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환님이 명진스님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노래를 파워풀하게...
- 제작년도
- 2010
비장의 OST가 연재되고 거의 십년이 지나 시즌2를 앞둔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의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코로나라는 팬데믹 상황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던 극장가와 더불어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의 약진은 문화산업의 지형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영화들은 제작되고 있고, 새로운 감독들과 스타들도 어김없이 탄생한다. 영화음악도 마찬가지. 돌아오는 비장의 OST 시즌2에선 이제 막 신인의 티를 벗고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영화음악가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의 비장의 OST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 클로버필드 10번지 >의 독특한 점은 영화에 참여했던 그 어떤 누구도 이 영화가 8년 전 깜짝 히트한 파운드 푸티지 방식의 ‘클로버필드’ 프랜차이즈가 될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각본을 쓴 작가 조시 캠벨과 맷 스투큰, 연출을 맡은 댄 트라첸버그는 물론, 주연 배우들마저도. 할리우드에선 종종 전혀 상관없는 원작을 들고 와 속편으로 뜯어고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월터 웨이저의 스탠드 얼론 소설 <58시간>은 < 다이하드 2 >가 되었고, 조너선 헨즐리가 쓴 ‘사이먼 세즈’란 각본은 < 다이하드 3 >로 탈바꿈되었다. 하지만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영화가 제작되던 중간까지도 ‘the Cellar’라는 각본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 스릴러가 될 예정이었다. 최연소 오스카 감독상에 빛나는 데이미언 셔젤은 이 히트리스트에 올랐던 각본을 각색하며 연출까지 고려했는데, 그가 고친 부분이 바로 지상에 나온 후 펼쳐지는 뒷부분, 이른바 반전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셔젤은 애초 계획대로 < 위플래시 >의 기회를 거머쥐었고, 댄 트라첸버그 감독에게 바톤이 넘어간 이 프로젝트는 제작자인 J. J. 에이브럼스가 클로버필드와의 연관성을 떠올리며 프로덕션 중에 세계관 확장(?)이라는 놀랄만한 방향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베어 맥크레리 이에 당황한 건 영화 촬영 전부터 참여해 후반을 앞두고 있던 영화음악가 베어 맥크레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는 TV쪽에서 꽤 잘 나가던 것과 달리 영화 쪽에선 호러나 스릴러, SF 등 b급 장르에서 행보를 이어온 신인에 가까웠는데, 모처럼 손 내민 파라마운트라는 메이저 스튜디오와 J. J. 에이브럼스라는 거물과의 협연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대학 시절 할리우드 영화음악 레전드인 앨머 번스타인에게 사사 받고, 영화음악가 리처드 깁스 밑에서 견습 생활을 했는데, 리처드 깁스가 스케줄 충돌로 인해 TV시리즈 <배틀스타 갤럭티카>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의 대타로 메인 음악가로 들어가게 되며 작곡가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후 <휴먼 타겟>과 <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 >, <유레카>, < 워킹 데드 >, <쉴드 오브 에이전트>, <아웃랜더> 등 손대는 작품마다 반향을 일으키며 TV시리즈 음악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과 행보를 이어왔는데, 이런 광폭적인 업자들의 인기에 대해 선수 중에 선수인 제작자 쌍제이 에이브럼스도 모를 리 없었다. 베어 맥크레리는 매주 반복되는 TV를 넘어 더 큰 스케일에 도전을 원했고, 갑작스런 클로버필드 세계관으로의 편입은 그래서 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점에서 베어 맥크레리가 <클로버필드 10번지>에 온갖 정성과 야심을 갈아 넣은 건 당연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제리 골드스미스와 버나드 허먼이라는 불세출의 영화음악가가 들려줘왔던 장르의 토대를 자양분 삼아 그는 고전 할리우드 장르 스코어가 가진 장기와 미덕이 <클로버필드 10번지>에서도 십분 발휘되길 원했다. 영화 후반이 프로덕션 과정에서 변경되긴 했어도 여전히 주된 무대가 되는 건 벙커였고, 그는 여기서 음악 색채에 대한 전체적인 모티브를 얻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뉴올리언스의 벙커 세트장에 방문해 며칠을 보냈고, 어두운 통풍구, 답답한 콘크리트 감방, 비좁은 복도 등을 경험하며 그 공간 안에서 나올 소리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운드 팀을 동원해 양철 쓰레기통, 환풍기소리, 전동기구 고주파, 벽돌, 유리, 톱, 체인, 징, 에어로졸 스프레이, 각종 기계 등 다양한 소리들을 채집해 샘플링하고 왜곡·변형하며 음악 전반에 효과로, 타악기로, 그리고 엠비언트로 상당수를 녹여냈다. 