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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 시즌 3 : episodes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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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 시즌 3 : episodes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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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 시즌 3 : special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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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찬송가 제27집(521~5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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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38:59
한국 찬송가 제27집 (521장~5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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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
- 연주시간
- 38:59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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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ナリオ 제49권 제2호
- 실물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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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hiers du 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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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앤하우웰 16mm 필름영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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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성장 잔혹사와 ‘귀여움’의 레짐 사이
<소년시절의 너> 중 / 사진: Far East Film Festival 대만, 중국, 홍콩을 아우르는 동시대 중화권 청춘영화는 어딘가 안전한 자리로 호출되곤 한다. 이는 가볍고 말랑한 감정의 외피를 두른 ‘틴 로맨스’나 ‘학원물’이 지배적인 인상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과 방 한 칸을 배경으로 한 ‘도시 로맨스’, 혹은 성적 지향이나 계급적 주류 범주에서 벗어나는 ‘아웃사이더’의 지난한 성장 서사 또한 그 반경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거짓 없는 미소와 서툰 고백에서 길어 올린 풋풋한 청춘의 초상과, 체제와 현실의 제약 속에서 너무 이르게 마모되어 버린 성장의 잔혹한 기록. 두 계열은 서로 다른 미학과 정서를 지닌 채 엇갈린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성장의 희미한 슬픔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교차하고 중첩된다. 우리가 중화권 청춘영화로 부르는 범주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 영화들은 어떻게 하여 이토록 ‘범아시아적’ 생명력을 유지하는가? 질문은 자연스레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누군가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구파도, 2011)나 <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조미, 2013)을 기점으로 삼을 테고, 또 다른 이는 < 남색대문 >(이치엔, 2002)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 더 긴 역사적 궤적 속으로 옮기면, 중화권 청춘영화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동시대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우선, 대만 뉴웨이브와 중국 6세대 영화, 그리고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어 온 홍콩 뉴웨이브의 성취 속에서 그 정서적, 미학적 뿌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나 아닌 여럿: 중화권 청춘영화의 기원들 누구나 겪지만 결국 지나간 과거로 남게 될 통과의례의 순간. 대만 뉴웨이브는 이러한 청춘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했던 시기로 기억될 만하다. 교복 입은 인물들의 초상이 전면에 놓인 작품도 가히 많았다. 그 출발점에 자리한 < 광음적고사 >(에드워드 양 외 3인, 1982)의 옴니버스 구성 가운데 타오더천과 에드워드 양이 각각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작은 용 머리”와 “기대”), 그리고 진곤후 감독의 < 샤오피 이야기 >(천 쿤하우, 1983)는 소년·소녀들의 작고 애틋한 바람결 같은 초상을 내세운다. 그 물밑으로는 미국 이민, 대학 진학, 도시 중산층 진입이라는 당대 사회적 분위기의 기대와 규범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학교와 가정을 중심으로 일상의 반복을 미묘하고 리드미컬하게 포착한 이 감각은 <남색대문>과 같은 영화들의 정서적 결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오늘날 중화권에서 ‘작은 청신함’이라 불리는 샤오칭신(小清新, Xiao qingxin)의 감정 구조와 그것이 하나의 서브 장르로 체화되어 온 흐름의 잠재태를 내포하고 있다. [1] 그러나 이 계보는 허우샤오셴의 < 연연풍진 >(1986)을 비롯한 성장영화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까지 대만 뉴웨이브 1세대가 소외된 젊은 세대를 응시해온 흐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영화들은 포스트-경제 기적 시기에 접어든 관점에서 계엄령 시기의 역사적 조건을 되비추는 장치로서 청춘을 호출하며, 어쩔 수 없이 감내하며 통과해야 했던 국면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 풍경은 담담한 일상으로, 때로 서늘하고 비정한 상태로 각인되는 한편으론 감독들의 노스탤지어와 자전적 경향을 투사한다. 도시로 향한 젊은 연인들이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을 흘려보낸 기억으로 남기거나(<연연풍진>), 백색 테러의 광풍과 외성인이라 불린 본토 이주민들의 불안정한 삶의 궤적을 통과하던 청년이 끝내 파국적인 폭력으로 치닫는 시간(<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속에서, 청춘은 이미 상실을 예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광음적고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중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Asian Film Archive ) 이러한 정조는 중국 6세대 영화에 이르러 또 다른 시선으로 변주된다. 1989년 이후 중국에서 독립영화 [2] 로 분류될 수 있는 체제 외부의 작품들이 활성화되어, 급격한 시장화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은 청춘의 초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아장커의 < 소무 >(1997)를 기점으로 가시화된 이 흐름은 로우예, 왕샤오슈아이, 장위안 등의 작업으로 이어지며 6세대라는 미학적 진영으로 일컬어졌다. 