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했다
- 감독
- 아끼 까우리스마끼
- 제작년도
- 1990
- 출연
- 장 삐에르 레오, 케네스 콜리, 이모겐 클레어, 마이클 오헤건, 월터 스파로우, 토니 로어, 세르주 레기아니
내 생각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되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장르의 컨벤션 안에서 다양한 주제와 캐릭터들이 뛰놀기 때문에 비슷한 색깔을 가지면서도 그 정취가 제각각이다. 음식으로 비교하면 만두 같다. 밀가루 피는 다 비슷하지만 그 안에 고기, 김치, 두부, 야채, 새우 뭐 하여간 뭐든지 집어넣어 쪄버리면 만두이지 않은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속 내용물은 보지 않고 밀가루 피로 싼건 다 똑같다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장르 영화가 잘 안 나온다. 나와도 망한다. 가끔은 ‘한국형’이라는, 일단 붙으면 뭐든 후져보이게 만드는 수식어를 붙여서 등장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것도 대충 망한다. 아마 많이 안 만들어 봤으니 노하우도 적고, 노하우가 적으니 잘 만들어지기가 어렵고, 잘 만들어지기가 어려우니 관객들도 잘 안보고.. 의 악순환이 진행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독립영화에서 이런 작품들을 꾸준히 제작하고 경험을 가진 감독들이 상업 영화로 넘어가 규모와 재미를 확장시킨다면 아주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이것도 참 안 된다. 2000년대 초중반, 단군 이래 영화계에 돈이 가장 많이 몰렸다던 그때. 이런 시도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감독들은 상업 영화로 넘어오면서 더는 그런 장르의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종종 공포, 스릴러의 영화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왜인지 대체로 신인감독이 연출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결과물도 신통치 않은 것이 대부분. 한국에서 장르 영화는 정말 안 되는 걸까? 이돈구 감독의 < 팡파레 >(2019)는 그래서 참 반가운 영화였다. 상업, 독립 영화를 통틀어 이런 유의 장르를 만난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할로윈 밤. 제이( 임화영 )은 우연찮게 막 할로윈 파티가 끝나고 영업을 정리 중인 술집에 들어가게 된다. 데킬라를 한 잔 시켜서 마시고 있으니 2인조 형제 무장 강도가 들이닥쳐 제이는 인질이 된다. 그러다 동생 희태( 박종환 )은 우발적으로 가게 사장을 살해하게 되고, 양아치로 평생을 살아온 자신과 달리 전과도 없고 무려 사이버 대학까지 나온 집안의 기둥, 희태를 지켜야하는 강태( 남연우 )는 이 일을 무마하려 평소 알고 지내던 깡패 쎈, 졸라 쎄서 쎈이라고 불리는 쎈( 이승원 ) 형을 부르게 된다. 현장에 도착한 쎈은 시체를 토막 내 유기하기로 하고 자신이 자주 이용하는(무려 VIP 고객이란다.) 살인청부업자 백선생( 박세준 )을 또 부르게 된다. 이렇게 한 공간에 모이게 된 5명은 시체를 처리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한 후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생각처럼 일이 잘 안풀린다. <팡파레>의 재미 정도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영화를 좋아해서 맨날 비디오 가게를 들락거리는 삼촌이 유명하거나 볼 만한 영화는 이미 다 봤고 아무거나 표지만 보고 골랐는데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아무거나 표지만 보고 고른 영화에 해당한다. 유명하지도, 어마어마한 뭔가가 숨어 있지도 않다. 다만 한 공간 안에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다섯 명이 서로 해치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저예산 독립 영화이니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깡패, 살인청부업자, 사이버 대학을 나온 집안의 기둥 등 뻔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묘하게 나사가 빠져있거나, 기존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기는 재미가 있고 또 캐스팅이 상당히 잘 되어있어 연기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는 맛도 좋다. 특히 쎈 역의 이승원과 백선생 역의 박세준이 보여주는 능청스러운 모습을 상당히 즐겁게 보았다. 이돈구 감독은 데뷔작 < 가시꽃 >(2013)으로 주목받은 후 곧장 꽤 큰 규모의 차기작 < 현기증 >(2014)을 발표하며 여러 사회문제를 다소 강한 톤으로 그려왔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오로지 재미만 생각한 것 같은 <팡파레>를 내놓았다. 묘하게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의 행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흥미롭다. 앞으로의 활동이 궁금하다.
