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
- 감독
- 서민호, 박석완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고무현, 이재원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먼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나는 글을 쓰는 게 정말 힘들다. 그렇긴 해도 대상이 되는 작품이 있을 땐 어떻게든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기획의 실체 없는 주제가 주는 자유 속에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게 한국영화 비평의 안녕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걸까? 간간이 영화평론가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지만, 나는 제대로 된 비평을 쓴 적이 거의 없다. 이 사실에서 오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내게 기회가 닿은 이 글을 일단 시작해보려 한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간 내가 무엇을 했는지 돌이켜 보기로 했다. 영화의 주변을 알짱거리며 한 것들 중에는 ‘말’을 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주로 빛이 사라진 스크린 앞 객석을 바라보는 자리에 서서 말이다. 1. 영화와 관련해 내가 처음 맡은 일은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라는 이름으로, 상영이 끝난 후 작품을 해설하는 것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그 일이 사라지기 전까지 1년 넘는 시간동안 매 주말 한 극장의 객석을 마주하고 섰다. 그리고 방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의미를 독해해주었다. 실은 큐레이터가 아니라 ‘해설자’나 ‘도슨트’ 정도의 이름이 걸맞은 일이었다. 15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혼자 말한 후에는 객석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이어졌다. 해설을 듣기 위에 자리에 남은 적지 않은 관객들은 영화에서 감독이 감추어놓았을 수수께끼들에 관심이 있었다. 한 번은 작품에 등장한 상징을 알려달라는 한 관객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가 다른 관객으로부터 ‘두부’에서 순수함이라는 상징을 왜 읽지 못하느냐는 꾸지람을 들은 일도 있다. 주인공 의상의 색상에서 어떤 변화의 도식을 찾아내려는 집착의 눈을 마주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부러 애쓰지는 않았지만, 아트하우스 영화를 즐겨 보는 관객들의 성향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핑계로 쉬운 길을 택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약간 덜었고, 이론 용어를 덜 쓰게 되었으며, 때로는 관객의 반응에서 보람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를 읽는 어떤 습관이 생겼고, 따로 활동을 하지는 않았기에, 비평과는 멀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비평은 단지 감독이 의도한 것을 대신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 십개월의 미래 >(남궁선, 2020) 관련 전주국제영화제 장기 상영회 중 필자 진행 GV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X ) 2. 내가 가장 최근에 활동한 장소는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 다. 나는 영화제 기간에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영화비평워크숍 ‘활동사진’의 전체 진행을 맡았고(이동윤 평론가가 처음 기획한 것으로, 나는 멘토로 참여해오다가 작년부터 이 일을 했다), 영화제 GV의 모더레이터를 했다. 인천 지역 중·고등학교를 찾아가 디아스포라영화제 상영작을 보고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프로그램, ‘영화, 학교가다!’의 모더레이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 역할은 주로 앞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GV(Guest Visit) 또는 관객과의 대화. 영화 상영 후 게스트(주로 감독)를 초청하여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자리에서 모더레이터는 감독과 관객 사이의 대화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리 작품을 세심하게 보고 정보를 찾아 알고 있어야 했다. 아트하우스 영화 해설과는 다르지만, 나는 GV 진행을 하면서도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때로는 비평적 시각을 지켜내면서 감독으로 하여금 영화의 무의식적인 수행을 발견하게 하는 뛰어난 GV 진행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경험이 많지 않고 역량이 부족한 내게는 진행의 매끄러움이 우선 과제가 되었고, 순발력을 중요한 능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진행자는 이 열린 대화의 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들에 유연하게 대처해야하기 때문이다. 객석의 질문이 없거나 감독의 대답이 지나치게 짧아 진행자의 말이 많이 필요한 경우가 있고, 단편 섹션에서 한 쪽으로만 질문이 몰리거나 순차통역으로 인해 시간이 부족해서 조율이 필요할 때도 있다. 사실 이것들은 사전에 잘 준비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예상하기 어려운 것은 어떤 관객이 말을 걸어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아닐까. 이제는 클래식 밈이 된 ‘GV 빌런’의 존재 말이다. GV에 참석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분에 대한 저마다의 피로한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진행자의 덕목일까? 나는 빌런을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그런데 관객으로서 나는, 가끔은 일부 관객들이 질문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를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얼마 전 참석한 한 영화제 GV에서 나는 영화제에 거의 처음으로 온 듯한 어느 비시네필 관객이 영화를 본 후 한껏 들뜬 자신의 감상을 길게 늘어놓는 동안 관객 여럿이 우르르 자리를 뜨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장황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관객의 소감과 그에 대한 감독의 대답에는 왠지 모를 감동 같은 것이 있었다.