소매치기인 주인공과 ‘사업가’로 변신한 옛 동료를 대조하며 중국 소도시 시장경제의 비루한 풍경을 날것으로 포착한 <소무>의 감각은 < 쑤저우강 >(로우예, 2000), < 여름궁전 >(로우예, 2006), < 북경 자전거 >(왕샤오슈아이, 2001), < 북경 녀석들 >(장위안, 1992) 등에서 목표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머물고 떠밀리며 시간을 견디는 젊음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6세대는 이처럼 국가 주도 계획경제와 개혁개방 사이의 격변기에 놓인 청춘이 조기에 소진되어버리는 감정 상태를 대변하는 성취를 보였고, 이는 세계 영화제 회로에서 환대를 받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중국 본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립영화’ 정신이 만개했던 때로 기록된다. 작가영화마저 상업영화 및 주선율 영화의 논리에 함몰되어가는 현 풍경을 떠올릴 때, 동아시아 청춘영화의 한 모델―즉, 비관적이지만 정직한 모델―을 제시한 당시 6세대의 성취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독립영화의 ‘죽음’이 목격되기 전 [3] , 이러한 계보를 근과거까지 계승하며 그 정서적 맥을 잇고 있는 작품으로 리위 감독의 < 관음산 >(2010)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무>, <관음산> 중 / 사진: IMDb( 1 , 2 ) 홍콩영화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할 만하다. 서극의 < 제일유형위험 >(1980)이 보여주듯, 초기 홍콩 뉴웨이브에서는 청춘의 권태와 분노를 폭발할 듯한 폭력과 뒤섞어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담가명이 호화롭고 자신감 넘치던 당시의 홍콩을 배경으로 도시 노마드들을 그려낸 < 열화청춘 >(1982)과, 왕가위의 < 중경삼림 >(1994)을 비롯한 1990년대 작품들은 청춘의 감정 구조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이어진 프룻 챈의 < 메이드 인 홍콩 >(1997)은 포스트-반환 시기 처음으로 등장한 뛰어난 청춘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두 소년과 이에 합세한 소녀로 구성된 아웃사이더들이 비가역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제일유형위험>을 환기시키면서도, 한결 차분한 시선으로 홍콩의 내면적 심상에 집중한다. 한편 왕가위와 같은 홍콩 뉴웨이브 2세대의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임영동의 <학교 풍운>(1988)은 전형적인 청춘영화의 문법과 거리가 있을지라도, 학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성장기 소년·소녀들의 위태로움을 그려낸 가장 ‘홍콩적인’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제일유형위험>, <메이드 인 홍콩> 중 / 사진: IFFR , IMDb 중국 문혁 세대와 Z세대의 초상: <방화>, <소년 시절의 너> 그렇다면 지난 10년으로 범위를 좁혀 중화권 영화로 시선을 옮겨보자. 동시대 작품들은 어떤 청춘의 풍경을 담아내왔을까? 이 작품들을 한눈에 조망하기란 쉽지 않고 필자의 한계도 있기에, 이어지는 글은 그 흐름을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인상적인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에서 제작된 청춘영화들은 대만발 ‘샤오칭신’ 장르가 중화권 전반에 끼친 영향력을 입증하듯 캠퍼스 로맨스가 주류를 이룬다. 매력적인 주연 배우들의 청신함, 푸르른 여름 하늘, 첫사랑과 서투른 고백 등 이 장르의 관습으로 간주될 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공부’ 자체가 단순한 성장담의 소재를 넘어 과열된 입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짓눌린 청춘 서사의 엔진이 된다는 점은, 중국 청춘영화만의 독특한 지점이다. 모범생 소녀가 불량스럽지만 순수한 문제아 소년의 공부를 도와주며 사랑이 싹튼다는 대만 영화의 공식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가 보여주듯 다소 귀여운 수준에 머물지만, 중국의 대히트작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2013)에 이르면 사뭇 다르게 변주된다. 이는 공부만이 ‘흙수저’인 자신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라 믿으며 로맨스를 아예 거부하는 주인공의 철벽같은 마음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중 / 사진: IMDb( 1 , 2 ) 증궈샹 감독의 < 소년시절의 너 >(2019)는 중국발 학원 영화들의 흐름 속에서 가장 성공한 판본인 동시에 사회성 짙은 텍스트로 각인된다. 대입 시험인 ‘가오카오’를 코앞에 둔 시기, 주인공 첸니엔(주동우)이 한 소녀가 학교에서 자살한 현장을 목격한다. 죽은 소녀는 교내 가해자들의 악명 높은 괴롭힘에 희생되었음이 드러난다. 가해자들의 다음 표적이 된 첸니엔은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십대 거리의 소년(이양천새)과 운명적으로 엮인다. 영화는 입시 위주 고등학교를 지배하는 잔혹함의 심리를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탐구하며 시작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온 세상에 맞서 싸우는 두 십대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로맨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육의 살풍경과 두 연인의 낭만적 비극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미덕이라기엔 다소 한계를 노출한다.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에 책임이 있는 체제 내부의 어른들(교사와 경찰들)이 지나치게 선량하고 도덕적인 인물로만 묘사되고, 가해자들 역시 충분한 전사나 깊이 없이 평면적 캐리커처에 가깝게 제시되면서, 두 상처 입은 영혼들의 고립은 사회적 압박 못지않게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려는 관계의 내향성에 의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오카오’ 점수가 부르주아로의 격상과 잔인한 빈곤의 삶 사이 간극을 결정짓는 상황에서, 첸니엔이 통과해야 하는 절박함의 정동은 한 편의 ‘십대 오페라’ 같은 이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일 테다. <소년시절의 너> / 사진: IMDb <방화>(2017)는 문화대혁명 말기, 문공단(문화예술선전대)에 입대한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공간이 당대의 예술학교나 사실상 다름없었던 현실이 재현될 뿐 아니라, 영화 역시 학원영화의 문법을 상당 부분 따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블록버스터와 풍자극을 넘나들며 < 집결호 >(2007), < 아부시반금련 >(2016) 등을 연출해온 중국의 대표적 감독 펑샤오강의 야심작이다. 무용수가 되기를 꿈꾸는 샤오핑은 문공단에 입성한 첫날, 자신을 마중 나온 선배 류펑에게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이타적이고 충직한 성정의 류펑은 정작 자신의 호의를 이용하기만 하는 피아노 반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영화는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 숙청, 그리고 1979년 중-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약 5년간의 격동을 통과한다. 그 사이 샤오핑은 재교육 시설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류펑과 샤오핑 모두 전쟁에 참전한 뒤 정신적·신체적으로 소진된 상태로 귀환한다. 하지만 <방화>는 문화대혁명이 야기한 전면적인 비극을 정면으로 성찰하기보다는, 학교 청춘물의 형식을 빌려 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공산당 간부나 상하이 상류층 자녀들과의 격차를 부각한다. <소년시절의 너>의 첸니엔처럼, 샤오핑 역시 수줍음과 서투름, 그리고 계급 지위로 인해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즉, 시대의 광기보다는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비판 가능한 엘리트 부유층의 부패와 계급적 소외에 비극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제목인 방화(芳华)는 ‘꽃다운 청춘’ 혹은 ‘향기로운 시절’을 뜻한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중반, 두 주인공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문공단 시절은 노스탤지어 깃든 기억으로 남고, 그 공식적 종언을 알리는 해산식 장면에서 샤오핑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다. 