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윗 홈 시카고
- 감독
- 알란 레이몬드, 수잔 레이몬드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머디 워터스, 버디 가이, 윌리 딕슨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1959년부터 이어져 온 동두천의 터줏대감 1959년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에서 문을 연 동광극장 은 현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상업용 개봉영화 단관 영화관(스크린을 하나만 갖춘 극장)이다. 전국에 단관 영화관들이 몇몇 있지만 예술영화 전용관, 실버극장 등으로 운영이 되고 있고 개봉영화 상영관으로 단관인 곳은 동광극장이 유일한데, 단독 건물이기까지 하다. 건물 자체가 영화관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1986년에 수리를 위해 천장을 뜯을 때 상량에 “1959”라고 쓰여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2024년 기준으로 2,500편이 넘는 영화를 상영했다. 현재 극장 대표인 고재서 씨가 1986년 인수하여 관리 및 운영 중이다. 동광극장이 오랫동안 지역에서 자리하게 되면서 극장 근처 다리 이름도 ‘동광교’라고 불리게 되었고, ‘동광’이라는 이름이 붙은 슈퍼마켓이나 카페 등이 영화관이 운영되는 긴 역사 내내 인근에 있곤 했다. 2024년 현재도 동광극장 백 미터 거리 안에 동광슈퍼, 동광호프, 카페동광, 동광여인숙 등이 있다. 2011년 도로명 주소가 생길 때(2011년 도로명 주소 고시, 2014년 전면 시행) 영화관이 있는 지역은 ‘동광로’가 되었다. 동광극장 인근에는 동광극장처럼 지역에서 오래된 ‘문화극장(2관 운영)’이 있으며 ‘양키시장(구 애신시장),’ ‘제일시장,’ ‘중앙시장’이 있다. 블로그,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 시대의 활성화와 더불어 이 지역으로 일명 ‘레트로 여행’을 체험하러 오는 젊은 층들이 시장과 영화관들을 둘러보곤 하는데, 그들에게 동광극장은 필수코스 중 하나이다. 지역 주민들의 추천에 의해 2023년 ‘경기도형 노포(오래된 가게)’ 중 한 곳으로 선정된 이후로는 개인뿐 아니라 지자체나 단체 등에서 공정여행이나 지역 역사 등을 주제로 여행 프로그램을 짜면서 지역의 명소로서 동광극장을 찾기도 한다. 경기 노포 같은 경우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경기도만의 정서와 이야기를 발굴해서 생활 관광의 대표 콘텐츠로 발굴한다’라는 목적으로 2023년 처음 실시한 것으로, ‘가게 운영 기간 20년 이상에 지역 정서를 반영하고 있어야 하며 보존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선정 조건에 부합해야 하는데, 영화관으로서는 동광극장이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건물 외벽 “경기노포” 표지 1950년대부터 동두천시에 영화관이 여러 개 자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군 기지 도시였던 것이 주요했다. 동두천시는 원래는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이라는 작은 시골 면 소재지였으나 한국전쟁 중 미군이 주둔한 이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동두천읍, 동두천시로 점차 승격되었다. 1951년에는 미국 육군 제24사단의 휴양소가 설치되었고, 1952년부터 1970년대까지는 미군 제7사단이 장기 주둔했다. 제7사단이 1970년 이후 본국으로 철수한 뒤에는 전방에 있던 미군 제2사단이 동두천으로 이전하고 총 6개의 미군 부대가 주둔해 왔다. 즉, 동두천시는 미군과 미군기지로 인해 인구가 늘고 지역 상권이 발전할 수 있었다. 1960~1970년대 동두천은 “리틀 시카고(Little Chicago)”라고 불리며 ‘동두천에 가면 한국 돈보다 달러가 더 많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의 호황을 누렸다. 1979년 당시 기준으로 동두천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36%가 미군을 대상으로 한 생업에 종사한 것으로 집계되었을 정도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미군 부대가 단계적으로 철수하면서 미군이 80% 감소하였고, 이에 동두천시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지역 경제를 지탱해 주던 미군들이 떠나면서 도심 상가들의 휴·폐업이 이어졌다. 미군에 의존해오던 동두천시 지역 경제가 쇠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추억의 유물과 현재의 시스템이 공존하는 공간 동광극장 역시 호황기에는 영화 간판을 그리는 ‘화공’을 비롯하여 영화관 전체 직원이 10명에 달했다가 지금은 고재서 대표 1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고재서 대표는 영사기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필름 영사기로 상영할 당시에 직접 영화를 틀기도 했다. 동광극장에 들어오면 보이는 ‘35mm 필름 영사기’ 같은 경우 영화 상영은 하지 않지만 지금도 작동 가능하게 관리되고 있다. 현재 영화 상영은 디지털 영사기로 상영되고 있는데 영사기는 모니터로 체크하고 매표기에도 전산화가 도입되어 있다. 