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
- 감독
- 존 파브로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윌 패럴, 제임스 칸, 메리 스틴버겐
* 사진: 필자 제공 연출배경 < 주희에게 >(2025)는 세 명의 연출( 장주희 , 부성필 , 김성환 ) 중 두 명이 출연자로 등장하며, 네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복잡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한 여성(장주희 감독)이 자신이 20대에 ‘혈액암’을 겪었음을 고백하며 시작된다. 사회로 복귀를 하게 된 무렵 만나게 된 동년배의 남성 다큐멘터리 감독(부성필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카메라의 시선은 그가 기록하는 장애인(선철규)의 번지점프 도전기에서부터, 2014년에 발생했던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전인숙)의 삶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를 통해 영화는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지표에 흐르고 있는 ‘고통’과 ‘연결’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는 전적으로 다큐멘터리 감독에 의해 기록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전하는 목소리는 혈액암과 가정폭력을 겪은 출연자이자, 연출인 여성, 주희(나)의 것이다. 나는 다큐멘터리 속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가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가정폭력 피해자인 여성의 삶, 세월호 유가족의 진상규명, 와상장애인의 번지점프 도전기, 제주 4·3 유가족 3세대의 삶이 연결된 복잡한 서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코 복잡한 이야기로만 단정 지을 수 없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이것은 30대 여성이 자신의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부터 지금까지 목격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타인의 고통 속으로 녹아들기 내가 목격한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으로서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본다’라는 수동적 태도에서 ‘말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과정 자체가 이 영화의 연출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관찰자에서 화자로 거듭난다는 것은 ‘목격’이라는 경험이 나를 변화시킨 근본적인 이유이며, 이는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지로, 적극적으로 기록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나는 영화 속에서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혈액암 환자’라는, 한 공간에 결박된 존재로서 철저하게 수동적이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 목격자이며, 이 고정된 시선은 앞으로 진행될 영화 안에서 변화가 예상될 수밖에 없는 ‘화자’의 자리로 안착한다. 이 영화가 담아낸 화자의 출발점은, 고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독한 무력감의 고백에서 시작된다. 나는 오랫동안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도 그 일이 없는 듯 살아왔다. 사회는 가정폭력을 일상의 예외로서 묵인하고, 사회에서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지워버린다. 우리는 304명의 승객이 탄 배가 가라앉는 걸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보다’라는 수동적인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무언가를 보기 전과 본 이후의 세계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주희’가 장애인자립센터에서 만난 장애여성 ‘은미’는 시설에서 선철규의 탈시설 다큐멘터리 < 지렁이 꿈틀 >(2010)을 보았고, 그 이후로 은미의 세계는 장애인 수용 시설에서 시설 밖으로 확장되었다. 나 역시 다큐멘터리를 통해 거리에서 투쟁하는 어떤 이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한다. 나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이가 거리에서 흘린 눈물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집안에서 흘리는 눈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목격은 적극적으로 ‘나’를 그 프레임 속의 대상과 겹치며, 그 속에 나를 투사하고자 하는 욕구와 이어진다. 나에게 ‘본다’는 행위는 사건을 목격한 일시적 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내가 목격한 사건이 나의 몸을 경유하여, 이전과 다른 몸을 만들어나간 과정이다. ‘본다’는 능동적 행위의 결과는 자신의 삶을 바꿔나가는 것이고, 더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결과는 다른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그런 맥락 속에서 ‘주희(나)’에게 ‘선철규(탈시설 장애인)’와 ‘전인숙(세월호 유가족 활동가)’의 존재는 자신의 문제에 온전히 투신하는 사람들, 즉 보이는 대상으로서 스스로 살아있는 이야기의 주체가 된 이들이었다. 이야기의 주체로서 나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주희에게>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로 인해 영화 속 ‘나(가정폭력 피해자, 암 환자)’의 이야기는 세 인물(다큐멘터리 감독, 장애인, 세월호 유가족)과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맺으며 단단하게 얽혀 들어간다. “본다는 것은 이처럼 보이는 대상을 거쳐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는(for us and In-itself) 가시적인 것들의 여정으로써, 우리는 봄을 통해 우리 내부로부터 발현하는 타인의 살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경험한다. 