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돼지 베이브
- 감독
- 크리스 누난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크리스틴 카바노프, 미리암 마고리스, 휴고 위빙, 대니 만, 마그다 즈밴스키, 제임스 크롬웰
1. 1973년 3월 31일자 중앙일보의 파리 특파원이 쓴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은 울분에 찬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다. “한국에서 로케 촬영한 <당수태권도>란 영화가 <변증법은 벽돌장을 깨뜨릴 수 있는가>라는 선전 문귀와 함께 완전한 공산주의 계급투쟁을 위한 영화로 둔갑, 파리에서 상영되고 있어 자유민주주의 한국이라는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다.” 이 성실한 특파원은 그저 소문만 듣고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직접 영화를 보고(“<당수태권도>의 토키가 중국어이기 때문에 원래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 영화에 대한 관련 평들을 찾아보고(“‘역사적 계급투쟁의 전위이다’라는 유력지 르몽드의 평까지 받았다”) 제작자까지 꼼꼼히 살펴본 후(“이 작품은 비공산계인 Ngay Hong에 의해서 제작된 영화이다”)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프랑스의 많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무조건 공산주의 선전물”로 받아들이게 했는지에 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문제의 묘는 상황의식을 가한 자막의 번역이 이 비공산주의 영화에 색채를 바꾸게 한 데 있다. 즉 완전히 자막 번역을 임의로 해 관중을 오도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또한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막을 달아 이곳에서 상영중인 이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들이 등장하고 특히 우리의 자랑인 태권도를 삼고 있다는 데 큰 문제점이 있다.” 1) ‘우리의 자랑인 태권도’를 내세운 공산주의 선전영화라니! 『중앙일보』의 보도 직후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경찰서, 문공부가 일제히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후속 기사에 따르면 진상은 다음과 같다. 문공부에 따르면 이 영화는 “합작영화가 아닌 순수한 우리나라 영화” < 정도 >인데, <정도>의 제작사 한진흥업은 제작에 앞서 홍콩의 장강영화사에 이 영화를 수출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여기에는 동남아지역상영권 양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수출신고절차를 밟기 전에 한진에서 장강으로 필름을 보냈고, 장강이 <당수태권도>라는 제목의 중국어 더빙 버전을 프랑스의 ‘계급투쟁촉진회’에 이중수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심각한 ‘오용’은 장강이라는 홍콩 영화사의 농간의 결과인가? 마침 영상자료원에는 이 영화 <정도>의 검열서류가 남아있다. 이 서류들에는 영화제작신고서, 진홍열, 백표(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진호 세 명의 홍콩배우들이 출연을 요청하는 국산극영화 외국배우 출연 승인 신청서와 장강과의 매도계약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매도계약서에 따르면 한진흥업과 장강영화사 사이의 계약은 1972년 2월 27일에 이루어졌다. 영화제작신고서는 이 영화의 제작기간이 1972년 10월 10일부터 1973년 1월 30일까지라고 명기하고 있다. <정도>는 1972년 12월 22일 문공부로부터 검열승인을 받고, 1973년 5월 12일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그런데 홍콩 필름아카이브에 따르면 <당수태권도>가 홍콩에서 개봉한 것은 이보다 만 1년 가까이 앞선 1972년 6월 20일이다. 이 검열 서류는 극히 의심스럽다. 만약 홍콩 필름 아카이브의 기록이 맞는다면 한진은 이미 존재하는 영화의 허위 제작 신고를 한 셈이다. 덧붙이자면 <정도>의 감독은 강유신, 오리지날 시나리오 및 심의대본의 작가는 유일수이다. 홍콩영화 <당수태권도>의 감독은 도광계(屠光啟), 시나리오는 예광(倪匡)이다. 강유신은 한진흥업의 전신인 대양영화사의 < 낙조 >(1968)로 감독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도>는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감독 작품이다. 1930년대말 상하이 시기부터 영화를 찍은 도광계는 1950년대 홍콩 우파 내셔날리스트를 대표하는 감독이었으며, 이후 쇼브라더스 전속으로 활약한 관록의 베테랑이다. 2) 1960년대 중후반 신필름 영화들의 각본을 담당했던 시나리오 작가 유일수는 이 시기 ‘용팔이’ 시리즈로 박노식이 그의 독특한 스타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는데 공조하고 있었다.