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 감독
- 게리 시니어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크리스 오도넬, 르네 젤위거, 아티 랜지, 에드워드 아스너, 할 홀브룩, 제임스 크롬웰, 말리 셀튼, 피터 어스티노브, 캐서린 타운, 레베카 크로스, 스터시 에드워즈, 머라이어 캐리
장철과 호금전의 무협에서 이소룡과 성룡의 쿵푸 액션으로. 오우삼과 서극, 왕가위에 이르는 뉴웨이브까지. 20세기 중·후반 홍콩영화는 각기 다른 색깔의 ‘신드롬’을 일으키며 한국에 스며들었다. 대만, 싱가포르, 중국 등 중국어권 영화 전반 역시 (정치, 외교, 경제 정책에 따른 변함은 있더라도) 예술과 산업의 측면에서 한국영화와 인연을 맺으며 그간 서로가 아시아영화의 한 종류로 자리 잡는 데 영향을 주고받았다. 한국영화가 중국어권 영화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어떻게 초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를 영화에 반영했는지를, 홍콩 시티대학교(City University of Hong Kong)와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이 공동으로 개최한 컨퍼런스 ‘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Destination Hong Kong: South Korean Cinema’s Encounter with Chinese-Language Cinemas) ’에서 되짚어보았다. 홍콩 시티대 이상준 교수와 한국영상자료원 정종화 학예연구팀장이 공동 의장을 맡았으며, 2025년 5월 16일과 17일, 다양한 세대로 구성된 각국의 연구자 및 아카이브 관계자들이 발표를 위해 홍콩 시티대를 찾았다. 중국어권과의 영화 교류의 흐름을 조망하는 자리가, 한·홍 합작의 주요 결과물 제작에 기여한 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설립자 런런쇼(Run Run Shaw)가 건립을 지원한 (홍콩 시티대 내) 런런쇼 창의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되어 더욱 뜻깊었다. 시티대 이상준 교수는 “1950년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홍콩,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중국 등과의 초국가적 및 초지역적 네트워크 속에서 한국영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본다”라는 컨퍼런스의 목적을 밝혔다. 초청 강연자로 함께 한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은 “기관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홍콩영화의 오랜 팬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더욱 감회가 깊다”라면서, “이번 행사는 한국영상자료원이 해외 학술기관과는 처음으로 공동 개최하는 컨퍼런스일 텐데, 관련 주제를 연구하는 작은 한 걸음이 위대한 도약의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라며 응원을 건넸다. 정종화 학예연구팀장 역시 본 컨퍼런스를 “한국과 중국어권, 특히 홍콩 간 영화적 교류에 대한 연구를 진작하는 특별한 기회”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번 컨퍼런스를 계기로 이상준 교수와의 협업을 지속하며 더욱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주최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며 컨퍼런스 이후에도 관계 기관과의 협력을 이어가며 연구 성과를 가다듬는 데 대한 의지를 밝혔다. 1950~60년대 한국과 중국어권 간 합작 사례부터 양국 21세기 감독들의 화제작까지, 시대나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고 이어진 양일간의 열띤 발표와 토론 내용을 기록한다. 먼저, 두 패널의 발표가 진행된 컨퍼런스 1일차 현장을 담았다. * 컨퍼런스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 개최 개요 및 프로그램 북( 링크 ) <패널 1>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 간 전후(戰後) 합작 1950년대 이후의 전후 한국영화계에서 중국어권과의 합작이 시도된 배경과 방식, 그리고 결과의 함의를 다뤘고, 홍콩 침례대학교 김신동 교수가 이끌었다. 한국영화인 강범구를 통해 본 1960년대 한국-대만 영화 교류사 (한국영상자료원 정종화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학예연구팀장은 1960년대 액션 장르 흥행을 이끌었던 강범구 감독의 작품이 한국영화 최초로 대만에 수출되거나 대만과의 합작을 통해 제작된 과정에 집중했다. 1960년대 한국과 대만의 영화 합작에 관한 첫 번째 학술적 연구다. 냉전 시기 동아시아 정세를 반영한 대만의 정치적 상황과 반일 감정이 한국 영화산업의 현실과 맞물리며 두 국가의 영화적 교류의 토대가 마련되었는데, 흥미롭게도 과거 양국과 식민지-제국 관계였던 일본의 영화기술이 필요한 현장이었음을 포착한다. 영자원이 2009년부터 2014년까지 강범구 감독을 면담해 기록한 구술채록문과 작품별 심의서류, 합작 계약서 등이 근거가 되었다. 전후 냉전 상황 속 동아시아에서 지정학적, 산업 및 기술적 요소가 상호작용하던 도중, 영화산업을 매개로 세 국가의 관계가 형성되는 한 지점을 재발견하는 연구였다. 강범구 감독은 1950년대 신상옥 감독의 현장에 촬영보조로 합류하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 지옥화 >(신상옥, 1958) 등의 작품에서 촬영감독으로 활약했다. 제작자 최관두 가 속한 한흥영화사와 협력하면서부터는 액션 스릴러에 초점을 두고 연출 활동을 시작해 독특한 액션 연출 및 촬영 기법으로 주목받았지만, 한국영화사에서는 아쉽게도 주변부 인물로 비춰지는 데 그쳤다. 그런데 그가 세 번째로 연출한 < 안개낀 거리 >(1963)는 1963년,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대만에 수출된 후 놀랍게도 흥행을 기록했다. 강범구 감독은 구술채록 당시 이러한 흥행의 비결이, (대만 역시 냉전 시기를 통과 중인 동아시아의 일부였음을 감안할 때) 상업적 장르영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전후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묘사 한 데 있었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양국 간 외교적 긴장을 야기한 지정학적 요인 [1] 의 영향으로 대만은 일본영화의 수입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안개낀 거리>는 이때 대만에 수출되면서 현지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얻고 일본영화의 빈자리를 메꿔 보다 쉽게 흥행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64년 6월, 대만의 일본영화 수입이 재개되면서 그러한 이점의 효력이 상실되었고, 대만에서 한국영화의 입지는 다시 변방으로 밀려났다. 강범구 감독과 박상호 감독 / <안개낀 거리>, <탈출명령> 포스터 하지만 1965년, 한국과 대만은 강범구 감독을 필두로 최초의 합작을 시도한다. 그의 액션 연출을 인상 깊게 바라본 대만의 감독 겸 제작자 가오 런허(Gao Renhe)의 제안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배경의 전쟁·액션 영화 < 탈출명령 >(1966) 제작을 위해, 대영영화주식회사와 대만 중흥영업유한공사(Chung Shing Films Corporation)가 합작했다. 계약서상 한국은 각본, 연출, 캐스팅을, 대만은 주로 재정 지출을 담당했음이 나타난다. 두 국가 간 최초의 합작은 한국의 창작적 리더십과 대만의 투자가 결합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탈출명령> 합작 과정에서 국내 영화인들의 작업 편리성이 일본 영화산업 의 기술을 통해 향상되었을 여지도 발견된다. 강범구 감독은 푸티지를 매일 일본 도요랩(Toyo Laboratory)으로 운송해 최신 기술을 바탕으로 현상·편집했으며, 본 합작을 계기로 일본의 영화 기자재와 소품용 총기가 항공편을 통해 본격적으로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했고, 촬영 현장에 중국어 통역사가 동반했음에도 일본 관계자가 소통을 도왔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러나 결과는 아쉬웠다. 제작비 규모가 계획한 예산을 초과해 대만 중흥영업유한공사의 재정적 부담이 컸는데, 박스오피스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흥행 불발에 더해 한국과 대만의 최초 합작 사례이다 보니 제도적 지원 역시 부족했던 터라, <탈출명령>은 한 번의 실험적 합작 시도의 결과물로만 남고 말았다. 하지만 정종화 팀장에 따르면, 해외 영화 수입 비율 충족을 위한 위장 합작이 만연했던 당시, 양국의 영화적 역량과 자본을 충실히 투입한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위 사례는 재조명될 가치가 있다. 정치, 외교, 기술적 측면에서 세 국가의 역할이 교차하며 쓰인, 동아시아 영화사의 독특한 협업 역사로도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한·홍 합작 멜로 속 여성 캐릭터의 민족 수행: <이국정원>과 <사랑의 스잔나>를 중심으로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윤서연 연구원) 윤서연 연구원은 한국과 홍콩이 합작한 멜로드라마 영화의 여성 인물이 민족성이나 국적을 수행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현상을 소개했다. 나아가 동 시기 한국 정세의 영향으로 극중 인물들의 젠더가 국적을 대변하는 양상을 띠는 점 역시 짚었다.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한국의 경우 6.25 전쟁 포함) 후 한국과 홍콩의 역사·문화적 의식이 인물을 통해 알레고리화되는 합작 멜로드라마 중에서도, 윤서연 연구원은 주인공의 부모가 국적이 다른 남녀의 이성 교제를 허락하는 구조를 띤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과 < 사랑의 스잔나 >(김종용, 송존수, 1976)에 대해 설명했다. 