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산 최후의 날
- 감독
- 설태호
- 제작년도
- 1977
- 출연
- 황해, 김보미, 장혁, 독고영재, 김천만, 진봉진, 김민규, 최성, 오영갑, 김영인, 이해룡, 박종설, 나갑성, 신찬일, 정규영, 송영수, 노사강, 이석구, 이완희, 최준, 이경희, 문지영, 나정옥, 장동휘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지난주 화제가 된 ‘대통령 제주 4.3 추념사’에서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부터 최근 영화 < 지슬 >, < 비념 >까지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문화예술 작품들이 거론되었다. 그렇다면 1970년대까지 4.3은 영화에서 한 번도 다루어지지 않은 것일까? 다음은 < 산(The Mountain) > 1) 이라는 영화 도입부에 삽입된 내레이션이다. “1948년 4월 3일. 네 번째 달의 세 번째 날. 치욕의 날. 제주도 사람들은 절대로 잊지 않을 날. 우리는 조용한 섬사람들입니다. 고립의 정적에 익숙한 자연과 신의 뜻에 적응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끔찍했던 날 고요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으로 인해 산산조각 났습니다. 겨우 몇 달 동안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이 말살됐습니다. 6만 명이 죽음을 당했고 8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왜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2) 이처럼 4.3으로 인한 제주도민의 죽음과 피해를 비교적 가감 없이 전달하는 <산>은 놀랍게도 최근작이 아니다. 1963년 미 공보원이 제작한 42분의 중편 문화영화이다. 이 영화는 아마도 1950~1970년대 거의 유일하게 제주 4.3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산>은 제주도의 비극을 다분히 프로파간다적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 무장대의 방화로 집을 잃은 고 씨 무장대를 추격하는 토벌대 토벌대 사이에서 담을 쌓는 주민들의 모습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했다는 즐거움이 사그라든 후 세상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없었지만 우리는 통치 받고 있었고 군대는 없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일부 껴 있던 경찰대가 있었습니다. 이 파괴 분자들의 세력은 밤에 남몰래 북에서 내려오는 동료들로 인해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위의 내레이션을 통해 알 수 있듯 영화는 무장대와 토벌대 사이에서 희생당한 민간인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시각은 다분히 편파적이다. <산>은 4.3으로 아내와 아들을 잃고 어린 딸과 이웃에 홀로 남겨진 다섯 살배기 남자 아이를 데리고 거주지인 산에서 쫓기듯 도망 나와 해안에 정착한 고 씨의 삶을 그린다. 고 씨는 남자 아이 이름을 ‘사삼’이라 짓고 과거를 숨긴 채 자신의 아들로 키운다. 시간이 흘러 산으로 돌아가 재정착에 나선 고 씨는 성인이 된 사삼과 딸 을순에게 숨겨왔던 지난 일들을 밝힌다. 친남매가 아닌 것을 알게 된 사삼과 을순은 결혼을 하고 가족은 산간을 일구며 살아간다. 한라산을 바라보는 고 씨 해녀일을 하는 을순을 찾아온 사삼 땅을 개간하는 고 씨 가족의 모습 <산>은 전반적으로 무장대의 잔혹함을 강조하며 악으로 규정하고 토벌대를 민간인을 보호하는 선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반공선전영화의 한계를 갖는다. 4.3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반공영화라는 점에서 새로울 것이 없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동안 숨겨왔던 제주도의 비극과 혼란했던 당시의 상황을 전면에 드러내는 영화를 ‘이 시기 왜 제작했느냐’이다. 그 배경에는 1963년 대통령선거와 1964년의 한일회담 그리고 한라산국립공원계획 등의 관광개발을 비롯한 제주도 종합개발이라는 여러 가지 선전요인이 있었다. 이 영화가 제작된 1963년 여름,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한 현안으로 혼란스러웠다. 