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
- 감독
- 장기철
- 제작년도
- 1996
2021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코로나19 발생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는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로 인한 확진자와 중증환자의 급증으로 산산이 깨졌다. 작년 연말이 돼서야, 이젠 2020년 2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완전히 다른 시대가 도래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눈으로 보이는 세상의 풍경이 그렇게 달라진 건 아니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좀 덜 돌아다니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긴 하지만 어딜 가든 조금만 유명한 곳들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극장의 풍경은 다르다. 코로나 상황 때문에 신작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잠시 활기를 띨 만하면 방역 조치가 강화되는 악순환이 2년째 반복되면서, 극장은 점점 조용해지고 있다. 이렇게 적은 관객들로 극장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영화론자’나 ‘영화주의자’들이 극장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극장에서 영화보는 일을 찬미하지만,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극장의 죽음은 이젠 가까운 미래의 일이 되어버렸다. 관객이 사라진 조용하기도 스산하기도 한 극장에 갈 때마다 쓸쓸했다. 이 고요함 속에서 때론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은 늘 낮은 곳부터 고이므로 실질적 피해는 영화산업을 하부에서 받치고 있는 작은 회사들과 독립창작자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극장에 갈 수 없는 관객에게는 OTT가 대안일 수 있겠지만, 산업 안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도 거대 자본이 만들어낸 OTT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가급적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들을 더 많이 포함시키고 싶었다. 올해에는 나의 2021년 사사로운 리스트 10편의 영화 중 클레이 자오의 < 노매드랜드 >에 대해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좋은 평론가들의 훌륭한 글에 더 보탤 말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노매드랜드>가 품고 있는 고통과 아름다움에 대해 몇 마디 더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극장에서 본 영화였고,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린 영화였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노매드’는 누구인가? 영화 <노매드랜드 Nomadland>의 제목은 떠돌이, 뜨내기, 부랑자, 정착하지 못하는 자, 유목민, 유랑자, 방랑자 등등의 뜻을 가진 ‘Nomad’와 땅 또는 지역이라는 뜻의 ‘Land’가 합쳐진 단어인데, 원작도 같은 제목이다. 그런데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쓴 이 원작 논픽션에는 부제가 달려 있다.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 Surviving America in the Twenty-First Century.” 그는 2014년 하퍼스 매거진에 ‘은퇴의 종말: 노동을 그만둔 삶을 감당할 수 없어질 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글을 읽고 감동 받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노매드랜드」를 출간했다. 여기서 ‘노매드’는 ‘노매드 노동자’, 혹은 ‘워캠퍼(workapmer = work+camp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2007년과 2008년 사이 발생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인해 미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했다. 주로 이 시기에 평생에 걸쳐 쌓아온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린 은퇴자들인데, 전통적인 형태의 벽과 기둥으로 된 집을 포기함으로써 집세와 주택담보대출금의 족쇄를 끊어버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밴과 RV, 트레일러를 집 삼아 좋은 날씨를 따라 단기 일자리에서 다른 단기 일자리로 이동하면서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계절에 맞는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물론 이들이 단지 경제적인 어려움만으로 떠밀리듯 이런 삶을 선택한 건 아니다. ‘노매드’로서의 삶은 은퇴 후의 경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이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노매드’들끼리 적극적으로 연대하기도 한다. 