두 작품에는 홍콩 출신 여성 인물이 한국문화를 경험하며 국적이나 민족성을 ‘유동적으로 수행’ 하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2] <이국정원>에서는 한복에 가깝게 디자인된 주인공 방음(우민)의 의상이, 그의 민족성 수행을 암시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된다. 방음의 모친 역시 과거에 교제했던 한국인 남성과 찍은 사진에서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3] <사랑의 스잔나>에서 국휘( 이승용 )와 추하(진추하) 두 사람은 민속촌을 방문해 한국의 전통 혼례식이 치러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그 순간 국휘는 추하에게 청혼한다. 홍콩 출신 여성 인물과 한국의 민족성 간 격차를 좁히고 여성 인물의 적극적인 민족성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 윤서연 연구원은 메리 앤 도안(Mary Ann Doane)의 “ 여성 가면(Female masquerade) ”이라는 개념을 빌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계기를 설명했다. 메리 앤 도안에 따르면, 영화 속 여성 인물들은 의상이나 몸짓을 통해 소위 ‘여성적인’ 특성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가부장적 사회 체계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생존 전략을 추구한다. [4] 한·홍 합작이라는 특수한 맥락에서 이 생존 전략은 타국의 문화적 맥락에 적응 하는 데 필요한 의상과 몸짓을 선보이는 홍콩 출신 여성 인물들에 의해 연기된다. (좌) <이국정원> 중 과거 교제한 한국인 남성과 촬영한 사진에서 한복을 입고 있는 방음의 모친 (우) <사랑의 스잔나> 중 추하와 국휘 그렇다면 왜 한·홍 합작 멜로에서는 대부분 한국인이 남성으로, 홍콩 출신이 여성으로 설정되어있을까? 윤서연 연구원은 한국과 남성을, 그리고 아시아의 타국과 여성을 연결해 한국이 국가적 남성성(National masculinity)을 회복 하려고 했다는 이영재의 주장을 인용했다. 이영재는 한국인 남성이 외국인 여성과 교제하는 구도(이를 반영한 멜로드라마 영화의 합작에 한국영화계가 투자한 이력 포함)를,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전후 한국사회가 문화적 영향력을 분출함으로써 권력을 지닌 가부장적 개념의 남성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는 점을 언급했다. [5] 국가로서의 주권을 되찾고 전쟁까지 거친 후, 아시아의 패권 다툼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열망이 극중에서는 젠더를 통한 국적 은유의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외에도 남성 인물의 한국적 민족성과 경제적 능력 보장 여부에 따라 결말이 달라지는 양상도 언급하면서 인물과 내러티브가 설정된 맥락을 주제와 연관 지어 더욱 구체화했다. 가부장제의 한계를 반영한 젠더적 수행과 국가적 권력에 대한 당시 한국의 시각을 포착해, 한·홍 합작의 결과물로서는 깊이 분석된 적이 드문 멜로드라마 장르를 다각도로 관찰하는 계기를 마련한 연구였다. ‘자유의 꾀꼬리’ 정형의 스타덤: 1960년대 영광영업공사의 한·홍 합작 영화 네 편을 중심으로 (홍콩 링난대학교 디지털아트·문화산업학부 연구 조교수 제시카 시우인 여웅) 제시카 시우인 여웅(Jesscia Siu-yin Yeung) 교수는 1960년대 광둥어권 지역의 영광영업공사를 중심으로 제작된 한·홍 합작 영화의 흥행을, 네 편의 작품에서 배우 정형(Ting Yang)의 역량과 연관 지어 설명했다. 그간 만다린어권이나 일본에 비해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한 광둥어권 아시아 여성 배우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리처드 다이어(Richard Dyer)의 스타 이론을 비롯해 정형 출연작을 다수 제작한 제작자 황척한(Wong Cheuk-hon)의 회고록, 그리고 각 작품의 전단을 참고했다. 정형은 황척한이 설립한 만다린어권 제작사 자유영업공사의 1960년대 작품에서 사실적이고 섬세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활약했다. 이후 황척한이 작품 심의 및 개봉 기준이 비교적 유연한 광둥어권에 영광영업공사를 세웠고, 영광영업공사 제작 작품 여러 편에도 주연으로 발탁돼 흥행에 기여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 서유기 >(김수용, 1962)의 경우 당시 한국에서 박정희 정부가 지원한 한양영화공사가 자유영업공사의 막 웡 헤이 감독과 협업하면서 김수용 감독이 연출에 나선 작품이다. 광둥어권에서는 이스트만 컬러 필름과 테크니컬러의 와이드스크린 포맷, 그리고 일본의 특수효과를 최초로 이용해 촬영한 작품이기도 하며, 이 작품에서 정형은 칠선공주로 분해 열연했다. 다음 합작 결과물인 < 에스 오 에스 홍콩(SOS 홍콩) >(최경옥, 1966)은 당시 아시아에서 열풍을 일으킨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유사한 첩보 액션 장르로 합작하기를 신상옥과 최은희 가 황척한에게 제안해 신필름과 영광영업공사와의 협업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정형은 이 작품에 주연 백민( 박노식 )을 돕는 요원 마리나를 연기했는데, 이때 배포된 전단을 보면 ‘대역 없이 정형 스스로 공중의 헬리콥터를 타고 오르는 모습에 주목해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제시카 교수는 주·조연 여부와는 관계없는 정형의 열연이 담긴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소규모 독립영화사로서의 영광영업공사을 대표하는 여성 배우 로서 그가 최선을 다해 연기했음을 보인다. 세 번째 작품은 멜로드라마 < 조용한 이별 >(정창화, 1967)이다. 정형은 이 작품에서 주연 정예화를 연기했고, 함께 연기한 남정임 은 당시 한국 최고의 여성 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홍콩 최고의 여성 배우 정형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임을 감안해 조연을 연기하라’라는 동료 배우 최은희의 조언에 설득되어 출연을 결심했다고 제시카 교수는 전했다. 마지막으로, 전쟁 블록버스터 < 장렬 509 대전차대 >(김동학, 1967)는 다른 배역들의 캐스팅은 황척한이 바라는 대로 진행하되, 주연으로는 반드시 신영균 과 정형이 캐스팅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제작되었다. 정형은 남매를 찾기 위해 군대에 합류한 간호장교 임수랑 역을 맡았고, 제시카 교수는 추운 날씨와 열악한 현장에서 노고가 많았다고 전한 정형의 발언을 강조했다. <에스 오 에스 홍콩(SOS 홍콩)> 중 마리나(정형) / <장렬 509 대전차대> 중 신성호(신영균)와 임수랑(정형) 광둥어권 관객을 타겟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소규모 독립영화사로 시작한 영광영업공사. 이를 이끈 황척한은 다른 대형 제작사에 대항해 경쟁력을 갖추고자 정형의 스타덤을 동원했다. 뿐만 아니라 이스트만 컬러 필름이나 테크니컬러의 와이드스크린 포맷, 일본의 특수효과를 도입하는 등 최첨단 영화 제작 기술까지 뒷받침되었음을 보이며, 제시카 교수는 영광영업공사가 1950~60년대 중국어권 영화계에서 정형을 필두로 차별화되기 위해 노력한 역사를 되짚었다. <반혼녀>와 신상옥·최은희의 기구한 운명: 홍콩 속 영화적 모험 (홍콩 침례대학교 영화과 조교수 케니 응) 케니 응(Kenny NG) 교수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가 홍콩 영화계에 입문하고 합작을 시도하게 된 계기를 해설했다. 신상옥은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로서 제작사 신필름을 운영했으며, 첩보, 액션 스릴러, 멜로드라마는 물론 초자연적 소재까지 다루면서 다양한 장르에 걸쳐 연출을 이어간 유능한 창작자였다. 하지만 국내 영화검열의 강도는 1970년대 중반까지 매우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영화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주제와 표현 방식의 폭이 매우 좁아진 터라 한국영화의 질적 완성도는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자 했던 신상옥 감독에게는 불리한 환경이었으며, 그가 운영하던 신필름도 1975년에 폐업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신상옥 감독은 홍콩 제작사 쇼브라더스와 합작을 시작했다. 쇼브라더스가 제작한 작품에 한국인 배우들이 출연하도록 하는 ‘ 위장 합작(Counterfeit co-production) ’의 방식이었는데, 케니 응 교수는 이것이 신상옥 감독으로 하여금 제작 과정에서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양국 영화산업의 역량을 개발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6] <반혼녀> 중 한도령(이승용)과 연화(리칭) 한편, 신상옥 감독이 시대적 한계를 지닌 사회 제도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과 그를 에워싼 금기시된 사랑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케니 응 교수는 당시 검열을 비롯한 사회적 권력의 억압에 의해 억눌리고 은폐된 욕망이 분출되는 양상 을 관찰했다. 특히 한·홍 합작 영화 < 반혼녀 >(신상옥, 1973)에서, ‘유령’이라는 초현실적 소재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추구해 상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내러티브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고 봤다. 