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지구
- 감독
- 김태형
- 제작년도
- 2023
1978년은 모든 것이 나쁜 상태였다. 이미 3년 전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통과된 다음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무언가 위협적인 사건이 계속 벌어졌다. 그 해가 시작되었을 때 영화배우 최은희 가 북한에 납치되었다, 고 발표했다. 3월 1일에 윤보선 전(前)대통령을 비롯하여 민주인사들이 ‘3.1 민주선언’을 했지만 그 해 가을 10월에 정부는 휴전선에서 세 번째 남침 땅굴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선거에서 박정희는 삼선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오는 관객은 거의 없었다. 그때 한국 ‘상업’영화 장르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하이틴 청춘영화뿐이었다. 그리고 새마을영화, 반공영화, 문예영화라는 이름의 정책영화들이 외국영화 스크린 쿼터를 얻기 위해 그저 의무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검열은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유현목 은 (아마도 그의 마지막 걸작이라고 해야 할) < 장마 >를 완성했지만 거의 아무도 보지 않았다. 김기영 은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를 찍은 다음 일 년 동안 개봉을 시키지 못했다. 이 영화를 시네필들이 발견하기까지는 박찬욱 의 열렬한 지지를 기다려야만 했다. 김수용 은 마치 실험영화를 만들기라도 하듯 대사가 없는 영화 < 웃음소리 >를 찍었다. 하지만 비평은 미처 이 영화에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침묵을 지켰다. 영화인들을 향해 “피고(被告)”라고 말하길 즐기던 하길종 은 완전히 항복하듯이 물러나서 < 병태와 영자, 속 바보들의 행진 >을 거의 자포자기하듯이 찍은 다음 그 이듬 해 2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임권택 은 그 안에서 묵묵히 영화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그 해에 네 편의 영화를 찍었다. 임권택을 임권택으로 만든 < 족보 >를 만든 해였다. 그런데 그 해에 임권택의 영화 전체에서 가장 기이한 영화 두 편을 더 찍었다. <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와 < 가깝고도 먼 길 >. 나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먼저 두 편의 영화가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은 두 편 모두 어린 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전에 어린 아이가 주인공이었던 전쟁영화 < 울지 않으리 >가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어른들. 희생당한 아이들, 여기서 반격하기라도 하듯 환상의 서사가 활동을 시작한다. 아이들이 총을 들고 어른들을 대신해서 전쟁을 한다. 상징적인 비유들. 아이러니의 전복. 나는 이미 이 영화에 대해서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 두 편은 완전히 다른 특별한 순간을 담고 있다. 임권택 은 주제에 대한 어떤 탐구나 소재에 대한 어떤 관심도 없이 여기서 오로지 영화가 이런 경우에도 견딜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만 같다. 이런 경우. 영화는 너무 쉽게 관습에 복종해왔다. 이 예술의 문법은 할리우드 고전영화들의 표본에서 끌어내고 거기서 체계를 만들었다. 문법이 만들어내는 경우. 그것을 따라가면서 만들어진 영화들. 임권택은 그것을 ( 정창화 를 경유하여) 경험으로 배운 다음 그것이 그의 영화 안에서 관습이 되었을 때 그 영화들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미 < 왕십리 >에서부터 눈에 보이게 임권택의 영화는 느려지고 있었다. 거기서 멈춰야하는데 그냥 지켜보았고, 주고 받아야하는데 두 사람을 하나의 화면에 놓아두었으며, 이따금 이야기 바깥으로 빠져나와서 아무 상관도 없는 풍경 안에 놓인 그 사람을 멀리서 쳐다보았다. 영화가 무언가를 느껴보는 시간. 임권택은 제제나 소재가 아니라 영화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마, 아마 틀림없이 그랬던 것 같다. 영화라는 문제. 영화 안에서의 질문. 종종 이 질문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거기서 어떤 대답도 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에서 그 대답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각자의 결론이 있을 뿐이다. 그때 결론은 힘의 방법을 지시하게 될 것이다. 영화의 힘은 거기에 있어요. 아무도 영화에서의 힘을 정의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 그 힘은 이제까지의 관습을 부숴버릴 것이다. 예술에서 형식의 문제는 그 예술의 존재의 문제이다. 여기서 그 예술의 위계질서의 자리를 놓고 다투기 시작할 것이다. 예술의 능력이 형식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까. 임권택은 판단의 순간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때 판단은 반성이라고 살짝 말을 바꾸어도 괜찮을 것이다. 무엇을 더 음미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전형적인 세계. 자유로운 활동. 이때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영화 자체가 부서질 수도 있다. 임권택은 자신이 위태로운 자리에 왔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질문한다. 한 번 더 반복하듯이 말하겠다. 이런 경우에도 견딜 수 있을까. 아마도 <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를 각자는 자기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영화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자본과 정치, 예술.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영화제작자와 검열관과 영화감독. 동아수출공사는 이 영화를 (처음에는 ‘위기 영화(Crisis film)이라고 정의 내려진 다음 하위 자르로 재(再)명명된) 재난영화(Disaster Movie)로 기획했(던 것 같)다. 할리우드는 1973년 < 포세이돈 어드벤처 >의 성공으로 일련의 재난영화들이 만들어졌고 < 타워링 >에서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스필버그의 < 죠스 >도 일련의 재난영화 장르로 기획된 영화이다. 예기치 않은 지진으로 발생한 해양해일이 제야의 파티를 벌이는 거대한 관광유람선을 덮친다. 상하가 뒤집힌 배에서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승객들은 시시각각 차오르는 바닷물을 피해 미로 같은 구조물 속에서 위로,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 동아수출공사는 이 영화를 수입한 회사이다. 물론 그때 한국영화는 할리우드 재난영화 규모의 영화를 제작할 수 없었다. <저 파도 위의 엄마 얼굴이>는 아동 재난영화로 기획되었다. 이 영화를 본 검열관은 먼저 ‘아동’ 주인공 영화라는 사실에 안심했을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 씬에서 중공(그때는 중국을 ‘中共’이라고 불렀다. 물론 ‘中華人民共和國’의 약자이지만 사람들은 ‘中國共産黨’의 약자처럼 읽었다) 화물선에 구출된 주인공 김한 어린이에게 ‘중공’ 선원들이 북한으로 보내줄까, 라는 질문에 완강하게 저항하며 대한민국, 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검열관들에게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이 장면은 1968년 12월 1일 강원도에 침투했던 무장공비들이 마주친 삼척 시골마을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자 그 일가 전체를 살해한 사건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이승복 일가 참상은 박정희 정권 내내 반공(反共)교육과 홍보의 이미지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검열관에게는 아동 교육홍보 반공영화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든다는 문제와 만나게 되면 완전히 다른 질문이 된다.