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獨臂刀 >(장철, 1967)의 작가로 시나리오 경력을 시작한 예광은 < 보표 保鏢 > < 철수무정 鐵手無情 > <십삼태보 十三太保> < 복수 報仇 > 등 이 시기 장철 영화의 가장 중요한 공헌자이자, 홍콩영화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필과 다작의 스타 작가였다.(그는 이소룡의 < 정무문 > 각본에도 참여하였다.) 이쯤에서 당신은 물을 것이다. 그럼 대체 <정도>/<당수태권도>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만들었다는 말인가? 적어도 서식의 완비라는 관료들의 꿈과 장사꾼의 야합이 만들어낸 저 서류들 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무망해 보인다. 진정한 ‘위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 서류 양식들 안에서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정도>/<당수태권도>는 1970년대 한국-홍콩, 한국-대만 여타 등지에서 횡행했던 ‘합작’의 전형적인 형태에 다름 아니다. 이 결합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아열대 기후의 홍콩은 가을과 겨울이 포착가능하며 오래된 중국적 풍경을 대체할 수 있는 장소가(고궁과 절) 있는 한국에서의 야외 촬영을 선호했으며, 스튜디오 촬영은 홍콩 쪽에서 담당하였다. 각자의 인건비와 상호 체류비를 담당하되 한국 내 배급권은 한국 회사가, 그 외 지역의 배급권은 광대한 화교 문화권 전역에 배급망을 연결해놓은 홍콩 회사에 귀속되었다. 크레딧, 특히 영화의 주요 창작 주체로 상정되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은 각각의 지역 버전에 따라 그곳의 관객들이 선호하거나 익숙한 이름만을 남기고 그 외의 이름들은 지웠다. 무엇보다 한국 같은 강력한 국가통제와 외화 유출 억제가 영화 정책의 이름으로 자행되던 장소에서 한국인 감독(제작자,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을 단 합작영화란 국내법과 산업적 재생산 모두를 충족시키는 기획이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복수의 기원의 영화가 발생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진정 <정도>/<당수태권도>의 사례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에 이미 내재된 포스트프로덕션적 탄력성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이 영화(들)는 이 부류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서로 다른 편집의, 서로 다른 더빙 버전으로 각각의 영화가 상영되는 지역의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하였다. 당시 후시녹음은 다양한 언어권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했던 홍콩 영화산업의 중요한 관행이었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 후시녹음의 탄탄한 스킬을 갖추고 있는 나라 중 하나였다. 여기서부터 더 확장된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더빙까지의 거리는 한 끝 차이다. 즉, <정도>/<당수태권도>는 조금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 부류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서로 다른 편집의, 서로 다른 더빙 버전으로 각각의 영화가 상영되는 지역의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영화(들)은 무수한 전용 가능성을 향해 이미 열려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전용 가능성이란 소비되는 지역에 따른 더 적절한 상품으로의 교체 가능성에 지나지 않지만. 2.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막”(이를테면 “착취당하는 자를 위해서는 건배를, 착취하는 자에게는 절멸을”과 같은 자막을 본 1973년의 파리 특파원이 느꼈을 기함을 한번 상상해보라)으로 점철된 르네 비에네의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한국인과 중국인 대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공분을 국가-자본주의의 앞잡이인 관료들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의 항거라는 계급적 대립으로 옮겨온다. 이 “이 최초의 전적인 전용영화”는 1967년 비에네가 『인터내셔날 상황주의자 제11호』에 기고한 「상황주의자들과 정치 및 예술에 반대하는 새로운 행동형태」 3) 라는 글에서 제시한 방법론의 현실태로 등장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전 세기의 혁명투쟁에서 이어받은 형식과 카테고리를 사용하여 체제 전복활동에 힘써왔다. 나는 과거로부터의 어떤 준거도 갖지 않는 수단을 통해 우리들의 이의 제기에 관한 표현을 완성할 것을 제안한다”는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선동적인 글에서 비에네는 ”스펙타클의 명제 그 자체를 전용(détournement)”할 것을 주장한다. 스펙타클 사회에 대항하는 실천이 그 자체로 스펙타클이 되어간다면, 여기에 회수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스펙타클의 미디어를 전용할 것. 