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윈
- 감독
- 토마스 맥카시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폴 지아마티, 에이미 라이언, 바비 카나베일, 제프리 탬버, 버트 영, 멜라니 린스키, 알렉스 셰퍼
올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중 가장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작품은 홍성은의 < 혼자 사는 사람들 >이다. 단지 내가 본 영화는 감독이 일반 관객들이 본 영화와 조금 다른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주인공 진아가 누리는 삶의 방식이 교정되어야 할 사회문제라고 느끼지 않았으니까. 올해는 될 수 있는 한 아카데미상 후보들을 리스트에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샤카 킹의 <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가 가진 역사의 무게와 원초적인 비극성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 스파이의 아내 >도 처참한 실제 역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지만 고전 멜로드라마와 첩보물을 거쳐 펼치는 정교하고 장르 유희는 다른 의미로 매혹적이었다. 이어지는 세 편은 판타지와 SF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 메모리아 >가 SF, 그 중에서도 말이 되는 부류에 속한다고 하면 많이들 안 믿을 텐데, 사실이다. 여전히 벽의 페인트가 말라가는 걸 지켜보게 강요하는 거 같은 아트하우스영화 특유의 고집이 눈에 뜨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셀린 시아마의 < 쁘띠(뜨) 마망 >은 얼핏 보면 소박한 시간여행 판타지처럼 보이는 설정을 통해 삼대에 걸친 여자들의 관계를 새로운 평등성을 통해 다시 들여다 본 독특한 작품으로,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중 내가 가장 많이 반복해 볼 영화가 될 것 같다. 데이비드 로어리의 < 그린 나이트 >는 아서왕 전설의 A24스러운 재해석으로, 아마 이 리스트의 영화들 중 ‘예술하는’ 것으로 <메모리아>와 경쟁할 수 있는 작품일 텐데, 그렇다고 해서 아서왕 전설의 아이돌을 시치미 뚝 떼고 잔인하게 놀려먹는 사디즘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머지 영화는 모두 호러다. 단지 앞의 세 편은 장르호러를 의도한 작품은 아니다. 조지 A. 로메로의 < 놀이공원 >은 개신교 계열 단체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교육영화지만, 유명한 동네 사람이라고 해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든 사람에게 이런 영화를 맡기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 영화가 출구 없는 악몽으로 그리는 노년의 삶은 심지어 좀비떼보다 무섭다. 에마 셀리그먼의 < 시바 베이비 >는 유대계 전통 장례식이라는, 우리에게 낯선 행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막 졸업을 앞둔 여자 대학생의 주변에서 일가친척들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의 뒤틀림과 이 과정 중 발생하는 폐소공포증은 친숙하기 짝이 없다. 임신 주제의 영화가 바디 호러로 흐르는 건 흔하지만, 남궁선의 < 십개월의 미래 >는 여기에 임산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덜떨어진 편견과 억압이 더해져서 <에일리언>보다 서너배는 더 무섭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 시계태엽 오렌지 >에 나오는 세뇌장치에 묶어놓고 이해가 될 때까지 이 영화를 반복 감상시켜야 한다. 슬프게도 그들 상당수는 시체가 될 때까지 의자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정곡을 찌르는 예술작품이라도 모든 사람들을 이해시키지는 못한다. 이제 한 편 남았다. 사실은 세 편이다. 리 자니악의 < 피어 스트리트: 1666 >은 < 피어 스트리트: 1994 >, < 피어 스트리트: 1978 >로 이어지는 삼부작의 마지막편으로, 이 세 영화를 분리해 감상하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이 영화들을 일주일에 한 편 간격으로 틀었는데, 그 때문에 이 작품을 보는 행위는 8,9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 미니시리즈의 ‘텔레비전 이벤트’ 감상과 비슷해졌다. 