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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년도
- 2010
홍콩 시티대학교와 한국영상자료원 공동 주최해 2025년 5월 16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국제 컨퍼런스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 (Destination Hong Kong: South Korean Cinema’s Encounter with Chinese-Language Cinemas)’의 기조연설과 2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 을 요약합니다. 컨퍼런스 개최 개요와 1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은 이전 글( 링크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조연설> 아시아 지역에서의 초국가적인 영화 협업 활동의 사례를 발견하고 그 맥락을 짚는다는 컨퍼런스의 목표에 맞춰,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의 크리스 베리 교수와 한국영상자료원의 김홍준 원장이 기조연설을 진행했다. 20세기 중후반의 역사적 사건들이 당대 아시아 영화의 제작과 배급, 수용에 미친 영향을 거시적인 차원의 담론과 미시적인 차원의 자전적 경험담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어권의 영화 연결 역사 속 우연성과 불가해성: 최국인, 신장, 그리고 <용의 해> (킹스 칼리지 런던 영화학과 교수 크리스 베리) 크리스 베리(Chris Berry) 교수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 주 활동 무대였던 영화인 최국인과 그가 공동 연출한 <용의 해>(아사날리 아시모프, 최국인, 1981)를 중심으로,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어권의 연결이 얼마나 우연적이면서도 불가해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두 문화권의 영화적 교류가 이외 지역의 개입을 통해 더욱 확장된 프레임으로 논의될 가능성을 보였다. 아시아 내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활동한 “마이너 디아스포라”로 규정되기도 하는 최국인은, 1926년 조선에서 태어나 1934년에 부모님을 따라 상하이로 이주하고, 6.25 전쟁 이후 북한에 체류하다가 1950년대 초반에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브기끄(VGIK)에 다니며 영화인으로서의 이력을 정립했다. 이후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카자흐필름스튜디오(Kazah Film Studio)를 마지막 근거지로 하여 활동했다. 다큐멘터리 <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김소영, 2017)을 통해 최국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크리스 베리는, 최국인을 ‘냉전’ 개념의 복합성을 깨닫게 해준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개인 숭배(cult of personality)를 통해 자신을 절대적 지도자로 신격화했던 스탈린의 행태를 비판하며 스탈린 체제로부터 이탈해야 함을 주장한 흐루쇼프의 연설이 있은 후, 당시 소련에서 브지끄의 학생이었던 최국인과 그의 동창들은 이를 모방해 북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졸업 이후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신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해 소련에 잔류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은 이를 허가한다. 흔히 미·소 간 대립을 중심으로만 이해되는 냉전의 이분법적 의미는 대개 서구 사회에 의해 구성되었고, 이외 문화권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서구적 의미 바깥에서 (심지어 사회주의 집단 내부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굴절이 발생하는지 를 알게 해준 일화였다. 게다가 동아시아가 ‘현대’ 사회로 돌입하며 받아들이게 된 이념은 상당 부분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동아시아 각지에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는데, 크리스 베리는 이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영화를 통해 연대하려는 노력 이 최국인과 같은 영화인에게서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패권국이 시시각각 대립하며 파장을 낳는 동시대 사회 속 불안정한 일상과 일면 유사하기도 하다.) 관련 활동은 연설의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아시아 곳곳의 영화인들에 의해 ‘우연적’으로 발생했다. <용의 해(Year of the Dragon)> 포스터 / 사진: IMDb 그가 1981년 중 연출에 참여한 <용의 해>는 신장 지구와 위구르족에 대한 청나라의 폭력적인 정복을 다룬다. 