① 동명극장(東明劇場), 대보극장(大寶劇場) 1923년 조선인상공업자로 구성된 함흥상업회 산하 흥행단체 흥화조합(興化組合)에서 건립한 영화관이다. 연극 공연은 물론 함흥의 대표적인 집회장소로 활용되었다. 함흥의 3개 영화관이 경쟁하던 1932년 당시 동명극장의 입장원은 대인 33,667명, 소인 19,646, 금액 7,563원으로 함흥극장보다는 미치지 못하지만 진사관과 비슷한 수준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었다. (<咸興三映畵館七年度成績>, 《朝鮮新聞》, 1933.01.20) 1936년 함흥상업회는 흥화조합을 주식회사 동명극장으로 바꾸었다. 당시 극장운영을 맡았던 김영선연예부(金永善演藝部)는 극장 임대료로 한 주당 12원 50전씩 지불했다. ( <분규 거듭하든 동극(東劇) 문제 단락(段落)>, 《동아일보》, 1936.05.19) 1940년 들어서서 동명극장은 대보극장(大寶劇場)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이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성주(李成周), 지배인은 김하룡(金河龍)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② 진사좌(眞砂座), 진사관(眞砂館),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 함흥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극장으로 함흥부 본정에 있었다. 진사좌를 운영하던 시마네(敷根角市)는 함흥의 실업인으로 재목점, 운송점과 더불어 진사좌연예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1925년 5월 운영자 시마네(敷根角市)가 기존의 낡은 건물을 수리하여 확장하였다. 1927년 1월 진사좌는 문화연예사 직영의 영화상설관으로 전환된다. 이때 이름을 진사관으로 바꾸었다. 문화영화사는 경성 희락관 악장으로 이름이 높던 시라이(白石蘇山)와 마츠무라(松村英)가 진사관을 경영하기 위해 만든 회사였다. (<眞砂舘の老人優待>, 《朝鮮新聞》, 1927.05.14) 1930년 무렵 진사관의 흥행권을 인수한 쿠니이 (國井勝英)는(<咸興眞砂舘開業一周年>, 《朝鮮新聞》, 1931.05.31) 1931년 5월 개업 1주년을 맞아 낡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한다. 1931년 8월 신축 허가를 득하고 공사에 들어가 1931년 11월 새로운 건물이 완공되었다. 공사비는 6만원이었다. 이즈음 진사관은 쇼치쿠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廣告>, 《朝鮮新聞》, 1933.07.03) 진사관은 1940년대 들어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茂信)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함흥극장(咸興劇場) 1923년 자본금 15만원의 주식회사 함흥극장이 조직되어 이 자금으로 함흥부 대화정에 건립한 극장이다. 공사비 1만 6천여원이 들었다. 초기 운영자는 타마키(玉置省三)였으며, 1928년 4월부터는 츠지(辻平三)가 1년에 3천원 씩의 임대료를 내기로 하고 운영을 시작했다 .(<大咸興の展望>, 《朝鮮新聞》, 1933.07.03) 1933년 당시에는 닛카츠와 신코키네마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츠지(辻ヤス子)였으며 고바야시(小林豊三)이 지배인이었다. 총 75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명보극장(明寶劇場) 1940년 함흥부 소화정에 이기진(李基進, 창씨명 芝山基進)이 건립했다. 3층 콘크리트 건물로 함흥역 가까이 위치했으며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박노홍은 경성의 명치좌에 지지 않는 극장이라고 평한 바 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이기진, 지배인은 다케모토(武本光洋)였다. ⑤ 함흥문화극장(咸興文化劇場) 함흥부 소화정에 있었던 문화영화 상영관으로 객석은 200석이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오쿠야마(奧山歲一)였으며 지배인은 하야시(林英一)였다. ⑥ 원산극장(元山劇場), 유락관(遊樂館) 원산극장은 1921년 9월 원산부 천정(泉町)에 설립되었다. 개관 당시 일본 코우카츠(國活)와 제휴하였다. 이후 연극, 영화의 상영은 물론 각종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으나 1925년 11월 15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피해액은 6만 5천원이었다 .(<원산극장 전소(全燒)>, 《동아일보》, 1925.11.17) 원산극장이 있던 자리는 한동안 빈터로 있었다. 후쿠이(福井伊三郞)를 중심으로 주식회사 유락관이 설립되어 이곳에 극장건립이 추진된다. 1926년 11월 30일 건물이 완공되어 영업을 시작했고, 1930년 활동사진관 수좌가 등장하여 경쟁체제를 갖추게 되자 닛카츠와 쇼치쿠 등과 계약을 맺고 혁신을 꾀하기도 했다. (<大改革の元山遊樂館披露>, 《朝鮮新聞》, 1930.12.03) 1933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수좌와 합병을 꾀하지만 무산된다. (<元山の兩常設館合併問題具體化>, 《朝鮮新聞》, 1933.10.26) 일제말기까지 원산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있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후지사와(藤澤正人)이며 지배인은 고이즈미(小泉昇三)였다. 