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채널 : 종교재판
- 감독
- 수안 핀케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데이비드 애크로이드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나를 웃음거리 정도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1]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건 진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거예요. 스타든, 노동자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부디 저를 웃음거리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이런 제 신념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해 주세요.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3. * 마릴린 먼로가 사망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마지막 부탁은 무시됐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발언권을 몰수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의 생애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한 미국인,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과 같이 혼란스러운 생을 살았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스타였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녀는 일생 내내 유·무형의 성적 폭력에 시달렸고 순탄치 않은 개인사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은 자주 모순적이고 불안정했다. 이 마지막 인상은,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연막에 그녀의 본 모습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상 ‘배우’로서의 자신을 강조했지만 일반적인 연기론과는 다르거나 불분명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배역 위주로 맡기는 소속 영화사에는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에는 행복해 했다. 오히려 유명인사나 거물과 적잖은 염문을 뿌렸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는 세간의 평을 듣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오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배우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관객들을 갈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적 아름다움을 포함한 자신의 ‘전체’를 보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밤에는 샤넬 No. 5를 입고 자요’라는 발언이 의도적으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정말 본인 말대로 피부가 민감해서 옷을 걸치지 않고 잔다는 의미였을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영화산업과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이미지가 무려 60년 이상 재생산되고 있다. 이걸 걷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신혼여행 중 도피한 여배우 6.25전쟁이 끝나고 고작 반 년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서울 여의도공항에 C-54 수송기가 도착하고 마릴린 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가 해외 파병 미군을 대상으로 한 캠프 쇼(Camp Show)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때의 기획은 다소 즉흥적이고 특별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DiMaggio)와 결혼하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이 결혼생활은 해가 가기 전에 고통스러운 파경 으로 치달을 것이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미 그 전조가 보였다. 조 디마지오는 신혼여행 중에도 일본 야구팀과의 공식 일정을 진행했고, 마릴린 먼로는 한국의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신혼여행 출발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제의를 받았다거나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 다만, 한국에서의 모든 공연에서 그녀는 보라색 칵테일 드레스 한 벌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원래 파티장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최종 결정 자체는 긴급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2월 1일,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부부 출처: 111-SC-452331, National Archives 마릴린 먼로는 2월 16일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19일까지 3박 4일동안 미군 기지 십여 군데를 순회하며 부대 내 야외 가설무대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2관에서 수집한 기록영상 중에는 미군 촬영병들이 이때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기록한 푸티지가 3점 있다. 이 영상들은 현재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3] 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데, 모두 흑백으로 촬영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음향을 함께 녹음하지 않는 군 기록영상의 특성상 군인들의 환호성과 마릴린 먼로의 음성이 담겨 있지는 않다. 원 소장처에서는 모두 “MARILYN MONROE SHOWS, K-2 AND K-16, KOREA”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자료원 컬렉션에서는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 내한 - 미군부대 순회공연> (A), (B), (C) [4] 로 구분했다. (이하, <영상 A>, <영상 B>, <영상 C>로 지칭하겠다.) 이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으로 일컬을 만했다. 