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영화, 학교가다!’ 프로그램에서는 시네필이 만족할 전문성 있는 질문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초대받은 감독과 진행자인 나는 이곳에서 영화제 GV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시네필 바깥의 시선들을 만난다. 학생들이 영화에 대해 주로 궁금해 하는 것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학생들에게 되돌렸을 때 흥미로운 반응을 만날 수도 있었다. 한 번은 주인공인 남자 고등학생이 숨겨왔던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친구들 앞에서 밝히며 끝나는 한 작품(< 동우 >(박호범, 2022))을 여러 학교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각자의 경험을 통해 서로 다른 시선을 갖게 된 두 집단의 의견이 뚜렷이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로 여학생들이 이 영화의 결말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인 반면,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암울한 후일담을 예상한 것이다. 나는 이후에 이 작품을 보게 된 학생들에게 앞서 확인한 이 결과를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가 촉발시킬 수 있는 대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3. 한 명의 강사가 강의를 하고 과제에 대해 피드백을 해주는 일반적인 비평워크숍들과 달리, ‘ 활동사진 ’은 한 명의 멘토와 네 명의 참가자로 구성된 복수의 모둠이 각각 활동하는 워크숍이다. 총 4회 차로 구성된 이 워크숍에서 각각의 모둠은 이틀간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상영작들을 함께 보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영화제를 기준으로 1주 전에 영화 비평 특강이 있고, 1주 후에는 비평문 초고에 대한 멘토의 피드백 시간이 있으며, 활동 종료 후 비평문 최종고를 엮어 비평집을 발간한다. 나름대로 고심한 구성이지만 비평적 글쓰기를 훈련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이 워크숍 활동의 정점은 글쓰기보다는 활기 넘치는 토론시간이라고 느껴진다. 여러 참가자들이 자신을 소개하며 ‘그간 영화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고 대화를 나눌 친구가 주위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들에게 비슷한 관심으로 만난 일면부지의 사람들이 함께 영화를 본 후 즉각적인 감상을 나누고 각자의 비평적 주제를 찾아가는 일은 분명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노출된 정보와 평가가 거의 없는 영화제 작품들을 선입감 없이 보고 판단한다는 상황이 흥분과 긴장을 더하는 것 같다. 워크숍 '활동사진' 활동 장면 (사진: 필자 제공) 영화를 본 직후에 이루어지는 토론은 말끔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본 것을 글로 바꾸고 고치면서 생각을 정련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말하는 것이니 어려운 게 당연하다. 멘토가 주제를 제시하며 방향을 잡지만, 간혹 대화는 참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엉뚱한 길목을 기웃거린다. 한 모둠이 토론하는 모습을 한발 떨어져서 지켜본 적이 있다.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린 한 참가자가 다소 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이었다. 그때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한 사람의 몸짓과 그의 말이 언제 끝날 지를 살피고 있는 듯한 다른 사람의 복잡한 얼굴이 함께 보였다. 여느 대화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 상황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입되었다. 나는 언제 어느 장소에서 어떤 사람들과 보고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따라 그 영화가 전혀 다른 말을 걸어올 수 있다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4. 역동적이고 미묘한 대화의 장에 대해 생각하면서, 지극히 단순하게도 김덕중 의 < 컨버세이션 >(2021)을 떠올린다. 유운성 평론가는 “ 한국독립영화 속, 대화의 언어 ”라는 글에서 한국독립영화에서 대화 장면의 빈약한 연출을 지적한 바 있다. <컨버세이션>은 한국(독립)영화에서 긴장감을 만들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에 그쳤던 ‘죽은’ 대화 장면을 섬세한 연출로 살려냈다. 이 생생한 장면들에서 우리는 대화를 구성하는 것이 말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다. 세 친구가 집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대에 파리에서 함께 유학 생활을 한 적 있는 은영( 조은지 ), 다혜( 송은지 ), 명숙( 김소이 )이 은영의 집에서 오랜만에 모인 것이다. 코너형 소파에 나누어 앉은 이들의 모습은 풀숏의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함께 보인다. 카메라를 마주한 명숙이 먼저 파리 시절에 새겨진 자신의 열등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새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혜가 입을 뗀다. 그런데 한 박자 늦은 은영이 다혜보다 큰 자신의 목소리를 밀고나간다. 카메라 가까이에 앉은 은영이 몸을 기울일 때마다 화면에서 얼굴이 가려져버리던 다혜가 결국 은영에게 발화권도 빼앗긴 것이다. 이제 카메라는 은영과 다혜를 마주보는 자리로 옮겨간다. 다혜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은영은 삶에 대한 느낌과 남편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화면 오른쪽에 있게 된 명숙이 끼어들어 말하기를 시도하지만 은영의 말이 멈추질 않는다. 실패한 명숙은 이후 소파에 몸을 기대어 슬며시 프레임 밖으로 나간다. 동시에 나온 목소리들이 서로 부딪치고 어떤 말들은 묻혀버리는 상황. <컨버세이션>은 발화 경쟁이 있는 익숙한 대화 상황에서 활동하는 힘들을 자연스러우면서도 또렷하게 가시화한다. 얼굴을 마주한 대화의 장을 구성하는 것은 말뿐만 아니라 표정과 몸짓이라는 시각적인 요소들이기도 하다. 