어차피 극장을 통한 적 없는 작품이니 세 영화를 그냥 한 편의 미니시리즈로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원래 의도는 한 달 간격으로 개봉되는 극장용 영화 시리즈였다고 하지만. 예고편만 보면 큰 기대가 안 생긴다. 그냥 예쁘장한 틴에이저들과 연쇄살인마를 한군데 모아놓고 다양한 방식으로 죽은 시체들을 쌓는 놀이를 하는 복고풍의 슬래셔 영화인가? 틀린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첫 편의 도입부를 보면 좋지 않은 의미로 어리둥절해진다. 잘 만들긴 했는데, 굳이 저렇게까지 성실하게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 도입부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스크림>은 이미 메타 호러인데 여기에 새 레이어를 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설정과 맥락을 설명해보자.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의 원작은 어린이 대상 호러물인 <구스범스> 시리즈의 R.L. 스타인이 청소년 대상으로 쓴 동명 호러 시리즈다. 셰이드사이드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주인공들은 책마다 바뀌며 폭력의 강도는 <구스범스>보다 높다고 한다. 자니악의 시리즈는 셰이드사이드라는 마을, 피어와 구드라는 가문명을 가져왔지만 이야기 자체는 오리지널이다. 셰이드사이드에 대응하는 부촌인 서니베일 역시 시리즈의 창작이다. 서니베일은 <버피> 시리즈의 무대인 서니데일을 연상시키는 이름인데, <버피> 역시 <스크림>만큼이나 이 시리즈에 뚜렷한 발톱자국을 남긴 작품이다. 둘 다 기존장르를 재해석하고 비트는 메타 호러에 속해있기도 하고. 시리즈의 주인공인 디나는 <스크림>보다는 <버피>에 가까운 인물이다. 셰이드사이드 고등학교의 밴드 멤버이고 동성애자, 흑백혼혈이다. 당연히 자신도, 도시전설에 미친 동생 조시도, 마약쟁이인 불량청소년 친구들도 모두 아웃사이더다. 여자친구 샘이 재혼한 엄마를 따라 부촌인 서니베일로 갔기 때문에 디나의 삶은 더 끔찍해졌다. 그런데 전설의 마녀 사라 피어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인마로 변신하고, 디나 일당은 이들에게 쫓기게 된다. 일단 <피어 스트리트 파트: 1994>를 다 보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도입부는 여전히 <스크림>을 지나치게 흉내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통적으로 보이는 슬래셔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동안에도 이 영화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감이 오지 않는다. 영화가 삼부작을 염두에 두고 구성되어 있어서 독립된 영화의 무게중심이 관객들의 예상과는 다른 위치에 놓여있고 그 때문에 늘 기대와는 어긋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폭력의 정도와 살생부의 선정도 예측하기 어렵다. 다음 편의 예고도 예측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영화들이 계속 과거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피어 스트리트: 1978>로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영화의 계산이 드러난다. <피어 스트리트>는 ‘진지하다’. 이 영화가 모델로 삼은 <스크림>과 7,80년대 슬래셔 장르의 관계를 보자. <스크림>의 영화광들에게 슬래셔 영화의 살인은 게으른 창작자들이 반복되는 클리셰들을 갖고 만든 어처구니 없고 대충 공허한 이야기의 일부로, 이들을 모방한 영화 속 연쇄살인 역시 잔인무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얄팍한 게임이다. 하지만 자니악은 비슷한 구성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시리즈 영화를 만들면서 이 허구와 현실 사이의 벽을 치워버린다. <피어 스트리트: 1994>에서 일어난 사건 일부를 설명하는 <피어 스트리트: 1978>의 사건은 여름 캠프와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익숙한 슬래셔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피어 스트리트: 1994>의 우주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피어 스트리트: 1994>를 통해 이미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신디는 극중 내내 놀랄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존재한다.