전용의 대상으로 적절한 것은 포트로망과 포르노 사진, 대중잡지, 코믹스, 그리고 예술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업영화와 같은 것들이다. “특히 상업영화를 우리의 것으로 하자.” 르네 비에네는 자신이 공언한 바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이어서 이시이 테루오의 <불량누님전>과 스즈키 노리부미의 <공포여학교>를 전용한 <카마레로부터 온 여자들 Girl from Kamare>(1974)이라는 또 한편의 ‘전용’ 영화를 만들었다. 1970년대 초 일본의 도에이 영화사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섹스와 폭력의 결합태로서 소위 ‘포르노 액션’으로 불리웠던 이 영화들은 노골적인 여성 신체의 전시와 착취, 그리고 젠더적 불안까지를 겸비한 포스트 68적 일본 대중문화의 급진성을 입증하는 실례였으며 또한 전세계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 시장의 중요한 공급물로 기능하였다. 즉, 이 영화들 역시 이 시장에서 빈번히 이루어졌던 바, <정도>/<당수태권도>와 마찬가지로 상영장소와 형태에 따른 부단히 탄력적인 대응이 강제되었으며 더빙과 재편집에 자유로웠다. 즉 전세계 대중들에게 가장 싸게 공급되는 염가의 상품으로서 이 영화들은 도작과 도용의 가능성에 활짝 열려 있었다. 르네 비에네는 이 두 번째 전용영화를 통해 국가와 시장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전복을 꾀하였다. 말하자면 이 상황주의자의 실천은 1970년대적인 의미연관은 차치하고라도 상품으로서 어떻게 상품에 대항할 수 있는가, 혹은 상황주의자의 어법을 따라하자면 스펙터클로서 어떻게 스펙터클에 저항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동어반복이지만 영화가 전적으로 ‘상품’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상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를테면 <정도>/<당수태권도> 같은 영화를 두고 국가적 귀속을 혹은 오리지날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보인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영화를 보는 자들은 이 귀속의 문제에 거의 무감하기 때문이다. 누가 상품을 만든 자를, 상품의 국적을 따지겠는가?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왜 1970년대 한국에서 이와 같은 영화들이 그토록 유독한 저질영화로 자리매김되었는지, 또는 (거개가 골계로 끝나버렸지만) ‘태권도’라는 국가적 기표를 덧씌우는데 그토록 희화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지가 아닌 담론적 차원에서) 매달렸는지를 해명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이 영화들은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고급 산물들의 반대편에 놓인 가장 싼 상품으로서, 싼 값에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 자본가들에 의해 잘라지고 이어붙여지는 것을 대가로, 이 지역 영화 중 최초로 말 그대로 글로벌한 이미지-상품으로 소비되었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비 속에서 이 영화들은 상품의 형태를 얻고 비로소 세계성의 획득에 성공하였다고. 이 싸구려 상품은 고급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염가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들, 전세계의 하위계급자들이 향유하는 이미지-상품으로 기능하였다. 아마도 20세기 영화의 위계 중에서 가장 최하위에 위치해 있을 이 영화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한 열정과 분노, 그리고 장사꾼들의 잇속(과 1970년대 한국이라는 저 유신 시대가 낳은 기괴한 이미지의 유통)으로 형성된 기이한 야합의 산물인 이 이미지-상품은 말하자면 ‘빈곤한 이미지’(히토 슈타이얼)의 영화적 전신이며, <벽돌은 변증법을 깰 수 있는가>라는 상황주의자의 실천은 그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혹은 상황주의의 시효와도 상관없이 무한한 도작과 도용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의 가능성으로 읽혀져야 한다. 3. 2000년대 이후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를 한국어로 처음 소개한 글은 2004년 4월 『씨네21』에 실린 아드리앙 공보의 「영화의 유용? 