결혼과 신혼여행도 평범하지는 않아서 화제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의외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신문보도에서도 이 순회공연의 전 일정이 빠짐없이 명시된 기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릴린 먼로 헌정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의 내용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출처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슬레이트 정보와 부대마크가 포함된 기록영상들은 귀중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이 영상들에는 당시의 몇몇 일정이 빠져 있고 시간 순서대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상들과 당대 신문기사를 종합해 마릴린 먼로의 일자별 방문지 순서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 16일(화) : 여의도 K-16 비행장 도착, 미 제1해병사단 제1보병연대(첫 공연) [5] , 미 제7보병사단 ◦ 2월 17일(수) : 미 제3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160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6] ◦ 2월 18일(목) : 미 제2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7] ◦ 2월 19일(금) : 대구 K-2 공군기지(마지막 공연) 이렇게 확인된 일정만 봐도 4일 동안 총 9군데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기억에 의존한 일부 블로그 글, 예를 들어 마지막 날 대구 전에 춘천 공연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신뢰한다면, 18일과 19일에 각각 최소 2~3군데의 일정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된 부대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8일까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최전선 부대들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기사들은 공연이 있었던 장소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서부 전방’(‘Western Front, Korea’), ‘중부 전방’(‘Central Front, Korea’), 그리고 마지막 날인 19일 제45보병사단 기사에서 ‘동부 전방’(‘Eastern Front, Korea’)으로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팀들은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전방 부대들을 동쪽으로 순회한 후 마지막 날 대구를 비롯한 후방 주요기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3,000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17일까지 이틀 동안 집계된 관객수를 6만명 으로 보도한 기사가 있고, 대략 19일까지 총 관객수를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 하다. 영상들은 주로 마릴린 먼로에 초점을 두고 촬영됐지만 다른 전반적인 정보도 함께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서울에 도착할 때와 대구 비행장으로 갈 때만 수송기를 탔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동할 때는 군용 헬리콥터를 탔다. 이 위문공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밴드 ‘Anything Goes’ 일원들, 남편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아내 진 오둘(Jean O’ Doul), 그 외에 매니저 역할을 한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늘 마릴린 먼로와 함께 이동했다. 따라서 이 인원들과 악기까지 감안하면 헬리콥터도 최소 3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대마다 사단장급이 나와서 일행을 영접했고 도착 장소에서 한동안 포토타임을 가졌다. 공연은 보통 밴드원들이 노래, 연주, 만담 등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군인들과 포토타임을 가지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 마릴린을 데려와라! - 신경쇠약 직전의 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마릴린 먼로는 1953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 세 편이 모두 흥행하면서 떠오르는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 데뷔 이전에 누드모델로 활동했고, 당시 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8] 중 하나였다. 대중문화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한국의 미군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라기보다는 핀업걸로 익숙했고, 사진에서 보던 모델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 (왼쪽) 미 제1해병항공단 비행대대 “Devil Cats”, 퀀셋 안 벽에 가득 ‘핀업’된 여성 모델과 배우 사진들 출처: 127-GR-223-A345138 , Box 32, Folder 223, National Archives. (오른쪽) 1953년 2월 14일,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 간이비행장 관제소에서 통신 중인 병사. 창에 ‘핀업’된 여성 사진. 출처: 111-LC-31969, National Archives / 열람: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중 <AERIAL PHOTO MISSION, IX CORPS, KOREA (2)> 2분 40초 지점 하지만 여의도공항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때의 미군 병사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3년간 전장을 경험했다. 특히 전방 부대들은 정전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 이남의 방비태세를 정비하거나 잔존하는 전쟁 재발의 위협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생존의 불안감과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 고국의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이들의 전반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1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USO가 발족하고 캠프 쇼를 기획했던 것도 바로 파병 군인들의 이런 정서를 달래 사기를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6.25전쟁 중에도 캠프 쇼가 수차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한국 땅을 밟은 다른 ‘레전드’급 연예인들 이상이었는데, 그만큼 이때의 미군들이 지쳐 있었고 절실히 귀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왼쪽)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공연 후 자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터에 사인을 해 주는 모습 (<영상 C>, 3분 58초 지점) (오른쪽)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즐거워하는 제2보병사단 군인들 (<영상 C>, 21초 지점) 한 군인은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 벗기는 것을 잊었다. 먼로가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벗기는거 잊었어.” 