한 번 영화를 틀면 최소 2~3주간 상영한다. 지금도 작동 가능한 로비의 필름 영사기 동광극장은 1993년 5월에 4개월간 문을 닫았다가 가을에 재개관했는데 그 당시 스크린과 음향 시설 등을 리모델링했고, 리모델링 이후 최신 영화를 가까운 곳에서 좀 더 쾌적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개봉관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2012년 7월부터는 디지털 영사기로 상영 시스템이 바뀌었다. 필름 영사기로 상영한 마지막 작품은 < 연가시 >(박정우, 2012)였고 디지털 영사기로 상영한 첫 번째 작품은 < 도둑들 >(최동훈, 2012)이었다. 필름 영사기뿐 아니라, 동광극장은 외부와 내부 모두 현재의 영화관들과는 달리 영화관 초창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함을 준다. 이 때문에 영화박물관이나 촬영 세트장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입구 왼편에 매점이 있고 오른편이 티켓부스다. 그리고 나머지 전체가 휴게실인데 소파와 안마의자가 있고 영화관의 옛 사진들과 영화 포스터들이 구석구석 붙어 있다. 손으로 직접 쓴 관람 시 주의사항 표지는 물론 신문 기사 등도 있는데 동광극장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휴게실에 모두 있는 셈이다. 휴게실 공간의 맨 끝에 철문을 열면 상영관에 입장하게 된다. 상영관 안에는 관객의 보행을 돕는 파란 LED 조명선이 있고 조명선을 따라 들어간 뒤 원하는 좌석에 앉으면 된다. 리모델링 당시 스크린 아래 무대를 뜯어내고 소파를 놓았고 그로 인해 50석이 줄어들었는데, 대신 앞뒤 객석의 간격이 넓어져서 더 쾌적해졌다. 1층 같은 경우 2009년에 전석 갈색의 가죽 리클라이너 소파와 간이 테이블을 설치하였는데 테이블과 보조 받침대가 있고 핸드폰 충전이 가능하도록 콘센트까지 설치되어 있다. 동광극장 상영관 내부 전경 동광극장은 건물 하나를 영화관으로만 쓰고 있다 보니 2층 건물 외부 전체가 상영작 포스터 간판을 비롯해서 영화관 관련한 표지들로 덮여 있다. 건물 맨 위에는 관객 수 1,000만 명이 넘은 한국영화들이 필름 모양 속에 나열되어 있고 그 밑에 노란색 액자 모양으로 크게 현재 상영 중인 영화의 포스터가 있다. 상영작을 홍보하는 간판 그림은 1990년대 말까지 그려졌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사진으로 걸린다. 그 밑에 작게 “1959”라고 영화관이 문을 연 연도가 적혀 있다. 상영작 홍보 포스터 간판 밑에 전광판이 있고 그 밑에 “동광극장 상영 중”이라는 글자와 입구가 있다. 입구 같은 경우 도로가 새롭게 나면서 도로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옛 입구가 있는 건물 벽면에 극장 이름이 시멘트로 조각되어 남아있다. 동광극장 외관 간판 부분 근접 사진 이렇듯 예전의 모습을 가진 영화관 내·외부 모습 때문에 유명 드라마 촬영지로 등장한 바 있으며(드라마 <시그널>,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김중미 작가의 자전적 소설 『나의 동두천』(2018)에도 등장한다. SNS상에서는 ‘와칸다 극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유튜버가 방문했을 2018년 당시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안소니 루소, 조 루소, 2018)가 개봉해서 전국적인 흥행을 하고 있었는데, 동광극장에서도 해당 영화를 틀고 있어서 영화 속 주요 배경인 ‘와칸다 왕국’ 이름을 따서 누리꾼들이 지은 것이다. “극장은 계속 열려 있어야 하니까” 현재는 설날이나 추석에 손님이 몰리는 편이고 흥행작이 개봉하면 지역 주민들이 극장을 찾아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역 주민들이 많이 보러 온 작품은 2023년 11월 22일에 개봉한 < 서울의 봄 >(김성수, 2022)이었다. 평소에는 영화관에 영화 자체를 보러 오는 손님보다 레트로 여행 등의 컨셉으로 인근 시장들을 둘러보고 오래된 영화관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 동광극장 같은 경우 지역신문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으나 장기적인 효과를 불러오지는 못했다. 전체적인 지역 경제 쇠퇴와 더불어 인근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등장은 물론 코로나 시기 OTT의 급부상 등이 부진의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광극장은 개봉관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친 극장 내부 리모델링 작업을 거쳤고, 매일 영화관을 열고 있다. 동광극장이 가진 소망은 1959년에 문을 연 이 자리에서 지금처럼 계속 개봉영화를 상영하는 상업영화관으로 지역에 남는 것이다. 극장주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그러므로 극장은 계속 열려 있어야 하니까.” 