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은 계속된다 (5부)
- 감독
- 김봉오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박미화, 원정련, 김원일, 문귀룡, 리금성, 리향숙, 리수경, 조송이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957년, 가설극장으로 시작하다 미림극장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민들과 함께 한, 인천을 대표하는 지역 상영관이다. 1957년 인천 동구 송현동에 고은진 씨가 천막을 세워 무성영화를 상영한 것을 시작으로 문을 연 미림극장은 이후 47년간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처음에 평화회관으로 시작한 천막극장은 이내 평화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미림(美林)극장으로 개명한다. 극장 운영은 고은진 대표의 아들 고용성 씨와 사위 오윤섭 씨가 맡아왔다. 이후 오윤섭 씨는 미림을 그만두고 오성극장을 설립하면서 미림극장은 고은진 씨의 아들 고희성 씨가 대표를 이어받았다.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외화 중심의 상영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면서 지역 문화 공동체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미림극장은 1970년대 중반 단층이었던 건물을 이층으로 신축하였고 그때 지금과 같은 2층 발코니 구조로 완성되었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근무한 조점용 영사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에는 고희성 대표의 탁월한 외화 프로그램 구성이 소문이 나서 서울의 극장배급사에서도 찾아와 견학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천 지역에 들어선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공세에 밀려 2004년 7월 29일 영화 <투 가이즈> 상영을 마지막으로 폐관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9년 뒤인 2013년 10월 미림극장은 ‘추억극장 미림’으로 단장하여 다시 돌아왔다. 미림극장 로비 추억극장으로 재출발하다 재개관한 추억극장 미림은 인천 최초이자 유일한 실버전용관을 콘셉트로 지역사회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140개 회원사를 가진 인천광역시 사회적기업협의회의 의지가 있었다. 원도심을 살리기 위한 복합문화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가능성 있는 사업 중 옛 영화관을 살려내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인천시에서 재정을 지원하고 비영리단체인 인천시 사회적기업협의회가 운영을 맡는 방식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천시의 정책이 여러 차례 변경되면서 약속되었던 인프라 구축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6년 인천시는 사실상 지원 종료를 통보한다. 지원이 끊어진 후 여러 차례 진정서와 청원서가 제출되었지만 방침은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낸 옛 영화관의 문을 다시 닫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크고 작은 후원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2월 29일 공익형 사회적 기업 1호로 거듭난 추억극장 미림은 단지 영화 상영뿐 아니라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 확장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고령, 경력 단절 여성 등 취약 계층의 고용률을 60% 이상 유지 중이며 실버 세대의 자원활동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상영관 내부, "추억극장 미림에서 추억의 명화를 만나보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무엇보다 추억극장이라는 콘셉트에 충실하되 그것에만 스스로를 가둔 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재 ‘미림’(美林)은 ‘아름다운 숲’이란 의미처럼 세대를 아우르며 공존하는 문화공간을 지향한다. 문화 혜택의 사각지대인 실버 관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 가족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16년 문화관광부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지정된 이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역사회와 밀착 중이며 2016년 9월 SK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와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2017년 인천광역치매센터 치매극복 선도기업으로 지정된 후 노인문화복지 증진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동시에 젊은 관객층 개발에도 소홀하지 않고 관객들이 직접 영화를 선정하여 상영하는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 중이다. 과거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고전영화 상영을 기본으로 하되 후배 세대와의 소통 창구를 꾸준히 개발하여 공존의 의미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 복원을 위한 노력 10년의 폐관 기간 동안 미림극장의 많은 자료들은 안타깝게 유실되었다. 하지만 재개관 후 보관된 자료들을 복원하고 인천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기증받는 등 자료복원과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극장의 3층에는 영화연구가 정종화 선생이 50년간 수집한 영화 포스터, 전단, 스틸 사진 등의 자료가 전시 중이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진행되는 정종화 영화연구가의 시네마데카메론 수업을 통해 과거의 낭만을 되짚어보고 청년세대에게 전하는 만남의 장이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공존의 현장이라 할만하다. 