이 순간, 우리는 우리 ‘내부로부터’ 몰려오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 속에 살게 되고 그 속으로 ‘녹아들어가’는데, 이를 통해, 재난의 세계는 우리의 눈앞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다.” - 최종철, 『재난의 예술』, 그린비, 2024, 24쪽. 타인의 고통과 내 안의 슬픔이 하나의 ‘살’로 섞여 드는 이 감각은, 프레임 너머의 비극을 지켜보는 것에 머물던 나를 기어이 말하는 주체로 밀어 올리는 동력이었다. 하지만 타인의 아픔이 내 안으로 밀려와 나를 바꾸어놓았다는 이 복잡한 연결고리를 과연 온전히 설득시킬수 있을까. 만약 관객들에게 이 예민한 호흡을 제대로 설득해내지 못한다면, 목격한 것을 말하는 ‘화자’로서의 내 존재 자체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영화’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목격자가 화자가 됨으로써 완성되는 이야기라면, 목격자가 화자가 된다는 이 단순한 전개는 결국 ‘주희’의 ‘성장 서사’가 되어야만 했다. 내가 본 것들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관객에게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장과 변화는 필연적으로 ‘미성숙’을 전제한다. ‘가정폭력 피해자’와 ‘환자’라는 정체성에 ‘미성숙’의 이미지를 덧씌워야만 성립되는 이 서사 구조 안에서는, 어떤 결핍이 과거의 나를 형성했는지, 그리고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내가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분명하게 전달해야만 했다. 친절한 전달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그러나 목격의 대가로서 스스로를 다시 한 번 결핍된 존재로 규정해야 하는 벽에 맞닥뜨린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기묘한 불쾌감과 함께 스스로에 대해 또다시 질문하게 했다.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성장은 과연 필수적인 것인가? 고통은 늘 어떠한 성찰을 수반해야만 하는가? 나의 고백이 도리어 가정폭력 피해에 대한 인상을 수동적이고 고정된 틀에 가두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여성의 성장 서사를 ‘피해의 극복’이나 ‘수동성에서의 탈피’ 같은 전형적인 이야기로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위치에 자리매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것은 내 존재가 그저 고통의 ‘친절한 전달자’로 머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들었다. 다큐멘터리의 바깥에서 그 안의 ‘결핍된 존재’인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고통을 전시하는 방식에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태도로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의 나를 분리해 바라보는 이 낯선 응시는, 곧 목격하기 전의 나, 그리고 목격한 후의 나, 그리고 그걸 되새기며 말하는 현재의 나라는 여러 층위로 인해 영화 안에서 인물 간의 여러 시간을 교차시킨다. 기록의 시간, 투쟁의 시간, 깨달음과 과거로의 회귀… 영화 안의 이 여러 시간 속에서 나의 위치는 그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깨닫는, 자책하는, 스스로 질문하는, 통찰하는 여러 시점에 놓인다. 이로 인해 ‘주희’의 내면과 인식의 변화는 영화의 타임라인을 따라 유동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본다는 것’의 윤리와 연대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자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수많은 질문과 의심들은, 영화가 상영되고 다양한 관객들과 마주하면서 비로소 온전한 대화가 되기 시작했다. 왜 지금 괜찮은지 묻는 이들에게 상영을 통해 관객분들을 만나다 보면 장애인의 번지점프에 대해, 세월호 진상규명의 방향에 대해 질문하는 분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10년에 가까운 긴 기록이 ‘삶’이라는 흐름의 속도와 동일하게 압축되어 있을 뿐, 어떤 의도적인 결말을 관객에게 제시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답변을 들은 관객들로부터 나는 그들이 안도하기도 하고, 더더욱 연대하겠다고 다짐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중 어떤 관객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가정폭력은 트라우마가 심하기 때문에 영영 치유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 질문은 마치 영화 밖, 현재의 나에게 “왜 지금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있는지”에 대해 묻는 날카로운 의문 같았다. 그 의문 앞에서 나는 영화 안에서 피해자로서 관객에게 제대로 된 공감과 연결 지점을 설명해내지 못한 것인지 자책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 그런 우려와 불안의 지점을 안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었고, 관객분이 내비친 날카로움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불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관객분이 제시한 솔직한 의문 속에서 나는 가정폭력 피해자가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가정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오직 폭력에 대한 응징과 가해자 처벌이라는 명확하고 클리셰적인 결말로만 해소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가정폭력 피해 서사의 완결이 지닌 본질은, 사회와 국가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제도를 통해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언제나 미완으로 남을 뿐이다. 