대만 청춘 영화의 속삭임: <조니를 찾아서>,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한편 오늘날 대만 청춘영화의 흐름이야말로 젊은 시절을 ‘아팠지만 예뻤던’ 감정으로 재배치하는 ‘샤오칭신’ 감성 구조와 떼어내 설명하기 어렵다. 동시에 그 한편에서는 이전 세대 영화들이 간직했던 불안과 공허의 정조를 일정 부분 봉합하면서도, 이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변주하려는 흐름 또한 포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만 청춘 영화들은 불확실한 현재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정서적 피난처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 곧 ‘작은 행복과 미세한 슬픔’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이 방식은 개인주의적 정서를 중시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로부터 물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려는 태도를 전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평론가이자 제작자인 페기 차오는 자신의 제작 영화 <남색대문>이 ‘샤오칭신’ 장르로 호명되는 데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내놓는다. 그 미덕이 “대만 사회에 뿌리를 둔 일상적 디테일의 축적을 통해 그려낸 삶의 초상이자, 자비로 가득하며 악의가 없는 세계”의 포착에 있다는 것이다. [4] 후앙시 감독의 < 조니를 찾아서 >(2017)는 이러한 설명에 잘 부합하는 텍스트다.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한 세 젊은 인물의 이야기는 인상 깊은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지하철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탄 여자에게 한 청년이 다가와 새장이 아니냐고 묻는다. 여자는 나중에 답을 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에 그런 상자에 새를 담아온 적이 있다고 덧붙인다. 같은 빌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걸어가는 긴 시퀀스를 통과할 때까지도 이들이 우연히 스친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후앙시는 허우샤오셴의 < 남국재견 >(1996)과 < 자객 섭은낭 >(2015) 제작부를 거치며 선배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롱테이크를 체득한 인물이며, 이 영화에는 실제 허우샤오셴이 제작자로 참여했다. 영화는 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주변을 어떠한 판단 없이 평등한 시선으로 관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일상의 미스터리를 낯설고도 신선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화면에 익숙해진 뒤에야 청년의 티셔츠 무늬가 작은 새들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순간처럼, ‘조니’라는 사람을 찾는 이상한 전화들을 계속 받아오던 여자는 문득 옛 애인을 조니라고 부른다. 앵무새를 키우는 여자와 자폐 성향을 지닌 청년, 그리고 탈출한 앵무새를 계기로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된 수줍음 많은 집수리공이 왜인지 모를 기분 좋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야기. 이는 느슨하며, 너그럽고,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삶에 대한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조니를 찾아서>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2020)을 논하기 위해서는 대만발 청춘영화의 또다른 국면을 호출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성보다는 강인하고 때로 보이시한 여성 캐릭터가 선호되고, 완성된 사랑보다는 첫사랑의 어슴푸레하고 틀이 잡히지 않은 감정에 집중해 온 흐름 말이다. <남색대문>, < 영원한 여름 >(2006), <여친 남친>(2012) 등이 보여주듯, 대만 청춘영화에는 퀴어 서사와 삼각관계의 묘사를 통해 장르의 영토를 확장해 온 하나의 계보가 존재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촉발되는 모호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섬세한 터치는 대만 청춘영화만의 고유한 미학을 구축해왔다. 패트릭 류 감독의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막 계엄령이 해제된 1980년대 후반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아한은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버디를 만나 단짝 친구가 되고, 두 소년 사이에 형성된 감정은 학교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하면서 시험대에 오른다. 신입 여학생 반반의 등장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직면하도록 압박하는 계기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삼각관계를 통한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테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네 마음>은 정통 퀴어 영화라기에는 터치가 다소 가벼웠던 기존의 청춘영화 흐름에서 한 발 더 묵직하게 나아간다. 기숙학교 내에 공공연히 만연한 호모포비아와, 스스로 게이였음에도 아한에게 ‘교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캐나다인 신부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계엄령 해제라는 조용한 변화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시간으로 닿는다. 과거의 고통과 열정을 다시 마주하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대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듯, 주제곡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 흐르는 가운데 두 주인공은 죽은 신부의 교구가 있던 퀘벡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결말로 향한다. 홍콩 독립 청춘영화의 새로움: <쪽빛 하늘>, <좁은 길> 마지막으로 최근 홍콩 독립 청춘영화는 대만의 청춘물이 제공하는 감정의 완충 지대나, 중국 본토 학원영화의 서사와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려낸다. 