미림극장은 상영관 오른쪽에 바로 외부와 연결되는 문이 뚫려있는 독특한 구조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실과 영화의 세계를 오가는 건축물은 지역주민과 밀착하여 가깝게 소통하는 미림극장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3층 미림역사관에 전시된 미림극장의 역사 자료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주소): 인천시 동구 화도진로 31 (송현동 92-7) 2. 설립일 - 1957.11월 최초 개관(평화극장) - 1958.10.5. 정식 개관(미림극장), 2004.7.29. 폐관 - 2013.10.2(재개관)~ 3. 대표자: 고은진(창업주), 고희석(폐관 당시), 최현준(현재) 4. 규모: 대지면적 477m², 연면적 745.79m², 바닥면적 437.79m²(지상2층, 지하1층) (1~3층 구조인데 건축물대장에는 이와 같이 표기되어 있음) 5. 극장 구성 - 단관극장, 재개관하면서 1층 206석, 2층 77석이였으나 2002년 3월 CGV 좌석기부를 통해 2층 좌석을 교체하면서 47석으로 줄어듦. 현재 253석. - 1층: 매표소(매점 겸업), 여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2층: 미림살롱(소공연장), 남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3층: 미림역사관(상설전시관), 영사실 6. 운영시간: 쉬는 날 없이 매일 9:30~20:30 7. 입장료 - 고전영화(기본 5,000원, 학생 4,000원, 65세이상 2,500원) - 개봉영화(기본 7,000원, 학생/65세이상 5,000원) 인터뷰: 최현준 대표(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최현준 대표 송경원 _미림극장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현준 _미림극장은 1957년도 지금 이 위치에서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의 천막극장으로 시작됐습니다. 오랫동안 인천시민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2004년도에 폐관을 했고, 다시 문을 연 건 2013년입니다. 인천 구도심의 오래된 영화관의 모습을 다시금 살려내어 향수를 추억하는 동시에 청년세대에게도 고전영화의 감동과 즐거움을 전하기 위해 운영 중입니다. 송경원 _9년 동안 폐관되었다가 어떻게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나요. 최현준 _1999년도에 인천 지역 멀티플렉스가 생겼습니다. 신도시로 인구 이동이 많았죠. 자연스럽게 동인천역 주변 지역은 구도심이 되었는데 그렇게 극장을 비롯한 상권의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2004년에 결국 미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고 10년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재개발 이슈가 있었지만 당장 이뤄지는 건 아니라서 오히려 보존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원도심을 살려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중 하나가 옛 영화관을 부활시키는 거였습니다. 인천시와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미림이 다시 문을 열었죠. 송경원 _하지만 그 뒤로도 상황이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최현준 _맞습니다. 원래 인천시가 인프라 구축과 재정지원을 약속했는데 이행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결국 포기해버렸습니다. 운영을 맡았던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한번 폐관됐던 극장을 다시 또 문닫게 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렇게 비영리 단체이 기업협의회의 주관 아래 다양한 후원과 관객들의 사랑으로 지금까지 운영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송경원 _미림은 '아름다운 숲'이란 뜻인데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최현준 _이름의 근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습니다. 원래 평화극장이었다가 어느 날 미림으로 변경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르기 쉽고 아름답고, 인근 수도국산이 있기도 하고 문화적인 쉼터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처음에는 시장통에 천막을 치고 시작했다가 점점 사람들이 모여 동인천 인근의 문화공간으로 유명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시장 번화가이기도 하고, 맞은 편에 달동네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는 장소였던 셈이죠. 계단 벽, "미림, 아름다운 영화의 숲"이라는 슬로건이 보인다 송경원 _건물 형태가 독특합니다. 극장 바로 옆에 출입구를 열면 바깥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최현준 _미림극장에 오래 근무하신 직원분들에게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를 자주 들었습니다. 간판 그림을 그리신 김기봉 선생님, 극장 입구를 지키셨던 양재영 선생님, 그리고 영사를 맡았던 조점용 선생님이 있습니다. 전성기였던 1970, 80년대에는 200석 남짓한 극장에 하루 2, 3천 명씩 몰려들어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70년대 중반 관객을 좀 더 수용하기 위해서 극장을 확장했는데, 천장이 높은 장점을 살려 2층에 발코니를 만들고 80석 규모를 늘렸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도 사고 한 번 나지 않았던 걸 오래 근무하신 분들은 다들 자부심으로 여깁니다. 문을 열면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 덕분이기도 한 것 같아요.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의 동선이 겹치지 않으니 사람이 깔릴 일이 없는 거죠. 