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안
- 감독
- 아소우 마나부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미즈노 미키, 구로키 히토미
나는 수집가였다. 그리고 구두쇠였다. 수집에는 돈이 드는 수집과 돈이 들지 않는 수집이 있다. 미취학 시절 금이라고 주워와서 빈 유리병에 모으던 식빵봉투용 철사심 끈은 공짜였지만, 길 건너 문방구에 새로 진열된 지우개를 손에 넣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구두쇠 수집가의 딜레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돈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옆 짝꿍이 우표를 자랑했다. 우표수집은 전염된다. 우표는 구매한 금액만큼 고스란히 우편용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구두쇠로서 최고의 수집 동기이며 핑계이다. 체신부는 한 달에 몇 번씩이나 취미우표를 발행하고 있었다. 주변의 재력 있는 아이들을 유혹했다. “철수야, 취미우표라는 게 있어. 어떤 우표는 나중에 엄청 비싸게 되팔 수 있대.” 그렇게 여러 명을 모았다. 취미우표를 발행하는 날이면 점심시간에 선생님 심부름으로 둘러대고 나갔다. 성내동 우체국을 부리나케 다녀오면 구매대행 수수료가 남고 그 몫으로 내 우표를 샀다. 그 고객들이 한 살 더 먹으면 다른 반으로 흩어졌고 거기서 또 자랑했다. ‘클럽에 대해 알리지 말라’는 파이트클럽의 규칙 같은 것도 없으니 날로 사업이 번창했다. 무슨 내용인지도 이해 못 한 채 모든 라디오방송의 채널 편성표를 수작업으로 작성하였고, 특정 작곡가 작품들을 연대기 순으로 테이프에 편집하던 1993년, 나는 ‘ 정은임 의 FM 영화음악’에 도착했다. 다른 방송들과 달랐다. 매주 출연한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더 달랐다. 영화는 그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의 글을 모으기 시작했다. 집에서 구독하지 않는 신문과 잡지는 도서관에 있었다. 복사비는 적은 돈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10년이 되니 복사 뭉치는 백과사전 분량이 되었다. 정성일 아카이브 인터넷이 생겼다. 대학 신입생의 필수 수강과목에 홈페이지 만들기 수업이 있었다. 네이버, 드림위즈, 하나포스, 천리안을 포함해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안전보건공단에서도 개인용 홈페이지 공간을 나눠줬다. 5~20MB씩 나눠주는 무료 공간을 긁어모아 '' 정성일 글모음 페이지''를 2000년에 만들었다.(seojae.com/critic) 스스로 자료를 찾기 위해 만들었던 목적이 컸다. 각 매체에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전제로 허락을 얻었고, 온라인 지면의 게재에 대한 계약이 따로 없었던지라 3년이 지난 출간물은 글쓴이에게 저작권이 돌아오는 것으로 암묵적 동의를 하여 업데이트하였다. 정성일 선생님의 추가 요청에 따라 복사금지기능을 추가했고, 2015년에 모바일 환경에 맞춘 개편을 하여 현재 1,926건의 글이 등록되어 있다. 월간 KINO 인덱스 페이지 1995년 창간한 영화 월간지 KINO는 예전에 봤던 내용을 다시 찾기 어려웠다. 특정 감독들의 인터뷰는 나중에 찾기 위해 따로 목록으로 정리해야 했다. KINO도 2000년 공식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KINO의 낱개 기사들을 유료로 판매했다. 하지만 제목도 순서도 검색도 엉망인 채였다. 잘 팔리지 않았는지 그 PDF 파일들을 2002년 무료로 공개했다. 총 2,948개의 PDF 파일과 PDF로 제공되지 않은 기사까지 인쇄본과 대조하여 2005년 인덱스 페이지를 오픈했다.(seojae.com/kino) PDF 본문검색은 네이버 블로그를 이용하고(blog.naver.com/kino1995), 인덱스 검색은 이글루스 블로그를 사용했다(kino99.egloos.com). KINO의 웹 부문 사업체였던 엔키노는 2004년 CJ 계열사로 편입된 뒤 2006년 운영 중단했으며 2007년 사업 청산되었다. 운영중단으로 2기가에 달하는 파일이 사라지고 나니 다운로드해두었던 PDF 파일들을 직접 인덱스 페이지에 걸려면 돈이 필요했다. 2년 뒤 기술의 발달로 스토리지 비용이 낮아지자 거대한 공간을 무료로 제공하는 업체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무료정책변경으로 skydrive, dropbox를 거쳐 지금은 archive.org를 저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은임 의 FM영화음악 팟캐스트 슬프게도 정은임 아나운서가 2004년 사고로 사망했다.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졌고 그녀의 아버님은 딸에 대한 사랑으로 녹음한 라디오 방송 테이프들을 3년 반 동안 민연홍 님이 파일로 변환하여 추모사업회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팟캐스트를 듣던 시기가 왔고, FM 영화음악을 쉽게 다시 들을 수 있도록 추모사업회의 파일을 기반으로 팟캐스트를 2010년에 만들었다.(seojae.com/podcast) 총 832개 16기가의 파일을 호스팅하던 추모사업회 홈페이지는 2016년부터 갑자기 접속되지 않았고, 저장 받아둔 방송파일들을 KINO PDF와 마찬가지로 archive.org로 옮겨서 비용 없이 제공하고 있다. 모두 개인적인 편의로 시작하여 이젠 한 달에 5천 원 가량의 유지비도 필요하지만, 이 페이지들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배우자를 만날 수 있었고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익힌 기술로 관련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육아로 여유가 없어서 다음 프로젝트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 또한 스스로의 편의에서 시작한 아카이브이겠지만 덩달아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게 될 것이다. 고마운 날들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필자가 씨네 21 기자로 일하던 1998년 9월 중순, 특이한 상영회가 열린다는 전갈이 왔다. 