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2호
- 제작년도
- 1994
<히어>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인가?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런 우유부단한 답변이 엄밀한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화’와 ‘영화’라는 여타의 매체들과 복합적으로 엮여 있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분명한 현실이니 말이다. ‘만화영화’란 말이 애니메이션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에 만화영화라는 호칭이 잘 쓰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이 위협받는 지점에서 그 매체의 성질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런 반론은 오히려 애니메이션이 겪는 고유한 문제를 묵과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거친 단언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매체사적 관점에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서둘러 훑어봐야만 하겠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이 무엇인가? 여기서는 저 위대한 애니메이터 노먼 맥라렌의 (1950년대 조지 시피아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인) 정의를 일단 따르기로 하자.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그림의 예술이 아니라 그려진 움직임의 예술이다. 각 프레임 사이에 무엇이 발생했는가는 각각의 프레임상에 무엇이 존재하느냐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애니메이션은 프레임들 사이의 속임수로 눈에 보이지 않는 틈새를 교묘하게 조작하는 예술이다.” 즉 우리네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들의 운동성을 (기록하는 대신) 만들어내고 나아가 시간의 흐름을 생성하기 위한 프레임 바이 프레임의 작업이 요구되는 미적 결과물 일체를 맥라렌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기초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짚는 이 정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니 오늘날이라서 더욱 탁월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만화와 영화의 조합어가 특정 매체를 표현하는 말이 된 걸까? 아무래도 ‘만화’는 그려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초현실적인 묘사를 왕왕 보여준다는 점이 같기 때문에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의 흐름)과 운동(성)으로써 작용한다는 점, 그리고 이 작용의 주 형식이 프레임과 숏이라는 점 때문에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에서의 번역된 명칭만으로 너무 많은 걸 해석하려는 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을 테다. 하나 만화영화라는 명칭은 사실 동아시아만의 것이 아닌데, 만화를 이르는 말 중 하나인 카툰(Cartoon)은 미국에서 만화영화와 비슷한 용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당장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전문 TV 방영사인 카툰 네트워크를 떠올려 보시라. 카툰 네트워크 스튜디오 그 태동기인 1910년대에 (< 리틀 네모 >의) 윈저 맥케이나 (< 고양이 펠릭스 >의) 오토 메스머 같은 위대한 만화가들의 세례를 받으면서 (셀-)애니메이션과 카툰은 창작에 있어서든 산업에 있어서든 깊이 뒤섞이고 혼용되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애니메이션학자 찰스 솔로몬이 『마법의 드로잉: 애니메이션의 역사(Enchanted Drawings: The History of Animation)』에서 말했듯 “애니메이션은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서 그려진 카툰의 동의어”가 되었다. 다시 한 번 “그려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초현실적인 묘사를 왕왕 보여준다는 점”을 곱씹어 보자. 하지만 당연하게도, 21세기의 우리들은 애니메이션의 세부적이고 다양한 갈래를 ‘만화’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노먼 맥라렌의 추상 애니메이션, 이리 트른카의 퍼핏 애니메이션, 그리고 < 터미네이터 2 >(제임스 카메론, 1991)와 < 쥬라기 공원 >(스티븐 스필버그, 1993) 이후 컴퓨터 그래픽스의 영화적 활용을 순전히 만화와의 상관만으로 논할 수 있을까? 혹은 스탠 브래키지, 존 휘트니, 바술카 부부 등의 작업들처럼 분명 애니메이션의 성립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보이나 (후대에 나온 3D 애니메이션과 달리) 애니메이션사 서술에서 주로 누락되고 실험영화사나 영상미술사에만 등장하는 경우는 또 어떤가? 