한편으론 낭만적인 면도 있습니다. 2시간 남짓 영화의 세계에 푹 빠졌다가 오른쪽 출구 문을 여는 순간 현실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 보면 이곳이 영화관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셨다고 합니다. 미림극장을 추억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도 이런 건물구조라는 분도 꽤 계십니다. 상영관 출구가 거리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송경원 _실버영화관 콘셉트의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을 했습니다. 최현준 _문화 소외층인 노령층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입니다만 거기에 국한되지 않고 가족 관객이 함께 찾는 지역 문화공간을 지향합니다. 2층에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소공연장 미림살롱을 마련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3층에는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인 미림역사관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재개관 2년 뒤인 2016년에 입사를 했는데 미림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도 과거 자료들을 찾는 거였습니다. 1957년에 개관한 영화관이니 얼마나 많은 자료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사실 남아있는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정종화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뜻있는 분에게 자료를 기증받았고, 공사를 하면서 발견한 작은 박스에서 예전 극장을 운영했던 장부 등의 기록 문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3층을 역사관으로 꾸몄습니다. 지금도 조금씩 수소문하며 과거의 자료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아직 많은 자료를 복원하진 못했지만 미림을 방문해주신 인천 시민분들께 이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가 어떤 역사와 얽혀서 지금까지 왔는지 알리고 싶습니다.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2층 미림살롱의 무대 공간 송경원 _미림극장에는 어떻게 근무하게 된 건가요. 최현준 _인천 지역에 개인적인 연고는 없습니다. 문화재단 관련 일을 오래 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미림극장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천국제영화제가 첫 직장이었는데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대한 애정과 친숙함이 미림극장에서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송경원 _사회적 공익기업이 주체인 만큼 다양하고 특색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띕니다. 최현준 _실버영화관이 시작이었던 만큼 인천광역치매센터와 함께 노령층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다만 지금은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생존하기 힘든 상황이라 저변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의 정신에 맞게 취약 계층 고용률을 60%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쉽지 않고, 피치 못한 사정으로 직원들이 떠나야 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신기한 건 인천시와 같은 외부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어려운 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점입니다. 2016년에 인천시의 지원이 중단됐을 때 2500여 명의 시민들이 서명을 하여 청원을 넣기도 했습니다. 그런 힘으로 오늘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상영관 입구, 다양한 시민들의 메시지가 붙어있는 벽면이 보인다 송경원 _실버영화관에서 출발하여 지역 기반의 문화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최현준 _아직 갈 길이 멀고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70대 이상 관객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버영화관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차라리 추억을 어떻게 함께 하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을 회상하는 공간으로, 젊은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고전 걸작과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고자 합니다. 클래식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필요한 건 그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1957년에 문을 연 미림극장은 세월의 힘이 쌓여 있습니다. 거기에 지금은 오래된 영화관 이상의 특별함을 드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 중입니다. 어르신들은 물론 원도심 인근의 아이들에게는 이 극장이 유일한 문화공간입니다. 우리 동네 마을 극장이라고 할까요.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꾸준히 고민하면서 이 공간이 가능한 오래 지속되길 희망합니다. 인터뷰: 조점용 영사기사(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조점용 영사기사 송경원 _미림극장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조점용 _196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영사기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림극장의 흥망성쇠를 함께 지켜보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영사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자식 셋을 키워냈습니다. 