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
- 감독
- 조르죠 팔피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요안니스 코키아스메노스, 마리아 디아코파나지오티, 아르기리스 판타자라스, 안토니스 카펫조폴로스, 안토니스 치오치오풀로스
클릭시 확대 ㅇㅇㅇㅇ ㅇㅇㅇ ㅇㅇㅇㅇ 2 클릭시 확대 ㅇㅇㅇ ㅇㅇㅇ ㅇㅇㅇ 고전 번역의 의의, 『영화. 심리학적 연구』(후고 뮌스터베르크, 1916) (지식을만드는지식) 윤종욱(영화 연구자 및 번역자) 2026년 1월에 후고 뮌스터베르크의 『영화. 심리학적 연구』가 번역, 출간되었다. 1916년에 쓰인 이 책은 영화가 인간의 주의, 기억, 감정을 어떻게 조직하는지 묻는다. 출간된 지 한 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 영화가 스크린 바깥의 디지털 환경으로 확장된 시대에 나는 번역자로서 이 오래된 질문과 대답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다. 이 글은 한 권의 고전을 번역하기로 결심한 이유, 110년 전의 낯선 이름들과 장치들 사이에서 길을 찾던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번역이 학문 공동체에 남길 수 있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이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독문학을 전공했던 나는 대학원 수료 후 독일에서 10년 동안 영화학을 공부했다. 독일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 중 하나는 발터 벤야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루돌프 아른하임, 벨라 발라즈와 같은 독일어권 출신의 영화이론 선구자들이었다.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들의 저작 중 일부는 당시에 이미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었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 『예술로서의 영화』(1932), 『영화의 이론』(1960) 같은 거대한 제목은 어딘지 모르게 독일의 학문적 전통에 대한 믿음을 부여했다. 영화사 초기부터 영화를 새로운 예술형태로서 진지하게 다룬 저작에 대한 경이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책을 통해서만 알던 영화를 일주일에 서너 편씩 보며 영화학의 다양한 분야에 관한 강의와 세미나에 참여했다. 학과에서 대여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영화인들을 초청해서 진행하는 수업을 듣는 일은 특히 즐거웠다. 한 학기 수업을 마치고 학업 평가는 기말 리포트로만 진행한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매 학기 여러 편의 기말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자료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단과대 도서관에는 영화학 관련 서적만 따로 모아둔 서가가 있었고, 영상자료실에서는 독일에 소개되었던 거의 모든 영화를 비디오테이프와 DVD로 볼 수 있다. 신문, 잡지에 실린 개별 영화평이 필요하면 내가 공부하던 곳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독일영화연구소로 갔다. 그곳에 있는 도서관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대중매체에 실린 영화평을 감독별로 스크랩해서 대여해주기 때문이다. 독일에서의 영화학 공부는 그동안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자료를 찾고, 리포트의 형식으로 답을 구성하는 훈련이었다. 영화 연구에서도 자료는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임을 실감했다. 클릭시 확대 ㅊㅇㅇㅇ ㄴㅌㅌ 구분 내용 비고 항목 1 설명 - 항목 2 설명 - 뮌헨 영화와 텔레비전 대학(Hochschule für Fernsehen und Film München)과 학내 도서관 (사진: 필자 제공) 해결해야 할 질문이 처음에는 아무리 거대하게 보여도 결국 관련한 핵심 자료만 충분히 제공된다면 나름의 답을 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핵심 자료란 고전으로 간주되는 단행본과 논문들, 그리고 한 분야의 축적된 지식과 방법론을 집대성한 대형 총서·개론서를 말한다. 이런 자료들이 충분히 번역되어 있다면 많은 경우 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긴 시간 동안 외국에서 공부하다 보면 한편으로는 공부를 끝낼 수 있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학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한국의 영화학이 학문으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여러 대도시마다 있는 영화연구소처럼 제도적인 지원도 필수적이지만,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는 좋은 원서를 번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서 읽기가 꼼꼼하고 깊이 있는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한글로 된 글을 읽을 때처럼 많은 정보를 좀 더 쉽고 빠르게 얻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나의 첫 번역서는 토마스 엘새서와 말테 하게너의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2012)였다. 아직 독일에 있을 때 번역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출간한 이 책은 저명한 영화학자인 토마스 엘새서와 그의 제자 말테 하게너의 공저인데, 내용도 물론 좋지만 하게너가 마침 내가 재학 중이던 학과의 교수로 부임해온 것도 번역을 결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자에게 직접 질문할 수 있었던 경험은 번역이 단순한 언어 변환이 아니라, 원저자·번역자·미래의 독자 사이에 새로운 독해의 통로를 만드는 작업임을 알게 했다. 출간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을 찾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은, 학술 번역의 가치는 출간 직후의 판매량만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귀국 후에 잠시 강의했던 영상이론 대학원 학생들에게 어떤 책이 번역되면 좋겠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나온 답이 나에게는 좀 놀라웠다. 학생들이 언급한 책은 당시에 주목받고 있던 인지 및 정동이론이나 디스포지티브 등 최신 이론과 관련한 서적이 아니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1947)나 『대중의 장식』(1927)과 같은 고전이었다. 영화 공부를 하면서 입문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접한 작품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나 자신도 1920, 30년대 저술들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크라카우어의 두 권의 책은 다행히 한국의 독문학자들에 의해 오랜 준비를 거쳐 각각 2022년과 2026년에 출간되었다). 나는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 다음으로 영화이론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영화. 심리학적 연구』를 번역했는데, 두 번역서 사이에는 14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다. 그 사이에 여러 편의 논문과 두 권의 책을 쓰고, 두 건의 번역에도 참여했지만, 영화서는 번역하지 못했다. 변명하자면 고전의 경우 분량이 많고 내용이 난해해서 긴 호흡으로 작업을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번역은 연구업적으로 거의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선뜻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이유다. 또 다른 이유로는 최근에 독일에서 나온 책 중에서 번역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지만, 학술적 성격이 강하고 분량도 적지 않아서 출판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을 들 수 있다. 