작품의 제작과 개봉에 관해서는 여러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소련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내용의 영화 제작을 허가했고, 왜 최국인을 공동 연출자로 임명했을까? 작품 자체가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 맥락을 먼저 살펴보자면, 작품은 20세기 중·후반 지속됐던 중·소 분열(Sino-Soviet Split)을 배경으로 기획됐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부터 중국은, 흐루쇼프를 필두로 탈스타린 기조에 접어든 소련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1964년에는 두 국가 간 국경이 과거 불평등 조약에 의해 확정됐다며 중국 측에서 소련을 대상으로 국경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여기에는 중국 서부 국경 지대에 해당하는 신장 지구가 포함된다). 그리고 당시 소련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신장 지구 내 위구르족의 투쟁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전개됐다는 입장으로 위구르족을 지지하며, 과거 청나라와 당시의 중국이 견지한 무리한 영토 확장 욕구를 비판하곤 했다. 더불어, 민족성(ethnicity)에 대한 두 국가의 인식 차이도 작품에 드러난다.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연방에 속한 개별 국가들의 자치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국은 각기 다른 민족이 통합되어 ‘하나의 중국’을 형성함을 주장해왔는데, 크리스 베리는 극중 청나라의 장군과 위구르족의 일원이 위구르족의 중국 융화 필요성, 그리고 민족의 자기 결정권 존속을 두고 논쟁하는 장면이 이러한 인식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짚었다. 과거에 위구르족을 향해서 그랬던 것처럼, 작품이 제작됐던 당시에도 중국은 소련에 대해 ‘하나의 중국’ 기조를 강요한다는 소련의 비판적 입장 이 내포됐다는 분석이다. 연설 중 재생된 <용의 해> 본편 영상 일부 한편, 최국인 개인의 이념이 작품과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은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사회적 이념을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재할 뿐더러, 그가 활동하던 시기 소련 영화산업의 현실을 고려하면 연결고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 당시 소련의 영화 제작은 보통 개별 감독에게 국가가 작품을 배당함으로써 진행됐기에 배당을 받지 못한 감독들의 수입은 비교적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최국인이 순전히 물질적인 관점에서 공동 연출 제의를 수락했는지, 그 이면에 개인의 이념적 지지 등이 존재했는지는 연설 제목처럼 여전히 불가해(unknowable)하다. 크리스 베리가 작품과 관련해 지적한 우연적이고 불가해한 또 다른 부분은 작품이 갑작스레 사라졌다는 점이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예산을 들여 제작됐고 1982년 제15회 소련 탈린영화제 수상까지 경험했음에도 오늘날 본편을 감상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저화질의 유튜브 영상에는 작품 배급이 갑작스레 중단된 데 대해 여러 이용자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원인으로 추정해볼만한 상황을 역사학자 피터 롤버그(Peter Rollberg)의 설명을 참고해 제안했다. 본 작품이 소련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 알레고리 로, 즉 중국이 아니라 소련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인식될 여지가 있어 소련 차원에서 배급 중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영화학적 개념으로 그는 이스턴 장르를 언급한다. 서구 문화권에서 비롯된 웨스턴 장르는 미국 서부 지역을 정복한 유럽인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를 모델로 발전한 이스턴 장르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소련의 정복을 다룬다. 원주민과 카우보이의 구도가 바스마치(소련에 저항한 중앙아시아 세력)와 볼셰비키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막이나 스텝 지대를 배경으로 삼고 석양을 따라 말을 타고 달리는 인물들, 그들의 총격전 등을 보면 자연스레 웨스턴 장르가 연상된다. 극중 몇몇 장면을 컨퍼런스 현장에서 직접 재생한 그는, 중·소 분리와 소련·중앙아시아 간 대립을 동시에 은유할 가능성을 통해 냉전 국면에서 아시아의 영화사적 기록을 되짚을 때 감지되는 우연성과 불가해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황홀한 기억: 홍콩영화와의 조우, 196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 김홍준 원장은 삶의 궤적을 따라 홍콩영화와 맺어온 관계와 그로부터 받았던 인상, 영감, 깨달음을 개인적 일화들을 바탕으로 공유했다. 