오래 했지만 뒤돌아보면 뚜렷하게 남긴 건 없네요. 그저 쉬지 않고 했습니다. 미림극장이 문을 닫았을 때도 말이죠. 매주 월요일에는 간석동에 있는 노인 종합문화회관, 화요일에는 중구청 지역의 문화원, 수요일에는 부천지역까지 가서 영화를 틀었습니다. 지금도 미림극장에서 불러주면 영사기를 만집니다. 송경원 _미림극장에 처음 오셨을 때 극장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조점용 _내가 처음 왔을 때는 천막은 아니고 단층극장이었어요. 단층에 200석인데 손님은 미어터져서 건물을 새로 지었지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더 몰리고. 재밌는 외화가 한다고 소문나는 시기에는 매일 작게는 1천 명, 많게는 3천 명까지 와서 장사진을 쳤죠. 인근 지역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그야말로 화제의 중심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여기서 영화를 튼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송경원 _개관 당시부터 꾸준히 인천 문화의 중심지였군요. 조점용 _맞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TV가 집집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이 최고의 호사였으니까요. 당시 수도국산 산동네는 정말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로애락을 주는 영화가 더욱 소중했죠. 인천 동구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이쪽으로 영화를 많이 보러 왔습니다. 왜냐면 서울에서는 개봉영화를 보려면 예매를 해야 하는데, 여기는 아무 때나 와서 자리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당시 인천 지역의 극장 시스템은 그랬습니다. 지금은 문을 닫은 문화극장이나 오성극장, 그 위쪽의 인천시민회관 등 인천 지역 영화의 산실이 바로 동인천 동구 이 동네였거든요. 송경원 _동구 지역 영화관 중에서도 미림극장이 특별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조점용 _사장님이 흥행할 영화를 잘 골라왔어요. 당시 영화수입업자들은 다 충무로에 있었는데 인기 있는 영화를 얼마나 가져오느냐에 따라 수입 차이가 꽤 컸습니다. 한국영화는 별로 인기가 없어서 억지로 틀고 그 대신 외국영화 틀 날짜를 받아오곤 했지요. 당시 사장인 고용성 씨가 미 8군사령부 수석 통역관이었던 사람이라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영어가 되니까 영화도 잘 고르는 거죠. 그래서 서울의 수입업자들이 고용성 사장을 찾아와서 어떤 영화를 수입할지 물어보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고용성 그 양반이 영화에 대한 식견도 높아서 당시에 해외영화 잡지 같은 것도 챙겨보고 그랬습니다. 영화가 미국에서 흥행했다고 한국에서 다 흥행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한국 정서에 맞는 작품을 잘 찾아야 되는데, 고용성 사장이 귀신같이 그런 걸 잘 골라냈습니다. 그런 자산을 가지고 영화를 빠르게 잘 배급해오기도 하고 그랬지요. 역사관에 전시되고 있는 80-90년대 상영되었던 영화 예고편 필름들 송경원 _40년 세월 영화를 틀어오셨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있을까요. 조점용 _글쎄, 워낙 많아서. <킬링 필드>(롤랑 조페 감독, 1984)라는 영화가 공무원들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라 단체관람객이 많이 왔던 게 생각납니다. 학생 단체관람도 많았고. 당시에 한국영화는 관객이 잘 안 드는데 스크린쿼터 때문에 억지로 틀기도 했어요. 그럴 땐 한국영화 간판만 걸어놓고 외화를 틀기도 했죠. 단속이 나와서 걸리다 보니까 나중에는 못하게 됐지만. 송경원 _2층 발코니 공간의 좌석이 특색이 있는 구조입니다. 조점용 _사람이 워낙 몰리니까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공사를 했죠. 당시엔 건축학과 교수들도 와서 이야기하곤 했어요. 여기가 인천에서 영화 보기 제일 좋은 곳이라고. 다들 좌석 한 자리라도 더 늘리려고 하지 이렇게 영화를 보기 좋게 설계한 곳이 없다고. 상단, 하단, 구석 어디에 앉든 스크린이 가려지는 곳이 없거든. 280석이 정원이지만 계단에 앉아서 보기도 하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받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어렵게 발걸음 했는데 많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손님이 하도 많으니까 여름에는 에어컨이 돌아가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들 열기랑 습기가 섞여가지고 유리창이나 렌즈만 닦는 아르바이트를 따로 고용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몇십 년을 운영하면서 이제껏 큰 사고 한번 안 났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도 그게 자랑거리입니다. 그만큼 직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다는 거죠. 상영관 2층 발코니 형 좌석 송경원 _그러던 게 1990년대 말, 2000년 초가 되어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침체에 빠졌습니다. 조점용 _서서히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관객이 한 번에 사라졌어요. 시대가 바뀐 거죠. 한 번에 14개 관에서 여러 영화를 상영하니 단관극장으로 사람들이 올 리가 있나. 매일 미어터지던 입구가 정말 거짓말처럼 한산해졌습니다. 송경원 _2004년 문을 닫는 마지막 날까지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점용 _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본 겁니다. 