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 감독
- 백주은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본 글에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일부 장면과 결말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 장손 >(2023)의 개봉 이후 인터뷰나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수많은 선배 감독의 영화를 참고하고 영향받았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몇몇 필자들은 <장손>을 두고 존경받는 한국 감독들의 계보를 잇는 영화라 평하기도 했다. 감사하지만 과찬이라 민망할 따름이다. 지난 3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대담 에서 금동현 평론가는 나에게 내밀한 질문을 던져왔다. 그는 영화감독들이 공개적으로 영향받았다고 언급하는 영화들은 대개 거짓말이라 믿지 않는다며 나에게 숨기고 있는 진짜 영향받은 영화가 무엇이냐 물었다.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깊이 숨기는 법이다.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1991)을 처음 본 감각을 또렷이 기억한다. 무언가 대단한 걸 본 건 분명한데 이 영화가 왜 대단한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문득 다른 매체는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영화는 능히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의 본질을 독자분들께 설명할 자신은 없다. 당시 대만 정치 상황과 에드워드 양의 영화 미학에 대한 뛰어난 평론은 많으니, 그것들을 참고해주기 바라며 나는 그저 ‘이 영화가 나를 스쳐 지나가며 남긴 흔적들’을 적어보려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61년 6월 대만에서 최초로 발생한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공교롭게도 감독 에드워드 양은 살인을 저지른 소년과 동갑으로, 이 사건은 그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데뷔 이후 < 공포분자 >(1986)에 이르기까지 대만의 모더니티를 탐구하던 그는 돌연히 1960년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샤오쓰가 감독 에드워드 양처럼 상해 출신의 외성인이라는 설정은 우연일 리가 없다. 비록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자기 삶이 깊게 밴 친숙한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이 영화는 지루하거나 불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다 보고 나서 이 영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인물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떠올려 보면 쉽사리 답할 수가 없다. 에드워드 양은 의도적으로 영화의 모든 씬을 연결하지 않고 파편화한다. 영화는 샤오쓰를 따라가기도 하고 샤오밍을 따라가기도 하고 제3자를 따라가기도 한다. 타이베이의 한 마을이라는 제약 아래 카메라는 마을 곳곳을 반복적으로 비추며 그 변화를 보여준다. 예컨대 영화 초반에 217파와 학교에서 다투던 슬라이가 몰래 만나던 여성이 샤오추이인줄 알았으나, 3시간 30분이 지나서 사실은 샤오추이가 아니라 샤오밍임을 알게 되는 식이다. 영화는 수많은 복선으로 가득해서 단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이후 등장하는 장면에서 의도하는 바를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모든 장면을 놓치지 않는다 한들 샤오쓰가 왜 샤오밍을 찌르는지, 에드워드 양이 이 영화를 통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선명하지 않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완성될 수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인 셈이다. 어쩌면 에드워드 양의 목표는, 애초에 정답이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를 관객들이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맞추려고 노력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을까. 관객들이 서사에 함몰되지 않고 씬과 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유추하고 지연된 정보를 종합하는 사유의 과정에서 1960년의 장제스 치하의 타이베이 공기를 느껴보기를 에드워드 양은 바랄 것이다. 제목 그대로 영화 말미에 주인공 샤오쓰는 자신이 사랑하는 샤오밍을 칼로 찌른다. 사건을 저지른 직후 샤오쓰의 행동을 보면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헛소리를 해대고 발작을 일으킨다. 마치 우리가 이제껏 보아온 샤오쓰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샤오쓰가 왜 샤오밍을 칼로 찌르게 됐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선 먼저 샤오밍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샤오밍은 마성의 매력을 가진 여학생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녀를 좋아한다. 