그가 영화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한국영상자료원장으로 재임하기까지 되새길 만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홍콩영화는, 동시대 아카이브가 지닌 고유의 임무를 환기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67년, 11살이 되고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때 그는 홍콩영화를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는 박정희 정부가 유신정권에 돌입하기 전, 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시기다. 동시에 반공주의적 의식이 사회 전반에 공유됐는데, 흥미롭게도 007 시리즈가 이러한 이념에 부합하는 영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리즈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묘사되었고, 주인공들은 '위험 세력'으로 그려진 이들을 소탕했기 때문이다. 이때 국내 군사 정부는 과거 식민 통치를 자행한 일본의 문화를 배격하던 와중이었기에 일본영화가 수입되지 않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일본영화가 점했던 영역을, 한국에서만큼은 홍콩의 액션 및 시대극 영화들이 차지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의 등장으로 < 황야의 무법자 >(세르지오 레오네, 1964) 등의 명작이 소개된 직후, <대취협>(호금전, 1966) 을 접했다. 중국어권에서 집필된 무협소설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시절, 김홍준 원장 역시 이 작품을 만나기 전에 대만의 유명 무협소설 작가 와룡생이 쓴 『군협지』를 먼저 접한 상태였으며, 그의 표현처럼 어린 시절 그에게 “무협의 피”는 이미 흐르고 있었다. <대취협>은 홍콩에서 1966년에, 한국에서는 이듬해인 1967년에 개봉했다. 당시 17살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본 무협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그가 대만 출신 배우 정패패와 영화 속 쿵푸의 세계를 최초로 알게 되는 계기였다. 이후 중국어권의 여러 무협영화 들이 국내에도 선을 보이면서 10대 관객들은 이들의 무협적 요소에 매료됨과 동시에 장르에 내재된 정서에 힘입어, 사춘기의 반항심이 거세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특히 정패패, 데이비드 치앙, 적룡과 같은 배우나 당대 걸출한 연출자로 꼽혔던 장철이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종류의 무협영화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액션이 아닌 맨주먹을 이용한 싸움을 소재로 하기 시작했기에, 무협 장르의 본령을 져버렸다고 생각한 그는 이전만큼 홍콩영화에 애정을 갖지 못했다. 이소룡과 성룡이 등장한 이후 20년간 홍콩영화를 그렇게 잠시 잊고 지내다가, 그가 2001년부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이끌게 되면서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국내 최초로 호금전 회고전을 기획해 < 협녀 >(1969), < 용문객잔 >(1967), < 산중전기 >(1979) 등의 작품을 상영한 것인데, 놀랍게도 30~50대 관객이 크게 몰렸다. 영화제 관객의 주 연령대인 2030 세대가 아니라 중년 관객층이 호응한 이례적인 사례였다. 2003년에는 복원 또는 재개봉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쇼브라더스 특별전을 개최했고, 영화제를 방문해 자신의 영화 인생 안내자로서의 호금전에 대해 설명하던 정패패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 <대취협> 중 정패패 /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대학 재학 중이던 1976년으로 돌아가보면, 김홍준 원장은 슈퍼 8mm 필름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제작했고, 이중 < 서울 7000 >의 수상을 계기로 영화 제작 활동을 보다 진지한 취미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군 제대 이후에는 학내 영화 동아리 ‘얄라셩’에 합류해 영화와 관련된 워크숍을 진행하며 관련 활동을 지속했지만, 본래 인류학을 전공했고 학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영상·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남는 시간에는 캠퍼스나 시네마테크 등을 찾아 계속 영화를 감상했으며, 교내 도서관의 간행물 섹션에서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and Sound )》나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 American Cinematographer )》,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 )》와 같은 영화잡지를 즐겨 읽었다. 