 일은 어제 일어난 일로부터 야기된다. 영화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영화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Finally, if we have any curiosity about the films that captivate us now, we can start to satisfy it by thinking historically. What happens today springs from what happened yesterday. By trying to understand film history, we better understand the movies of our moment. - 데이비드 보드웰(David Bordwell), " Doing Film History ", David Bordwell's website on cinema 오영숙(성공회대 동아시아 연구소 HK연구교수) l 영화가 공동체의 심리적 현실과 맺는 유의미한 관계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쓰고 있다. 『1950년대, 한국영화와 문화 담론』(2007), 『탈북의 경험과 영화 표상』(2013), 『근현대 한국영화의 마인드스케이프』(2024) 집필. 『진짜 눈물의 공포(The Fright of Real Tears)』(슬라보예 지젝, 2004), 『영화의 내레이션(Narration in the Fiction Film)』(데이비드 보드웰, 2007) 번역.
오래전 인간은 손으로 사냥을 하고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도구를 찾기 전까지 오랜 시간 그랬다. 한 쌍의 포크와 나이프가 입과 손 사이를 벌려 그 안에 식탁이라는 문화의 공간을 형성하기까지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폭력과 야만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그렇게 천천히 문명화의 과정을 밟았다. 미술가 안규철은 「손, 인간의 조건」이라는 글에서 한 인간의 생애 역시 인류의 문명화 과정과 닮아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젖을 떼고 처음 배우는 숟가락질은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기 위한 첫 규범이 된다. 숟가락질은 학교에 들어간 후 글씨를 쓰고 셈을 하는 방법과 때리거나 훔쳐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학습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그 지난한 훈련의 과정을 거쳐 인간은 손과 입 사이, 몸과 세상 사이의 “여백”을 얻는 것이다. 여백은 당연히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양육자에게 아이란 무엇보다도 밀착해 먹여 키워야 할 과제로서 존재하는 대상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난항을 겪는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존재만으로 자연스레 양분을 공급받다가 모체로부터 떨어져나온 뒤부터 자력으로 생명을 유지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밥을 먹는 행위는 독립된 주체로 홀로 선다는 것의 가장 원초적인 은유인지도 모른다. <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은 이 행위를 매개 삼아 모녀라는 관계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조망하는 영화다. 십여 년 전, 열다섯 살 채영은 섭식장애 진단을 받고 병동에 입원했다. 치료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거식증이 지나가자 폭식증이 찾아왔다. 엄마 상옥은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병의 근원을 이해하고자 씨름하는 시간을 보냈다. 김보람 감독은 원래 섭식장애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진행하다, 오랜 시간 섭식장애를 앓은 당사자인 채영을 만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이어트와 외모 강박이라는 익숙한 문법으로 이 질환을 읽으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거둔다. 대신에 채영 스스로 말하는 몸의 역사와 마음의 변화에 집중하며, 딸 채영과 엄마 상옥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루기로 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섭식장애라는 표면적 징후 대신에, 삶의 밑바닥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내면의 문제, 즉 가족이라는 복잡한 실타래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채영과 상옥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 오랜 시간 서로 말하지 않고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카메라 앞에서 우연히, 어쩌면 카메라 덕분에 비로소, 조금씩 꺼내어진다. 섭식장애를 처음 앓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채영은 당시에 두려움이나 고통보다는 온몸으로 확신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음식을 거부하거나 폭식을 하거나 구토를 하는 행위를 가장 적극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행위로 여겼다는 것이다. 상옥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는다. “각본을 수백 가지는 써봤는데 지금 네가 말한 각본은 참 뜻밖이네.” 젊은 시절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상옥은 1990년 이후 더 이상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역으로 이주해 대안학교의 사감으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데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다. 학교 특성상 그곳은 채영을 학교 구성원들과 함께 키우는 공동양육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관람할 무렵 나는 우연찮게도 비비언 고닉이 쓴 『사나운 애착』을 읽고 있었다. 평생에 걸친 어머니와의 애증을 다룬 이 자전적 에세이는 뉴욕 브롱크스가에 위치한 가난한 이민자들의 다세대주택을 배경으로 한다. 저자가 일평생 보고 자란 것은 엄마를 포함한 이웃 여성들의 삶이었다. 고닉은 타인들과 밀착된 그 어린 시절이, 그리고 벗어나고자 했으나 어느새 거울이 되어버린 엄마의 이미지가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채영 또한 남달랐던 유년 시절의 환경을 의미심장하게 복기한다. 