캬바레부인
- 감독
- 김봉은
- 제작년도
- 1990
- 출연
- 이수진, 이동준, 전수경, 박용철, 이무정, 허진, 강희주, 문명권, 이미령, 유창국, 최재호, 우정아, 한주연, 박용호, 박용팔, 이정민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낙원상가와 함께 탄생한 극장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256(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28)에 위치한 낙원상가는 1960년대 후반 서울시 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지어졌다. 1969년 아파트와 상가가 공존하는 지상 15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이 완공됐을 때 볼링장, 당구장, 다방, 캬바레 등 다양한 상가가 입점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허리우드 극장은 낙원상가 4층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개관 당시의 운영주체는 고 신상옥 감독의 영화사였던 신필름이었다. 낙원상가는 서울시 도시 계획으로 건축된 1세대 주상복합건물 중 하나로 1967년 10월 완공됐다. 지금도 남아있는 건물의 현판에는 ‘낙원삘딍’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당시 서울시는 종로구에 대규모 건물을 지을 만한 넓은 대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4차선 도로 위에 지상 15층 규모의 건물을 올리는 독특한 건축 방식을 선택했다. 그 결과 낙원빌딩 1층은 주차장과 신호등, 건널목까지 있는 4차선 도로가 됐다. 이는 도로 관련법 체계가 완비되지 않았던 시절에 준공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지금은 공공도로 위에 민간업체가 건축물을 짓는 일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낙원빌딩의 지분을 소유한 법인이나 개인은 토지세가 아닌 도로 점용료를 내고 있다. 1970년대 말까지 낙원상가는 다양한 상가와 아파트가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의 성격을 유지했지만, 1979년 탑골공원 정비 사업 이후 다수의 악기 점포들이 들어오면서 악기전문상가로 특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도심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한때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건물의 상징성을 인정받아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됐다. 씨네필의 메카였던 때 1980년대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낙원상가는 서울시민들이 여가를 즐기기 위해 찾는 인기 명소였다. 영화 애호가들과 음악인들이 찾는 중심지로 호황을 누리던 허리우드 극장은 1980년대 강남 개발 사업이 시작되고 1990년대 멀티플렉스 극장이 생겨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1997년 기존 2000여석 규모의 개봉관을 레드, 블루, 그린 3개관으로 분리하며 시대의 변화를 적응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대형 극장의 몸집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허리우드 극장은 예술영화관 전용관에 장소를 임대하는 곳으로 공간의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다. 2005년 4월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나란히 낙원상가로 자리를 옮기면서 허리우드 극장은 ‘시네필을 위한 전당’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사단법인 한국시네마테크협의희가 위탁 운영하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이며, 2002년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문을 열었다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화사 이모션픽쳐스의 대관으로 운영됐던 필름포럼은 기존 허리우드 극장 3개관 중 2개관을 임차하며 각각 480석과 300석의 규모를 자랑하는 예술영화관이 됐다. 당시 기획·운영은 임재철 영화평론가가 맡았다. 필름포럼은 2008년 4월 이화여대 후문으로 이사했고, 서울아트시네마는 2015년 3월까지만 낙원상가 내에서 운영되다가 계약이 만료되어 인근 서울극장으로 위치를 옮겼다. 실버세대를 위한 영화문화의 공간으로 허리우드 극장 입구의 돼지국밥 골목 인사동 거리와 탑골공원에 인접한 허리우드 극장은 젊은 층과 외국인 관광객, 노인 인구에게 모두 접근성이 높다. 따라서 서울아트시네마가 계약을 맺었던 2015년까지 예술영화를 즐기는 젊은 시네필이 방문하기에 어렵지 않은 곳이었다. 2009년 개관한 실버영화관 역시 노인 인구가 높은 인근 거리 일대와 시너지 효과를 내며 지속 가능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 2016년 8월에는 육의전 빌딩부터 낙원상가까지 이어지는 ‘송해길’이 만들어졌다. 낙원동에서 오래 활동했던 고 송해 선생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낙원상가 입구에는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돼지국밥 식당들이 줄지어 있어 이곳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돼지국밥 골목 옆 낙원상가 입구 계단 현재 허리우드 극장은 ‘낙원악기상가’로 명칭을 변경한 건물 4층에서 임차 형태로 개별 극장에게 공간을 내주고 있다. 