클릭시 확대 클릭시 확대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From Caligari to Hitler)』, 『대중의 장식((Das Ornament der Masse)』,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Film Theory: An Introduction through the Senses)』 (사진: Princeton University Press, 교보문고, Routledge) 클릭시 확대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From Caligari to Hitler)』, 『대중의 장식((Das Ornament der Masse)』,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Film Theory: An Introduction through the Senses)』 (사진: Princeton University Press, 교보문고, Routledge) ㅇㅇㅇㅇ 규정했다. 그는 클로즈업, 몽타주, 플래시백 등을 지각·기억·주의 같은 심리 과정과 연결 지으며 영화 형식의 고유성을 설명했다. 특히 연극과 달리 영화는 외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정신적 현실’을 조직하는 매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형식주의 영화이론과 인지적 영화연구의 중요한 선구로 평가된다. 아마 대부분의 영화학도들은 뮌스터베르크의 유일한 영화책에 대해 이 정도의 지식을 이미 입문서를 통해서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 ㅇㅇㅇ ㅇㅇㅇㅇ ㅇ ㅇ ㅇ ㅇㅇㅇ 뮌스터베르크의 『영화. 심리학적 연구』는 영화이론사에서 최초의 체계적 이론서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이 책에서 영화를 인간 정신의 작용을 반영하는 예술로 규정했다. 그는 클로즈업, 몽타주, 플래시백 등을 지각·기억·주의 같은 심리 과정과 연결 지으며 영화 형식의 고유성을 설명했다. 특히 연극과 달리 영화는 외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정신적 현실’을 조직하는 매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형식주의 영화이론과 인지적 영화연구의 중요한 선구로 평가된다. 아마 대부분의 영화학도들은 뮌스터베르크의 유일한 영화책에 대해 이 정도의 지식을 이미 입문서를 통해서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의 전체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던 내가 뮌스터베르크 저작 번역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독일 출신의 미디어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있었다. 키틀러는 자신의 매체이론을 펼치면서 뮌스터베르크를 인용한다. 특히 뮌스터베르크가 인간의 정신작용과 기술적 매체가 결합하는 지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키틀러는 영화가 인간의 지각, 기억, 주의 등 정신 작용을 조율하고 시각화하는 방식, 영화관이라는 기술적 공간이 인간의 내면적 의식 구조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 뮌스터베르크의 설명을 언급하며 자신의 매체유물론을 펼친다. 나는 키틀러가 뮌스터베르크를 다시 불러내어 자신의 이론을 정립해간 방식에 주목하게 되었다. 독일 미디어 이론의 역사에서 가장 최근의 거장으로 간주되는 키틀러가 영화이론의 초기 텍스트를 소환해서 자신의 이론을 펼쳐나갔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키틀러에게 뮌스터베르크는 영화 초기의 낡은 이론가가 아니었다. 기술 매체가 인간의 지각과 기억, 주의를 어떻게 재배치하는지를 사유하기 위해 다시 읽어야 할 동시대인이었다. 이 독해를 통해 나는 고전이 이미 결론 난 과거가 아니라, 후대의 질문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텍스트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영화. 심리학적 연구』를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분량이나 난이도 면에서 접근하기 쉬웠던 것도 번역 결정에 도움이 되었다. 후고 뮌스터베르크(Hugo Münsterberg)와 『영화. 심리학적 연구(The Photoplay: A Psychological Study)』 (사진: Harvard University, Internet Archive) 번역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뮌스터베르크가 인용하는 많은 낯선 고유명사들보다, 그것이 당대 독자에게는 상식이었을 맥락을 오늘의 독자에게 어느 정도까지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뮌스터베르크는 초기 영화의 장치와 상영 환경, 당대에 널리 알려진 배우와 영화들을 설명 없이 호출한다. 이를 모두 본문 안에서 풀어 쓰면 저자의 논지가 흐려지고, 아무 설명 없이 두면 책은 지나치게 멀어진다. 나는 가능한 한 본문의 호흡을 보존하되, 독해의 문턱이 될 만한 지점에는 각주를 두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90개의 각주로 1916년의 영화 관객과 2026년의 한국 독자를 연결하고자 했다. 또한 오늘날의 영화 용어와 당시의 용어가 완전히 겹치지 않는 문제와 뮌스터베르크의 문체(단정적이거나 반복적이며, 때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시대의 문체적 특징이 드러나는 문장)를 어디까지 보존할지의 문제 역시 꽤나 고민한 부분이다. 책에 덧붙인 해설에는 이런 고민에 대해 내가 내린 나름의 답을 설명했다. 번역이 실제로 완성되는 순간은 책이 출간될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 책에서 자기 질문을 발견할 때일 것이다. 영화가 우리의 주의와 기억, 감정을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묻는 이 책이, 오늘날 스크린과 플랫폼, 영상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연구자와 학생, 그리고 영화 관객에게도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키틀러가 한 세기 전의 뮌스터베르크에게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듯, 이 한국어 번역본 또한 누군가에게 다음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자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총서와 같이 상업성이 없는 학술서도 많이 번역될 수 있도록 한국연구재단과 공공도서관의 적극적인 역할도 꿈꾸어본다. 버튼 영상 ㄹㄹ ㅇㅇㅇㅇㅇㅇ 클릭시 확대 클릭시 확대 클릭시 확대 클릭시 확대 클릭시 확대 ㅇㅇㅇ 클릭시 확대 ㅇㅇㅇ ㄹㄹㄹㄹ번역이 실제로 완성되는 순간은 책이 출간될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 책에서 자기 질문을 발견할 때일 것이다. 영화가 우리의 주의와 기억, 감정을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묻는 이 책이, 오늘날 스크린과 플랫폼, 영상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연구자와 학생, 그리고 영화 관객에게도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키틀러가 한 세기 전의 뮌스터베르크에게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듯, 이 한국어 번역본 또한 누군가에게 다음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자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총서와 같이 상업성이 없는 학술서도 많이 번역될 수 있도록 한국연구재단과 공공도서관의 적극적인 역할도 꿈꾸어본다.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 ㄹㄹㄹ 번역이 실제로 완성되는 순간은 책이 출간될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 책에서 자기 질문을 발견할 때일 것이다. 영화가 우리의 주의와 기억, 감정을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묻는 이 책이, 오늘날 스크린과 플랫폼, 영상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연구자와 학생, 그리고 영화 관객에게도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키틀러가 한 세기 전의 뮌스터베르크에게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듯, 이 한국어 번역본 또한 누군가에게 다음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자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총서와 같이 상업성이 없는 학술서도 많이 번역될 수 있도록 한국연구재단과 공공도서관의 적극적인 역할도 꿈꾸어본다. 번역이 실제로 완성되는 순간은 책이 출간될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 책에서 자기 질문을 발견할 때일 것이다. 