거액의 돈을 가지고 연인 연화(리칭)에게 가려고 했던 한도령(이승용)은 산적에게 기습을 당하고, 한도령과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다한 연화가 유령이 되어 그를 찾아와 사랑을 이어간다는 이야기이다. 케니 응 교수는 유령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라는 설정 자체가 사회적 통념에 반하려는 시도이며, 여기에 호러와 코미디 요소가 섞여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말한다. 또한 성과 폭력에 관한 묘사가 비교적 엄격히 규제되었던 1970년대의 시대적 한계를 그만의 예술성으로 극복한 방식 역시 인상적이라고 덧붙였다. [7] 신상옥 감독과 쇼브라더스 간 이와 같은 협력을 기점으로, ‘유령이 등장하는 로맨스’가 아시아 영화에서 장르로 인식되고 활발히 제작되는 데 기여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 토론 * 패널 1의 발표자 4인이 발표한 후, 홍콩 링난대학교 디지털아트·문화산업학부 연구 조교수 에녹 이욕 탐(Enok Yee-Iok Tam)이 아래와 같이 질문했고, 발표자들이 답변했다. Q. 제시카 시우인 여웅 교수에게 (질문1) 본 연구에서 정형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홍콩 자유영업공사와 영광영업공사의 설립자 황척한 이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한국과 홍콩의 합작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또한 영광영업공사 는 소규모의 독립영화 제작사에 가까웠음에도, 한국은 어떻게 이들과 합작을 고려하게 되었을까? (답변) 냉전 시기 홍콩과 대만, 한국(남한),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은 아시아의 반공 지역으로 구분되었고, 황척한은 이들 중 대만과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의 영화시장에 진입을 시도했지만 결과가 성공적이지 않아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서유기>가 흥행하면서 제작자로서 그의 명성이 한국에 전해지고 합작 대상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당시 개최되어오던 아시아영화제도 아시아 국가들 간의 합작을 매개하는 장으로 기능했을 수 있다. (질문2) 한·홍 합작이 활성화되던 시기 아시아에서 ‘ 007 시리즈 ’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말씀하셨다. 007 시리즈 열풍을 중심으로 한 당시 첩보 액션의 인기가 황척헌과 한국영화계의 합작에 미친 영향이 궁금하다. (답변) 007 시리즈는 비슷한 시기 여러 문화권에 의해 이용된 영화적 트렌드였다. 세계 각지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유사한 그림을 연출하고 싶어 했고, 헬리콥터 액션 신 촬영에 동참한 정형 역시 이 트렌드에 합류하는 배우로 인식되려는 의지를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국가들 역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 시리즈와 유사한 장르에 안착해, 박스오피스 흥행을 보장하고 상업적 성공을 이룩하려고 했으리라고 본다. Q. 정종화 팀장에게 (질문1) 위에서 제시카 교수가 언급하셨듯이, 팀장님께서도 007 시리즈 개봉과 더불어 첩보 액션 장르의 인기가 합작 영화의 장르 설정 및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한국형 첩보 액션이 냉전이 진행 중이던 당시 대만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얻은 배경을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 (답변) 한국에서 개봉한 첫 007 시리즈는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 007 제2탄 – 위기일발 >(테렌스 영, 1963)이었다. 국내 개봉 연도인 1965년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엄청난 흥행 성과를 거뒀고, 당연히 한국 스타일의 첩보 액션 장르가 확립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는 특히 북한을 적대자로 설정하는 반공 기조의 내러티브가 결합되었다. 또한 스파이 출신의 여성과 한국 남성 요원이 연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이국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릴 넘치는 모험 등 여러 대목에서 007 시리즈의 흥행 공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007 시리즈의 자장 아래 제작된 작품들은 당시까지 제작 및 개봉된 한국영화에서는 관찰되지 않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강인하고 생기 넘치는 남성 주인공 이 등장하며, 서구의 007 시리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족’에 대한 강한 집착 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만을 포함한 해외 국가에서 제작된 작품들과 대만 박스오피스에서 경쟁해야 했던 강범구 감독의 관점에서, 007 시리즈 첩보 액션의 이러한 특징들은 대만 관객을 사로잡는 데 유용한 기회로 작용했다. 그는 장르영화에 관한 새로운 미학 을 추구하고, 빠른 편집 을 시도했으며,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액션 내러티브 를 고안했다. 그 결과, 같은 시기의 대만 장르영화들에 비해 그의 작품이 국제적 감각을 지녔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코멘트_패널 체어 김신동 교수) 개인적으로, 007 시리즈는 첩보 액션 스릴러임과 동시에, 세계 각지의 생활 모습을 노출하며 낯선 지역의 풍경을 매혹적인 소재로 소비하는 이국주의(Exoticism)의 관점에서 제작된 관광 영화 (Tourism film)에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한국영화계 역시 이러한 시각적 즐거움이 전시된 영화를 만들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1960~70년대에는 멀리 위치한 해외 국가에 접근하기가 여의치 않았고, 홍콩을 비롯해 일본의 오사카, 필리핀의 마닐라, 대만 정도가 그들이 지리적 배경으로 선정할 수 있는 ‘외국’의 범위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홍콩은 그중에서도 한국영화계와 관객 모두가 매력을 느낀 공간이었다. <패널 2> 아시아 영화 속 경계 허물기 일본 교토대학교 김수현 연구원이 이끈 패널로, 동시대 중국어권 영화가 서로 다른 국적이나 지역성, 젠더 등의 ‘경계’를 사유 또는 표현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중국어권 동아시아의 ‘악센트 차이니즈 시네마’: 장률의 <야나가와> 등 트랜스내셔널 영화 제작을 이론화하기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 박사 수료자 클로이 원셴 장) 클로이 원셴 장(Chloe Wenxian Zhang)은 영화 속에서 관찰되는 억양과 방언이 작품의 형식과 미시적 담론, 그리고 인물들의 자기 정체성 인식의 측면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를 연구했다.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재중동포 3세로서 국가나 민족의 경계에 관한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를 선보였던 장률 감독의 < 야나가와 >(2021)를 텍스트로 선정했다. 장률 감독은 ‘국적’을 주제로 디아스포라 감성을 일깨우는 비주류 독립영화, 하나의 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경계를 가로지르는(Border-crossing)’ 영화를 발표한 초국가적 작가(Transnational auteur)로 알려져 있다. 클로이는 장률이 대사의 ‘ 억양(Accent) ’을 사유하는 방식을 통해 본 작품이 색다른 트랜스내셔널 시네마가 될 수 있음을 보였다. <야나가와>에서 주인공 아추안, 그리고 형제 리동과 리천은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표준 중국어로 인식된 ‘부동화’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했고, 이에 대한 인물들의 기억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같은 중국인이더라도 표준 중국어인 부동화를 구사하지 못하는 이는 소외되도록 하는 관습으로서의 ‘내부 타자화(Internal othering)’를, 클로이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 타자의 단일언어주의(Monolingualism of the Other) ’ 개념을 적용해 설명했다. 데리다는 인간은 오직 한 가지의 언어를 모국어로 습득하지만 이는 본래 ‘타자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타자는 권력을 바탕으로 그의 언어만을 말하도록 교육하거나 강요하고,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은 언어를 배우고 소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베이징 방언을 사용하던 아추안이 부동화를 선호하는 다수로서의 ‘타자’가 지닌 권력에 의해 소외되자, 그가 공동체 안에서 존립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리동이 자신 역시 베이징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타자가 강요한 언어에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말이다. <야나가와> 중 아추안과 리동 한편, 클로이는 억양이 단순히 누군가의 정체성을 재단하는 지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실존하는 행위 로 인정할 수 있음을 보였다. 