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나의 침묵
- 감독
- 장 피에르 다르덴, 뤼크 다르덴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아르타 도브로쉬, 제레미 라이너, 올리비에르 구르메, 파브리지오 로지오네
사진: " Lorna's silence ", Les Films du Fleuve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대개 기억들은 전체적인 상황보다는 순간의 감각들로 남겨진다. 가령 유년 시절의 계곡을 떠올릴 때면 언제, 누구와 왜 갔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상황은 떠올릴 수 없다. 다만 물에 빠졌던 순간 느꼈던 알싸한 코끝의 감각과 함께 어디선가 습한 풀냄새가 흘러오는 것이다. 혀에 닿았던 철봉의 비린 쇠 맛, 몸에 들러붙는 젖은 옷의 찜찜함, 불규칙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소리, 아릿한 손끝... 그렇게 지나간 순간들은 몸 어딘가에 고이게 된다. 감각을 동반하지 않는 기억은 과연 남겨질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감각되지 않는 기억은 금방 휘발되어버리고 만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나에게 남겨진다. 결국 오래도록 나에게 맴도는 영화들은 기승전결에 따른 이야기의 전체 몸뚱이, 그로부터 얻은 교훈 같은 것이 아니다. 결국 남겨지는 건 인물의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들이다. 사진: " Lorna's silence ", Les Films du Fleuve 영화 < 로나의 침묵 >(장 피에르 다르덴, 뤼크 다르덴, 2008)을 본 날은 21살의 겨울이었다. 나는 지독한 시네필이었다거나 내 삶을 뒤흔든 영화를 만났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 없이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영화과 학부생이었다. 학기 중 내가 본 영화의 절대적인 수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방학을 맞이하여 전투적으로 매일 3편씩 영화를 보던 시기였다. 그저 방학 동안 최대한 영화를 많이 보는 것만이 목표였기 때문에 마음 한켠에는 항상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때문에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곱씹을 틈도 없이 기계적으로 바로 다음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런데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을 본 후에는 쉽사리 다음 영화로 넘어갈 수 없었다.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하다. 클로디의 죽음에 대해 침묵을 강요받던 로나는 파블로의 감시를 피해 숲으로 도망친다. 이윽고 오두막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안에 숨어 들어간다. 어둡고 싸늘한 오두막에 주워 온 나뭇가지로 불을 피운 로나는 자신의 빈 배를 부여잡고 존재하지 않는 클로디의 아기를 향해 말을 걸며 잠에 든다. 영화가 끝나고 나 또한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을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마지막 장면은 이상하게 허하고 서글픈 뱃속의 감각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클로디가 도와달라고 외치며 로나에게 매달리는 장면에서 클로디를 휘감았을 고독과 두려움의 통증, 자전거를 사고 힘차게 페달을 밟던 순간 마약으로 인해 마비되었거나 혹은 너무 날카로워졌던 클로디의 몸이 생의 활력으로 일깨워지는 감각. 이렇게 <로나의 침묵>의 장면들은 나에게 컷과 이미지가 아닌 몸 어딘가의 느낌으로 기억된다. 사진: " Lorna's Silence ", Rotten Tomatoes 이러한 내가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찬가지로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때 영화가 더 깊게 관객에게 남겨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때문에 시나리오를 쓸 때면 당연히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도 고심하지만 각 씬이 품고 있는 기운 혹은 인물의 몸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상상하는 데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된다. 