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니 커넥션
- 감독
- 비센떼 아란다
- 제작년도
- 1989
- 출연
- 화니 코탕송, 브루노 크레머, 프란시스코 알고라, 베르타 카브레, 이안 세라, 파까 가발돈, 에두아르도 맥그레고, 호아퀸 카르도나, 로베르토 아스라, 호르헤 세라트, 마르타 페도반, 칼즈 세일즈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라고 18세기 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말했다. 그러나 금정연은 SNS에 음식 사진을 올리지 않는 사람이다. 셀카도 안 올리고 남이 찍어준 자기 사진도 안 올린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는데 관심이 없는 걸까. 금정연이 요즘 업데이트하는 건 자기 블로그 캡쳐 사진인데, 이것도 자기 어필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지속적이거나 유의미한 방식은 아니다(참고로 그는 오디오 전문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가 석달 만에 그만뒀다. 구독자는 2022년 7월 기준 40명. 가장 최근 올린 영상은 6개월 전의 것으로 GENE의 <I Say A Little Prayer>을 바이닐 판으로 재생한다. 조회수는 96. 댓글은 2개. 댓글 내용은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참고로 한 사람이 두개의 댓글을 달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의 SNS는 중구난방이다. 트위터에선 트위터의 법을 따르고 인스타그램에선 인스타그램의 법을 조금 따르긴 하지만, (육아 때문인지 마감 때문인지) 대체로 정신이 나가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개인적으로 아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의 SNS 자아는 실제와 거의 같다. 샤토브리앙은 이렇게 썼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프랑스 작가 중에서 자신의 작품과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바꿔 쓰면,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작가 중에서 자신의 SNS와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금정연이 유일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그가 3년 만에 극장에 가서 < 탑건: 매버릭 >을 보고 < 헤어질 결심 >도 보고 트위터에 소감도 남겼다. 심지어 한영한사 지난 연재에는 탑건에 대한 글도 남겼다. 나는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한 연재에 왠 탑건이냐고 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 R2B >가 있잖아요, <창공>도 있고, 라고 했던가. <창공>이 뭐예요? 내가 묻자 정연씨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지돈씨. 왜 저랑 다른 세대인 척 해요? 네? 류시원이랑 김원준 나온 드라마 있잖아요. 류시원이요? 지돈씨도 알죠? 김원준이 류시원 데뷔시켜준 거?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정연씨가 왜 탑건에 대해 썼을까. 비천한 영화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서? 아니면 어쩌다 극장에서 <탑건: 매버릭>을 봤고 마감은 다가왔고 억지로 논리를 맞춰야 해서? 모든 연재가 그런 식 아닌가? 그러나 어디서도 말한 적 없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톰 크루즈고 정연씨는 물론 그 사실을 안다. 지친 아저씨 류의 배우를 좋아하는 정연씨는 예순이 되어도 지칠 기색이 없는 톰 크루즈가 이해되지 않는지 내게 종종 묻기도 했다. 지돈씨, 지돈씨는 톰 크루즈가 왜 좋아요? 글쎄, 왜일까. 사실 이번 글에서 이렇게 답할 생각이었다. 톰 크루즈야말로 자본주의적 추상의 현현이라고,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히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마크 피셔는 말합니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닐 매콜리야말로 포스트 포드주의의 화신이라고. 닐 매콜리는 “익명의 이름, 가짜 여권의 이름, 역사가 없는 이름이다. … 하나의 스크린, 암호, 깊이를 알 수 없는, 냉정하고 전문가적인, 완벽한 준비.” 닐 매콜리에게 도덕이나 윤리, 역사는 무의미하거나 나중 문제다. 그는 단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까 마이클 만이 21세기 초에 찍은 영화가 뭡니까. 바로 < 콜래트럴 >이죠. 포스트포드주의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탈역사적 회색 킬러와 낭만주의적이고 포드주의적이며 아메리칸 드림의 신봉자인 택시기사의 대결. 그 킬러가 바로 톰 크루즈죠. 떠올려보세요, <탑건: 매버릭>에서 적의 존재를. 헐리웃 영화 역사상 가장 추상적인 적군이 나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애국주의적 영화는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체 어느 나라에 충성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데(나라가 있다면 그건 톰 크루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건 톰 크루즈와 <탑건: 매버릭>의 감독인 조셉 코진스키가 함께 했던 2013년작 < 오블리비언 >에서 예고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오블리비언>의 외계인은 외계+인도 아니고 사실상 유기체인지도 알 수 없는 존재로, 표면적으로는 인간을 복제해서 내세우는 추상적 도형(원, 세모, 네모)의 형상을 한 추상 그 자체인데 이 추상적 존재에 의해 끝없이 복제되는 톰 크루즈의 적은 다름 아닌 톰 크루즈입니다. 