이 글을 준비하며 마주한 가장 큰 수확은 홍콩 반환 이후 감독들의 본토행에 따른 영화 산업의 공동화나 정체성의 약화라는 오랜 우려를 불식시키는, 독립영화 진영의 새로운 세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저예산으로 제작되면서도 도시 청춘들의 표정과 삶의 결을 세밀하게 기록해 온 이 영화들은, 때로는 홍콩을 향한 러브 레터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모스 와이의 <닷 투 닷>(2014), <냅핑 키드>(2018), <먼 곳에서>(2022)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주목할 점은 홍콩영화발전위원회(Hong Kong Film Development Council)가 주관하는 신인 감독 지원 사업(First Feature Film Initiative)을 통해 입봉하는 신예가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지원할 때 홍콩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나 베테랑 제작자를 멘토로 매칭해 주는 방식을 취한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세대 간 유기적 결합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 덕분에, 최근 홍콩 독립영화를 보면 타이틀 크레딧에서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익숙한 홍콩 감독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쪽빛 하늘>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그중에서도 <쪽빛 하늘>(2017)은 동시대 홍콩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하나인 청킹와이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천하태평>(2008), <음악 인생>(2009), <하나의 국가, 두 개의 도시>(2011), <테이스트 오브 유스>(2016) 등 홍콩의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들과 허안화의 <밤과 안개>(2009)의 각본을 쓰며 다져온 청킹와이의 서늘한 시선은, 부모 살해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통해 홍콩 사회가 청춘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냉정하게 응시한다. <쪽빛 하늘>에서 부모의 시신이 지역 저수지 인근에서 발견된 뒤, 어린 코니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이 강렬한 스릴러는 누가 저질렀는가를 이미 알려주고 시작하기에, 질문의 중심은 ‘왜’라는 동기로 집중된다. 빈곤과 학대로 점철된 코니의 가정환경, 그녀가 학교 친구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과정, 그리고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서 점차 자신의 사적인 삶까지 흔들리기 시작하는 여성 수사관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선정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펼쳐지는 이 탐구의 형식은 평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코니와 같은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게끔 유도한다. 대만이나 중국의 청춘 학원 영화에서 ‘파란 하늘’이 젊음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이 영화의 어스름한 ‘쪽빛’은 홍콩의 비좁고 폐쇄적인 공간을 짓누르는 색채로 활용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채 위협받는 십대들을 압박감 가득한 스릴러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학교풍운> 같은 홍콩영화의 고전적 전통이 환기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부모 살해를 자행한 소녀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거부하는 젊은 여경의 윤리적 딜레마는 평행선을 달리는데, 이는 세대 갈등의 단면이자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도시에 갇힌 홍콩 현세대의 실존적 질식 상태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좁은 길>(2022)은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 자살을 예고한 어린 시위대를 구하려는 청년 구조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기를>(2021)을 렉스 렌과 공동 연출했던 람섬 감독의 단독 연출작이다. 이 영화 역시 대만의 낭만이나 중국의 열망과는 또 다른, 도시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는 홍콩 청춘들만의 정직하고도 아픈 초상을 그려낸다. 코로나19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영세 청소 대행업체의 일원인 노동자 자크가 늦은 밤 식당을 방역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로 가라앉은 팬데믹 시기의 밤 장면으로 구성된 <좁은 길>은 조용한 노동계급의 고독을 포착하지만, 음울하거나 비관적이기보다는 사회 주변부의 고단한 상황을 응시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위로와 해방감을 안겨준다. 일손이 절실하지만 도시를 덮친 팬데믹 탓에 자크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충동적으로 지원한 캔디의 비공식적인 구직 요청을 받아들이고, 매일 밤 일당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비교적 어린 여성인 줄로만 알았던 캔디는 사실 어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두 사람은 감정적 방어 기제를 세우면서도 서서히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 사이로 발전하지만, 영화는 연애담을 전형화하지 않는 선에서 결말을 열어둔다. 람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낸 홍콩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5]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는 <좁은 길>의 가장 큰 미덕이자, 고립 속의 유대를 형성하는 두 주인공의 서사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동력일 것이다. 청춘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자면 입체적으로 그려진 젊은 청소 노동자와 싱글맘의 묘사 자체가 인상적인 ‘캐릭터 스터디’라 할 만하다. <좁은 길> / 사진: IMDb *** [1] Papan Yang, “The Taste of Ice kacang: Xiaoqingxin Film as the Possible Prospect of Taiwan Popular Cinema”, The IAFOR JOurnal of Asian Studies, 2:1, 2016, p. 75. [2] Chris Berry, “Cinema: Reconsolidation of Party-State Hegemony in a Market Economy,” in M Dahl, M. Szatkowski & H. Kups (eds.), China under Xi Jinping: An Interdisciplinary Assessment , Leiden & Boston: Brill, 2016, p. 351. 중국 독립영화는 일반적으로 정부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영화를 말한다. 이는 체제 내 상영이 허가된 예술영화(艺术片, yishupian)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공식적으로 상영되지 못하는 독립영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내 독립 영화제(난징, 베이징 등)나 대안적 상영 공간을 통해 소개되거나, 주로 해외 영화제를 거점으로 유통되는 경향을 보였다. [3] Chris Berry, ibid., p. 350. [4] Song Hwee Lim, Taiwan Cinema as Soft Power: Authorship, Transnationality, Historiography , London &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p. 129에서 재인용함. [5] Elizabeth Kerr, “ Portrait of a City: The Narrow Road ” , ZOLIMA citymag (접속일: 2025. 12. 26.). 박은지(영화 연구자) l 프랑스 탈식민주의 영화와 동시대 동아시아 영화를 연구하고 글을 쓴다.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지은 책으로 『지중해의 영화』, 주요 논문으로는 「장-뤽 낭시를 경유한 클레르 드니의 여정: ‘신체-지리학’ 영화, 생태적으로 그려내기」, 「부산 프랑스문화원과 트랜스로컬 시네필리아」, 「홍콩 누아르에서 포스트-홍콩 누아르까지 성찰적으로 바라보기」, 「두기봉의 밀키웨이 제작사와 포스트-1997 홍콩영화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있다.