손님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허전한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이 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닌가 보다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쩌겠어. 평생 해온 게 이 일이고 내 자리가 여긴데. 에어컨도 없이 여름이면 지옥 같은 영사실에서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이제 와서 뭘 다른 일을 하겠어요. 우리 집이 바로 여기서 몇십 미터 앞이거든. 여기서 일하려고 집을 아예 구해버렸지. 일하기 좋았던 시절도 있고 어려운 시절도 있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오늘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많이 퇴색이 됐어요. 추억을 쌓고 잊히지 않는 공간으로 자꾸 발전되어야 하는데 그런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요. 미림극장이 다시 문을 연 건 반가운 일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쉽진 않지만. 필자: 송경원(씨네21) 사진촬영: 손홍주 인터뷰 일자: 2022년 5월 20일
한 작품의 두 제목: <남녀공학>과 <학창시절> 1976년 개봉한 영화 <학창시절>의 신문광고 포스터에는 작게 ‘原名(원명): 男女共學(남녀공학)’이라는 또 다른 제목이 표기되어 있다. 본 작품이 특정 영화의 리메이크작이거나 원작 소설 등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원명’이 따로 명기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까 <학창시절>이라는 작품명보다 원래 의도한 이름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명기하는 것은 다소 의아한 일이다. 당시 영화제목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문공부에 서류를 제출하고 그 합당함을 인정받아야 했기에, <남녀공학>과 마찬가지로 <학창시절> 역시 학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데도 굳이 제명을 변경한 것은 그 수고스러움에 비해 크게 얻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변경했다면, 그리고 이전의 제목까지 명기했다면 제명을 변경한 것은 적어도 제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겨 말하자면 영화 <학창시절>은 시나리오 표절시비사건에 휘말리면서 세간의 이목을 끈 작품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영화에서 표절시비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를 규제할만한 저작권법이 명확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표절은 그리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지 않았고,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문제시 되었던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표절에 대한 무관심이 이어졌다 1 . 이러한 상황에서 <학창시절>의 시나리오 표절시비사건이 대두된 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작품의 표절시비 사건으로 인해 당시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 위원장이 사퇴의사를 밝히는 등 이 작품의 표절시비 사건은 표절을 여부를 가리는 문제를 넘어서는 데에 까지 확대되면서 당시 ‘민간심의기구’라는 예륜의 지위와 책임, 그리고 문공부가 이 심의기구를 대하는 태도 등을 매우 흥미롭게 보여준다. 영화검열에 있어 1970년대라는 시대적 레토릭이 발휘하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검열에 대한 상(像)이 고정되어 있는 것, 영화검열은 곧 삭제라는 행위로 간소화되고 이는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상식과 같은 생각들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에 따라 검열자는 국가라는 단일한 주체로 결정되고, 심의와 관련한 모든 기구의 의견은 국가의 것으로 간주된다. 특히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예륜, 1976년 5월 이후 이름을 바꾼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의 시나리오 심의는 폭력적인 검열을 행한 국가의 의견과 등치에 놓인 채 구분되지 않는 경향이 짙다. 물론 당시 민간심의기구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던 예륜이나 공윤은 예산이나 위원장의 임명 등을 문공부의 관리 아래에서 진행했지만, 이것으로 예륜이나 공윤이 국가 검열권력과 동등한 선상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학창시절>의 표절시비 사건을 파악할 수 있는 심의서류는 당시의 예륜이 수많은 돌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 쉽게 책임질 상황을 만들지 않는 국가 검열로 인해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지 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예상 밖의 검열의 이면을 바라보게 한다. 검열 질서를 깨뜨리는 돌발적 상황들 <학창시절>은 1975년 11월 15일 <고교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2 예륜에 심의 신청했던 시나리오가 수정 통과된 후, 같은 해 11월 21일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 12월 7일 문공부로부터 제작신고 수리를 통보 받은 후 영화제작에 착수한다. 