억양이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열망하고, 그에게 친밀감을 표현하는 방식을 가리킨다고 설명한 문화비평가 푸자 라간(Pooja Ragan)을 인용했다. <야나가와>의 후반에 아추안과 일본인 여성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지만 상대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다고 표현한 장면과, < 후쿠오카 >(2019)에서 한국인과 중국인(만다린어 구사), 일본인이 단어가 아니라 발화의 톤과 몸짓을 통해 소통하는 모습이 그 예다. 단어가 무너지면, 삶의 방식으로서 실존하는 억양과 몸짓 등이 비로소 언어를 초월해 공명을 일으키고, 장률의 작품에서처럼 아시아 국가 간의 친밀감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클로이는 <야나가와>를 내셔널,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라는 개념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이 선택한 ‘억양’의 색다른 의미를 철학적 차원에서 발굴해 장률 작품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소개했다. 내러티브를 매개하고 인물들의 감정을 증폭하는 핵심 요소로서, 그리고 언어로는 극복할 수 없는 서로 다른 화자 간의 장벽을 친밀감으로 허무는 행위 그 자체로서 ‘억양’을 상정한다. 언어의 형태가 아니면서도 영화에서 인물 간 본연의 소통을 돕는 실천적 행위로서 ‘억양’의 지위를 재정립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소속감의 한계를 질문하기: 동시대 한국영화 속 화교 인물 연구 (홍콩대학교 현대언어문화학과 방문 교수 김소혜) 김소혜 교수는 동시대 한국영화가 화교 또는 조선족 출신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한국영화가 인물들의 다양한 정체성을 재현하는 데 여전히 한계를 보임을 지적한다. 화교와 조선족은 내/외국인을 가르는 이분법에 도전하고, 민족적 동질성에 관해 일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을 흔든다. 이렇게 국적이나 민족 인식에 관한 긴장을 논의하는 장이,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통해 마련되기 시작했다. 김소혜 교수는 화교를 이주 시점을 기준으로 두 종류 [8] 로 구분하고, 그중에서도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와 < 극한직업 >(이병헌, 2018), 그리고 < 신세계 >(박훈정, 2012)를 사례로 연구했다. 인천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성 다섯 명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낙후된’ 지역으로 묘사되는 인천은 번화한 서울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동시에 화교 인구가 이주한 공간이라는 이미지도 덧붙여지면서 작품 전반에 ‘소외’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더불어, 인물 다섯 명 중 화교의 후손으로 설정된 일란성 쌍둥이 비류( 이은실 )와 온조( 이은주 )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개성을 지닌 주체로 비춰지지 않는다. 일란성 쌍둥이라는 인물 설정에서 나타나듯,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으로서의 캐릭터는 그들에게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인물들 모두가 불확실한 미래를 찾아 떠나고, 그들이 함께 돌보던 고양이가 유일하게 인천에 남은 비류와 온조에게 건네진다는 내러티브 역시, 두 인물이 인천에게 입혀진 ‘소외된 지역’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함을 암시한다. 비류와 온조는 다른 인물들과 같이 몸소 성장을 경험하는 주체가 아닌 그들의 성장에 기여하는 주변적 인물 로만 그려진다. 2000년대 이후 화교 인물은 특유의 언어적, 문화적 유동성을 바탕으로 한국과 더욱 광범위한 중국어권 사회 사이의 소통을 매개하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문화에 더욱 잘 동화된 ‘ 안전한 비주류 ’로서의 화교 인물이 형성된다. 배우 진선규 는 매우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인물로 그려진 전작 < 범죄도시 >(강윤성, 2017)에서의 역할과 다르게, <극한직업>에서는 전직 유도 국가대표이자 현직 경찰로 등장하며 유순하고 정직한 이미지를 표방한다. 한국인 여성 장 형사( 이하늬 )와의 로맨스까지 등장하면서 그가 민족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내 위치를 점한다는 인식이 강화된다. <신세계>에서 이자성( 이정재 )은 화교 출신 인물이지만 이를 이용해 폭력 조직에 잠입하며 한국 경찰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반면, 이 작품에서 정청( 황정민 )이 일시적인 폭력 행사를 위해 불러들인 조선족 인물들은 의상과 말투 등에서 한국인과 크게 대비되도록 설정되어있다. 게다가 후반부에는 이자성마저도 끝내 경찰 조직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폭력 조직에 동화되고, 한국의 공식적인 사회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 진입한 지하세계에서 소속감을 획득한다. 한국영화에서 화교 인물이 배경으로만 소비되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낸 사례임을 인정하더라도, <극한직업>과 <신세계>와 같은 동시대 작품은 그들을 ‘한국에 동화되기 쉬운 덜 잔인한 비주류’라는 이미지로 재단한 후에 소환하려고 한다. 김소혜 교수는 이러한 설정이, 화교 인물들을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주장한다. 화교 인물들에 대한 가시성은 확보되었지만, 한국사회의 다양성 담론의 한계와 더불어 한국영화가 긴 시간 침묵을 강요받은 비주류 공동체를 재현하는 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경계 위의 여성 동성애: <녹야>와 <블루 송> 속 한·중 퀴어의 조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 미디어학과 박사 수료자 앤디 주) 앤디 주(Andy K. Zhu)는 중국 퀴어영화에서 한국과 중국의 퀴어적 조우가 발생하는 맥락을 설명한다. 특히 최근 발표되는 중국 퀴어영화 중 다수가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성을 아우르는 중국 북동부의 ‘ 동북(Dōngběi) ’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9] 여기에 퀴어 연구를 접목해, 이분법적인 사고로부터 탈피해서 국적과 젠더 등에 관한 복잡한 질문을 사유하는 공간으로서 동북이 지닌 가능성 역시 제안하고, 관련 영화로는 < 녹야 >(한슈아이, 2023)와 <블루 송>(경즈한, 2023)이 언급됐다. 중국의 퀴어영화의 배경으로 동북이 부상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앤디는 영화의 본질이자 단어 자체에도 반영되어있는 ‘ 움직임 (Kino)’의 개념을 퀴어에 적용했다. 그는 다수의 퀴어영화가 인물들의 퀴어한 욕망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국경을 초월한 ‘움직임’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퀴어영화 연구에 필요한 방법론으로 ‘ 키노정치학 (Kinopolitics)’을 선택한다. 나아가, 두 작품에서 특히 돋보이는 퀴어한 인물들의 움직임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 경계 위의 여성 동성애 (Bordering lesbianism)”를 소개했다. 국가의 중심지로부터 소외된 지역에서 역시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여성 퀴어 인물들이 관계를 맺고 특유의 움직임을 실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녹야> 중 중국인이지만 한국으로 이주해 공항에서 세관 직원으로 근무하는 진샤(판빙빙)는 가정폭력과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로 고통 받던 중에 초록머리 여자( 이주영 )를 만난다. 두 사람이 공항 보안 검색 중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이방인이자 이주 노동자인 진샤에게 한국인인 초록머리 여자는 그를 유혹하듯이 미소를 지으며 가깝게 다가온다. 퀴어적 접촉의 시도 이후, 두 인물은 서로를 위협하는 존재들을 제거함으로써 국경, 젠더, 권력의 경계를 넘나들며 폭력에 저항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을 함께 실천한다. 작품에서 인천·서울은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한 이주 노동자와, 마약 밀매에 연루되며 불안정한 삶을 지속하는 한국인이 동시에 머무는, 역시나 역동성이 가득한 공간으로 표현된다. <녹야> 중 <블루 송>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인 하얼빈에 거주하며 서로 다른 민족적 정체성의 공존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소녀 루시엔이, 조선족 소녀 밍메이를 만나며 퀴어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극중 루시엔은 교내 공연을 준비하며 한복을 입어야 하는 장면에서 그가 입을 차례가 되자 여성용 한복이 모자라 남성용 한복을 입게 되고, 한복 자체의 질감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한국의 민족성을 상징하는 한복에 익숙하지 않은 것과 여성용 한복에 접근하지 않는 설정은, 국적과 젠더의 측면에서 루시엔의 정체성이 고정되어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또한 루시엔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진관에서 만나 그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밍메이는 하얼빈에서 조선족이 머무는 공간으로 루시엔을 안내하며 또 다른 민족성의 경험을 유도하기도 한다. 