동광극장 로비 전경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 경기도 동두천시 동광로 33 (생연동) 2) 설립일 : 1959년 3) 대표자 : 고재서 4) 규모 : 지상 2층, 면적 483.63㎡, 연면적 707.32㎡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수, 훨체어석): 상영관 1개관 총 283석 (리클라이너 의자로 인해 실질적으로는 240석, 지정좌석제가 아닌 자율 착석) 6) 운영시간 및 정기휴무 : 자율적 운영, 정기휴무 없음 7) 입장료 및 할인 정책 - 일반인 주중 9,000원, 주말 9,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군인, 간부, 소방공무원 주중 8,000원, 주말 8,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청소년, 정복 군인 주중 7,000원, 주말 7,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경로우대, 장애인, 국가유공자 주중 6,000원, 주말 6,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어린이 주중 5,000원, 주말 5,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8) 조직 구성 : 대표 1명 상근 9) 구성원 : 고재서 대표 1인 10) 주요 장비 (영사 장비, 음향): 디지털 영사기, 돌비 음향 시스템, 상영관 입구에 작동 가능한 필름영사기 취재 일자 : 2024년 6월 17일 글/인터뷰 진행 : 김문경 사진 : 허 성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 중인 < Archives Korea 1930-1940 >은 여러 가지 의미로 어마어마한 기록영상 필름이다. 이 영상은 이미 2021년에 기록영상 컬렉션 의 일부로서 심층 해제와 함께 공개됐고 VOD 기획전 에서도 짧게 다룬 바 있지만, 1928년부터 1941년경까지의 방대한 시기를 촬영하고 두서없이 묶어놓은 꽤 불친절한 영상인 탓에 전체적인 맥락을 한 번 더 소개해 보려 한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 Morris)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서 트램 회사 ‘Market Street Railway’의 부매니저로 일하던 모리스는 28세가 되던 1899년에 서울로 건너와 한성전기회사가 부설한 전차 운행 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그의 여권(1910.2, 1918.4.)에 기재된 바대로 애초에 조선에 온 것은 '사업 목적의 임시거주'였지만, 근대적 시간 및 경제 개념이 부족했던 조선인들과 함께 아웅다웅하면서 정이 들기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나다 출생의 미국인 여성과 결혼(1902)도 하고 딸도 낳아(1905)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생각이 바뀐 듯하다. 결국 그는 서울 정동의 외국인 공동체 속에서 정확히 40년을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1938년에 돌아가게 된다. 조선에 올 때는 중간 경유지인 일본 고베에서 제물포까지 이동하는 데만 해도 11일이 걸렸지만, 고국에 돌아갈 때 즈음엔 23시간 정도면 가능해졌을 정도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1899년에 조선에 온 J. H. 모리스씨는 40년간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현재 주소는 캘리포니아주 밀브래 하이랜드의 엘더 애비뉴 30번가입니다. 모리스 부부는 한국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변함없는 친절과 배려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 “Contributor's Column”, The Korea Mission Field 36 , no.2 (1940년 2월호) 그는 긴 조선 체류기간 동안 광산업, 자동차 수입 및 정비업, 램프 등 생필품 수입 판매업 등을 하며 미국, 일본, 중국 등을 수시로 오갔다. 한편으로는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재정 임원을 역임했고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RASKB)의 회원(회보 속 회원록 기준으로 1915년부터 1940년까지)이기도 했으며, 그가 1924년에 마련한 강당 공간을 외국인 대상의 초교파 연합 교회인 서울유니온교회(Seoul Union Church) 및 서울외국인학교(Seoul Foreign School)의 각종 예배 및 행사 용도로 제공하는 등 정동의 선교사 모임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모리스 홀(Morris Hall) 앞 미국 장로교 조선선교회 연례 모임 기념 사진(1939)> 사진: Moffet Korea Collection (Photograph, Series 5, Box 33) “서울외국인학교협회는 작년에 매입한 건물 2층에 새로운 강당을 완공했다. 이 강당은 300명의 청중을 편히 수용할 수 있으며, 협회는 건립위원회 위원장 J. H. 모리스 씨의 봉사와 관대함을 기려 환호 속에 이 새로운 강당을 "모리스 홀"로 명명하기로 의결했다. 