극장 앞에 위치한 광장은 허리우드 극장 시절부터 각종 공연 및 행사가 열렸던 공간이다. 현재는 노인들을 위한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작은 정원으로 인테리어를 바꿨다.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허리우드 클래식-실버영화관’을 운영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은 2009년 1월 이곳에 문을 열었다. 바로 옆에 자리한 낭만극장은 서울아트시네마가 떠난 자리에 2015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필름포럼이 이사한 후 공연장으로 활용되던 기존 허리우드 극장의 상층, 낙원상가 5층에 해당하는 공간은 현재 ‘모두의 극장’이란 이름으로 추억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허리우드 극장 입구의 정원 실버영화관을 운영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에 소속된 직원의 90% 이상은 노년층이다. 오전, 오후 그리고 주 3일 로테이션으로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어 고용노동부로부터 60대 이상 노년층을 채용하고 사회공헌 일자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 야외매표소 ※ 5층은 공연장인 "모두의 극장"으로 활용 중 인터뷰: 김은주 대표(추억을 파는 극장 대표, 헐리우드 클래식-실버영화관 운영) 실버영화관을 운영 중인 (주)추억을 파는 극장 김은주 대표 임수연 _낙원상가에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이 입주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세요. 김은주 _원래는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있었는데, 필름포럼이 먼저 이사를 한 뒤 그 자리에 제가 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이 들어오게 됐어요. 서울아트시네마가 이사를 한 뒤에는 낭만극장이 입주했습니다. 현재는 ㈜추억을 파는 극장에서는 영화관을, 낭만극장에서는 영화관 1개관과 공연장을 운영합니다. 처음 극장을 대관하게 됐을 땐 젊은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하나,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나 고민이 있었어요. <더티 댄싱> <영웅본색> <미션> 이런 옛날 영화들을 상영을 해볼까 해서 왔는데, 사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올 줄 알았는데 노인 관객들이 대거 오시는 거예요. 그때 그분들이 옛날 영화를 갈망하는 눈을 봤고, 그 눈을 제가 뿌리칠 수 없었어요. 여러 조건이 맞아 떨어져서 2009년 1월 실버영화관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임수연 _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김은주 _낭만극장 대표님은 2013년 관객으로 처음 만났어요. 은행에서 오래 일을 하시고 퇴직한 직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고민하시길래 실버영화관과 같은 결을 갖고 있는 극장을 운영해보시라고 제안드렸어요. 그래서 2015년 서울아트시네마가 떠난 자리에 낭만극장이 문을 열게 됐습니다. 실버영화관이 영화만 상영한다면, 낭만극장은 영화도 상영하고 공연도 합니다. 실버영화관은 7~80대를 대상으로 상영한다면, 낭만극장은 그보다는 젊은 영화들도 틀어요. 그래서 낭만극장에서는 도전해볼 만한 영화들도 틉니다. 저희가 히트했던 대작 위주로 진행한다면, 낭만극장은 ‘오드리 헵번’전, ‘존 웨인’전, ‘윌리엄 웰먼’ 특집전 같은 기획전 위주로 프로그램을 짭니다. 실버영화관(좌)과 낭만극장(우) 입구 임수연 _실버영화관의 상영 프로그램은 어떻게 결정되나요. 김은주 _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종이에 써서 집어넣는 함이 있어요. 이를 토대로 저작권이 협의된 작품들을 추립니다. 아직은 이 시장의 저변이 확 넓어진 건 아니기 때문에 마니아성 영화보다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으로 노년층들이 좋아하는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유명한 작품들이 주로 언급됩니다. 임수연 _공간 인테리어 측면에서 어떤 부분을 신경 쓰고 있습니까. 김은주 _코로나 이전에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미세먼지였어요. 전 시대에 비해 폐렴으로 돌아가시는 노인들이 상당히 많아요. 그만큼 미세먼지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거죠. 실버영화관도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원과 같은 극장을 만들려고 했어요. 노인을 위한 극장이라고 초라하고 허름할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거죠. 영화뿐만 아니라 노인들의 삶의 질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식물들로 장식된 4층 로비 벽면 임수연 _이곳을 찾는 노년 관객들의 성향은 어떤가요. 김은주 _눈을 뜨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되게 행복하신가 봐요. 