국가폭력을 비롯한 ‘피해자’라는 정체성과 그 삶의 맥락을 가진 모든 존재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제도적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 한,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시선과 인상은 언제까지나 머릿속에 가득 찬 답답함과 같은 브레인 포그 현상처럼 뿌옇고 불명확한 인상만을 남겨둔 채 방치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안개 속을 우연히 뚫고 나왔을 뿐임에도, 나는 그것이 과연 ‘성장’이 될 수 있는지에 여전히 의문을 품는다. 아직도 내가 ‘성장’했다는 표현에 대해, 그리고 이 영화 속 나를 ‘성장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분명한 변화가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성장한 주희’이자, 30대 여성으로서, 이 불평등한 세계 속에 굴하지 않는 동등한 스피커(화자)가 되어 주어 고맙다는 말로 들리는 착각과 환청 속에서, 나는 ‘여성’ 화자로서의 나의 위치성에 대해 고민하고 분노하고 인정하는 분열적 상태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분열이야말로 ‘존재의 바로 보기’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음을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를 만들던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다시 내릴 수 있었다. 나를 결핍된 존재로 규정해야 했던 것, 변화와 성장을 증명해야 했던 것으로 비롯된 나의 불편감에 대한 답을 말이다. 나는 비로소 내 존재 자체의 당혹스러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수치의 반복을 넘어, 당신의 존재가 구원이 될 때 나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은 나 자신을 비롯해 나의 고통을 목격한 모든 이들의 당혹스러움을 감당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가정폭력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 몰랐다’라는 반응으로부터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듯한 감각을 맞닥뜨려야 했던 그 순간 속에서 알 수 있었다. 결핍된 존재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수치심을 동반하며,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지독한 부정의 시선과 언어들 속에서, 드러내기와 수치의 반복 속에서 나와 당신의 존재가 결국 우리 모두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선언할 수 있는 강력한 힘, 나는 그 힘이 바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다큐-코멘터리: 프레임 밖의 문장 타인의 삶이 모이고 흩어지는 한 순간을 카메라로 붙잡기로 결심한 또 다른 순간에 대해, 프레임 밖에서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장주희(여성인권활동가, 영화감독) l 장애인 대상 미디어 교육과 여성인권 단체에서 활동하며 < 장애인, 미디어, 교육 >(2022), <주희에게>(2025)를 만들었다.
사진: Cambridge Community Foundation , Photo by Wolfgang Wesener 프레더릭 와이즈먼 영화의 러닝타임은 길었고, 와이즈먼의 생애 역시 러닝타임만큼이나 길었다. 하지만 1967년 < 티티컷 풍자극 >으로 시작하여 2023년 < 메뉴의 즐거움 - 트와그로 가족 >까지 이어진 와이즈먼의 이력은 한 작가의 세계가 어떻게 성립되고, 완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와이즈먼의 영화는 주요 영화제에서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고 따라서 덜 탐구되었지만, 2017년 제89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역사적인 공헌을 인정받기도 했다. ‘평생공로’라는 상투적인 수사에 와이즈먼만큼 어울리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그가 남긴 개성적인 작품들은 교육적 가치를 지니며, 수도사적인 열정으로 만들어진 그의 영화들은 인간의 복잡성과 인류의 풍습. 제도를 끈기 있게 기록함으로써 영화와 삶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을 풍요롭게 했다. 촬영과 편집의 반복된 루틴을 벗어난 예외적인 작품이자 와이즈먼의 최고 작업 중 하나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이어진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화들은 폭넓게 배급된 적이 거의 없지만 이 역사적인 복원 작업은 더 많은 사람들이 와이즈먼의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티티컷 풍자극>부터 <주 의회>(2006)에 이르는 33편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가 복원의 대상이었다. 와이즈먼의 영화를 관리하는 지포라 필름(Zipporah Films)이 주도하고, 미 의회도서관과 하버드 필름 아카이브, 그리고 유수의 후반 작업 스튜디오인 듀아트(DuArt), 골드크레스트 포스트(Goldcrest Post)가 참여하여 2024년 완결된 복원 프로젝트는 단순히 한 감독의 작품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인류의 유산을 온존시키기 위한 뜻깊은 프로젝트였다. 시대의 조류에 밀려 기록보관소에 파묻힐 뻔했던 거장의 주옥편들이 원본 16mm 필름의 질감을 간직한 상태로, 4K 디지털 버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필름의 결을 매만지고, 그 표면에 조화로운 질감을 부여하며, 과거를 다시 쓰는 생명의 재탄생 과정에 비견할만한 이들 복원 작품이야말로 한국영상자료원 같은 필름 아카이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 중 하나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와이즈먼의 영화는 특정 순간의 기록을 넘어 역사적 ‘문서’가 될 것이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우리가 알던 기관의 본질도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공권력 집행 방식, 고등학교 교육의 모습, 복지 기관의 일 처리 방식, 의사들이 질병을 다스리는 접근, 인간의 식생활은 필연적으로 변한다. 