한국 전역 군부대 PX에서는 필름이 모두 매진되었고 제7보병사단 공연에서는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 한 기자가 "공산군들은 제7보병사단이 야간 기동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하늘이 계속 환했다." [11]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 무대 조명을 세팅하는 모습(왼쪽, <영상 A> 3분 44초 지점)과 공연 중 플래시가 터진 순간(오른쪽, <영상 A> 4분 29초 지점) 영상에서 비춰진 마릴린 먼로는 여신처럼 군림하는 스타가 아니라 군인들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마중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교보다는 사병들이 카메라에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어깨끈만 있는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헌신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비나 진눈깨비가 온다고 하여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제40보병사단에서는 비와 추위로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나와 공연을 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39도의 고열로 앓아누운 것은 이때 무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친 병사들은 이토록 친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부터 아마도 위로 또는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마릴린 먼로가 군용항공점퍼를 입고 헬리콥터나 전차, 지프 등에 올라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긴 긴장상태가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13] 한국에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의 미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어깨끈 없는 드레스 [14] 와 샌들을 신고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0. 병사들은 이렇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고 위로 받는 감정을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호응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영상에 누락됐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 중에는 무대로 달려들려는 군인들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 있었다. [15] 이어 가장 격렬했다고 알려진 2월 18일 제45보병사단 공연에서는, 약 6,000명의 군인들이 마릴린 먼로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앞 순서 공연자들에게 ‘마릴린을 데려와라!(Bring on Marilyn!)’라며 야유를 하고 돌을 던졌다. 결국 마릴린 먼로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하자 이들이 일제히 무대로 달려드는 통에 한 군인이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6] 이런 해프닝들도 있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은 한결같이 회고록이나 구술을 통해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회고하며 특히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최고로 멋진 여성이었다’, ‘여배우지만 겸손해서 놀랐다’ 등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때의 마릴린 먼로는 ‘추억보정’이라고 하기엔 유별나게 헌신적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성과 진정성이 함께 폭발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야외 무대 ‘Grenadier Palace’ 공연 : 진눈깨비에 가까운 비가 내리자 마이크를 손으로 닦아주는 관계자(위, <영상 A> 7분 7초 시점). 결국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나오는 마릴린 먼로(아래, <영상 A> 7분 21초 시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장에 가득 찬 군인들(<영상 B> 1분 24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25보병사단 공연 장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모습 (<영상 C>, 5분 48초 지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패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하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마릴린 먼로 (<영상 B> 50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6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첫 공연장으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탄 모습. 이 순간에도 다리를 내밀고 포즈를 잡는 모습 (<영상 B> 5분 19초 지점) 마릴린 먼로의 다시 없을 순간 이번에는 마릴린 먼로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이 순간 마릴린 먼로가 미국의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위해 본분을 다 한 것이었다면 ‘프로’로서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발언들, 그녀에 관한 여러 전기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모든 발언은 늘 오해를 살 만 했다. 진심이 립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거나 화제성을 노린 발언으로 곡해되기 딱 좋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해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보고 한 유명한 발언,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왔으면 좋았으련만.”은 자신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의도적 발언으로 보이기 쉽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제 커리어의 정점이에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영화 스타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도 스타의 의례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적인 발언에 소심하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곤 하던 그녀의 성향에 주목한다면 모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지인들에게 한, 좀 더 내밀한 발언을 들어보자. “스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한 후 자신의 무용 선생인 로테 고슬라르(Lotte Goslar)에게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한국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17] “7만여 명의 군인들이 내 앞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데...” 먼로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벤 헤크트(Ben Hecht)에게 말했다. “...그저 행복뿐이었어요. 집에 온 느낌처럼 .”