늦은 밤 어린 소녀가 부모의 싸우는 통화 소리를 엿들을 때 그녀가 딛고 서 있던 타일의 싸늘함, 발바닥을 조용히 적시는 시리도록 차가운 물. 비밀을 품고 마주한 두 여고생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불의 열기. 영원히 진실된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만 같던 모녀의 입을 열게 만드는 녹은 아이스크림의 단 맛.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면 때로는 정말 실제로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인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손끝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객들의 혀에, 피부에, 코끝에 남겨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 컨테이너 >(김세인, 2018), < 불놀이 >(김세인, 2018) 중 <로나의 침묵>이 오랫동안 나에게 남아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로나가 연속적인 변심과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마약을 끊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클로디의 청을 외면하던 로나는 점차 클로디를 적극적으로 돕고 이내 몸으로 보듬어 주기까지 한다. 거래 현장에서 갑작스레 아기에 대한 질문을 꺼내놓고 심지어 아기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끝내 부정하며 끊임없이 아기에게 말을 건넨다. 이러한 변심과 충동에 따른 행동들로 인해 로나는 사랑하던 애인과 이별하고 가게도 돈도 모두 잃게 된다. 급기야 생명까지도 위태로워진다. 영화의 초반 계산적으로만 행동하던 로나는 실속 없이 모든 것을 잃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대답 없는 빈 배뿐이다.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그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 또한 줄곧 변심과 충동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다. 냉철하고 실속 있게 살아가고 싶은데 나 같은 유형의 사람에겐 그건 영영 오지 않을 세계다. 나이가 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닥쳐오는 상황들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느 정도는 눈에 보일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도 모르겠는 건 모르겠고, 그중 제일 모르겠는 건 나 자신이다. 언제까지 나 자신에게 당황하며 살아가야 할까. 사랑하던 애인과 돈 계산을 한 뒤 이별하는 순간,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 이외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로나의 답답한 눈물이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나의 마음이었는데. 그저 빈 배를 움켜쥘 수밖에. 그리고 믿어볼 수밖에. 내 연민과 사랑이 불러온 결과가 결코 빈 배가 아니라고. 이 배는 비어있지 않다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건 나도 로나처럼 믿고 싶어서였다. 연민과 사랑으로 다소 유약하게 굴었던 나에게 남은 건 빈 배가 아니다. 여기 이 배 속에 무언가 남아 있다. 그 무언가가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2021) 중 김세인(영화감독) l 글을 쓰고 영화를 연출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1) 등 연출 .
2003년 | 싸이더스 감독, 시나리오: 장준환 | 제작: 차승재 | 촬영: 홍경표 | 프로덕션 디자인: 장근영 김경희 | 음악: 이동준 CAST 병구: 신하균 | 강 사장: 백윤식 | 순이: 황정민 | 추 형사: 이재용 < 지구를 지켜라! >는 외계인이라는 소재와 병구와 강 사장의 대립을 통해 한국 사회를 통렬하게 폭로합니다. 저녁에 기자들과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 누군가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갈등에 대한 영화인 것 같다”고 말하자, 장준환 감독은 “맞다. 사실 외계인 같은 덴 별 관심도 없다”고 직설적으로 대답하기도 했죠. 