서울유니온교회는 준비되는 대로 이 강당에서 정기 주일 예배를 거행하기로 했다.” - “Notes and Personals” , The Korea Mission Field 20, no.4 (1924년 4월호), p.80 <정동 21번지, 모리스 상회(J. H. Morris & Co. Seoul) 전경> *주1 모리스 상회가 취급하던 물품은 자동차 및 부속들, 타이어, 모터사이클, 램프, 화재보험 등 다양했다. (좌)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20 no.2 (1924년 2월호), (우)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13 no.8 (1917년 8월호) 무엇보다도 사진광이었던 그는 유니버설 필름의 조선 내 수입 배급업을 하면서 필름 촬영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을 떠나는 순간까지의 왕성한 활동들을 필름 길이 기준으로 3시간 30분 가량(16mm 필름 7권), 적정 속도로 영사했을 때의 기준으로 5시간 15분 가량의 방대한 촬영본으로 남기게 된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2년 2월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니, 거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상으로 기록했던 셈이다. 4일 월요일. 구름. 쌀쌀함. 서울 집. 하디(Hardie) 박사의 집에서 케른(Kern) 및 그 일행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모리스(Morris)씨가 자신이 직접 찍은 영상을 보여줬는데, 동쪽 궐 내, 금강산, 필리핀, 백두산의 모습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9시 반 경에 귀가했다. - 『윤치호 일기』(尹致昊日記) 10권 중 12월 4일 일기 J. H. 모리스의 일대기와 그를 둘러싼 정동의 선교사, 외교관, 사업가 공동체를 이해하는 것은 이 뜬금없는 푸티지 모음집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1930년대 초중반 전주와 함흥 일대의 선교 활동 모습, 뜬금없이 중국에서 촬영된 푸티지들(1920년대 중후반부터 선교공동체가 모색했던 중국 선교와의 관련성 등), 1936년 5월 28일 이화학당 개원 50주년 행사 등이 촬영됐던 이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194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됐던 “Bowl of Rice" 퍼레이드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인근의 풍경들이 1940년에서 1941년 즈음에 촬영됐던 동기 등 대략적인 맥락은 이제 그의 생애와 그가 속했던 공동체와의 관계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Archives Korea 1930-1940> 중, 1940~1941년에 촬영된 푸티지들 (좌) 캘리포니아 레드우드(Redwood) 공원, (우) 샌프란시스코 “Bowl of Rice” 퍼레이드 특히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상 속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정서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쉽게 구하기 어려운 극동의 한 나라에 자리를 잡고 서로 의지하고 갈등하며 3세대에 걸쳐 함께 했던 60여 년의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들은 마냥 착한 사람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선교지의 발전과 그 국민들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고민했던 흔적들이 기록 여기저기에 남아 있으며, 어려움 속에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였던 공동체로서 서로 간의 유대감도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정동에서 태어난 2세, 3세들은 서로를 ‘Korea Kids’라고 칭했고, 1940년대 초 일제의 압박에 밀려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최소 50여 년 이상 조선에서의 추억담과 서로의 근황을 Korea Klipper 라는 이름의 월간 소식지로 엮어 구독했으니 말이다. <J. H. 모리스의 사위(딸 Marion의 남편)인 스테판(C. H. Stephan)이 최근에 사망했다는 셔우드 홀(Sherwood Hall)의 전언> 사진: The Korea Klipper vol.39, no.2 (1980년 2월호), 첫번째 소식. 모리스의 영상을 보면 이렇듯 서로에 대한 신뢰와 친밀감이 언뜻 비춰지는 장면들이 있다. 중일전쟁 직전의 긴장감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인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영국 영사관에서 열린 1937년 5월 24일 대영제국 기념일(Empire Day) 행사 중의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고 공동체 친구들은 서로를 향해,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다. 1935년 3월에 경복궁 후원이 특별 개방되면서 열렸던 야외 연회장에서는 붐비는 방문객들 사이로 다른 장면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난다. 이때 카메라와 이들의 정서적 거리는 매우 가까워 보인다. <Archives Korea 1930-1940> : 모리스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사람들 (상) 1935년 경복궁 후원 (3:48:24), (중) 같은 장면, 구세군 모자를 쓴 새뮤얼 모팻 선교사? (3:48:05), (하) 1937년 영국 영사관, 대영제국의 날 행사 (4:46:32) [참고] 이하 제시되는 타임코드(시:분:초)는 적정 속도로 조정한 KMDb VOD 버전 기준의 시간입니다. 