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를 구성하는 재료들은 대부분 호러 관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는 주인공들의 진지함과 입체성을 막지는 못한다. <피어 스트리트: 1666>에서 시리즈의 야심은 심지어 더 커진다. 시리즈 설정의 기원을 파기 위해 북미 대륙 개척시대로 시간여행한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사실 대충 짐작은 간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17세기 미대륙에서 일어난 마녀 사건과 연결된다면 그 마녀는 역사가 말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고 다른 일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디나와 사라 피어의 소수성을 연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미국 건국역사 전체를 재검토한다. 허울좋은 공정의 판타지는 파괴되고 수백년에 걸친 차별의 구조가 드러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온몸으로 이에 맞서 싸운다. 천진난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호러 관습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세계 속 이야기라고 해도, 그 안에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냉소하는 건 유치한 일이다.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진지함 속에서 영화의 공포, 로맨스, 액션, 드라마는 모두 강렬한 힘을 얻는다. 그 결과물은 놀랄만큼 정통적으로 재미있는 오락물이다. 우리가 할리우드에서 기대하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어느 여고의 신체 검사 날, 민아는 정체 불명의 일기를 한 권 줍고 그것이 자신과 같은 반인 시은과 떠들썩한 스캔들을 일으킨 효신의 교환일기임을 알게 된다. 일기를 읽어가면 갈수록 민아는 그들의 비밀스러운 관계에 점점 더 몰입하게 되고, 꾀병을 부려 들어간 양호실에서 우연히 시은과 효신이 직접 대화하는 것을 듣게 되면서 호기심은 점점 더 커져간다. 둘의 소원해진 관계에 대한 효신의 발화가 은밀해지면 은밀해질수록 시은은 양호실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눈치다. 그들이 옥상에서 나누는 대화를 엿듣던 민아는 이미 시작된 신체검사에 더 늦을 수 없어 서둘러 교실로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을 기도한 효신의 시신을 보게 된다. “첫 키스는 사과향기 같은 거라구? 난 피 냄새를 맡았어.” 수돗가에서 처음 일기를 주워 든 민아가 읽은 첫 번째 문구는 서브컬처적 은밀함과 성적 도발이 어지러이 뒤섞인 영화의 기본 정서를 암시한다. 그것은 또 신비화된 세기말의 파토스를 반영하기도 한다. 대의는 없다, 절대선도 없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를 추동 하는 것은 방향을 잃어버린 집단 안에서 이질적 불순물이 파괴적인 방식으로 뛰쳐나가려고 할 때, 이를 수습하여 붙들어두려는 집단의 관성이 길항적으로 작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여고괴담>(1998) 첫 번째 시리즈가 교육 시스템과 기성세대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에 중점을 둠으로써 한국 사회의 과격한 집단성에 어느 정도 알리바이를 줬다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훨씬 첨예하게 개인을 논하는 이야기다. ‘우리’는 생각보다 차이를 참을 수 없고, 그 차이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면 놀랍도록 잔인해질 수 있다고. ‘우리’는 집단의 명백한 가담자다. 이는 (감독들이 ‘여고괴담’이라는 제목보다 더 선호한다고 알려진) 이 영화의 부제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의 첫 번째 단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개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의 수난을 더 잘 다루기 위해서 특정 젠더가 되어간다는 것 (혹은 수행한다는 것)의 고단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동시대적이다. 