현재 그녀는 소공원파의 보스인 허니의 애인으로, 허니는 그녀 때문에 산동파의 보스를 죽이고 타이베이를 떠나 잠적한 상태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듯 허니가 사라지자 동네 수많은 남학생은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샤오밍 또한 남자들을 뿌리치지 않고 다음 짝을 고르듯 만난다. 하지만 이를 샤오밍의 남성 편력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슬프게도 샤오밍에게 남자란 생존 전략의 수단에 가깝다. 샤오밍과 그녀의 엄마는 외성인으로 타이베이에 마땅한 기반이 없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던 그녀는 엄마의 지병인 천식이 도지자 남의 집을 전전한다. 핑 아주머니에게 쫓겨난 그들은 야박한 친척 집을 들렀다가 소공원파의 경쟁조직인 217파에게까지 의지한다. 의아해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217파 보스와 연인관계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자신의 친정집으로 돌아간 셈이다. 그러다 사라졌던 허니가 다시 돌아오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허니에게 의지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허니와 샤오밍이 연인이라고 하지만 그 어떤 장면에서도 두 사람의 스킨십 장면이 없다. 그 흔한 손잡는 장면이나 포옹 장면도 없다. 그저 허니의 첫 등장에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장면이 유일하게 함께 담긴 장면이다. 그리고 허니는 샤오쓰에게 “샤오밍이 널 많이 좋아한다고 그러더라”라고 말한다. 이게 어디 남자친구가 할 법한 말인가. 허니는 애인이 아니라 오히려 샤오밍에게 부재한 오빠나 아버지에 가깝다. 허니는 샤오밍의 유사 가족인 셈이다. 비극적인 사고로 허니가 죽자 다시 샤오밍은 떠돌아다닌다. 자신에게 환심을 보이는 의사 선생님에게 의지했다가 그에게 약혼녀가 생기자 다시 샤오마의 집에 식모살이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샤오쓰는 이 모든 과정을 무기력하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샤오밍과 허니 (사진: "A Brighter Summer Day"_ 1 , 2 , IMDb) 그러면 반대로 남자들은 왜 이렇게 샤오밍에게 열광하는가. 동네 불량배 남학생들은 허니가 사라지자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슬라이, 타이거, 샤오쓰 외에도 더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동네의 강력한 1인자 허니가 등장하자 꼬리를 감췄다가, 허니가 죽자 다시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샤오밍을 욕망하는 남자들은 샤오밍에게 경쟁적으로 구애하지 않고 서로 싸우기에 바쁘다. 그들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샤오밍의 마음’이 아니라 샤오밍을 욕망할 수 있는 위치인 ‘허니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를 빌려 이야기하면 자신 내부의 자발적 욕망이 아니라 중개자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의 욕망인 셈이다. 남자들은 스스로 ‘샤오밍’을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거짓이며 욕망 중개자인 ‘허니’를 모방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인 ‘샤오밍의 마음’을 얻어 다른 남자들의 우위에 서는 ‘허니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오밍을 욕망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샤오밍이 허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질투하기는커녕 중요하게 생각한다. 샤오밍의 마음을 얻지 못한 남자들, 다시 말해 허니의 위치에 오르지 못한 자들은 모두 무너진다. 슬라이는 권력을 잃고 타이거 또한 말을 잃는다. 주인공 샤오쓰도 샤오밍을 평생 지켜주겠다며 고백하지만 거절당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여학생과 만남을 가지고 키스를 한다. 그리고 다음날 샤오쓰는 자신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지킬 거냐는 샤오밍에게 자신의 부정을 숨기고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샤오밍과 교제를 시작한 샤오쓰는 잠시 행복할 뿐 그녀가 떠나 버릴까 봐 불안하다. 샤오쓰는 샤오밍이 주위 남자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널 깔볼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는 실상 다른 사람들이 아닌 샤오쓰의 본심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퇴학을 당한 샤오쓰는 점점 샤오밍과 멀어진다. 큰 나무 아래서 샤오쓰는 주간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샤오밍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말하자 샤오밍은 “허니가 타이난으로 떠났을 때랑 비슷하네”라고 대답한다. 