모리스의 이 방대한 기록영상 필름은 모리스 사후 그의 딸 매리언(Marion)이 간직하고 있다가 친분이 있던 로스 H. 맥도널드(Ross H. Macdonald) 토론토 대학 교수에게 전달했고, 그의 사망 후 아내 리스(Leith Macdonald)가 캐나다 연합 교회(United Church of Canada)에 기증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모리스의 손녀와 친분이 있던 다큐멘터리 영화작가 마티 그로스(Marty Gross)의 도움을 통해 <Archives Korea 1930-1940>는 드디어 어언 80여 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에 도착했다. 진면목이 드러난 모리스 필름의 이모저모를 짧은 글 하나에 모두 설명하기란 무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이 영상에 등장하는 장소, 건물, 인물, 상황에 대한 식별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16mm 필름 품질 상의 한계도 있지만, 기록영상 속 정보를 새롭게 하나 식별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작 우리의 주인공 모리스 씨의 얼굴을 식별하는 데에만 해도 여러 근거자료를 교차 검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마저도 100%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추정은 다음과 같다. (이외에도 미 감리교 디지털 컬렉션의 자료 를 함께 참고해 볼 수 있다.) (좌) J. H. 모리스의 여권(1918.8.21.) 속 가족사진 : 순서대로 모리스(47세), 딸 매리언(14세), 아내 마벨(45세) (우) 마벨(Mabel Clair Perkins)의 여권(1923.11.5.) 속 사진 <서울유니온 50주년(1939년) 기념사진 속 모리스(68세)> 사진: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위 사진 중 모리스 부분 확대>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 추정 인물 - (상) 3:21:18 (하) 3:16:17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의 가족들 (상) 모리스의 딸 매리언 부부로 추정되는 인물들 (3:14:08), (하) 맨 오른쪽은 모리스의 아내로 추정 (3:17:36) ※ 참고 문헌 Morris, J. H. “Early Experience with the Seoul Street Railway”,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Seoul: 26-27. Macdonald, Leith, “Rare Film Footage Captures: Korea in the '30s”, Korean Culture , vol.8, no.2. (Summer 1987). 33-37. Underwood, H. G. “An American Boy in Yesterday's Seoul - 'Golden Days' Fondly Recalled”, KOREANA vol.5, no.1, (Spring 1991), 19-26 Clark, Donald N. “Impermanent Residents: The Seoul Foreign Community in 1937”,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 vol.64, (1989) 19-37. *** 주1. 사진: Cameron, W. H. Morton. Present Day Impressions of Japan; the History, People, Commerce, Industries and Resources of Japan and Japan’s Colonial Empire, Kwantung, Chosen, Taiwan, Karafuto. Edited by W. Feldwick. Chicago: Globe Encyclopedia Co., (1919) p.854
이 문서는 국무부에서 전쟁부(War Department)로 영화 정책 관련 업무를 이관한 이후 민사처(Civil Affairs Division) 산하 재정향 부서(Reorientation Branch)에서 작성한 1947년 점령지 사업 프로그램에 관한 내용이다. 재정향(Reorientation)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교육 시스템의 탈나치화와 탈군사화 그리고 민주주의화를 위하여 마련한 재교육(Reeducation)에서 유래한다. 재교육을 재정향으로 순화된 표현으로 사용하면서 민사처의 사업은 대안적인 시스템을 알리고 물질적인 원조에 중점을 두는 사업으로 변하였다. 1 1946년 9월 16일 작성된 이 문서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기록되지 않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재정향 부서의 1947년 회계연도(1946년 7월 1일부터 1947년 6월 30일)의 사업 내용과 예산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주목된다. 이 문서는 모두 11장에 달하며 개괄적인 설명 없이 ‘미디어국’과 ‘교육 및 종교 정책국’ 그리고 ‘특별 기획국’으로 구분하여 기술한다. 