물론 모두가 알고 있듯, 기본적으로 이는 학창시절의 호모섹슈얼리티에 대한 성실한 묘사에서 비롯되지만 그것 외에도 ‘여성성’의 강박은 의외로 곳곳에 섬세하게 숨겨져 있다. 예컨대 영화 초반에 민아의 친구 지원이 캠코더를 들고 반 친구들을 촬영하면서 하는 말 같은 것들 말이다. 쉬는 시간에 잠을 자고 있는 친구들에게 “’밤 일’ 하고 있냐’”고 묻고 그 옆의 화장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떡칠’을 하고 있지만 ‘원판’은 변하지 않는다”고 조롱하는 것 따위의. 그러나 앳된 얼굴의 아이들은 별 생각 없이 쾌활하게 웃는다. 하필 이야기가 벌어지는 그 날은 신체검사 날이기도 하다. 신체검사에서 더 마른 몸, 더 큰 키, 더 큰 가슴으로 정의되기 위해 민아의 친구 연안은 채소로만 끼니를 때우고 지원은 선생님에게 더 작은 소리로 가슴 사이즈를 말해달라고 애원한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국어선생 고형석과 효신의 관계다. 고형석은 자신의 ‘연약한 영혼’을 담보 삼아 효신에게 자신의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것은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관계의 성질이 효신의 유달리 조숙한 얼굴 뒤에 숨어 어른과 동등한 판단력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될 때, 우리는 ‘성적으로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가진 허울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예쁘고 날씬하고 ‘본판’에 거짓되지 않되, ‘밤 일’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어떠한 행동거지도 조심해야 하지만, 동시에 성적으로 개방적이면서 가끔은 내면의 괴로움으로 울부짖는 남자를 달래줄 수 있을 정도로 자애로울 것. 의도치 않은 부산물이겠지만, 효신의 죽음은 효신을 신비화함으로써 여성성에 대한 분열적 다중명령을 더 강화하고 만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김태용, 민규동 감독이 두 달간 사전조사 및 실제 한 학교의 연극반에 2주간 담당강사로 나갔으며, 극 중 대화의 많은 부분들이 실제 학생들의 대화에서 영감 받아 만들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다중명령은 감독들이 비판을 받아야 할 지점이라기보다 메타적으로 읽어야 하는 지점이 맞다. 물론 이러한 (평론가 듀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화인류학적’ 결과물을 보다 정밀하게 설명해내기 위해 굳이 X세대의 문화가 80년대 ‘청년문화’와 얼마나 다른지, 이 시대의 청소년 문화는 어떻게 태동되었고, 정치경제적 상황과 더욱 개방적으로 변한 대중문화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등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확실한 것은 90년대의 10대 여성은 전 세대에 비해 더욱 촘촘해진 레이어들을 통해 스스로의 젠더성을 검열하고 발전시킬 수 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고, 그 과정이 비평 가능한 수준으로 곳곳 관찰되고 있었으며, 여고괴담2는 이를 아주 정성스럽게 담아내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는 X세대의 다음 세대가 스스로가 처한 곤경을 수많은 페미니즘적 논의를 통해 인식하고 설명하려고 하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시사적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학창시절에는 항상 선생과의 음흉한 소문을 달고 다니는, 지나치게 조숙해서 아니면 그냥 ‘창녀’라서 배척되었던 캐릭터 한 명쯤 있지 않았나? 이성애 경쟁에 수반되는 다양한 사회의 명령들을 수행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약간은 배제될 필요가 있어 보이는 레즈비언 캐릭터도? 놀랍게도 ‘그들’은 여전히 대상화된 ‘캐릭터’로 남아있다. 왜? 언제부터? 관객의 무의식이 이러한 질문에까지 닿게 될 때, 효신의 죽음을 목격한 다른 주인공들과 학생들이 느끼는 비정상적인 공포는 우리가 함께 져야 할 연대적 책임의 일부로 변환되어 수용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언제고 명백한 집단의 가담자가 될 수 있으므로. 