옷차림, 언어 습관, 헤어스타일, 회의 방식, 심지어 신체 특성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의 사람들이 와이즈먼의 영화를 보며, 자신들의 현재와 과거 사이의 명확한 차이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될 것은 자명하다. (상) < 고등학교 >, <임사> 중 /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Film at Lincoln Center , © Zipporah Films (하) <발레>, <몬로비아, 인디애나> 중 /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좌 , 우 ), © Zipporah Films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유산이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것은 그의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특이점 때문이다. 소박한 제목의 작품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와이즈먼은 기관과 공동체의 모습을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인상적인 스타일로 기록하였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관습에 따라 원시적인 베리테(vérité) 스타일을 고수한 작가처럼 보이지만, 그는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인간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독창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와이즈먼은 결코 단순한 베리테 추종자가 아니다. 문학 작품에서 활용되는 서술자 시점을 영화의 서술에 이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던 와이즈먼은 철저히 주관적 관점에서 조망된 기관의 속살을 묘사하였다. 도시 건축의 기하학적 지표성, 수많은 복도와 거리 장면, 자동차의 이동을 주기적으로 삽입하는 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 샷처럼, 오직 와이즈먼에게서만 발견되는 일관된 스타일 장치이다. 그의 영화는 서로 맞물린 도시 교향곡 서사시의 개별적인 부분들처럼 기능한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리처드 리콕(Richard Leacock)은 관찰 다큐멘터리에서 영화감독은 ‘연출자’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와이즈먼에 관한 한 리콕의 말은 틀렸다. 와이즈먼은 관찰 양식을 채택했으나 그의 모든 영화는 온전히 그의 것이고,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대로 만들어졌다. 스타일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제목이다. 작명(作名)은 와이즈먼의 영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영감을 제공한다. 와이즈먼 영화의 제목은 문자 그대로의 기관을 나타내는 언어이자 제도이고, 제도와 연관된 인간 행위의 속성을 암시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기관의 이름이나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직업에서 추출한 제목은 일상의 힘과 제도적 차원의 사소한 결정들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포착한다. 대표작 중 하나인 < 복지 >(1975)를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의 서사는 뉴욕시의 복지 기관과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것이므로 장소를 제목으로 취한 와이즈먼의 다른 영화들처럼 <복지 사무소> 또는 <뉴욕 복지 사무소>라는 직설의 제목을 붙일 수 있다. <복지>와 <복지 사무소>라는 표제의 초점은 판이하다. 이 영화는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의 장소성을 탐구하는 좁은 의미를 초월하여 미국의 복지 제도와 시스템, 또는 더욱 추상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신체와 생활,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는 인간 활동을 주제화한다. 그곳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의 관계, 욕망, 희망, 좌절을 묘사하는 대목도 여럿이다. 따라서 복지 사무소에서 진행되는 영화는 역사의 특정 시점에 존재했던 장소와 사람들을 기록한 것이지만 제도와 인간의 영속하는 본질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 중 / 사진: Harvard Film Archive , © Zipporah Films 이것만으로도 위대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와이즈먼의 영화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작품 전체를 흐름을 살펴보면,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문법을 완전히 다시 쓰는 독창성과 정밀함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이는 와이즈먼이 고안한 규칙과 조건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스타일 체계에 의해 가능했다. 그의 성취는, 진정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은 이러해야 한다는 세간의 통념을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굳게 닫힌 기관의 문들을 열고,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카메라에 담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자연스럽고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스토리를 효율적으로, 빠르게 진행시키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수십 분에 달하는 회의, 토론 장면도 생략 없이 편집했다. 