영화가 우리의 주의와 기억, 감정을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묻는 이 책이, 오늘날 스크린과 플랫폼, 영상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연구자와 학생, 그리고 영화 관객에게도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키틀러가 한 세기 전의 뮌스터베르크에게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듯, 이 한국어 번역본 또한 누군가에게 다음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자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총서와 같이 상업성이 없는 학술서도 많이 번역될 수 있도록 한국연구재단과 공공도서관의 적극적인 역할도 꿈꾸어본다. 번역이 실제로 완성되는 순간은 책이 출간될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 책에서 자기 질문을 발견할 때일 것이다. 영화가 우리의 주의와 기억, 감정을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묻는 이 책이, 오늘날 스크린과 플랫폼, 영상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연구자와 학생, 그리고 영화 관객에게도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키틀러가 한 세기 전의 뮌스터베르크에게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듯, 이 한국어 번역본 또한 누군가에게 다음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자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총서와 같이 상업성이 없는 학술서도 많이 번역될 수 있도록 한국연구재단과 공공도서관의 적극적인 역할도 꿈꾸어본다. 윤종욱(영화 연구자 및 번역자) l 독일에서 영화학을 공부하고, 한국의 독문과에서 일하고 있다. 토마스 엘새서·말테 하게너의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와 후고 뮌스터베르크의 『영화. 심리학적 연구』를 한국어로 옮겼다. 최근에는 켄 로치 영화와 독일영화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1 클릭시 확대 1) 각주
© 지식을만드는지식 2026년 1월에 후고 뮌스터베르크의 『영화. 심리학적 연구』가 번역, 출간되었다. 1916년에 쓰인 이 책은 영화가 인간의 주의, 기억, 감정을 어떻게 조직하는지 묻는다. 출간된 지 한 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 영화가 스크린 바깥의 디지털 환경으로 확장된 시대에 나는 번역자로서 이 오래된 질문과 대답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다. 이 글은 한 권의 고전을 번역하기로 결심한 이유, 110년 전의 낯선 이름들과 장치들 사이에서 길을 찾던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번역이 학문 공동체에 남길 수 있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이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독문학을 전공했던 나는 대학원 수료 후 독일에서 10년 동안 영화학을 공부했다. 독일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 중 하나는 발터 벤야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루돌프 아른하임, 벨라 발라즈와 같은 독일어권 출신의 영화이론 선구자들이었다.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들의 저작 중 일부는 당시에 이미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었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1935), 『예술로서의 영화( Film als Kunst )』(1932), 『영화의 이론( Theory of Film: The Redemption of Physical Reality )』(1960) 같은 거대한 제목은 어딘지 모르게 독일의 학문적 전통에 대한 믿음을 부여했다. 영화사 초기부터 영화를 새로운 예술형태로서 진지하게 다룬 저작에 대한 경이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책을 통해서만 알던 영화를 일주일에 서너 편씩 보며 영화학의 다양한 분야에 관한 강의와 세미나에 참여했다. 학과에서 대여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영화인들을 초청해서 진행하는 수업을 듣는 일은 특히 즐거웠다. 한 학기 수업을 마치고 학업 평가는 기말 리포트로만 진행한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매 학기 여러 편의 기말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자료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단과대 도서관에는 영화학 관련 서적만 따로 모아둔 서가가 있었고, 영상자료실에서는 독일에 소개되었던 거의 모든 영화를 비디오테이프와 DVD로 볼 수 있다. 신문, 잡지에 실린 개별 영화평이 필요하면 내가 공부하던 곳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독일영화연구소로 갔다. 그곳에 있는 도서관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대중매체에 실린 영화평을 감독별로 스크랩해서 대여해주기 때문이다. 독일에서의 영화학 공부는 그동안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자료를 찾고, 리포트의 형식으로 답을 구성하는 훈련이었다. 영화 연구에서도 자료는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임을 실감했다. 뮌헨 영화와 텔레비전 대학(Hochschule für Fernsehen und Film München)과 학내 도서관 (사진: 필자 제공) 해결해야 할 질문이 처음에는 아무리 거대하게 보여도 결국 관련한 핵심 자료만 충분히 제공된다면 나름의 답을 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핵심 자료란 고전으로 간주되는 단행본과 논문들, 그리고 한 분야의 축적된 지식과 방법론을 집대성한 대형 총서·개론서를 말한다. 이런 자료들이 충분히 번역되어 있다면 많은 경우 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긴 시간 동안 외국에서 공부하다 보면 한편으로는 공부를 끝낼 수 있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학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한국의 영화학이 학문으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여러 대도시마다 있는 영화연구소처럼 제도적인 지원도 필수적이지만,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는 좋은 원서를 번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서 읽기가 꼼꼼하고 깊이 있는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한글로 된 글을 읽을 때처럼 많은 정보를 좀 더 쉽고 빠르게 얻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나의 첫 번역서는 토마스 엘새서와 말테 하게너의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 Filmtheorie zur Einführung )』(2007)였다. 아직 독일에 있을 때 번역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출간한 이 책은 저명한 영화학자인 토마스 엘새서와 그의 제자 말테 하게너의 공저인데, 내용도 물론 좋지만 하게너가 마침 내가 재학 중이던 학과의 교수로 부임해온 것도 번역을 결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자에게 직접 질문할 수 있었던 경험은 번역이 단순한 언어 변환이 아니라, 원저자·번역자·미래의 독자 사이에 새로운 독해의 통로를 만드는 작업임을 알게 했다. 출간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을 찾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은, 학술 번역의 가치는 출간 직후의 판매량만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귀국 후에 잠시 강의했던 영상이론 대학원 학생들에게 어떤 책이 번역되면 좋겠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나온 답이 나에게는 좀 놀라웠다. 