물론 이 모든 정치적 함의만으로 이 영화의 가치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사운드와 공간을 운문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학창시절의 아름다움과 곤란함을 낭만화(또는 공포화) 하는데 매우 탁월하기도 하다. 특히 효신과 시은의 관계가 묘사되는 방식이 그러하다. 예컨대 효신이 아이들로부터 야유성 우유팩 세례를 받는 것을 목격한 후, 분노한 시은이 우유팩 하나를 발로 밟아 터뜨릴 때 나는 소리는 시은의 청력 문제를 알아채지 못하는 음악선생에 대한 반항으로 효신이 피아노 줄을 끊어버릴 때 나는 파열음과 몹시 닮아있다. 닮아있을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 매우 리드미컬한 대구를 이룬다. 효신의 죽음 이후 각종 유령적 현상으로 인해 패닉에 빠진 아이들이 몰개성한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장소로서의 1층 중정(中庭)과, 효신과 시은이 연인으로서 가장 순수하게 교감하는 곳으로서 그려지는 옥상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공식적으로 존재해도 되는 것으로 승인된 장소와 그렇지 못한 장소의 대조는 아이러니하게도 ‘승인되지 못한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력을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승인된 것들’의 무의미함도. 여고괴담2는 팬들마저도 인정하는(?) 무섭지 않은 공포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가 사운드와 공간을 통해 관객의 신경을 긁으려는 방식 눈치챔으로써 전통적인 공포 영화 문법의 재미를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영화는 무엇일까?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코리안 뉴 웨이브’를 중심에 둔다면 그 시작인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이장호)일 것이고, 작가주의 예술 영화라면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 배용균)이 떠오를 것이다. 대중적 상업영화의 규범으로는 배창호의 < 고래사냥 >(1984)과 < 깊고 푸른 밤 >(1985)이 있을 것이며, < 길소뜸 >(1986. 임권택)이 보여준 리얼리즘의 시선도 빼놓을 수 없다. <애마부인>(1982년)부터 등장한 시그니처 포즈 하지만 영향력으로 본다면 단연 < 애마부인 >(1982. 정인엽)이다. 이 영화 이후 충무로는 ‘에로티시즘’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이어지는 ‘애마 프랜차이즈’는 1980년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한국영화의 ‘에로 패러다임’을 규정한다. <애마부인>은 이전까지 한국영화가 애써 눈 감아 온 ‘여자의 욕망’에 대해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방향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거나, 그 표현이 미학적이거나, 그 서사가 논리적으로 수긍할 만하다는 건 아니다. <애마부인>은 거대한 시작이었고 수많은 에로 영화들은 이 영화를 모방하거나 변주했다. ‘애마’라는 캐릭터가 30년 넘게 그려온 연대기는 한국영화의 웬만한 에로틱 아이템은 모두 품고 있었고, 그 흐름은 이후 < 젖소부인 바람났네 >(1995. 김인수)로 만개한 에로 비디오 시장과도 직결된다. 1대 애마 안소영. <애마부인>은 애마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때 애마는 고개를 돌려 관객을 응시한다. 애마의 각성. 이 테마는 30년 넘게 지속되어 온 ‘애마 프랜차이즈’의 핵심이다. 1982년은 분기점이었다. 이 해 안소영 과 임동진 이 부부/연인으로 등장하는 두 편의 영화가 개봉된다. <애마부인>과 < 산딸기 >(1982. 김수형)였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로틱 멜로드라마와 일제 강점기를 다룬 토속 영화. 만약 <산딸기>가 더 인기를 끌었다면, 1980년대 에로 트렌드는 후자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지만, 결과는 전자의 압도적 승리였고 이후 ‘애마의 세계’가 열린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 이후 신군부 쿠데타와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을 겪은 남한 사회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여전한 공포 정치였지만, 그 표면은 훨씬 화려해졌다. 