이때 토니 레인즈가 작성한 한 기사에서 홍콩영화계의 새로운 세대가 “ 홍콩 뉴웨이브 ”를 구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홍콩영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렇게 학업을 이어가며 영화도 자주 감상하던 어느 날, 미국의 한 극장에서 < 도마단 > (서극, 1986) 을 상영하는 더블 피쳐 프로그램이 열렸고, 영화잡지 외에는 관련 정보를 살펴볼 기회가 드물었기에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관람했지만 홍콩 출신 여자 배우 3인의 우정이 아름답고 감성적으로 그려지는 순간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물들이 곧 일어날 ‘혁명’을 예고하는 마지막 장면 역시 돋보였다. 1980년대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사회적 외침이 본격화되던 시기였기에, 해당 장면 속 대사와 분위기가 암시하는 ‘혁명’은 그로 하여금 단어에 내포된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도록 했다. 작품을 연출한 홍콩 출신의 영화인 서극은 감독이자 제작자, 배우로서 여러 역작을 남겼다. 국내에서는 그가 연출 또는 제작한 < 영웅본색 2 >(오우삼, 1987), < 황비홍 >(1991), < 신용문객잔 >(1992) 이 흥행했다. 공교롭게도 김홍준 원장의 연설이 있기 3주 정도 전에, 서극은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반열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좌 ) <도마단> 중 주인공 3인 / ( 우 ) 혁명 후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인물들 / 사진: IMDb 그리고 몇 년 후, 김홍준 원장은 국내 영화잡지 《로드쇼》에서, 한 작품의 특정 장면을 영화 이론이나 영화사적 개념으로 해설하는 “도시에” 섹션 연재를 맡는다. 섹션 내 첫 원고의 주제로는 대중적 관심도에 비해 주류 평론계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던 홍콩영화를 선택했다. 원고 작성 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서 고충은 있었지만,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평론가의 말처럼 1990년대 홍콩영화를 진지하게 비평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서 의미를 찾았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본 잡지에 그가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이 원고들은 이후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그가 홍콩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키워가도록 한 작품이 한 편 더 있다. 왕가위 감독의 < 열혈남아 >(왕가위, 1989)다. 국내에 수입된 당시 배포됐던 포스터와 한국어 제목이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의 이미지를 연상시킨 것과는 정반대로. 작품은 완성도 높은 예술영화에 가까웠다. 결투 중심의 홍콩영화로부터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적 동요와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혀 홍콩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는 눈에 띄는 강렬한 몇 장면을 연설 중 공유했으며, 그중 하나는 포장마차에서의 액션 신이다. 얼핏 보면 인공 혈흔과 같은 특수효과가 매우 어색해보이지만, 액션을 비롯해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 기술이 무척 유려하게 적용됐다는 점이 놀랍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이 만들어낸 명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김홍준 원장이 본래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홍콩영화 관련 영상자료들도 다수이지만, 그는 원내수집 담당 부서에서 국내 기증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수집을 진행한 덕에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 1,000여 점에 달하는 홍콩영화 DVD 또는 블루레이가 소장돼 있다고 전했다. 아카이브를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기억의 과정으로서, 작품을 재발견하고 수집한 후 디지털 복원해, 대중에게 그 가치를 전파하면서 작품 자체가 다시 상상(re-imagine)되는 데 기여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밝히기도 했다. 연설을 마무리하며 그가 재생한 <열혈남아> 속 두 배우의 얼굴처럼, 과거의 한 순간에 멈춰 있지 않고 미래 세대를 위해 계속해서 재발견될 영화 속의 무언가를, 필름 아카이브로서 꾸준히 찾아 공유하고 싶다는 소망도 덧붙였다. <패널 3> 장르, 리메이크, 그리고 조우 특정 장르 속에서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계가 각자의 스타일과 인력을 교환한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이면의 지정학적·산업적 영향을 분석했으며, 홍콩대학교 김소혜 교수가 발표자들을 소개했다. 중국 멜로 TV 드라마 속 한국 남성 스타와 한류 남성성의 현지화 (영국 카디프대학교 현대언어학부(중국학) 조교수 일레인 정) (당시 해외 체류 중이었음에 따라 비대면 발표 진행) 일레인 정(Elaine Chung)은 중국 멜로영화나 TV 시리즈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한국 남성 배우들의 배역을 통해, 중국어권이 ‘한국의 남성성(Korean masculinity)’을 현지화하게 된 배경과 사례를 소개했다. 