이렇듯 오늘날 광대해진 애니메이션에 있어 ‘만화’의 특권성이란 어딘가 불충분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영화학자 톰 거닝이 「순간을 애니메이션화하기: 애니메이션과 사진의 은밀한 대칭성(Animating the Instant: The Secret Symmetry between Animation and Photography)」을 비롯한 여러 연구에서 말했듯, 실사 영화의 역사와 전통적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단지 애니메이션이 좁은 의미에서 영화사의 일부인 것을 넘어) 서로 깊이 얽혀 있을뿐더러 순전히 기술의 계보로만 따지면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에 앞서서 우리네 세계에 출몰했다. 더군다나 요즈음 대부분의 대중적 실사 영화는 실사 이미지와 그래픽 이미지 사이의 디지털 합성으로 이루어진, 사실상의 부분적/비가시적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학자 수잰 부캔은 이를 ‘편재하는 애니메이션(pervasive animation)’이란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디지털 이후 영화는 근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의 특수한 일종이 되었다’라는, 미디어학자 션 커빗과 레프 마노비치의 따로 또 같은 주장은 그 도발성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이라 할 만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영화(사 서술)에 있어 렌즈 기반의 사진적 이미지가 지닌 특권성은 애니메이션을 주변화하거나 보조화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은폐된 기원이자 기둥으로서 애니메이션. (상) 원작 『여기서』(리처드 맥과이어, 2014) 중 / (하) 실사 영화 <히어> 중 (사진: " Here, 2014 ", Richard McGuire) 요컨대 애니메이션이란 범주는 ‘만화영화’로서의 요소를 강하게 지닌 동시에 이를 완전히 초과하는,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발터 벤야민)’에 처해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흥미롭게 볼 만한 작품이 있다면, 아무래도 로버트 저메키스의 근작 < 히어 >(2024)이지 않을까? 리처드 맥과이어의 급진적인 반(反)만화 『여기서』를 영화화한다는 난제를 수행하면서, 저메키스는 원작의 (드라마적 서사와 정돈된 타임라인 없이 펼쳐지는) 초월적 고정 시점과 다중 프레임 구조에 적당한 인간적 중력을 부여하려 애쓴다. 그런데 어떻게? (마구 혼재된 타임라인을 관통하기 위한) 모션 캡처와 3D 애니메이션 기술을 적극 활용해 작품을 부분적인 가족 드라마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영화는 불안정하고 과포화된 시각적 구도와 지나치게 매끈한 사물 이미지 등 그 외양에 있어 동시대 연극 같기도 하고, 제프 월이나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사진 같기도 하며, (저메키스 자신이 지난 2000년대에 천착했던) 모션 캡처 CG 애니메이션 같기도 한, 지극히 비(非)영화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달리 말해 반만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비영화 <히어>에는 애니메이션이 활용된다는 것을 숨기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그저 작품의 실패라고 쉽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저메키스에게는 ‘애니메이션다움’을 부상시키는 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을까? 우리가 지식으론 알고 있는 ‘편재하는 애니메이션’의 비가시적인 사실을 과도하리만큼 가시화하는 것 말이다. 고정된 위치에서 인간사와 자연사를 번잡하게 조망할 수 있는 초월적 시선이란 (적어도 영화 내적으로는) 애니메이션 기술을 통해서만 구현 가능하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저메키스는 그러한 시선으로 보는 세계는 인간적 지각(의 기준)과 닮기보다는 퍽 애니메이션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믿음으로 치환하여 밀어 붙여본 것이다. 이는 반만화적인 구상과 비영화적인 구성을 지탱하고 구축하는 것이 애니메이션 기술이란 사실과도 겹치며, 우리를 마지막 장면으로 끌고 간다. 기억을 더듬는 노년의 부부를 무심히 바라보다 마침내 거대하고 유려하게 움직이는 ‘영화적’ 시선. 그것의 감동은 애니메이션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사이의 내재적인 혼융이 양자의 전환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근사하게 제시한다는 데에서 온다. 다시 한 번, 이 무모한 작품은 애니메이션이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함을,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이 이중구속 속에서 제 역량을 탁월하게 발휘하기도 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기에 이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은 은총에 가깝다. 