저자 제시카는 2014년부터 무려 3년 동안 실제 RV에서 살면서 ‘노매드’들을 따라 약 2만 4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 클레이 자오의 영화와 그의 세계 제시카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원작에는 저자의 취재를 도와 노매드의 세계로 안내해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린다 메이’라는 이름의 이 인물은 영화에도 같은 이름으로 직접 출연하는데, 영화에서도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난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을 노매드의 세계로 안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제작자이기도 한 배우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오래된 동료 제작자인 피터 스피어와 함께 이 책의 판권을 구입한 후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영화로 옮겼다면, 그 영화는 아마도 저자인 제시카나 린다 메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노매드들의 일상을 따라가는, 그럼으로써 미국 사회의 또 다른 현실을 들여다보는 정치적이고 시사적이며, 고발적인 영화, 차갑고 딱딱하고 쓸쓸한 톤의 영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러브콜을 흔쾌히 받아들인 클레이 자오는 뻔하고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클레이 자오는 원작의 세 번째 챕터에 나오는 미국의 오래된 기업의존형 도시인 엠파이어를 고향으로 둔 ‘펀’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만들어냄으로써, 원작이 그려낸 부조리한 미국 사회를, 꿈과 결핍을 숙명처럼 안고 사는 사회적 약자들이 살고 있는 클레이 자오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 실제 ‘노매드’들을 영화에 출연시켜 자신의 삶에 대해 발언하게 함으로써, 원작의 르포르타주적인 면을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영화화했다. <노매드랜드>는 마치 실제 ‘노매드랜드’라는 현실 속에 전문배우인 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데이빗 스트라탄을 투입하여 영화를 찍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감독과 훈련된 전문 배우들은 노매드들의 진짜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함께 들어주고, 카메라에 담긴 이들의 이야기는 <노매드랜드>의 서사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영화만들기 방식은 캐나다 퀘백 지역을 대표하는 드니 코테 감독이 2009년 연출한 다큐멘터리이자 극영화인 <카르카세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에서 드니 코테는 수백 대의 자동차의 무덤에서 살아가는 한 노인의 집 마당에 4명의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의도적으로 투입하여 서사에 긴장을 만들어냄으로써 서사를 진행시켰다. 클레이 자오 감독은 이처럼 자기만의 영화만들기 방식을 통해 다루는 주제와 소재, 인물과 사회적 맥락의 역학 관계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한편, 어떤 영화에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이식하고, 자신만의 인장을 찍어왔다. 그의 경력과 전작을 살펴보면 그는 정말 '이상하고 특별한' 감독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으면서도 미국적 가치와 정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으며, 그걸 섬세하게 영화에 담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특별한 재능은 <노매드랜드>에서 정점을 찍었다. 1982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는 15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사립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는 뉴욕대에서 영화를 전공하기 전 에밀리 디킨스의 모교였던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도대체 왜 중국인들은 함께 모여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정치학을 시작했지만 그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 사회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장편 데뷔작 <내 형제가 가르쳐준 노래>(2015)와 두 번째 영화 < 로데오 카우보이 >(2017)를 연달아 만들었다. 배경, 인물, 주제, 배우, 연출방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연작이나 다름없는 이 두 영화에는 클레이 자오의 영화 세계를 떠받치는 주요 특징들이 모두 담겨 있다. 장편 데뷔작 <Songs My Brother Taught Me>는 - 국내 포털에 <내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라는 제목으로 올라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Brother’는 ‘형제’가 아니라 ‘오빠’로 번역되는 것이 맞다. 이 영화가 국내에서 정식으로 상영된 후에 포털에 제목이 올라갔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아마도 <오빠가 가르쳐준 노래>가 되었을 것이다. -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오빠와 여동생, 남매의 이야기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우스 다코타의 파인 릿지 인디언 보존지구에서 살고 있는 10대 소년 조니인데, 그는 졸업 후 여자친구와 함께 이곳을 떠나 LA에 가서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는 건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여동생이다. 