이는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의 불길한 복선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의 가장 빛나던 순간인 나무 아래 장면 다음 샤오마의 집으로 연결된다. 샤오마의 아버지는 고위 장군으로 그의 집에는 커다란 일본 장도와 총이 가득하다. 캣과 비행기는 전쟁놀이를 하고 있고 총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샤오밍은 실수로 샤오쓰를 향해 총을 쏴버린다. 샤오쓰는 그대로 얼어버리고 놀란 샤오마는 샤오밍의 손에 들린 총을 빼앗고는 뺨을 때린다. 모두의 선망 대상이자 친구 샤오쓰의 애인이지만 샤오마에게는 샤오밍은 그저 입버릇처럼 말하는 ‘여자 따위’에 불가하다. 여기서 결코 좁힐 수 없는 권력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 속 남자들, 총을 겨눈 샤오밍 퇴학을 당한 샤오쓰는 주간부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지만 계속 샤오밍을 그리워한다. 캣의 집에 놀러 간 샤오쓰는 캣에게 샤오밍의 안부를 묻는데 이때 샤오쓰가 은장도의 주인이자 정절를 중요시한 일본 여자의 사진을 보고 샤오밍을 언급한다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하다. 이후 샤오밍을 볼 수 없는 샤오쓰는 일본 여자의 사진을 통해 샤오밍을 생각한다. 불안한 샤오쓰는 샤오밍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정절을 지키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슬라이를 통해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샤오마와 갈등한다. 캣이 중재해 보려 하지만 샤오마가 칼을 들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촬영장에서 종이에 글을 쓰더니 손전등을 두고 사라진다. 눈이 나쁜 샤오쓰가 항상 밤마다 들고 다니던 손전등을 버린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을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며, 그가 쓰던 글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둘째 누나에게 남기는 유서였다. 샤오쓰는 죽기를 각오한 것이다. 캣의 은장도를 들고 학교로 찾아간 샤오쓰는 샤오마 대신에 샤오밍을 우연히 마주치고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이제 네게 남은 희망은 나밖에 없어. 과거에 허니가 그랬지. 네가 왜 허니를 못 잊는지 알아? 그건 네가 날 허니처럼 생각해서 그래.” 자신이 곧 허니라고 말하는 샤오쓰는 자신이 샤오밍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주장한다. 이에 샤오밍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변하도록 도와주겠다는 거야? 너도 똑같아.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나한테 감정을 바라고 잘해 준 거였어. 그러면 안심이 될 테니까. 참 이기적이야. 네가 날 바꾸겠다고? 난 이 세상과 같아. 세상은 변할 수 없어.” 애석하게도 샤오밍은 샤오쓰를 ‘허니’가 아닌 허니가 되지 못한 ‘다른 애들’로 취급해 버린다. 순간 샤오쓰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셈이다. 허니가 되지 못한 공허한 존재, 샤오쓰는 반대로 자신이 지키려던 존재, 샤오밍을 부정해 버린다. 그건 샤오밍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샤오밍을 비난하듯 은장도로 찌른다. “넌 희망이 없어. 뻔뻔한 계집 부끄러운 줄 알아.”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샤오쓰는 그대로 미쳐버리고 다시는 영화에서 그의 정상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샤오쓰가 샤오밍을 왜 죽였는지 묻는 영화가 아니라 샤오쓰가 샤오밍을 죽이기까지 어떻게 미쳐가는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내 능력의 부족과 마감 기한이 임박한 관계로 영화 속 학생들의 세계 중 일부만 다루는 반쪽짜리 글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영화 속 어른의 세계를 다뤄보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과 나누고 싶은 인상적인 장면 세 가지와 영화를 보며 해소되지 않는 질문 세 가지만 공유해보고 싶다. 1) 체육 시간에 캣은 허니를 무시하는 타이거에게 공을 날린다. 공에 맞은 타이거는 이를 샤오쓰의 행동으로 오해한다. 하교하던 샤오쓰 일행은 어둠 속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날아온 농구공을 마주한다. 개인적으로 태풍 속에서 217파를 살육하는 장면보다 훨씬 무섭다. 타이거로 유추는 가능하지만 상대방이 누군지 몇 명인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는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에드워드 양은 이 장면에서 공포를 보여주는 대신 상상하게 만든다. 보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의 상상은 한계가 없다. 2) 샤오쓰의 아버지는 친한 친구 왕 선생과 연루되어 이적 혐의로 며칠 동안 비밀경찰의 심문을 받는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신이 알고 모든 것을 진술하기를 강요받는다. 