촬영 현장은 비(非) 개입주의에 따라 진행하지만 편집 단계에선 전적으로 주관에 의지하고, 편집의 자유로운 힘을 활용하여 틀에 박힌 의미가 아니라 해석적인 개인의 비전을 불어넣는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혁명적인 것을 조용하고, 겸손하게 한 예술가였다. 영화 역사를 지탱해 온, 기록과 구성의 이분법, 몽타주와 롱테이크의 대치,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을 초월하는 영화를 와이즈먼은 만들었다. 영화에서 ‘드라마’는 대개 격정적인 갈등이나 극적인 사건을 의미한다. 하지만 와이즈먼에게 드라마란 표면 아래에 숨겨진 추상적인 가치와 계급의 초상이다. 콜로라도주 아스펜을 소재로 한 <애스펀>(1991)에는 부유층 여피들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예리한 시퀀스가 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버림받은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소설 「단순한 마음」(A Simple Heart)에 관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소설 속 비극과 그들의 호화로운 삶 사이의 기묘한 반향을 만들어낸다. 이 장면은 플로베르의 스토리를 보여주기 위해 삽입된 것이 아니라 토론회에 참석한 부유한 여인들의 헛헛한 내면과 가치관에 대한 폭로로 기능한다. <애스펀> 중 /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 Zipporah Films 또 다른 예로 <법과 질서>(1969)에는 길 잃은 소녀를 다정하게 보살피는 경찰과, 매춘 혐의를 받는 흑인 여성을 무도하게 제압하는 경찰의 폭력이 동시에 담겨 있다. 와이즈먼의 렌즈 안에서 인간은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은 양극적 행동 양태 사이 어딘가에 분포해 있다. <복지>에는 반복적인 민원인의 요청에 앵무새 같은 말로 응대하는 복지 사무소 직원과 손수 민원인을 데리고 층을 옮겨가며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직원이 나란히 놓인다. 이런 대비는 영화와 영화 사이를 건너뛰어 발생하기도 한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다룬 <복지>나 <공공 주택>(1997)의 반대편에 상류층의 삶의 방식을 묘사하는 <백화점>(1983)과 <애스펀>이 놓인다. 달라스의 고급 백화점 니만 마커스(Neiman-Marcus)를 통해 부유층의 삶을 관찰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을 비추는 것만큼이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본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냉소적이라거나 따뜻하다고 단정 짓기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인정이 넘친다고 단정하기에, 우리가 마주하는 삶은 입체적이다. <공공 주택>, <백화점> 중 / 사진: MUBI , SIFF , © Zipporah Films 인간 행동에 대해 사회학적인 일반화에 저항하는 와이즈먼의 세계관은 언제나 ‘너머의 진실’을 보려 했다. 진정한 영화란 스크린 위의 영상과 관객의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탄생하며, 누군가는 희망을 읽고 누군가는 비관을 느낀다. 우리들이 와이즈먼의 영화를 보는 이유, 한 사람의 시선이 머문 기록물을 후대인들이 반복적으로 꺼내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에 관하여 웨스 앤더슨(이후 앤더슨)의 영화에 관한 주된 불평은 강박적이고 화려한 이미지의 형식적 아름다움에 비해 내러티브의 밀도가 낮다는 것이다. 영화의 서사가 지닌 명확한 목표가 있음에도 주인공의 감정과 주된 갈등에 집중하기보다 산만하게 여러 인물과 주변 사건을 나열하듯 펼치며,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를 표현하는 시청각적 형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럴듯한 가상의 세계 안에 살아가는 실제 인간이라기보다 인형극 속 인형처럼 존재하며, 배경이 되는 공간도 로케이션과 세트장의 구분 없이 무대화된 허구적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앤더슨 영화의 특성은 누군가에게는 불평을 넘어 시각적 스타일 외에는 말할 것 없는 텅 빈 영화라는 비판에 이르게 한다. 텅 비었다는 가치 판단을 제외하고, 강박적으로 통제된 시각적 이미지에 반해 내러티브가 온전히 제어되지 않고 산만하게 구성되어 형식과 내용 사이에 연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강박적으로 통제된 이미지를 통해 영화의 허구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서사에서도 그럴듯한 극적 이야기에 이르는 고전적 구조가 아니라 산만한 구성을 통해 몰입을 방해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영화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앤더슨 세계의 스타일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인 데뷔작 < 바틀 로켓 >(1996)을 보자. 영화의 핵심 사건을 이끌어가는 인물인 디그넌(오언 윌슨)은 서점과 공장을 터는 행위를 범죄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하듯 실행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작전은 장르 영화처럼 흘러가지 않고, 모방임이 드러난 방식으로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작전이 진행되거나 실패에 이른다. 그럼에도 디그넌의 계획들은 그가 추구했던 일상적인 삶 바깥의 일탈적 범죄에 도달하며 그 스스로도 만족한다. 법적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는 암울한 상황과 그 과정이 그럴듯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몽상가를 필요로 한다”라는 디그넌을 은유하는 영화의 핵심 대사 속에 꿈이란 고전적인 극적 구조로서의 환영이 아니라 그것을 모방함이 드러난 아마추어 같은, 어딘가 부족한 반쪽짜리 환영이다. 디그넌이 그랬던 것처럼, 앤더슨 세계의 꿈 혹은 영화적 꿈이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꿈이 주는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다. 그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방식에서 앤더슨은 기묘한 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시각적으로는 강박적으로 계산된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가시화한 프레임과 과도하게 장식적인 이미지로 인해 가짜임이 드러난 형식으로 보여준다. 