[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 에바(EVA), 시네마테크에 타라!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박: 애니메이션영화제 했었을 때, 아까 <에반게리온> 얘기했었지만. <에반게리온>이나 < 공각기동대 >, 뭐뭐 < 에스카플로네 > 이런 거 했었거든요. 근데 잘 됐었어요. [1] 해당 구술채록문을 읽다 보면, “아까 <에반게리온> 얘기했었지만”이라는 말에서 이상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이 나오기 이전까지 구술에서 단 한 번도 <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 >(안노 히데야키, 1995)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아까 한 이야기’는 인터뷰 사이 잠시 쉬는 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구술담당자로서 인터뷰에 참관하면서 구술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생기면 이렇게 쉬는 시간에 살짝 물어보곤 한다. 그리고 당시 구술자에게 <에반게리온>에 대해 물어본 것은, 내가 에바팬이라거나 그래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유는 이제부터 천천히 풀어갈 것이다. 닫힌 영화, 열린 영화제 사실 광주 ‘ 영화로 세상보기 ’ 운영자였던 박상백 구술(2024년 10월 17일 진행) 이전에 그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황: 일본영화 같은 경우는, 사실은 광주 기획을 좀 본따고 그랬는데. 광주 ‘영화로 세상보기’에서 그때 돈을 막 많이 벌었더라고요. 한: 재패니메이션으로? 황: 그래서 액정도 바꾸고. 이게 그때 ‘소년 탐정’인가? <에반게리온> 시리즈. 저는 뭐 내용도 아직도 모르는데, ‘야, 저런 매니아층이 또 있구나.’ 그래서. 저희도 해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사람이 꽤 오더라고요. [2] 대전 ‘ 씨네마떼끄 컬트 ’의 운영자였던 황규석 (2024년 6월 29일 인터뷰 진행)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에반게리온> 상영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라는 사실보다도 ‘저런 매니아층이 있다’라는 깨달음에 있었다. 이러한 관객층을 지금의 관점에서 그냥 ‘오타쿠(オタク)’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이 등장했던 시기만 해도, 국내에서는 ‘오타쿠’에 대한 뚜렷한 사회적 인식도 없었고, 특정 애니메이션 작품에 대한 열렬한 지지층의 활동이 눈에 띄지도 않았었다(존재는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적어도 외연적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구술자가 이들을 ‘저런 매니아층’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어느 정도 오늘날 재패니메이션 ‘오타쿠’에 대해 사후적으로 형성된 느낌도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사후적인 인식을 제외하더라도 평소 이상의 어떤 관객층들이 <에반게리온> 상영 당시 몰려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누구이고 왜 여기 왔을까? 정: 제 세대뿐만 아니라 바로 윗세대들도, 제 바로 다음 세대들도 너무나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어요. 너무나 보고 싶었던 영화. 일본영화. … 유학을 가지 않으면 그건 접할 수가 없는 거니까. 사실은 프랑스영화・독일영화에 대한 갈증보다 일본영화에 대한 갈증이 훨씬 컸어요. [3] 한: 혹시 그런 건 없었나요? 선호하는 영화 통계 같은 거. 조: 있었죠. 한: 아, 있었어요? 조: 네. 일본영화, 뭐 (사이) 제일 많이 봤던 영화가 아마 < 러브레터 >. 수입되기 전에. 그리고 피터 잭슨 < 데드 얼라이브 >, < 천상의 피조물 > 이런 게 공식적으로 소개 안 됐었거든요? … 되게 압도적으로 피터 잭슨 영화하고 일본영화하고 미국의 인디영화들, 이런 영화들이 사람이 많이 왔었어요. [4] 영화평론가 정성일 과 1990년대 문화학교 서울 의 운영자로 일했던 조영각 은 당시 시네마테크를 찾아오는 관객들은 근본적으로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영화를 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에 한국 극장에서는 보기 힘든 프랑스영화, 독일영화, 미국의 인디영화들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마음도 강했지만, 이 영화들이 수입자유화와 함께 쏟아지는 미국영화들 속에서 틈새를 찾아 소규모의 예술영화전용관들을 채울 때조차도 들어오지 못했던, 원천적으로 수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던 일본영화,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욕구는, 그것이 문화적・심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시네마테크의 운영자들의 근원적인 고민 역시 있었다. 시네마테크를 찾는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한국사회로부터 ‘닫힌 영화’들 이기 때문에, 이들의 자료 확보와 상영 활동은 불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러브레터>는 처음에 어느 쪽에서 구하셨어요? 곽: (목소리를 낮춰서) 어디서 구했을까요? 어디서 구했을까. [5]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쉬! 조: 영화를 보려면 무조건 회원가입을 해야 돼요. 그게 저희 문턱이었고. 저희는 그렇게 운영해야지 여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사실 불법이잖아요. 비디오를, 영화를 트는 게 심의를 받은 것도 아니고 우리도 저작권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회원제라는 규정을 만든 거고. … 그런 규칙들이 있어서 내부 결속력은 되게 탄탄했던 반면에 다른 데서 보기에는 “좀 폐쇄적이다” 이런 얘기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6] ‘회원제로 운영되는 폐쇄적 시네마테크를 통해 극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본다’라는 것이 어쩌면 ‘특권’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정반대였다. 음지화된 공간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들어온 작품을 보고 있다는 사실, 즉 ‘ 모두 함께 모여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고 있다 ’라는 비밀(?)은 시네마테크를 찾는 관객들의 소속감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이들의 응집력을 높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 통신전용망을 이용해 취미와 관심이 같은 사람 또는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토론을 벌이는 개인용 컴퓨터 통신동호회들이 많이 결성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동호회 회원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특정 주제에 대하여 온라인 토론을 벌이는 외에도 전자게시판 기능을 이용, 알리고 싶은 소식을 회원 모두에게 공개하거나 공동 자료실을 만들어 쓰고 있다. - “PC통신 동호인 모임 활발”, 《한겨레》 1990. 8. 14. 8면 기사 “이 영화가 < 미져리 >보다 무섭다는 ‘ PC통신 ’을 보셨습니까?” (《조선일보》 1994. 6. 10. 18면 광고) 1990년대 초 PC통신 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도입되면서,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사실 이 새로운 공간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정보를 준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김: ‘이제 그런 영화들이 인정받는 세상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어떤 각인? 취향을 드러내게 되는 거죠. … 팬과 마니아라는 거에 대한 나의 소속감 ? 그게 굉장히 컸던 거 같아요. [7] 이 온라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동시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영퀴’를 풀면서 소속감을 다져갔다. 이러한 소속감이 커질수록, 각자의 취향은 숨기거나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그렇게 자신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어디에 가면 볼 수 있는지 정보를 공유하며 시네마테크로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쉬는 시간을 빌어 구술자 박상백에게 ‘영화로 세상보기에서 <에반게리온>을 상영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본 인터뷰 때 이야기한 것처럼 그 시기가 “닫힌 시대이기는 했지만 좀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다 알려져 있던 것들”이었고, 소문만 무성한 그 ‘화제작’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답했다. 