이 장면의 첫 컷에서 카메라는 아버지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발소리와 함께 진술을 그만해도 된다는 경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경찰의 시점 샷으로 유추된다. 아버지는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때 먼 곳에서 다른 경찰의 목소리가 들린다. 놀란 아버지는 뒤를 돌아보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는 환청을 들은 셈이다. 그런데 이때 샷 구성이 굉장히 흥미로운데, 두 번째 컷에서 아버지의 시점 샷 대신에 대신 경찰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위치에서 시점 샷으로 연결된다. 아버지가 경찰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독재국가의 폭력에 미쳐버린 아버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기검열과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한 죄수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세 번째 컷에서 드디어 아버지의 시점 샷으로 문이 활짝 열린 모습이 나오는데 아버지는 왠지 열린 문으로 쉽사리 나가지는 못할 것 같다. 3)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당장 샤오마의 집으로 찾아간다. 샤오쓰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자, 샤오마는 샤오밍이 자신의 집에 찾아와 일자리를 달라고 부탁해서 받아준 것이라고 대답한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들어와서 샤오밍을 만나고 가라고 하지만 샤오쓰는 끝내 들어가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샤오마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한 다음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샷이 나누어지지 않은 채로 지속된다. 우리는 집 안에 있는 샤오마를 볼 수 있지만, 바깥에 있는 샤오쓰는 볼 수 없다. 오직 목소리로만 샤오쓰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양은 왜 컷을 나눠서 샤오쓰를 비추지 않았을까? 에드워드 양은 이 장면에서 샤오쓰가 차마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심정을 찍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샤오밍이 살고 있는 샤오마의 집에 한 발짝도 들이고 싶지 않은 샤오쓰의 내면을 샤오쓰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으로 형상화해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모든 장면이 뛰어나지만 특히 이 장면이 가장 훌륭하다. 나에게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사유를 매번 하게 만드는 선생님 같은 장면이다. - - - 앞서 말했듯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완성될 수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 같은 영화다. 몇 번을 봐도 해결할 수 없는 의문점이 생긴다. 첫 번째 질문. 의사 선생님은 왜 샤오밍에게 호의를 베풀었는가. 의사 선생님은 샤오밍과 그녀의 어머니까지 치료해 주고 지낼 곳을 마련해준다. 샤오밍의 말처럼 의사 선생님도 그녀를 좋아해서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의료인으로서의 호의를 베푼 것인지 알 수 없다. 샤오밍이 죽고 난 뒤 그녀와 어떤 관계였냐고 따져 묻는 기자의 말에 발끈하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주저하게 된다. 다음 질문. 샤오추이는 어떤 인물인가.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샤오추이와 데이트를 한다. 이때 샤오추이는 슬라이가 학교에서 217파와 붙었을 때 옆에 있던 여자가 자신이 아닌 샤오밍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슬라이가 허니가 돌아오면 맞아 죽을까 봐 샤오밍이 아닌 자신이라고 소문을 냈다는 것이다. 사실 샤오쓰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샤오추이는 이런 비밀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런데 샤오추이가 고마워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남자들이 샤오밍을 욕망하며 허니가 되고 싶었던 것처럼 샤오추이도 슬라이를 욕망하며 샤오밍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마지막 질문. 엔딩 장면의 의미는 무엇인가. 결국 15년형을 선고받은 샤오쓰가 떠나고 남은 가족들은 대청소를 하고 있다. 그러던 중 고장 났던 라디오가 다시 작동하더니 대학 합격 명단이 흘러나온다. 마당에서 옷을 정리하던 샤오쓰의 어머니는 샤오쓰의 교복을 발견하고는 생각에 잠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수많은 명단 중 샤오쓰의 본명인 ‘장첸’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는데, 현실적으로 중학생이자 감옥에 있는 샤오쓰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 ‘장첸’이라는 이름이 우연으로 들어갈 리도 없는데 에드워드 양은 왜 이런 장면을 엔딩으로 선택했을까. 이 정답 없는 질문들을 공유하며 언젠가 독자분들과 함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를 고대한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의 북극성 같은 에드워드 양 감독님께 존경의 인사를 보내며, 나 또한 이렇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남긴다. 오정민(영화감독) l 영화로 먹고사는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는 베짱이. < 장손 >(2023) 연출.