그뿐일까. 이 장면에는 초대받지 않은 바깥의 존재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끓고 있는 커피포트는 은영을 프레임 안팎으로 들락거리게 해 분위기를 산만하게 하고, 근처에 잠들어 있는 아기의 존재는 음량을 조절하게 만든다. 창으로 들어온 오후의 강한 태양마저 은영의 얼굴 위에서 빛과 그림자의 그림을 부단하게 그린다. 이 바깥의 존재는 이어진 씬에서 대화의 다른 차원을 지시하기도 한다. 다혜와 명숙이 아파트 복도 끝 계단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눈다. 이때, 다혜가 명숙에게 자신이 말을 하지 못하면 ‘빡이 친다’고 말하며 앞선 발화 경쟁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밝힌다. 그런데 이처럼 강한 토로 후에 이어진 다혜의 말은 하필 도로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묻혀 때때로 우리에게 잘 들리지 않게 된다. 건물 고층에 서있는 두 사람과 건너편 같은 높이의 어느 장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 사이에 마치 심연과 같은 무한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앞선 장면에서 인물들의 대화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것들이 시선과 몸짓을 통해 드러났다면, 이 장면에서는 인물들의 세계와 관객이 자리한 현실 사이에 놓인 모종의 간격이 시청각적인 거리감으로서 드러난다. 말하자면, 어떤 외부가 항상 대화에 끼어들고 있다. (영화와 현실의)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와 관객 사이의 대화에서도. 5. 대화의 장에서 발신자의 말은 수신자에게 진실을 온전하게 전하지 못한다. 홍상수 의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는 이 불완전한 ‘말’을 대하는 한 인물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동일한 두 인물이 우연히 만나 같은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이틀간의 여정이 반복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수원에서 열리는 GV 행사에 하루 일찍 도착한 영화감독 함춘수( 정재영 )는 화성행궁을 서성이다 윤희정( 김민희 )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둘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윤희정의 화실에도 간다. 만남이 술자리까지 이어지자 함춘수는 부지런히 구애를 하고, 윤희정의 요청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지인들과 합석하게 된다. 영화의 1부(‘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와 2부(‘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 기본적인 상황 위에서 그려진다. 이때, 1부와 2부의 두 세계 사이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상황을 대하는 인물의 말, 그리고 그에 따른 표정과 몸짓, 감정 등의 변화다. 1부에서 함춘수와 윤희정이 나누는 대화들은 우스꽝스럽다. 두 사람은 ‘알 것 같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서로 반복한다. 함춘수는 윤희정의 그림을 보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좋아요. 정말로 좋아요. 뭘 한 건지 알 것 같아요.” 이어서 그는 자기 영화를 표현하는 데 쓰던 말로 그녀의 그림을 상찬한다. 하지만 그날 밤, 술자리 동석자들에 의해 그가 빈말을 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고, 함춘수는 자신에 대한 말(사실과 소문)들에 둘러싸여 난처해진다. 결국 수치심을 느낀 윤희정이 자리를 벗어나자 둘의 관계는 맥없이 끝나버린다. 이튿날, GV에서 모더레이터는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이냐’는 ‘빌런’같은 질문을 던진다. 굳은 얼굴로 입을 연 함춘수는 기어이 격분하며 이렇게 소리치고는 극장을 나간다. “우리의 삶은 그런 말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말의 힘? 저는요, 그런 중요한 말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대사는 말에 대한 그의 입장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어차피 진실을 전하지 못하는 말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냉소적인 태도 말이다. 그렇기에 함춘수는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면서, 텅 빈 말들이 불러일으키는 ‘공감’이라는 착각, 그것이 주는 편안함에 기대려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1부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함춘수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그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보다는, 그가 독백의 공간에 갇혀 영원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만을 남긴다. 2부의 함춘수는 ‘말’에 대해서는 1부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는 말을 ‘함부로’ ‘많이’ 하면서 어떻게든 진실을 전하려고 분투한다. 윤희정은 처음엔 함춘수의 말에 상처받지만 곧 그를 믿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새벽이 오자 두 사람은 그들의 짧은 만남을 정리하며 부드러운 말들을 서로 주고받는다. 함춘수는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했다’며 사과의 말을 건네고, 윤희정은 함춘수의 실수를 덮으며 자신이 ‘말을 잘 할 테니 걱정 말라’고 다독인다. 또 다시 이튿날, 다행히 이번 GV는 무사히 끝난 것 같다. 함께 담배를 피우던 모더레이터가 함춘수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는 스태프에게 좀 전에 만난 GV 빌런 이야기를 꺼낸다. “근데 아까 안경 낀 걔는 너무 깼어.” “너무 말을 많이 하죠?” 함춘수는 여기서 자신의 영화를 보러 온 윤희정과 재회한다. 이 대화 장면은 영화의 예고편으로 쓰였다. 그런데 예고편은 영상을 거꾸로 재생한다. 이 역재생된 화면 위로 ‘지금’, ‘그때’, ‘맞다’, ‘틀리다’라는 단어들로 조합된 말들이 자막으로 나온다. 말의 언어적 의미가 소거된 이 영상에는 서로에게 집중하는 두 사람의 표정과 몸짓이 더욱 잘 보인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그 비언어적인 소리와 시각적 표현들을 통해, 혹은 우리가 배우지 못한 미지의 언어를 가지고서 정말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이 세계를 탐험하는 동안, 비언어적 의미들이 함께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영화는 대화들로 구성된다. 