부산에서 표를 끊어 올라오셔서 굳이 티켓까지 보여주시면서 “자리가 없으면 서서 볼 거다” 라고 하세요. 여기 오시는 분들은 극장 매표소에 있는 박스에 사식 넣듯 자꾸 초콜릿, 과자 같은 것을 집어넣으세요. 어떤 날은 집에서 재배했다면서 감자를 엄청 삶아갖고 오시고, 사과나 곶감을 보내시기도 해요. 일반 극장은 관객과 소통할 일이 없는데 저희는 관객과 쌍방향 소통을 상당히 많이 한다는 게 굉장히 독특하죠. 실버영화관 내부 코로나로 인해 격석으로 좌석을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임수연 _실버영화관에서 일하는 직원 규모는 어느 정도 되나요. 김은주 _㈜추억을 파는 극장에는 30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중 10% 미만이고 나머지는 다 노인 분들이에요. 병원도 가셔야 하고 스케줄이 많아요. 그래서 오전과 오후, 그리고 주 3일 로테이션으로 업무를 나누느라 많은 사람들이 근무를 하게 됐어요. 또 저희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됐어요. 고용노동부에서 60대 이상 경험자들이 현장에 파견 나가 일을 할 수 있게끔 돈을 주고 지원하는데, 그렇게 사회공헌 일자리로 일을 하시는 분들도 있죠. 임수연 _상영환경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다면? 김은주 _아쉬운 건 필름으로 계속 상영을 하고 싶지만 전 세계적으로 필름이 공급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필름으로 영화를 틀지 못하는 게 아쉬워요. 다행인 건 필름의 거의 마지막 시대에 가장 좋은 필름으로 고전 명작을 많이 구입했어요. 만약 <사운드 오브 뮤직>을 상영한다면 저희가 갖고 있는 거의 원판에 가까운 필름으로 트는 게 가장 화질이 좋을 거예요. 필름비는 한편당 500만원, 번역과 통관까지 합치면 1000만원 이상 드는데 2004~2005년쯤 작품을 대거 구입했습니다. 실버영화관 영사실 내부와 영사기 임수연 _앞으로 이 공간이 사람들에게 계속 기억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요. 김은주 _예산 지원이 뒷받침돼야 하지 않을까요. 실버영화관이 멀티플렉스는 아니지만 멀티 플레이어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했던 영화 키드 세대가 지금은 노인 세대가 됐어요. 이분들이 좀더 품격 있는 노년을 맞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친구가 돼서 항상 곁을 지켜줘야 해요. 어려운 것부터 가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즐겁게 시작할 수 있는 시도를 해 나가려고 해요. 극장이 사라지면 안 되기 때문에 영진위에서 다양한 예산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김종준 대표(낭만극장 운영) 낭만극장 김종준 대표 임수연 _대표님은 과거 허리우드 극장에 대한 추억이 있을 법한 세대입니다. 그 기억이 낭만극장을 운영하는데 영향을 미쳤나요. 김종준 _제가 62학번입니다. 60~70년대에는 영화를 관람하는 게 제일 좋은 취미였습니다.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도 영화 보는 게 제일 큰 행사였죠. 500원, 1000원이면 영화도 보고 불고기도 먹을 수 있었죠. 그때 기억 때문에 영화도 지금까지 좋아하는 거예요. 어느덧 저도 늙었으니까, 노인들의 행복을 위해 아지트를 만들고 외로움을 덜어드리고자 낭만극장을 열었습니다. 임수연 _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의 프로그램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김종준 _차이는 없어요. 코로나19 전에는 관객이 1500~2000명씩 왔어요. 한 극장에서 프로그램 한번 할 때 3~4일 정도 상영하거든요. 여기 오는 관객들은 오늘은 낭만극장에서, 내일은 실버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식으로 하다 보면 일주일에 영화를 4~5편 봐요. 그래서 시너지 효과가 좋아요. 내가 영화관에 가야 사는 것 같다고도 하시고요. 서대문의 청춘극장도 김은주 대표가 맡고 있는데, 거기까지 티켓 2000원으로 서울시로부터 위탁을 받아서 영화를 틀고 있습니다. 임수연 _낭만극장과 공연장을 함께 운영하고 계세요. 5층은 언제부터 공연장으로 만드신 건가요. 김종준 _2년 정도? 그 전에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다른 공연팀이 있었는데 몇 천 명씩 와서 공연을 봤어요. 그러다 코로나 때문에 중국 관광객이 들어오지 못하니까 저희가 국내 공연을 하는 곳으로 만든 거예요. 예전에는 일주일에 2~3번씩 공연을 했어요. 낙원상가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악기상가가 있잖아요. 악기상들이 자기 고객들에게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로 소개하면 저희가 대여를 해주기도 했죠. 지금은 극장 2개관이 각각 300석, 공연장이 400석, 총 1000석입니다. 5층 공연장 모두의 극장 내부 임수연 _낭만극장과 실버영화관이 공유하는 라운지를 꾸밀 때 특히 어떤 점에 신경 쓰셨나요. 김종준 _영화를 안 보시는 분들도 로비에 와서 즐기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코로나 이전에는 식당에서 간단한 음료와 간식도 팔았어요. 공기 정화를 위해 공기청정기도 설치했습니다. 임수연 _낭만극장을 주로 찾는 관객들은 대체로 어떤 사람들인가요. 김종준 _가장 많은 건 80대에요.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70대였는데 그분들이 지금은 80대가 됐을 테니까요. 5~6년 전에는 90대 관객이 오면 신기해서 따로 모셨는데, 지금은 예사롭지 않은 일입니다. 