이야기의 심장 복제가 아니라 배신이다. < 하트 >(2019)는 정가영 다운 어떤 것을 반복하는 영화가 아니라, 정가영에게 기대되는 것을 배반하는 영화다. 정가영의 영화에서 대화는 늘 중요했으며, 정가영의 도발성은 대부분 말에서 비롯되었다. <하트>에서 말은 전작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말의 내용은 정가영답지만, 그 밀도는 떨어지고 이야기가 등장하는 자리는 뜬금없다. 당혹감은 잠시 접어두고 영화를 들여다보자. 전작과는 달리 이 작품만은 말의 내용에 집착할수록 영화에 대한 이해와 멀어지고 유부남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섣부른 결론에 이르고 만다. 정가영 감독은 종종 사운드 없이 화면만 보거나 반대로 사운드만 들으며 영화를 연구한다고 말해왔다. 그의 말을 힌트 삼아 우리를 지나치게 옭아매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이야기’라는 사운드를 잠시 줄여 보자. 대화의 공백 사이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가영(정가영)과 성범( 이석형 )의 초반 미술학원 대화 장면은 크게 네 종류의 숏으로 운용된다. 가영이 앉은 2인용 소파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숏을 기본으로 1인용 의자에 앉아 가영의 말에 반응하는 성범의 얼굴 클로즈업 숏을 함께 가져가되, 이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관찰하는 듯한 롱숏과 초상화, 조각상 등의 인서트가 첨가된다. 롱숏은 성범 어머니의 죽음이 언급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기에, 제삼자의 시선 혹은 죽음과 관련된 숏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질적인 숏 하나가 추가된다. 가영과 성범이 키스를 나누는 순간, 카메라는 소파 뒤쪽에서 이들을 비춘다. 원래 소파는 벽과 붙어 있어 어떻게 봐도 촬영이 가능한 장소가 아니다. 단지 ‘좋은 그림’을 위한 시도였다고 넘어가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하다. 감독은 왜 불가능한 숏을 굳이 집어넣은 것일까. 정가영의 영화는 늘 감독 정가영과 배우 정가영의 분리와 교통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아왔다. 외부의 시선을 감독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했던 전작과는 달리, <하트>에서 시선의 주인 자리는 비어 있다. 시선의 주체가 불명확해진 것은 무엇보다 카메라 앞에 선 배우 가영 캐릭터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가영이 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장면을 장악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 가영은 제 발로 성범을 찾아오긴 했으나 이전처럼 그의 마음을 떠보며 ‘자자’고 매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고민을 상담하러 온 사람 같다. 다른 유부남에게 연정을 품은 가영은 ‘그 사람이 생각날 것 같아’서 술도 거부하고 있으며, 키스 직전 관계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인 말(“나는 너 이제 보호 안 한다”)을 성범에게 넘겨주고 있기도 하다. 전작에도 충분히 제기될만한 ‘자기 복제’라는 혹평이 유독 <하트>에 쏟아진 이유는 이전까지 유희의 도구에 가까워 보였던 금기의 사랑 이야기를 감독이 진심처럼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애인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던 이전의 이야기는 촘촘하게 짜인 대화의 맛을 따라 농담처럼 즐기면 그만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느슨함으로 인해 이야기에 거리를 두고 판단할 여지가 마련된다. 이제 관객은 가영의 관계에도, 가영의 영화에도 가혹해질 수 있다. 재기발랄한 캐릭터가 채도를 낮춘 사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뒤엉킨 시간이다. 감독 정가영이 배우 제섭(최태환)과 미팅하는 장면 이전에도 가영의 시간은 이미 교란되고 있었다. 성범과 가영이 술을 사러 편의점을 오가는 밤 장면 도중 가영이 무인도에 사는 100명의 남녀에 관해 이야기하는 미술학원 시퀀스의 자리는 특히 이상하다. 편의점에 다녀온 가영과 성범의 대화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카메라는 내내 가영만을 비추고 있기에 가영이 대화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다. 성범일 확률이 높지만, 목소리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게다가 대화할 때 가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성범이 있던 자리가 아닌 정면을 향한다. 