두 작품은 퀴어적 인물에 대해 널리 각인된 이미지를 재확인하지 않는다. 대신 장르적 혼종성(네오 누아르인 <녹야>, 성장과 멜로를 섞은 <블루 송>)과 언어와 의복의 뒤섞임, 키노정치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역동적 공간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조우하는 장면을 짚으며 이들 작품의 ‘악센트 시네마(Accent cinema)’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특히 동북과 한국, 북한의 경계에서 퀴어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퀴어영화를 지리적 공간과 연결했다는 점이 독특했다. 이러한 지리적 경계가 지닌 영화적 가능성을 향후 중국어권 퀴어영화에 대한 연구에서 주목할 주제로 남겨두기도 했다. * 토론 * 패널 2의 발표자 3인이 발표한 후, 홍콩 링난대학교 디지털아트·문화산업학부의 박지희 조교수가 아래와 같이 질문했고, 발표자들이 답변했다. Q. 클로이 원셴 장에게 (질문1) <야나가와>의 배경이 되는 일본 후쿠오카현의 야나가와시는 국제적으로 활동한 일본의 예술가 오노 요코의 고향이자 일제강점기 조선의 윤동주 시인이 생을 마감한 지역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제국주의 역사의 상흔이 남아있는 장소 이다. 이를 배경으로 극중 인물들이 중국어의 암묵적 위계와 그로 인한 차별, 차별이 낳은 상처와 분투한다는 설정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이러한 배경 설정이, 클로이가 언급한 ‘악센트 시네마’가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품이 되는 데 기여하는 것일까? (답변) 시간 관계상 장률이 야나가와를 식민지의 상흔을 간직한 역사적 공간으로서 어떻게 사유해냈는지를 다루지 못했다. 오노 요코와 윤동주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역사적 또는 언어학적으로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많았다. 주목할 점은, 장률의 작품은 언어학적, 영화적, 역사적으로 풍부한 의미를 지닌 기호들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억양(악센트)’은 그러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역사적 핵심 주제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꼭 적용하고자 하는 개념이다. Q. 김소혜 교수에게 (질문1) 한국영화에서 화교 인물들은 말씀해주신 대로 배경의 일부 또는 단일민족주의에 관한 고정관념을 연상시키는 객체로 소비되기도 한다. 하지만 ‘ 장르영화 ’의 문법 속에서 이들은 또 다른 종류의 매력이나 잠재력 을 발휘하기도 한다. 예시로 드신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발견하셨을지 궁금하다. (답변) 본 연구에서는 화교 인물들이 그간 작품의 주요 인물의 뒤편으로 물러서는 존재로 묘사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말씀해주신 대로 그들은 한국의 역사와 지역성을 깨닫는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성장 장르라고 할 수 있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비류와 온조를 일란성 쌍둥이로 설정해 서로를 거울에 비춘 대칭적 이미지로 제시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주의 역사와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세계>에서 역시 화교에 대한 편견을 답습하는 장면이 많이 발견되지만, 이자성의 경우 화교 출신이자 한국 경찰로 근무하는 양가적 정체성을 지닌 인물로 설정되어, 갱스터 누아르·언더커버 장르의 문법 안에서 모종의 자율성(또는 모호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기존의 경향을 전복할 만큼의 위력을 지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추후 화교 인물의 재현을 시도한 다른 작품들의 사례에서 지속적으로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신세계> 중 *** [1] 1963년 10월 7일 발생한 주홍칭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도쿄에서 주홍칭(周洪景)이라는 인물이 정치적 망명을 위해 대만 입국 허가를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가 그를 중국 공산당으로 보내면서 대만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긴장이 발생했다. [2] 이는 다른 작품에서 여성 인물에 대한 한국인 남성 인물의 기대로도 표출된 바 있다. < 비련 >(정창화, 1967)에서 양일환( 남궁원 )이 한국 여성의 옷은 아름답고, 상대 여성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고 언급하거나, < 조용한 이별 >(정창화, 1967)에서 이상현( 신성일 )이 극중 유학생인 정예화(정형)와 창덕궁에서 만나 한복을 입도록 하고 시부모님께 절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장면이 예가 된다. [3] 하지만 모친은 현재 다른 남성과 결혼해 홍콩에 정착했는데, 이렇게 중년 여성 인물은 현 가정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다른 국적의 남성과 과거에 맺은 연인 관계를 숨기는 경향이 짙다. < 나는 비밀이 있다 >(김용덕, 1963)에서도, 차경녀( 주증녀 )는 홍콩에서 결혼한 적이 있지만 이내 한국으로 넘어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며 홍콩에서 낳은 자녀의 존재 역시 부정한다. [4] Doane, M.A., Film and the masquerade: Theorising the female spectator , Screen, 1982. [5] 이영재, 『아시아적 신체』, 소명출판, 2019. [6] 대표적으로 < 대폭군 >(임원식, 1966)이 있다. 한국어 버전에는 최은희가, 중국어 버전에는 리리화가 출연했다. 컬러로 촬영되었으며 홍콩 쇼브라더스 스튜디오와 서울 교외 지역 모두를 로케이션으로 하여 약 25,000여 명이 촬영에 임했다. 제작에는 오백만 홍콩 달러라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어, 양국 영화산업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외에도 < 보은의 구름다리 >(최경옥, 1963), < 달기 >(최인현, 악풍, 1964) 등 신필름과 쇼브라더스가 합작한 작품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7] 이외에도 < 꿈 >(신상옥, 1955)은 전후 한국 여성이 맞닥뜨린 사회적 제약을 조신( 황남 )과 달례( 최은희 )의 금기시된 로맨스, 그리고 클로즈업과 몽타주 등의 장치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승려와 여성 간의 사랑과 성적 욕망을 다루며 사회적 금기에 도전한 1950년대 영화적 실험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8]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국 산둥 성에서 조선으로 이주한 중국인을 ‘구화교’로,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92년에 한국과 수교를 맺은 뒤 한국으로 대거 이주한 한국계 민족, 즉 조선족을 ‘신화교’로 칭했다. [9] 동북은 1990년대부터 국영 공장들의 폐쇄로 중국에서 쇠퇴와 폐허의 상징이 됐지만, 앤디는 영화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수십년간 중국사회의 변천사를 반추하게 하는 공간으로 이 지역을 재조명한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괜히 겁이 나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정말 몰라요 들어보긴 했어요 가슴이 떨려 오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걸요 화장도 할 줄 몰라요 사랑이랑 처음이어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떨어져 얘기해요 얼굴이 뜨거워져요 엄마가 화낼 거에요 하지만 듣고 싶네요 사랑이란 그 말이 싫지만은 않네요 - <나는 열아홉살이에요>: 윤시내 노래, 이장희 작곡: < 별들의 고향 >(이장호, 1974)의 주제가 한국영화의 여성상은 참으로 많은 부침을 겪었다. 감히 시대에 앞선 욕망을 추구하는 여자는 처참히 몰락해야 했으며 *주1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7-80년대의 도시에서 순진무구하나 배운 것 없는 소녀는 기필코 사창가로 전락했다. 90년대 이후, 새로운 서사로 한국전쟁을 그려낸 수작들에는 발달장애가 있는 여성들이 단골로 등장한다. 머리에 꽃을 달고 마을을 내달리는 그녀들은 동화 같은 공동체에 폭력이 소개되는 순간,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탄광의 카나리아들이다. *주2 이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여성상은 단연코, 몰락하여 사창가로 들어가는 여성들이다. < 영자의 전성시대 >(김호선, 1975),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가히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7-80년대의 “호스티스 멜로” 영화들. 