가장 많은 건 80대, 그 다음이 70대, 그 다음이 90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60대 관객이 가장 적습니다. 대체로 50년대부터 60년대 초,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보시던 분들이 많습니다. 낭만극장 내부 임수연 _튼튼하게 지은 만큼 건물 자체는 앞으로도 보존될 수 있겠지만,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영화관이 계속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종준 _60~70년대에는 영화를 많이 봤지만 80~90년대에는 야외에 나가서 골프도 치고 다른 여가활동을 많이 하게 됐어요. 앞으로 베이비부머 세대를 흡수하기 위해 공연장에서 베이비부머 연예인들이 공연을 많이 하게끔 하는 게 낭만극장의 숙제이자 목표에요. 추억의 명화를 트는 일은 70~80대가 80~90대가 되고 나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를 끌어들여야 해요. 필자: 임수연(씨네21) 사진촬영: 최성열(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4월 19일
1967년 <청춘극장>(강대진)과 검열의 체계화 검열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때는 검열에서 위반사항이 발견되지 않을 때이다. 1967년 <청춘극장>은 바로 이러한 역설의 증거인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1965년 이후 왜색에 대한 검열은 강화되었음에도 1967년 <청춘극장> 검열에서는 왜색 문제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제작자가 미리 검열 기준을 의식하여 검열에서 문제가 될 만한 왜색을 노출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별 문제 없이 검열을 통과한다. 그런데 1967년 <청춘극장> 검열 과정을 들여다보면 왜색의 사전 삭제와 같이 제작자로 하여금 미리 자체 검열을 통해 제한사항을 최소화하게 만들도록 검열이 체계적으로 강고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법 제2차 개정(1966년 8월3일 개정)과 시행(1967년 4월4일 시행)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검열제도의 변화가 보다 잘 드러나기도 한다. 1966년 6월29일에 <청춘극장>의 제작신고서가 공보부 1) 영화과에 제출된다. 1966년 3월4일에 사단법인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한 것으로 되어 있고, 별첨되어 있는 공연권취득증명서가 3월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제작사는 3월부터 이 영화의 제작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7월7일에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사인 합동영화주식회사가 시나리오와 전속출연자 활용각서를 첨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영화 제작신고에 따르는 미비서류 보완 통보>를 제작사에 보낸다. 8월3일자로 개정된 영화법 에 의해 시나리오 검열은 법제화되는 반면 전속제는 폐지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는 과도기적인 중복으로 보인다. 제작사는 영화법이 개정되고 난 10월이 되어서야 공보부에서 요구한 보완서류를 제출한다. 그리고 2개월 후인 12월6일에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시정사항 없음’으로 시나리오 검열 의견서가 기안된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행정 절차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림 1) <영화제작신고서> (그림 2) <극영화 제작신고에 따르는 미비서류 보완 통보> (그림 3) <극영화 시나리오 내용 검토> 2차 영화법 개정 이후 신규영화허가신청서에 구비해야 하는 서류는 영화시나리오를 비롯해 납세완납증명서, 자립저축필증, 동시상영문화영화복사수속필증 등 13가지로 보다 복잡해졌다. 이를 통해 보건대 개정된 영화법의 시행은 1967년 4월3일이라고 하나 제출 서류에 대한 관리가 보다 엄격해짐으로써 실제로는 이미 개정된 영화법에 준하는 행정 검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보부 측의 미비서류를 제출해달라는 요청과 그에 따른 제작사의 보완 제출이 있은 끝에 1966년 12월29일자로 <영화검열합격증>이 발부된다. (그림 4) <신규 영화상영허가신청서(구비서류목록)> (그림 5) <국산영화 “청춘극장” 상영허가>와 별첨 <영화검열합격증> 위 서류에 의하면 <청춘극장>은 “원작인 『청춘극장』을 영화화한 것으로서, 때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무렵, 우리나라 젊은 학도 백영민, 장일수, 신성호 등은 각자 풍운의 꿈을 안고 항일투사로 일본유학생으로 또는 국내에서 애국활동을 하던 청춘상을 그린 극영화”로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은 1959년의 것(“가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한국청년들과 여성들의 활약상과 이들 젊은이들의 애정 문제를 묘사한 내용”)에 비해 항일운동과 애국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일한 제한사항이 백영민이 학병으로 출전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일본 군가를 단축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강화된 왜색 검열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항일 애국주의의 강화와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영화에 대한 미성년자 관람 심사에서는 보다 많은 제한이 이루어졌다. 