채영은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서, 특히 그러한 공동체의 삶으로 자신을 이끈 엄마 상옥을 통해서 일찍이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한 환경이었다. 상옥은 주변을 돌보느라,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집중하느라, 어린 채영의 곁에 있어주지 못할 때가 잦았다. 세월이 흘러 카메라 앞에 선 채영은, 엄마가 상정한 기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막연한 불안이 자신을 오래 괴롭혔음을 털어놓는다. 당신의 삶이 실패였음을 인정하길 원했었다는 날선 말을 뱉은 후였다. 섭식장애를 앓는 환자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성별화된 질병이라는 점에서 이 현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 『명랑한 은둔자』를 쓴 캐럴라인 냅 역시 자신의 삶을 추락시킨 알코올 중독과 섭식장애를 어머니와의 관계에 연결 지어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러한 서사와 종종 조우하는 것이 아마도 완전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 여성의 삶에서 매 순간의 선택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의 표명이자 실패이기 때문이다. 채영과 상옥의 회고는 세대를 넘어 할머니의 시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돌이켜보면 몸과 마음을 억압당하는 시대를 살았던 채영의 할머니도 먹은 것을 스스로 게워내곤 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기 몸 하나밖에 없어서였다. 환경과 시대는 달라도 세상과 불화하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라는 최전선 위에서 부대끼고 고전하는 과정은 서로 닮아있다. 괴로운 기억도 날선 말들도 공동의 식탁 위에 올려지고 난 뒤에는 조금쯤 무게가 가벼워진다. 성인이 된 채영은 일을 하러 호주로 떠나고 상옥은 딸의 진정한 독립을 응원한다. 흥미롭게도 채영이 선택한 일은 타인을 위한 식사를 만들고 식탁을 준비하는 일이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누군가 낯선 이를 먹이는 일이고, 다른 존재가 무사히 일상을 유지하도록 돕는 일이다. 채영은 자신에게 요리란 조금 더 괜찮은 사람, 조금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말한다. 그 일 앞에서 도전과 실패를 감행하며 삶을 다시금 써 내려가는 채영의 모습은, 회복의 과정이란 결코 자기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실감케 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조용히 듣는 귀의 역할을 고수하기에 함부로 진단을 내리지도, 첨언하거나 평가하지도 않는 미덕을 지녔다. 그러나 고민과 결단의 순간들을 짐작하게 하는 편집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족사를 다루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흔히 취하는 전략에 비추자면 이 이야기는 사적인 정보를 무척 적게 말한다. 다큐멘터리가 결국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로 시선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그러한 선택과 집중이 이 영화를 여성들의 내면세계에 관한 보다 섬세하고 집요한 연구에 가깝게 만드는 것 같다. 재밌는 건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 어딘가 투명한 물음표가 계속 따라다닌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 피의 연대기 >와는 무척이나 다른 형식과 화법을 가졌는데도 그 인상만은 두 작품이 궤를 같이하는 느낌이다. 그건 영화가 지닌 시선이 정제되고 흐트러짐 없는 ‘서술자’의 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물을 대하는 카메라는 조용하지만 존재감이 꽤 있다.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때로는 갈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이야기를 듣는다. 신중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그 특유의 시선 때문에, 카메라가 관찰과 기록의 도구가 아니라 함께 질문하며 답을 구하는 ‘동행자’의 역할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실 이 카메라의 미묘한 존재감은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중요한 요소로 배치된다. 촬영 초반 일대일 상담에 응한 채영은 아직 카메라의 존재가 어색하고 낯설다. 지금 감정이 어떠냐고 인터뷰어가 거듭 묻자 채영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편함이 드러난다. 이 시퀀스는 의도했든 아니든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근본적인 고난, 상처를 지닌 타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해야 하고 환부를 들추어야만 하는 어려움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김보람 감독의 영화에는 그 어려움을 딛고 개진해 내는 힘 또한 있다. 영화를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 좋은 질문이 있는 한 카메라도 있고, 이 카메라가 언젠가는 양쪽 모두에게 답을 줄 것이라는, 어떤 믿음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영화가 완성되고 공개된 이후, 채영은 GV에서 영화를 통해 깨달은 사실 하나를 이야기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상옥의 눈빛이 그렇게 애틋한 줄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을 보아왔지만 스크린을 통해 새롭게 자각하게 된 엄마의 시선이다. 딸은 그 시선을 경유해 자신의 얼굴 또한 새롭게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중간에는 인서트컷으로 수영장 물속에 잠겨있는 채영의 얼굴이 잠시 등장한다. 이 이미지는 그가 최근 쓴 자서전 『이것도 제 삶입니다』의 표지로 사용된 사진이기도 하다. 눈을 감은 채영의 얼굴이 사뭇 편안해 보인다. 모녀 관계란 엄마의 뱃속에서 하나였던 두 몸이 별개의 개체로 분리된 직후부터 시작되는 분투의 여정이다. 