한국만큼 순수한 여성의 추락 서사에 집착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비비안 리를 주인공으로 한 < 애수 >(Waterloo Bridge, 마빈 르로이, 1940)가 한국에서만 유독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한국에서 <애수>는 < 벤허 >(윌리엄 와일러, 1959)나 < 아라비아의 로렌스 >(데이빗 린, 1962)만큼이나 “주말의 명화”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정작 영어권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은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외에는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파란 눈의 동료교수들은 유독 한국에서만 주목받은 이 영화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냐고 내게 묻는다. <별들의 고향> 중 거울 앞에서 기도하는 경아 20세기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죄목은 대개 둘 중 하나다. 너무 많이 알거나, 혹은 너무 모르거나. 아는 여성은 많이 아는 죄로 응징을 당하고, 모르는 여성은 배운 것 없는 무식의 죄로 몰락한다. <별들의 고향>에서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엄마가 화낼 거예요”라고 노래하는 천진난만한 경아( 안인숙 )의 죄는 아무것도 모름, 즉 순진함이다. 너무 순진해서 신마저도 그녀를 버린다. 여관으로 끌려가 반 강제적 성관계를 하기 전, 필요한 것은 콘돔과 녹음기, 변호사였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경아는 거울 앞에 서서 기도하는 것으로 이 모두를 대신한다. “저를 행복하게 해 주소서, (이 남자가) 저를 버리지 않게 해주소서”라고 화장실에서 기도한 그녀의 간절함은 어디에도 가 닿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 자신의 잘못이다. 세상은 그 사실을 경아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스스로에게 타락한 여자라는 굴레를 씌우고 죄의식과 수치심의 선악과를 베어 문 여자의 추락은 끝이 없고, 그런 그녀를 놓아두고 세상은 세상의 질서대로 묵묵히 발전해 나갈 뿐이다. < 가여운 것들 >(요르고스 란티모스, 2023)을 보는 내내 윤시내가 청순하고 앳된 목소리로 데뷔 전 부른 <별들의 고향>의 주제가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진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메리 셸리적인 *주3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죽은 모체의 몸에 모체의 태내에 있던 태아의 두뇌를 장착한 벨라(엠마 스톤)는, 두뇌는 아기이나 몸은 성인 여성이다. 경아의 후예로 21세기의 한국에 등장한 베이글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얼굴은 해맑은 어린이이되 몸은 글래머인 성인 여성 -- 베이비와 글래머를 합성한, 어원부터 심상치 않은 포스트휴먼 냄새를 물씬 풍기는 여성상. 걷는 것조차 서툴던 벨라는 외부의 자극에 명민하게 반응하며 구강기-항문기-성기기를 꼭꼭 다지며 (두뇌만) 알차게 성장하여 끝없는 성욕을 가진,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름다운 여성이 된다. 여기까지는 이성애자 남성의 편의대로 주물(鑄物) 할 수 있는 완벽한 대상으로 보인다. <가여운 것들> 포스터 하지만, 그녀에게는 기억과 트라우마가 없다는 반전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맞지만, 그런 무지로 인해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사건들은 그저 재미있는 삶의 경험일 뿐, 벨라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주입하지 않는다. 수치심과 죄의식에 태생적 면역을 가지고 있는 벨라의 모습은 유아성욕의 묘사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마치 곤충의 다리를 하나씩 절단하며 관찰하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호기심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벨라의 성욕은, 최은미의 단편소설 「라라네」(2015, 『목련정전』, 문학과 지성사)에 등장하는 긴머리의 소녀 라라를 닮았다. 최은미의 소설 속 라라는 애정결핍으로 끊임없이 자위행위를 하고, 그의 엄마는 저주에 가까운 말로 겨우 유치원생에 불과한 라라에게 수치심과 죄의식을 주입한다. 그러나 벨라에게는 그렇게 할 엄마도 없다. 그녀를 저지하는 것은 “벨라 백스터”라는 의학적 프로젝트의 성장을 기록하기 위해 고용되었지만 후에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약혼자가 되는 맥스(라미 유세프) 뿐이다. 그는 단호하고 진지하게, 남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은 예의바르지 못한(not polite) 행동이라고 훈육한다. 벨라에게 사회 속에서의 예의라는 개념은 이렇게 처음 뿌리를 내린다.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억압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 예의라는 개념으로 배운 셈이다. 이후 벨라의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단죄하지 않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의 극한을 보여준다. 집과 실험실 밖의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뻔한 거짓말로 자신을 유혹하는 던컨(마크 러팔로)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벨라는 그의 리스본 여행 제안을 받아들인다. 지능발달로만 보면 엄연히 어린 아이인 그녀와 “성난 점핑(furious jumping)”이라고 명명되는 섹스를 질펀하게 즐기는 이 관계는 그러나 착취로 귀결되지 않는다. 한계치를 벗어나는 그녀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던컨 쪽이며, 무료해진 벨라는 휴식을 취하는 그를 혼자 놓아두고 표표히 외출을 감행한다. 식음료의 냄새와 맛, 도시의 강렬한 비주얼과 소음 등, 오감을 자극하는 세계를 하나씩 맛보며 벨라의 두뇌는 유아기와 소년기의 모든 징후를 짧은 시간 안에 축약적으로 드러내며 성장한다. 바야흐로 청년기를 맞은 그녀의 두뇌는 어느 순간, 성욕을 지식에 대한 욕구로 환원시킨다. 책 읽는 것을 “성난 점핑”보다 좋아하게 된 그녀에게 던컨은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녀의 지식에 대한 갈망은 이미 발사된 로케트처럼 궤도를 착실히 따르며 더 큰 우주로 나갈 뿐이다. 유람선에서 만나 벨라의 짧은 생에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 주는 정갈한 매너의 청년 해리(제러드 카마이클)는 그런 그녀의 호기심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해리의 손에 이끌려 배에서 내려 난생처음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본 그녀는 연민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역시 난생처음으로 번민을 맛본다. 유람선의 카지노에서 번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녀의 행위는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꿀 수 없는 낭만적이고 어리석은 행위일지언정,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벨라의 철없는 자선행위는 던컨과 그녀를 파산으로 내몰고 둘은 호화 유람선에서 내쫓기고 만다. 어찌어찌 파리에 도달한 두 사람은 자산도 생산수단도 없이 살아남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하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벨라의 “선택”은 유일한 생산수단인 자신의 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선택이란 참으로 희한한 단어이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발돋움하는 젊은 여성에게 선택이란 단어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유학을 가거나, 가업을 잇거나, 직장을 갖거나 하는, 동등한 비중의 장단점을 가진 옵션들 중 개인이 자신의 가치관에 맞추어 고르는 것이다. 거리에서 굶어 죽는 것과 매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어떤 자살은 타살이듯, 이미 더러워진 몸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춘밖에 없다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젊은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놓아버리는 결과인 매춘 행위를 “선택”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다. 이렇게 사용된 선택이란 단어는 고장 난 시스템에 면죄부를 주고 개인에게는 가장 큰 폭력이 된다. 인권이 부재한 경제개발이라는 한국사회의 고장 난 시스템 안에서, 경아에게도 영자에게도 매춘은 결코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으며 암묵적 합의에 의해 일어나고 방관되는 사회적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벨라는 이 사회적 폭력마저도 스스로 선택한 삶의 실험으로 만들어버린다. 자발적 성매매라는 위험천만하고 논쟁적인 설정은 관객들의 반감을 사기도 하고, 그녀의 실험적 태도를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정사씬이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는 삶의 권태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발적 성매매자가 되는 벨드쥬르, 세브린느 *주4 처럼 자신의 삶에 대한 멈출 수 없는 벨라의 실존적 갈증이 있다. 