이 사운드 디자인이 가미된 스코어는 벙커 안에 벌어지는 세 주인공들의 불안한 심리 싸움은 물론, 벙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황을 상상하게끔 만들며 들려주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스코어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독특한 소리들이 <클로버필드 10번지> 스코어의 근간이 되었지만, 베어 맥크레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특별히 더 주안점을 둔 지점이 있었으니, 바로 벙커라는 공간 그 자체를 들려줄, 아니 바로 그 공간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블래스터 빔’이란 악기와 주인공 미셸의 캐릭터를 형상화하기 위해 동원된 터키의 민속악기 ‘야일리 탐부르 yaylı tambur’다. 제리 골드스미스가 <스타트렉: 극장판>에서 사용해 충격과 명성을 안긴 블래스터 빔은 페달 스틸기타를 큼지막이 확장시킨 것과 같은 대형악기(길이가 무려 3-5m에 이른다)로, 수많은 와이어가 연결된 본체를 손가락이나 막대, 활, 파이프 혹은 타피 같은 물체로 치거나 문지르거나 튕기며 연주한다. 이름만큼이나 어둡고 불길하며 환상적인 특유의 깊은 음색으로 SF나 호러 장르에서 사랑을 받았고, 제리 골드스미스의 뒤를 이어 제임스 호너가 <우주의 7인>에서, 존 배리가 <블랙홀>, 모리스 자르는 < 드림스케이프 >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7-80년대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 20년간은 어느 영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다는 이 독특한 악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새 생명을 부여했다. 그랜드 피아노나 업라이트 베이스, 콘트라 바순의 가장 낮은 음보다 훨씬 더 깊은 아래의 저음을 으르렁 울리며 저돌적으로 휘몰아치는 긴장감 넘치며 파워풀한 소리는 가히 이 스코어의 백미로, 지하라는 공간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동시에 빠져나갈 수 없는 벙커 안에서 느껴지는 답답함과 무력감, 그리고 지상의 인류 전멸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데 큰 일조를 한다. 반면 야일리 탐부르의 깊고 신비스러우며 풍부한 음색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흐르는 ‘장조와 단조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섯 노트 주제부’와 결부되며 주인공 미셸의 미묘한 심리를 표출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소리는 모든 상황에서 도망만 다니던 피동적인 모습에서 점차 적극적으로 의지를 드러내며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취적인 자세로 변해가는 성장형 캐릭터의 이중적인 면모를 담아내기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앨머 번스타인은 영화가 시작될 때 비주얼도, 스토리도 진행되지 않을 찰라 음악만이 관객들의 모든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며 영화를 대표하는 악기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베어 맥크레리는 이 조언을 충실히 받아들여 배급사와 제작사 크레딧이 뜨는 동안 야일리 탐부르의 기묘한 소리로 연주되는 테마를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뒤로 갈수록 두텁고 큰 스케일의 관현악이 합류하고, 이른바 ‘미스터리 스트링’이라 이름 붙인 여덟 노트의 휘몰아치는 오스티나토(어떤 일정한 음형을, 악곡 전체에 걸쳐,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고로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가 덧입혀지며 벙커 안의 긴장감 넘치는 주도권 싸움과 탈출 과정의 빌드 업을 묘사해 가는데, 영화 내내 단 3명의 등장인물과 하나의 공간만이 나오는 단출한 구성임에도 다이내믹하며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마력을 선사한다. 오케스트레이션에도 다양한 시도와 고전적인 방식을 교차로 활용했는데, 영화 초반의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던 불안한 상황에선 현악 콰르텟 편성을 위주로 디테일한 지점 묘사에 신경 쓴다면, 중반부에 이르러선 벙커의 깊이감이나 풍부한 미스터리함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무력감을 묘사하기 위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전혀 없는 30대의 첼로와 8대의 업라이트 베이스만 편성해 저음 위주의 공격적이고, 강력한 무게감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지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모든 비밀들이 밝혀지는 영화 후반에 이르러선 90인조 풀 관현악단을 활용해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케일의 영화음악으로 대장정을 마친다. 