섹스와 스포츠와 스크린을 동원한 이른바 ‘3S 정책’의 시대였고, 통금 해제와 함께 ‘심야 상영’이라는 게 가능해졌으며, 그 첫 수혜자는 바로 <애마부인>이었다. 그 해 한국영화(당시엔 ‘방화’라고 불렀던) 흥행 1위였던 <애마부인>은,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극장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던 화제작이었다. 감독은 정인엽 . 1960년대에 데뷔해 반공 영화부터 청소년 영화까지 이런저런 장르를 섭렵하다가 호스티스 영화 < 꽃순이를 아시나요 >(1979)로 빅 히트를 기록한 정인엽 감독은 1970년대 말 미국으로 연수를 떠난다. 이때 아트하우스에서 접한 유럽과 미국의 에로티시즘 영화들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귀국 후 당대 베스트셀러였던 조수비의 『애마부인』(1981)을 영화화한 것이다. <애마부인>은 달랐다. 여성이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 자유 연애를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여성의 육체를 눈요깃감으로 전시한다는 점에서 꽤나 모순적인 영화였지만, 당대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1980년대식 욕망을 읽었다. 혼자 아파트에 살며,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고, 패셔너블하면서, 나이트 클럽이나 바에서 즐기는 여자. 여기엔 1960년대 멜로드라마의 모성에 대한 강박이나,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가 지닌 비극적 운명의 흔적은 없었다. 유명무실한 가부장제(애마의 남편은 감옥에 있다), 육아의 의무에서 해방된 솔로의 삶(시댁에서 아이를 빼앗아갔다), 경제적 풍족함(애마에겐 생계에 대한 고민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육체적 매력(남자뿐만 아니라 동성 친구도 눈독 들인다)…. 애마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였으며, 한편으론 남한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일부일처제가 붕괴중임을 몸으로 선언하는 인물이었다. <애마부인> 시리즈에서 ‘애마’는 ‘말’과 함께 ‘자동차’를 의미한다. 호스티스 영화가 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여성들의 사연이라면, <애마부인>의 애마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오너 드라이버인 그녀는 직접 차를 몰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다. 사진은 <애마부인 6>. 모델인 애마(다희아)는 자동차 CF를 찍고 있는데, 이 영화엔 현대자동차가 공식 협찬을 했다. 산업적으로도 <애마부인>은 전인미답의 경지로 들어갔다. 이른바 ‘애마 프랜차이즈’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강한 생명력을 지닌 시리즈일 것이다. 1982년에 첫 선을 보인 후 최근 < 애마부인 2016 >(2016. 김미연)까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20대 초반의 관객이 어느덧 환갑에 가까워질 때까지, 애마의 역사는 세대를 가로질러 이어졌다. 연방영화에서 제작한 ‘정전’은 1996년까지 13편으로 이어지지만, 정전보다 많은 ‘외전’이 있었다. 극장용 영화에서 시작한 프랜차이즈는 비디오 시장과 모바일 시장을 거쳐 IPTV 시장까지 이어졌으니, <애마부인>과 그 후예들은 한국의 영상 콘텐츠에 대한 산 증인인 셈이다. 그리고 애마 시리즈는 스타 시스템에 정면 도전했다. 배우와 장르의 인기에 힘입어 시리즈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프랜차이즈 자체의 동력을 통해 ‘O대 애마’라는 식으로 편마다 신인(급) 여배우를 등장시켰고 그들을 스타덤에 올렸다. 1대 애마 안소영, 2대 애마 오수비, 3대 애마 김부선. <애마부인> 시리즈의 초창기를 장식한 강렬한 섹슈얼 카리스마 배우들. 흔히들 <애마부인> 1편만 보고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본 양 이야기하지만, 정인엽 감독이 연출한 1~3편을 모두 본 후에야 이 시리즈의 진수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애마부인>과 < 애마부인 2 >(1984. 