원문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살펴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참고로 이 문서에서 쓰이는 용어는 다음과 같이 정한다. 즉, Department는 부(部), Branch는 부서(部署), Division은 과(課), Section은 국(局), 그리고 Unit은 반(班) 등이다). 미디어국(Media Section)은 신문, 정기 간행물 그리고 영화 및 극장 등 세 개의 반(Unites)으로 구성된다. 미디어국은 DANA(독일어), KYODO(일본어), 뉴스 대행사 그리고 미국에서 발행한 독일 잡지의 편집과 관련된 서비스를 포함한 점령지의 미국 라이센스 도서 및 정기 간행물에 대한 소식과 관련된 자료를 준비하고 조달한다. 또한, 교육적인 이용과 대중 상영을 위하여 극영화를 제작하고 공급한다. 미디어국은 국무부가 제작한 라디오 프로그램 - ‘미국의 소리 Voice of America’ - 을 점령지에서 이용하는 정책과 관련하여 국무부와 공조한다. 미디어국 각 반의 사업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문반(Press Unit) 담당자는 점령지에 다음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첫째, ‘주요 사건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picture)’을 제공하기 위하여 매일 6위까지 선정한 세계 뉴스를 평균 500 단어 이내로 제공한다. 이들 이야기는 독일의 DANA와 일본어 KYODO 통신사에게 제공한다. 둘째, 독일과 일본에 특히 관련된 분야의 미국식 생활과 사건을 묘사한 뉴스 특집 기사(news feature stories)를 제공한다. 강조할 내용은 음식, 세계 평화 기구, 과학, 경제, 점령지에 대한 미국의 정책 그리고 국제 문제이다. 셋째, 사설(editorials), 칼럼, 라디오 단평 그리고 외국 특파원의 분석 기사(analytical stories)을 제공한다. 또한, 일주일에 두 차례 편집 코멘트를 준비하여 전보로 발송한다. 국무부의 언론 및 출판과(Press and Publication Division)는 미디어국에서 다큐멘터리 작품(articles)과 극영화 그리고 사진(pictures)을 정기적으로 제작하도록 만든다. (2) 정기 간행물반(Periodical Unit)은 세 개의 하부 단위(Sub-Unit) 즉, 독일 공개 출판(German Overt Publications Sub-Unit), 비공개 잡지 서비스(Non-Overt Magazine Servicing Sub-Unit) 그리고 저작권 허가(Copyright Clearance Sub-Unit)로 구성된다. 이들은 각각 독일 미군정의 공식 출판물 편집과 제공, 미군정 허가 정기 간행물 이용과 관련하여 점령지에 보급할 출판 자료의 선택, 그리고 점령지에 필요한 모든 자료에 대한 저작권 취득과 면허 통관 업무를 담당한다. [그림1] 재정향부 사업보고서 첫 페이지, 신문반과 정기간행물반 사업 관련 (3) 영화와 극장반(Film and Theaters Unit)은 독일과 일본의 교육을 목적으로 기획한 120릴(reels) 분량의 특별 다큐멘터리 조달을 주요 업무로 한다. 이 반은 새로운 영화 제작과 점령지에서 각색 가능한 기존 필름(footage)을 조달하기 위하여 영화 산업 및 기타 에이전시와 사업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한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큐멘터리와 단편(Documentaries and Shorts) 영화 제작 담당자는 52주 동안 매주 2~3개 릴의 다큐멘터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점령지에서 사용할 120릴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계약한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미국적인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하여 보여준다. 영화 주제는 점령국 국민의 심리적인 태도를 세심하게 분석하여 선정한다. 영화는 점령지 국민의 재교육과 관련된 전문가들의 지도를 받아 기획하고 제작한다. 전쟁부 담당자는 테스트용 영어판(pilot English version)을 계획 및 제작하여 한 세트의 영화가 4개 점령국의 요구를 모두 충족하도록 한다. 한편,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 가운데 점령지에서 ‘입수한 영화의 각색(Adapting Acquired Film)’의 경우, 계약을 맺은 영화는 여타 미국 정부 기관과 민간 영역(private source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를 입수하여 보완한다. 이들 영화는 농업, 과학, 산업 그리고 기술적인 주제를 다루며 교육 프로그램의 이용을 위하여 〔더빙, 편집 그리고 기타 작업 등과 같이〕 개작한다. [그림2] 영화와극장반 사업 중 오리지날 다큐멘터리 제작 관련 페이지 둘째, 대중 상영을 위한 할리우드 영화와 단편 영화의 주제(Hollywood Feature Films and Short Subjects for Public Showing)는 점령지의 요청에 따라 정한다. 담당 직원은 점령지에 적합한 극영화와 단편에 대하여 영화업계에 추천을 요청한다. 〔상영〕 적합성(suitability) 여부는 영화업계의 승인 기준에 따라서 결정하며, 영화업계로부터 제목 리스트를 받아 점령지로 보낸다. 영화 리스트를 발송할 때 점령지 책임자가 기존 계약 조건과 정책 그리고 공공의 의견을 바탕으로 선정할 수 있도록 신문사 비평과 해설을 동봉한다. 