추 형사가 벌떼의 공격을 받는 장면을 중심으로, 현장은 정말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장준환 감독은 속보로 현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배우와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스태프들과는 영화의 디테일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데뷔 감독의 열정과 꼼꼼함을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죠. < 복수는 나의 것 >(2001) < 서프라이즈 >(2002)에 이어 신하균이 선택한 영화는 <지구를 지켜라!>였습니다. 병구는 외딴 곳에 홀로 살며 외계인의 존재를 추적하는 캐릭터죠. 내성적이지만 에너지를 내뿜을 땐 그 누구보다도 강한 인물인데요, 신하균은 자신과 병구 사이에 꽤 많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습니다. 연기의 감정적 밀도가 높아서 한 컷 안에서 여러 감정을 한꺼번에 보여줘야 하는 게 어려움이라고 하더군요. 이 날 촬영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신하균이 아니라 추 형사 역의 이재용이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영화계에 막 얼굴을 알리는 단계였는데요, 곽경택 감독의 < 친구 >(2001)에서 유오성 의 얼굴에 지긋이 칼을 대던 조폭 역할로 강한 인상을 남긴 후였죠. 장준환 감독 현장에서 장준환 감독은 조용하면서도 섬세히 요구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가 병구 역에 신하균을 떠올린 건 시나리오를 마칠 즈음인데요, 어느 잡지에 실린 그의 얼굴과 눈빛을 보고 병구의 광기를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하네요. 짙은 노란색 머리는, 감독 자신이 직접 염색한 거라고 합니다. 숙소에서 심심해서 그냥 한 번 해봤다는군요. 홍경표 촬영감독 최근엔 이창동 감독의 < 버닝 >(2018)으로, 그리고 < 곡성 >(2016)이나 < 설국열차 >(2013), 더 거슬러 올라가면 < 마더 >(2009)와 이명세 감독의 < M >(2007) 그리고 < 태극기 휘날리며 >(2004) 등에서 카메라를 잡았던 홍경표 촬영감독. 그는 스태프 중 가장 연장자였지만 가장 활기에 차 보였습니다. 홍 감독의 촬영 플랜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카메라워크와 그린 톤이었는데요, 궁극적 목표는 코미디와 서스펜스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양봉장 위엔 병구의 집이 있습니다. 공포영화에서나 만날 수 법한 을씨년스러운 곳이었죠. 이곳에서의 촬영 공개는 없었지만, 내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병구는 가내수공업으로 마네킨을 만들며 외계인의 존재를 주시하는 인물인데요, 그런 캐릭터가 공간에도 잘 드러납니다. 하얀 마네킨과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외계인 관련 자료들, 그리고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장준환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 >(1991)과 < 미저리Misery >(1990)를 참고했다고 하는데요, 이 공간을 본 후에 감독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감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산은 금방 어두워집니다. 거의 쉬는 시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현장. 촬영장에 어둠이 깔리고, 이제는 카메라를 꺼야 할 시간입니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암전된 화면에 조용히 깔리는 차 소리. 크레딧이 이어지다 제목이 뜨면 화면 가득히 흰색의 복면이 보인다. 극대화된 클로즈업이라 세세한 천의 격자무늬 질감마저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와 함께 심장박동처럼 둥둥둥 울리는 저음의 빠른 타악 리듬, 불안한 심정을 마구 휘젓는 속삭임의 보컬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리고 이국적인 구음의 노래가 펼쳐지면 그제야 비로소 공간과 인물이 소개된다. 달리는 차 안. 무장한 군인. 흙바닥의 경치. 생소한 아라비안 문자. 회반죽의 건물들과 히잡 그리고 카피에까지.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불타는 화약고, 중동이다. 남자는 지금 복면을 쓴 채 헤즈볼라 무장단체 지도자를 섭외하러 가는 길이다. 이 긴박감 넘치는 오프닝을 통해 마이클 만 감독은 < 인사이더 >라는 영화에 대해 명료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에 대해. 