특히 상당수의 한류스타가 중국어권 콘텐츠 산업에 진출한 시기, 즉 그들의 인기가 중국어권에서 부상한 2000년부터 사드무기체계(THAAD) 배치로 인해 양국 교역이 대폭 축소된 2016년까지의 작품들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인 배우들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특성으로부터 중국어권 사회가 도출한 ‘한국의 남성성’과 이에 대한 인식이 내러티브에 어떻게 반영되어있는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로맨스와 남성성은 한국 드라마는 물론 아시아에서 흥행한 한류 콘텐츠 전반이 중심적으로 다루는 소재다. 정선의 한류 연구(“Pan-East Asian Soft Masculity”, 2001)에서는 두 요소의 결합을 통한 남성 한류스타들의 강력한 팬덤과 한국 멜로 TV 시리즈 흥행이 2000년대 초반 동아시아 한류 열풍을 본격적으로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한다. 일레인 역시 한류 콘텐츠 속 한국인 남성 주인공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 ‘ 부드러운 남성성(Soft masculinity) ’을 언급했다. 신사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 차분한 말투, 그리고 섬세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그들은 종종 재벌로 등장하며,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상대역 여성과 함께 신데렐라 내러티브를 완성시킨다(2000년대 초반 당시 한국 멜로 TV 드라마의 전형이다). 그러나 일레인은, 한류 콘텐츠를 통해 이상화된 부드러운 남성성이 중국 TV 시리즈 속 한국인 남성 배우를 거치면서, 중국어권 대중에게는 다르게 인식될 여지가 있다며 TV 시리즈 세 편을 예로 들었다.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 한국인 남성 주인공의 성격이 또 다른 중국인 남성 배우와 비교 또는 대조되며 내심 부정적으로 평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백령공우(White Collar Apartment)>(2002)의 안재욱, <100번째 신부(The 100th Bride>(2004)의 지진희, <다이아몬드 러버(Diamond Lover)>(2015)의 정지훈 모두 여성 주인공과 연인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관계를 지켜내는 데 실패한다. 반면 그들과 여성 주인공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룬 중국인 남성 배우는, 실용적이면서도 강인한 면모를 보이며 마침내 여성 주인공과 연인이 된다. 혹은 한국인 남성 주인공과 달리, 이들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자수성가했으며 여성 주인공에게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독립적이고 성숙한 어른을 표방하면서 더욱 이상적인 방식으로 ‘부드러운 남성성’을 구현한다. <다이아몬드 러버> 주요 인물 / 사진: TV Time 예시가 된 세 작품의 자세한 줄거리를 살펴보면, 시리즈 흥행을 위해 남성 한류스타를 캐스팅하고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면서도 결말은 중국인 남성에게 우호적으로 전개된다. 중국어권 콘텐츠 제작자의 관점에서 강력한 팬덤을 동원한 한류스타의 이미지를 문화적 자본으로 활용 해 상업적 성공을 꾀하면서도, 인물 구도와 내러티브를 중국어권 문화의 맥락에서 지역화한 결과 라고 일레인은 분석한다. 경제 발전 이후 중국사회에서 단정하고 신사적인 외양으로 대표되는 소위 “화이트 칼라 남성성(White-collar masculinity)”이 호응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레인에 따르면, 중국어권에 아직 널리 공유되어있는 통념상 가장 바람직한 남성 이미지는 ‘부단히 노력한 후 사회적 성공을 거둬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에 가깝다. 따라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부유한 집안에서 편안히 자랐지만 가정을 이끄는 독립적 주체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한) 한국인 남성 배우의 역할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로 지각되어 내러티브에서 소외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일레인은 추측했다. 중국어권 콘텐츠 흥행 수단으로 한류의 대중적 인기를 활용함과 동시에, 인기의 핵심이 되는 남성 이미지는 지역화해서 내러티브에 반영함으로써 한류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한·중 영화 협력의 산업적·정책적 측면: <제3의 사랑>을 중심으로 일본 교토대학 강사 김수현(현 영국 퀸즈대학교 벨파스트 조교수) 김수현 교수는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과 중국어권 간 콘텐츠 합작이 시도된 역사를 산업과 정치의 맥락에서 분석했다. 특히 한·중 합작 영화에서 작가로서의 권리와 투자자로서의 권리가 각 스태프에 의해 복합적으로 행사되는 현상 을, 동아시아의 정치와 산업에 관한 담론에 기반해 설명했다. 