그 위험한 변신」이다. 4) 유운성은 아드리앙 공보가 전용의 ‘원본’으로 제시한 <당수태권도 唐手跆拳道>와 <정도 正道>의 관계를 밝혔다. 5) 또, 이 글을 보완, 확장한 글(「전용의 계보: 당수태권도는 변증법의 정도(正道)일 수 있는가?」 6) 에서 유운성은 이 영화의 ‘혼란스러운’ 창작주체에 관한 추측을 <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비교 및 <정도>의 심의대본과 오리지날 시나리오의 비교를 통하여 꼼꼼하게 수행한 바 있다. 7) 특히 상황주의자들의 실천에 관한 포괄적인 논의를 전개해가는 멕켄지 와크는 프랑스 마오이즘과 중국학 연구자 르네 비에네 사이의 긴장, 그의 두 편의 ‘전용’ 영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와 <카마레로부터 온 여자들 Girl from Kamare>(1974)을 논하는 데 책의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한편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68혁명과 영화’라는 주제하에 상영된 바 있으며, 2019년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당수태권도>는 worldcinemacentral.com이 운영하는 유투브 채널 Wu Tang Collecti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8) 르네 비에네의 ‘전용’ 영화들은 우부웹(UbuWeb)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토 슈타이얼은 에세이 영화 <11월>에서 그녀의 매혹적인 개념 ‘빈곤한 이미지’와 ‘여행하는 이미지’를 전개해나가면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를 인용해오고 있다. 또한 당신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한국어 자막 버전과 중국어 자막 버전을 각각 유투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자막은 물론 어떤 한국어 화자와 어떤 중국어 화자의 노고 덕택이다.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은 계속된다. *** 1) 주섭일, 「프랑스서 공산주의 선전영화로 둔갑한 합작 무협영화」, 『중앙일보』, 1973.3.31 2) 국공내전의 와중에 홍콩으로 이주해온 도광계는 특히 1950년대 홍콩에서 1930년대의 상하이 좌파 영화들을 우파 영화로 ‘전용’해오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경력을 생각한다면 프랑스에서의 <당수태권도>의 운명에는 명확한 시적 정의가 있다.” Morris, Meaghan. “Transnational Imagination in Action Cinema: Hong Kong and the making of a global popular culture,”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5, No. 2, 2004. 도광계는 1957년에 만들어진 한국/홍콩의 첫 번째 칼라 합작영화 <이국정원>에 전창근, 와카스기 미츠오와 함께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당수태권도>는 그가 감독 크레딧에 올라 있는 마지막 영화이다. 3) Viénet, René. “The Situationists and New Forms of Action Against Politics and Art”,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No.11, October 1967. 이 글을 포함한 상황주의자들의 글은Situationist International Online(https://www.cddc.vt.edu/sionline/si/against.html)에서 읽을 수 있다. 4)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23961 5) 「<정도 正道>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가 된 사연」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17/10/causerie.html 6)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19/01/blog-post.html 7) 그 외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관한 영어 문헌으로는 다음을 참조. Wark, McKenzie. The Spectacle of Disintegration: Situationist Passages out of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Verso, 2013. 프랑스어 자막을 입힌 이 독특한 전용의 형태에 대해서는 Shochat, Ella and Stam, Robert. “The Cinema After Babel: Language, Difference, Power”, Screen, vol.26 no.2, 1985. 8) https://www.youtube.com/watch?v=ZmM2-SZV3Rs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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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영화의 정수는 '키스'가 아니라 '달리기' TV에서는 핑클이 캠핑을 다녔다. 유튜브에서는 1990년대의 <SBS 인기가요>가 24시간 스트리밍됐다. <핑클클럽>과 <SBS 인기가요> 모두 그때의 기억을 소환시켰다. 논산 연무대에서 출발해 부대로 향하는 기차 속에서 처음 들었던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떠올랐고, 과거 <SBS 인기가요>에서 노래를 소개하며 ‘네~!’