한편, 그로부터 2년 후 같은 지역에서 촬영된 두 번째 영화 <로데오 카우보이>의 주인공은 이제는 한물간 로데오를 사랑하는 브래디다. 그는 로데오 경기 중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후 가족을 위해 자신의 간절한 꿈을 포기하는데, 여기에도 핸디캡을 가진 여동생이 등장한다. 이 두 영화는 모두 가족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청년과 여동생으로 상징되는 가족, 그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무나도 미국적인 이 두 편의 영화 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여동생은 마치 클레이 자오 감독처럼 느껴지는데, 감독은 이런 방식을 통해 그가 품었던 ‘가족주의’에 관한 질문과 그 답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화에 담아낸다. 클레이 자오가 담아낸 노매드의 세계 클레이 자오가 <노매드랜드>에서 창조한 ‘펀’이라는 인물 역시 상실감과 결핍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인물이다. 펀은 2편의 전작에서 창조한 두 청년과 여러모로 닮아있다. 남편을 잃은 ‘펀’은 마치 이들의 40년 또는 50년 후의 모습 같다. 꿈을 포기하고 가족을 선택한 이 두 청년들은 평생 결핍과 상실감은 숨겨둔 채 살다가, 가족마저 사라지면 그들의 어깨에는 허무함이 하나 더 얹어질 것이고, 결국 그들은 평생을 부유하듯 살게 될 것이다. 뗄 수 없는 결핍과 상실감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은 < 이터널스 >에서도 변함없이 등장한다. 게이, 흑인, 애정 결핍, 치매, 청각 장애 등 너무 정치적이어서 오히려 재미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초능력과 함께 결핍을 부여받은 히어로들, 결국 지구인에 대한 애정으로 창조주를 배신한 그 히어로들은 영원히 상실감을 껴안고 살아갈 것이다. 클레이 자오의 세계에 존재하는 중요 인물들은 이런 상실감과 결핍으로 규정된다. 클레이 자오는 남편이 죽은 후 남편과 함께 살았던 하지만 이제 망해버린 엠파이어를 떠난 펀의 이야기, 그리고 펀이 길 위에서 만난 노매드 노동자들의 이야기, 이 두 개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그리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결핍과 상실감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들의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지는 도구로써, 미국 서부의 눈부시도록 쓸쓸하고 아름다운 실제 풍경을 영화 곳곳에 배치한다. 그는 이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약 5개월간 25명의 스텝과 함께 일곱 개 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표현법 때문에 너무 낭만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능한 비판이겠지만, 기억할 것은 아무리 고단한 인생이라도 삶의 숨통을 띄워주는 낭만의 순간들을 에너지원 삼아 한발 한발 전진한다는 것이고, 또한, 항상 슬픈 표정으로 있어야만 피해자가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늘 고통받고 힘든 표정으로 사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피해자에게는 피해자답기를 요구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난한 사람답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들이 진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의도치 않게 사회가 약자와 피해자들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약자성’ 또는 ‘피해자성’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펀의 내면은 이미 황폐할 대로 황폐해졌고, 그는 생계를 유지할 충분한 돈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편하게 정착해 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다시 길 위에 선다. 이제 길 위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주어진 노동을 하고, 밴을 타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차박’을 한다고 해서 그의 삶이 진실하지 않거나, 그가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다. 서부극으로써의 <노매드랜드> 영화를 보다가 이 영화의 장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건 ‘펀’의 여동생이 던진 말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언니를 방어해주기 위해 동생은 이렇게 말한다. “노매드들이 하는 일은 개척자들이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난 펀이 미국 전통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이 말은 이 영화를 자연스럽게 서부극과 연결시킨다. 이미 클레이 자오는 서부극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두 번째 영화 <로데오 카우보이>가 공개된 후 언론은 이 영화를 ‘웨스턴’ 장르로 이해했고, 인디와이어는 이 영화에 대해 ‘한 중국 이민자 출신의 영화감독이 미국의 가장 오래된 장르(웨스턴)를 혁신적으로 바꾸어냈다’고 평했다. 