그리고 덧붙여 ‘왜 <에반게리온>에 당시 관객들이 그토록 열광했다고 생각하냐’라는 질문을 이어 했고, 이에 대해 “<에반게리온>은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 당시 시네필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답했다. 확실히 <에반게리온>은 지금까지도 말도 많고 해석도 다양한, 참 어려운 애니메이션이다. <에반게리온>에 대한 세기말 관객들의 관심이 상당 부분 이 ‘해석놀이’에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반게리온>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시기 재패니메이션의 인기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한 축으로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구술자 송정환은 평택의 ‘ 시네마드리밍 ’에서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平成狸合戰ポンポコ) >(다카하타 이사오, 1994)을 상영했을 때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러왔고, 특히나 평택시민아카데미로 공부를 하러 오던 청소년들이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재미있어했으며, 이에 같은 공부방에 있던 아이들끼리 상영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함께 감상을 했던 일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8] 누가 뭐래도 지브리 최고 남주는 ‘ 아시타카 ’다. (필자 개인 의견임) 뿐만 아니라, 시네마테크 운영자들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과 호응을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 쪽으로 이끌고 갔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지만, 단편 애니메이션의 경우 영화제가 아니면 일반 관객에게 상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시네마테크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전국적인 시네마테크 배급망(전국씨네마떼끄연합은 1997년 결성되었다)을 이용해,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의 작품을 모아 순회상영을 하거나 장편 사이에 단편 작품들을 끼워 넣어 함께 상영하는 등 프로그램을 다양화했다. 박: 그때 해외에서 들어온 독립영화하고 국내 독립 애니메이션을 붙여 가지고 긴 독립영화, 해외 독립영화 장편에 앞서서 마치 인트로를 열듯이, 국내 단편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그다음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딱 이렇게 된다든가, 데이비드 린치의 < 이레이저 헤드 >를 상영하는 데 앞서서 나기용 감독의 단편이 상영된다거나, 이런 식으로 하는 시도들도 있었고. 그리고 독립영화협회하고도 좀 같이하는 활동들이 있었고. 문화학교 서울이라고 지금은 없어졌는데 거기하고 저희랑 같이 해서 상영회를 조그맣게 한다든가 이런 활동들이 더러 있었죠. [9] 손: 저기 문화학교 서울인가, 정말 하꼬방 같은 그런 극장에서. 기억나네. 완전히 다락방 같은 극장이었는데, 거기서 < 생존 > 틀고 이랬을 때 무렵이었거든요? 그러면서 교류를 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저는 모션&픽쳐에 있으면서 독립영화, 시네마테크 이런 쪽 하는 사람들 하고 교류가 되기 시작한 거죠. … 자체 영화제가 이런 때 서울에 있는 작품들 가져올 때도 지역 뭐 같이 해서 틀기도 하고. 그러면서 교류가 많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시네마테크 활동하던 분들이 독립영화협회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가 맞물린 거죠, 대구도 . 그래 가지고 대구에서도 원승환 이라는 친구하고 이렇게 해서 협회를 만들어보자라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 그렇게 이제 모션&픽처하고 독립영화 하는 친구들하고, 시네마테크 하는 사람들하고 이렇게 해서 ( 대구독립영화협회를 ) 만들게 되었죠. [10] <생존>(손영득, 1997)의 한 장면 물론 < 아키라 >(오토모 가츠히로, 1988)나 <공각기동대>(오시이 마모루, 1995)를 보러 왔던 관객들, <에반게리온>의 팬들, ‘지브리 애니메이션’이나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던 관객들이 모두 같은 성격의 관객층이라고 뭉뚱그릴 수 없다. 심지어 <에반게리온> 상영회를 보러 왔던 관객들조차도 하나의 성격을 가진 집단으로 묶을 수 없다. 개중에는 정말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오타쿠도, 그저 심도 깊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시네필도 있을 것이고, 혹은 ‘워낙 화제가 되는 작품이라니 나도 구경이나 한번 해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네마테크를 찾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너무 보고 싶지만 좀처럼 볼 수 없는 작품이 상영되는 곳 , 그런 작품을 찾는 이들이 편안하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며 모일 수 있는 곳, 배급 경로를 찾지 못한 창작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들고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곳으로서 시네마테크가 다양한 관객층을 끌어모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관객층들이 2000년대 초반, 흔히 ‘한국영화의 화양연화’라고 이야기되는 시기를 불러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킹덤>의 팬덤 1990년대 가장 ‘힙한’ 공간이었던 이 민간 시네마테크들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을까. 결론을 대신하여 2024년 주제사에서 가장 핫했던 작품 < 킹덤(Riget) >(라스 폰 트리에, 모턴 안프레드, 1994)과 < 킹덤 2(Riget II) >(라스 폰 트리에, 모턴 안프레드, 1997)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두 작품의 상영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시네마테크의 관객층이 갖는 응집력의 폭발 인 동시에 이들이 주류의 문화 안으로 흡수되는 과정 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된 이후로, 부천의 판타스틱영화제・서울여성영화제・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영화제(SICAFF) 그리고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제 들은 영화팬들에게 또 다른 놀이터였다. 영화제는 ‘합법적’으로 새로운 영화를 제공했고 관객들은 그곳에서 마음껏 놀았다. 그리고 영화제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신문 기사나 PC통신 동호회 등등을 통해 참석자들의 뜨거운 후기는 전해졌다. 수보다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열기. < 브레이킹 더 웨이브 >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연출한 무려 4시간 반짜리 영화 <킹덤>이 대표적인 경우. 지난달 30일 자정에 열린 첫 상영에는 4백여 석 극장에 2천여 명이 몰려 급히 다른 극장을 잡아 시차를 두고 두 곳에서 상영했으며 그러고도 수백 명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 “시네마 부천, 9만 관객 갈채”, 《동아일보》 1997. 9. 6. 26면 기사 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킹덤>과 심야영화 의 붐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킹덤>과 심야상영을 찾던 관객 안에는 좋은 작품을 찾아 헤매는 시네필들도 있었지만, 단순히 심야상영 문화를 즐기고 그 열기에 섞이고 싶은 젊은이들도 모여들었다. 