이 과정은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영화검열의 기본적인 절차로 제작사는 예륜을 통해 먼저 시나리오 심의를 받은 후, 그 결과에 따라 문공부 측에 제작하겠다는 허가를 요청하며 3 , 문공부가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와 자체적으로 심의한 유의사항을 덧붙여 영화제작을 허락하는 절차에 따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문공부의 제작허가는 절차상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만약 시나리오에서 문제가 발생할 시 그 책임을 전적으로 예륜의 몫으로 미룰 수 있다는 점이다. <남녀공학>의 표절시비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문공부의 태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서 미성년자의 음주나 일탈 등에 대한 몇 군데의 지적에 그쳐 제작에 착수했던 <남녀공학>은 12월 5일 접수된 ‘대한민국 영화 애호가’의 투서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남녀공학> 표절 시비를 촉발시킨 청원서 문공부장관 앞으로 보낸 청원서에는 <남녀공학>이 소화34년(1959)년에 발행된 『月刊 シナリオ』(월간 시나리오)에 실렸던 <ハイティーン>(하이틴)을 ‘표절 각색한’ 작품이라고 지적하며, 이미 일본에서 제작·상영된 바 있는 이 영화의 허가·상영은 내년 ‘아세아 영화제가 개최되는 시기에’ ‘이 작품 내용을 아는 일본인들이나 그 외 사람들이’ 안다면 ‘엄청난 챙피’와 ‘국위를 손상 시킬 것’이며, ‘민족 고유 미풍양속을 저해시키는’ 일이 될 것이라 덧붙인다. 이에 문공부는 곧바로 예륜 측에 청원서에 대한 의견 조회를 요청하고 해를 넘긴 1976년 1월 8일, 예륜은 「영화 1733-16853(청원서에 대한 의견조회)에 대한 결과보고」를 통해 ‘상황 및 디테일(부분, 항목) 설정이 전체적으로 흡사한 점이 많고’, ‘교사의 봉임과정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등 인물들의 설정에 유사성을 들어 ‘표절이라는 판정을 면하기 어렵다고 사료(인정)됨’이라는 의견을 문공부 측으로 전달한다. 이러한 예륜의 판정은 처음 시나리오를 심의 후 통과시킨 자신들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고 그 결과를 번복한 셈이다. 그러나 <남녀공학>의 문제는 표절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표절시비에 휘말리면서 예륜의 의견서를 제외하고도 제출된 표절관련 의견서가 세 편에 이르는데 이 중 한국영화인협회(이하 영협) 시나리오 위원회라는 정확한 주체를 밝히고 제출한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출처가 불명확하다 4 . 이렇게 영화인들이 직접적으로 의견서를 제출한 데에는 이 작품의 각본을 담당했던 황영빈의 당시 지위가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남녀공학> 원작자 황영빈의 영화제작승낙서 <남녀공학>의 제작신고서에는 각본이 원작자 황영빈, 각색자 서인경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원작자의 영화제작 승낙서」가 첨부되어 있다. 이 중 황영빈은 당시 영협의 시나리오 위원회 위원장이자 영협의 부이사장, 예륜의 윤리위원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시나리오 표절문제는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황영빈이 시나리오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당선된 직후 발생한 이 작품의 표절시비는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의 권력 다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었다. 표절이라 판단한 예륜의 의견서와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시나리오 위원회의 자체 의견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결정 두 기구 간의 의견도 엇갈렸지만,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에서도 80여명의 회원이 양쪽으로 갈려 치열한 논쟁이 오고갔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표절시비사건이었지만 그 내막에는 직전에 있던 시나리오 위원회 위원장 선거에서 패배한 측에서 보복으로 라이벌이었던 황영빈을 몰아세워 위원장직에서 사퇴시키려 의도가 도시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5 . 앞서 살펴본 청원서의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 그러니까 영화와 관련한 업무를 맡아보는 문공부와 예술국장을 명시하고 있으며, 현재 <남녀공학>을 찍고 있는 지역과 제작사 일시 등을 알고 있고, 각본가와 감독의 이름, 표절이 의심되는 작품의 출처와 상영의 여부 등을 명시한 것으로 보아 영화계 내부인사의 청원서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기에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의 표절에 대한 상반된 결정이 시나리오 위원회의 권력다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6 . 결국 이러한 다툼 속에서 제출된 보고서들은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내놓고 있었고, 작가들은 <하이틴>이라는 작품은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예륜은 이 작품이 표절이라 판단 내렸던 것이다. 예륜은 왜 표절 판정을 번복하는가? 예륜이 1월 8일 문공부 측에 보낸 「영화 1733-16853(청원서에 대한 의견조회)에 대한 결과보고」는 하루 전인 1월 7일에 작성된 것인데, 같은 날 작성된 「예륜 위원장 개인의견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서류는 1월 8일 문공부 측에 보내는 위의 공문과 작가들의 해명서와 함께 발송된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절을 인정한 예륜 위원장 개인의견서 결국 예륜 위원장은 이 작품이 표절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표절문제가 불거진 것이 ‘원작자의 직소(直訴)’, 즉 <하이틴> 원작자의 직접적인 호소에 의한 것이 아니니 선처를 베풀어 달라는 첨언을 한 것이다. 이는 예륜 위원장이 표절 자체를 중대한 문제로 삼는다기보다 사후적인 처리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시나리오 심의 결과를 번복하고 있는 예륜의 입장에선 문공부의 처분에 따라 자신들의 위상이 흔들릴 수도 있었기에, 「예륜 위원장의 개인의견서」라는 가장 정중한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에 대한 신뢰와 심의기구에 대한 존중을 요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공부는 이러한 예륜의 공문을 받은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월 14일, 「국산영화 시나리오 표절 여부에 대한 재조회」라는 제목의 공문을 예륜에 발송한다. 