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는 거대한 배가 뒤집히는 <포세이돈 어드벤처>가 아니며 엄청난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피노키오>가 아니다. 혹은 하이 테크한 스펙터클 < 라이프 오브 파이 >가 아니다. 영화라는 시스템이 허락하는 조건과 상황. 영화에서 이미지의 생명은 화폐, 라고 고다르가 말했을 때 그 말은 고통스러운 전언이다. 영화에서 어떤 풍경이 있을 때, 거기에 어떤 사물이 나타날 때, 그 사물이 사건이 될 때, 그 사건 안으로 주인공이 들어가야 할 때, 이 모든 관계는 화폐의 연쇄고리이다. 종종 우리들은 이 문제를 지나치게 영화에서 하위 체계에 놓아둔다. 시나리오의 많은 장면들은 쓰기도 전에 삭제된다. 찍을 수 없는 장면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문학과 영화의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스템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풍경은 화폐의 권리이며 결정에 따라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설명은 둘 사이의 등가성을 인정하고 교환 가치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임권택이 찍어야하는 풍경. 진행해야 하는 사건. 그냥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돛단배에 열두 살 소년 김한 어린이가 표류하는 이야기가 그 전부이다. 달리 가족과 연락할 도구도 없으며, 구조를 요청할만한 방법도 없다. 가지고 있던 트랜지스터라디오는 김한 어린이가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다음 (한국방송은 더 이상 잡히지 않고 주파수에는 중국 방송만이 잡힌다) 배터리가 방전된다. 이 소년이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구조를 기다리며 버티는 것 말고는 달리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게다가 무언가를 하기에는 배가 너무 좁다. 주변의 풍경은 바다가 전부이다. 텅 빈 미장센. <저 파도 위의 엄마 얼굴이>는 <캐스트 어웨이>가 아니다. 게다가 소년을 구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구조대는 허락할 수 있는 제작비를 훨씬 넘어설 것이다. 1978년은 컴퓨터 그래픽이 영화에 도착하기 전이다. 그러므로 여기엔 별다른 사건이 있을 수 없다. 임권택은 그걸 끌어안고 바다로 나아갔다. 물론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에서 서사의 약점을 지적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돛단배 한 척에 별다른 엔진도 없이 바다로 떠밀려 내려간 다음 라디오 방송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전 국민적인 구조 대상이 되었는데도 레이더망과 헬리콥터 수색을 피해서 조류의 흐름을 따라 저 멀리 공해상으로까지 떠밀려갔다는 진행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 게다가 동해 벌섬 근처에서 실종되었다면 동해상에서 떠돌았을 텐데 그 배를 왜 ‘중공’ 화물선이 구했는지도 잘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왜 이 영화의 설정을 서해로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그때 한국은 대만과 수교를 맺고 ‘중공’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은 것은 1992년이다. 그런데 아무런 외교적 분쟁 없이 김한 어린이는 (아마도) 인도적 차원에서 돌아온다. 다시 한 번 환기하지만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는 < 족보 >과 같은 해에 찍은 영화이다. 그 이듬 해 임권택은 < 깃발 없는 기수 >와 < 짝코 >를 연달아 연출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서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임권택의 관심은 서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영화에서 서사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거의 무의미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의 이야기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의도적으로 영화의 순서를 무시하고 서사의 순서대로 이야기하겠다. 평화롭게 야구를 하며 놀고 있는 아이들. 그때 공이 멀리 날아가고 김한은 그 공을 주우려다가 나무 위의 새장을 발견한다. 김한은 나무에 올라가 새장에서 새알을 꺼내려다가 새장을 나무에서 떨어트린다. 그때 동네 할아버지가 와서 야단치며 그 새장을 다시 나무 위에 올려놓으려다가 그만 나무에서 떨어진다. 가난한 할아버지는 응급치료만 받고 병원을 떠나자 걱정이 된 아이들은 치료비를 모으기로 결심한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시작이다. (하지만 중간 과정은 김한 어린이가 배에서 표류할 때 플래시백으로 다시 진행된다) 궁리하던 김한은 용돈을 받기 위해 해안가 마을에서 큰 배의 선주인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거기서 알고 지내던 칠성이형이 돛단배로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아오는 걸 보고 김한은 호기심에 몰래 그 배를 훔쳐 타고 바다로 간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고 지루해진 김한은 잠깐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서 배가 바다 한 복판으로 흘러왔음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가 영화가 시작하고 20분이다. 그런 다음 1시간 10분이 더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달리 설명할 내용이 없다. 설명할 드라마가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갑자기 배가 나타난다. 누군가 구조 요청을 보낸 것도 아니고 또 무언가 단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우연히 바다 한 복판에서 배를 만난다. 표류하던 김한은 ‘중공’ 화물선에 구조되고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반 친구들을 만난다. 영화가 더 이상 진행해야 할 사건이 없는데도 거기 영화가 있을 때 비로소 영화적, 이라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체자레 자바티니의 정식화 때문이다. 그런 다음 각자는 각자의 방법으로 이 정식을 밀고 나아갔다. 임권택은 1953년에 자바티니가 주장한 ‘영화에 관한 몇 가지 사유’를 읽지 못했다. (이 글은 지금도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속적으로 임권택이 영화에서 이론이 정식화시켜놓은 자리를 우회해서 자기 자신의 시행착오를 거친 다음 같은 자리에 도착하는 것을 반복해서 보았다. 결국에는 동일한 결론. 예기치 않게 여기서 임권택은 영화에서 잉여의 시간들이라는 문제와 만나게 되었다. 임권택은 이전에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이 영화가 섬세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섬세한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에서 시련은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사건이 아니라 잉여의 시간들을 견디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 이 영화를 무시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없었다면 < 만다라 >는 없었을 것이다. 잉여의 시간들로 이어지는 만행 길.