(“I only felt happy. I felt at home.) [18]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에서 군인들과 즐거운 한 때. 다친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신혼여행 출발 때부터 남편의 폭행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 (<영상 B>, 31초 지점) 이렇듯 가장 뜨거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이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28살의 젊은 마릴린 먼로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앞날이 겹쳐 보인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군인들이 보인 맹목적이면서 순수해 보일 정도의 격렬한 애정표현은 역설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결핍된 정서를 보듬어 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기록영상에서는 성욕이든, 갈증이든, 관심이든 뭐든,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과 결핍상태에 놓여 있던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여배우가 이 짧은 며칠동안 서로를 위로했다고 느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영상 중 한 슬레이트에서 ‘Marilyn Monroe + ME’라는 문구를 보고 촬영자가 벅차는 마음으로 ‘마릴린 먼로와 나(ME)’라고 적었을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지금이야 그럴 리 없다, 이것이 군 오락(Military Entertainment)과 같은 다른 용어의 약어일 것이다, 등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영상 속에서 군인들과 여배우의 소위 ‘케미’는 끈끈해 보인다. (왼쪽)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의 탈의실 또는 대기실 입구에서. ‘마릴린, 총검사단의 연인(SWEETHEART of the BAYONET DIVISION).’ (<영상 A>, 3분 27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슬레이트, ‘Marilyn + ME’ (<영상 A>, 16초 지점)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무대에서. (왼쪽: <영상 A> 1분 25초 지점. 오른쪽: <영상 A> 1분 15초 지점)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무대 ‘Bulldozer Bowl’에서. (각각 <영상 C> 4분 1초, 3분 41초 지점) 그리고 여배우들의 인생선이 교차한 순간 마릴린 먼로의 이 역사적인 내한공연은 한국어 콘텐츠에서 보통 다음의 두 가지 꼭지로 소비된다. ‘세상에,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왔었다고?’ 아니면 ‘마릴린 먼로가 최은희 와 만났던 것 알아?’. 사실 두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배우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맥락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국내 신문에서도 딱히 보도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만남은 일정 마지막 날인 19일, 대구 동촌비행장(K-2 공군기지)에서 이뤄졌다. 이 순간은 <영상 A>에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영상은 슬레이트 외에는 매우 어둡게 찍혀서 처음에는 인물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무리 조명 부족 등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어두운 시간대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시간대를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잘 식별되고 현실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색상을 보정하는 것이 바로 기록영상 색보정의 핵심이다. 색보정 후에 비로소 마릴린 먼로 양 옆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화배우 최은희, 연극배우 백성희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못 퍼져 있는 대표적인 정보 중 하나를 확실히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 대구 장면은 이따금 잘못 안내되는 것처럼 최은희 등이 마릴린 먼로의 ‘입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구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맞이하러 온, 크게 보면 수일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환송의 의미로 나온 장면이다. 심지어는 이 장면의 장소를 여의도공항으로 오인하는 내용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마도 마릴린 먼로가 군 수송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을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소스를 교차 검증하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사실이 명확해진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슬레이트(<영상 A> 4분 35초 지점) 및 세 배우가 함께 한 모습(<영상 A> 5분 18초 지점) 영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군용기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든 수많은 헌병에 둘러싸여 환대를 받는다. 그러고는 환영 인파에 포함돼 있던 두 배우를 만나 함께 팔짱을 끼고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때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이 둘 보이는데, 이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에게 무어라 말하자 ‘Thank you’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두 배우가 마중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을 듯하다. 이 남성들의 존재로 인해 이 만남이 배우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이유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처음 보는 군인들과 놀랍도록 친밀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도 이 순간에는 딱히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짧은 장면 이후는 그녀가 주변의 전투기 날개에 올라 원래 그렇듯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촬영에 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시기의 백성희 배우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없지만, 최은희 배우는 이때 자신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신상옥 감독의 < 코리아 >(1954) 촬영이 끝났거나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아>는 신상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서, 한국의 각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를 극화하여 엮은 문화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를 195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1954년 5월 1월에 개봉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1954년에 최은희와 결혼한다. 