새로운 시도를 펼쳤던 < 혹성탈출 >과 < 에이리언 >, <스타트렉>의 제리 골드스미스와 긴장감 넘치는 현악으로 대표되는 < 싸이코 >와 < 현기증 >의 버나드 허먼에게 경배를 바치는 이 놀라운 작업물은 베어 맥크레리를 단순한 TV시리즈에서 활약하던 일개 젊은 작곡가 유망주에서 단숨에 차세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이끌 다크호스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베어 맥크레리가 현재 위치까지 오게 된 초석이자 가장 야심 있고 강력한 비전을 발휘해냈던 승부수이자 비장의 OST였다. 그는 계속해서 <클로버필드 패러독스>와 < 해피 데스데이 > 시리즈, <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 등 메이저 영화 작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콜 오브 듀티: 뱅가드>나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등 인기 게임은 물론, 코로나로 인해 OTT 세상이 도래한 현재 가장 비싼 드라마 중에 하나인 아마존의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와 애플TV+의 <파운데이션>, 넷플릭스의 <위쳐: 블러드 오리진> 등 새 미드에서도 꾸준히 음악을 만들며 눈코 뜰 새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Track List 1. Michelle 2. The Concrete Cell 3. Howard 4. A Bright Red Flash 5. At The Door 6. Two Stories 7. Message From Megan 8. Hazmat Suit 9. A Happy Family 10. The Burn 11. Up Above 12. Valencia 13. The New Michelle 14. 10 Cloverfield Lane
10편의 리스트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쉽지 않다. ‘여성’ ‘역사’ ‘일상에서 비켜난 삶’ 등 몇몇 개념이 떠오르지만 전체 리스트를 다 아우르지는 못한다. 다시 한번, 나 자신은 과연 이 영화들의 무엇에 끌렸나 질문한 끝에 이 리스트의 최대 공약수를 “존엄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군분투” 정도로 정리해 본다. 이 리스트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삶의 궁지에 몰린 평범한 사람들이다. 침범당한 삶, 위기에 빠진 삶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 속에서 이들의 존재 가치가 드러난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저마다 다르고 그들은 오직 자신의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골몰할 뿐이지만 그러한 고군분투 속에서 빛나는 삶에 대한 애착과 위로의 힘은 매우 크다. 타인의 인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인간으로서 자신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한다. 마닐라 빈민가의 뒷골목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게를 운영하면서 마약을 거래하는 로사를 윤리적인 인간이라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마’ 로사 >(브릴얀테 멘도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억척스럽게 뛰어다니는 그녀의 모호한 얼굴에서, 부패한 공권력이 지배하는 거친 뒷골목에서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강렬한 생의 에너지에서 우리는 순간이나마 숭고미마저 느끼게 된다. 라브 디아즈의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는 헤수스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필리핀의 어두운 과거와 비타협적으로 치열하게 싸워온 거장의 신작에서 여성혁명가 헤수스는 총살당한 혁명 영웅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시신을 찾아 산속을 헤맨다. 그녀를 통해 다시 한번 역사의 격변기를 호명하면서 영화는 과거에 벌어진 사건의 의미를 필리핀의 현재로 확장시킨다. 필리핀 민중에게 호소하는 감독의 목소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고 직설적인 울림이 있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두 번째 장편 < 아쿠아리우스 >는 아름다운 노년 여성의 눈을 통해 개발과 보존, 기억과 망각이라는 사회정치적 이슈를 서정적이고 파워풀하게 그려낸다. 기억의 의미, 추억과 공간의 관계, 아카이브로서의 공간이라는 테마를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 멋지게 풀어낸 이 영화의 중심에도 섬세하고 강인한 여성이 자리 잡고 있다. < 화염의 바다 >는 근래 유럽 다큐멘터리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난민 문제를 다룬 영화다.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관문인 람페두사를 배경으로 참혹한 난민 구조 현장과 섬 소년의 일상을 느슨하게 교차시킨 이 영화는, 아름다운 섬의 나른하고 잔잔한 일상이야말로 목숨 걸고 고향을 떠나온 난민들이 소망했던 삶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어쩌면 “바다에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섬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난민 문제에 대한 모든 해법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 붉은 거북 >은 무인도에 난파되어 평생 외로움과 싸우다 늙어버린 남자에 관한 애니메이션이다.