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왕십리>에서부터, 그것도 전체가 아니라 아마도 절반으로 나눈 후반부에서, 임권택의 영화 내부는 이상할 정도로 드라마 사이를 연결하는 장치들 사이의 관계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순간적이긴 하지만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나는 그걸 <둘째 어머니>에서도 보았다. <만다라>(1981) 다소 장황하게 이 문제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임권택의 영화 전체 안에서 이제까지 잘 설명되지 않은 상태의 형식이 있다. 처음 볼 때는 통상적인 설명에 따라 이 상태를 나태한 형식으로만 받아들였다. 내 생각을 바꾼 건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와 < 가깝고도 먼 길 >이었다. 하지만 두 영화는 동일한 문제의식 위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둘을 분리해서 설명할 것이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자. 임권택은 드라마가 전부라고 결론을 내린 다음 영화는 거기에 복종해야한다는 믿음으로 장치들을 동원하고 그 안에서 시스템을 만들면서 시작했다. < 망부석 >은 이미 그가 이 시스템의 장인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기이한 방식으로 모더니즘 영화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할리우드 고전영화를 배우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서 리얼리즘이라는 질문을 배웠다. 영화에서 리얼리즘은 문학과 다른 경로를 밟아 나아갔다. 귀도 아리스토타르코와 앙드레 바쟁의 논쟁. 사회 안에서의 영화의 리얼리즘이라는 정치적 규정과 영화 안에서 세계의 존재의 형식에 대한 반론. 환상 없는 세상 앞에서 영화는 쇼트가 세계라는 시간 속에 놓여야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영화는 무엇을 느껴보는가. 대답이 기괴하게도 빈곤의 실체가 아니라 시간의 형식이었다. < 오발탄 >이 리얼리즘 영화이자 이미 모더니즘의 방법론을 따라가고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거리에서 무작정 배회하는 실직자들. 그저 거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쇼트들. <오발탄>은 < 자전거 도둑 >이 아니라 < 흔들리는 대지 >이다. 그런 다음 < 만추 >와 만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펜스. 단지 그것뿐인 쇼트들, 아마도, 아마도 안토니오니의 풍경. 거기서 1974년 세대, 이장호 와 하길종 , 김호선 은 각자의 방법을 배웠다. < 별들의 고향 >, < 바보들의 행진 >, < 영자의 전성시대 >. 물론 거기서만 배운 것은 아니다. 좀 더 복잡하게 잡종 교배된 역사가 있다. 그때는 아무런 설명도 알지 못했다. 1974년 세대는 자신들이 왜 그렇게 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친숙한 지 스스로 설명하지 않았다. (혹은 못했다) 단지 변방의 영화 문화에 속하던 그들이 동시대 ‘우드스탁 제너레이션’이 된다는 흥분만이 거기에 있었다. 네오리얼리즘의 방법론을 받아들인 누벨바그를 경유하여 아메리칸 뉴 시네마로 다가온 할리우드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이미 그들 세대가 몰락한 다음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임권택은 그들 곁에서 멀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영화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성립이라는 문제. 저렇게 진행해도 괜찮은가. 새로운 시청각 기호들의 배치. 저렇게 촬영해도 괜찮은가. 그것들이 창조해내는 영화적 상황, 저렇게 편집해도 괜찮은가. 그 상황이 만들어내는 감각. 이때 임권택은 그 상황에 적응해야 할 필요는 느꼈(을 것이)다. 물론 한 번에 어떤 단절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임권택의 영화에서 종종 나태하다고 비난한 장면들, 사실은 그 순간에 임권택은 그 장면이 사건 안에서 네 것이거나 내 것인지 결정할 수 없는 어떤 개입이 가능한 지를 시험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실험, 이라는 말을 피했다. 임권택은 영화에서 실험이라는 말을 혐오한다. 시험과 실험은 임권택의 영화에서 커다란 차이를 갖는다. 실험이 그 예술의 존재론에 질문을 던진다면 시험은 그 예술의 능력에 대한 반성적 판단을 요구할 것이다. 임권택은 그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무모한 드라마를 끌어안지 못했을 것이다. 무모한 드라마? 무엇보다도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는 자꾸만 균형이 깨져버리고 방향을 상실한다는 인상을 안겨준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말 그대로 표류. 여기서 임권택은 사실상 드라마를 어떻게 해서든지 느슨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해야만 개입의 여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무엇이? 하나의 위기. 드라마의 위기.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영화의 어디쯤 온 것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전에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기승전결은 하나의 리듬이었으며, 그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아름답게 다루는데 거의 모든 영화적 순간들이 바쳐졌다. 여기서는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의 리듬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거의 아무 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감정의 어느 지점에 온 것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가장 이상한 것은 한 쪽은 표류하고 있고 다른 한 쪽은 탐색을 하고 있는데 끝내 둘 사이에서 어떤 끈도 발견하지 못한 채 김한 어린이는 완전히 바깥으로 빠져나간 버린 다음 다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둘 사이에는 아무 드라마도 없다. 물론 임권택은 돛단배를 탄 김한 어린이를 하나의 시퀀스로 놓은 다음 육지에서 걱정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모, 할아버지와 할머니, 군부대. 돛단배의 주인인 칠성이와 그의 아버지, 분주히 그들 사이를 오가는 월간 신여성 기자 혜미를 또 다른 시퀀스로 놓고 그 둘 사이를 교차편집 한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사라진 효과. 그 둘은 각자 활동할 뿐이다. 이때 임권택은 이 둘을 바라볼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자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얻으려면 영화 바깥으로 나와서 무능력하게 그저 이쪽과 저쪽을 쳐다보는 도리밖에 없다. 불균질한 상태에서 진행되는 두 개의 시퀀스. 그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둘 사이에서 의도적인 어떤 결과를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하나는 바다 위에서 진행되고 다른 하나는 육지에 머물러 있는 것뿐이다. 적어도 이 차이를 임권택은 정확하게 의식하고 있다. 김한 어린이를 제외하고 누구도 바다 위로 나가지 못한다. 아버지가 김한 어린이를 직접 탐색하기 위해 배를 빌리기까지 하지만 그런 다음 아버지는 배와 함께 영화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김한 어린이가 귀환할 때 공항에서 다시 나타난다) 오직 유일한 예외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서 지친 김한 어린이가 환상을 볼 때 저 멀리서 아버지와 어머니, 이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구조선을 타고 나타나는 장면뿐이다. 