학생들이 언급한 책은 당시에 주목받고 있던 인지 및 정동이론이나 디스포지티브 등 최신 이론과 관련한 서적이 아니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 Von Caligari zu Hitler )』(1947)나 『대중의 장식( Das Ornament der Masse) 』(1927)과 같은 고전이었다. 영화 공부를 하면서 입문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접한 작품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나 자신도 1920, 30년대 저술들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크라카우어의 두 권의 책은 다행히 한국의 독문학자들에 의해 오랜 준비를 거쳐 각각 2022년과 2026년에 출간되었다). 나는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 다음으로 영화이론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영화. 심리학적 연구』를 번역했는데, 두 번역서 사이에는 14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다. 그 사이에 여러 편의 논문과 두 권의 책을 쓰고, 두 건의 번역에도 참여했지만, 영화서는 번역하지 못했다. 변명하자면 고전의 경우 분량이 많고 내용이 난해해서 긴 호흡으로 작업을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번역은 연구업적으로 거의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선뜻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이유다. 또 다른 이유로는 최근에 독일에서 나온 책 중에서 번역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지만, 학술적 성격이 강하고 분량도 적지 않아서 출판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 『대중의 장식』,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 (사진: Princeton University Press , 교보문고 , Routledge ) 뮌스터베르크의 『영화. 심리학적 연구』는 영화이론사에서 최초의 체계적 이론서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이 책에서 영화를 인간 정신의 작용을 반영하는 예술로 규정했다. 그는 클로즈업, 몽타주, 플래시백 등을 지각·기억·주의 같은 심리 과정과 연결 지으며 영화 형식의 고유성을 설명했다. 특히 연극과 달리 영화는 외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정신적 현실’을 조직하는 매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형식주의 영화이론과 인지적 영화연구의 중요한 선구로 평가된다. 아마 대부분의 영화학도들은 뮌스터베르크의 유일한 영화책에 대해 이 정도의 지식을 이미 입문서를 통해서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의 전체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던 내가 뮌스터베르크 저작 번역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독일 출신의 미디어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있었다. 키틀러는 자신의 매체이론을 펼치면서 뮌스터베르크를 인용한다. 특히 뮌스터베르크가 인간의 정신작용과 기술적 매체가 결합하는 지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키틀러는 영화가 인간의 지각, 기억, 주의 등 정신 작용을 조율하고 시각화하는 방식, 영화관이라는 기술적 공간이 인간의 내면적 의식 구조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 뮌스터베르크의 설명을 언급하며 자신의 매체유물론을 펼친다. 나는 키틀러가 뮌스터베르크를 다시 불러내어 자신의 이론을 정립해간 방식에 주목하게 되었다. 독일 미디어 이론의 역사에서 가장 최근의 거장으로 간주되는 키틀러가 영화이론의 초기 텍스트를 소환해서 자신의 이론을 펼쳐나갔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키틀러에게 뮌스터베르크는 영화 초기의 낡은 이론가가 아니었다. 기술 매체가 인간의 지각과 기억, 주의를 어떻게 재배치하는지를 사유하기 위해 다시 읽어야 할 동시대인이었다. 이 독해를 통해 나는 고전이 이미 결론 난 과거가 아니라, 후대의 질문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텍스트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영화. 심리학적 연구』를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분량이나 난이도 면에서 접근하기 쉬웠던 것도 번역 결정에 도움이 되었다. 후고 뮌스터베르크(Hugo Münsterberg)와 『영화. 심리학적 연구(The Photoplay: A Psychological Study)』 (사진: Harvard University , Internet Archive ) 번역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뮌스터베르크가 인용하는 많은 낯선 고유명사들보다, 그것이 당대 독자에게는 상식이었을 맥락을 오늘의 독자에게 어느 정도까지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뮌스터베르크는 초기 영화의 장치와 상영 환경, 당대에 널리 알려진 배우와 영화들을 설명 없이 호출한다. 이를 모두 본문 안에서 풀어 쓰면 저자의 논지가 흐려지고, 아무 설명 없이 두면 책은 지나치게 멀어진다. 나는 가능한 한 본문의 호흡을 보존하되, 독해의 문턱이 될 만한 지점에는 각주를 두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90개의 각주로 1916년의 영화 관객과 2026년의 한국 독자를 연결하고자 했다. 또한 오늘날의 영화 용어와 당시의 용어가 완전히 겹치지 않는 문제와 뮌스터베르크의 문체(단정적이거나 반복적이며, 때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시대의 문체적 특징이 드러나는 문장)를 어디까지 보존할지의 문제 역시 꽤나 고민한 부분이다. 책에 덧붙인 해설에는 이런 고민에 대해 내가 내린 나름의 답을 설명했다. 번역이 실제로 완성되는 순간은 책이 출간될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 책에서 자기 질문을 발견할 때일 것이다. 영화가 우리의 주의와 기억, 감정을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묻는 이 책이, 오늘날 스크린과 플랫폼, 영상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연구자와 학생, 그리고 영화 관객에게도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키틀러가 한 세기 전의 뮌스터베르크에게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듯, 이 한국어 번역본 또한 누군가에게 다음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자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총서와 같이 상업성이 없는 학술서도 많이 번역될 수 있도록 한국연구재단과 공공도서관의 적극적인 역할도 꿈꾸어본다. 윤종욱(영화 연구자 및 번역자) l 독일에서 영화학을 공부하고, 한국의 독문과에서 일하고 있다. 토마스 엘새서·말테 하게너의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와 후고 뮌스터베르크의 『영화. 심리학적 연구』를 한국어로 옮겼다. 최근에는 켄 로치 영화와 독일영화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나를 웃음거리 정도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1]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건 진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거예요. 스타든, 노동자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부디 저를 웃음거리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이런 제 신념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해 주세요.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3. * 마릴린 먼로가 사망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마지막 부탁은 무시됐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발언권을 몰수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의 생애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한 미국인,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과 같이 혼란스러운 생을 살았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스타였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녀는 일생 내내 유·무형의 성적 폭력에 시달렸고 순탄치 않은 개인사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은 자주 모순적이고 불안정했다. 