이 공문에는 예륜에서 보낸 재심의 결과 보고서로는 작품 전체의 표절 여부를 확정할 수 없으며, 이 영화는 예륜의 판단에 따라 제작 신고를 수리하여 이미 촬영이 완료된 작품으로 예륜의 판단이 이 작품은 물론 향후의 작품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니 확대 심의회의를 개최하여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령이 담겨 있다. 덧붙여 원작 대본과의 씬 별 대조표를 작성, 작품 전체 중 ‘유사 장면 수, 모방 장면 수, 표절 장면 수, 전혀 다른 장면 수’를 적고 ‘원작의 어느 정도를 모방함으로써 표절이라 판정할 수 있는 지의 기준’을 제시하라고 통고하고 있다. 조용히 넘어가 달라는 예륜 위원장의 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문공부는 누구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해 수치로 환산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인 결과를 요구했다. ‘유사’, ‘모방’, ‘표절’을 장면별로 구분하라는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표절을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문공부는 이 작품이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 결과에 ‘따라’ 자신들이 제작신고를 수리하여 영화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언급하며 영화가 겪을 불이익을 고스란히 예륜의 탓으로 돌리면서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도, 표절이라는 판단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이 사이 영화를 완성한 제작사는 영화 본편검열신청서와 미성년자 관람신청서 등을 제출하지만, 문공부는 표절여부를 조회 중인 작품이니 이후 진행하겠다며 검열 자체를 진행하지 않았고, 예륜은 약 2주가 지난 1월 28일 이 작품은 표절이 아니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문공부 측에 보내온다. <국산영화 시나리오 표절여부에 대한 재조회>에 대한 예륜의 결과보고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예륜이 얼마나 이 문제를 고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륜은 1월 20일 내부적으로 가졌던 재심의에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고, 1월 22일 긴급윤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외부 인사 3인을 위촉하여 재심의를 진행한다. 여기에서 예륜이 최대한 내부적인 의견 개진과 그로 인한 결정을 거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인의 외부인사의 입을 통해서야 9개의 씬 일부와 인물의 설정과 배치, 배경 등의 유사성은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표절이 아니라고 판단 내린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이러한 번복에는 작품 자체의 비교를 넘어 다소 위압적인 문공부의 통고와 이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진 시나리오 위원회의 분란 등이 더욱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결정 후 문공부는 1월 30일 <남녀공학>의 제작사인 대영흥행 측으로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라는 공문을 보낸다. 문공부는 예륜이 표절로 판단했을 때에는 제작사 측으로 즉시 통고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재심의 요청을 한 것과는 다르게, 표절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에는 즉시 그 결과를 통보하면서 표절이라는 판단을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문공부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를 통해 자신들이 본 작품을 허가한 것이라 책임을 회피하지만, 제작신고 수리 공문에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 시 지적되지 않았던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어 문공부 역시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살펴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문공부는 이 모든 책임을 예륜으로 넘기며 영화검열 업무를 관장하는 문공부의 결정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에 명시된 보완사항에서 문공부가 주력한 것은 표절시비 사건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점에서 표절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공부의 의지가 더욱 명확하게 읽힌다.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 위의 공문에서 문공부는 세 가지의 보완을 지시한다. 하나는 ‘사회적 물의를 야기시’킨 제명을 변경하라는 것, <하이틴>과 유사한 부분을 삭제하거나 개작하라는 것, 수정한 부분을 명시하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지시사항은 문제가 되었던 부분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없었던 것처럼 만들라는 뜻으로 문공부가 문제가 생긴 영화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제작자는 이러한 지시를 받은 후 「<남녀공학> 제명사용에 관한 건의」라는 문서를 통해 이미 제작수리에 본 제목으로 들어갔으며, 본편과 예고편 등에 타이틀 화면을 다시 찍어야 하고, 이 제목으로 배급 계약을 마쳤기에 제목의 수정지시를 거두어 달라는 내용을 전달한다. 