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이미지의 힘만으로 고립된 남자의 외로움, 절대고독을 재현한 이 영화는 마음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뒤늦게 덮친 쓰나미처럼 내 마음을 어지럽게 휘저어 놓는다. 재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때로 침묵이 무엇보다 강렬한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영화다. 짐 자무쉬의 < 패터슨 >은 단조로운 삶이 반복되는 버스 기사 패터슨의 일주일을 그린다. 매일 반복되는 그의 일상은 집-버스-집-동네 주점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동선의 반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에도 변화는 있고 그러한 변화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 가장 큰 활력소인 시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실의에 빠진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만난 일본인에게 자신을 “시 쓰는 버스 기사”라고 소개한다. 시인이 아닌 시 쓰는 버스 기사. 평범한 삶의 특별함을 절제된 연출과 여백으로 보여주는 짐 자무쉬의 단단한 연출은 오즈 야스지로를 떠오르게 한다. 올해의 가장 뛰어난 영화라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하게 될 작품은 안제이 바이다의 < 애프터이미지 >이다. 이 영화는 토론토에서 처음 보고 부산에서 다시 한번 보았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감독의 부고를 들었다. 또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 가슴 속에서 쿵 소리가 울린다. 2차대전의 상처와 폴란드의 역사적 경험을 어루만지면서 폴란드의 역동적 변화와 공명해온 감독의 이력답게 <애프터이미지> 역시 스탈린 체제하의 폴란드라는 역사의 어두운 시기로 걸어 들어간다. 폴란드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표 작가인 스트르제민스키의 삶을 통해 스탈린 체제 하에서 예술에 가해진 억압에 대해 고발하는 이 영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스탈린의 예술 테제가 어떻게 예술의 숨통을 끊어놓고 예술을 프로파간다로 전락시켰는지 보여준다.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사물의 이미지가 망막에 남아있는 잔상 효과를 뜻하는 ‘애프터이미지 afterimage’는 스트르제민스키에게서 시각적 의식이 작용하는 특정한 메카니즘이자 역사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오프닝 신은 영화의 방향을 예시하는 복선으로 기능한다. 스트르제민스키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이 새빨갛게 물든다. 거대한 붉은 천에 그려진 스탈린 초상화가 건물에 걸리면서 그의 작업실 전체를 가려버린 것이다. 붉게 물든 작업실은 스탈린의 소비에트 이데올로기가 폴란드 예술가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예술은 이념이 아닌 형태(form)라고 굳게 믿는 그에게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강요는 예술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의 강요 앞에 자신의 예술관을 꺾지 않던 그는 직장을 잃고 예술가조합에서 추방되며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동료 예술가인 아내 코브로와 헤어져 평생 만나지 않았던 이유도 예술관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예술은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가치였던 것이다. 배고픔에 굶주려 빈 접시를 하염없이 핥아대면서도 체제 이데올로기의 겁박에 순응하지 않았던 이 고집 센 예술가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의 죽음 소식을 들은 그는 아내의 무덤 앞에 파란 물을 들인 꽃을 바친다. 아내가 아름다운 푸른 눈을 가졌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붉게 물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횡행하던 체제에 저항하듯이 푸른 꽃을 예술가 아내의 무덤에 바치던 예술가 역시 쓸쓸하게 죽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예술 형식을 중시한 폴란드의 대표 전위예술가이자 자신의 우상이었던 스트르제민스키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서 안제이 바이다 감독이 고전적 리얼리즘 양식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술의 비개성화를 주장하면서 대중의 미적 기준을 향상시키려 했던 스트르제민스키의 예술 작업을 고려할 때 감독이 채택한 고전적 리얼리즘 양식은 조금은 의외다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영화가 스트르제민스키의 예술보다는 시대와 불화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안제이 바이다 역시 역사가 되었다.