이 마지막 인상은,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연막에 그녀의 본 모습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상 ‘배우’로서의 자신을 강조했지만 일반적인 연기론과는 다르거나 불분명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배역 위주로 맡기는 소속 영화사에는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에는 행복해 했다. 오히려 유명인사나 거물과 적잖은 염문을 뿌렸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는 세간의 평을 듣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오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배우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관객들을 갈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적 아름다움을 포함한 자신의 ‘전체’를 보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밤에는 샤넬 No. 5를 입고 자요’라는 발언이 의도적으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정말 본인 말대로 피부가 민감해서 옷을 걸치지 않고 잔다는 의미였을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영화산업과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이미지가 무려 60년 이상 재생산되고 있다. 이걸 걷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신혼여행 중 도피한 여배우 6.25전쟁이 끝나고 고작 반 년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서울 여의도공항에 C-54 수송기가 도착하고 마릴린 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가 해외 파병 미군을 대상으로 한 캠프 쇼(Camp Show)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때의 기획은 다소 즉흥적이고 특별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DiMaggio)와 결혼하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이 결혼생활은 해가 가기 전에 고통스러운 파경 으로 치달을 것이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미 그 전조가 보였다. 조 디마지오는 신혼여행 중에도 일본 야구팀과의 공식 일정을 진행했고, 마릴린 먼로는 한국의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신혼여행 출발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제의를 받았다거나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 다만, 한국에서의 모든 공연에서 그녀는 보라색 칵테일 드레스 한 벌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원래 파티장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최종 결정 자체는 긴급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2월 1일,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부부 출처: 111-SC-452331, National Archives 마릴린 먼로는 2월 16일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19일까지 3박 4일동안 미군 기지 십여 군데를 순회하며 부대 내 야외 가설무대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2관에서 수집한 기록영상 중에는 미군 촬영병들이 이때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기록한 푸티지가 3점 있다. 이 영상들은 현재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3] 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데, 모두 흑백으로 촬영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음향을 함께 녹음하지 않는 군 기록영상의 특성상 군인들의 환호성과 마릴린 먼로의 음성이 담겨 있지는 않다. 원 소장처에서는 모두 “MARILYN MONROE SHOWS, K-2 AND K-16, KOREA”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자료원 컬렉션에서는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 내한 - 미군부대 순회공연> (A), (B), (C) [4] 로 구분했다. (이하, <영상 A>, <영상 B>, <영상 C>로 지칭하겠다.) 이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으로 일컬을 만했다. 결혼과 신혼여행도 평범하지는 않아서 화제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의외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신문보도에서도 이 순회공연의 전 일정이 빠짐없이 명시된 기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릴린 먼로 헌정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의 내용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출처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슬레이트 정보와 부대마크가 포함된 기록영상들은 귀중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이 영상들에는 당시의 몇몇 일정이 빠져 있고 시간 순서대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상들과 당대 신문기사를 종합해 마릴린 먼로의 일자별 방문지 순서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 16일(화) : 여의도 K-16 비행장 도착, 미 제1해병사단 제1보병연대(첫 공연) [5] , 미 제7보병사단 ◦ 2월 17일(수) : 미 제3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160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6] ◦ 2월 18일(목) : 미 제2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7] ◦ 2월 19일(금) : 대구 K-2 공군기지(마지막 공연) 이렇게 확인된 일정만 봐도 4일 동안 총 9군데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기억에 의존한 일부 블로그 글, 예를 들어 마지막 날 대구 전에 춘천 공연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신뢰한다면, 18일과 19일에 각각 최소 2~3군데의 일정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된 부대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8일까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최전선 부대들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기사들은 공연이 있었던 장소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서부 전방’(‘Western Front, Korea’), ‘중부 전방’(‘Central Front, Korea’), 그리고 마지막 날인 19일 제45보병사단 기사에서 ‘동부 전방’(‘Eastern Front, Korea’)으로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팀들은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전방 부대들을 동쪽으로 순회한 후 마지막 날 대구를 비롯한 후방 주요기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3,000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17일까지 이틀 동안 집계된 관객수를 6만명 으로 보도한 기사가 있고, 대략 19일까지 총 관객수를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 하다. 