객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후 신영관(新映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⑦ 수좌(壽座), 대승관(大勝館) 원산부 경정(京町) 36번지에 있던 극장이다. 원산의 토목건축청부업자인 우메다(梅田市治郞)의 주도로 조직된 주식회사 수좌에서 1930년 설립했다. 도아(東亞), 데이키네(帝キネ)의 영화를 상영하며 유락관과 더불어 원산의 양대 일본인 영화관으로 등극했다. 1931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주식회사 유락관과의 합병 문제로 잠시 휴관을 했다. (<元山の毒座>, 《朝鮮新聞》, 1931.06.14) 1933년 주식회사 유락관과 합병 직전까지 갔으나 무산되었고 1935년 6월 21일 새벽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1935년 주식회사 수좌는 소실된 수좌의 재건을 추진한다. 새롭게 건축된 극장의 이름은 대승관(大勝館)이었다. 극장 신축을 위해 주식회사 수좌는 자본금을 12,100원에서 20,000원으로 늘려 주식회사 대승관으로 전환한다. 1943년 당시 대승관의 흥행주는 고이즈미(小泉昇三), 지배인은 요시오카(吉岡玉男)이었다.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⑧ 원산관(元山館) 원산부 북촌정에 건립한 활동사진관으로 1928년 1월 23일 구정을 맞아 개장했다. 1927년 1월, 원산시영회(元山市榮會)의 알선으로 공회당 겸 극장을 짓기로 하고 노기만(盧紀萬) 등 원산 거주 조선인 실업가들이 발기하여 조직한 주식회사 원산관이 설립을 맡았다 .(<『원산관』 발기>, 《중외일보》, 1927.01.20) 원산관의 흥행주는 보통 주주총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설립 이후 김창준(金昌俊) 등이 맡아 운영했다. (<원산관 쇄신>, 《중외일보》, 1930.03.30) 흥행주인 김창준은 1930년 원산관 산하에 원산관연예부를 조직하여 연극 공연 등을 펼쳤는데 호응이 좋아 인근 함흥의 동명극장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졌다. (<원산관연예부에 초차관(初次舘) 외 출연>, 《중외일보》, 1930.10.04) 1933년 3월 원산관에서는 원산 최초로 토키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자는 김낙진(松平洛鎭)이며 660개의 객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방 후 원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⑨ 희락관(喜樂館) 흥남읍 구룡리에 위치한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38년 12월 흥남의 교통사고 기사에서 사상자들이 희락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조선질소비료회사 사택으로 가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면 관객의 대부분이 조선질소비료회사의 사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남 뻐스열차 충돌사건 상보(詳報)>, 《동아일보》, 1938.12.06)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에다(前田長太郞)였으며 지배인은 삼촌건삼이었다. 5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⑩ 흥남관(興南館) 흥남읍 천기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경성 중앙관의 흥행주인 오이시(大石貞七)이며 지배인은 가메야마(龜山嘉介)였다. 총 5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흥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⑪ 소화관(昭和館) 흥남읍 송상리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11월 극단 고협이 이곳에서 공연 중 극장 2층이 붕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와타(砥綿啓太), 지배인은 타치바나(立花三郞)였다. 총 87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⑫ 흥남문화영화극장(興南文化映畵劇場) 흥남읍 호남리에 있던 문화영화 전용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카도타니(門谷淸), 지배인은 마츠오(松尾辰次郞)였다.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⑬ 용흥극장(龍興劇場) 흥남읍 용흥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野虎雄)였다. 9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단천좌(端川座) 단천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오모토(大元貞珪), 지배인은 시라키(白木義信)이었다. 742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⑮ 단천극장(端川劇場) 단천읍 내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설립자는 함흥출신의 최두진(崔斗鎭)으로 흥행계통에서 일하던 인물이다. (<흥행계에 권위 단천극장주 최두진(崔斗鎭)씨>, 《동아일보》, 1939.10.03) 1943년 단천군총력연맹에서 막간 강연을 추진할 장소로 단천좌와 함께 지목된 곳이다. 