윤아랑(비평가) l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감각을 문제시하는 문화 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 『라임 앤 리즌 2호: 오컬트』(공저, 2025) 등이 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중 (사진: " 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 IMDb)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멀티버스란 컨셉트는 애니메이션에 더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요즘 다시 보고 있는 <릭 앤 모티>(2013~) 시리즈와, 며칠 전 마침내 개봉일과 티저 이미지를 공개한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2027) 때문이었다. 직접적으로 평행우주론/다중우주론을 끌어들여 흥미진진하게 소화한(혹은 그러리라 기대되는) 두 사례를 비슷한 시기에 마주쳐 함께 음미하던 도중에 문득 그럴듯한 상념들이 떠오른 것인데, 하나 이는 단지 질적인 수준에 대한 인상만은 아니었다. 물론 멀티버스 컨셉트의 유행이 불러온, 스케일만 넓어졌을 뿐 지루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실사’ 영화들의 향연이 내게 상당한 불쾌감을 주고 있기는 하다. 특히 < 데드풀과 울버린 >(숀 레비, 2024)처럼 (디즈니가 사들인 지식재산권을 이용하여) 관객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데나 급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최신작들은 도저히 참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멀티버스를 끌어들인 ‘실사’ 영화들은 이미 (배우의 존재나 문화사적 기호들이 자연스레 추동하는) 추억의 인력에 끔찍한 모양새로 잠식된 것은 아닐까? 그에 비하면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로 막을 내릴)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시리즈(Spider-Verse Animation Flim Series, 2018~)는 스파이더맨에 대한 추억을 자극하면서도 거기에 마냥 기대지 않고 (스파이더맨 파생 캐릭터들의 상이함을 유머러스하게 전면화하는 등) 창의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재밌는 기획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재밌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는,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2010)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너에게> & <너를 사랑했던 한 사람의 나에게>(2022)처럼 평행우주를 직접적으로 내세우는 경우만이 아니라 여타의 애니메이션들도 멀티버스의 성질에 대해 묘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고 말해보면 어떨까? 예컨대 <릭 앤 모티> 시즌5 2화 “Mortyplicity”에서 무수한 ‘미끼’ 가족들이 쉴 새 없이 죽고 새로 나타나길 반복하다 종국에 다 함께 서로를 찢고 베고 터트려 죽이는 광경을 보면서, 나는 ‘야, 이거 좀 <톰과 제리>(1940~) 같네’라고 문득 생각했다. 어떤 에피소드에선 죽은 듯이 묘사되거나(“The Yankee Doodle Mouse”) 정말로 죽는(“Mouse Trouble”) 톰이 다른 에피소드에선 멀쩡히 살아있는 채로 제리와 마찰을 계속 일으키는 식의 픽션적 허용이 여기서 멀티버스적 설정을 경유하여 서사적으로, 또 폭력적으로 소화되었다고 느낀 것이다. (“Mortyplicity”는 멀티버스 컨셉트를 직접 끌어들이진 않았다고 반론을 제기할 독자도 있겠다. 그러나 저 무수한 ‘미끼’ 가족들이 모두 서로 마주치지 않은 채 한 우주의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는 비약적인 극적 설정에서 멀티버스를 떠올리지 않기란 무리일 터이다) <릭 앤 모티>(2013) 중 / <톰과 제리(Mouse Trouble)>(1944) 중 (사진: 좌 , 우 _IMDb) 당연하게도 이런 픽션적 허용은 <톰과 제리>만의 것이 아니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팬덤에서 ‘사자에상 시공’이란 용어가 뿌리 깊게 박혀있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이나 통신 기기의 변화는 묘사하되 캐릭터의 나이처럼 작품의 정체성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요소는 묘사하지 않으면서 작품을 우직하게 지속하는 경향을 우리는 여러 초장편 애니메이션에서 번번이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게게게의 키타로>(1968~), < 심슨 가족 >(1989~), <크레용 신짱>(1992~), <명탐정 코난>(1996~), <네모바지 스폰지밥>(1999~)… (이에 더해 본편에 대한 평행우주로 ‘일단’ 취급되곤 하는 극장판까지 셈해보자) 계속해서 ‘갈아 치워지는’ 타겟 시청자층과, (성우의 노화, 그림체의 변화, 해상도 포맷의 변화 등을 제외한다면) 영구적으로 같은 외양의 극적 세계를 창출할 수 있다는 표현성 등 애니메이션 특유의 문제계가 여기에 큰 몫을 한다. 