채영은 이제 스스로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짐으로써, 새롭게 자각한 얼굴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숨쉬는 법을 배우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엔딩은 채영과 상옥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간단하게 차린 제사상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명복을 빈 뒤 상을 맞들고는 거실로 옮긴다. 죽은 부모를 위한 제사상은 살아있는 두 모녀의 아침식사를 위한 식탁으로 역할이 바뀐다. 이 식탁을 내리사랑의 은유로 읽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에 식탁이, 어쩌면 둘 사이의 공간이, 그렇게 언제든 임시적인 거처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가 그러하듯이, 식탁은 두 타인의 사이에 잠시 어떤 공간을 마련해준다. 너무 크고 거창하지만 않다면, 둘러앉은 이들이 이렇게도 차려보고 저렇게도 차려볼 여지가 있다면, 식탁은 예절과 격식의 자리만이 아니라 적당한 환대와 우정의 자리도 될 수가 있다. 네모난 식탁을 사이에 두고 채영은 상옥과의 관계에 대해 잠정적 결론을 내려본다. “평행성도 좋지, 나란히 가는 거니까.” 평행선이 그려지는 곳에서 두 존재는 억지로 겹치거나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에 서로를 두고서 오랫동안 같은 방향을 향해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비비언 고닉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지탱해줄 튼튼하고 평평한 식탁 같은 것. 어떤 가족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사랑이나 헌신이 아니라, 바로 그런 중간지대의 존재다.
< 지옥만세 >는 십대 소녀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의 로드무비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둘은 사는 게 지옥 같다. 가족도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 힘들다고 토로해봤자 약해빠졌다거나 너보다 더 힘든 동생을 배려하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학교 폭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둘은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몇 번이나 자살에 실패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을 받고, 선우도 나미의 뒤를 따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자살기도 중 나미는 따돌림을 주도했던 채린(정이주)이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복수를 위해 선우와 함께 서울로 향한다. 학교폭력, 자살기도, 납치와 그루밍, 사이비 종교집단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반전처럼 경쾌하고 엉뚱하며 발랄한 톤을 갖고 있다. 초성만 쓰면서 가볍게 주고받는 문자, 싸이키델릭한 록 스타일의 음악, 뮤직 비디오 같은 회상 몽타주씬들은 그러한 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앞의 나열된 소재를 표피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나미와 선우의 예상을 엇나가는 반응과 엉뚱한 선택들은 십대 소녀들이 자신의 고통의 기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관되게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지옥 같은 현실이 압도해 올 때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왜 자신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서로가 있고, 그렇기에 두 소녀는 지옥에 살면서도 생동감이 넘칠 수 있다. 자살에 성공할 방법을 역동적으로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들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처한 파국의 풍경은 자살 장소로 대변된다. 나미와 선우가 사는 곳은 온천 관광지로 유명했던 수안보이다. 한때 인산인해를 이루던 관광지는 그 영광을 잃어 점차 쇠락했다. 이제 이곳은 문 닫은 대중목욕탕들로 가득하다.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버려진 대중목욕탕은 자살하기에 좋은 장소다. 엄마에게 들켜 자살에 실패하곤 했던 나미는 선우의 도움으로 진짜 자살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자꾸 자살 도구를 트집 잡고 왕따 주동자인 채린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미의 태도는 그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죽을 만큼 괴로워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무력감에 놓여 있을 뿐이다. 선우에게 유서를 건네며 “그냥 아무 우체통에다 넣어줘. 운명처럼 어디든 닿겠지”라고 말하는 나미 대사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 종로에 도착한 나미와 선우는 어이없을 정도의 우연으로 채린과 마주친다. 무작정 종로를 헤매자던 나미의 전략이 성공에 이르게 된다. 잘나가던 채린의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낙원’이라 불리는 해외의 종교 집단 거주지로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채린은 엄마를 따라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나미와 선우는 채린의 얼굴에 ‘기스’를 내어 살아있는 지옥을 맞보게 해주기로 결심하지만 채린은 이미 가해자가 아닌 회개자의 얼굴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채린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며 나미와 선우에게 용서를 빈다. 나미는 채린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선우는 채린이 여전히 종교 집단에서 함께 살며 낙원을 가기 위해 경쟁하는 아이들 안에서 ‘여왕벌’ 노릇을 하며 따돌림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따돌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겉으로는 다정다감해 보이는 명호(박성훈)다. 