실제로 클레이 자오 감독은 <노매드랜드>에서도 웨스턴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이터널스> 전까지 자신의 모든 영화를 촬영했던 촬영감독 조슈아 제임스 리처드와 함께 <노매드랜드>를 촬영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펀’이라는 인물은 결국 집을 떠나 황야로 걸어 들어가는 존 웨인의 현대적인 캐릭터이어야 하고, 존 포드의 고전 영화를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쇼트들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 배치되어야 한다고. 이렇게 해야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포획된 한 인물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서부극에 등장하는 서부개척자들 또는 영웅들과 노매드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서부극의 인물들은 도착과 정착을 원하지만, 노매드들은 떠남과 방랑을 원한다. 서부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집과 마을을 지을 장소를 향해 전진한다. 그들은 항상 수평선을 향해 걸어가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노매드랜드>의 노매드들은 정착했던 곳을 떠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수평선을 향해 가지만, 그 너머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들의 집은 길이다. ‘펀’이 분명하게 말했던대로 그들은 houseless지만 homeless는 아닌 것이다. 로드무비로써의 <노매드랜드> 그러므로 <노매드랜드>의 인물들은 정착하고 머물던 곳을 떠나 길 위에 선다는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서부극이라기보다 오히려 로드무비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서부극은 마지막에 갈등이 해결되고, 로드무비는 끝날 때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과정에서 인물은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런 면에서 태반의 로드무비는 성장영화와 동의어다. 하지만 <노매드랜드>는 이런 일반적인 로드무비와 다르다. <노매드랜드>의 펀은 길 위에 있지만, 목적이 없다. 그는 생존을 위해 길을 선택한 자다. 그의 목적은 방랑이다. 그래서 그는 정착을 두려워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두 번씩이나 정착할 기회를 얻는다. 한번은 여동생에게서, 한번은 남자친구에게서, 그러나 그는 편안한 침대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선다. 모두가 이런 삶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사실 마음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일부러 육체적 불편함을 선택하는 일은 그렇게 낯설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몬티 헬만의 마스터피스 < 자유의 이차선 >의 낭만주의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1968년 파격적인 결말을 담은 전설적인 로드무비 < 이지라이더 >가 세상에 나온 지 3년 만에 나온 이 영화는 건조하고 불친절하지만 도전적인 로드무비이면서 <이지라이더>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결말을 가진 영화다. 몬티 헬만의 최고 걸작이며, 영화사에서도 <분노의 총성>과 함께 종종 언급되는 영화다. 로드 무비의 장르적 컨벤션을 전복시키는 이 영화는 제대로 된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이 왜 차를 집처럼 여기면서,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끊임없이 자동차 경주를 하면서 앞으로만 달리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질주한다. 목적지가 동부인 것 같지만, 왜 거기까지 가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다. <자유의 이차선>이 내재하고 있는 주제는 이렇게 <노매드랜드>의 주제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 두 영화 모두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차의 이미지로 끝이 난다. 물론 <자유의 이차선>이 한 발 더 나아가지만, 목적과 목적지 없이, 오직 차로 달리는 것만이 목표인 로드무비는 50년 후에 한 이방인 출신의 미국 감독의 손을 통해 환생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격변의 60년대를 방황하던 <자유의 이차선>의 이름 없는 젊은이들은 50년 후 <노매드랜드>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파산한 ‘노매드’의 모습으로 다시 길 위에 선 것이다. “어디에나 틈은 있어. 빛은 그 틈을 통해 들어오지“ 제시카 부르너의 <노매드랜드>의 원작 첫 장에는 레너드 코먼의 문구가 써 있다. "어디에나 틈은 있어. 빛은 그 틈을 통해 들어오지." 클레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원작을 클레오 자오의 방식으로 변주한 영화지만, 원작과 마찬가지로 ‘틈과 빛’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본주의의 틈에 끼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집이 아닌 길을, 정착이 아닌 방랑을 선택한 자들에 관한 영화. 