하지만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영화관이 아닌 연극장으로 구분되었거나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⑯ 혜산극장(惠山劇場) 혜산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다(安田隆一)이며 객석수는 455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신포극장(新浦劇場) 신포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야마(中山賢一)이며 객석수는 400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고사관(高砂館) 북청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康弘)이며 좌석수는 489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홍원좌(洪原座) 홍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홍춘선(洪春善, 창씨명洪村春善)이며 4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⑳ 흥락관(興樂館), 고원극장(高原劇場) 흥락관은 고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1936년 12월 23일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 등이 합자하여 7천여원의 경비를 들여 만들었다. 고원을 대표하는 장소로 뒷날 고원극장(高原劇場) 으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교우코쿠(岐谷亮吉)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1. 삼우회관(三友會館) 천내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노(水野長一郞)이며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2. 영흥극장(永興劇塲) 1935년 10월 12일 영흥군에 건립된 극장으로 개관 당시, 함흥의 동명극장을 경영하던 김영선연예부가 운영을 맡았다 .(<영흥극장 수(遂) 개관>, 《동아일보》, 1935.10.13)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연극장으로 구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자료] ≪매일신보≫, 1936.12.29. 고원(高原)에 극장, 입삼일(廿三日) 개관 【고원】 약진도상에 잇는 고원은 발전 여지가 풍만하여 점차 도시의 기풍을 정(呈)하고 잇다. 그러나 아직 오락기관이 업서 간혹 순업흥행단이 차저주면 일대(一大) 울회(鬱懷)를 느끼든 시민의 위안이나 되엿지만 겨우 가설극장에서 풍우설한(風雨雪寒)이면 불편무비(不便無比)하든 바 시내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씨 등 유지 제씨가 합자하야 약 七천여원의 경비로 흥락관(興樂館)이란 극장을 건축하엿는데 거(去) 二十三일에 낙성식을 거행하고 동일(同日)부터 三일간 개관기념을 하게 되여 매야 입장객에게 추첨권까지 배부하여 좌기와 여(如)한 경품을 수여하엿다. 一등 一인 백미 一叺 二등 一인 궤종시계 一座 三등 一인 경대 一座 (사진은 건축된 흥락관) [자료] ≪朝鮮新聞≫, 1931.06.14. 元山の壽座 開館に决定 (元山)元山壽座は活動常設遊樂館に對抗し優秀な活動や芝居等を上映興業してフアンを喜ばせるたが突如休館遊樂館に合倂問題が起り一時は一般から成行を注視されてるたが重役會議で開館續行に決定し今後三村敏郞氏が經營の任に當り從來の東亞,帝キネの外新に日活とも特約嶄新なる映畵を上映してフアンの待望にそひ開館隆盛を期することゝなつた [자료] ≪중외일보≫, 1927.01.26. 본보(本報) 독자위안(讀者慰安) 대흥행, 함흥 진사좌(眞砂座)의 개관 기념 함흥에 잇는 극장의 효시로 일반사회에도 공헌이 만튼 진사좌는 근래에 미미(微微) 부진 중에 잇든 바 래(來) 二十五일부터 문화연예사의 직영으로 상설관이 되얏는데 기(其) 벽두로 래(來) 二十五일 야(夜)에는 봉황의 면류관을 봉절할 터이라 하며 래(來) 二十七일 오후 七시반부터는 본보 독자를 위하야 三일간 무료로 흥행하리라는데 단(但) 하족료(下足料)만 받으리라더라(함흥) (우대권은 欄外에) [자료] ≪시대일보≫, 1925.11.20. 원산극장 전소(全燒) 손해(損害) 六만원 【원산】 원산 오락기관의 하나로 또 원산의 유수한 건물인 원산극장은 十五일 오전 三시 四十분에 발화되어 소방대의 전력을 빌엇으나 겨우 五시 三十분에 소화되어 극장은 전소되고 인가(隣家) 二三동까지 소화되엇는데 손해는 약 六만원이라고 [자료] ≪매일신보≫, 1918.10.29. 함흥 활동상설 개관(活動常設 開館) 금춘(今春) 이래 신축 중이던 만세관(萬歲館)은 유유(愈愈) 기(其) 내부의 설치 등이 완성되야 十월 二十五일 야(夜)부터 개관한바 비상한 호평을 박(博)하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5.03.12. 동명관(東明舘) 기념 【함흥】 함흥부 내에서 오직 하나만인 군선인 경영 영화상설관인 동명극장(東明劇場)은 수난에 수난을 거듭하야 이제 개관 八개년 기념으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지난 九일 함흥 일반 유지를 춘경원(春慶園)에 초대하야 간담회를 개최하고 고급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저렴한 요금으로 공개하엿다는 바 지금은 함흥부내에서 다른 영화관에 손색이 없을만큼 모든 설비를 하엿다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0.04.28. 흥남에 각 극장 수입, 四개월간 六만여원 【흥남】 지난 四월부터 七월까지 四개월간 흥남읍내 각 연극장에서 흥행한 활동사진과 연극들의 관람료금을 조사한 통게 수자는 六만四천五백六원 五十전으로 이에 대한 인원수는 一六六,七三二명이라 한다. 작년 동기에 비하면 약 二활 증가라 한다.