그런데 마치 누구도 바다 위에 올 수 없다는 걸 환기시키기라도 하듯 그들은 저 멀리서 나타난 다음 갑자기 김한 어린이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 마치 그들끼리 바다에 관광을 나오기라도 한 듯,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김한 어린이에게서 고개를 돌린 다음 다른 곳을 보면서 그들끼리 즐겁게 웃는다. 이 장면은 처음부터 환상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이 씬은 김한 어린이가 바다 저쪽을 바라보자 화면은 초점이 맞지 않은 상태(out_of_focus)로 시작한다. 어쩌면 원래의 목표는 김한 어린이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헛것이 보일만큼 지쳤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보조적인 설명 씬처럼 시작한다. 그런데 이 주관적인 환상 속에서 김한 어린이가 구조를 받는 대신 버림을 받을 때 이상할 정도로 보는 쪽을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 왜냐하면 문득 여기서 이 영화가 비극으로 끝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깝고도 먼 길>에서 벌어지고 만다) 이 공포에 질린 환상은 영화 전체에서 마치 오점처럼 작동한다. 오점? 그렇다. 자칫하면 영화에서 오점은 의미의 네트워크 전체에서 오작동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임권택은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설명할 때마다 거의 반복하듯이 같은 말을 했다. “지엽적인 재미를 따라가다가는 영화 전체를 망치는 거예요” 이 씬이 영화에서 무슨 특별한 장치도 아니고 이야기의 전환을 이루는 것도 아니며 김한 어린이에게 최소의 위기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위협적으로 거기에 있다. 임권택은 여기서 드라마가 수순을 밟아나가는 방법을 중단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그 장면 앞에서 예정된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 이제 임권택의 영화에서 진부한 것으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결정적인 순간과 마주하고 있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거의 집중력이 없어 보이는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는 상투적인 실패작의 전형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권택은 이 영화를 반대편의 극단에 가져다놓고 있는 중이다. 나는 좀 더 이 장면에 머무르고 싶다. 임권택은 아주 가끔 이상한 환상, 혹은 꿈을 갑자기 사사 안에 밀어 넣을 때가 있다. 그게 문제를 일으키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 게다가 서사에서 오점일 뿐만 아니라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이 전 해에 연출한 < 옥례기 >에는 임권택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꿈 장면이 나온다. 옥례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중매 시집을 간다. 그리고 첫 날 밤 이 남자가 다리를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인데다가 정신박약이라는 걸 알게 된다. (여기서 이 표현이 ‘멸시’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의 언어로 서술하는 중이다) 옥례는 꿈에서 이 동네를 도망치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잡으러 몰려온다. 그런데 이 영화의 서사는 사실상 정반대이다. 옥례는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내조한다. 어떤 의심도 없이 내내 옥례는 희생을 받아들인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이때 이 환상 혹은 꿈은 단지 그것이 현실인가 아닌가, 혹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라는 단순한 진위 판단의 여부를 슬그머니 넘어선다. 여기서 장황한 정신분석의 개념을 전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요점은 서사에 끼어든 꿈, 혹은 환상은 단순하게 서사의 장면과 장면 사이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종종 전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한 어린이는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고 안도한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부모님과 이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제까지 말썽을 부리면서 개구쟁이로 생활한 자기를 이 기회를 빌려 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사실은 이 꿈이 말하는 진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금 웃는 것은 자기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외면하면서 기쁨에 차서 웃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가정은 단지 짓궂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한 어린이는 구조된 다음 표류하던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공통점은 여전히 표류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꿈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라는 질문이 아니라 동일한 상태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의 요구이다. 못 찾는 것인가, 버림받은 것인가. 사실로부터 해석에로 옮겨갈 때 영화는 드라마를 고정점으로부터 풀어헤쳐 놓게 된다. 서사 안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교환과 교정, 그 사이에 놓인 선택의 불확정성. <옥례기>(1977) 그렇다면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왜 임권택에게 드라마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단지 그걸 진부함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할리우드의 위대한 고전영화들은 드라마 안에서도 결코 진부한 공식 안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리고 임권택은 그걸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았다. 그게 너무나도 놀라워서 연출부 시절에는 그의 동료들과 프린트를 카피한 다음 프레임 단위로 그걸 경이롭게 지켜보았던 경험이 있다.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는 그 대답의 일부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여기까지 우리는 그 한 척의 작은 배만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바다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를 진행하면서 임권택은 영화 앞에서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는 세계를 마주해야만 했다. 그건 모든 영화의 숙명과 같은 것이다. 그걸 피하고 싶으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 앞에서 스튜디오는 얼마나 조잡한가. 종종 세계는 시나리오를 때려 부셨을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멈추지 않는 비. 정반대로 아무리 기다려도 내리지 않는 비. 무한정 기다릴 수 있는 영화라는 것은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시스템의 영화라면 그냥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임권택은 속수무책인 바다로 영화를 가져다 놓았다. 평면의 공간. 미장센 제로의 장소. 단 한 명의 등장인물, 열 두 살의 어린 아이. 아주 작은 배. 