점령지에서 영화를 선정하면 영화업계로 보내서 네거티브 필름(negative film)과 프린트를 복사하여 조달하도록 한다. 셋째, 뉴스릴 자료(Newsreel Material) 담당자는 점령지에서 준비된 뉴스릴에 대하여 ‘날짜가 없는 자료(non-dated material)’을 선택하고, 뉴스릴 회사가 제공한 자료를 매주 조달 및 전달한다. 마지막으로, 무대 연극(Stage Plays) 담당자 역시 점령지 무대 연극 업무에 대한 책임을 진다. 위의 계획에 따라서 영화 프로그램 예산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영화 제작의 경우, 할리우드에 준하여 테스트용 영어판 다큐멘터리 제작비는 52주 동안 매주 2~3개의 릴을 만들어 총 120 릴을 제작한다면 1,700,000달러가 필요하다. 이들 다큐멘터리 단편 영화의 주제는 학교와 대학 그리고 성인 교육에 적합한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점령지 언어로 전환할 때 소요되는 생필름 비용은 독일 221,440달러, 오스트리아 21,600달러, 일본 167,940달러 그리고 한국 76,800달러가 든다. 4개 국가 모두 35mm보다 16mm 필름을 더 많이 제작한다. 둘째, 민간영역에서 구입한 영화의 경우, 여타 미국 정부 기관과 민간 영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의 네거티브 필름 총 구매 비용과 필름의 각색과 재작업(rescoring)에 필요한 생필름 비용은 다음과 같다. 즉, 독일이 72,300달러로 1위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일본 48,300달러와 한국 20,000달러 그리고 오스트리아 8,000달러이다. 한국이 오스트리아보다 앞선 이유는 16mm 프린트를 더욱 많이 구매할 계획을 세운 결과에 따른 것이다. 셋째, 점령지의 뉴스릴 또는 단편 영화와 다큐멘터리 제작 관련 생필름 예산은 독일과 일본에만 책정한다. 넷째, 학교와 대학에서 16mm 영화 상영에 필요한 영사기 비용을 보면, 독일과 일본 모두 영사기 관련 부품을 1,000개 구매할 계획이다. 이와 달리 오스트리아는 50개 그리고 한국은 300개를 구매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는 한국에 상설극장이 부재한 지역이 다수 존재함을 방증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점령지 연극 공연과 관련하여 저자에게 지급할 저작권 사용료 비율은 일괄적으로 균등하게 책정한다. [그림3] 오리지날 다큐멘터리와 구입 영화의 복사에 소요되는 생필름 및 예산 배정 내역 다음으로, 재정향 부서는 교육과 종교 정책국(Education and Religion Policy Section) 사업을 다음과 같이 수립한다. 그것은 교육, 종교, 사회 조직, 청년 운동을 포함한 국가 간 인적 교류 정책과 관련된다. 해당 사업의 책임자는 시청각 도서와 교과서 그리고 음악 및 자료 조달과 관련된 부서 활동을 감독한다. 이를 위하여 교육과 ‘문화 자료반’은 세 개의 하부 반 - 도서관과 교과서, 음악, 그리고 예술과 사진 전시 – 을 구성한다. 도서관과 교과서 담당자는 정보 센터(information center: 정보 센터는 점령지에 따라서 공보원 또는 문화원으로 불림)를 설립하여 도서관과 교과서 자료를 선정하고 조달한다. 음악 부서 담당자는 점령지의 음악 도서관과 관현악단에 공급할 자료를 대여하고, 소규모 비관현악단과 대중음악 도서관 설립을 위한 자료 선정과 조달 그리고 배송을 책임진다. 예상 비용은 새로운 오케스트라 작품, 악보 그리고 관현악단 자료의 대여까지 포괄하여 정한다. 음악반의 주요 작품은 민속악(folk music), 밴드 음악과 학교 실내악(chamber music), 성악, 독주 기악 그리고 관현악 작품(orchestral score) 등을 다룬다. 대중음악을 포함한 리코딩 도서관 역시 점령지 정보 센터별로 예산을 편성한다. 예술과 사진 전시 분야는 유채화 및 수채화 복사를 포함한 예술 쇼(art shows)와 미국 예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미디어를 점령지에 조달하고 발송한다. 또한, 점령지 대중이 미국식 풍경에 익숙해지도록 사진 벽화(photo-murals)와 같은 시청각 자료를 해당 사업에 포함한다. [그림4] 교육과종교정책국의 사업 내역이 담긴 페이지 마지막으로, 1947년 재정향 부서 사업은 특별 기획국(Special Projects Section) 사업으로, 재교육과 재정향에 관련된 법률과 저작권에 대한 조언과 자료 조달을 설정한다. 더불어 일반인부터 명사(名士)까지 국제 간 인적 교류에 관한 운영상 문제를 다룬다. 이와 관련된 비용 산출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즉, “미국 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점령지로 보내어 교육과 종교 그리고 정보 관련 담당자들에게 조언하기를 권한다. 점령지 지도자들은 그들의 문제에 관하여 미국인들과 논의하기를 갈구하고 있으며, 미국의 전문가들과 어디에서든 1개월에서 3개월 또는 그 이상 그들의 문제를 생각할 기회를 환영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전 세계로부터 오랫동안 고립되었거나 편향된 정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면대면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점령지 사람들은 민주주의에서 그들의 특정한 작업과 기능이 어떻게 다뤄지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따라서 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적합한 미국식 실천 방법과 범위에 관하여 미국의 전문가들과 토론함으로써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서 설정된 점령지 파견 사업을 위한 예상 비용은 다음과 같다. 