부산에는 1900년 이전부터 극장이 존재했다. 1900년대~1910년대에는 행좌, 송정좌, 변천좌, 부산좌, 동양좌(이후 대흑좌[大黑座]), 질자좌, 욱관, 보래관, 초량좌, 행관, 상생관 등 여러 곳에 극장이 난립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활동사진관을 중심으로 극장이 정리, 재편되었다. 해방 전까지 존속하고 있던 극장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극장과 영화관에 대해서 살펴보자. ① 행좌(幸座), 행관(幸館), 소화관(昭和館) 행좌(幸座)는 부산 남빈정에 있던 극장이다. 1903년 발행된 「부산항시가 및 부근 지도」에 송정좌(松井座)와 더불어 그 위치가 표기되어 부산 지역의 가장 오랜 극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1904년, 부산에서 최초의 활동사진을 상영한 이 극장은 1910년대 들어 활동사진이 큰 인기를 끌면서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신축되는데 그 이름을 행관(幸館)이라 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부산의 일본인 실력자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였다. 1915년 12월 개관한 행관은 비슷한 시기 활동사진전용관으로 전환한 보래관이나 상생관에 밀려 고전했다. 하지만 1917년 하야가와연예부가 직영하고 이어 1919년부터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萬活)에서 직영하면서 부산 흥행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만카츠 특파원으로 부산으로 건너왔다가 이후 행관을 운영하게 된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는 행관을 중심으로 일본의 중소프로덕션의 영화를 배급하면서 조선흥행계에 큰 주목받았다. 하지만 행관은 개관 15년 만인 1930년 11월 10일, 영화 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큰 피해를 입은 사쿠라바 후지오는 자본금 10만원의 주식회사 사쿠라바상사를 세우고 지상 3층 규모의 최신 영화관인 소화관(昭和館)을 지어 사업을 확장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쿠라바 후지오, 지배인은 사쿠라바 토시오(櫻庭敏雄)이며 1,0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 그 이름을 조선극장으로 바꾸었다. ② 부산좌(釜山座) 1907년 7월 15일 부평정에 만들어진 극장이다. 부산의 대표적 실력자인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를 중심으로 일본인 유지들이 만든 부산연극합명회사에서 설립했다. 개관 당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극장으로, 회전무대를 갖춘 최신의 설비를 갖추었으며 다양한 공연은 물론 활동사진도 상영되었다. 1923년 3월 22일 화재로 소실되어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③ 보래관(寶來館) 1914년 무렵 부산부 행정에 개관한 극장이다. 개관 초기에는 라쿠고(落語)와 같은 연희를 공연하는 요세(寄席)로 활용되었으며 흥행일수도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5년 1월 운영자가 고노(小野)에서 호소미(細見)로 바뀌면서 연중무휴의 흥행을 천명했고, 그해 3월 경성의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텐카츠회사의 필름을 공급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으로 이용되었다. 1916년 12월 27일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었고 오사카에 근거지를 둔 스기모토(杉木)상회가 직영하게 된다. 1924년 무렵에는 오카모토(岡本松造)가 운영자로 이름을 올렸다. 1930년 10월 8일에는 영화상영 도중 필름에 불이 붙어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다. 1937년 상생관과 함께 건물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신축을 명령받고 1938년 10월 다시 신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와사키 다케지(岩崎武二), 지배인은 이와사키 모모타로(岩崎桃二郞)이다. 객석수는 총 952석이었다. 해방 후 국제영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④ 변천좌(辨天座), 상생관(相生舘) 변천좌는 1912년 무렵 부산부 본정에 들어선 요세(寄席)이다. 1914년 무렵 좌주는 교야마(京山花丸)였다. 활동사진의 인기가 비등하면서 변천좌는 활동사진관으로 개축을 꾀한다. 1916년 11월 1일 활동사진관 개업을 하면서 이름을 상생관으로 바꾸었다. 개관 초기 닛카츠영화를 상영하던 상생관은 1922년부터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으며 1925년 쇼치쿠와 공동경영을 시작하며 쇼치쿠 만선(滿鮮) 봉절장이 되었다. 이에 맞춰 당시 관주인 아라이(新井幸吉)는 극장 개축을 추진하여 2개월의 공사 끝에 1925년 11월 15일 새롭게 개관하게 된다. 1933년 11월 무렵 상생관의 관주는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이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 역시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 지배인은 미쯔오 타다오(滿生忠雄)이었다. 좌석수는 총 805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사진] 변천좌에서 이름을 바꾼 상생관 ⑤ 국제관(國際館) 부산부 안본정(岸本町)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1920년 8월 22일 자본금 20만원, 불입금 13만원의 주식회사 국제관에서 설립했다. 