영화는 여기서 다가가는 것과 멀리 물러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다. 거기서는 레일을 깔아놓고 카메라를 수직으로 이동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크레인을 세워서 상하로 움직일 수도 없다. 단조로운 망원렌즈. 흔들리는 배 위에서의 힘겨운 자세로 바라보는 클로즈업의 단편들. 나는 어떤 장면의 구도에서 이석기가 무거운 35미리 카메라를 들고 그 작은 배 위에서 위태롭게 찍을 수밖에 없었을 자세를 떠올리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보다 삼년 전인 1975년,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스필버그는 <죠스>를 찍은 다음 두 번 다시 바다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 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상어와의 바다에서의 쫓고 쫓기는 추적극을 보러가는 것이다. 스필버그는 할 수 있는 한 바다에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계속해서 해변에서만 머물다가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 11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바다로 나간다. 임권택은 어촌에 도착하자마자 바다로 먼저 나간다. 아니, 나가버린다, 라고 말하고 싶다. 바다에는 김한 어린이가 대결해야 할 대상이 없다. 구태여 그것이 있다면 바다 위에서의 시간이다. 임권택이 바다로 간 것은 거기서 바다를 음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서 마주하는 것은 바다가 주는 공포이다. 이때 그것은 드라마로서 주어진 공포라는 장치가 아니라 영화 앞에 마주하고 있는 바다가 주는 공포이다. 그걸 영화가 견뎌볼 수 있을까. 세 개의 질문, 첫 번째 질문. 그걸 견뎌야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대부분 이 영화에 대해서 실망한 사람들은 이 대답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망스럽다. 임권택은 아직은 드라마의 장치 안에 머물면서 교차편집을 하면서 여전히 망설인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 그걸 견뎌야 한다면 영화는 어떻게 될까. 여기서 임권택은 바다가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영화가 감당해야하는 순간들과 마주한다. 그 해에 임권택은 <족보>를 찍으면서 설진영 노인이 일렬로 늘어선 커다란 포플러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그 사이를 걸어오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위대한 장면에 대해서 나는 이미 설명했다) 여기는 도호 스튜디오가 아니다. 이 바람은 <요진보>의 거대한 선풍기 바람이 아니다. 그저 그 시간에 부는 바람. 영화가 그때 거기에 있다는 문제. 지금 바다는 화면 앞에서 명백하게 과잉하고 있다. 그러므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만일 영화가 드라마를 포기하고 그 과잉에 몰두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세 번째 질문이 나왔을 것이다. 그걸 견뎌야 한다면 영화는 무엇을 찍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임권택은 여기서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몇 가지 사실이 <저 파도 위의 엄마 얼굴이>에 기록되어 있다. 그때 바다는 어떤 은유도 상징도 아니다. 그런데 그 공포가 종종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말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바다, 라고 써야 할 자리에 공포, 라고 말했다. 방치될 수밖에 없는 환경. 바다는 그저 거기에 있다. 마치 재난과도 같은 그것. 이제까지는 그냥 놓아두면 영화의 장치들을 닥치는 대로 망가트려버릴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그것. 그런데 거기에 장치들을 대신하는 세계의 체험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을 임권택은 몇몇 순간에 경이롭게 바라보면서 그냥 내버려둔다. 영화에서 상실이란 없다. 하나가 자리를 비우면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물러날 이유가 없어졌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영화에서 충분히 실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독도에서 <저 파도 위의 엄마 얼굴이>를 찍으면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임권택의 표정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그 장면들이 증명하는 기이한 선물, 바다라는 영도(零度)를 깨달았을 때 그는 어떤 얼굴이었을까. (계속)
이미례 는 1957년 8월 20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연극영화학과에 재학하면서 스승 유현목 감독의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한국영화사의 거장 유현목의 조감독으로 여성이 등장하자 여성 감독이 드문 영화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졸업 후 김호선의 조감독을 거치는 등, 현장경험을 더 쌓은 이미례는 1984년에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로 데뷔했다. 수령에서 건진 내딸 관련 인터뷰 중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은 비행청소년 문제를 다룬 가족영화이다. 모범생이었던 유리는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부모의 불화를 겪으면서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딸을 수렁에서 구해내려는 부모의 악전고투가 눈물겹다. 특히 심리치료와 상담 개념이 거의 없었던 시대에, 청소년 문제 담당자가 부모에게 딸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제시하는 방안들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개봉한 해에 한국영화 흥행 순위 5위를 기록했다. 이 영화에서 유리 역을 맡은 김진아 (한국영화사의 대 스타 김진규 와 배우 김보애 의 딸이다. 김보애는 유리의 엄마 역을 연기했다)는 스타로 자리매김 했다. 이미례는 성공적인 데뷔작을 통해 박남옥 , 홍은원 , 최은희 , 황혜미 이후, 한국 영화계가 처음으로 건져낸 여성 감독으로 주목을 받았다. 여성 감독 자체가 별종으로 취급 받기에 충분한 시대에 ‘파마머리’에 담배를 물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28살의 여성감독 이미례는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고추밭의 양배추 촬영 현장 이미례의 두 번째 영화는 1985년의 < 고추밭의 양배추 >. 에로티시즘 영화가 한국영화의 주류를 이루는 시절이었기에 이 영화 역시 제목만으로는 그런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7년 동안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수환이 오지랖이 넓어 사사건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수환은 학교 안에서 노숙하기 일쑤고, 재벌의 딸을 경호하는 보디가드들이 캠퍼스에 들어왔다고 결투를 벌이고, 소매치기를 쫓다 교통사고를 당해 만신창이가 되거나, 불쌍한 사람을 위해 등록금을 쓰고는 공사판에 가서 일을 하기도 한다. 수환 같은 늙은 괴짜 대학생은 1970-80년대의 대학가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타입이다. 이미례의 세 번째 영화는 1987년의 < 물망초 >. 감독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손꼽는 이 멜로드라마는 그녀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부유하고 철없는 남학생 철수와 예쁘고 생활력 강한 여학생 영희가 오로지 사랑의 힘만을 믿고 대학생 부부가 되는 사건을 저지른다. 그들은 ‘철없는 애송이 부부’라는 사회의 편견을 깨고 꿋꿋하게 자립하려고 분투한다. 