환영적이면서 일면 자기 반영적(self-reflexivity)이기도 한 모순된 시각화 방식이다. 그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만든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2009)와 < 개들의 섬 >(2018)이라는 두 편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영화 간의 비교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완전한 가상인 그림이나 CG가 아니라 현실의 인형과 물질을 활용한 스톱모션으로 제작되어 애니메이션이라는 허구의 세계가 하나의 사실적 이미지이기도 함을 이중으로 드러낸다. 이는 현실의 인간들과 공간을 촬영한 영화를 정반대로 비현실적으로 연출하고 미니어처 애니메이션처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이미지를 다루는 앤더슨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가상의 것은 사실적으로, 사실인 것은 비현실적으로 그리며 ‘영화’라는 사실을 기록했지만, 이미지에 불과한 매체의 양면성이 빚는 감각을 극대화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앤더슨적인 스타일을 대표하는, 강박적 대칭 구도를 생각해보자. 오른쪽과 왼쪽이 데칼코마니처럼 같아 안정적 아름다움에서 오는 미적 즐거움과 그러한 구도가 극단적으로 반복되어 작위성이 드러나는 일종의 거리 두기 효과를 동시에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수평과 수직 트래킹 쇼트는 인물에게 다가가는 몰입의 효과도 있지만, 주요인물에게서 멀어지거나 관객들이 몰입하고 있는 프레임을 벗어나 공간이 확장되는 효과를 주면서, 우리가 몰입하고 있는 이야기 바깥에도 다른 세계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다만 이러한 프레임 밖을 비추며 나타나는 효과가 다른 사실주의 영화들처럼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통제 불가능한 세계의 잠재성을 확인시키는 열린 프레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앤더슨의 영화에서는 완전히 통제된 허구의 세계 바깥에도 통제된 다른 허구적 무대가 계속 이어져 있는 열려있지만 닫혀있기도 한 기이한 프레임의 성질을 나타내고 있다. 열려있지만 닫혀있고, 몰입시키면서 몰입을 저해하는, 이를테면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2023)에서 등장인물이 직접 소설 지문까지 읽는 형식처럼 앤더슨 영화의 내러티브에서도 환영성과 자기 반영성의 모순적 충돌이 일어난다. 그의 영화 대부분에서 중심인물에는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은 어머니의 죽음(<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 친구의 죽음(<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 아버지의 죽음(< 다즐링 주식회사 >), 부모님의 부재(< 문라이즈 킹덤 >), 아내의 죽음(< 애스터로이드 시티 >)과 같이 사적 전사(前史)를 이룬다. 보통 영화가 그러하듯 앤더슨의 영화에도 인물의 전사는 거대 서사를 만나 해결되는 고전적인 이야기 형태로 마무리된다. 다만 그 과정이 극적 구조로만 묘사되지 않으며 앞서 언급한 대로 산만하게 서브플롯을 다루거나, 시간 순서를 뒤섞거나, 막을 나누거나, 화면비와 색을 바꾸거나, 시각적 형식 자체가 서사의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고전적이지만 과정이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앤더슨 영화의 내러티브가 밀도가 낮다고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디그넌이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범죄를 모방하는 것처럼, 극적 밀도가 낮은 상태 혹은 고전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과정이 충돌하는 내러티브 방식이 앤더슨의 의도이다. 매혹 시키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작위성을 나타내는 이미지, 시각 형식의 모호한 감각을 즐기는 것이 앤더슨 영화의 핵심이듯 말이다.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에 이르면 앤더슨은 그러한 자신의 테마에 더 적절한 이야기 구조를 하나 덧붙인다. 수평 트래킹의 움직임을 따라 화면을 확장하여 우리가 보고 있는 허구적 세계 밖에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제된 움직임 아래 보여주었던 것처럼 액자식 구조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의 이전 영화처럼 주요인물의 결핍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 이야기 안에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젊은 시절에 겪은 영화적인 모험이 있고 그 극적인 사건 끝나고 회상 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결핍이 등장한다. 과거의 이야기, 허구적인 모험의 바깥에 전쟁이라는, 파시즘이라는, 독감이라는 재앙의 현실이 있고 더 바깥에는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주드 로/톰 윌킨슨)의 죽음이라는 시간이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에 시간은 약이 아니라 반창고는 될 수 있다는 대사처럼 제로가 작가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처의 회복이 아니라 슬픔과 약간의 위로뿐이다. 오기(제이슨 슈왈츠먼)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4.5광년 떨어진 별나라가 아니라 땅속에 있다고 말했듯, 앤더슨은 고전적 이야기 구조가 온전한 위로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미니어처처럼 작게 보이는 인간과 세계를 액자식 구조를 통해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바라보며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삶과 비슷하면서 다른 허구의 아름다움에 이입하거나 거리를 두며 나의 현실을 비추는, 낯설고 기묘한 감흥을 줄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자면, 앤더슨의 영화적 꿈이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크나큰 낙차에서 오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다. 