우선 등급은 중학생 이상 관람가가 되었는데, 그에 비례하여 겁탈 장면, 캬바레에서 무희가 춤추는 장면, 영민이와 유경의 정사가 암시되는 장면, 임신을 알리는 대사 등 주로 성적인 장면들이 삭제 대상이 되었다. 1965년 <춘몽>을 둘러싼 음화 논란 이후 공안에 가려져 있던 외설이 검열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한다. <청춘극장>의 관람 등급 심사에서 제한된 내용은 성적인 표현에서도 검열이 보다 엄혹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6) <영화 미성년자 관람심사 결과 통보> 1975년 <청춘극장>(변장호)과 무너지는 검열 1975년 <청춘극장>은 사회가 유신체제로 이행되고 제4차 영화법 개정(1973년 2월16일)이 이루어진 이후, 게다가 긴급조치 이후에 제작된 영화다. 제4차 영화법 개정의 골자는 영화 표현 영역에서 유신체제의 기조를 관철하는 것이었으므로 표현의 자유는 더욱 통제되고 억압되었다. 통제와 억압의 강도는 긴급조치 이후에 나날이 심해졌으며, 그에 따라 영화 검열기준 또한 강고해졌다. 1975년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1975년 <청춘극장>에 대한 시나리오 검열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 이전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의 등장이다. 예륜은 1970년부터 극영화 시나리오 검열을 전담한 기관이다. 제작사는 우선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을 거친 뒤에야 검열 담당 부처(공보부, 문화공보부 등)에 제작신고를 할 수 있었다. 이에 1975년 <청춘극장>의 시나리오 검열도 ‘예륜’에서 수행한 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청춘극장>의 제작사는 1975년 6월17일자로 시나리오 검열을 예륜에 신청하고, 예륜은 6월20일에 검열을 수행하여 공보부에 보고한 것이다.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는 이 영화의 내용이 “꼬마 신랑 백영민과 장일수, 신성호는 동창생이었다. 이들이 일제 치하에 겪는 수난을 묘사하여 식민지 치하의 형극의 길을 걸었던 민족의 불운을 되돌아보는 광복 3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요약되어 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수난’, ‘형극’과 같은 국가의 위기를 상기시키는 표현이 쓰이고 있고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 시국과 결부하여 생각할 때”라는 전제 하에 “비록 일제 때 있었던 학병 강제 동원 등[이라 하더라도] 일반에게 전쟁기피증과 반전사상을 주입시키는 악영향을 주지 않도록 세심 유의”하라는 의견이 첫 번째로 명시되어 있다. 당시는 남북한 모두 정권 유지를 위한 이념이 강화되며 남북한 관계가 경색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고조시켜 사회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한편 언제든지 국민을 전쟁에 강제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 검열에서 항일정신의 구현을 영화의 미덕으로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반전의식을 고취시켜서는 안된다는 모순적인 제한조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7)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그림 8) <종합의견 보충설명 및 부분시정사항>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 단계를 통과한 제작사는 제작에 착수하겠다는 신고서를 1975년 7월1일자로 문화공보부에 제출한다. 문화공보부에서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 의거하여 시나리오를 개작하라고 7월7일자로 제작사에 통보한다. 이에 7월12일 제작사는 문화공보부의 개작 요구에 따라 충실히 수정하겠다는 보고서와 함께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한다. 문화공보부 영화과에서는 개작된 시나리오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여 상부에 보고하면서 제작사에 수리 통보를 한다. 이때 “본 작품은 제작과정에서 사계 권위자의 고중을 받아 시대적 배경으로 뚜렷이 하여 전쟁기피증 및 반전사상과 대일 굴욕감정이 유발되지 않도록 특히 유의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에 대한 적대의식은 고양하되 염전(厭戰)의식은 지양하라는 지침이 다시금 강조된다. (그림 9) <국산극영화 “청춘극장” 대본 개작 통보> (그림 10) <국산극영화 “청춘극장” 대본 개작 보고의 건> (그림 11) <극영화 “청춘극장” 제작신고 수리 통보>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18일에 제작사는 방대한 제작규모에 비해 제작시일이 촉박하여 시나리오 검열에서 시정이 요구된 사항을 다 고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내용의 각서와 경위서를 제출한다. 