대표는 기노시타 모도지로(木下元次郞)이다. 설립 당시 부산지역의 가장 호화로운 극장이었기에 영화상영 외에도 연극장으로 활용되었으며 부산에서 조선영화가 주로 상영되던 곳이다. 1929년 2월 27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⑥ 유락관(遊樂館) 부산부 좌천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7,500원 규모로, 부산흥산주식회사가 1921년 12월 11일 세웠다. 대표는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였다. 1932년 1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태평관(太平館) 부산부 행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으로 1922년 설립되었다. 1923년 부산좌가 소실된 이후 부산의 대표적인 연극전용극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37년 11월 20일 개축되었으나 1943년 11월 19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사진] 부산 태평관 사진 ⑧ 수좌(壽座) 부산부 목도(牧之島, 지금의 영도)에 있던 극장이다. 1924년 목도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극장설립을 추진하여 1924년 3월 6일 덴도(田頭孝一)를 조합장으로 하는 수좌경영조합이 설립했다. 1926년 행관을 경영하던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가 임대하여 제2행관(第二幸館)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1932년 다시 수좌라는 이름으로 복귀 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미가(富賀四郞)이며 객석은 총 341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중앙극장(中央劇場), 대생좌(大生座) 부산부 초량정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1929년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와 가나모리 신기치(金森新吉)가 출원하여 1만 4천3백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2층 규모로 만들었다. 같은 해 7월 22일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중앙극장은 당대 유명 사기꾼인 호리가와(堀川辰吉郎)의 사기행각에 말려들어 1934년 경매에 붙여졌으며 상생관 흥행주 미쯔오(滿生峯次郞)가 낙찰 받아 이름을 대생좌(大生座)로 바꾸었다. 이 사건은 원 중앙극장 소유주 가나모리가 소유권 이전 말소 소송에서 승소하며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대생좌라는 이름은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 일본인 극장이던 이곳에서는 1939년 5월 극연좌가 공연한 적이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기시타(杉下末次郞)이며 총 498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⑩ 부산극장(釜山劇場) 부산부 서정(西町) 1정목에 있던 극장이다. 1934년 11월 5일 개관했다. 가부키를 공연할 수 있는 대극장으로 건축되었다. 연극전용극장이었지만 가끔씩 영화도 상영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영화관으로 활용되었다. [사진] 부산부 서정 1정목에 위치했던 부산극장 ⑪ 대화극장(大和劇場) 부산부 수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42년 건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이조(西條貞利), 지배인은 고야마(小山秀一)이며 객석은 총 5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환서좌(丸西座), 앵관(櫻館) 1910년대 이전부터 마산에 있던 극장으로 각종 연예물과 활동사진이 상연되었다. 1925년 당시 지배인이던 무라카미(村上竹次郞)가 천여원의 비용을 들여 내부와 외부를 수리했다. 1932년 자본금 2만원, 불입금 2만원의 마산연예주식회사가 영화관 신축을 위해 매수하여 1933년 5월 마산 경정 3정목에 앵관이라는 극장을 짓게 된다. 영업은 오오츠카(大塚寅吉)가 맡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미타(住田春三)이며 객석 수는 79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도좌(都座), 마산좌(馬山座), 마산극장(馬山劇場) 마산부 도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0년대 설립된 극장으로 보인다. 1918년 활동사진상설관으로 개수되었다. 1922년 무렵까지 영화 상영내역이 확인된다. 이후 마산좌(馬山座)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산좌는 1932년 개축하면서 그 이름을 마산극장으로 바꾸었다. 혼다(本田槌五郞)가 건립하였다. 1941년 극장 일부를 수리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⑭ 수좌(壽座), 공락관(共樂館) 수좌는 구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극장이다. 1915년 구마산 지역민들이 극장설립을 추진하였으며 1916년 3천원 예산으로 극장을 세우기 위해 주식을 발행하여 조선인 70여명, 일본인 43명으로 주주를 구성하였고 1917년 10월 구마산 지역의 수정에 극장을 설립하고 이름을 수좌라 지었다. 1917년 10월 20일 개관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사용하던 극장이었다. 