영화를 보면 어떤 내용인지 아시겠지만 물론 정연씨가 이 영화를 볼 리는 없겠죠. 하지만 < 엣지 오브 투모로우 >를 떠올려보세요. 여기서 톰 크루즈는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의 리셋-존재로 현현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영화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정말 단지 그 이유일까요. 제 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는 탑 배우 중에 내면이 없는 사람은 톰 크루즈 하나라고요. 그러므로 “하나의 스크린, 깊이를 알 수 없는”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톰 크루즈가 복제 가능하고 복제될수록 (존 말코비치처럼) 거북해지는 게 아니라 매력이 더하는 이유는 그에게 내면이나 깊이, 모순 따위가 없기 때문이죠. 그는 사실상 아무것에도 충성하지 않고(이단 헌트는 가족도 없고, 직책도 없고 상급자도, 국가도 안중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충성하고 적과의 싸움만 반복하는데, 그것은 그가 표면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추상성을 재현하는 일은 디지털 이미지도 포스트 시네마틱한 확장 영화도 아닌 복제 톰 크루즈가 하고 있다고, 마블 영화가 자본주의의 변명으로서 자본주의를 지속시킨다면 톰 크루즈의 영화는(사실상 지금의 헐리웃 영화는 이 둘로 나뉩니다) “서사를 포기한 채 충격과 스릴, 흥분이라는 감각적 경험에 모든 것을 내거는 것처럼 보인다” 1) 고 나는 정연씨에게 답하려고 했지만 우선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것보다는 엔데믹 이후 다시 원래의 자리를 복귀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에 대해서, SNS에 줄을 잇고 있는 영화 인증에 대해서 묻기로 했다. 그러니까 왜 내 주변에는 < 헤어질 결심 >과 < 애프터 양 >과 하마구치 류스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인지,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도 왜 “헤결”은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은 건지(한 신문 기사에 의하면 “헤결” 각본집은 7월 18일 예약 판매 시작후 하루만에 6,000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2) …), 왜 어떤 사람들은 <탑건: 매버릭>은 보고 “헤결"은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 왜 < 토르: 러브앤썬더 >를 본 사람은 한명도 없는지에 대해 묻기로 했다. 선호하는 작품이 다르고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평가가 다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정연씨는 지금도 그러한 사실에 깜짝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역사의 불의를 처음 마주한 마르크스처럼 말이다. 똑같이 훌륭한 시민인데 어떻게 같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정반대의 말을 할 수 있는가. 문학에선 그런 일이 흔치 않다. 기본적으로 같은 문학 작품을 읽은 경우가 드물고 읽었다면 이미 그들은 합의의 공동체 또는 장에 속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문학은 끝났고 영화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임재철 평론가가 말했던 것 같다고 정연씨는 말했다. 정확히는 맨날 보는 애들만 보면 뭐하냐, 안 볼 사람도 봐야 진짜 예술이지, 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안 볼 사람이 본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그것들의 인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영화를 무엇으로 변형시키는 것일까. 영화는 사바랭의 음식이 된 걸까. 며칠 전에 미팅을 진행한 어느 출판사는 사내 행사로 직원들이 다 같이 <헤어질 결심>을 봤다고 했다. 다른 업종의 회사도 “헤결”을 볼까? 아니면 < 범죄도시2 >? 노동자들이 함께 보는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케빈 켈리는 <통제 불능>에서 생명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 복잡적응계를 비비시스템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벌이나 개미처럼 개별적으로는 연약하지만 군집이 되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들이 그 예다. 개별적일 때는 존재하지 않는 특성이 창발하는 것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픽사의 공동 창업자인 로렌 카펜터는 라스베이거스의 회의장에서 5000명의 군중들과 실험을 했다. 