를 유행어로 만든 장정진 성우도 기억났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고 역시 1990년대를 그린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도 같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1994년부터 2005년까지, IMF를 지나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다룬 이 영화가 소환한 건, 잊혀진 기억이 아니라 잠시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언뜻 < 유열의 음악앨범 >( 정지우 , 2019)은 < 건축학개론 >( 이용주 , 2011)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다를 게 없어보이는 영화다. 과거의 사랑방식을 재현하면서 그때의 대중음악으로 기억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건축학개론>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응답하라> 시리즈가 HOT와 서태지를 활용했던 것처럼 <유열의 음악앨범>도 그때의 유행가들을 곳곳에 배치한다. 모자이크의 <자유시대>, 핑클의 <영원한 사랑>, 윤상이 부르고 토이 앨범에 수록했던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신승훈의 <오늘 같은 창밖이 좋아> 등등. 그때 이 음악을 들었던 관객들이라면, 반가워할 수밖에 없는 노래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그들과 달리 ‘그땐 그랬지’란 그리움의 시선이 없다. 예를 들어 PC통신을 통해 소통하는 장면은 <응답하라 1997>에 나왔고, <건축학개론>에는 하드 용량 1기가의 펜티엄 컴퓨터가 나온다. 이 작품들에서 그때의 컴퓨터와 PC통신은 어디까지나 그때를 재현하는 소품이다. 하지만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주인공 미수가 PC통신을 이용해 현우에게 메일을 쓰는 상황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그리운 사람과 그렇게 소통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자체다. 여러 장면에서 소환되는 음악들이 일으키는 효과도 현재형으로 쓰인다. 음악들은 인물들이 직접 좋아하는 노래들로 나타나지 않고, 인물들이 영화 속 현재에서 느끼는 감정을 실어내보내는 역할을 맡는다. 드디어 다시 소통하게 된 미수와 현우의 감정을 ‘영원한 사랑’으로 표현한 연출이 대표적이다. 설렘을 증폭시키기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그땐 그랬지’란 태도도 없지만, ‘그때가 좋았지’란 입장도 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인생에서 20대를 보낸 그때는 가장 아프고 추웠던 시절이다. 현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죄책감을 갖고 있고,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워 한다. 미수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위치해 있는 공간에도 애써 로맨틱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낡고 허름한 빵집은 그 자체로 따뜻한 공기를 뿜지만 이후 현우와 미수가 사는 공간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우는 컨테이너로 가득한 곳에서 무거운 짐들을 옮기며 살고, 미수는 제본공장 바로 옆에 붙은 사무실에서 소음을 견디며 일한다. 녹슨 철제 컨테이너와 기계, 소음으로 가득한 이 풍경들은 이 영화가 그 시대를 현재로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강하게 드러낸다.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지 않는 <유열의 음악앨범>이 그럼에도 1990년대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가 필요로 한 건, 쉽게 소통할 수 없어서 우연에 기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더 절실해질 수 밖에 없는 시대다. 이야기는 두 남녀가 만났다가 멀어지고, 또 우연히 다시 만나고, 또 다시 멀어지는 걸 반복하지만 이런 흐름이 긴장감을 일으키는 이유도 시대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현우가 차를 타고 가버리는 미수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감정의 밀도가 높다. 지금 놓치면 또 언제 진심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유열의 음악앨범>은 이 달리기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핸드폰도 없고, 당연히 스마트폰도 없고, 그래서 소셜미디어도 없는 시대의 남녀는 서로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헤매고 뛰어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멜로영화의 정수는, 키스보다 달리기에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달릴 필요가 없는 시대. <유열의 음악앨범>의 감정적 울림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인상적으로 꼽힌 장면들이 있다. 그 중 판문점 경계선에서 남북 정상의 월경(越境)은 큰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호 “오늘의 뉴우스”에서는 지난 몇 주간 세계뉴스에서 가장 주목 받은 판문점이 과거 뉴스영상 속에서는 어떠한 풍경으로 그려졌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코리안뉴스> 타이틀 현재까지 수집된 기록영상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한국전쟁 관련 영상이다. 