연말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부 여당과 야당의 선거 후보 문제로 정계는 시끄러웠으며 미국이 한일국교를 압박하며 한일회담이라는 뜨거운 이슈가 연일 뉴스에 오르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3년 6월 초 박정희의 제주도 시찰 후 4.3사건 이재민 복구사업 지시가 내려졌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공고문을 통해 이 사업이 영화 제작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부가 제주도를 다방면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이재민의 재정착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4.3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특히 제주도의 관광개발을 위해서 새로운 선전과 홍보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제주도를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 홍보 선전하기 위해 과거를 어떤 식으로든 매듭짓고 포장하는 전략 중 하나로써 이 영화가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3년 이재민 복구사업 공고문 무장대에 고문당하는 주민 토벌대와 맞서는 무장대 대장과 대원들 제작 주체인 미 공보원은 한일국교 이후 제주도를 방문할 해외 관광객들과 4.3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수많은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들의 문제도 염두에 두었을지 모른다. 따라서 영화는 제주도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되 4.3은 한국 내부의 사상전쟁으로 벌어진 지나간 과거이며, 현재 제주도는 공산주의에 승리한 자유주의의 희망이 피어나는 새로운 땅이라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제시한다. 제작주체인 미 공보원은 4.3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군정의 모습은 삭제한다.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 밝힐 계획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 공보원은 그보다는 영화에서 악의 무리로 그려지는 무장대의 재현에 심혈을 기울인다. 제작진은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를 모델로 한 극 중 배역에 조천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홍성중을 캐스팅했는데, 조천중학교는 바로 이덕구가 교사로 재직한 학교였다. 홍성중 은 이 영화를 계기로 영화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산>을 촬영할 당시 겪었던 내적 갈등을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사 3) 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4.3과 이덕구에 대한 엇갈린 평가, 무고하게 희생된 주민들의 비극을 내색하지 못하고 지시하는 대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민의 정체성을 담담히 밝힌다. 1950~1970년대 제주도는 국가 홍보선전영화에서 주로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관광지역으로 그려졌으며, 극영화에서는 문명이 곳곳에 닿지 않은 낙후된 지역으로 그려지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은 거의 유일하게 4.3을 다룬 영화라는 특징을 갖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정부와 미국 공보기관의 프로파간다 전략이 있었던 것이다. 1) <산(The Mountain)> - 한국영상자료원 험프리 렌지(Humphrey W. Leynse) 콜렉션 소장자료 2) 고려대학교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3) 한국영상자료원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1 - 윤일봉‧홍성중‧고인하』
두 남녀가 술집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화이트 스트라이프의 ‘Ball And Biscuit’이 그들 사이에 인상적으로 흐른다. 중국의 천재들이 미국 인구수보다 많다는 믿지 못할 주제로 시작해 수능 만점에 교내 사교 클럽과 조정팀 얘기까지. 좌충우돌 동충서돌 이리저리 오가는 남자의 속사포 잡담에 여자는 도통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 결국 말꼬리 잡기와 의심, 오만과 독단 그리고 변명이 뒤섞인 대화에 지친 여자는 화를 내며 일어나고 남자는 허무하게 끝나버린 관계에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른 채 술집에서 빠져나간다. 이 5분 30초간의 인트로 씬을 통해 감독 데이빗 핀처와 각본가 아론 소킨은 이 남자의 성격과 미래를 조망한다. 