사전 준비 없이 비디오 스크린 화면을 보며 다 같이 하나가 되어 비디오 게임 <퐁>을 하거나 카드섹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의 절정은 비행기 조종 시뮬레이션이었다. 왼쪽에 앉은 사람들은 비행기의 좌우기울기roll을 조종하고 오른쪽 사람들은 상하요동pitch를 조종했다. 대형 스크린 위에 비행기는 떠 있고 조종사는 경험이 전무한 5,000명의 사람이다. 비행기는 분홍 산들 사이의 분홍 계곡에 있는 활주로를 향하고 있었다. 상황은 곧 급박해졌다. 회의장은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찼다. 왼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군집은 혼란을 일으켰고 비행기는 갈지자를 그리며 추락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5,000명의 조종사는 착륙 시도를 중단하고 고도를 높이고 기수를 돌렸다. 그들이 갑자기 어떻게 합의한 것일까? 지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크게 선회했다. 그러더니 아무런 논의 없이 함께 날개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평선이 어지럽게 돌아가면서, 비행기는 크고 아름답게 360도 회전을 하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케빈 켈리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철새떼들이 하는 행동, ‘무리지어 날기’를 했다고 썼다. 새들은 그들이 어떤 모양을 만드는지, 규모나 배열, 형태 등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들은 단지 군집에 감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패턴을 만들어내고 개별일 때보다 더 놀라운 반응과 움직임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별 영화가 새라면, 시네마는 철새떼, 개별 영화가 벌이라면, 시네마는 벌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한편의 영화를 보고 거기에 대해 말하고 반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영화가 지금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영화가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화에 대한 사유는 걸작이나 비천한 영화 개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뛰어난 작가-감독이나 명배우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숫자와 그것들의 연결에서 온다. 루이스 부뉴엘은 “노동자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며 이들의 노하우가 부럽다”고 말하며, 안제이 바이다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한 편의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흘러가는 비밀스러운 연속성 속 무언가가 내게 감동을 준다.” 3) *** 1) 서동진, "시네마 이후의 이미지 : 자본주의적 추상은 재현 가능한가"(2021) 2) 이투데이, "N차 관람→'왜놈 칠 결심' 밈까지...'헤어질 결심'의 조용한 신드롬" 3) 루이스 부뉴엘, 이윤영 옮김 <루이스 부뉴엘>(을유문화사, 2021)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이성구 감독의 최고 작품으로 < 장군의 수염 >(1968)을 꼽는 데 이견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어령 원작, 김승옥 각본이라는 당대 최고 조합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이며,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의 심리적 리얼리즘의 한국 상륙으로 보일 정도로 세련된 영화적 표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전에, 196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성구 감독에게는 황순원 소설을 영화화한 < 일월 >(1967)과 이효석 소설을 영화화한 < 메밀꽃 필 무렵 >(1967)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로써 이성구 감독은 문예영화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메밀 꽃 필 무렵>은 1965년부터 시행된 우수영화 보상정책으로 인해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문예영화 전성기의 한 작품으로 베니스영화제에도 출품되었다. 소설가 이효석이 1936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을 1시간 40분 장편영화로 옮기면서 새로운 캐릭터와 사건들을 추가하였다. 장돌뱅이 허생원, 조선달, 동이 등 세 인물이 나귀를 끌고 봉평장을 오가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 안에 서정적인 문체로 공간과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는 아름다움이 원작의 특징이다. 반면 영화는 허생원의 첫사랑 분이와의 만남을 한 시퀀스로 구성하고, 분이의 떠돌이 생활과 분이를 찾아다니는 허생원의 분투기를 길게 묘사하며, 병으로 골골한 장돌뱅이 윤봉운의 이야기와 조선달의 아내 이야기 등을 삽입함으로써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윤봉운(허장강)과 조선달(김희갑) 평생을 장터로 떠돌아다니며 지낸 장돌뱅이 허생원( 박노식 분)은 조선달( 김희갑 분), 윤봉운( 허장강 분)과 봉평장에서 다음 장터로 이동하는 중에 젊은 장꾼 동이( 이순재 분)를 만난다. 