하지만 1932년 9월 마산경찰서에서는 장내의 협착, 설비의 부패 등을 이유로 휴관을 명령하고 새로운 극장의 신축 출원을 받았다. 그 결과 마산극장 주인인 혼다(本田槌五郞)가 출원한 극장 설립안이 인가 받아 1935년 구마산 석정 64번지에 공락관이라는 영화관이 만들어진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4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봉래좌(蓬萊座) 통영읍 대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4년 쓰야마(陶山美賀藏)를 중심으로 주식을 발행하여 설립했다. 1931년에는 하시모토(橋本米吉)가 운영하며 영화관으로 활용했다. 1938년 이후 낙후한 상태로 폐쇄되었던 봉래좌는 1939년 신축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하시모토(橋本公博)이며 50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통영좌(統營座) 통영읍 길야정에 있었던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27년 다케타(竹田應吉)가 조합장을 맡고 있었으며 1936년 주주간의 분규로 문을 닫았다. 1937년 봉래좌의 운영자 하시모토가 운영을 맡으며 정상화 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무라카미(村上善藏)이며 48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영좌(榮座) 경남 진주의 매립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1914년 6월 24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고야나기(小柳藤介) 등 진주의 유지들이었다. 개관 1년 후 경남지역의 유력자인 하자마(迫間房太郞)의 땅에 타구치(谷口秀楠)가 부산 행좌를 이전하여 극장을 새로 짓게 되자 활동을 멈췄다. 1917년 해체되었다. ⑱ 진주좌(晋州座), 진주극장(晋州劇場), 동보영화극장(晋州東寶映畵劇場) 1922년 진주부 영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좌조합에서 설립했다. 설립 이후 오랫동안 진주의 유일한 흥행장이었다. 1936년 2월 서종숙(徐宗淑)이 인수하여 낙후한 극장을 최신의 영화관으로 개축했다. 1940년 동보영화사의 직영으로 바뀌어 이름도 진주동보영화극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941년 10월 동보측이 손을 떼면서 서종숙 단독으로 극장을 경영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종숙(창씨명 平山宗淑)이며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삼포관(三浦館) 진주부 금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의 실업가 미우라(三浦仁八)가 1936년 7월 4일 건립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요시(三吉範夫)이며 객석수는 515석이었다. 해방 후 이름을 동명극장(東明劇場)으로 바꾸었다. ⑳ 진해좌(鎭海座), 묘락좌(妙樂座) 진해좌는 진해읍 국천정(菊川町)에 있던 극장으로 1915년 이전에 설립되었다. 1930년 3월 진해 창고에서 영화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소학생 백여명이 소사한 사건이 발생하자 낙후한 시설의 진해좌는 영업 중지 상태가 되었다. 진해좌의 소유주 데즈카(手塚松一)는 극장을 신축하기로 하고 1만원의 경비로 활동사진관을 건설하게 된다. 새롭게 건설된 활동사진관의 이름은 묘락좌(妙樂座)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데즈카이며 4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이후까지 존속했다. 21. 밀양극장(密陽劇場) 밀양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11월 16일 가나모리(金森新吉)가 밀양역 앞에 설립했다. 1929년 밀양 성내에 조일극장(朝日劇場)이 설립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22. 조일극장(朝日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극장이다. 밀양성내동지회에서 세웠으며 1929년 2월 4일 개관했다. 1939년 3월 밀양의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있었다. 1939년 12월 당시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조일극장 옆에 밀양영화극장을 설립하면서 문을 닫은 듯 보인다. 23. 밀양영화극장(密陽映畫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영화관이다. 1939년 12월 밀양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세웠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카미(水上至海)이며 2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4. 삼천포극장(三千浦劇場) 삼천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사천군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 것으로 보아 1939년 이전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가와(白川晃)이며, 27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5. 구포극장(龜浦劇場) 구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필름손실방지와 사고방지를 위해 전국의 영사기를 조사했을 당시 한 대의 영사기로 영사하여 배급정지처분을 받았다. 당시 흥행주는 하라구치(原口淸見)였다. 293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6. 