이처럼 벨라의 실험은 극한으로 치달으며, 삶은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성노동자 뚜와넷(수지 벰바)의 이끌림으로 사회주의를 접하며 자신의 고민들을 단순한 낭만적 연민 이상의 의식(意識)으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휴일을 이용해 사회주의 전당대회에 나가는 그녀들 앞에 런던으로 돌아간 줄 믿었던 던컨이 다시 나타난다. 벨라에게 청혼을 거부당한 던컨이 창녀라고 소리 지르자 뚜와넷은 자신들은 “자립적인 생산수단을 가진 자”라고 친절히 정정해준다. 사실 이 모든 모험의 연대기와 별도로, 벨라는 이미 맥스와 약혼한 사이며 그 사실에 나름 놀랍도록 충실하다. 이미 알고 있는 던컨과의 관계는 물론, 매춘 경험에 대해 담담하고 정직하게 약혼자에게 이야기 하는 벨라를 맥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용을 가진 벨라가 동등한 관용으로 보답 받는 셈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은 영화의 다른 장면들에 비해 덜 선정적이지만, 주체적 선택권을 가진 여성이라는 벨라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 갓윈(윌렘 데포)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간 벨라는, 던컨이 데리고 온 처음 보는 남자에게 결혼을 저지당한다. 자신의 육체에 다른 사람(어머니)의 두뇌가 들어있을 때 함께 살던, 일종의 전남편, 알피(크리스토퍼 애봇)다. 솟구치는 호기심 반, 모호한 책임감 반으로, 벨라는 아버지와 약혼자의 만류를 무릅쓰고 알피를 따라간다. <별들의 고향>에서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잃고 상품성을 잃어버린 경아의 존재는 두 남자 사이에서 물건처럼 떠넘겨 지지만(버거우니 당신이 대신 좀 맡아주시오), 벨라는 자신을 추종하는 남성들 사이를 스스로 선택하며 자유롭게 횡단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매춘조차 할 수 없는 경아가 수면제를 먹고 눈밭에서 동사한다는 설정으로,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의 완전한 파괴로 마감되는 근현대 여성잔혹사 <별들의 고향>과 달리, <가여운 것들>에서 파괴되는 것은 벨라를 착취하려 했던 남성들뿐이다. 희대의 카사노바 던컨은 그녀를 성적으로 착취하려 했지만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파괴되고, 할례수술을 통해 벨라를 자신의 자손을 생산하는 자궁으로 축소하려 했던 알피는 염소의 두뇌를 갖게 된다. 인류의 역사 속 너무나 오랫동안 여성상의 두 축을 이루었던 창녀와 어머니라는 전형성은 이렇게 산산조각 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잘못”이라는 가스라이팅에서 살아남은 벨라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즐기고, 도전하고, 성취한다. 세상의 부조리와 자신을 착취하려는 주변인물들을 가뿐히 넘어서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그녀의 비밀은 무엇일까? 죄의식과 수치심이 없는 그녀에게는 맥스에게 교육받은 “예의”와, 해리를 통해 깨닫게 된 세상의 불행에 대한 “연민”이 있다. 맥스는 예의 바른 사람이지만 경계를 넘어선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해리는 세계의 모순을 설명하는 일관되고 세련된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세상을 두려워하는 소년”일 뿐이다. 반면 벨라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무모하고 무조건적인 관용을 지닌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과학실험의 대상으로 자신을 탄생시킨 아버지를 용서하게 만들고,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그녀를 성장시킨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지만, 자아와 타자를 아우르는 자유에 이르는 길은 어쩌면 벨라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이라는 두 대의 등대를 따라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느긋한 오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칵테일을 마시며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해부학 공부를 하는 벨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면 이런 가사가 나올 것이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괜히 신이 나네요 그런 말 더 해 주세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더 배우고 싶어요 심장이 세게 뛰네요 그런 말 더 해 주세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걸요 화장은 필요 없어요 이 모든 게 처음이예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와 주세요 더 만지며 얘기해요 온몸이 뜨거워져요 엄마는 죽고 없어요 뭐든지 알고 싶어요 사랑이란 그 말도 가끔은 재미지네요 <별들의 고향> 중 경아와 <가여운 것들> 중 벨라 다시 경아의 세상으로 돌아가보자. 벨라가 경아처럼 대한민국의 70년대를 살아갔다면 어떨까? 일찌감치 데이트 살해를 당해 세상에서 사라지는 위험만 넘어설 수 있다면 경계가 없는 꿈을 꾸는 큰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 아니다. 정신병동에 감금되거나 감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경우의 수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는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잘못이라고 끝없이 세뇌했을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벨라를 산산이 부수어 뜨리는 것으로 응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벨라의 존재는 그레이의 소설과 란티모스의 영화 속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터무니없는 꿈이고 동화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이미지는, 언어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현상(現象 phenomonon)일 뿐이다. 벨라의 말처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하기 전까지 지구는 평평했고, 전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상은 어두웠다. “그것이 다다르기 전까지 세상은 그 이전의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녀의 언어는 도발이 아닌 혁명이다. 주1. < 하녀 >(김기영, 1960), < 자유부인 >(한형모, 1956)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2. < 그 섬에 가고싶다 >(박광수, 1993), < 웰컴 투 동막골 >(박광현, 2005)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3. 최초의 SF작가로 인정받는 영국의 여성 작가. <가여운 것들>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여성주의적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설정과 제재는 물론, 작가인 메리 셸리의 삶의 궤적까지도 <가여운 것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메리 셸리의 결혼 전 성(姓)은 메리 갓윈 Godwin이다. 갓윈은 영화 속에서 벨라 아버지의 이름(first name)으로 차용 되고, 벨라는 그를 갓(God)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실제로 당대의 진보적 정치사상가였던 메리의 아버지 윌리암 갓윈은 일찌감치 어머니를 여읜 딸에게 당시 여성으로 받기 힘든 양질의 교육을 선사했다. 교육을 위해 딸을 급진주의 사상가 친구 집에 보내기도 하는데, 그 친구의 성(姓)이 영화 속 벨라의 성(姓)인 백스터(Baxter)이다. 메리는 백스터의 집에서 그의 네 딸들과 자매처럼 지내며 작가로서의 감수성을 발전시킨다. 메리 갓윈은 이후 아버지의 사상을 추종하는 유부남 퍼시 셸리와 사랑에 빠진다. 벨라처럼 도주하여 퍼시와의 유럽여행을 감행하는 메리 갓윈은 퍼시의 아내가 죽은 후 그와 결혼하여 마침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메리 셸리가 된다.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던 메리 셸리의 삶을 영화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가여운 것들>을 보는 큰 재미다. 주4. < 벨드쥬르(세브린느) >(Belle de Jour, 루이스 부뉴엘, 1967). 사랑하는 의사남편과 유복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세브린느는 완벽해 보이는 삶에도 불구하고 공허감을 이기지 못한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고급 요정에서 남편의 근무시간인 낮에만 성매매를 하는 세브린느에게 마담은 벨드쥬르라는 애칭을 부여한다. 조세프 케셀의 동명 소설(Belle de Jour)을 원작으로 한, 논쟁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여성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어지는 몽환적 서사와 부뉴엘 감독 특유의 아이러니와 검은 유머가 가득한 역작이다. 김진아 (UCLA 영화과 교수, 감독) l < 그 집앞 >(2003), < 두번째 사랑 >(2007), < 파이널 레시피 >(2013) 등 다섯 편의 장편영화와, 미군위안부3부작 < 동두천 >(2017), < 소요산 >(2021), < 아메리칸 타운 >(2023) 등을 연출. 미국 UCLA대학 교수로 시각예술의 재현 윤리, 초국가적 영화론을 가르치고 연구한다.