영상들은 주로 마릴린 먼로에 초점을 두고 촬영됐지만 다른 전반적인 정보도 함께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서울에 도착할 때와 대구 비행장으로 갈 때만 수송기를 탔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동할 때는 군용 헬리콥터를 탔다. 이 위문공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밴드 ‘Anything Goes’ 일원들, 남편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아내 진 오둘(Jean O’ Doul), 그 외에 매니저 역할을 한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늘 마릴린 먼로와 함께 이동했다. 따라서 이 인원들과 악기까지 감안하면 헬리콥터도 최소 3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대마다 사단장급이 나와서 일행을 영접했고 도착 장소에서 한동안 포토타임을 가졌다. 공연은 보통 밴드원들이 노래, 연주, 만담 등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군인들과 포토타임을 가지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 마릴린을 데려와라! - 신경쇠약 직전의 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마릴린 먼로는 1953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 세 편이 모두 흥행하면서 떠오르는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 데뷔 이전에 누드모델로 활동했고, 당시 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8] 중 하나였다. 대중문화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한국의 미군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라기보다는 핀업걸로 익숙했고, 사진에서 보던 모델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 (왼쪽) 미 제1해병항공단 비행대대 “Devil Cats”, 퀀셋 안 벽에 가득 ‘핀업’된 여성 모델과 배우 사진들 출처: 127-GR-223-A345138 , Box 32, Folder 223, National Archives. (오른쪽) 1953년 2월 14일,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 간이비행장 관제소에서 통신 중인 병사. 창에 ‘핀업’된 여성 사진. 출처: 111-LC-31969, National Archives / 열람: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중 <AERIAL PHOTO MISSION, IX CORPS, KOREA (2)> 2분 40초 지점 하지만 여의도공항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때의 미군 병사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3년간 전장을 경험했다. 특히 전방 부대들은 정전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 이남의 방비태세를 정비하거나 잔존하는 전쟁 재발의 위협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생존의 불안감과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 고국의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이들의 전반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1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USO가 발족하고 캠프 쇼를 기획했던 것도 바로 파병 군인들의 이런 정서를 달래 사기를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6.25전쟁 중에도 캠프 쇼가 수차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한국 땅을 밟은 다른 ‘레전드’급 연예인들 이상이었는데, 그만큼 이때의 미군들이 지쳐 있었고 절실히 귀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왼쪽)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공연 후 자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터에 사인을 해 주는 모습 (<영상 C>, 3분 58초 지점) (오른쪽)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즐거워하는 제2보병사단 군인들 (<영상 C>, 21초 지점) 한 군인은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 벗기는 것을 잊었다. 먼로가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벗기는거 잊었어.” 한국 전역 군부대 PX에서는 필름이 모두 매진되었고 제7보병사단 공연에서는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 한 기자가 "공산군들은 제7보병사단이 야간 기동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하늘이 계속 환했다." [11]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 무대 조명을 세팅하는 모습(왼쪽, <영상 A> 3분 44초 지점)과 공연 중 플래시가 터진 순간(오른쪽, <영상 A> 4분 29초 지점) 영상에서 비춰진 마릴린 먼로는 여신처럼 군림하는 스타가 아니라 군인들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마중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교보다는 사병들이 카메라에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어깨끈만 있는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헌신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비나 진눈깨비가 온다고 하여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제40보병사단에서는 비와 추위로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나와 공연을 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39도의 고열로 앓아누운 것은 이때 무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친 병사들은 이토록 친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부터 아마도 위로 또는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마릴린 먼로가 군용항공점퍼를 입고 헬리콥터나 전차, 지프 등에 올라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긴 긴장상태가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13] 한국에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의 미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어깨끈 없는 드레스 [14] 와 샌들을 신고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0. 병사들은 이렇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고 위로 받는 감정을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호응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영상에 누락됐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 중에는 무대로 달려들려는 군인들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 있었다. [15] 이어 가장 격렬했다고 알려진 2월 18일 제45보병사단 공연에서는, 약 6,000명의 군인들이 마릴린 먼로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앞 순서 공연자들에게 ‘마릴린을 데려와라!(Bring on Marilyn!)’라며 야유를 하고 돌을 던졌다. 결국 마릴린 먼로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하자 이들이 일제히 무대로 달려드는 통에 한 군인이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6] 이런 해프닝들도 있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은 한결같이 회고록이나 구술을 통해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회고하며 특히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최고로 멋진 여성이었다’, ‘여배우지만 겸손해서 놀랐다’ 등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때의 마릴린 먼로는 ‘추억보정’이라고 하기엔 유별나게 헌신적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성과 진정성이 함께 폭발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야외 무대 ‘Grenadier Palace’ 공연 : 진눈깨비에 가까운 비가 내리자 마이크를 손으로 닦아주는 관계자(위, <영상 A> 7분 7초 시점). 