최근 들어서는 심야시사회로 일반화되는 추세.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던 예술영화의 재상영 기회 로도 그 몫을 한다. 심야상영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우선 값이 싸기 때문이다. 일반영화 한 편 값으로 서너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IMF형 문화상품. 단순한 영화관람에만 그치지 않고 젊음과 영화를 매개로 한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한다는 것도 한 이유. 여대생 박진아 양(22)은 “영화관에 있으면 한배에 탄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전율과 긴장, 공포와 웃음으로 밤을 지샌 뒤 인적없는 새벽거리로 나설 때의 쾌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말한다. - “값싸고 젊음・마니아 상징에 만원사례, 심야상영 신세대문화로 뿌리”, 《경향신문》 1998. 5. 29. 22면 기사 상대적으로 수도권에 비해 문화적 전파가 더딜 수밖에 없는 지역에서도 뒤늦게 <킹덤>과 심야상영을 즐기려는 관객들이 자신의 지역에 위치한 시네마테크에서의 재상영을 찾았다. 박상백은 “전라도의 모든,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다 왔던 것 같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표현했는데, 이런 엄청난 관객 동원은 기존 시네마테크를 찾던 시네필들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박: 그때 부천영화에서 이미 상영을 했었고, 필름으로. 저도 그때 가서 봤고. 열기를 봤었고. 자연스럽게 볼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비디오테이프로 그거를 작업해서 돌았었어요 . 그래서 그거를 가져다가 이제 상영을 한 건데. … 심야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게 또 사람들은 새로운 거에 대한 호기심이나 그런 걸 경험해보고 싶은 충동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잘 이렇게 융합이 돼 가지고 아마 그렇게 많은 관객분들이 오시게 된 단초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잘되니까 다른 시네마테크에서도 했었던 걸로 알고 있고. [11] 원: 그중에서 관객들이 제일 많이 봤던 영화가 <킹덤>이라는 영화였어요. 그 영화가 97년도 부천영화제에서 매진이 되고, 그해 12월에 동숭씨네마텍에서 개봉을 했는데, 대구에는 이 영화가 내려올 일이 없다고 생각을 한 것죠. 그래서 2월쯤에 그 영화만 가지고 상영회를 했어요. 근데 어느날 배급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우리가 그 영화 권리를 가지고 있는 회사인데 무단으로 틀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 재산상 손해를 이렇게 봤으니까 만나자.” … “그러면 대구에서 <킹덤>이 개봉되는데 홍보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 을 주셨는데, … <킹덤>이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흥행했던 영화들하고 다르게 전국 로드쇼를 했던 영화고. 서울 상영이 대박이 터지면서 부산 상영을 했고, 부산에서도 대박이 터지면서 대구로 이제 상영이 옮아온 거고. 그게 12월이었는데 대구가 2월이니까 한 3개월 뒤에 오는 거잖아요. 그래서 서울에서 홍보가 이미 다 끝났고 지역에서 개봉할 때는 지역 언론사에 별도로 홍보를 해야 되는 필요가 생겼는데. … 또 <킹덤 2> 할 때는 아예 처음부터 ‘지역에 있는 시네클럽들, 시네마테크들하고 홍보를 같이 하자’ 라는 계획을 세웠어요. … 대구에서는 그걸 제가 했던 거고, 광주에는 뭐 광주극장에서 워낙 잘하시니까 그걸 했던 거고. 부산은 뭐 부영극장에서 잘하시니까 그랬던 거고. 대전은 이제 ‘컬트’가 그거를 하게 된 거고. [12] 대전 씨네마떼끄 컬트에서 개최된 ‘킹덤 상영회 포스터’ ※황규석 기증자료 박상백이나 원승환의 말처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킹덤>을 향한 관객들의 뜨거운 열기를 확인한 시네마테크들도 앞다퉈 <킹덤> 상영회를 추진했고, 그 열기에 동참하고, 함께 즐기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오며 시네마테크에서도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다. 이들은 이듬해 <킹덤 2>의 상영회도 추진하고자 했지만 <킹덤 2>의 정식 수입사인 KJ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 시네마테크의 불법적 상영에 제동을 거는 한편으로, 오히려 이들이 갖고 있는 지역에서의 홍보 노하우를 적극 활용하여 전국 상영을 진행했다. 그렇게 <킹덤 2> 역시 흥행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제 시네마테크들의 입장에서는 합법적 상영 공간에 자신들의 역할을 내어줄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2000년대에 들어서서 일부 시네마테크 운영자들은 멀티플렉스에 자리를 빼앗긴 소극장이나 각 지역 대표 단관극장들과 손을 잡고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을 운영하거나, 자신들의 특기를 살려 독립예술영화 배급 쪽으로 자리를 옮겨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은밀한, 그래서 더 자유롭고 끈끈했던 관객들, 그리고 그들에게 아지트가 되어준 문화공간들은 사라져 버렸지만, 각 지역의 민간 시네마테크들이 남긴 유산은 여전히 한국영화 산업 내에서 여러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지역의 영화문화와 독립・예술영화 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KOFA컬렉션을 통해 공개된 2024년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트워크’ 에서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자! *** [1] 공영민 채록연구,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크워크> 1권: 정희섭・박영정・박상백・송정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4, 217~218쪽. [2] 공영민・한나리 채록연구,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크워크> 3권: 이진이・원승환・황규석・강민구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4, 192쪽. [3] 공영민・한나리 채록연구,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영화문화의 변화와 사설 시네마테크의 활동> 2권: 정성일・이하영・손주연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3, 37~38쪽. [4] 한나리 채록연구,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영화문화의 변화와 사설 시네마테크의 활동> 3권: 안정숙・곽용수・조영각・김영덕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3, 188~189쪽. [5] 한나리 채록연구, 앞의 책, 101쪽. [6] 한나리 채록연구, 위의 책, 147~148쪽. [7] 한나리 채록연구,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영화문화의 변화와 사설 시네마테크의 활동> 3권: 안정숙・곽용수・조영각・김영덕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3, 224~226쪽. [8] 공영민 채록연구,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크워크> 1권: 정희섭・박영정・박상백・송정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4, 295쪽. [9] 이문주 채록연구,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8권: 박보경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1, 69쪽. [10] 유은정・박지윤 채록연구,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21권: 손영득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1, 95~96쪽. [11] 공영민 채록연구, 앞의 책, 한국영상자료원, 2024, 216~217쪽. [12] 공영민・한나리 채록연구, 앞의 책, 한국영상자료원, 2024, 142~147쪽.