2001년 | 싸이더스 감독: 허진호 | 각본: 류장하 이숙연 신준호 허진호 | 제작: 차승재 진가신 히데시 미야지마 | 촬영: 김형구 | 미술: 박일현 | 음악: 조성우 CAST 상우: 유지태 | 은수: 이영애 | 할머니: 백성희 | 아버지: 박인환 | 고모: 신신애 허진호 감독의 < 봄날은 간다 >(2001)는 그의 데뷔작 < 8월의 크리스마스 >(1998)과 함께 한국의 멜로, 로맨스 장르를 이야기할 때 영원히 언급될 작품입니다. “사랑이 변하니…” “라면 먹고 갈래요?” 같은 대사들의 일상적 울림과 함께, 이 영화는 ‘연애’라는 관계에 깃들어 있는 씁쓸한 감정들을 리얼하게 드러냅니다. 현장 공개는 2001년 여름에 있었습니다. 상우(유지태)가 은수(이영애)에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장면이었죠. 묵호시 삼본아파트 앞, 해안도로와 바다가 함께 하는 그곳. 버스에서 내린 은수는 상우에게 다가가 이별의 말을 전합니다. 현장은 너무나 조용했는데요, 가끔 새 소리나 동네 아낙들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습니다. “우리 헤어지자.” “내가 잘할게.” “헤어져.” “너 나 사랑하니? (침묵) 사랑이 변하니… (침묵) 헤어지자…” 연인이 이별하는 일반적인 장면이지만, 그 감정을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하는 건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허진호 감독은 ‘숏-리버스 숏’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테이크를 사용합니다. “두 사람의 시간이 실시간으로 한 번에 진행될 때와, 시간을 잘라서 붙여 놓았을 때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에요. 난 전자의 느낌이 더 좋았어요.” 이 영화의 카메라는 김형구 촬영감독(맨 오른쪽)이 잡았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인데요, 김형구 촬영감독은 유 감독님의 촬영부 출신이었죠. 허진호 감독은 현장에서 스스로를 “헤매는 스타일”이라고 말하는데요, “설명도 안 하고, OK 사인도 잘 안 주고 그러는데, 스태프들이 많이 이해해주었다”고 고마움을 전합니다. 은수는 사랑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어쩌면 사랑을 믿지 않는 인물입니다. 이영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독님은 물론 배우와 스태프를 통틀어서 아무도 은수에 대해 똑 부러지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뭐라고 한마디로 말하기가 참 어려운 인물이에요. 하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고요.” 버스 안 현장 모습입니다. 모자를 쓴 허진호 감독 뒤로 류장하 조감독이 보입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는데요, <8월의 크리스마스> 조감독이기도 했죠. 2004년엔 < 꽃피는 봄이 오면 >으로 감독 데뷔했고 < 순정만화 >(2008) < 더 펜션 >(2018)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2월 3일에 5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한번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두 배우의 연기를 허진호 감독이 미소 지으며 보고 있네요. 이영애는 자신과 유지태와 허진호 감독의 성격이 비슷했고, 그래서 현장에서 잘 맞았다고 하네요. 한편 허진호 감독은 “과연 사랑은 변할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변하는 것 같아요. 그게 나쁜 것도 아닌 것 같고. 사람 자체가 변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모습을 지키려는 것도 좋지만, 변해가는 것에 대해 집착하고 붙잡으려 한다면 행복해지는 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허진호 감독은 은수라는 캐릭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은수도 혼자 있을 때는 힘들어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겠죠. 하지만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는 활발하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여자예요. 그래서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상우는 사랑을 처음 해보는 거니까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은수는 사랑이 없어지면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부정해버릴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에요.”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가 자신에게 “일종의 실험”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채워나가는 느낌의 연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자연스러움’을 경계해야 했고요.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의 감정 연기가 조금은 달랐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짜 감정을 다루니까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정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하고 슬퍼하진 않잖아요. 실제로는 직장에 나가 일도 하고 그러죠. 영화 속에서 상우가 은수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는 신이 있는데, 속으로는 슬프고 힘들지만 둘 다 겉으로는 슬퍼하지 않아요. 그런 내재된 슬픔이 보는 사람에게 전이될 수 있는 영화가 <봄날은 간다>라고 생각해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영애는 “슬펐다”며, 그래도 좋았던 건 ‘소리’였다고 합니다. “평소 자연의 소리에 민감한 편이었고 관심도 많았기에 소리를 채집하는 사람들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한편 유지태는 “멜로 영화 같지 않다”는 게 첫인상이었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슬픔을 다룬 영화거든요. 누구나 슬픔이 있잖아요. 사랑하고, 헤어지고, 잊혀지는 슬픔.” “이 신에선 상우가 화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은수가 나가니까 좀 이상한데.”(허진호)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닐까요?”(이영애) “그럼 이번엔 제가 나가는 걸로 한 번 해볼게요.”(유지태) 세 사람은 하나의 테이크가 끝나면 마치 오누이들처럼 소곤소곤 모니터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다음 테이크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은 쉴 새 없이 변했는데요, 은수가 상우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상우가 그 손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대사를 빼기도 하고, 은수와 상우가 번갈아 가며 화면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그렇게 10번이 넘는 테이크가 이어졌습니다. 허진호 감독은 <봄날은 간다>에서 되도록이면 설정하지 않고, 콘티도 만들지 않고, 상황만 던져준 채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각자 포커스를 달리한 두 배우의 투 숏입니다. 허진호 감독은 유지태의 첫인상을 ‘맑다’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는데요, 촬영 전에 상우는 어떤 사람일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영애는 첫 만남부터 조금 남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하네요. < 선물 >( 오기환 , 2001) 현장에서 바로 올라왔는데, 공항인가 역 화장실에서 막 세수를 한 맨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허진호 감독은 유지태에서 “물이 안 채워진 유리잔처럼 배우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빈 잔에 물이 조금씩 채워져서 찰랑찰랑 넘칠 때쯤 영화가 개봉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백지상태에서 함께 조금씩 그림을 그려나가길 바라셨던 거죠.” <봄날은 간다>는 한국의 싸이더스의 홍콩의 어플라우즈 픽쳐스와 일본의 쇼치쿠가 공동 제작한 영화입니다. 제작 발표회에서 각국 제작진과 배우, 감독이 함께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맨 오른쪽에 홍콩의 제작자인 진가신 감독이 보이네요. <봄날은 간다>는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의 이야기”라는 설정에서 발전한 영화입니다. 그러면서 작가들과 영화사 기획실 사람들의 연애담들이 하나둘씩 보태졌고, 그렇게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8월의 크리스마스>에 비하면 <봄날은 간다>는 훨씬 더 거칠고 현실적이며 기복이 큰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