다음 시퀀스에서 맥주 캔이 든 봉지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가영과 성범의 모습이 뒤늦게 등장하므로, 이야기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마치 유령처럼 도착한 것 같다. 숏의 자리를 뒤섞고 이를 이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면서 감독은 애초에 자신의 이야기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클리셰적인 장르 전환 장면에서 실제와 허상 사이에 놓인 가영의 상태가 상징적으로 드러내듯, 감독은 이야기를 반쯤은 얼빠진 소요처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한 이야기는 결국 마지막 장면의 산뜻한 반전을 예비해 둔다. 감독의 세계를 비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제섭을 상대하느라 내내 진땀을 뺀 가영은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야 그답게 “한 번만 안아주고 가면 안 돼요?”라며 양팔을 벌린다. 제섭은 포옹 대신 가영의 왼쪽 가슴을 느닷없이 툭 하고 치고는 떠나는데 그 순간의 파장은 꽤 오래간다. 깜짝 놀라 자신의 왼쪽 가슴에 두 손을 포개놓은 채 당황스러워하는 가영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그 순간 고대하던 심장을 얻게 된 누군가처럼 보인다. 그와 함께 유령의 소요처럼 보였던 이야기도 심장을 장착한 채 다시 시작될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 즉시 이야기는 끝나버리고, 두 사람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진 뒤 남은 것은 속절없이 물을 뿜는 분수대뿐이다. < 밤치기 >(2017)에서 가영이 들려준 바 있던 결말이 없는 영화로서의 ‘최고의 결말’은 이렇게 실현된 것도 같다.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 남은 이 황망한 마음을 어찌할 것인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나는 두가지 특별한 사적 감흥을 느낀다. 하나는 화면이 젖어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안개에 잠겨 있지 않아도 그레이의 화면은 멜랑콜리아의 습기라고 할만한 기묘한 물질감이 감싸고 있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점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다른 하나는 친구 혹은 연인과의 투 숏에서도 심지어 가족의 회합 장면에서도 그레이의 인물은 절대적 고립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감정은 표현되는 게 아니라, 보는 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신체에 스며들고 번져가며 전염되는 것 같다. 그레이의 최고작으로 여겨지는 < 투 러버스 >(2008)보다 이 점을 잘 느끼게 하는 영화는 없다. 주인공 레너드(호아킨 피닉스)는 그가 사랑하는,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여인 미셸(기네스 펠트로)과 있을 때에도,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있을 때에도 철저히 고립된 존재이며 외로움의 심연에 가라앉은 인물로 감지된다. 가장 뛰어난 장면은 마지막 시퀀스에 있다. 미셸이 떠난 뒤 레너드는 다시 자살을 시도하려다 포기하고 가족과 그를 아끼는 따뜻한 여인 산드라(비네사 쇼)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셸에게 주려던 반지를 그녀에게 끼워준다. “우는 거예요?”(산드라), “행복해서 그래요.”(레너드). 가족들, 유태인 친척들이 작은 파티를 벌이고 있는 따뜻한 집에서 두 남녀는 키스하고 포옹한다. 놀라운 점은 외관상 가장 포근하고 평온한, 그리고 남녀의 결합으로 마무리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레너드의 속수무책의 고립을 사무치게 체감한다. 그레이의 영화에서 우울과 외로움은 이야기의 주제이기 이전에, 매 숏에 담긴 물질적 표정 혹은 운명적 공기와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느낌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고, 적시할 수 있는 한 숏 내부의 특정 요소들의 효과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 및 앵글, 인물의 표정과 동작과 말, 음악과 사운드, 숏의 길이와 편집의 리듬 등이 이야기와 결합된 복합적 효과일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남다른 점은 그가 두드러진 스타일을 구사하지 않을 뿐더러, 특정한 사건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연출의 영역에 속한 갖가지 요소들의 유기적 조합을 통해 유례를 찾기 힘든 높은 밀도와 강한 전염성을 지닌 감정의 강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레이의 영화를 말할 때야말로 감정 대신 정동(情動)이란 단어를 쓰고 싶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레이는 동세대의 어떤 감독보다 고전적인 작가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영화적 스승으로 거론하는 인물에 속하진 않지만, 니콜라스 레이의 진정한 후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 애드 아스트라 >(2019)는 공간이 우주로 확대되어도 화면에는 농축된 감정의 밀도가 압도하는 매우 제임스 그레이적인 영화이다. 