이런 경향은 누적된 에피소드들 사이에 중대한 모순을 야기하면서 절대 해소하지는 않기 때문에 종종 몹시 기묘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한때 국내에서 유행했던 ‘짱구 자폐증 괴담’은 이런 기묘함을 음모론으로 확장한 결과였을 게다), 이 느낌은 멀티버스를 직면할 때의 (가정된) 당혹감과 어느 정도 유사할 것이다. 컨셉트로서 멀티버스와 애니메이션 사이의 친연성은 좀 더 있다. 스파이더맨을 구심점 삼은 멀티버스 영화들인 ‘실사’ <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존 왓츠, 2022)과 애니메이션 <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호아킴 도스 산토스 외 2인, 2023)를 비교해보면 확실해지는데, 전자에 (지금껏 실사 영화화된)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적어도 외양에 있어선) 이물감 없이 매끄럽게 등장하는 반면 후자에는 (코믹스에만 등장했던 이들을 포함하여) 무수한 스파이더맨과 그들 각자의 우주가 (그웬의 우주에서 배경이 물감 텍스쳐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서로에 대한 이물감을 드러낸 채로 제시 및 교차된다. 멀티버스가 단지 ‘여기가 아닌 우주들’이 아니라 ‘여기와 다른 우주들’을 지시하는 낱말임을 떠올린다면, ‘실제적인 것’을 충족해야 하는 제약이 상대적으로 덜 해 상이한 질감의 캐릭터와 사물이 하나의 장면/작품에서 불통합적으로 조화를 이루기에 수월한 장(場)인 후자의 애니메이션이, 멀티버스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친연성을 갖는다 해도 무리는 아닐 터이다. 예컨대 2D 애니메이션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기괴하게 공존시킨 < 내 주머니 속의 돌들 >(시그네 바우만, 2014)은 명시적으론 멀티버스와 어떤 관계도 없으나, 서로 다른 질감의 존재들을 병립시키고 나아가 충돌시켜 이따금 (그 질감이 지시하는) 우주들의 경계가 뒤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상)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중 세 명의 스파이더맨 /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중 물감 텍스쳐로 나타난 그웬과 그의 아버지 (사진: 좌 , 우 _IMDb) (하) 2D와 스톱 모션의 연출이 공존하는 <내 주머니 속의 돌들> (사진: " ROCKS IN MY POCKET Official Trailer ", 유튜브 Signe Baumane) 하지만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멀티버스가 애니메이션에 더 어울린다고 해서 ‘실사’ 멀티버스 영화가 무용하다고까지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데이빗 린치, 페드로 코스타, 홍상수 , 웨스 앤더슨,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같은 우리 시대의 영화작가들은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의식하진 않았더라도) 각자의 방식으로 멀티버스적인 존재론적 혼란을 강렬하게 육화하지 않았던가? 친연성과 탁월함은 통일된 개념이 아니다. 다만 이 자리에선 이런 친연성이 컨셉트로서 멀티버스에 대한 애니메이션의 잠재력으로 향할 수 있음을 논하고자 하였다. 그 점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건 <팝 팀 에픽> 1기(2018)이다. 동일한 시각적 이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성우들이 상이한 연기(여기에는 호흡은 물론 대사 애드리브도 포함되어 있다)를 펼친 후 이를 본방송과 재방송 구도로 함께 뻔뻔하게 제시한, 방법론의 차원에서 은근하고도 흥미진진하게 멀티버스를 소화했던 이 애니메이션은 갑작스레 마지막 화에서 (시간 여행 설정을 통해) 멀티버스를 가시적으로 끌어들인다. 작품의 방법론이 지닌 힘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작품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조바심의 발로였을까.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논한 애니메이션의 친연성/잠재력이 <팝 팀 에픽>에서 과도할 정도로 ‘잘’ 양식화되었다는 사실뿐이다. <팝 팀 에픽>(2018) 중 (사진: " Poputepipikku ", IMDb) 윤아랑(비평가) l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감각을 문제시하는 문화 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 등이 있다.