여기에서 흐르는 곡은 호주의 뉴웨이브 듀오 ‘데드 캔 댄스’ 출신의 리사 제라드 2집에 실린 ‘Tempest’란 노래로, (제목 그대로) 잘 살던 두 남자 인생에 갑자기 몰아닥친 ‘폭풍’의 전조를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번뇌에 찬 목소리와 혼동에 가까운 퍼커션을 통해 그들에게 닥칠 폭풍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짐작게 한다. 로웰 버그만, 제프리 와이건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의 강의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제프리 와이건 박사는 기로에 서 있다. 그는 자고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 지식이 공익적으로 사용되지 않음을 불편해했고, 미국 굴지의 담배회사 브라운 앤 윌리엄스는 그러한 그의 자의식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래서 원만치 못한 대인 관계를 핑계 삼아 그를 해고해버린다. 비밀서약과 가족의 안정을 빌미로 그의 목을 서서히 옥죄어온다. 안전한 비겁자가 되느냐, 용감한 희생자가 되느냐 그 사이에 낀 그는 신념과 도덕적 가치를 좇아 싸워온 PD 로웰 버그만과 만나 위대한 결단을 내린다. 비록 자신에게는 최악의 결정이 되겠지만. 로웰 버그만 역시 압력과 회유에 시달린다. 보도를 통해 소송에 걸리면 회사 매각과 관련해 주가가 폭락할 것을 염려한 간부들의 방해로 방영금지라는 초유의 결정을 받아든다. 모든 상황이 무(無)로 돌아가 버릴 위기에 빠지자 그는 다른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미디어를 폭로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결국 인터뷰는 무삭제로 방영되지만 제프리 와이건은 고소당하고 이혼하며, 로웰 버그만은 직장을 떠난다. 이 인터뷰가 방영되는 감격스러운 장면에서 다시 리사 제라드 2집에 실린 ‘Sacrifice’가 흐른다. 처연하고 소름 끼치는 마력의 보이스가 그들의 희생을 위로하고 달래준다. 어쩌면 감독은 이 두 곡을 쓰기 위해 리사 제라드와 피터 버크에게 음악을 맡겼는지 모른다. 마이클 만은 영화만큼이나 음악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감독이다. 데뷔작 <비정의 거리> 와 그다음에 찍은 <악마의 성>에선 당시 하이테크한 유행의 정점에 오른 탠저린 드림의 차갑고도 강렬한 전자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인기 TV 시리즈였던 <마이애미 바이스>에선 감각적이고 현란한 얀 해머의 신디 사운드로 스타일을 과시했다. 고전적인 멜로 서사극의 절정을 보여준 < 라스트 모히칸 >에선 트레버 존스와 랜디 에델만이란 정반대적인 성향의 작곡가를 고용해 인상적인 교향시를 조율하기도 했다. <히트>와 <퍼블릭 에너미>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다양한 삽입곡들과 함께 엘리웃 골든탈의 미니멀하면서도 전위적인 스코어로 임팩트를 남겼으며, 도시의 어두운 이면과 우울한 범죄의 초상을 담은 < 콜래트럴 >과 극장판 < 마이애미 바이스 >에서는 제임스 뉴톤 하워드와 존 머피를 통해 HD 질감에 걸맞은 세련된 감성의 잿빛 스코어를 요구했다.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고, 비정한 도시(장소)의 슬픔을 간직한 그의 영상 속에서 설명과 대사는 지엽적이다. 대신 음악이 그 감성을 묘사한다. 모자란 설정을 채워주고 있다. <인사이더>에서도 마찬가지. 대사는 적되, 카메라는 인물에게 초근접해 다가가고, 사건의 무게와 심각성은 그들의 얼굴과 뒷모습에 진 음영을 통해 표현되며, 감정은 음악으로 발현된다. 대기처럼 영화 내 부유하는 스코어는 조용하지만 은은한 울림으로 그들의 심적인 고통과 피로함을 호소한다. 상처뿐인 영광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텁텁한 뒷맛이다. 리사 제라드, 피터 버크 80년대 초반부터 리사 제라드는 브랜든 페리와 함께 ‘데드 캔 댄스’를 통해 아프리칸 폴리리듬과 아일리쉬 민속음악, 그레고리안 성가에 중세 진언까지 포용한 월드뮤직 스타일의 뉴웨이브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갔다. 그들이 시도한 다크 웨이브는 고딕적인 성향의 복합적인 엠비언트 사운드와 아트록의 만남으로 비록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진 못했지만 지속적인 반응과 평단의 호응을 얻어냈고, 90년대 초반 그들의 앨범이 본격적으로 미국에 소개되면서 차츰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다. 1995년 < 히트 >에서 그녀의 곡 ‘La Bas’와 ‘Gloradin’, ‘Celon’을 사용하며 눈여겨봤던 마이클 만은 전격적으로 차기작이었던 <인사이더>의 음악을 리사 제라드와 그녀의 음악적 파트너였던 피터 버크에게 맡기는데, 앞서 소개한 삽입곡 외에 다양한 트랙에서 미니멀하면서 에스닉한 분위기의 엠비언트 사운드를 구사하며 숨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형화되고 단조로울 수 있는 느낌을 탈피하는 건 신비스러운 구음을 구사하는 리사 제라드의 목소리 덕분이다. 