생각해보자. 야구치 시노부가 우릴 실망시킨 적이 있었던가? 한국에서 < 산전수전 >(1999)으로 리메이크되면서 망가지긴 했지만, 첫 35mm 장편 < 비밀의 화원 >(1996)부터 야구치 시노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의 감성을 지닌 감독이었다. 사실 < 아드레날린 드라이브 >(1999)가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그래도 안도 마사노부가 있지 아니한가!) < 워터 보이즈 >(2001)는 극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이후 남학생들에게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시킨 감독은 < 스윙 걸즈 >(2004)에서 여학생 합주반을 만들며 유쾌 발랄하고 따뜻한 드라마를 선사한다. < 해피 플라이트 >(2008)에선 위기의 비행기 안에서마저 웃음을 만들어내더니, < 로봇 G >(2011)에선 조잡하면서도 기상천외한 특유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 비밀의 화원 >(1996) < 워터 보이즈 >(2001) < 해피 플라이트 >(2008) < 로봇 G >(2011) 그리고 < 우드 잡 >(2014)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갈 곳은 재수학원밖에 없는 녀석이 산에서 나무처럼 성장해가는 이야기는, 역시 야구치 시노부스럽고, 여전히 소소한 재미로 가득 차 있으며, 의외로 깊이 있는 울림을 준다. 상황과 인물과 디테일을 흘러가듯 즐기며 볼 수 있는 휴머니즘 코미디. 인생에서 나무만 보는 사람들에게 숲을 보라고 조용히 타이르는 목소리. 바로 <우드 잡>이다. 이 영화는 시노부 감독의 장기인 ‘제로 투 히어로’(zero to hero) 패턴을 그대로 반영한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었던’(zero) 루저이며 오합지졸이던 청춘들이 의외의 상황에 부딪혀 갖가지 난관을 통과한 후에 ‘영웅’(hero)이 되는 이야기다. 물론 여기서 ‘영웅’은 그 어감이 지닌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우뚝 서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영웅은, 드디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화학에서 언급되는 영웅 서사의 경로를 그대로 밟으며, 결국은 외톨이에서 벗어나 사회와 통합된다. < 우드 잡 >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히라노 유키(소메타니 쇼타)는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흥청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우연히 산림 연수원 모집 전단지를 보고 끌린다. 평소에 이쪽 분야에 관심 있었느냐고? 그럴 리가… 태어나 나무 한 그루 심어 본 적 없는 유키를 유혹한 건 홍보 전단지의 여자 모델이었다. 그는 다음 날 기차를 타고 무작정 연수원으로 향한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이론을 빌자면, 영웅이 ‘모험의 소명’을 받은 셈. 그는 그곳에서 도망치려 하지만(소명의 거부) 결국 과정을 수료하고, 휴대전화 신호도 터지지 않는 가무사리 마을의 나카무라 임업에서 1년 동안 연수생으로 일한다. 산속의 삶은 힘들었지만 그는 마을 축제의 일원이 되면서 ‘산 사나이’로서 인정을 받는다(관문의 통과). 물론 시련과 굴욕은 이어졌다. 거머리에게 물려 사람들 앞에서 엉덩이를 노출하고, 살모사에게 물려 부은 귀가, 마치 부처상의 귀처럼 축 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보상이 있었다면, 전단지에 있던 그 모델이 바로 마을에 살고 있었던 것. 그녀의 이름은 이시이 나오키(나가사와 마사미). 단 홍보용 이미지처럼 조신하진 않다. 캠벨의 이론에 의하면 유키는 1년의 시간을 마치고 도시로 ‘귀환’해야 하며, 그의 곁엔 연인이 된 나오키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 우드 잡 >의 결말은 여기서 작은 반전을 만들어낸다. < 우드 잡 >은 야구치 시노부 감독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롱 숏의 웃음’이랄까? 억지스러운 개그 코드를 들이대기보다는, 한 발자국 물러선 카메라 안에서 인간이 하나의 풍경이 되어 웃음을 유발한다(아…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유머 코드는 글로 설명하기엔 그 뉘앙스가 너무 강하다). 이 영화가 선사하는 또 한 종류의 웃음이라면 은근한 섹스 코미디다. 이다 요키(이토 히데아키)는 연수원 시절부터 강인한 인상을 주었던 교관으로 유키는 그의 집에서 1년 동안 숙식을 된다. 요키와 아내 리다 미키(유카)의 지상 목표는 아이를 갖는 것. 미키는 체온 그래프를 만들어 ‘그날’을 정하고, 부부는 유키를 피해 도시의 모텔로 가 거사를 치르는데, 이 설정에서 잔잔한 웃음들이 만들어진다. 