그‘노매드’들이 틈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찾아가는 영화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건 단순히 사회적 약자를 따뜻하게 그려냈다거나, 눈부신 미국 서부의 풍경 때문이 아니다. 살아갈 이유가 사라져버린 희망 없는 인생도 살아낼 수 있는 세계, 동산과 부동산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시스템 밖에서도 가능한 삶이 존재하는 세계, 전통적인 사회적 통념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를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긍정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쓸쓸한 세계에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돌아오고(오빠가 가르쳐 준 노래), 결국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하며(로데오 카우보이), 살기 위해 길 위에서 노동을 하고(노매드랜드), 각자 결핍을 가진 초능력자들이 사랑 때문에 창조주(부모)의 명령을 거부한다.(이터널스). 이렇게 클레이 자오의 세계 속에는 꿈 같은 거 없이 상실감과 결핍 속에서 허덕이면서도 존엄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좁은 틈으로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바라보고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란 1965년 디즈니가 테마파크 건설을 위한 플로리다주 올랜도 부동산 매입계획에 붙인 가칭이다. 그렇게 지어진 디즈니월드는 여전히 성업 중이지만 가족 단위 투숙객을 겨냥한 인근 저렴한 모텔들은 2008년 경기침체 이후 극빈층의 임시거주지로 용도가 변경됐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이라 안정된 주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남의 집에 얹혀살거나, 차에서 먹고 자거나, 모텔에 주 단위로 투숙하는 소위 ‘숨은 홈리스’(Hidden Homeless) 현상이다. 숀 베이커 감독의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192번 국도 주변 퇴락한 모텔 매직 캐슬을 로케이션으로 삼아, 디즈니 월드 지척에 살면서도 디즈니 월드와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에 속하는 여섯 살 소녀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친구들의 여름을 지켜본다. 아직 10대 티를 벗지 못한 엄마 핼리(브리아 비네트)는 하루 38달러의 방값과 다음 끼니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처지다. 그러나 말썽쟁이 무니에게 알록달록한 모텔 동네와 기념품 가게들은 신나는 놀이터고 교육의 부재는 무한한 자유다. 소녀는 관광객에게 잔돈을 얻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일이 하나도 슬프지 않다. 엄마끼리 친구인 아래층 스쿠티(크리스토퍼 리베라), 이웃 퓨처랜드 모텔에 새로 이사 온 잰시(발레리아 코토)와 삼총사를 이룬 무니는 어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부류의 꼬마다. 자동차 창에 침 뱉기 게임을 하고,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가 두꺼비 집을 내리고, 일광욕하는 아줌마를 놀리며 뛰어논다. 말할 나위 없이 한 발 떨어져 보면 아이들의 일상은 위험투성이다. 국도에는 자동차가 질주하고, 수풀에서는 악어가 나올지도 모르고, 공사가 중단된 주택단지에선 뭐가 떨어질지 모른다. 수상한 취향의 뜨내기 아저씨가 노는 아이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무니의 매일은 여름 캠프처럼 즐겁지만, 엄마 핼리는 생계를 점점 위험한 방법에 의지하게 되고 이는 여름의 파국으로 이어진다. 보호자들이 돈을 버는 사이 본의 아니게 모텔 아이들의 안위를 챙기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매직 캐슬의 관리인 바비(윌렘 데포)다. 관광 모텔이 빈민 레지던스로 변하면서 모텔 매니저인 그는 업무 내역에도 없는 ‘생활주임’ 노릇을 한다. 투숙객들은 그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의지한다. 숀 베이커 감독은 이 사내를 가부장적 시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모텔 주인의 피고용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명백히 인식하면서도 무니 모녀가 최악의 상태에 떨어질까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바비는 수호천사도 선한 사마리아인도 아니고 그저 다른 인간의 곤경에 감응하는 인간이다. 모녀를 염려하지만 도울 길이 무망하다는 점에서 그는 관객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는 부산한 일과를 마친 그가 어스름을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일 때 찾아온다. 바비가 첫 연기를 작은 한숨처럼 내쉬자 모텔 복도 외부 등이 일제히 들어오는 순간은, 이 남자가 ‘매직 캐슬’을 지키는 소박한 마법사임을 말하는 매직 아워다. 바비는 관객의 대리자일 뿐 아니라, 사회 주변부에서 겨우 생존을 이어가는 인물들을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감독이 택한 윤리적 포지션도 암시한다. 우선 미국 영화에서 거의 재현되지 않는 극빈층 아웃사이더의 삶과 그들의 생활공간, 그들이 매일의 빵을 얻는 지하경제는 숀 베이커 감독이 줄곧 이끌리는 소재다. 2012년 작 < 스탈렛 >은 샌 페르난도 밸리의 백인 포르노 배우가 노년의 여성과 맺는 우정 이야기였고 바로 전작 < 탠저린 >은 매춘으로 먹고사는 트랜스우먼 친구 둘의 크리스마스이브를 그렸다. 