허생원은 주막집 주모와 농담을 나누는 동이가 꼴 보기 싫어 손찌검을 하지만, 애지중지하던 나귀가 끈을 끓고 도망가려는 것을 동이가 잡아오고, 병든 윤봉운의 뒤처리를 해주는 모습에 동이를 다시 보게 된 허생원은 그와 점점 가까워지며 동행한다. 그 와중에 동이도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임을 알게 되는 허생원이 동이의 홀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제천을 향해 함께 떠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가족 결합을 염원하는 허생원의 로드무비다. 허생원의 외로움은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조선달과 비교되거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늙은 수컷 나귀를 연민 어린 감정으로 돌보는 것에서 잘 표현된다. 하고 또 한 말, 분이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조선달에게 또 늘어놓는 허생원의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이동하기 위한 내레이션으로 활용하면서 그의 과거 로맨스가 플롯 구조 안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톱스타 김지미 가 허생원의 첫사랑 분이로 등장함에 따라 그의 극중 비중은 높아졌고, 그의 비극적 사연과 운명은 더욱더 극적으로 플롯화된다. 분이(김지미) 천하일색인 분이를 장에서 우연히 보고 마음을 빼앗겨버린 허생원은 밤새 뒤척이다 메밀꽃밭에 나가고, 여기서 그는 아버지의 노름빚에 팔려가게 될 분이와 마주친다. 원작에서는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신세 한탄을 하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합방하게 되는 아름다운 사연이지만, 영화에서 허생원은 강압적으로 분이를 범한 후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훗날을 기약한다. 결국 둘은 만나지 못하고 분이와 아들 동이는 이리저리 팔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지금 시대의 눈으로 보면 허용할 수 없는 표현이나, 60년대 멜로 영화가 관음증적 재미를 위해 관행적으로 그리던 겁탈 장면 방식을 노골적으로 사용하여 성적 긴장감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의 치명적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한국영화니 일부러 배제하고 감상하거나 빼버린 채 영화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이는 사랑을 맹세한 남자가 제시간에 데리러 오지 못해, 원래 계획되었던 아버지의 빚을 탕감하고자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이후 이리저리 되팔려가며 거래 대상이 된다. 이때 그녀의 값어치는 남자들에 의해 반반한 얼굴과 밤자리 실력으로 매겨진다. 철저히 돈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어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다. 유린당하지만 살아남는 이 여성은 영화에서 원시적이고 신성한 기호로 재위치 된다.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신성함과 메밀꽃으로 기억되는 자연의 원시성을 동시에 가진 이상화된 여성이라는 기호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60년대 위로부터 강요된 열망이 낳은 일그러진 교섭 장소다. 이는 당대 문예영화의 향토성이 가진 공통감각이기도 하다. ‘왼손잡이’의 유전성 여부가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는다. 일정한 법칙을 따르지 않는 현대과학의 숙제이긴 하나 대체로 유전되는 경향이 많다고 하니, 허생원이 동이가 왼손잡이임을 알고 반기는 장면은 경험치에서 나온 믿음이다. 이 장면은 허생원과 동이를 더욱 강하게 연결하는 결정적 장치로 기능한다. 허생원(박노식)과 동이(이순재)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허생원과 동이가, 물어 빠진 허생원을 젊은 동이가 업어주기까지 점점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의 유대와 연대감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간다. 두 사람의 심정적 변화는 그들의 물리적 위치와 맞물리며 잘 고안된 방식으로 시각화된다. 이제 정착해야 할 때, 오랜 유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고 싶다는 늙어가는 몸이 전하는 애처로움, 그리고 평생 찾아다닌 숙명의 여인에 대한 애달픈 갈망이 영화 전체에 아우라를 남기는, 처연함과 원시성이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메밀꽃 필 무렵> VOD 보러가기→