연구 방법론 중 하나로 참여관찰법을 도입해 합작 영화 < 제3의 사랑 >(이재한, 2014) 제작 현장에서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활동한 경험을 녹여낸 점도 인상적이었다. “20세기는 방송(Broadcasting)의 시대”라며 방송이라는 동시다발적 송신의 매체가 대중문화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미셀 힐름스(Michele Hilmes)의 주장을 ‘영화’에도 적용하는 것으로 발표가 시작됐다. 영화도 기술을 바탕으로 초국적으로 전파될 수 있고, 스타나 대중문화에 관한 담론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화된 문화적 양식으로 공유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는 2000년대부터 영화를 매개로 초국가적인 협업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은 같은 시기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고 정부 당국이 한층 완화된 문화 정책을 펼치면서 ‘합작’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국은 합작 파트너로서 중국어권 제작나와 배우와 협업해 < 비천무 >(김영준, 2000), < 무사 >(김성수, 2000), < 아나키스트 >(유영식, 2000)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김수현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초국가적 합작의 경제적 기반을 조성한 여러 주체들 간의 협상 결과에 따라, 작품의 ‘작가(author)’로서 창작의 방향을 결정하고 통제할 권리가 주어진다. 한·중 합작 영화의 경우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정부 당국의 검열이 만연한 중국 영화산업의 특성까지 더해져, 작가로서의 권리가 제작 주체들 사이에서 합리적으로 배분되기가 쉽지 않다 . 그는 <제3의 사랑>의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서 각색과 제작, 배급 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경험을 빌려, 이 과정에서 견제나 갈등, 때로 불공정한 상황까지 야기될 수 있음을 보였다. <제3의 사랑> 포스터, 스틸 / 사진: IMDb( 1 , 2 ) <제3의 사랑>은 동명의 중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인 이재한 감독(John. H. Lee)이 연출하고 중국 제작사 HS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맡은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다. 원작을 각색한 각본은 본래 이재한 감독이 집필했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각본은 중국 측 프로듀서의 작업 결과물이었다. 특히 영화 제작 및 배급을 담당하는 국영 기업 차이나 필름 그룹(China Film Group Corporation)의 당시 부대표는, 일부 장면이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대면하려는 동기를 약화한다는 이유로 원작 소설에 충실할 것을 지시하는 이메일을 감독에게 직접 보내기도 했다. 차이나 필름 그룹이 중국영화에 관한 대규모 투자 및 배급을 주도하는 국영 기업이라는 점에서, 각색에 참여한 한국 스태프 인력은 합작 영화의 창작을 둘러싼 권력 구조를 개편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중국 제작사 측의 불공정한 대우는 직업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수현 교수가 인터뷰한 한국 출신 조감독의 경우, 현장 참여를 위해 중국에 체류하던 중 비자가 만료되었음에도 중국 제작사는 이를 연장하는 데 협조하기를 거부했고, 해당 조감독은 촬영 도중 출국해야 했으며, 중국 측 제작사와의 갈등을 이유로 중국 재입국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 제작사는 촬영 종료일까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의 이름을 작품 크레딧에서 제외하고 만다. 이렇게 중국에서 일시적으로 근무한 한국 출신 스태프들은 체류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는 비자를 발급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제작 현장에 기여한 바와 관계없이 스태프로서의 지위까지 위협받는 불안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배급 지역마저도 중국 측 배급사가 단독으로 결정하면서, 대규모 흥행에도 불구하고 한국 관객으로부터 발생할 잠재적 수요는 무시된 채 작품은 중국 내에서 배급되는 데 그쳤다. 또 다른 한중 합작 영화 < 평안도 >(장윤현, 2014)는 출연한 배우가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띤다는 등의 이유로 중국 내 상영이 금지됐고, 중국 당국의 압력으로 인해 해외 상영까지도 무산되며 2016년까지 개봉을 하지 못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위와 같은 몇몇 사례를 종합했을 때, 한·중 합작은 중국이 상대 국가와 맺고 있는 여러 종류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그에 따라 합작 결과물의 중국 시장 진출 향방이 정해지는 현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합작’이라는 외형을 지녔지만 제작과 배급 전반이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게 되는 한계 가 드러나기도 했고, 상대국 제작진이 체감하는 지정학적 불안정성 이 그들의 제작 참여 경험의 질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수현 교수는 이렇게 영화산업의 논리와 제작 방식이 서로 달라 충돌하는 상황에서, 국제 합작이라는 작업에는 통상 모종의 긴장 관계가 형성됨을 언급했다. 