명호는 사이비 종교 교주인 목사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조직을 이끌어 가고 있다. ‘낙원’으로 가려면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에게 받는 용서’의 점수가 가장 높기 때문에 채린은 이 점수를 받기 위해 나미와 선우에게 자신을 용서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영화는 어떤 존재와 사건이든 하나의 얼굴만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채린은 학교 폭력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며 종교집단의 납치폭력과 그루밍을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나미는 가해자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채린과의 관계에 있어선 피해자이지만 가해자 무리에 속해 선우를 향한 괴롭힘에 동조하고 외면해왔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선우는 피해자이고 다른 피해자를 잘 알아차리며 보호하려는 태도를 취하지만 나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미 엄마 식당에 대한 악플을 올렸다는 점에선 가해자이다. 나미와 선우는 피해자이지만 마냥 착하거나 약한 자들은 아니다. 취약한 상황에서 이상한 신념에 빠진 이들과 달리 나미와 선우는 그들의 친절함에 고마워하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않는다. 둘은 채린을 향한 복수의 여정에서 자신들뿐만 아니라 채린을 구해 나올 정도로 용기 있는 이들이다. 또한 나미는 선우와의 관계에서 회개했다는 채린에게 더 동일시하며 그의 위선을 알아채지 못해 선우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 정도로 자신을 성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때서야 영화는 회상 장면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여준다. 영화의 오프닝은 ‘황구라’라고 불리는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또래 무리들이 촬영한 것 같은 친밀한 카메라를 시뮬레이션 한다. 하지만 생일을 맞은 아이와 함께 즐겁게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던 장면은 곧 지옥으로 변한다. 이 영상이 사실은 학교폭력 피해자를 괴롭히는 영상 푸티지라는 것이 밝혀진다. 피해자인 아이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얼굴에 케이크를 맞고 괴로워하는 뒷모습만을 비춘다. 한 아이가 쓰러진 아이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지만 곧 무리의 부름에 그를 버리고 가버린다. 선우가 채린에게 연민을 보이고 공감하는 나미에게 실망할 때 나미의 회상 속에서 이 오프닝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이번에는 피해자 아이와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배신하고 가버린 아이의 얼굴이 모두 정확히 보인다. 피해자는 선우이고 버리고 가버린 아이는 나미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얼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더불어 나미는 자신이 선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외면했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다양하고 복잡한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해서 한 얼굴이 다른 얼굴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한다. 채린이 피해자의 얼굴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갖고 있는 가해자의 얼굴이 사라지거나 면죄 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채린이 가길 바라는 낙원은 이미 지옥이 된지 오래일 것이다. 명호가 돌보고 이끄는 아이들 공동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를 돌보는 따뜻한 분위기에 선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낙원행 티켓을 타기 위한 생존게임에 불과하다. 명호는 친절하고 관대한 젊은 종교 지도자처럼 보이지만 그 스스로 사기공모 범죄자이며 사기 피해자이다. 지옥과 낙원은 동전의 양면이다. 나미와 선우의 여행은 어쩌면 고립된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은 부재하고 도처에 지옥의 면모가 있기에 지옥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선 지옥 역시 낙원의 일면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고통을 알아봐 준 서로가 있다면 조금은 지옥을 견딜 수도 있을지 모른다. 친절해 보였던 어른들의 광기와 납치폭력에서 탈출하고 명호의 자살을 실제로 목격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꽂혀 있던 ‘낙원’ 엽서는 꽤 직접적인 은유가 된다. 현실은 바뀌지 않은 채 여지없이 돌아오자마자 괴롭힘을 당한다. 이번에는 서로가 있고 더 이상 죽고 싶어 하지 않으며, 가해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는 차이가 있다. 극복, 해방, 낙원 이런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방과 낙원은 곧 지옥이 될 것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선 지옥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가볍게 인정하며 “오키 오키”라고 답할 수 있는 태도, 적어도 죽지 말고 “지옥을 견뎌내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기들만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서로의 집으로 향하는 엔딩씬에서 나미는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가는 선우를 응시한다. 망원렌즈 촬영으로 거리와 초점이 왜곡된 쇼트에서 얼마 안가 선우의 뒷모습은 포커스가 나가 흐릿해지다 못해 빛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나미는 선우의 생존을 확인이라도 해보듯 다급하게 부른다. 가해자들이 별칭으로 부르던 ‘황구라’가 아닌 ‘선우’라고 분명하게 부른다. 포커스가 나가 있기 때문에 선우가 나미의 부름을 들었는지, 그가 되돌아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선우는 그의 부름에 응답하며 되돌아온다. 드디어 초점이 맞춰져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에 나미는 웃으며 “웰컴 백 투 더 헬, X발”이라 말한다. 다시 각자의 집으로 가는 나미와 선우의 얼굴 클로즈업이 교차한다. 오늘은 그의 이름을 불러 지옥을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