가상의 공간, 애스터로이드 시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막 도착한 오기는 자식들에게 아내의 부고를 전하며, 과거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버지는 별나라에 계신다고 위로했던 일화를 말한다. 그는 그것을 부정하며 시간은 약이 될 수 없고, 반창고 정도는 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처음부터 고전적인 이야기의 허구적 위로가 불가능함을 선언하듯 시작한다. 그럼에도 가상의 공간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결핍을 지녔거나 상처를 지닌 캐릭터들이 모여든다. 중심인물인 오기는 아내의 죽음을 겪었고, 밋지(스칼렛 요한슨)는 전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다. 이 두 사람은 1층이지만 전경만 보면 공중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 창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의 과거와 상처를 말하고, 사진을 찍고, 연기 연습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창을 경계로 마주 보는 두 인물의 관계는 각각 카메라와 피사체이자 관객과 배우처럼 느껴진다. 창이라는 프레임을 경계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인물의 구도와, 오기가 사진작가이고 밋지가 배우라는 직업적 위치가 그러한 생각을 강화한다. 여기에 왜 자신과 오기가 가까워졌는지 알겠다고 말하는 밋지의 말이 덧붙여진다. 둘은 비슷하므로 가까워졌다.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 아픔을 숨기고 있다는 유사성 때문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못한다. 카메라와 피사체, 관객과 배우는 아픔, 결핍을 매개체로 이어져 있다. 물론 시선을 끌어당기는 볼거리라는 본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대개 관객들은 현실과 닮은 허구의 고통과 갈등에 이입한다. 때문에, 영화의 시작에서 해설자(브라이언 크랜스턴)가 완전한 픽션이라고 선언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도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모여든다. 그렇지만 앤더슨 영화가 늘 그러하듯,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인물들의 전사와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액자식 구성을 오가며 여러 인물의 서브플롯들을 산만하게 비춘다. 외계인이 소행성을 훔쳐 가는 비일상적인 사건 또한, 보통의 고전적 이야기 구조라면 주인공의 결핍이나 상처를 거울처럼 비추는 은유가 되거나 갈등을 해소하는 거대 서사로 기능하지만 오기와 밋지에게는 그렇지 않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밋지는 오기에게 느낌이 다르냐고 묻고 오기는 아무 느낌 없다고 답한다. 그러고 얼마 후 외계인이 나타나 훔쳐 갔던 소행성을 돌려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외계인은 왜 소행성을 가져갔고 다시 돌려놓았을까? 우드로(제이크 라이언)는 외계인이 소행성을 가져간 후 오기에게 “이제 세상이 변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외계인이 또 올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우리는 아는 것이 없고, 어쩌면 저 우주에 뭔가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외계인이 소행성을 돌려놓고 변한 것은 우습게도 소행성에 적혀진 품목번호뿐이다. 외계인(제프 골드블룸)을 연기하던 배우 또한 외계인 탈을 벗고 자신은 외계인을 하나의 메타포로 이해한다고 말했을 때 오기가 무엇에 관한 메타포냐고 되묻자 대답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모호하다고 답한다. 즉 이 코스믹 한 해프닝은 그저 픽션에 필수 불가결한 비일상적인 사건으로서만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때문에, 오기 역할을 연기하던 존스는 혼자 중얼거린다. “이 연극이 이해가 안 돼” 그는 이 말을 내뱉고 무대 뒤로 연결된 문을 열고 연극 연출자에게 향한다. 허구의 이야기가 상연되는 무대 밖을 벗어나 횡적으로 이어진 여러 공간을 지나쳐 오기는 연출자를 호출한다. 자신이 제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계속 연기를 해야 하는지, 저 우주엔 뭔가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으며 이 연극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주연 배우에게 연출자 슈버트(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Doesn't matter, Just keep telling the story)”라고 말한다. 외계인의 말대로 모든 것이 모호하고, 해설자의 말처럼 현대 연극으로 정의되는 이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창작과정의 고통을 묘사하는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답을 내리지 않는 이 둘의 대화에는 이상한 감동이 있다. 내가 아닌 캐릭터의 상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는 오기이자 존스의 고민에 연극이라는 하나의 작은 우주를 통제하는 연출자가 삶의 고통 속에서도 그저 계속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전하는 말이 현실 세계를 향한 코스믹(Cosmic) 한 시선의 조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밖에서 안으로 히켄루퍼 박사(틸다 스윈튼)는 우드로를 위로하며 자신의 어머니도 46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공통점으로 서로의 마음에 공감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어른의 마음과 얼마 전에 일을 겪은 아이의 마음은 같을 수 없다. 