『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1789년 혁명의 여름에 쓰인 인권선언은 재산과 생명을 불가침의 권리로 상정하였다. 이로써 프랑스혁명은 자본주의를 불러왔다. 도둑질을 대가로 가혹한 형벌을 받은 장발장은, 불가침의 권리를 어긴 대가가 얼마나 가혹했던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 가혹한 처벌과 함께 시작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도시를 둘로 갈라놓았다. 도시의 한 켠에는 전례 없는 풍요와 번영이, 다른 한 켠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빈곤이 자리를 잡았다. 도시에 넘쳐나는 이 빈곤과 마주하며 지식인들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말했다. 피에르 르루처럼 다수의 힘으로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며 ‘사회주의’를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세기말에 이르러 에밀 뒤르켐이나 마르셀 모스처럼 ‘연대’와 ‘증여’를 사회적인 것이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이들의 행동과 사고를 관찰하며 문제를 분석해보자는 이들도 있었다.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을 말한 아돌프 께뜰레, 사회 역학(social epidemiology)을 말한 루이 빌레르메, 그리고 사회학(sociology)을 말한 오귀스트 꽁트가 그들이었다. ‘social’이라는 형용사가 만들어 낸 렌즈를 통해 사람들은 ‘사회’의 형상을 발견해 나갔고 또 발명해 나갔다. 관찰은 주장이 되었고, 정책은 안전망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회적 안전망은 도시의 삶과 습속의 ‘일반성’과 ‘정상성’ 창출을 목표로 했다. 이에 따라 남성의 경우, 고등학교 내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은 후에는 (핵)가족을 구성하고, 내 집과 내 차를 마련한 후에는 주중에는 일터와 집을 오가고 주말에는 백화점이나 공원과 집을 오가는 ‘보통의 삶’이 20세기 들어 점차 일반화되어갔다. 20세기 중후반 서구사회는 그랬다. 1990년대 한국의 대학가에는 ‘포스트(post)’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었다. 탈독재, 탈냉전, 탈사회주의라는 변화를 배경으로 지식인들은 민주주의 너머(post)를 말했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민족주의, 포스트발전주의 등, 대다수는 이른바 ‘선진국’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온 것이었다. 여기에는 이제 한국사회가 ‘정상’을 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상황 판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느 선진국처럼 민주주의를 누리고, 여느 선진국처럼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는 판단. 그렇기에 이제는 반봉건사회라든지 주변부 사회라 말하기 어렵다는 판단. 이런 판단들이 중첩되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판단과, 이제는 민중을 대신하여 중산층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삶을 보여준다는 판단이 지식인들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유령은 다름 아닌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삶이었다. 도시를 누비는 자동차의 숫자도 ‘아파트’라 불리는 주거 상품의 가격도 빠르게 늘어갔지만, 이렇다 할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2000년대 이후 가장 빠르게 증가한 것은 불안한 일자리와 불안한 삶들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서구사회가 경험했던 정상적인 삶의 일반화는 인류 중 소수만이 경험한 것이었고, 한국사회에서는 더더욱 소수만이 경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여전히 괜찮은 일자리, 자동차, 아파트를 소유하고 중산층 가족을 구성하며 여가와 소비를 즐기는 삶을 일반적이고 정상적이라 간주한다. 안전망 없이 규범만 존재하는 것이다. 필자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사회적인 것’을 말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의 담론과 실천 속에서 만들어진 정책과 사회적 안전망의 뒷받침 없이,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삶에 관한 규범만 창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사회적인 것’ 없이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구와는 다른 한국사회 특유의 ‘사회적인 것’이 있던 것은 아닐까? 서구와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습속을 창출하는 장치들이 있던 것은 아닐까?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 88 서울올림픽대회 폐회식 야경 원경 ”, 한국정챙방송원 e영상역사관 그렇게 해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1988 서울올림픽이었다. 정상적인 삶을 창출하는 안전망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삶의 외양이 만들어지는 모멘텀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올림픽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아파트뿐만 아니라 백화점, 공원, 미술관, 공연장 등 정상적인 삶의 외양에 필요한 여러 요소를 배치하는 계기였다. 또한 그런 도시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상인지에 대한 담론이 대량으로 유통되고 정상적인 습속을 창출하기 위한 캠페인과 감시와 처벌이 일상화되는 계기였다. 이러한 도시에서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관한 드라마 <우리는 중산층>(1991)과 <말로만 중산층>(1991~1992)이 방영된 것은 올림픽 직후였다. 그랬기에 한국사회에서 ‘사회’의 탄생을 말하고자 한다면 서울올림픽을 간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책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논문에서 필자는 서울올림픽이 정상적인 삶으로서의 ‘사회’를 창출하고자 하는 수단이자, 습속에 관한 담론으로서의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정치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국가기록원,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많은 문서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잡지와 도서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하면서 서울의 골목 골목마다 남아 있는 권력의 흔적을 보여주고, 또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일상 구석구석을 통제하고자 한 권력의 강박을 보여주고자 했다. 서울올림픽을 도시와 사회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메가이벤트(mega event)로 봄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을 탈정치화시키고 우민화시키고자 올림픽을 개최했다고 하는 기존의 해석을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메가이벤트라는 프레임은 정상적인 삶과 습속을 만들어가는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에 한계를 보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 책은 존 매칼룬과 요시미 슌야 등의 공연론을 프레임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서울올림픽이라는 기획에서 마무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공연의 기획에서 커튼콜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으로 해석해 보고자 했다. 또 그 범위가 무대 제작에서부터 배우 준비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기에 ‘연출’이 아닌 ‘드라마투르기(극작법)’로서 올림픽의 준비와 상연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사진: (상) "88 서울올림픽대회 개막식(식전공개행사, 입장)( 1 , 2 )", (하) "88 서울올림픽대회 개막식 공개 행사( 1 , 2 )", 한국정챙방송원 e영상역사관 그럴 때 발견된 것은 다음과 같다. 권력을 손에 넣은 군인들이 사회 구성원들과 맺은 것은 그럴듯한 공연에 관한 계약이라는 것. 그런 군인들은 서울올림픽을 위해 전 국민을 배우로 동원했고, 관객이 될 외국인의 시선을 앞세워 서울이라는 무대를 만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무대 위에서 보여줄 것과 무대 아래 감출 것을 나누었다는 것. 올림픽 이후에는 무대가 확산되고,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연출하는 배우가 되어갔다는 것. 서울올림픽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은 군인을 대신하여 가상의 외국인과 공연 계약을 맺고 공연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 이는 외국인들에게 그럴듯한 공연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음으로써 한국사회 내 지지를 획득하는 사회적 질서로서의 88년 체제를 탄생시켰다는 것. 하지만 이런 공연 계약은 무대의 위와 아래를 나누어 사회적 갈등에 분열에 취약하다는 점. 책에는 쓰지 못했지만, ‘극장도시’라는 표현에는 필자의 개인적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필자가 거주하던 서울 관악구는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삶을 꿈꾸며 상경한 이들이 개별적으로 고군분투하는 공간이다. 서울은 결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좁기만 한 원룸이나 고시원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도시다. 이런 공간에 사는 이들이 불안과 우울을 견디는 한 가지 방법은, 한강이 되었든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되었든 집 바깥의 어딘가 그럴듯한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곳을 사진으로 남기며 자신의 삶을 전시 내지 상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럴듯한 공간의 다수는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서울은 보여줄 수 없는 내 방과 보여주고 싶은 공원, 박물관, 백화점, 미술관 사이의 대비가 분명한 도시이자 무대의 위와 아래가 명확한 도시이다. 그런 공간에서 사람들은 전시적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서울은 극장도시인 것이다. 사진: “ 서울 풍경 ”, 서울특별시 서울사랑 (문덕관) 박해남(사회학 연구자) l 계명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면서 20세기 이후 한국과 일본의 도시와 도시 속 삶들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