이에 대한 별다른 조치 없이 이튿날인 9월19일에 이 영화는 검열에 합격한다. 이는 늘어나는 제한조치에 비해 그것을 위반했을 시의 조치는 의외로 탄력적이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영화 검열 의견서에서는 “백영민과 장일수, 신성호는 학교 동창생으로서 이들이 일제 치하에 겪는 수난을 묘사하여 식민지 치하의 형극을 걸었던 민족의 수난사를 되돌아보는 내용”이라고 하면서도 또 다시 꽤 많은 제한사항을 통보하고 있다. ‘학생이 선생에게 대드는 장면’, ‘대통령 모독’, ‘성적인 표현’ 등이 주로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제한사항은 중학생 이상 관람할 수 있게 한 관람 등급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2) <국산영화 “청춘극장” 검열합격> (그림 13) <영화검열 의견서> 1975년 <청춘극장>에서는 그 이전에 없었던 예고편에 대한 검열까지 이루어진다. 본편이 검열에 합격한 지 일주일 뒤인 9월25일에 제작사는 <예고편 검열신청서>를 제출한다. 이때에도 납세증명서가 첨부된다. 그리고 9월27일에 예고편 검열 합격이 통보된다. 여기에서도 주요인물의 별칭에 해당하는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삭제하라는 제한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림 14) <예고편 영화검열 신청서> (그림 15) <국산 영화 예고편 “청춘극장” 검열합격> (그림 16) <청춘극장 예고편 검열대본> 중 마지막 페이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1975년 <청춘극장>은 대본 검열에서부터 예고편 검열에 이르기까지 보다 많은 검열 단계를 거치며 또 그만큼 많은 시정을 명령받았다. 한 마디로 1959년, 1967년보다 매우 엄격한 제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대통령’이나 ‘장군’과 같이 군부와 관련된 표현에 대해서는 히스테릭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민한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드는 것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음이 드러난다. 설사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선생의 관계라 하더라도 ‘하극상’은 용납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사항들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위계적이고 경직되어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러한 경직성은 ‘왜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일본 복색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일본어도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설사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일본어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규제되었던 것인데 이 시기에 이르면 민족주의가 강화되며 그 일환으로 국가 주도로 국어순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그 규제가 더욱 강화된다. 한편 “동경 가면 예쁜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는 표현도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삭제된 것은 주목을 요한다. 이는 당시 남한보다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발전한 일본은 영화 표현에서 경계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과하다고밖에 할 수 없어서 이러한 조치를 통해 오히려 당시 정권의 불안이 엿보이기도 한다. 앞서 검열이 효과적으로 수행될 때는 오히려 검열 과정에서 제한 사항이 없을 때라고 말했다. 반대로 검열에서 제한 조치가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검열의 기준이 제작 과정에 관철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1975년에 이르면 시나리오가 예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반려되는 비율이 80%에 이르게 된다.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국가의 영화 통제는 영화산업과 회복할 수 없는 괴리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유신체제 이후 그 괴리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리고 1975년 이후에는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게 된다. 금지하고 제한해도 검열에서 문제가 될 영화가 계속 기획되었다는 것은 검열이 무너지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1975년 <청춘극장>은 바로 그러한 변곡점에 놓인 영화였다. 1) 영화 검열 업무는 1961년 10월2일 이후 문교부에서 공보부로 이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