결국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나오는 마릴린 먼로(아래, <영상 A> 7분 21초 시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장에 가득 찬 군인들(<영상 B> 1분 24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25보병사단 공연 장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모습 (<영상 C>, 5분 48초 지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패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하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마릴린 먼로 (<영상 B> 50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6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첫 공연장으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탄 모습. 이 순간에도 다리를 내밀고 포즈를 잡는 모습 (<영상 B> 5분 19초 지점) 마릴린 먼로의 다시 없을 순간 이번에는 마릴린 먼로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이 순간 마릴린 먼로가 미국의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위해 본분을 다 한 것이었다면 ‘프로’로서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발언들, 그녀에 관한 여러 전기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모든 발언은 늘 오해를 살 만 했다. 진심이 립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거나 화제성을 노린 발언으로 곡해되기 딱 좋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해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보고 한 유명한 발언,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왔으면 좋았으련만.”은 자신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의도적 발언으로 보이기 쉽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제 커리어의 정점이에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영화 스타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도 스타의 의례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적인 발언에 소심하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곤 하던 그녀의 성향에 주목한다면 모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지인들에게 한, 좀 더 내밀한 발언을 들어보자. “스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한 후 자신의 무용 선생인 로테 고슬라르(Lotte Goslar)에게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한국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17] “7만여 명의 군인들이 내 앞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데...” 먼로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벤 헤크트(Ben Hecht)에게 말했다. “...그저 행복뿐이었어요. 집에 온 느낌처럼 .”(“I only felt happy. I felt at home.) [18]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에서 군인들과 즐거운 한 때. 다친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신혼여행 출발 때부터 남편의 폭행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 (<영상 B>, 31초 지점) 이렇듯 가장 뜨거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이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28살의 젊은 마릴린 먼로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앞날이 겹쳐 보인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군인들이 보인 맹목적이면서 순수해 보일 정도의 격렬한 애정표현은 역설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결핍된 정서를 보듬어 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기록영상에서는 성욕이든, 갈증이든, 관심이든 뭐든,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과 결핍상태에 놓여 있던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여배우가 이 짧은 며칠동안 서로를 위로했다고 느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영상 중 한 슬레이트에서 ‘Marilyn Monroe + ME’라는 문구를 보고 촬영자가 벅차는 마음으로 ‘마릴린 먼로와 나(ME)’라고 적었을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지금이야 그럴 리 없다, 이것이 군 오락(Military Entertainment)과 같은 다른 용어의 약어일 것이다, 등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영상 속에서 군인들과 여배우의 소위 ‘케미’는 끈끈해 보인다. (왼쪽)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의 탈의실 또는 대기실 입구에서. ‘마릴린, 총검사단의 연인(SWEETHEART of the BAYONET DIVISION).’ (<영상 A>, 3분 27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슬레이트, ‘Marilyn + ME’ (<영상 A>, 16초 지점)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무대에서. (왼쪽: <영상 A> 1분 25초 지점. 오른쪽: <영상 A> 1분 15초 지점)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무대 ‘Bulldozer Bowl’에서. (각각 <영상 C> 4분 1초, 3분 41초 지점) 그리고 여배우들의 인생선이 교차한 순간 마릴린 먼로의 이 역사적인 내한공연은 한국어 콘텐츠에서 보통 다음의 두 가지 꼭지로 소비된다. ‘세상에,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왔었다고?’ 아니면 ‘마릴린 먼로가 최은희 와 만났던 것 알아?’. 사실 두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배우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맥락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국내 신문에서도 딱히 보도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만남은 일정 마지막 날인 19일, 대구 동촌비행장(K-2 공군기지)에서 이뤄졌다. 이 순간은 <영상 A>에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영상은 슬레이트 외에는 매우 어둡게 찍혀서 처음에는 인물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무리 조명 부족 등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어두운 시간대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시간대를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잘 식별되고 현실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색상을 보정하는 것이 바로 기록영상 색보정의 핵심이다. 