영화 속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뿐 아니라, 인물과 세계 사이, 세계와 세계 사이의 대화가 있다. 영화비평은 그런 영화와의 대화다. 우리는 영화의 대화를 추적함으로써 그것이 의도로 귀결되지 않게 하는 외부의 활동을 발견한다. 아니, 거꾸로 이 잉여적인 것이야말로 비평이라는 대화의 장을 연다. 비평은 다른 비평과의 대화를 진행하기도 한다. 극장의 평론가 대담이나, 온라인 팟캐스트 같은 것들이 있다. 내가 이따금 참여하는 ‘ 비평의 편지 ’는 영화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간 세 통의 편지를 독자에게 발송하는데, 잠재적인 다수의 수신자를 가정하고 쓰인 사적 대화라는 점에서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를 닮았다. 영화의 대화, 영화와의 대화, 그리고 비평의 대화는 이렇게 서로 연결된다. 우리는 독백 속에 갇히지 않기 위해, 외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지금’에 충실한 말을 찾아 계속해서 새로운 대화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강소정(영화평론가) l 가끔 영화에 대해 말하거나 쓴다. 제2회 독립영화비평상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 부문 당선.
셀린 시아마의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은 두 여인의 짧은 기간 동안의 사랑과 그 기억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화실에서 초상화 수업을 하던 마리안느가 ‘치맛단에 불이 붙은 한 여인’을 묘사한 그림을 발견하고, 그림이 환기시키는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리안느는 정혼자에게 보낼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청탁받고 외딴 섬에 도착한다. 레즈비언 로맨스로서, 이야기의 중심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과 이별의 과정에 있지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동성애적 관계의 서사적 진전은 더디게 진행되고 지연된다. 이전에 초상화 모델이 되기를 거부했던 엘로이즈와 ‘산책 친구’로 가장하여 몰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마리안느 사이의 긴장과 서로를 향한 관심이 서서히 차곡차곡 화면을 채워가지만, 영화는 하녀 소피를 포함한 세 여자의 유대내지는 연대적 관계 묘사에 집중한다. 애당초 여자들만 있는 공간이었지만, 가부장제의 대리인인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운 후, ‘집’은 다른 공간으로 전환된다. 그 곳은 신분도 계급도 ‘아버지’도 없는 해방의 공간이 된다. ‘아가씨’, ‘화가’, ‘하녀’는 서로에게 살가운 친구가 된다. 하녀는 수를 놓고 아가씨는 음식을 장만한다. 하녀는 앉아 있고 아가씨는 서서 가사 노동을 한다. 셋이서 나란히 식탁에 앉아 음식을 장만할 때, 삼각대형으로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할 때, 바닷가로 산책을 나갈 때, 잘 짜인 화면 구도와 카메라 움직임은 그들의 수평성을 강조한다. 이 해방의 공간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세 여자가 함께 책을 읽는 부분이다. 셋은 오르페우스신화를 읽고 있다. 이야기의 절정 부분, 에우리디케가 하데스의 세계, 지하의 세계로 다시 끌려 들어가는 장면에서, 세 여성은 각자의 해석과 의견을 제시한다. 예컨대, 소피는 지상의 입구에 도달하기까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어긴 오르페우스의 행동에 분노한다.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오르페우스를 불러 뒤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그녀의 의지로 지하세계로 돌아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엘로이즈의 해석은 영화의 의미화 층위에서 그녀가 마리안느와의 관계에서 행할 선택에 반향하며, 이후 마리안느의 그림으로 재차 반영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진정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여성관객성’에 대한 영화의 자기반영적 성찰로서 가지는 울림 때문이다. 텍스트에 저항하고, 결을 거슬러가며 독해하고, 행간을 채우고, 의미를 전유하는 과정은, 압도적으로 가부장적인 텍스트들에 둘러싸여 있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분노, 지성을 이용하여 쾌락을 만들어 가는 여성관객성의 핵심을 관통한다. 또한 “결국 서사적 해결은 이야기를 만든 자의 선택”이라는 말을 통해, 스토리텔링 장치의 남성중심적 위치와 그 이데올로기적 지지대를 소환한다. 이러한 세 사람의 유대는 소피의 임신중절 과정을 함께 히는 것으로 확장된다. 원치 않은 임신에, 세 여성은 여성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민간요법에 대한 지혜를 모아 시행하지만 실패한다. 영화의 표제가 된 미술 작품이 탄생하는 밤의 해변 장면은 고혹적이고도 아름답다. 밤에 여성들이 해변에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하는 장면은 신비로운 비의적 아우라에 쌓여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여성들은 그녀들만의 비밀스런 정보를 알음알음 교환하고 고통을 나누는 듯하다. 셀린 시아마는 여성들의 모임의 비의적 하모니 속에 관객들을 참여시킨다. 그리고 바로 그곳, 여성들만의 비밀의 세계에서 엘로이즈의 치마에 불이 붙는다. 즉 그녀의 욕망이 타오른다. 소파시술 장면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놀라움을 주는 것으로서 여성 이슈에 대한 시아마의 깊은 탐구심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지금이나 두 세기 전이나 여성들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며 아이를 유산한다. 가려지고, 기록되지 않고, 재현되지 않은 여성의 역사에 대한 시아마의 소명 의식은, 집에서 엘로이즈가 소파시술 장면을 재연하고 마리안느에게 그리라고 할 때, 자기반영적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선 그 자체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질문한다. 여자가 여자를 그린다면, 여자가 여자를 응시한다면, 어떤 변화가 생성될까. 셀린 시아마가 한 인터뷰에 밝혔듯이, 1770년대 당시 여성 화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마리안느처럼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림을 발표하였다. 