그들은 아이까지 낳아 키우며 악전고투 하지만, 철수가 불치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젊은이들의 발랄한 분투기가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리면서 짙은 여운을 남긴다. 영희는 한국영화의 여주인공 대부분이 매춘부와 호스티스였던 시기에 씩씩하고 활달한 캐릭터로서 주목할 만하다. 철수 역은 당시 스타로 발 돋음 하던 최재성 이 맡아 눈길을 끈다. 이 영화를 찍은 다음 해인 1988년, 이미례는 2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이후 이미례는 1987년에 < 학창보고서 >, 1990년에 < 영심이 >, 1991년에 <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를 연출했다. 모두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하이틴 영화이다. 이 시기 한국영화에서 하이틴 영화가 유행한 데다 여성감독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반영된 것 같다. 세 편 가운데 특히 배금택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심이>는 평범한 여고생 영심이가 가정과 학교에서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을 코믹하게 그려내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 가요계의 최고 스타였던 댄스가수 박남정 이 카메오로 출연하고, 이재은 , 김민종 , 이경영 , 노사연 등 화려한 출연진들도 화제를 모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박남정과 백댄서들이 출연, 박진감 넘치는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인다. 가수 노사연의 코믹한 연기도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1990년 ‘한국영화 베스트10’에 선정되었다. 이밖에 <학창보고서>는 열등학급으로 전학 온 주인공 창하가 스터디그룹을 결성하고 학우들을 다독여 학급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이야기이다. 이상아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무용수의 꿈이 좌절되자 방황하는 해리 역을 맡았다.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는 새로 부임한 젊은 남자 교사가 주인공이다. 그는 학생들을 변호하다 교장과 마찰을 빚기 일쑤인데, 결국 문제 학생을 위기에서 구해주려다 희생하게 된다. 학생들은 비로소 스승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오열한다. 이미례의 하이틴 영화는 모범학생이 아니라 평범하거나 다소 불량한 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그들이 즐기는 하위문화를 다채롭고 코믹하게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이미례는 작품으로 인정받거나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고, 당시까지는 유일하게 6편의 영화를 찍은 여성감독이자 영화계의 홍일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계속 주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인터뷰에 따르면, ‘제작자들이 깊이도 없는 청소년 영화만 맡기는 바람에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계속 청소년 영화만 하라고 하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쿼터 맞추려고 아니면 장사하려고 한국영화 찍는 분위기도 싫고, 청소년 영화감독으로 꼬리표가 붙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이래저래 탈진해서 영화를 놓아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미례는 영화 대신 공중파의 방송 다큐멘터리, EBS의 <육아일기> 등을 연출했다. 유아프로그램은 미래의 결혼 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더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프로덕션 ‘미례비전’을 설립했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우석대학교 영상학부에서 겸임 교수로 재직했다. 여행을 다니고 벗들과 어울리며 한가하게 쉬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미례는 1996년, 독신생활의 노하우를 집약한 책 『모르면 큰 일 나는 혼자 살기 테크닉』을 출판했다. 이 책을 내면서 그녀는 ‘혼자 사는 게 꽤 재미있었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나를 위해 요리를 만들고 청소를 했다. 그런 노력이 독신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관건인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나날이 늘어가는 독신 여성을 위해 책을 썼다’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 편으로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1997년 5월, 그녀는 등산전문잡지 「사람과 산」의 편집부장이자 산악인인 박기성과 결혼하면서, 오랜 독신생활을 청산했다. 임순례 감독과 함께 이미례는 애초에 영화계를 완전히 떠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동안 쉬려고 했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이 10년이 훌쩍 흘러가고 말았다. 2001년, 그녀는 산악영화 <화이트 케어>를 들고 컴백하려고 했다. 백두대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두 여성이 산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여성 버디무비가 될 예정이었다. 시나리오 작업도 잘 끝냈고 제작자도 나선 상태였기에 바로 제작에 들어갈 듯 했지만, 이미례가 10년 만에 영화계로 돌아온다며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끝내 영화로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07년, 이미례가 쓴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안나푸르나>라는 연극이 개막을 했다. 1999년, 산악인 엄홍길과 함께 안나푸르나를 등반하고, 하산 길에 실종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다. 여기에 여성 산악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들의 견고하고 끈끈한 우정을 담아내려고 했다. 이미례는 <안나푸르나>가 반드시 만들고 싶은 꿈같은 영화이기에, 저예산 독립영화로 직접 제작하려고까지 했으나 결국 영화화하지는 못했다. 2008년, 이미례는 여성영화인모임이 주최하는 ‘2008 여성영화인축제’에서 ‘올해의 여성 영화인 공로상’을 받았다. 여성 영화인이 없는 환경에서 후배 여성들을 위해 길을 터 준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미례는 영화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다짐해왔지만, 현재는 2005년에 문을 연 음식점 ‘여자만’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남편의 고향이 전남 고흥인데다 시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좋아 비법을 전수받다보니 음식솜씨가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영화제작이 계속 무산되자 먹고 살기 위해 음식점을 차리게 되었는데, 인사동 맛 집으로 대박이 나면서 분점까지 여는 성공을 거두었다. 여전히 이미례는 한국영화사에서 여섯 편의 영화를 연출한 몇 안 되는 여성감독으로 기록되고 있다. “죽을 때까지 영화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 그게 가장 행복한 삶일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영화계로 돌아와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새로운 신화를 쓰게 될지 기대해본다.