해방 공간에서 신예 영화인으로 주목받던 최은희는 전쟁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배우로서의 경력과 개인사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리아>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에게 앞으로 펼쳐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같은 인생 역정의 출발점이었다. 마릴린 먼로와의 뜬금없는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인생 역정에서 꽤나 비슷한 시기에 조우했다는 생각은 든다. *** [1]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 중 발언이다. 원어로는 “ Please don’t make me a joke. ”로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선정적 이미지나 가십거리로 자신을 단순화하고 규정해 온 언론과 대중에 대한 마지막 호소로 읽힌다. [2] Liesl Bradner (2026. 2. 18), When Marilyn Monroe Interrupted Her Honeymoon to Go to Korea , HistoryNet Retrieved from https://www.historynet.com/when-marilyn-monroe-interrupted-her-honeymoon-to-go-to-korea/ [3] 컬렉션 사이트의 검색 필터 중 ‘미군위문협회(USO)’를 선택하면 이 영상들이 조회된다. [4] 원 소장처의 local ID로 구분하면, (A)는 111-LC-35128, (B)는 111-LC-35129, (C)는 111-LC-35130이다. [5] 제1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와 스틸사진들이 존재한다. [6] 제24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24, 25보병사단의 방문 순서는 알 수 없다. [7] 제45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8] 핀업걸(Pin-up girl)은 매력적인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나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또는 이를 활용한 잡지나 달력 등을 말하며, 주로 벽에 핀으로 고정하고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작업장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군 기관지 Stars & Stripes 에서 선정한 ‘1951년 미스 치즈케이크’(치즈케이크는 핀업걸의 은어임)였다. [9]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아키비스트가 실존하는 과거의 기록과 현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색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바람직함’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군과 마릴린 먼로가 어떤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대해 주목한 것임을 밝힌다. [10] 미 육군의 TV시리즈 The Big PIcture 중 < USO - Where ever We Go >는 USO의 탄생 배경과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군인이 자신이 속했던 민간사회(old civilian)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사기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미군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USO는 고향의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군인과 민간의 삶을 연결지어 주는 곳입니다.” [11] Liesl Bradner, 앞의 글 [12]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23 1954. [13] 필자 개인의 인상이 포함됐으며 어쩌면 ‘군인과 꽃’ 클리셰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안이한 해석일 수도 있다. [14] 정확히 말하면 끈 없는 드레스(strapless dress)는 아니다. 얇은 끈의 드레스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17 1954. [16] The Key West citizen . (Key West, FL), Feb. 18 1954. [17] Liesl Bradner, 앞의 글 [18] Liesl Bradner, 앞의 글 [19] Spoto, Donald. 2001.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Harper Collins, 1993. p.262.
<그저 사고였을 뿐> 중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 Les Films Pelleas) 몇 해 전 한 시네필 커뮤니티에서 “영화, 어디까지 봤니(소위 ‘시네필력’ 테스트)”의 끝판왕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권역을 담당하는 프로그래머로서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민망함이 스쳤다. 같은 아시아 대륙에 속해 있지만, 우리에게 동남아시아나 서아시아 영화들은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심리적으로도 멀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 소개되는 편수 자체가 절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은 앞다퉈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들에 주목하고 있다. 이곳이 지금 가장 역동적인 작가군이 형성되고 있는 흥미로운 화수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해 주요 영화제 수상작 리스트에는 이 지역 감독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산업적인 지형도 바뀌고 있다. 필리핀과 태국이라는 전통적인 영화 강국 외에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신흥국들이 자국 상업영화로 박스오피스를 주도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탄탄해진 산업적 기반 위에서 작가주의 영화들이 칸, 베를린, 로테르담 등 서구권 영화제를 휩쓰는 현상은 이제 하나의 경향으로 굳어졌다. 한편, 검열이나 전쟁으로 억눌려 있던 서아시아권의 목소리 또한 잠재력을 폭발시키고 있다. 망명지에서 혹은 비공식적인 루트로 영화를 만들던 이들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와 도하를 중심으로 한 공격적인 지원 정책에 힘입어 그들의 언어로 동시대의 서사를 드러내고 있다. 비슷한 역사적 상흔과 아시아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우리로서는 이 흐름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 그 거대한 파도의 맨 앞자리에 선 젊은 작가들의 데뷔작들을 통해 아시아 영화의 현재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쓸모 있는 귀신>: 눈을 뜨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증거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 Best Friend Forever 불교 국가이자 뿌리 깊은 민간신앙의 전통을 가진 태국은 동남아의 오랜 영화 강국이다. 