정인엽)는, 배우는 안소영에서 오수비 로 바뀌지만,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이어지는 스토리라인을 지닌다. 1편의 마지막에서 애마는 젊은 애인과 남편 사이에서 결국 남편을 선택하고, 그들의 가정은 회복된다. 하지만 남편은 변한 게 없다. 여전히 일에 바쁘다는 이유로 밤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편을 위해 단장했던 애마가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면서 영화는 끝난다. 2편의 시작 역시 애마(오수비)가 화장을 지우는 장면이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1편을 통해 애마는 각성했고, 2편의 그녀는 이미 이혼했으며 외국 항공사에서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고 근사한 애인 성현( 신일룡 )이 있다. 1편이 애마가 불행한 이유로 ‘바쁜 남편으로 인한 외로움’을 제시한다면, 2편에선 단 한 줄의 대사로 그것은 모두 허울이며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린 함께 도달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 애마부인 3 >(1985. 정인엽)에 오면 더욱 명확하게 진단한다. 의사( 진봉진 )는 말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다수의 부인들은 남편이 무력하다는 이유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애마부인>의 엔딩(상단).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애마는 화장을 지운다. <엠마누엘>(1974. 쥐스트 자켕)의 엔딩(하단). 엠마누엘(실비아 크리스텔)은 짙게 화장을 한다. 과거의 모습을 지우고 새롭게 변신한 모습이다. <애마부인 2>의 첫 장면에서 화장을 지우던 애마의 모습은 1편의 엔딩과 연결된다. 하지만 <애마부인 2>의 엔딩에서 활짝 웃는 애마는 헤어스타일을 단발로 바꾸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모습이다. 남편, 애인, 연하남 등 ‘남자’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자존심을 죽이고 잠자리를 요구할 때마다 당신은 무참하게 날 거부했어요,”(애마) “난 당신이 그런 여자인 줄 몰랐어.”(남편) 이런 식의 대사로 변죽만 울렸던 게 <애마부인>이라면, <애마부인 2>는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부부 사이의 ‘섹스’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며 애마는 “난 이제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어요”라며 선언한다. 그리고 3편에 오면 애마( 김부선 )는 남편을 집에 남겨두고 떠나 버린다. 종종 사람들이 <애마부인> 시리즈를 유부녀의 일탈과 불륜에 대한 이야기 정도로 여기는데, 이 시리즈는 시종일관 ‘부부 관계’에 대해 고찰한다(10년 후에 나온 < 결혼 이야기 >(1992. 김의석)는 <애마부인>에 로맨틱 코미디를 결합한 업그레이드다). 그런 점에서 <애마부인>은 20년 가까이 독재와 유신 체제로 억눌렸던 한국 사회가 폭발했던 1980년대의 ‘욕망의 사회학’이자 ‘부부의 심리학’이었다. <애마부인> 시리즈를 이야기할 때 애마 못지 않게 인상적인 캐릭터는 에리카이다. 1편과 2편에서 김애경 역할을 맡은(목소리는 박정자 의 더빙) 에리카는 “애마야, 제발 그 봉건적 사상 좀 버려. 사랑해주지 않는 그런 남자와는 같이 살 필요가 없는 거야”라고 말하는 계몽적 멘트를 날리면서, 한편으론 “네 몸은 언제 봐도 정말 예뻐”라며 섹슈얼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애마부인> 시리즈는 당시로선 과감하게 호모섹슈얼리티에 대해 가감 없이 표현했고, 이것은 억눌린 부부 관계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이국적 이름을 지닌 동성 친구’ 캐릭터는 3편의 세실리( 박원숙 )을 거쳐 < 파리 애마 >(1986. 정인엽)와 <애마부인> 4편과 5편엔 다시 에리카로 이어지고, 7편에선 루비아( 박혜란 )가 등장한다. 이후에도 이 시리즈엔 항상 예술계나 화류계에 종사하는, 개방적인 여성들이 등장해 애마의 곁에 머문다. 애마에겐 항상 자유로운 삶을 사는, 영어 이름으로 불리는 솔로 친구가 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1편과 2편의 에리카(김애경), 3편의 세실리(박원숙), <파리 애마>의 에리카(민복기), 4편의 에리카(윤지원), 5편의 에리카(전혜성), 7편의 루비아(박혜란). <애마부인>에서 애마와 에리카의 얼굴을 교차해 보여주는 신. 