박남옥 , 홍은원 , 최은희 의 뒤를 이어 네 번째로 한국 여자감독이 된 황혜미 는 1970년대 유일하게 활동했던 여성감독이었다. 홍일점 영화감독 자체로도 유명했지만, 더욱 그녀의 명성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소르본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는 거의 정설처럼 회자되었던 소문이었다. 간혹 남편과 함께 미국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했다는 낭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 아름다운 생존 >에서 프랑스에 잠시 가있었을 뿐 소르본느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활동 당시에 그녀는 내내 여류감독과 소르본느를 졸업한 재원이라는 수식어로 규정되었다. 황혜미는 1936년 만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63년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황종률이며, 아마도 부친이 일본 규슈제국대학 졸업 후 만주국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이화여고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였고, 1961년 미국에서 김동수와 결혼했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잠시 학교를 다녔지만 바로 미국으로 가느라고 등록만 해놓고 수업을 거의 불참했고 대신 하루에 3편을 볼 정도로 열성적으로 영화관에 다녔다고 술회한다. 1) 인터뷰에서는 그 당시 <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 >(1959) 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본 추억을 생생히 기억해내고 있다. 황혜미는 어릴 때부터 이미 영화광이었는데 중학교 2-3학년이었던 부산 피난시절부터 미성년자 입장불가의 극장을 출입하는데 능숙했었다고 한다. 이 시기 기억나는 영화로 <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 >(1937)이나 < 망향(Pepe Le Moko) (>(1937)을 몰래 보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때부터 유럽영화에 깊이 심취해있었으며 프랑스 유학시절에는 유럽 모더니즘 영화, 특히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혜미는 인터뷰에서 스스로 전후 세대로 규정하면서 성장과정에서 카뮈나 사르트르에 영향받았고 헤르만 헤세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언급하면서 특히 영화제작에 대해서는 푸도프킨의 서적을 중요하게 참조했음을 밝혔다. 2) 첫 경험 미국에서 돌아와 김승옥 의 소설을 읽고 매료되었던 황혜미는 남편 김동수 의 도움으로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을 영화화하게 되었다. 김수용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 안개 >(1967)의 감독을 맡기 위해서 소공동의 사무실에서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엘리트’였던 제작자 김동수와 황혜미 커플을 만났고 그 자리에는 당시 신문에 열정적으로 글을 쓰던 이어령도 참석하고 있었다. 3) 태창흥업의 대명제작을 하는 프로듀서로 황혜미는 <안개>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그녀의 표현처럼 ‘처음이라서 재미있으니까 일일이’ ‘로케이션 헌팅까지 쫓아다니’면서 완성한 영화였다.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방가르드’한 기획을 밀어붙여 제작했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성공을 하였고 젊은 여성 기획자로서 황혜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문예영화 <안개>의 성공으로 획득한 2편의 외화수입권은 영화계의 초짜였던 황혜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4) 차기작으로 < 감자 >(1968)를 선택했고 김승옥에게 감독을 맡겼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검열에 시달렸던 <감자>는 원래 기획의도와 멀어지면서 흥행에도 실패하였다. 이러한 힘든 경험을 겪은 후 김동수와 황혜미 부부는 1970년 마벨코리아라는 영화사를 세우고 첫 작품으로 황혜미 각본, 감독의 < 첫경험 >(1970)을 제작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말 영화사는 보한산업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첫경험>은 1970년 11월 27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였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영화예술』에서 선정한 1970년 베스트 영화 4위에 올랐다.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황혜미는 신인상을 받았고 흥행 역시 무난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을 황혜미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영화가 개봉하기 전 “우리영화의 시장조사 및 수출-입 문제에 관한 현지답사”를 위해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황혜미에게 이러한 성공을 안겨준 영화 <첫경험>은 중년을 바라보는 부부인 기준( 남궁원 )과 지숙( 김지미 )은 권태로운 일상을 다룬다. 5) 부산으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에서 기준은 대학자퇴생 인애( 윤정희 )와 만나게 되고 밀회를 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를 눈치 챈 지숙은 방황하게 되고 탈선을 시도한다. 그러자 인애가 기준과의 지난날을 소중한 첫경험으로 남겨두고 떠남으로써 그들의 가정은 파탄직전에서 구출된다. 당시 유행하던 불륜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이야기 자체만 본다면 평범할 수 있으나 권태로운 부부의 일상 그리고 탈선 및 좌절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였다. 슬픈 꽃잎이 질 때 이후로 황혜미는 < 슬픈 꽃잎이 질 때 >(1971)와 < 관계 >(1972)를 연이어 제작, 각본, 감독한다. 황혜미가 사업차 3개월의 외유 끝에 돌아와서 집필한 작품인 <슬픈 꽃잎이 질 때>는 고아인 서은희( 문희 )가 수녀님의 소개로 부호인 엄상훈(남궁원)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상훈은 이름난 바람둥이 홀아비이고 방치 속에 자라는 두 자녀는 개구쟁이들이다. 은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결국 아이들과 친해진다. 이 과정에서 점차 상훈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시기한 전부인의 가족이 벌인 흉계에 휘말린다. 결국 상훈과 은희는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게 되지만 돌아오는 길에 사고로 은희는 죽게 된다. 이 영화의 이야기 전개 및 등장인물들의 구도는 < 제인에어 (Jane Eyre)>(1944)와 <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1965)의 구조를 차용한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영화는 혹평을 받았고 흥행도 크게 실패하였다.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한 기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였다고 평가한다. 관계 세 번째 작품인 <관계>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 < 졸업(The Graduate) >(1967)을 패러디한 것인데 원래의 설정에서 남녀를 변경한 영화이다. 홀어머니( 김신재 )와 살고있는 인애( 박지영 )은 근무하는 회사의 전무 기택( 남궁원 )의 유혹에 몸을 버리게 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이를 알게된 어머니는 충격으로 숨진다. 여행사에 취직한 인애는 손님인 준호( 신영일 )의 적극적 구애로 사귀게 되고 준호의 부모님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준호의 아버지가 기택임을 알게되고 결혼을 피하게 된다. 힘들어하는 준호에게 기택은 모든 것을 고백한다. 인애는 자살을 기도하나 준호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된다. 너무 힘들어하는 준호를 보던 준호의 어머니( 문정숙 )은 사실 준호가 기택의 자식이 아님을 밝힌다. 진실을 알게 된 기택은 깊은 참회에 괴로워하고 인애는 병실에서 나와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고속버스를 타고 떠나지만 준호는 차를 몰고 와서 버스를 막아서며 인애와 재회한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성역할을 변경시켰을 때 그 이야기는 당시 흔한 불륜의 소재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과 결국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준호와 인애가 맺어질 수 있다는 결론은 한 신문평의 언급처럼 “<졸업>의 경우 기존윤리를 정면에서 초극하려했던데 비하면 <관계>는 끝내 한국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6) 현재 황혜미가 감독한 이 세 영화 모두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그녀의 작품은 감각적인 영상미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이 부재는 안타깝다. 