그림1.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프로덕션과정이 가녹음→촬영→가편집→합성→종합편집 등의 과정으로 이어지며 에피소드당 4주 정도 소요된다. ⓒCentral animation studios 프로덕션 과정이란 흔히 본격적인 제작 기간을 말한다. 프리 과정이 우여곡절 끝에 잘 진행되었다면, 제작과정은 그야말로 순조롭게 잘 진행될 수도 있다. 많은 제작사가 프리프로덕션 과정에 많은 공을 들이는 이유도 본격적인 제작 과정인 프로덕션 기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돌발적인 변수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는 각 제작사의 PD나, 제작 담당들의 업무가 눈에 띄게 많아지는데, 제작일정, 인력 분배, 신규인원 채용, 외주 진행, 예산, 기타 행정 업무들이 모두 이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프로덕션 과정에 들어서면 제작팀 전반의 업무가 상대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로 보자면,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진행된 시나리오-디자인-콘티-애니메틱의 검토가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제작에 들어가게 되면서, 감독은 시리즈 연출에 대한 전반적인 과정을 담당하며, 미술 감독과 촬영 감독, 그리고 애니메이션 감독들은 각각의 제작 공정에 대한 책임을 담당하고 진행하게 된다. PD들은 제작과정 전반에 대한 행정관리, 인사관리, 예산관리, 일정관리 등을 담당하고, 수시로 발생하는 일정 변동과 마감관리를 진행한다. 각각의 회사와 제작되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국내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11~15분 분량의 26부작 작품의 경우 제작 기간을 거의 1년 정도로 상정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보통의 제작 지원 사업이 약 1년 6개월 정도의 기간이며, 배급과 관련된 다양한 상황, 방송국 일정, 그리고 투자사 등의 판단 여부 등이 주요하다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작사 입장에서도 제작 기간이 길어지면 당연히 제작비가 인상되기 때문에 제작기간을 합리적으로 구성해야 하는 지점이 제일 크다. 따라서 프로덕션 과정에 있어서 많은 갈등 부분은 작품 제작의 일정과 작품의 퀄리티 컨트롤에 있다. 물론 다른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 하에 말이다. 하지만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제작 과정은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그렇게 녹록치 않다. 일반적인 TV 시리즈의 프로덕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애니메틱을 바탕으로 씬 및 쇼트, 분리된 각각의 영상들이 애니메이터에게 전달된다. 이는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제작의 기초 단위로, 움직임을 만들기 위한 영상이며 움직임의 궤적, 시간, 대사 등이 포함되는 일종의 에피소드별 제작 설계도이기도 하다. 애니메이터는 이를 바탕으로 할당받은 분량을 점검하고 매일 매일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만들어진 쇼트 단위 또는 씬 단위의 영상들은 애니메이션 감독에 의해 ‘재작업’ 또는 ‘통과’ 결정이 내려지고, ‘통과’ 딱지가 붙은 분량은 촬영팀으로 보내진다. CG로 진행되는 경우는 씬 단위 전체를 각 단위에서 마무리 짓기도 한다. 스톱모션의 경우에는 촬영과 애니메이팅이 동시에 이뤄지며, 이 과정이 끝난 이후 필요에 의해 후반 CG 팀으로 넘겨진다. 일반적으로 감독은 이 과정에서 가편집을 통해 앞뒤 장면의 완성도나 움직임의 훅업, 감정이나 톤의 흐름을 파악하고 전체적인 편집 타이밍을 점검하기도 한다. 이후 CG 실로 넘어간 작업물에는 이후 컴포지팅과 같은 합성 작업이 이뤄지고, 별도의 이펙트 과정이 들어가기도 한다. 물론 이 작업 이후에는 성우더빙, 사운드 디자인, 효과음 등등의 기간도 진행된다. 제작 기간을 1년으로 잡는다는 것은, (간단하게 계산해서) 프로덕션 과정 만으로만 본다고 하면 한 달에 두 편 정도의 분량, 즉 한 달에 23분 정도의 촬영본 또는 영상본이 나와야 일정에 문제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이는 수치 만으로만 그러하고 실제로는 한 달에 30분 이상의 분량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게다가 방영 일자가 정해지는 방식에 자비가 없다 보니, 프로덕션의 과정은 더욱 힘이 든다. 말하자면 TV 애니메이션의 경우도 100% 사전 제작이 없다. 흔히들 많으면 (26부작 중) 8편에서 10편, 적을 경우는 4편을 사전제작하고 방영에 들어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17년 하반기인 9월에 방영이 시작되는 TV 시리즈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제작사가 8편의 작품을 사전에 만들어 두고 매주 한편씩 방영을 한다고 하면, 보통 4개월이 지난 12월 말 정도가 되면 제작 속도와 방영 속도가 거의 비슷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말하자면 에피소드 16편 정도가 방영되고 나면, 제작사는 제작 일정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한 편의 시리즈 에피소드 제작 과정을 4~6주 정도로 보는데, 각 공정별로 2주 정도씩 구분하고, 업무를 연달아서 작업하게 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풀 3D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블라킹-애니메이팅-조명/FX렌더링-합성을 6주 정도 사이클로, 2D애니메이션은 레이아웃-원화-동화-촬영-합성 등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촬영-가편집-합성-FX과정을 6주 동안에 반복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각 에피소드의 제작 과정은 1편이 완성되는 6주 동안 다른 두 편이 동시에 맞물려 진행되어야 방영일정을 소화해 낼 수 있다. 