어쩌면 우주의 텅빈 그리고 무한대의 시공간이야말로 그레이의 인물이 벗어날 수 없는 고립과 외로움의 물질적 거처로 가장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그레이가 SF로 눈길을 돌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는 모험의 사건과 미래의 변화에 열린 확장적 공간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절대적 고립을 재확인하는 내성적이고 수축적인 공간이다. 우주비행사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 해왕성으로 떠난 뒤 16년째 소식이 끊긴 아버지이며 우주탐험의 전설 클리포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를 찾아 떠난다. 스토리라인은 머나먼 정글에서 광기의 왕국을 건설한 미친 유사 아버지를 수색하는 병사의 이야기 < 지옥의 묵시록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9)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모티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다 그를 찾아나서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서 빌려왔다. 텔레마코스는 누구인가. 이타카의 왕이자 전쟁영웅 오디세우스가 전쟁 원정으로 왕국을 20년간 비운 동안, 난봉꾼 왕자와 귀족들이 그의 재산과 왕위를 빼앗기 위해 어머니를 희롱하고 결혼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귀환으로 자신의 땅에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다, 아버지의 행적을 쫓아 목숨을 건 여행에 나선 아들.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이 인물의 어떤 점에 영감을 얻었을까. 결말을 떠올리면 <애드 아스트라>는 오이디푸스의 살부(殺父) 의식에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살부와 근친상간은 법의 위반과 욕망의 실현이라는 차원에 놓여 있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사실상 법의 충실한 집행자다. 그의 목숨과 여러 사람의 생명이 걸린 그의 해왕성 행은 아버지의 우주선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지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그리고 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로이가 상부의 명령이나 미션의 대의에 완전히 동일화하는 건 아니다. 로이는 아버지의 우주선 리마의 파괴 임무를 맡은 우주선 세피우스에 무단으로 탑승하고, 그를 제압하려는 세피우스 승무원들을 미필적 고의로 모두 죽인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이 흔히 그렇듯 우리는 로이의 욕망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맥박수가 80을 넘지 않는 냉담한 사람이다. 그의 행동으로 추론하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다. 평생 복종해온 명령, 특히 이번엔 부당하기는 커녕 지구의 안녕이 걸려있는 중대한 명령을 거부한 것도 세피우스의 제거 작전이 성공하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것을 그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항상 두려웠다.”고 독백한다. 마침내 조우한 아버지도 “난 아내에게도 너에게도 관심이 없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매정하게 말한다. 다시 물어보자. 로이는 왜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만나려 하는가. 이 질문은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적어도 대사를 통해서는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레이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그레이는 그 무지를 존중한다. 아버지 클리포드는 말한다. “나는 지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우리는 과학이 부인하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내야 돼. 이건 신의 소리야. 난 이 여정을 멈출 수 없어.” 그의 친구인 동료 우주비행사 프루이트 대령(도널드 서덜랜드)은 로이에게 말한다. “오랜 우주 비행으로 내가 깨달은 바는, 탐험 비행이 때론 탈출 수단이 될 수도 있다네.” 지적 생명체에 대한 종교적 믿음, 지구에 대한 혐오, 탈출의 은밀한 욕망. 우리는 어느 말을 믿어야 할까. 내 생각에 가장 신뢰할만한 말은 영화의 결말부에 있는 로이의 독백이다. “아버지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 앞에 있는 소중한 건 보지 못했다”.” 그러느라 동료를 죽이고 지구를 위험에 빠트린 미친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로이 자신은 어떠한가. 그 역시 우주 비행에 미쳐서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 아닌가. 