하지만 강력한 검열 탓에 근현대사나 사회적 이슈를 직설적으로 다루기는 어려웠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들이 몽환적인 숲과 은유로 점철된 것은 이러한 억압에 대한 미학적 응답이었을 것이다. 반면 < 쓸모 있는 귀신 >(랏차뿜 분번차초케, 2025)은 태국 주류 장르인 호러 코미디에 SF와 퀴어 코드를 뒤섞으며 노골적으로 장르를 융합하고 파괴하는 혁신적인 태도를 취한다. 진공청소기에 빙의한 귀신이 다른 귀신을 퇴마하고 살아있는 남편은 혼령의 기억을 붙들려 애쓴다는 설정은 자칫 난해하거나 신인 감독의 객기 어린 실험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놀라운 지점은, 그 황당한 설정 속에 태국 사회, 더 넓게는 국가 폭력의 은폐와 트라우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심어놓았다는 데 있다. 영화는 기억을 저장하는 타임캡슐로서 매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하다. 교육 제도와 레거시 미디어가 철저히 은폐하려 했던 태국 민주화 과정의 잔혹한 상흔을 이토록 대담하고 환상적인 화법으로 직시한 영화가 또 있었던가. <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 >: 나비가 되기 위한 인고의 시간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베트남 영화는 강렬한 색감과 회화적인 구도에 강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팜 티엔 안 감독은 이 시각적 유산을 능숙하게 다룰 뿐 아니라 편집이라는 시간의 리듬마저 훌륭하게 조율해낸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 힘든 정교한 롱테이크는 단연 압권이다. 영화 속에서 때론 아름답게 때론 무심하게 스쳐 가는 풍경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기원전부터 수백 세대를 거쳐 ‘사람이 가꿔온’ 장소이자 척박한 정글을 일군 땀, 수천 년에 걸친 전쟁의 피와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눈물이 배어 있는 역사적 지층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 던져진 주인공의 삶 역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족을 잃고 시골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며 조카를 돌봐야 하는 현실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오롯이 그의 몫에 달려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베트남 영화사에 이정표가 될 만한 지점은 그간 금기시되던 베트남 전쟁의 상흔을 무심한 듯 툭 건드리는 대목이다. 그것이 당국의 실수였든 의도치 않은 허용이었든 이 장면은 베트남 영화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 호랑이 소녀 >: 소녀의 해방이 선사하는 날 선 카타르시스 사진: IMDb , 부산국제영화제 이슬람 문화권인 말레이시아에서 소녀의 신체적 변화는 흔히 부끄럽고 감춰야 할 대상으로 치부된다. 아만다 넬 유 감독은 12세 소녀 자판을 통해 이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자판은 초경을 불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몸이 겪는 변화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바디 호러’라는 장르는 사회적 억압을 찢고 나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탁월한 선택이 된다. 영화를 견인하는 힘은 소녀들이 뿜어내는 야생적인 활력이다. 기성세대가 씌워놓은 차별과 억압의 프레임을 내면화하는 대신, 자판은 두려움마저 집어삼키고 사회가 경외하는 호랑이로 탈피한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긍정하는 것만큼 큰 자유가 어디 있을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정작 본국인 말레이시아에서는 검열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가진 전복적인 힘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자서전>: 깨지 않는 숙취 같은 독재의 그림자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 KawanKawan Media < 자서전 >(막불 무바락, 2022)은 독재 정권이 끝나면 곧 공정한 세상이 올 것이라 믿었던 청년의 순진한 믿음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수십 년간 이어진 독재의 잔재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미세한 틈새에서 악취를 풍긴다. 수감된 아버지를 대신해 은퇴한 장군의 저택에서 일하게 된 청년 라킵은 카리스마 넘치는 장군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냉혹한 어른의 세계를 학습한다. 그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거짓을 덮고 우발적인 폭력을 묵인한다. 약육강식의 법칙 속에 새겨진 부패는 라킵의 내면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인도네시아의 신예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인 막불 무바락 감독은 자칫 관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을 부자 관계를 연상시키는 개인의 서사로 치환하여 설득력을 얻는다. 과거의 유령이 현재의 청춘을 어떻게 잠식하는지 그 서늘한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이러한 표현이 허용된다는 사실 자체에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희망을 엿보게 된다. <대통령의 케이크>: 달콤한 케이크 위로 흐르는 씁쓸한 아이러니 사진: 토론토국제영화제(TIFF) 이웃 국가와의 전쟁과 강압적인 철권통치 아래 놓인 1990년대 이라크. < 대통령의 케이크 >(하산 하디, 2025)는 이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소녀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다. 9살 소녀 라미아에게 떨어진 숙제는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할 케이크를 구해오는 것. 경제 제재로 당장 먹을 빵조차 부족하고 사기꾼이 들끓는 거리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다. 하지만 절대권력과도 같은 선생님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는 소녀는 길을 나선다. 시장과 검문소에서 마주친 어른들은 소녀를 도울 여력이 없거나 오히려 이용하려 든다. 그러나 라미아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전문적인 연기 수업을 받았을 리 만무한 비전문 배우가 보여주는 그 단단한 눈빛은 연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체득한 앙상한 강인함처럼 보여 마음을 울린다. 가장 달콤해야 할 케이크를 구하기 위해 가장 비정한 현실을 통과해야 하는 아이러니. 