두성과 가성, 진성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아프리카 토속적인 주술서부터 그레고리안 성가 스타일까지 두루 연결 짓는 그녀의 보이스톤은 영화에 묵직하면서도 숭고한 정신을 부여하고 있다. 내부자(Insider)들이 철저히 아웃사이더(Outsider)가 되어가는 과정을 건조하게 담아낸 영화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 건 그 한 맺힌 살풀이의 힘이 크다. 리사 제라드와 피터 버크의 부족한 부분은 베테랑 영화음악가 그레이엄 레벨이 메꾸고 있다. 전체적인 톤은 비슷하게 맞춰나가면서도 자신의 특징이었던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클래식컬한 감성을 덧붙여 두 캐릭터가 가지는 고독과 시련을 형상화했다. 영화음악가가 되기 전 인더스트리얼 밴드에서 활동한 바 있는 그답게 음울하면서도 강렬한 존재감의 짧은 큐들이다. 이들의 스코어가 영화의 전체적인 공기를 스케치한다면 쟁쟁한 네임 밸류를 자랑하는 삽입곡들은 영화 내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며 마치 이 영화를 위해 작곡되었던 것처럼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재판을 앞두고 법원에서 증언할 결심을 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현란한 기타 연주곡은 두 차례 아카데미 음악상에 빛나는 구스타보 산타올라야의 개인 앨범 [Ronroco]에 실린 ‘Iguazu’로, 심란한 제프리 와이건의 용기를 대변한다. 반면 방송국의 전횡을 신문사에 고발하는 과정에서 흐르는 인상적인 색소폰 연주곡은 ECM 레이블의 간판이자 유럽 최정상급의 아티스트 얀 가바렉의 앨범 [Rites]에 실린 동명의 ‘Rites’란 곡으로, 로웰 버그만의 양심을 상징한다. 두 곡은 각각 캐릭터들의 고독과 고난, 행동과 맞물리며 스코어가 지니지 못한 질감을 명징하게 표출한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트립합의 대부 메시브 어택의 ‘Safe from Harm’이다. 방송국을 그만두고 나서는 로웰 버그만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후일담 자막이 이어지는 부분까지 마치 재단된 것처럼 딱 맞춰 흐른다. 엔드 크레딧에선 리사 제라드와 피터 버크가 작곡한 멜랑꼴리한 분위기의 ‘Meltdown’이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Massive Attack - Safe From Harm 마이클 만은 전통적인 할리우드 방식과 달리 이 2시간 40분에 이르는 긴 영상에 영웅주의 스코어와 상업적인 팝으로 도배하지 않았다. 음악은 단지 필요한 부분에 효율적으로 배치됐을 뿐이다. 그러나 진실과 정의, 용기와 좌절, 공포와 희망을 표현하는 데 있어 결코 모자람이 없다. 건조하고 차갑기 이를 데 없지만, 때론 침묵하고 관조함에도 이런 모노톤의 투명한 소리들의 총합이 바로 <인사이더> 사운드트랙이 가진 매력이다. 그 속에서 일말의 온기를 찾아내는 것이 진실과 정의에 다가가는 길과 비슷하지 않을까. 리사 제라드와 피터 버크는 <인사이더>로 골든 글로브 음악상에 올랐다. 작업에 만족한 마이클 만은 차기작 < 알리 >에서도 이들과 작업을 이어갔고, 이 역시 골든 글로브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노고와 실력을 인정했다. <인사이더> 사운드트랙은 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F-320) 에서 직접 귀로 확인할 수 있다. Track List 1. Tempest 2. Dawn of the Truth 3. Sacrifice 4. The Subordinate 5. Exile 6. The Silencer 7. Broken 8. Faith 9. I'm Alone on This (by Graeme Revell) 10. LB in Montana (by Graeme Revell) 11. Palladino Montage (by Graeme Revell) 12. Iguazu - performed by Gustavo Santaolalla 13. Liquid Moon 14. Rites ? performed by Jan Garbarek 15. Safe from Harm ? performed by Massive Attack 16. Meltd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