마을 축제도 의미심장하다. 남성 생식기를 상징하는 거목을 잘라, 여성 생식기 모양의 거대한 짚더미에 충돌시키는 의식이 치러지는데, 의도하지 않고 훈도시만을 입은 채 거목 위에 탄 유키는 얼떨결에 제주도 돌하르방 코처럼 생식의 아이콘이 되고, 마을 여성들은 그를 어루만진다. 자연의 스펙터클 하지만 < 우드 잡 >이 숲에서 펼쳐지는 웃음 한마당에 그친다면, 굳이 이렇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엔, 도시 관객들이라면 경이감을 가질 만한 자연의 스펙터클로 가득하다. 특히 나무가 넘어가는 장면의 파워풀한 느낌은 장엄함을 넘어 거룩하기까지 하며(마치 산신령이 나무를 허락해주는 듯하다), 산 위에서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는 산 사람들의 모습엔 자연과 함께하는 노동의 삶이 지닌 운치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요를 부르며 산에서 내려온다. “나무 하나 자르면 배부르게 먹고/소처럼 누워 코 골며 잔다/오늘도 늙는다. 오늘도 늙는다….” 어쩌면 우린 이런 삶을 희구해온 것이 아니었을까? 단순하면서도 건강하고,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삶.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그것을 누리는 삶. 이 대목은 가문의 이름을 걸고 임업사를 경영하는 나카무라 세이치(미츠이시 켄)의 말에서 더욱 울림을 준다. 그가 오늘 벤 나무는 100년 전에 증조할아버지가 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100년 후의 후손을 위해 오늘도 산에 묘목을 심는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한 일의 결과는 우리가 죽은 후에 나오는 거지.” 나무를 벤다는 것은 시간을 베는 것이며, 나무를 심는 것은 시간을 심는 것이다. 이것이 도시 루저 유키가 숲에서 배운 교훈이며, 눈앞의 것만 좇으며 살아가는 근시안적인 현대인들에게 이 영화가 전하는 힐링의 메시지다. 이것은 조화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무’와 ‘일’이 결합된 < 우드 잡 >이라는 제목처럼, 이 영화는 두 세계가 하나 된 모습들을 보여주며, 종종 자연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이미지들을 삽입하고 인물들은 그것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 자연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그렇게 순환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이며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한 철학을 영화는 힘주지 않고 너무나 편하게 전달한다. < 우드 잡 >은 아직 세상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젊은 청년이 산속에서 삶의 태도를 배우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1년 후 도시로 돌아간 그는, 자신이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야 할 세상이 어디인지 어렵지 않게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어느새 그에겐 용기가 생긴 것이다(‘유키’라는 이름은 한자로 ‘용기’(勇氣)다).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 사족으로 원작자에 대해 소개한다면 나오키상 수상작가인 미우라 시온. 일본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어 봤을, 그리고 한 권쯤은 읽어봤을 작가로 < 우드 잡 >은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을 영화화한 것이다. 주인공 유키가 산에서 보낸 1년을 일기 형식으로 쓴 소설로, 미우라 시온의 작품은 「마사 & 겐」 「배를 엮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 집」 「천국 여행」 「흰 뱀이 잠든 섬」 「고구레빌라 연애 소동」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등 한국에서 10여 종이 출간되어 있다. <우드 잡> 외에도 여러 편이 영화화되었는데 첫 각색은 오오모리 스미오 감독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2009). 2011년엔 타츠시 오모리 감독에 의해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 집」이 영화화되었는데, 2013년엔 TV 시리즈로도 만들었다. 영화와 TV 시리즈 모두 에이타가 출연한다. 이시이 유야 감독의 < 행복한 사전 >(2013)은 한국에서도 개봉했던 작품으로, 「배를 엮다」를 각색했다.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