영화는 그 끝맛이 달콤함이 아닌 강렬한 메시지임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저 사고였을 뿐>: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외치는 진실 앞서 살펴본 데뷔작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올해 가장 주목받은 영화중에 하나인 < 그저 사고였을 뿐 >(자파르 파니히, 2025)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늦은 밤 운전 중에 발생한 로드킬로부터 시작된 영화는, 도입부 이후 자기의심과 복수심 사이에서 국가폭력 희생자들이 겪는 끊임없는 갈등이 고조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정부로부터 영화 제작 금지와 출국 금지라는 가혹한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며 저항의 서사를 써 내려온 작가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그저 사고였을 뿐>은 제목이 주는 무심함과는 대조적으로, 이란 사회 내부에 깊게 뿌리 박힌 불신과 권위주의, 그리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집단적 심리를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층 서늘해진 시각으로 해부한다. 국가적 트라우마가 개인의 일상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묵직하게 웅변하고 있다. 사진: Cinema Galeries 스크린으로 목격하는 아시아의 오늘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전반적인 경향을 짚어보자면, 동남아시아는 적극적인 국제 공동 제작의 틀을 활용해 자본과 기술의 한계를 영리하게 극복하며 외연을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서아시아는 국가 정책의 기조가 과거의 통제에서 적극적인 지원으로 선회하며 산업 성장의 새로운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두 지역 모두 이전보다 압도적인 작품 수와 두터워진 작가군을 배출하며 영화 산업의 비약적인 고도화를 이뤄내고 있다. 물론 모든 곳이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이란과 같이 정부의 직접적인 검열과 통제가 오히려 강화되는 역행의 길을 걷는 국가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가장 날카로운 저항의 언어로 거듭난다. 억눌린 목소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기어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본래 영화는 소설이나 미술 등 인접 예술의 자양분을 섭취하며 성장해왔지만 동시에 대중과 가장 밀착된 예술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아 왔다. 과거에 금기시되었던 소재를 수면 위로 올리고 소외되었던 관점을 복원하는 이들의 시도는 단순한 미학적 성취를 넘어선다. 특히 초반에 열거한 다섯 편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국가, 장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하나의 거대한 맥락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기억과 응시다. 이들은 국가가 감추고 싶어 하는 치부나 사회가 강요하는 금기를 외면하지 않고 장르적 상상력 혹은 집요한 리얼리즘을 통해 스크린 위로 기어이 끄집어낸다. 특히 이 작품들이 모두 신인 감독들의 데뷔작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윗세대가 남긴 부채와 상흔을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자신들만의 새로운 문법으로 해석하고 기록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망각에 저항하는 기록이자 억압된 목소리들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낯선 아시아 영화들을 보며 기시감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 또한 지난한 근현대사를 통해 비슷한 고통과 성장을 겪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대 아시아 작가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지 이국적인 풍광을 즐기는 취미를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고군분투에 보내는 가장 조용한 응원일지 모른다. 스크린 너머 그들의 치열한 오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박성호(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l 10년 이상 해외에 거주하며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A Million Years (2018) 등 다수의 단편 및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사진: " 도라지 불고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도라지>에서 양지훈 은 대학교 축구 동아리에서 만난 ‘아는 형’을 보러 일본에 간다. 재일조선인인 ‘형’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에 양지훈을 초대하고, 양지훈은 그 여정을 브이로그 형식으로 촬영한다. 이후 <도라지>에 <불고기>를 덧붙여 장편 분량으로 편집된 < 도라지 불고기 >(2025)에는 <도라지>의 브이로그 영상을 시청하는 형의 모습을 촬영한 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하나는 양지훈이 <도라지>를 제작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일본에 방문해 촬영을 이어 나갔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가 당사자를 대상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도 그 이미지를 당사자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특수하고 유일무이한 이미지가 아닌, 그저 범박한 모습으로 말이다. 양지훈의 영화에서 이들은 재일조선인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키사다 이사오의 < GO(고) >(2001)나 최양일 의 <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1993)처럼 미묘한 차별을 통과하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들은 여느 사람들처럼 조선학교에 다녔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추억하고, 불고기를 먹고, 가라오케에 간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형’과 그의 친지들, 조선학교의 관계자들을 포함한 재일조선인들의 얼굴은 모두 블러 처리된 형상으로 등장한다. 얼굴을 탈각한 형상들은 평범함의 분신들인 것처럼 스펙터클 없음을 재차 강조해 드러낸다. 양지훈 감독은 한 토크 자리에서 출연진들의 얼굴을 가린 이유에 대해 “욕망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내 얼굴만을 드러내는 게 정당한 것 같다”라고 말한 적 있다. [1] 그의 말에 의하면 얼굴은 욕망하는 자의 언어다. 여기서 욕망이란 자신의 부분을 드러내는 노출증적인 욕망만이 아니라, 그 얼굴에서 욕망을 소거할 수 없다는 난감함을 수렴하는 최소한의 진실의 단위인 셈이다. 한편, 그날의 대화에서 좀 더 흥미로웠던 대목은 양지훈 감독이 이렇게 덧붙였을 때다. “제가 (말하면서) 자꾸 욕망이란 말을 써서 욕망이란 말을 안 써보겠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가 정말 ‘욕망’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 이 말이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맺혀 있는 소거법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욕망이라는 말을 덜어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는 감독으로서 무대에 서 있는 상황이 이미 충분히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겼기에 ‘욕망’이라는 말을 거듭 입에 올리는 것을 경계했을 수도 있다. 