여성 화가들에게 초상화는 배타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한에서 허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초상화는 남성 화가의 전유물이었다. 초상화에는 초상화가의 시선이 구조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되고, ‘결혼을 위한 초상화’라는 분명한 목적은, 보는 자(화가와 관객)의 위치를 남성으로 못 박는다. 이 때 포즈를 잡는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경유하여 자신을 바라본다. 정혼자의 마음에 들만큼 예쁘게, 정혼자의 성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에로틱하게, 몸을 비틀고 ‘적당히’ 노출하도록 요구받는다. 남성 화가는 바라보고 행위하고, 여성 대상은 자신(의 이미지)를 바라본다. 그녀는 남성의 응시를 내면화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포즈’란 시선이 오고가고 부딪히는 과정이며 포즈를 체화하는 몸은 시선의 전쟁터이다. 엘로이즈가 이전 화가에게 포즈를 거부했던 것, 그리고 화가가 엘로이즈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고 뭉개놓았던 것이 엘로이즈가 남성 화가의 일방향적 응시에 저항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화가는 자신의 응시의 좌절과 그 분노감을 그림의 구조 속에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작업은 응시를 주고받음의 상호작용과정으로 전화시킨다. 마리안느의 시선 뿐 아니라, 엘로이즈의 시선이 카메라와 대사를 통해 명료화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응시를 통해 서로의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과 버릇, 그리고 사랑의 기미를 포착한다. 이때 셀린 시아마가 전경화하고 있는 것은 시각문화예술 전반에서의 시선의 문제 그 자체이다. 그것은 시선의 구조화를 둘러싼 영화 장치의 젠더 관계를 질문하고 드러내고 새롭게 구조화하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를 바라보고, 사랑의 눈으로 응시하고, 상호적으로 주고받는 과정은, 엘로이즈의 몸에 마리안느의 얼굴이 겹쳐지는 누드화로 인장된다. 이는 서구의 회화 역사에서 보기 방식의 양식화를 통해 남성 관객 위치를 새겨 넣는 지배적 형식으로서의 누드화를 레즈비언의 에로틱한 시선으로 일순간에 전복시키는 순간이다. 귀족 가문의 거실에 엘로이즈의 초상화가 놓일 것이라면, 그 누드화는 공적 초상화 밑면의 ‘네가 이미지’, 즉 음화(陰畫)이자 레즈비언 음화(淫畫)인 것이다. 시각화와 관련하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비전은, 초상화같이 포착된 결혼식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의 이미지이다. 그 비전은 모순적 상황과 내적 갈등이 깊어지는 순간들에 마리안느에게 출몰한다. 검은 어둠을 배경삼아 정면에 시선을 둔 채 서있는, 엘로이즈의 전신을 담은 그 ‘초상’은 흡사 유령 같다. 깊은 어둠이 엘로이즈의 형상을 허공에 매단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비전은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의 실제 안으로 봉합됨으로써 일종의 플래시포워드로 재위치화 되는데, 이 이미지 역시 결혼 초상화의 밑면에 자리한 네거티브 이미지이다. 이 유령 신부의 이미지는 여성들의 생기, 여성들의 성애적 관계의 죽음으로서의 결혼의 의미를 드러낸다.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결혼 제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는 유령으로서의 삶이다. 꽤나 긴 길이의, 내레이션이 동반된 에필로그는 십중팔구 진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에필로그는 떨리는 화표면의 진동을 통해 보기 드물게 감동적인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 낸다. 두 사람의 이별 후 다른 화가의 시선과 손으로 그려졌을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보며 관객들은 그 시각화의 과정을 예측하게 된다. 엘로이즈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어떻게 재현되기를 원하였으며, 초상화가와 어떤 시선의 협상을 하였는지를. 아울러 그것은 여성 섹슈얼리티의 한 측면을 강력한 힘으로 증언하는데, 이성애 실천 가운데 말소 되지 않는 동성애적 욕망의 존재이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전달된다. 비발디의 음악을 매개로 한 엘로이즈의 얼굴 클로즈업은 기억의 한 챕터에 넣어두었던 여성 성애의 주이상스의 현현이다.
일본에서 현재 방영 중인 TV 애니메이션 <시로바코>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배경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내용을 그린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설명이지만, 실제로 그런 내용의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2014년 10월부터 애니플러스 채널에서 방영 중인데, 아직 미완의 작품을 이번 칼럼에서 다루고자 생각한 것은 이 작품 자체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통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과정’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시로바코>란 제목은, ‘하얀 상자’라고 하여 비디오테이프의 하얀 박스를 가리킨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되면, 수많은 제작 스태프들에게 완성된 본편을 녹화해서 돌리게 되는데 그때 일일이 발매된 소프트(DVD나 블루레이 등)를 주려고 하면 그 많은 인원에 대해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기도 하거니와 애니메이션이 소프트로 출시되는 것은 TV 방영 이후 한참이 지난 다음이니 너무 늦다. 그러니 공테이프에 녹화해서 나눠주다 보니 그 공테이프가 담겨 있는 ‘하얀 상자’ 모양을 빗대어 완성본을 ‘시로바코(하얀 상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더 이상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라 CD-ROM 혹은 DVD-ROM 등의 매체로 배포되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용어는 그대로 ‘시로바코(하얀 상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시로바코(하얀 상자)’ <시로바코>의 주인공은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제작진행’이란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사원이다. 