즉, 60일 동안 매달 1인당 500불의 여행비를 산정하여 독일과 일본에 파견할 전문가 200명과 오스트리아 및 한국에 파견할 전문가 50명에게 제공한다. 예상 비용은 독일과 일본은 각각 200,000달러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한국은 각각 50,000달러에 이른다. 위의 문서에서 기획한 바와 같이, 재정향 부서의 프로그램이 점령지 각국에서 실행되었는지 여부와 그것의 효과에 대해서 점령지 국가별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유럽의 경우, 재정향 부서가 언급한 ‘정보 센터’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의 “Amerika Häuser” 사례는 재정향 사업이 적극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미국 문화를 전파한 Amerika Häuser는 도서관과 갤러리 등으로 이용되는 한편으로 오스트리아에서 ISB (Information Services Branch)가 제작한 선전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하도록 조치한 기관이었다. ISB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전 연합군 사령부가 설립하여 미국식 태도에 대한 경의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물질적 · 정신적 수단을 동원하는 데 주력하였다. 2 다시 말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의 점령지 재정향 프로그램은 전쟁 종료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재정향 부서의 한국에서의 사업은 영화 제작과 ‘정보 센터’ 활동을 통해 확인된다. 1947년 8월 미공보원은 서울역 앞에서 업무를 시작하면서 영화 제작과 문화 사업을 시행하였다. 영화의 경우, 미군정청 공보부 영화과를 포함한 농림부와 내무부와 같은 기타 정부 기관 그리고 미공보원이 문화영화를 제작하였다. 3 또한, 미국문화연구소(Office of Civil Information)에서 출발한 미공보원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미공보원 사업은 ‘정보 센터’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미공보원이 직접 나서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경우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현지 지역민을 주체로 세운 문화원(Culture Center)이 문을 열고 사업을 수행하였다. 1947년 10월 9일 한국 최초로 개원한 ‘강화문화관’은 박물부와 도서부 그리고 대중 사업부를 두었는데, 이는 재정향 부서가 기획한 사업 내용과 유사한 모습이었다. 4 강화문화관의 부서는 향후 전국적으로 증가한 문화원 프로그램의 원형을 제시한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재정향 부서의 ‘교육과 문화 자료반’ 가운데 음악 관련 프로그램 역시 1949년 강원도 춘천 미국 공보원의 오케스트라 설명과 연주회 개최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나아가 재정향 부서의 사업 수행은 한국전쟁 이후 지역 문화원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초반 충남 대전의 대전문화원이 참여 대상자의 특성을 세분화하여 고전음악 감상부터 영화 관람까지 다방면에 걸쳐 사업을 수행한 것은 재정향 부서 프로그램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5 1. James F. Tent, Mission on the Rhine: Reeducation and Denazification in American-Occupied Germany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 254. 2. Reinhold Wagnleitner, “The Irony of American Culture Abroad: Austria and the Cold War”, (Ed.) Lary May, Recasting America: Culture and Politics in the Age of Cold War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pp. 286-288. 3. 심혜경, 「안철영 텍스트를 통해 본 대한미국 설립 초기 ‘조선영화’ 연구 - <무궁화동산>과 『성림기행』을 중심으로 -」,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학위논문, 45~46쪽, 각주 89 참고. 4. 위경혜, 「문화냉전의 지역성 - 대전문화원의 활동을 중심으로 -」,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49집, 2018, 124~126쪽. 5. 대전문화원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다음을 참고. 위경혜, 앞의 논문, 134~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