그러나 직후 「<남녀공학> 지시사항에 대한 복명」이라는 문서를 통해 제목을 <남녀공학>에서 <학창시절>로 바꾸겠다는 내용을 전달, 제작사의 요청은 거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남녀공학>은 <학창시절>로 그 제목을 바꾸어 개봉했고, 포스터에는 원제가 <남녀공학>이었다는 것을 작은 글씨로나마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공부가 영화검열 업무를 책임지는 법 결국 <학창시절>은 문공부의 예륜으로의 책임전가, 예륜의 판단 번복, 이로 인해 발생한 물의를 잠재우기 위해 최대한 원제와 유사하게 붙인 제목이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예륜 위원장은 사표를 제출한다. 일신상의 사정이라는 이유였지만, 시나리오 파벌싸움의 부작용이자 문공부의 예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7 . 상반된 표절 판정에 최종적으로는 문공부가 가려내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8 문공부는 어떠한 판정도 내리지 않은 채 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 문공부가 내린 결정은 ‘여고생’ 소재의 영화 제작을 규제하겠다는 것이었다. 남녀 고교생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그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정적으로 그린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9 「표절시비 극영화 <남녀공학> 예륜, 윤리위에 심의위임」 10 이라는 기사와 바투 붙어 있는 이 기사는 문공부 결정의 이면을 상상하게 한다. <남녀공학>과 <하이틴>의 표절 여부를 판단할 때에 고교생활을 다루는 데에 있어 소재나 등장인물, 배경, 사건 등이 유사할 수밖에 없다는 난점이 의견서마다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던 것을 생각한다면, 문공부의 결정은 아예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문공부의 태도는 영화법이 시행된 이후부터 꾸준히 보인 것으로, 강압적으로 영화의 삭제를 지시했을 것이라는 국가 검열에 대한 상(像)과는 거리가 있다. <학창시절>의 검열과정은 검열에 끼어든 상황과 주체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처가 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1. 이는 1970년대에 들어 표절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1970년대에는 수많은 합작영화로 표절에 관한 지적이 많을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의 언론에서 영화검열에 관한 언급 자체 줄어들었고, 검열과 관계 된 표절에 대한 언급 역시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영화검열의 언론 노출에 비한다면 1970년대 영화검열은 그 빈도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든다. 2. 이 작품은 <고교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제작신고 직후 <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제명변경을 신청하고, 제작신고수리가 된 이후부터는 <남녀공학>으로 명기된다. 이 글에서 역시 이 작품을 가리킬 때에는 <남녀공학>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고자 한다. 3. 시나리오 심의에서 통과 판정을 받지 못한다면 예륜의 요청에 따른 시나리오에 대한 수정과 심의가 반복된다. 이를 통해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 통과해야만 제작신고를 할 수 있다. 4. 출처가 분명치 않은 두 개의 보고서 중 하나에는 ‘익명의 영화인 제출’이라 수기로 표기되어 있다. 나머지 하나는 시나리오 위원회의 분열로 인해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하의 내용과 각주 6번 참조. 5. 「극영화 <남녀공학> 표절시비」, 《일간스포츠》, 1976.1.17. 본 신문기사를 비롯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는 6-7개의 신문기사가 심의서류에 스크랩되어 있다. 6. 당시 시나리오 위원회는 시나리오 문학회와 시나리오 위원회로 나뉘어 전자는 이 작품을 표절로, 후자는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며 첨예하고 대립했다(「극영화 <남녀공학> 표절논쟁 확대: 표절이다 아니다 상반된 보고서」, 《일간스포츠》, 1976.1.22.). 이 기사를 바탕으로 표절에 관해 의견을 제시했던 총 세 개의 보고서 중 출처가 분명치 않았던 두 개 중 하나는 시나리오 문학회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7. 「표절논쟁 2라운드 접어들어-판정 뒤집히면 책임소재 시비 또 일 듯」, 《일간스포츠》, 1976.1.24. 8. 「극영화 <남녀공학> 표절논쟁 확대: 표절이다 아니다 상반된 보고서」, 《일간스포츠》, 1976.1.22. 9. 「여고생소재 무절제 극영화-문공부 제작 규제」, 《일간스포츠》, 1976.1.23. 이 기사의 표제는 ‘여고생’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남녀’ 고등학생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탈선이나 반항 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 이를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문공부는 ‘특히 여고생의 경우 담임 선생님을 사모하’는 설정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식, 탈선’등이 최근 남녀 고등학생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문제로 꼽아 규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데, 이러한 설정은 모두 영화 <남녀공학>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10. 「표절시비 극영화 <남녀공학> 예륜, 윤리위에 심의위임」, 《일간스포츠》, 1976.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