그렇다면 일본 애니메이션 계에서 말하는 ‘제작진행’의 역할은 무엇일까. 주로 TV 애니메이션 제작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직책명인데, 간단히 말해 애니메이션의 중심 스태프를 보좌하며 잡무를 담당하는 역할이 된다. 자세한 것은 일본어 위키피디아를 참고해보자. 직접 번역을 해보았다. 작화, 배경미술, 채색, 촬영, 현상, 편집 등 애니메이션 제작 공정은 분업화되어 외주프로덕션으로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제작진행은 TV 애니메이션에서 해당하는 담당 화를 연출자(‘각화 연출’이라 불리우는 각 화별 담당 연출자)의 지시를 받아 각 제작 외주 프로덕션 사이에 제작 도중의 작품 작업물을 옮겨야 한다. 원화가 완성되면 동화 담당 업체로, 동화가 완성되면 채색 담당 업체로 운반한다는 식이다. 제작 중간 과정의 어떤 작업물을 지금 어느 부서가 갖고 있는지, 항상 변화하는 최신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납품일까지 남은 날짜와 필요한 작업량을 계산하여 확인하고 조정하는 일도 필요하다. 연출가만이 아니라 작화감독 등 개별 부서의 팀장 및 이하 스태프들과 스케줄 관리를 위해 절충을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을 위해 뛰어다녀야 한다. 콘티 등 여러 인원이 공유할 필요가 있는 자료는 복사해둬야 하고, 가끔씩 스태프를 자택과 제작 스튜디오 사이에 이동시켜주기도 해야 한다. 업무 내용이 실로 다양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화려하지 않고 눈에 잘 안 띄는 직책이지만, 제작진행이 없으면 애니메이션 제작은 불가능하다. (중략) 애니메이션 스태프의 생활 리듬은 불규칙적이기 마련이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고, 일이 끝나면 그 즉시 다음 공정으로 작업물을 옮겨야만 한다. 따라서 근무 시간이 불규칙할뿐 더러 장시간 걸리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제작진행은 항상 과중 노동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육체적 피로뿐 아니라 항상 긴박한 스케줄 탓에 정신적으로도 힘든 직책이라 할 수 있다. 업무 시간이 길고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급여가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다. (중략) 가혹한 업무 탓으로 단기간 만에 그만두는 이가 많아, 매해 여러 번씩 직원을 모집하는 회사도 있다. (중략) 셀화로 제작되던 시절에는 연출조수를 겸직하는 경우도 있어, 연출자 옆에서 촬영 준비(필요한 작업물을 모아놓는 작업)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경우에, 각화마다 제작진행 담당자가 별도로 복수 존재하여 교대로 스케줄을 짜서 담당하게 된다. (후략) 이처럼 ‘제작진행’은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의 거의 전체를 지켜볼 수 있고, 또 연출가(감독)와 프로듀서 등 작품의 중심적 인물들과 직접 대화를 하게 되므로 제작진행 출신이 나중에 프로듀서나 감독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로바코>에서 제작진행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도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의 전반을 다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도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쿠로미 양>(다이치 아키타로, 2001)이란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이 일본의 소위 ‘업계 애니메이션’ 중에서 최초로 애니메이션 업계를 무대로 삼았다고 일컬어지는데, 말하자면 <시로바코>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출을 맡은 다이치 아키타로 감독은 < 후르츠 바스켓 > 등의 대표작이 있다. <시로바코>는 애니메이션 제작이 풀 디지털화된 현재 시점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어 크게 참고가 되는 작품이다. 특히, ‘꿈과 희망’만을 갖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뛰어들고자 하는 지망생들에게는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 그런 현실 위에서 꿈을 잃지 않고 어떻게 해서 ‘직업’과 ‘자아실현’을 연결시킬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고교 시절 함께 아마추어 애니메이션 서클의 멤버 중에 유독 성우 지망생 한 명만이 작품 중반을 지난 현시점에서 특별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성우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있어 가장 화려한 것이 성우이고, 일본의 성우는 거의 연예인 수준으로 인기가 높지만 그만큼 경쟁률이 무지막지하게 높다. 간혹 한국인인데도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꿈을 갖고 성우학교에 입학하는 이를 볼 수 있는데, 국적만 한국일 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교포가 아니라면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입장에서 사실상 외국인이 성우로 기용되기는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꿈을 갖고 많은 비용을 들여 일본의 성우학교에 입학하는 외국인은 비단 한국인만이 아니라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로바코>를 보면 일본인이어도 성우로서 데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가 있다. 성우를 소재로 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시로바코> 외에도 많으니, 최소한 그런 작품은 본 후에 일본 유학을 결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쪽이나, 혹은 촬영, 컴퓨터그래픽 등 다른 분야에서는 외국인이 참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거에는 한국 회사가 일본으로부터 소위 ‘하청’을 받아 작업에 참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아예 일본 회사에 직접 입사한 한국인 애니메이터도 많다. 