당연히 모든 과정이 유기적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만약 하나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 모든 일정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에 일어난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 모든 제작과정에는 일정이든, 퀄리티든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프리프로덕션을 공고하게 하는 이유도 이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일까? 가끔 업계의 선배들의 이야기처럼 전설 같은 해결사(문제가 생긴 작화와 동화를 불과 며칠 만에 해결해 버린다든지 뭐 그런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가 등장하거나, 외주 특공대들을 이용한다든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일은 부끄럽지만, 야근이다. 많은 업계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야근이 부지기수다. 영상 관련 종사자들의 거의 모두가 이런 경험이 있는데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는 프로듀서의 잘못이며, 일정 계산의 착오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가끔 방송에서 지난 시리즈들의 이야기를 함께 묶어 방영하는 에피소드, 보통 총집편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방영된다면 사고가 난 것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우리는 야심이 있었다. 장난감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TV 애니메이션의 현재를 쫓는 포기와 무성의를 벗어나고자, 건물은 허술했지만 스튜디오의 젊은 스태프는 우리의 의욕에 답하며 힘을 모아 주었다. 비상 걸린 1년이 시작되고 우리는 맹렬히 일했다. 수면 부족과 과로, 너무 긴장해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중략) 몸이 많이 망가졌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그걸 격려로 버티며 일을 끝냈다. (중략) 텔레비전의 무서움을 조금은 알게 된 것은 그때부터다. 반복해서 같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텔레비전이었다. 뭐든지 일상화는 탐욕. 비상사태를 일상으로 요구받으며 알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TV시리즈」, 「아사히신문」 1987년 9월 21일 자에서 부분 인용 오래된 이야기지만, 미야자키의 고백(?)에도 언급된 것처럼 ‘비상 걸린 1년’은 지금 2017년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업계로 진출하고 있는 젊은 대표님들과 사장님들도 모두 이러한 상황을 겪어 왔기 때문에 무리한 일정과 비정상적인 과정을 타파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점점 이런 관행(?)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현실성 있는 일정이, 또는 회사의 규모에 맞는 작품과 일정을 선택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작은 스튜디오가 지속적으로 인력을 유지하고 다른 프로젝트로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스튜디오도 지난 3년 동안 공식적인 야근이 없었다. 아니 한 일주일 정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야근을 하게 된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보존을 해드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업계의 모든 스태프, 아티스트 분들에게 건강과 안녕을...) 그림2. 제작과정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트 양식. 이는 2D, 3D, 스톱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보통 제작 과정에서 전달되어야 하는 상황들과 진행사항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각 에피소드 마다 씬 단위로 의견과 전달사항, 진행과정등이 담긴다. 이어서 후반 작업이다. 제작되는 방식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후반 작업은 사운드, 성우녹음, 사운드 디자인, 그리고 납품과정까지 포함된다고 보면 된다. 