혹은 ‘욕망’이라는 단어가 대상과 촬영자 사이의 관계를 손쉽게 일축해 버린다는 편리함에서 일종의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의 강직한 성정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욕망’을 다른 언어로 대체하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욕망’이라는 말의 자리가 여기저기로 산재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양지훈에게 있어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는 소거법은 있는 것을 그대로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당연시되는 것들의 제자리를 흐트러뜨리는 일에 가까운 것이다. 사진: " 도라지 불고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이는 <도라지 불고기>에서 촬영 대상의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자신의 얼굴만을 드러내기로 한 결단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다. <도라지 불고기>에는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가더라도 조선학교를 다닐 거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형’의 얼굴이 없다. 주민등록을 할 수 없어서 신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한 ‘형’의 얼굴도 없다. 운동회에서 찬가를 부르고 아이치 새교사 준공식에서 축하공연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은 집단화된 이미지를 거쳐 이중으로 익명화된다. 하지만 이것이 곧 그 얼굴을 모두 삭제하고 감독 자신의 얼굴을 대체한 것이라고 말해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임유빈은 <도라지>에 이어 <불고기>를 보았을 때 윤리의 측면에서 언어화하기 어려운 어긋남을 감지했다고 말하며 “얼굴은 삭제된다고 하더라도 얼굴이었다”라고 쓴다. [2] 얼굴이 블러 처리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의 시선은 그 얼굴의 빈자리들과 관계 맺는다. 어쩌면 그 흐릿한 형상은 우리가 그 얼굴을 마주하더라도 그 얼굴로부터 필연적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한계를 포착한 미래 시제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스펙터클이 아니라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시선이 반사되어 맺힌 표면이다.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에 자꾸만 부재하는 것의 의미를 대입하려는 관객의 관성은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이처럼 자꾸만 한발 앞서나가 기대되는 것을 지우는 영화의 전략은 한편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의 반응을 과도하게 결정화한 결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허나 궁극적으로는 그 소거된 자리에 다큐멘터리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불고기>에서 인터뷰를 하러 온 ‘형’은 준비된 조명을 보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하는 거야?”라고 물으며 당황해한다. 그러자 카메라 뒷편에 있던 양지훈 감독은 “폭력적으로?”라고 되묻는다. ‘형’은 감독의 말을 정정하지 않은 채 “어”라고 답한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차이지만 ‘본격적으로’와 ‘폭력적으로’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다. 물론 형이 ‘본격적으로’라고 말했을 때 은연중에 ‘폭력적으로’라는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아직 ‘잠재적으로 발화되지 않은 말’이다. 양지훈은 그 잠재성을 기어코 수면 위로 드러내며 다큐멘터리의 폭력성을 상기시킨다. 이 장면을 두고 < 포수 >(2022)에서 인터뷰 자리에 준비된 조명을 보고 자신을 주인공처럼 만들어 준다면서 기뻐하는 할아버지의 반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양지훈은 다큐멘터리에 전제된 폭력성을, 할아버지를 기쁘게 한 몫으로 상쇄하는 듯한 은밀하고도 발칙한 교환의 현장을 목격하게끔 한다. 그 현장을 더 이상 암묵적인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영화에 전면화했다는 점에서 <포수>는 기이한 전복적 쾌를 충족시키기도 하는 것이었다. 한편, <불고기>에서도 양지훈은 대상의 현실에 필연적으로 개입하고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 카메라의 폭력성을 숨기는 대신 선취하여 보여준다.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권력관계를 ‘대화’로 재구성함으로써 카메라를 든 순간 영화적 현실이 이미 물리적 현실에 개입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진: " 도라지 불고기 (좌)", " 포수 (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도라지 불고기>는 트린 T. 민하가 선언했던 것처럼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하는 다큐멘터리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반(反)다큐멘터리다. 우리는 영화가 객관성의 허구를 폭로하는 방식으로만, 영화적 현실과 재현된 현실이 뒤섞이는 방식으로만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맞닥뜨려야 한다. <도라지 불고기>는 “숭고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보편의 개인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연출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노출해야 한다고 말하는, 진정 과시적인 자의 겸손한 영화다. 이처럼 다큐멘터리의 신화에 열성적인 구멍을 내는 영화를 보고 있자면, < 에스퍼의 빛 >(2024)을 두고 정재훈 감독이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3] 라고 말(해야만)했던 것이 떠오른다. 한편으로 이 말은 “<에스퍼의 빛>이 다큐멘터리인가?”라는 고루한 반문을 상대하는 것이다. <도라지 불고기>와 <에스퍼의 빛>은 다큐멘터리라는 역사의 사장된 빈틈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당연시 여겨지게끔 만드는 요소들을 지워냄으로써 재현의 관성으로부터 누락된 반(反)역사에 다가가려 한다.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드는 불온함을 통해 다큐멘터리는 다시 한 번 갱신된다. *** [1] 해당 발언은 제17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의 “클럽시네마”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던 토크 “‘자기’가 되는 방법 : 카메라, 몽타주, 나”에서 발췌했다. 도미니크 카브레라의 <환송대 다섯 번째 샷>을 상영한 뒤 양지훈, 이예진, 황예지 작가와 함께 대화를 나눴다. [2] 임유빈, 「얼굴≠얼굴」, 『도라지불고기』, 2025, 59쪽. [3] 정재현, “ 온라인도 물리적 공간이다, <에스퍼의 빛> 정재훈 감독 ”, 《씨네21》, 2025. 11. 6. 김예솔비(영화평론가) l 영화를 중심으로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이따금 영화 비슷한 것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