또 그림 분야만이 아니라 다른 전문 분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직원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도 <시로바코>와 같은 작품은 참고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과거에도 이런 식의 ‘직업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꽤 많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소위 ‘만화가 만화’ 같은 케이스다. ‘만화가 만화’란 만화가가 만화를 그리는 자체를 소재로 한 만화를 뜻한다. 지금 예를 들자면 대표적으로 「바쿠만」(오오바 츠구미 원작, 오바타 타케시 만화)과 같은 작품이 있겠는데, 그 외에도 좀비만화인 「아이 앰 어 히어로」(하나자와 켄고)에서도 주인공이 만화가 화실의 스태프(어시스턴트)라서 초반 1~2권에는 일본에서 만화가 및 만화가의 화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참고가 되는 내용이 나온다. 또 「외쳐라 펜」(시마모토 카즈히코)은 전형적인 ‘만화가 만화’로서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만화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화를 그리며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작품이다. 「G전장 헤븐즈 도어」(니혼바시 요코)는 만화가와 편집자의 자식들이 주인공인데 일본의 상업만화 세계에서 마치 전쟁처럼 살아가는 만화가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밖에도 ‘만화가 만화’는 많이 존재한다. 「아오이 호노오(푸른 불꽃)」 작년 일본에서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화제를 모은 만화 「아오이 호노오(푸른 불꽃)」(시마모토 카즈히코)의 경우엔, 작가 시마모토 카즈히코가 대학 시절 자신과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던 안노 히데아키(신세기 에반게리온), 야마가 히로유키(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아카이 타카미(게임 ‘프린세스 메이커’ 제작자) 등 이후 애니메이션 제작사 ‘가이낙스’를 설립시키는 중추가 되는 인물들과 만났던 때를 회고하는 자전적 만화로서 1980년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하던 젊은이들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일본 애니메이션계 를 짊어지는 인물로 성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로바코>나 「아오이 호노오(푸른 불꽃)」과 같은 작품들을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작 과정을 알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무조건 ‘애니메이션 선진국’, ‘만화의 왕국’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서양, 특히 미국과 비교할 때 상당히 종사자에게 있어서 불리한 업무 환경이라고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앞서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기재되어 있는 제작진행 담당자의 업무 내용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급여는 매우 낮은 편인데 업무 시간도 상당히 길고 아주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이는 제작진행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터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그나마 회사 소속인 제작진행에 비해(제작진행 역시도 대개 계약직이라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지만) 애니메이터는 대부분의 경우 프리랜서이므로 아무런 보장이 없어 더 불리한 직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일본에서는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프리랜서인 애니메이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일종의 고용보험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는 것이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일본에서는 상당히 오랜만에 ‘모든 애니메이터를 사원으로 고용’하는 형태를 추진했는데, 회사의 양대 기둥이 되어 온 두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가 고령으로 은퇴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이미 종래의 ‘완전 고용’을 포기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알 수가 있다. 아주 예전, 일본을 대표하는 유서깊은 애니메이션 회사 토에이 애니메이션(토에이동화)을 필두로 애니메이터들은 전부 회사 소속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일본영화계 자체가 대부분의 스태프, 심지어 배우들까지를 회사에서 고용하는 형태였다. 오히려 그때에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능력 있는 연출자나 배우들은 회사와의 계약 기간이 빨리 끝나고 프리랜서로 나가려는 분위기였다. 스포츠 선수나 요즘 연예인과 소속사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즉 당시에는 영화제작사가 제작 스태프도 고용했고 연예인 매니지먼트도 담당했다는 뜻인데, 지금 국내에서 가수 분야의 경우 매니지먼트와 음반(음원) 제작을 같은 회사에서 담당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때는 왜 영화 분야에서도 그런 식이었는가 하면, 간단히 말해서 할리우드도 그랬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니 아주 간략하게 말하자면, 소위 ‘할리우드 황금기’ 시대에는 할리우드 영화사에서도 스태프와 배우들이 영화사 소속인 경우가 많았다. 2011년에 발표된 영화 < 아티스트 >를 떠올리면 되겠다. 그래서 그 영향을 받아 일본 영화계도 마찬가지 방식이었고, 영화 제작사가 애니메이션도 제작하던 초창기에는 애니메이션 업계도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업계가 점점 변화하면서 모든 애니메이터를 회사가 고용하여 급여를 주는 형태가 점점 불가능해졌고, 결국 전체 사원 애니메이터를 해고하고 외주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분야별로 생기기 시작하면서 현재와 같은 형태가 일본 애니메이션(그리고 미국에서도 비슷하게 바뀌었다)의 주류 시스템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도 시스템이 바뀌면서 많은 배우나 스태프들이 그 변화 속에서의 소위 ‘패러다임 시프트’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했는데, 사회 전체가 보다 좌파적, 사회주의적이었던 과거 일본에서는 그 과정이 보다 과격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당시 토에이동화 소속의 애니메이터 노조에서 서기장(직함 자체가 매우 공산주의적이지 않은가)을 맡기도 했고, 역시 토에이 노조에서 부위원장을 맡았던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최근까지도 일본공산당 지지를 공표했던 것이다. 