에리카는 말한다. “애마야, 네 몸은 언제 봐도 정말 예뻐.” 두 여성의 에로틱한 관계는 8편 이후 두드러지며, 이전엔 ‘노골적 암시’ 수준이었다면 매우 직접적인 베드 신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남자가 점점 싫어져.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아”라는 애마의 대사가 드러내듯, 10편은 퀴어 영화에 가까운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장 인상적인 섹스 신은 9편일 듯하다. 애마( 진주희 )는 여행 중 우연희 강희( 강선영 )라는 포토그래퍼를 만나 그녀의 모델이 되고 사랑을 나누는데, 그 베드 신은 아마도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격렬한 수위일 듯. 이때 강희는 말한다. “나는 구속 당하는 건 질색이다. 그런 날, 사람들은 레즈비언이라 비웃더군.” 호모섹슈얼리티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테마였다. (상단 좌측부터 지그재그로) <애마부인 7>의 애마(강승미)와 루비아. <애마부인 10>의 애마(오노아)와 영주(유미희). <애마부인 9>의 애마와 강희. 한편 정인엽 감독은 <파리 애마>의 유혜리와 ‘엠마누엘’ 실비아 크리스텔과 함께 <성애의 침묵>(1992)를 찍는다. 이 영화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 <애마부인> 시리즈는 수많은 클리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건 말 타는 장면일 것이다. 애마의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은 말을 통해, 말을 어루만지는 행동과, 말을 타는 쾌감과, 말 위에서 느끼는 속도감 등을 통해 해소되는데, 종종 이 신은 판타지로 제시되며 일종의 마스터베이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전통은 최근작인 <애마부인 2016>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남편과 트러블이 있는 은혜(류현아)는 친구 유리( 백세리 )의 권유로 승마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든다. ‘말’로 상징되는 자연은, 도시에서 해소되지 못하는 욕구의 해방구이기도 한데, <애마부인> 시리즈는 바닷가나 숲 속 같은 공간을 종종 섹스의 공간으로 설정하며, 여기서 말은 어떤 매개체가 된다. 한편 이 시리즈엔 ‘도시 VS 자연’처럼 수많은 이항 대립이 존재하며, 이것은 영화 전체를 구성하는 어떤 공식이 된다. ‘결혼 VS 불륜’ ‘남편 VS 애인’ ‘애마 VS 에리카’ ‘이성애 VS 동성애’ ‘현실 VS 판타지’…. 여기서 애마는 그 경계에서 고뇌한다. 이외에도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홀로 엑스터시를 느끼거나(이때 애마는 종종 안대를 한다), 고독이 몸부림 칠 때 침대나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 등도 시리즈에서 반복되는 ‘시그니처 포즈’들. 이 모든 것이 애마의 내면적 갈망을 표현한다. 훔쳐보기 신도 마찬가지다. 애마는 카페나 술집 같은 곳에 자주 가고, 그곳에서 우연히 낯선 커플의 애정 행각을 목격한다. 그 모습에 격정을 느낀 애마는 몸을 비틀며 스스로를 느끼는데, 이때 그런 애마의 모습을 역시 훔쳐보는 음험한 남성의 시선이 있다. 그 남자는 애마에게 접근해 섹스를 요구하고, 애마는 뿌리친다. 이런 구도는 종종 스토킹이나 강간의 모티프와 결합되어 <애마부인> 후기 시리즈에 자주 등장한다. 흥행력이 떨어지던 시기 자극적 요소로 관객을 끌려는 시도일 수도 있지만, 그 시기 창궐하던 에로 비디오의 성폭력적 요소를 받아들인 면도 있다. (계속) <애마부인>. 전설의 장면. 말이라는 상징적 존재와 무의식. 그리고 판타지. <애마부인 2>. 욕조에서 목욕을 하던 애마는 말의 판타지에 빠지고, 그 안에서 젊은 남자와 섹스를 한다. 현실로 돌아왔을 땐 침대에 마치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다. <애마부인>에서 애마는 바에서 어느 커플을 엿본다. 이때 그녀를 바라보는 낯선 남자가 있다. 격렬한 키스를 나누는 커플. 애마는 다리를 비틀며 은밀한 마스터베이션에 빠진다. 엿보기와 마스터베이션의 결합은 <애마부인> 시리즈에서 여러 번 반복된 공식이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애마부인> <애마부인 2> <애마부인 3> <애마부인 9>의 애마들. 그들이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는 모습은 이 시리즈의 시그니처 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