현재 열리고 있는 성대한 프로그램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의 주인공인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몹시 사적으로 대했던 연출자, 자신의 삶을 곧 영화로 만들고자 했던 연출자다. 그런 그의 태도를 기리며, 이 글에서는 평소보다 더 사심을 담아 트뤼포의 영화 세 편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혹은 ‘여자를 좋아했던 남자’ 트뤼포의 세 여자를. 공교롭게도 세 여자는 모두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지만, 세 여자의 운명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건 트뤼포의 영화니까. 첫째, 〈 미시시피의 인어 〉 혹은 카트린느 드뇌브. 미리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당대에나 지금이나 트뤼포의 수작으로는 거론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트뤼포 영화다. 일단 〈미시시피의 인어〉는 〈 비련의 신부 〉와 마찬가지로 미국 범죄 소설계의 거장이요, 밤과 서스펜스의 시인인 윌리엄 아이리시/코넬 울리치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가장 훌륭한 울리치 영화는 아니더라도, 〈미시시피의 인어〉에는 울리치 특유의 논리를 넘어서는 휘몰아치는 낭만이 존재한다. 또 〈미시시피의 인어〉는 트뤼포의 장편 연출작 중 유일하게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한 작품이며, 이 형식을 과시하듯 사용한다. 60년대의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극장의 큰 스크린에 가득 찬 이미지를 구경하는 호사를 누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휴가용 영화’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트린느 드뇌브가 어마무시하게 아름답다. 물론 드뇌브는 〈셰르부르의 우산〉에서도, 〈 로슈포르의 숙녀들 〉에서도, 〈 세브린느 〉에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미시시피의 인어〉는 드뇌브를 향한 숭배 의식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생색을 내거나 자의식적 윙크를 던지는 일도 없이 그저 ‘해는 동쪽에서 뜨고 나는 아름답지요’라고 말하는 듯 아름다움을 무심하게 발산해댄다. 이 드뇌브가 악당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명백하다. 그런데도 넘어갈 것인가. 말하자면 〈미시시피의 인어〉는 장-폴 벨몽도와 관객들을 상대로 카트린느 드뇌브라는 패를 보여준 채 벌이는 게임인데, 벨몽도와 우리는 알면서도 질 수밖에 없다. 둘째, 〈 나처럼 예쁜 여자 〉 혹은 베르나데트 라퐁. 베르나데트 라퐁은 이번에 상영되는 단편 〈개구쟁이들〉에서 개구쟁이들이 환상을 품고 흠모하는 묘령의 아가씨로 출연하는 배우로, 그 작품은 트뤼포의 첫 연출작인 동시에 라퐁의 첫 출연작이기도 했다. 그 후 15년 만에 두 사람이 재회하여 만든 영화가 〈나처럼 예쁜 여자〉다. 제목부터 뻔뻔한 이 영화에서 라퐁은 자신의 행실에 한 점 후회 없는 범죄자로 출연하여 자신을 연구하고자 하는 순진무구한 사회학자 앞에 속어를 쏟아내며 얼을 빼놓는다. 범죄자의 행적을 여러 개의 플래시백으로 재구성한다는 소재와 구조는 필름 누아르에서 온 것이지만, 그보다는 막스 브라더스나 바보 삼총사(Three Stooges) 유의 슬랩스틱 코미디, 루니툰 애니메이션, 그리고 장-뤽 고다르의 60년대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인공적이고 과장된 세계를 전면에 내세우는 코미디다. 베르나데트 라퐁은 이 안에서 거의 시종일관 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기운차게 고함을 지르고 질주하며 형형색색의 패션을 과시하고 모든 남자들을 때려눕힌다. 아드레날린과 깔깔거림을 원한다면 바로 이 영화다. 셋째, 〈 신나는 일요일 〉 혹은 파니 아르당. 〈신나는 일요일〉은 트뤼포의 유작이지만, 여기에서 억지로 죽음의 기운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런 영화가 필요하다면 〈녹색방〉을 찾아가시길. 이것은 트뤼포가 할리우드식 B무비의 기운을 불어넣고자 일부러 촬영을 재촉하며 경쾌하게 찍은 작품이다. 줄거리만 봐서는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가고 밤과 매춘과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범인도 잡고 연애도 하는 하워드 혹스 풍의 로맨틱 미스터리다. (시네마테크KOFA 단골 관객 여러분께서는 얼마 전 상영한 〈 빅 슬립 〉을 기억하시리라.) 여기서는 누구보다도 트뤼포가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자, 파니 아르당을 잊을 수 없다. 영화는 파니 아르당이 활기차게 길을 걷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바로 그 걸음걸이가 〈신나는 일요일〉의 주제나 다름없다.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장을 가게에 가둬둔 채 트렌치코트를 입고 돌아다니며 사건을 수사하는 흑발 비서의 모험담. 이 사랑스러운 소품을 통해 트뤼포는 흡사 자신의 스승인 알프레드 히치콕에게 반기를 드는 듯하다. 누명 쓴 사나이는 누명 쓴 채로 가만히 계시라. 차가운 섹스어필 가득한 금발 미녀도 안녕. 수다스럽고 활기찬 흑발의 비서가 나가신다! 그리고 히치콕식 범죄극으로 시작하여 혹스식 말다툼으로 발전하는 이 영화는 드뇌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는 아르당의 패션쇼와 다리 과시를 거친 다음 문득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장난을 바라보며 막을 내린다. 영원한 영화 소년 트뤼포의 마지막 인사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영화는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