다만 46년이라는 시간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면 그때는 우드로가 박사의 마음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외계인이 등장하는 코스믹 한 사건에도 어른들은 시큰둥하고 격리된 상황에 불평만 늘어놓지만, 아이들은 외계인을 향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보이며 통제된 상황을 타개할 작전을 세운다. 이 맹랑한 아이들도, 죽은 딸이 과거에는 손녀들 같았다고 말하는 스탠리(톰 행크스)의 대사처럼, 언젠가 어른이 될 것이다. 당연히 히켄루퍼의 말대로 몇조 킬로미터 떨어진 별의 빛이 우리에게 닿은 시간만큼은 아니겠지만 끝없이 흐르는 우주적 흐름대로 말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액자식 구조의 여러 겹의 세계 속 현실과 허구를 오가며, 스토리텔링 하는 연기자들처럼 우리의 삶도 일면 가상적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이, 삶의 고통이, 우주인의 등장과 같은 허무맹랑한 사건이 등장하더라도 결국, 이야기의 처음에 보여주었던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황량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우주의 순환적 시간 아래 그러하다. 대신 이러한 무기력함, 허무함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잠을 자는 것이라 덧붙인다. 언젠가 죽음의 시간이 찾아오면 오기의 말대로 땅으로 돌아가 영원한 잠을 자게 되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자는 잠에는 꿈이 존재한다. 연기 학교의 선생님 솔츠버그(윌렘 데포)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자는 건 죽는 것이 아니다. 숨 쉬고 심장이 뛰고 생각도 한다. 죽은 엄마를 만날 수 있고, 전처나 전남편과 잘 수도 있고, 마테호른에 오를 수도 있다. 그게 스토리가 될까? 되지, 밖에서 안으로 씬을 구성해보자고” 밖에서 안으로 씬을 구성한다. 이는 꿈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현실로 삶을 구성한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안에서 도저히 이 연극을, 이 삶을 이해할 수 없던 오기는 밖으로 나간다. 그 밖이란 무대를 넘어 연극이 상연 중인 건물 외부까지 향한다. 이때 그는 연극에서 잘린 배우를 만나게 된다. 오기의 아내 역할을 했던 배우(마고 로비)와 삭제된 장면의 대사를 나누는 이 장면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오기의 죽은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씬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극적 상황이 아닌 일상적 위치에서, 두 인물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삭제된 대본을 아내 역할의 배우가 혼자 상대의 대사와 지문까지 읊고 있는 자기 반영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두 배우에게 이 대본 리딩은 감정적인 몰입의 순간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 겪은 작은 대화처럼 지나가며, 좋은 회상인데 왜 잘랐는지 서로 의문을 표하며 가볍게 헤어진다. 정작, 이 장면 속에서 별나라에 있는 오기의 엄마를 만난 것처럼, 죽은 아내와 조우하게 되는 것은 스크린 밖 우리 관객들이다. 측면에서 두 인물을 약간 멀리서 비추는 쇼트들이 지나가고, 대사의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정면 바스트 쇼트에서 클로즈업 쇼트로 인물을 비추면, 그 쇼트들이 만드는 환영적 효과는 관객들에게 약은 아니지만, 반창고와 같은 작은 위로의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우리가 오기의 죽은 아내를 보지 못했지만 본 것처럼 느끼듯, 배우인 존스가 대본에서 삭제된 부분을 상대역을 통해 듣는 것일 뿐 오기라는 연극 속 캐릭터가 겪은 경험이 아님에도, 오기가 꾸는 꿈처럼 느끼게 한다. 이는 밋지와 창을 통해 나누었던 장면의 구성과도 공명하면서 이해할 수 없던 연극의 의미를 부여하며, 무대의 안과 밖, 스크린의 안과 밖의 경계를 어지럽게 뒤섞으며 환영성과 자기 반영성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난 돌아올 수 없어 오기”라는 아내의 슬픈 대사와 함께 존재의 부재증명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사진을 냉정하지만 일면 따뜻하게 마주하게 한다. 결국,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오기가 무대를 탈주하며 이어지는 이 장면들을 통해 꿈이, 허구가, 이야기가 주는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 뒤섞인 앤더슨 세계의 모호한 매혹을 잘 드러내는 최상의 것으로 남는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이 탁월한 시퀀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연극의 극작가 콘래드(에드워드 노튼)의 죽음을 알리며 모든 연기자가 다 같이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라는 대사를 외치는 씬으로 이어진다. 콘래드가 연극의 주제가 무엇이냐는 배우의 질문에 “무한함? 나머지는 잘 모르겠어”라고 말한 것처럼, 앞과 뒤를 알 수 없이 순환하고 있는 이 문장은 앤더슨식 세계를 더없이 적절히 요약한다. 이제 영화의 엔딩에서 우리는 잠에서 깬 오기의 모습을 보며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극작가가 신비한 우주적 체험을 공유한 모든 등장인물이 몽환적인 잠 속으로 제각기 빠져드는 씬을 구상 중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여전히 연극 속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이것이 안인지 밖인지 헷갈릴 때쯤, 영화는 죽은 엄마를 향해 기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무신론자의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돌아올 수 없다”라는 삭제된 꿈 장면의 슬프지만 차갑기도 한 대사처럼, 신을, 꿈을, 허구를 믿지 않지만, 반창고 같은 위로를 기대하며 그렇게 영화라는 잠에 빠지고 꿈에서 깨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