넷 기반의 소셜 네트워크에 혁신을 가져다주었지만 자신은 현실적 소셜 네트워크가 불가능했던 아이러니한 천재, 페이스북의 개발자이자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인 마크 주커버그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진실 여부에 관심이 없다. 실제 주커버그와 영화 속 주커버그는 다른 인물이다. 페이스북 설립과 이를 둘러싼 소송에 대한 사건들만이 사실일 뿐, 아론 소킨은 주어진 현실보다 더 극적이고 인위적으로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각색했다. 소송의 당사자 중 하나인 에두와르도 세브린의 증언을 바탕으로 삼은 영화의 원작은 다소 편향적이긴 했지만, 소킨은 이에 그치지 않고 서로간의 증언과 주장을 교묘히 대립시키고 그들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주커버그란 인물과 그를 둘러싼 사건 그리고 관계들을 입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여지를 주었다. 이를 리드미컬한 감각으로 쪼개 숨 가쁘게 재구성한 데이빗 핀처의 신들린 연출은 뻔한 전기물과 지겨운 법정물 사이에서 방황할 수 있는 드라마를 강렬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심리극으로 치환해냈다. 생생한 캐릭터들의 압도적인 대사, 탁구시합을 보듯 빠르게 주고받는 플래시백 향연에, 정교한 카메라 워크와 좋은 연기가 곁들어진 영화는 상투적일 것 같은 성공담의 신화를 넘어 그 뒤에 감춰진 장중하고 세련된 희비극에 집중한다. 21세기판 <시민 케인> 이자 IT버전의 <라쇼몽> 이다. 이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건 그러한 반목과 오해, 번민들을 백일몽처럼 희석시켰다 다시 증폭해내는 트렌트 레즈너와 아티커스 로스의 공감각적인 스코어다. 트렌트 레즈너. 소음도 충분히 상업적인 음악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의 대부. 그는 세기말 ‘나인 인치 네일스’란 원맨밴드로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파괴적인 노이즈, 불길한 엠비언트 등을 버무려 기존의 아름다운 화성의 곡과는 다른, 새로운 감성을 창조했다. 방법은 이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실험성을 넘어 대중적 환호까지 이끌어낸 건 그가 처음이었다. 왜곡되고 변형된 보이스를 통해 섬뜩하고 진중한 의미를 전달하는 한편, 불협화음과 극단적인 음악적 해체에 가까운 효과들, 철저하게 계산된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종교에서 탐욕, 성별, 명성, 중독, 자기기만, 후회, 허무주의 그리고 정치적인 이슈까지 암울하고 혼란스런 시대상의 모습과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반영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요즘 인더스트리얼의 파급력은 그때보다 약해졌지만, 그가 시도하고 창안하는 사운드가 주는 의미와 충격파는 여전히 유효하다. 프로그레시브한 사운드 못지않게 스토리텔링의 앨범 콘셉트나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연출, 기괴한 뮤직 비디오 같은 비주얼적인 측면도 인정받으며 자연스레 영상과 관련된 작업들에 조금씩 관여했는데, 음악적 컨설턴트로 참여한 <내츄럴 본 킬러> 나 <로스트 하이웨이> 같은 할리우드 영화는 물론, <둠> 시리즈로 유명한 id소프트사의 FPS 게임 <퀘이크>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고, 여러 단편 작업에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을 보였다. 특히 데이빗 핀처와의 인연은 드문드문하지만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타이틀 시퀀스의 고전이 된 <세븐> 의 오프닝 크레딧에 ‘Closer’가 편곡돼 쓰였고, 원작자 척 팔라닉의 강력한 추천으로 <파이트 클럽> 음악을 맡을 뻔 했지만 그 당시 발표한 세 번째 앨범 ‘The Fragile’ 활동과 겹쳐지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2005년 발표한 ‘Only’의 뮤직비디오를 핀처가 감독하며 둘은 비로소 조우하는데, 그 인연으로 핀처는 <소셜 네트워크> 의 음악을 레즈너에게 부탁한다. 오랜 투어와 레코딩 작업에 지친 그는 핀처의 제안을 수차례 거절하지만 결국 자신의 앨범을 함께 했던 아티커스 로스와 공동으로 처음 영화음악에 도전하게 된다. Only 최첨단의 트렌드가 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개발해 억만장자에 오른 남자의 이야기에 산업화된 사회에 반기를 든 인더스트리얼 뮤직의 대부를 골랐다는 점도 의미심장하지만, 이 미니멀하고 반복적인 사운드를 통해서 고립된 인물의 내면과 단절되어버린 인적 교류 관계를 시니컬하게 묘사해 나간 것도 탁월하다. 