로이와 클리포드는 아들과 아버지이기 이전에 완전히 동질적인 인간이며, 둘은 말하자면 쌍생아다. 로이의 혹독한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려는 가족애의 여정이 아니며 아버지의 율법을 살해해 자신의 욕망의 법을 세우려는 아들의 모험도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자신을 대면하려는 여정이다. 지구 혹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을 혐오하고 피안을 향해 탈출하려는 자신의 욕망, 그 욕망의 잔혹함과의 대면이다. 그 대면을 위해 로이 역시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아버지와 대면하고서야 로이가 아버지와 똑 같은 과정을 거쳐 그 대면에 성공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지적 생명체나 인류의 진보 같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정확한 동형의 여정이다. 이제 선택은 두가지다. 집으로 돌아오느냐, 아니면 더 멀리 떠나느냐. 아버지 클리포드는 후자를, 아들 로이는 전자를 택한다. 로이에게 아버지는 주인 기표도 율법의 표상도 아니다. 요컨대, 로이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안티오이디푸스도 아니다. 호메로스의 텔레마코스는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가 기다리는 건 아버지이자 왕인 오디세우스이지만, 그것은 권력의 복원이나 주인의 귀환에의 기대가 아니다. 이탈리아 심리학자 마시모 레칼라티의 말을 빌리면,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에 대해 오이디푸스의 절연과 달리 상속의 관계를 맺는다.(<버려진 아들의 심리학>, 윤병언 옮김, 책세상) 하지만 상속은 과거의 권력이나 재화, 혹은 영광스런 기억의 선사가 아니다. 레칼라티의 논지를 요약하면 정당한 상속은 아버지의 증언을 참조함으로써 이뤄지는 말의 계율과 욕망의 재설정이다. 그렇다면 상속은 완료가 불가능한, 반복되는 실패를 경유할 수밖는 끝없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속자는 고아다.” 또한 그러므로 상속이란 “아버지의 구조적 부재라는 열린 틈새를 메우는 일이 아니라, 항상 그것을 통과하는 일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텔레마코스의 이야기에서 상속의 약속 없는 상속자의 여정이라는 모티브를 본 것 같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세상을 헤맸지만 오디세우스를 만난 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고향에서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여정의 끝에 아버지를 만났지만 그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불멸에의 꿈을 포기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와 달리,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조정할 줄 모르는 눈먼 광인일 뿐이다. 텔레마코스는 이제 상속의 과정을 본격화할 것이다. 하지만 로이가 이른 곳은 아버지의 삶, 그 복제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모두 눈 먼 광인의 소동으로 드러나는 황량한 공허이다. 그는 홀로 지구에 돌아온다. “삶에 의욕을 느껴요. 내 주변 상황에도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됐죠. 이젠 소중한 것에만 집중하며 살 겁니다.” 이어지는 결말의 언어들은 계몽적이고 달콤하나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를 가득 채운 우울증의 공기는 무관하다. 우리는 이 평온한 결말의 언어와 비슷한 것을 그레이의 전작에서도 만났다. < 위 오운 더 나잇 >(2007)에서도 만났다. 경찰학교 졸업식장에 앉은 경찰 형제(마크 왈버그, 호아킨 피닉스)가 나누는 마지막 대화. “사랑한다, 동생아.” “나도 사랑해, 형”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투 러버스>의 마지막 대화. “우는 거예요?“ ”행복해서 그래요.“ 이 장면들이 뼈저린 것은, 인물들 특히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남자에게 이 말이, 이 말의 실현불가성에 대한 필사적인 부인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이 거짓말이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절박한 진실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가족(때로 유태인 공동체)은 주인공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내면적 강박처럼 등장한다. 이 점에서 그레이의 서사는 주인공이 이 강박을 정당한 상속으로 전환하려는 모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결말에서 만나는 것은 결말의 언어가 숨기고 있는, 하지만 관객 누구라도 느끼는 있는 상속의 실패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 역시 임무수행에는 성공했지만 상속에 실패한, 하지만 그 실패를 필사적으로 부인하려는 텔레마코스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은 여전히 출구 없는 멜랑콜리아의 안개 속을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