색보정 후에 비로소 마릴린 먼로 양 옆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화배우 최은희, 연극배우 백성희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못 퍼져 있는 대표적인 정보 중 하나를 확실히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 대구 장면은 이따금 잘못 안내되는 것처럼 최은희 등이 마릴린 먼로의 ‘입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구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맞이하러 온, 크게 보면 수일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환송의 의미로 나온 장면이다. 심지어는 이 장면의 장소를 여의도공항으로 오인하는 내용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마도 마릴린 먼로가 군 수송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을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소스를 교차 검증하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사실이 명확해진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슬레이트(<영상 A> 4분 35초 지점) 및 세 배우가 함께 한 모습(<영상 A> 5분 18초 지점) 영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군용기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든 수많은 헌병에 둘러싸여 환대를 받는다. 그러고는 환영 인파에 포함돼 있던 두 배우를 만나 함께 팔짱을 끼고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때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이 둘 보이는데, 이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에게 무어라 말하자 ‘Thank you’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두 배우가 마중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을 듯하다. 이 남성들의 존재로 인해 이 만남이 배우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이유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처음 보는 군인들과 놀랍도록 친밀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도 이 순간에는 딱히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짧은 장면 이후는 그녀가 주변의 전투기 날개에 올라 원래 그렇듯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촬영에 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시기의 백성희 배우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없지만, 최은희 배우는 이때 자신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신상옥 감독의 < 코리아 >(1954) 촬영이 끝났거나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아>는 신상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서, 한국의 각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를 극화하여 엮은 문화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를 195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1954년 5월 1월에 개봉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1954년에 최은희와 결혼한다. 해방 공간에서 신예 영화인으로 주목받던 최은희는 전쟁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배우로서의 경력과 개인사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리아>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에게 앞으로 펼쳐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같은 인생 역정의 출발점이었다. 마릴린 먼로와의 뜬금없는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인생 역정에서 꽤나 비슷한 시기에 조우했다는 생각은 든다. *** [1]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 중 발언이다. 원어로는 “ Please don’t make me a joke. ”로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선정적 이미지나 가십거리로 자신을 단순화하고 규정해 온 언론과 대중에 대한 마지막 호소로 읽힌다. [2] Liesl Bradner (2026. 2. 18), When Marilyn Monroe Interrupted Her Honeymoon to Go to Korea , HistoryNet Retrieved from https://www.historynet.com/when-marilyn-monroe-interrupted-her-honeymoon-to-go-to-korea/ [3] 컬렉션 사이트의 검색 필터 중 ‘미군위문협회(USO)’를 선택하면 이 영상들이 조회된다. [4] 원 소장처의 local ID로 구분하면, (A)는 111-LC-35128, (B)는 111-LC-35129, (C)는 111-LC-35130이다. [5] 제1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와 스틸사진들이 존재한다. [6] 제24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24, 25보병사단의 방문 순서는 알 수 없다. [7] 제45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8] 핀업걸(Pin-up girl)은 매력적인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나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또는 이를 활용한 잡지나 달력 등을 말하며, 주로 벽에 핀으로 고정하고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작업장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군 기관지 Stars & Stripes 에서 선정한 ‘1951년 미스 치즈케이크’(치즈케이크는 핀업걸의 은어임)였다. [9]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아키비스트가 실존하는 과거의 기록과 현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색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바람직함’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군과 마릴린 먼로가 어떤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대해 주목한 것임을 밝힌다. [10] 미 육군의 TV시리즈 The Big PIcture 중 < USO - Where ever We Go >는 USO의 탄생 배경과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군인이 자신이 속했던 민간사회(old civilian)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사기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미군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USO는 고향의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군인과 민간의 삶을 연결지어 주는 곳입니다.” [11] Liesl Bradner, 앞의 글 [12]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23 1954. [13] 필자 개인의 인상이 포함됐으며 어쩌면 ‘군인과 꽃’ 클리셰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안이한 해석일 수도 있다. [14] 정확히 말하면 끈 없는 드레스(strapless dress)는 아니다. 얇은 끈의 드레스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17 1954. [16] The Key West citizen . (Key West, FL), Feb. 18 1954. [17] Liesl Bradner, 앞의 글 [18] Liesl Bradner, 앞의 글 [19] Spoto, Donald. 2001.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Harper Collins, 1993. p.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