김수형 감독의 전화였다. 그는 1980년대에 < 산딸기 >, <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 > 등의 에로 영화를 연출했던 감독이며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스승의 대표작인 < 갯마을 >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사연은 이랬다. 당시 천리안 동성애자 모임 ‘퀴어넷’이 이태원의 어느 카페에서 김수형의 < 금욕 >(1976)이란 영화를 상영했고 이 자리에서 영화를 본 동성애 잡지 「버디」의 편집인들이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잡지에 실었으며 신촌의 한 카페에서 재상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사춘기와 청년기에 그의 영화를 동시상영 극장에서 곧잘 봤던 필자는 호기심이 동했으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인 김수형 감독은 다소 흥분해 있었다. 영화전문기자인 김영진은 이처럼 역사적인 자리에 꼭 기록자로 참석해야 한다는 게 그의 요지였다. 실제로 < 금욕 >은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영화였다. 1973년 < 바람아 구름아 >로 데뷔했던 김수형 은 이 세 번째 장편영화에서 자기 나름의 모험을 시도한다. 제작자가 원한 대로 그는 새롭게 에로티시즘을 가미한 멜로드라마를 찍을 작정이었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급진적인 시선을 담은 영화로 태어날 뻔한 미완의 가치 있는 시도가 거기 담겨 있었다. <금욕>의 여주인공인 패션모델 영희는 세 남자에게 성폭행당한 기억 때문에 패션쇼장에서 발작을 일으킬 만큼 몸과 마음이 다친 상태인데 부유한 이혼녀이자 화가인 노미애의 그림 모델 제안을 받고 노미애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사랑에 빠진다. 남편에게 학대받은 기억이 있는 노미애는 영희에게 동병상련을 느끼고 영희의 재활을 헌신적으로 도와준다. 당시 대다수의 한국 멜로드라마 영화 여주인공들이 남자들에게 상처받으며 전락하는 과정을 다뤘다면 < 금욕 >은 남자들에게 상처받은 여성들이 서로 보듬어줌으로써 아픔을 치유하고 넘어선다는 주제를 다룬다. 물론 이 플롯은 에로티시즘을 넣기 위한 구실이기도 하다. 영희와 노미애가 서로 마음을 보듬는 과정은 노미애가 영희의 몸에 바디 페인팅을 하거나 벌꿀로 영희의 몸을 전신마사지하는 초보적 에로티시즘의 형태로 묘사된다. 1970년대의 심의 기준으로는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면서 김수형 은 여성 주인공들이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나눈다는 설정을 플롯에 암시적으로 끼워 넣었다. 노미애의 집을 온갖 새장들로 가득 찬 공간으로 설정하고 새장의 이미지를 줄곧 화면 전경에 놓고 폐소공포증을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가운데 두 여성 주인공이 가학과 피학을 오가는 성적 교감을 나누는 전개는 제작자의 구미를 당겼을 것이다. 물론, < 금욕 >이 끝까지 당시의 금기를 밀어붙인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중반 이후 전개가 다소 상투적인 전개로 흐르는 가운데 영희는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남성 디자이너 준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와의 결혼을 꿈꾼다. 영희는 준이라는 완벽한 남자를 만나 나누는 성관계를 통해 강간의 충격을 벗어나 이성애적 사랑의 길로 다시 걸어 들어간다. 그런 영희의 선택을 비난하는 노미애의 태도는 감상적인 질투에 가깝다. 당시 잡지 「버디」의 편집진은 노미애가 영희를 붙잡을 때 “내 삶을 전부 너에게 줘버렸기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대사에 이 영화의 비의도적인 레즈비언 적 상상력의 올바른 정치적 태도가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금욕>이 레즈비언 영화의 계열에 들어갈 수 있다면 바로 이 대목 때문이다. 레즈비언이란 여자와 성교하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 인생의 가치 중심을 여자에게 둘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금욕>은 이성애주의로 점철된 한국영화의 한켠에서 레즈비언 적 시선을 한 줄 건져 올릴 수는 있는 셈이다.” 80년대 충무로 에로 영화 계보의 한 축을 차지했던 감독 김수형 은 < 금욕 >을 만들 때 29살의 나이였다. 미숙한 대로 이 영화에는 의욕 충만한 영화청년의 기질이 곧잘 드러난다. 새장 속의 새와 남성 지배사회 속의 여성이라는 유추는 뻔한 것이지만 일관되게 새장 이미지를 밀어붙이는 화면의 응집력은 꽤 힘이 있다. 불행한 여성이 또 다른 여성을 만나 구원을 얻었고 남자 때문에 그 여성을 버렸다가 다시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구조도 남성의 의지에 따라 여성주인공의 운명이 정해지는 멜로드라마의 관성을 깨는 것이었다. 영화의 말미에 영희는 다른 여자의 구애를 받는 준을 목격하고 다시 노미애의 집에 돌아오지만 노미애는 이미 자살한 뒤다. 영화 상영이 끝난 후 필자를 만난 김수형 감독은 <금욕>이 자기 의도대로 촬영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됐을 거라고 변명했다. 그는 “애초에 영화의 결말은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다른 여자를 찾는 노미애를 보여주며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검열 때문에 자신이 없어서 결말을 바꿨다. 제목도 본래는 ‘여자와 여자’였는데 개봉 당시 심의가 나오지 않아 <금욕>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어쨌든 검열과 영세한 산업구조의 이중고에 갇혀 있던 1970년대의 한국영화계를 감안 할 때, <금욕>은 우리가 기억할 만한 미완의 동성애 소재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