이 둘은 마지막까지도 토에이동화가 사원 애니메이터를 해고하는 데에 대해 노동쟁의를 통해 꽤나 과격하게 반대한 바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둘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스튜디오 지브리는 애니메이터를 사원으로 고용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계약직 형태가 많은 것 같기는 해도.) 지금은 < 에반게리온 > 시리즈를 가지고 가이낙스에서 독립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스튜디오 카라 역시도, ‘애니메이터의 노후 보장’ 등을 고민하면서 사원 제도를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같은데, 어쨌든 지브리나 카라 모두 일본에서 흥행면에 있어 가장 성공한 작품을 이미 내놓았기 때문에 그 바탕 위에서 직원들의 복지 혜택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겠다. 국내에서도 영화 분야에서 소위 ‘열정 페이’ 문제가 많이 논의되는 상황 속에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의 회사가 스태프들과 표준 근로계약서를 통해 작업했다는 기사가 많이 나왔는데,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사실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 역시도 여전히 ‘열정 페이’ 위에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고, 일본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색이 이제야 시작되고 있는 단계라고 보면 되겠다. (따라서, 작품의 연출 방식이나 제작 방법 등을 참고한다면 모를까, 제작 시스템이나 회사의 구조 등에 있어서는 미국이 아닌 일본을 참고로 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라고 해서 물론 전부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보다 합리적인 시스템을 위해 세세한 스태프들까지 각종 단체를 통해 표준적인 계약서와 계약 관계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으니 좀 더 참고할 만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어쨌든, 이런 ‘시스템’이나 ‘절차’에 대해서는 사실 외국이 정확하게 실무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기는 쉽지가 않다. 직접 외국의 해당 업체에 들어가서 몸으로 부딪혀보지 않으면 체험하기가 어렵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기에는 언어의 문제도 있고 상황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체험자들의 경험담이 소개되어야 하는데, 관련서적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험담을 듣는다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우연하게 동료나 선배를 통해 잠깐잠깐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것이 고작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로바코>와 같이 전체적인 업계 사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만화 업계에 대해 <바쿠만>이 국내의 독자들의 이해도를 많이 올렸듯이, <시로바코>도 그런 역할이 되었으면 생각한다. 물론 <바쿠만>에서 일본만화의 모든 측면이 다 소개된 것은 아니고 거기에 다뤄지지 않은 내용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킨 면도 있었듯, <시로바코> 역시도 한계는 있겠으나 워낙 참고할 자료가 없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는 그나마 목마른 자에게 잠깐의 소나기 역할이라도 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트리거류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독본」 사실은, 작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트리거류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독본」(이 책의 저자는 애니메이션 <킬라킬>을 만든 제작사 ‘트리거’의 이사 겸 프로듀서 마스모토 카즈야) 등과 같이 실제로 참고가 될만한 관련서적이 국내에도 번역되는 편이 더 확실할뿐 더러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선 기왕에 수입된 <시로바코>라도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국내에도 애니메이션 업계가 존재하고 있고 지망하는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좀 더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련된 서적이 많이 출간되길 희망한다. 구도나 데생 같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작법서’는 이미 많이 나왔고,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시나리오를 위한 ‘스토리 작법서’ 역시 고전이 될만한 프로프나 캠벨의 저서는 물론이고 재작년부터 화제가 된 오쓰카 에이지의 저서도 번역판이 나왔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분야에서 그런 작법이 아니라 ‘업계 상황’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서적은 아직 거의 없고, <시로바코>나 <바쿠만>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아쉽다. 또 이 작품들은 일본 업계가 아니라 한국의 업계를 다룬다는 한계점도 있으니 더더욱…. 한국의 업계는 좁다 보니 건너건너 다들 아는 사이라서 비판을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만화든 게임이든 지망생이 존재하고 매년 신입이 들어오는 업계이니만큼 입에서 입으로 소문만으로 돌고 끝날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상황을 정리해주는 서적이나 직접적으로 업계를 보여주는 작품이 국내에도 좀 더 나와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