에피소드 하나당 6주 정도의 사이클을 겹쳐서 진행된다고 본다면, 후반 음악 과정은 2~4주 정도로 소요된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성우들의 녹음은 2주에 2~4편을 묶어서 진행하는데,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경우에는 방송 1~2주 전에 심의를 진행해야 하므로 방송 일정 최소 한 달 전에 진행한다. 우리같이 작은 스튜디오의 경우 초기 몇 편 정도는 감독이 함께 녹음 과정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녹음 스튜디오에서 별도의 녹음 연출자의 책임 하에 진행된다. 음악의 경우는 보통 녹음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곳의 소속 작곡자나 대표가 진행한다. 주제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외 캐릭터마다 테마곡들이 존재하는데, 시리즈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음악의 경우는 20곡부터 많게는 40여 곡에 이른다. 많은 녹음 스튜디오들이 평소에 다양한 분위기의 음악을 제작해 두고, 애니메이션 감독과 작곡가가 에피소드의 톤을 확인하면서 음악을 선정한다. 성우 녹음과 음악, 그리고 효과음 등의 작업이 완료되면, 마지막으로 감독의 종합 검토가 이뤄진다. 감독은 최종적으로 취합한 영상과 사운드들을 점검하고, 종합 편집을 진행하는데, 이때 마지막 편집이 진행되거나, 재촬영 또는 재녹음 등이 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일정 문제 때문에 간단하게 넘긴다. 왜냐면 방송 심의에서 수정 사항을 요구하거나 불가 판정 등이 오기 때문이다. 특히 5세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특히 조심해야 하는데, 대사나 행동, 묘사되는 캐릭터 등에 불필요한 요소가 있을 경우는 문제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심의에서 별다른 지적이 없으면, 이제는 방송이다. 공중파에서 에피소드 1편이 방송될 때는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하지만 마음에 남는 순간은 마지막 에피소드가 방영될 때이다.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작하는 작품은 방송에서 보기 힘들다. 시간도 없고, 이미 너무나 많이 봤고, 그리고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편은 가능하면 다 함께 본다. 많은 아쉬움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자본, 시간, 일정, 능력, 마니아 또는 오타쿠, 노동, 열정, 정당한 대가라는 단어들이 그 마지막 편이 방영될 때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마지막 편이 방영되면, 프로젝트의 종료를 알리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이 떠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도 한다. 매번 에피소드에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이지만, 그거 하나 믿고 덤벼들었던 사람들이다. 사람은 바뀌어도 작품에 참여했던 분들의 이름은 같이 간다. 말은 안 해도 스태프들은 방송 마지막에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에서 자기 이름만은 크게 보고 빨리 발견한다. 부모님들이나, 친구, 친척, 할머니들에게도 보여준다. 그게 ‘1년 동안의 비상사태’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른다. 눈물겨운 보상이다. 하지만 진짜 보상을 해줘야 한다. 그들의 열정이 허비되지 않도록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도록 말이다. 짧은 기간 동안 짧은 지면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애니메이션 만들기”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하였는데, 어느새 마지막이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하였는데, 무게감과 중압감이 장난이 아니게 다가왔다. 글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고, 탈고도 하지 못한 글들이었다. 이글도 아마도 탈고조차 못 할 듯. 그러나 아직 풀지 못한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많다. 한국 애니메이션이라는 시장의 현실도 냉정하게 보여주지 못했고, 스태프들의 인건비 문제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하지만 또 언젠가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본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시간이 부족하다. 우리도 다음 에피소드를 준비해야 하고, 다음 프로젝트를 또 준비해야 한다. 이 기간이 보릿고개라 스태프들의 고용유지를 위한 방안도 준비해야 하고, 은행 대출도 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프로젝트의 앤딩 크레디트를 볼 수 있으니까. 다들 파이팅이다. 스태프들, 아티스트 분들, 해결사분들, 그리고 대표님들. 그리고 애니메이션 마니아 분들 모두. 우린 또다시 ‘1년 동안의 비상사태’를 준비하며, 좀 더 좋아질 거라는 믿음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