김해극장(金海劇場) 김해읍 대화정에 있던 극장이다. 1929년 김무일(金武日)과 배봉을(裵鳳乙)이 약 8천원의 공사비로 제작하였다. 건평 51평 2층 규모로 9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케시(武伺吉恒)이며 4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옛 창고를 연상하는 낙후된 시설이었다. 27. 거창좌(居昌座) 거창읍에 있었으며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전상길(全相吉, 창씨명 酒井相吉)이다. 그는 양조장 등을 거느린 거창지역의 대표적인 실업인이었다. 지배인은 타마야마(玉山榮秀)이며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8. 울산극장(蔚山劇場) 울산읍 성남동에 있던 극장이다. 1920년대 만들어진 낡은 극장이 울산 역전에 있었는데, 당지 유지들인 김재문 외 5인의 발기로 1936년 현대식 건물로 신축이 추진되었다. 군에서는 1만 5천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극장을 공회당의 성격으로 활용하려 했다. 1937년 9월 1일 낙성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이(白井叶), 지배인은 니시가와(西川康南)였다. 객석은 7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29. 사천극장(泗川劇塲), 국민좌(國民座) 경상남도 사천읍 내에 있는 극장으로 고바야시(小林齊吉)가 1만원의 예산으로 지었다. 1938년 9월 12일 개관했으며 외관은 2층 양옥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는 1939년 방공영화상영회 등이 열렸다. 1940년대 이름을 국민좌(國民座)로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달오(창씨명 金村達五)이며 객석은 300석이었다. * [사진](상단) 부산부 행정에 위치했던 보래관 [자료] 《매일신보》, 1930.03.01. 중앙극장 신축낙성(洛城), 근일 개관할 터 【부산】 작년 오월 일일 고(故) 대지충조(大池忠助)씨와 밀양 금삼신길(金森新吉)씨가 출원한 부산 초량정 중앙극장은 동년 십일월 이십일일 경비 일만 사천삼백삼십사원으로 공사에 착수하여 신축 중이든 바 일전에 준공되었음으로 당국의 검사가 맛치는데로 근간 개관하리라더라. [자료] 《매일신보》, 1937.07.10. 신축 울산극장, 삼십일경 준공 【울산】 신축 중의 울산극장은 삼십일경 준공케 되야 당일 성대한 낙성식이 잇스리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1.03.23. 방어진(方魚津)극장 전소(全燒) 【부산지사전화】 이십이일 오전 일시경 경남 방어진읍(方魚津邑) 방어진극장으로부터 불이 일어나 목조 극장 한 채를 전소하고 동 이시 반에 진화되었다. 손해는 5만원이고 원인은 전날 밤 객석에서 사용한 화롯불 건사를 잘못하야 화로로부터 이러난 것으로 판명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3.22. 김해에 극장, 불원간(不遠間) 준공(竣工) 경남 김해군에는 아즉 극장설비가 무(無)하야 매양 차종(此種)의 집회가 유(有)한 시(時)는 곤란을 만히 당하야 옴으로 이에 향의(向意)한 당지 청부업자 배봉을(裵鳳乙)군은 읍내 서문통에다 극장 신축을 벌서 수월 전부터 착수하야 공사에 착착 진행하얏슴으로 금후 일주간이면 준공하야 도당국의 검사(檢査)를 경(經)한 후 일반 사용에 제공하겟다하며 건평은 오십일평임으로 이층 합하면 약 구백명의 수용을 행(行)할지며 총공비(總工費)는 팔천원을 요(要)하얏다더라. 【김해】 [자료] 《동아일보》, 1935.08.19. 구(舊)마산에 극장 【마산】 문제 중에 잇든 구마산의 극장 신축의 건에 대하야 오래전부터 부민의 관심을 끌어오든 바 요지음 와서 부내 도정(都町) 팔번지 본전퇴오랑(本田槌五郞)씨에게 극장 신축 인가가 낫다고 한다. 장소는 석정(石町) 육십사번지 전(前) 마산구락부(俱樂部) 폐터라는 바 건평 백이십평에 방화식 대용(防火式 代用) 콩크리트 이층 총공비 지료 합하여 일만 오천원이라 하며 내부는 역시 일본식으로 다다미를 깔고 이층에는 긱연실(喫煙室)까지 설치하리라는데 공사는 오는 이십일에 착수하여 십일월 하순경에 준공하리라고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7.09.07. 울산극장 준공 【울산】 약진하는 울산으로 우금 극장 한 개가 없엇음을 한탄한 당지 유지로 극장조합을 조직하야 금춘 이래 구역전(舊驛前)에다 총공비 이만여원으로 공사에 착수 진행중에 잇던 바 드디어 금번 준공되어 지난 1일 신극장 내에서 관민 다수를 초대하야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는 바 신설된 극장은 내외관 설비가 완전하야 『토-키』 발성기게 등도 대도시 일류 극장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하며 외관에 잇어서도 명랑한 맛이 잇는 모던 건물이라고 한다. (사진은 울산극장) [자료] 《동아일보》, 1937.06.30. 의령(宜寧) 공회당 착공 【의령】 경남 의녕에서는 일정한 공중의 집회장소와 또는 극장 등속이 없음을 일반이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오든 중 작년 가을부터 임(林) 의녕군수의 주선 하에 유지 이명후, 이태희, 이종덕(李明厚, 李泰羲, 李鍾德) 삼씨의 의연금이 모집되어 공사비 오천원으로 의녕 신시장통에 의령공회당을 건축케 되어 멀지 안흔 시일에 준공이 되리라는데 해 공회당이 준공되면 의녕 발전에 한층 더 이채를 증가하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0.02.05. 밀양성내(城內) 소화(小火) 【밀양】 밀양군 성내 조일극장(密陽郡 城內 朝日劇場) 압 밀양은행 소유 가옥에 잇는 박경모(朴景某)씨의 소실 장씨(張氏)의 부억에서 지난 초이일 오후 열시경에 불이 나서 집 처마위로 타올라가는 것을 그 이웃에서 풍물을 치고 놀든 사십여명이 달려들어 즉시 진화시키엇다는데 그 원인을 듯건대 어린 아이를 시키어 군불을 ᄯᅢ다가 그와 가티 실화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