이와 같은 소재에 접근하면서 숀 베이커 감독은 외부자로서 취하기 쉬운 분노나 동정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내려다보지 않고 옆자리를 지키며 그들의 삶에 내재한 아름다움과 어두움을 그대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핍한 삶에서 방점은 궁핍이 아니라 궁핍이라는 조건을 수반한 삶에 있어야 한다고 숀 베이커의 영화는 믿는다. 예컨대 < 플로리다 프로젝트 >의 도입부에는 무니가 침을 뱉은 차의 주인이 따지러 오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내키지 않는 투로 무니의 손목을 끌고 간 엄마 핼리는 피해자 아주머니와 벌 받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아주머니도 처지가 딱해진 딸 대신 손자를 키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담배를 나눠 피는 두 여자 사이에는 어느새 미묘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이 아이들을 보라!”는 계고의 메시지와 거리가 멀다. 숀 베이커의 시나리오와 카메라는 가난한 어린이의 가난에 집중하는 대신, 아이를 아이답게 만드는 환희와 활력을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의 객관적 궁지도 직시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극 중 개인도 천사와 악마로 만들지 않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선한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절망을 착취하는 수많은 영화들이 입증한 바 있다. 핼리는 누가 봐도 훌륭한 엄마가 아니다. 부분적으로 무책임하며, 어리석은 선택도 한다.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팔려고 어린 딸과 함께 호객하고, 매춘을 위한 프로필 사진 촬영을 딸과의 놀이로 만들어버리는 핼리의 행동은 충분히 우려스럽다. 그녀가 딸에게 선물하는 사치는, 좀 더 고급스런 모텔의 아침 뷔페에서 누리는 도둑 포식이다. 숀 베이커 감독은 핼리를 변호하지 않으나 이 캐릭터를 판정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핼리를 한심해 하면서도, 이 어린 엄마가 무니에게 최고의 친구이며 무니를 온 세상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사필귀정이라는 안도감과 모녀가 헤어지는 일은 옳지 않다는 감정 사이에서 흔들린다. 영화의 최선은 때로 관객 안에 진정한 갈등을 심는 것이다. 전작 < 탠저린 >을 아이폰 5S로 스크린에 손색없이 아름답게 촬영해 화제를 모았던 숀 베이커는 ‘아이폰 감독’으로 세상에 기억되는 일을 방지라도 하듯 < 플로리다 프로젝트 >를 35밀리 필름으로 찍었다.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감독의 < 사일런트 라이트 > <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 >를 촬영한 알렉시스 사베가 카메라를 담당했다. 실제 로케이션에서 촬영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프레임은 연보라와 오렌지, 플로리다의 환한 푸른색으로 가득하다. 혹자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현실의 어둠과 배치되는 컬러의 역설에서 찾겠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숀 베이커는 그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장소의 공기를 주민의 눈으로 포착할 줄 안다. 저예산 영화 다섯 편을 만들며 세트 없이 인물의 생활공간에서 영화적 긴장을 발견해 온 경험은 그의 커다란 자산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많은 숏은 성인의 허리께에 오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순진한 흥분과 거기에 무심한 세상의 압도적 사이즈를 전한다. 그러나 숀 베이커는 특정 스타일에 고착하는 감독은 아니다. 존재감이 엷고 기동성 높은 스마트폰 촬영으로 비전문 배우의 거침없는 연기를 따라잡고 부추겼던 <탠저린>과 대조적으로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주의 깊은 블로킹과 프레이밍이 만들어 낸 숏으로 지지된다. 어린 배우들로부터 의도한 결과를 끌어내는 데에 실용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뇌관인 무니 역 브루클린 프린스의 연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널리 회자될 터라 여기서는 말을 아끼기로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공개된 후 프린스와 자주 비교되는 대상은 최연소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됐던 <비스트>(2012)의 크반자네 왈리스인데 왈리스가 아이로서 존재를 그대로 카메라 앞에 드러내는 연기를 했다면 브루클린 프린스의 그것은 타고 난 배우의 철저히 리허설 된 연기다. 이런 영악한 속성이 스스로를 세상의 주인공으로 믿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무니라는 소녀의 성격과 조화롭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내내 관객을 이끌고 무니의 세상을 기웃거리고 뛰어다니던 < 플로리다 프로젝트 >는 마지막에 이르러, 마치 지금껏 한 번도 달리지 않았던 것처럼 달려나간다. 질주인지 비상인지 구분하기 힘든 이미지 앞에 떨면서 나는 딱 한 가지만 잊지 않으려고 했다. 예술이 세계를, 예술가가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좋은 방법을 아는 영화를 방금 봤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