디지털 시대 넷이란 가상의 공간에서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정작 현실에선 점점 더 외로워지고 마는 인간의 뒷모습을 역설적으로 담아낸 영화에 이 먹먹하고 혼돈스런 일렉트릭 사운드는 잔인한 비가(悲歌)이자 기존 스코어에 이별을 고하는 송가로 비친다. 종종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음색은 일말의 휴머니즘을 상징하지만 이내 사라져버릴 듯 가녀리고 얄팍하다. 그 주변을 감싸는 건 시끄러운 노이즈와 식상한 패턴의 음향들뿐이다. 이는 초조하게 고조되고, 무겁게 침전되었다가, 몽롱하게 허공을 부유한다. 차가우면서도 복합적이고 실험적이며 누구보다 공격적인 그들의 사운드스케이프는 핀쳐가 그려낸 캐릭터들의 심리와 방황에 너무나 잘 부합된다. 감성적인 엠비언트 사운드로 현실의 무게감과 감정들을 담아내는 레즈너와 로스의 이 놀랄만한 협업물은 <파이트 클럽>에서 들려준 더스트 브라더스의 일렉트로니카 충격을 넘어선다. 더스트 브라더스가 화려하고 리드미컬한 DJ 믹스의 트립합을 통해 파멸적이고 분열적인 내면을 감각적으로 묘사했다면, 나인 인치 네일스는 단색의 모노크롬과 같은 기계적 음색으로 세상의 알고리즘을 거부하고 부정한다. 모든 트랙에 걸쳐 들리는 스산하고 씁쓸한 뒷맛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Ghosts I-IV, Peer Gyunt suites <소셜 네트워크>의 스코어는 불균질하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2008년에 발표한 앨범 ‘Ghosts I-IV’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실제로 3번 트랙을 비롯해 몇몇 트랙들은 ‘35 Ghosts IV’의 변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음악적인 부분을 넘어 음향적인 기능까지 수행하는 아슬아슬하고 모호한 경계가 분분한 이견을 만들어낸다. 주로 호러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운드 디자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미키마우징과 라이트모티브에서 빗겨난 이 소리들의 배치는 시종일관 밋밋하게 보이는 변호사 사무실과 대학교, 방안과 술집 같은 평범한 공간에 긴장과 심리 상태를 직간접적으로 부여한다. 사정없이 옥죄고 느슨했다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의 리듬감은 바로 이 소리들 때문에 생겨난다. 따로 떨어뜨려 놓으면 단조롭고 재미없게 들리지만 영상에 종속되는 순간 폭발적인 힘과 짙은 공허함, 애수와 분노를 가지고 꿈틀댄다. 의미가 만들어낸 스코어인 셈이다. 사운드트랙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노르웨이 작곡가 에드바르트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제1번 Op.46 제4곡 산의 마왕의 전당에서’을 가져온 12번째 트랙이다. 핀처는 <시계태엽 오렌지>의 웬디 카를로스 스타일이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냈고, 트레너와 로스는 이에 맞춰 곡을 찾고 편곡해 조정 경기 씬에서 독특한 효과를 보았다. 장난스럽지만 동시에 처절한 감정을 농축시켜 결국 윙클보스 형제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 트렌트 레즈너는 첫 영화음악이란 한계가 무색하게 아티커스 로스와 2010년과 11년의 시상식에서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를 비롯해 8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해 데이빗 핀처와 두 번째 결과물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를 내놓으며 성공적으로 2년차 징크스를 극복했다. 이쯤 되면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Hand Covers Bruise Track List 1. Hand Covers Bruise 2. In Motion 3. A Familiar Taste 4. It Catches Up with You 5. Intriguing Possibilities 6. Painted Sun in Abstract 7. 3:14 Every Night 8. Pieces Form the Whole 9. Carbon Prevails 10. Eventually We Find Our Way 11. Penetration 12. 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 (Edvard Grieg) 13. On We March 14. Magnetic 15. Almost Home 16. Hand Covers Bruise, Reprise 17. Complication with Optimistic Outcome 18. The Gentle Hum of Anxiety 19. Soft Trees Break the F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