이 한계는 황혜미의 문제의식과 그 영화들이 가지는 당대의 의미를 가늠하는 것을 힘들게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인터뷰와 당대의 평가들 및 관련 자료를 통해 조망해볼 때 우리는 당시 남성감독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감성 혹은 윤리적 길항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황혜미가 감독으로 활발하게 작업했던 1970년대 초반을 다시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경험>이 상영된 해인 1970년을 평가하면서 이영일 은 해당년도 영화계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자 했다. 하나는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로 떠오른 < 미워도 다시한번 >류의 범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을 주제로 한 영화가 확연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7)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는 1,2,3편 모두 흥행에 성공하면서 1970년대 초반 멜로드라마의 주류서사가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항상 ‘한 남자의 비틀거리는 행위 때문에 그의 아내와 다른 하나의 동거여인 사이에 ...끝없는 자기희생’을 반복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8) 반면 이러한 보수적 이데올로기 반대편에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성을 그린 성 주제 영화들이 존재했다. 이영일은 <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 >(1960) 나 < 페드라(Phaedra) >(1962) 처럼 파격적인 윤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성을 타부시했던 한국의 상황에서 성을 주제로 한 이 영화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반체제적인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9) 황혜미의 <첫경험>은 위의 두 경향이 기묘하게 길항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는 불륜의 소재를 차용하지만, 불륜으로 인한 신파적 희생은 부재하다. 더구나 불륜 자체는 등장인물들에게 기성의 사회가 가지는 틀에 박힌 질서나 윤리의식을 벗어나는 상황으로 변주된다. 이처럼 불륜이 무겁지 않게 그려지고 있는 것은 성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중년의 남성과 젊은 여성은 별다른 윤리적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섹스를 하게된다. 그들이 느끼는 탈선의 근거는 징후적으로 소품이나 이미지를 통해 보여지거나 간결한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설명이 결여된 채 이미지의 단상들을 통해 관객은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일상의 권태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평론가들이 호평하였던 영화의 도입부인 기준과 지숙의 섹스 장면은 “차가운 금속성의 탁상시계 소리를 에펙트로 넣고 그 속에서 부부의 냉각된 섹스”를 보여줌으로써 “부부의 성 자체가 이미 단순한 생활 속의 반복으로 리듬같은 일상으로 변했음”을 드러낸다. 10) 인애 역시 대학이라는 제도 자체에서 막 벗어난 젊은 여성으로 둘은 부산이라는 비일상적 휴양지에서 해방 혹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에 쉽게 섹스를 할 수 있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영화들에서 섹스와 불륜은 엄중한 도덕적 문제였다. 성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결혼을 전제로 하는 약속된 행위여야만 했고, 남성의 기만에 속아서 순결을 지키지못한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첫경험>에서 섹스는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둘의 밀회는 계속되고 눈치를 챈 지숙은 배반감에 탈선을 시도한다. 기준은 아들과 아내가 있는 가정이 점차 무너지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인애 역시 유부남이라는 현실과 마주했을 때 그 무게감이 점점 힘들어진다. 지숙의 탈선시도는 아슬아슬하게 멈추게 되고 인애는 담담하게 기준을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벼랑 끝에서 다시 일상은 봉합된다. 게다가 ‘첫경험’을 한 인애가 파멸을 한다는 암시도 없다. 영화는 치정이나 불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감정적 격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일상성을 강조하며 영상언어를 통해 그 감성들을 유려하게 그려나간다. 공허함을 느낀 지숙이 아들이 동물원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거대한 코끼리와 대조되는 지숙의 왜소함을 이미지화함으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이 느끼는 위축감을 드러내거나 기준과 인애의 이별 장면에서 문을 사이에 두고 외부에 있는 남성과 내부의 젊은이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젊은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각각 속해있는 세대 차이를 강조하는 장면 등 11) 은 어떠한 발화적인 설명 없이 결국 각자의 벗어나려했던 기존의 틀로 돌아가는 행위의 당위성을 납득시켜준다. 12) <첫경험>의 불륜을 보는 여성적 시선이나 <관계>가 드러내는 한 여성을 둘러싼 부자관계의 비윤리성은 한국사회의 기본 윤리에 대한 저항적 도전이었다. 그러나 황혜미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안도할만한 결론을 내면서 그 저항의 칼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 무뎌지는 저항의 감각이 그녀 본래의 윤리의식의 한계인지 상업성의 압박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상업적 압박이 아니었다면 황혜미는 더 강하게 도전적인 시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개>를 제작하는 도중이었던 1967년 9월, 그녀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실험적인 시도는 하고 싶지만 당분간은 “밑지는 일이 싫어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13) 아이러니 하게도 <안개>는 황혜미가 관여한 영화 중 가장 예술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을 했다. 그러나 <첫경험>과 이후 작품을 통해 작가적 의식과 상업성은 점차 균형을 잃었다.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상업영화들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그녀가 가진 성과 결혼에 대한 시대감각, 그리고 1970년대라는 현실상황은 매끄럽게 조화되지 못했다. 황혜미는 세 편을 끝으로 영화활동을 접었으며 몸담고 있던 보한산업주식회사 역시 1973년 이후에는 제작을 중단했다. 1)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8면. 2) 이 글에서 주가 없는 황혜미의 소회나 발언 및 인용문은 모두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여성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2001)에서 채록한 것이다. 3) 김수용, 『나의 사랑 시네마』, 시네21, 2005. 105쪽. 여타 자료나 당시를 회고하는 글들을 참조하면 이어령은 시나리오의 감수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4) 황혜미, 「연패 끝에 <첫경험>의 메가폰」, 『여성동아』 1970년 12월호, 179쪽. 5) 기준이라는 이름은 <안개>의 남주인공 이름과 동일하다. 그 연결점을 의도적으로 설졍한 것으로 보인다. 6) 「타협으로 끝난 애정모럴의 갈등- <관계>」, 동아일보 1972.4.25.8면. 7) 이영일, 「마비와 혼미의 시대」, 『영화예술』 1970년 12월호, 32-36쪽. 8) 이영일, 위의 글, 34쪽. 9) 이영일, 위의 글, 35쪽. 10) 이서림, 「참신한 영화감각의 가작」, 『영화예술』. 1971년 1월호, 72쪽. 11) 「<첫경험>, 처녀의 불장난을 영상화」, 동아일보, 1970.11.28. 5면. 12) 이러한 서사구조와 영상미의 성취는 당시 프랑스 영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 1966)와 <파리의 정사>(Vivre Pour Vivre, 1967)의 표절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13)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 8면. 황혜미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