국내 제작 뉴스영상은 물론이고 이 시기 생산된 해외 뉴스를 비롯한 기록영상에서 제작 국가를 불문하고 1순위를 차지하는 소재는 한국전쟁일 것이다. 그만큼 한국전쟁은 냉전의 시작을 전 세계에 알리는 프로파간다의 첨병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 시기 기록영상에는 전쟁 발발의 원인부터 전선 상황, 정전협정까지 한국전쟁과 관련한 다양한 ‘소식’이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1951년 7월 10일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조인에 이르기까지 무려 2년 동안 진행된 정전협상은 판문점과 비무장지대가 뉴스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협상이 이루어지는 장소의 특성상 판문점은 주로 적과 적이 코앞에서 대면하는 장소로 긴장감 있게 연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곳은 비무장지대라는 특성상 한반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참화는 마치 다른 세계의 일인 양 일상적이고 평안한 장소로 그려지기도 했다. 여기에서는 미 공보원(USIS)이 제작한 <코리안뉴스>에 삽입된 세 개의 장면을 통해 널리 알려진 판문점 협상 장면 이외의 모습들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살펴보려 한다. 1951년 12월 판문점에서의 소년 포로 석방과 귀환 첫 번째 장면은 1951년 11월 발행된 <코리안뉴스 제476호>의 ‘한국에 관한 소식’에 등장하는 어린 포로의 석방 모습이다. 이 뉴스는 북한군에 구류되었던 11살 소년이 판문점에서 유엔군 손으로 넘겨져 가족과 상봉하는 모습을 전한다. 판문점 인근에 주거하며 먹을 것을 찾아다니던 소년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유엔군 정전대표단의 교섭으로 풀려난다. 소년은 한국군, 미군과 함께 ‘다리 하나를 건너’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다. 1분 남짓한 짧은 영상에 전쟁으로 달라진 거주민의 일상과 남북한의 경계 역할을 하는 판문점의 모습이 모두 담겨 있다. 가건물도 아닌 야전용 천막이 들어선 판문점에서 미군의 옷을 걸치고 순진무구하게 웃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당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전쟁의 모습을 대변한다. 1951년 12월 판문점 회담장의 풍경 두 번째 장면은 1951년 12월 발행된 <코리안뉴스 제479호>의 정전 협상 뉴스 속에 등장하는 판문점의 모습이다. 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막사는 유엔군과 공산군, 소수의 카메라 기자들 그리고 화면에 대한 내레이션이 없다면 판문점인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초라하다. 정전선에 대한 세부 기준을 정하는 회담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현재 판문점의 모습처럼 남북을 가로지르는 뚜렷한 경계선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회담에 참여하는 양측의 군인들과 경비군, 취재진들은 막사를 둘러싸고 비교적 자유롭게 운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1953년 정전 협정이 조인되던 당시 가건물이나마 그럴듯하게 회담장의 모습을 갖춘 판문점의 모습과 대비된다. 2년 동안 판문점에서 숱하게 이루어졌던 회담의 모습은 다양한 영상에서 확인 가능한데 이 뉴스의 경우 앞의 소년 포로 뉴스와 함께 초기 판문점 회담장 밖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영상이다. 1952년 3월 함께 낚시를 하는 판문점의 남북 병사들 세 번째 장면은 1952년 3월 발행된 <코리안뉴스 제499호>에 등장하는 남북 병사들의 모습이다. ‘한국에 대한 소식’의 첫 꼭지는 “일진일퇴하는 정전협정의 최후 체결”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남북 병사들의 짧은 휴식 시간을 보여준다. 30초라는 극히 짧은 영상 속, 놀랍게도 판문점을 지키는 남북병사들이 냇가에 모여 낚시를 하고 있다. 내레이션에 따르면 “협상이 9개월이나 지연되어 기분전환”을 위해 “양편의 병사들이 회의장의 단절을 풀려고 낚싯대를 든” 것이다. 낚시하는 병사들의 모습 다음에는 조이 제독과 리지웨이 장군의 담소 장면을 짧게 삽입해 이 뉴스가 판문점의 정전회담 관련 소식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상과 같이 1951~1952년의 판문점 풍경은 이 전쟁이 어떻게 종결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임시로 세워진 판문점 막사만큼이나 소년의 귀환과 남북병사들의 낚시는 당시로서는 그다지 놀라운 뉴스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2018년 현재 판문점의 풍경과 과거 뉴스 속 판문점 풍경을 비교해보면 65년째 휴전 상태에 처해 있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