그리고 ‘시장 확장’을 목표로 한다는 본래 특성상 합작 영화 제작 시 감독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여지가 있으며, 위에 언급한 국가 간 이해관계와 지정학적 역학 관계에 따라 창작과 배급을 주도할 권리가 주어지는 현상도 소개했다. 국제 합작은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권 간 타협과 조율, 그리고 힘겨루기의 장이 되며, 합작을 둘러싼 권리는 예술적 아이디어나 행위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가운데 주장 된다. 다만 산업 환경이 변화하면서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제 합작 경향은 조금씩 달라지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합작에서는 각본이나 캐스팅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며 작품의 ‘창작’을 함께 하려는 기조가 강했다(단, 일본의 경우 < 박하사탕 >에서처럼 제작 투자 위주로 참여했다). 그리고 시장을 효과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동아시아 관객 모두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주제(< 적벽대전 >과 < 묵공 >에서와 같이 대개 역사적 사건)를 바탕으로 한 블록버스터 대작들이 주로 제작됐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한중 합작이 주로 이뤄졌고, 중국을 찾는 한국인 제작진들의 규모도 증가했으며, 후반 작업 단계까지도 합작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최근 2020년대에는 분위기가 달라져, 앞서 언급한 캐스팅, 각본 집필 등의 창작 과정을 함께 하지 않고, 장소 섭외와 같은 프로덕션 서비스만을 서로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의 합작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김수현 원구원은 한·중 합작 사례가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다는 부정적 현실을 전했다. 2016년, 사드무기체게(THAAD) 배치 문제로 한·중 간 지정학적 긴장 관계가 형성되면서 대부분의 합작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해당 분야에 투자되던 예산 역시 삭감되면서 2020년대까지도 한중 합작은 거의 성사되지 않고 있고, 최근 동아시아 내 합작은 주로 일본과 중국, 대만 간 진행된다. 액션! 대만 갱스터 영화의 부활과 한국 영화인·문화와의 연결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 조교수 팅 우 초) 팅 우 초(Ting Wu Cho) 교수는 이전부터 자신이 연구해왔던 ‘대만 펄프 영화(pulp film)’라는 주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만 갱스터 영화가 한국영화와의 상호작용을 거쳐 2000년대 이후 부흥한 현상을 다뤘다. 이를 위해 1950~60년대 대만 고전영화를 비롯해 대만 내 영화산업의 발전, 지역문화, 그리고 지정학적 관계의 변화에 따른 영향까지 폭넓게 고려했다. 논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개념으로는 냥유연(Long-liu-lian) 을 제안했는데, 중국어 방언의 한 종류인 복건어로 표현된 ‘낭유연’은 목적 없이 방랑하며 시간을 흘려 보내는 행태를 말한다. 그는 제작 자본의 투자와 시장 구조, 장르적 요소의 측면에서 불안정하고 혼종적인 성격을 지닌 대만 갱스터 영화 의 특성이 이 개념과 유사하다고 봤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대만 갱스터 영화 중 다수가, 타국의 영화산업과의 합작을 통해 액션연기를 수입하고 자국 관객의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면서, 작품의 장르와 자본 모두 초국가적이고 혼종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팅 우 초는 대만 갱스터 영화를 시간 순으로 세 종류로 구분했다. ‘방랑자’의 전형을 타고난 인물에 대한 구원 서사 가 중심이 되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이 첫 순서다. 대만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범죄 및 갱스터 영화의 관습이 이들에게서부터 처음으로 발견되기 시작했다. 냥유연을 체화한 방랑자로서의 인물과 지역의 청년문화, 그리고 유행가 삽입을 통한 뮤직비디오와도 같은 연출이 눈에 띈다. 장르의 측면에서는 일본의 야쿠자 영화와 홍콩의 액션 영화가 모두 엿보인다. 그리고 제작 자본은 불안정하게 투입된 데다 당시 검열의 강도는 높았기에, 이 시기에 발표된 대만 갱스터 영화들 대다수는 상업적 흥행을 이루지 못했다. 계엄이 해제된 1990년대에는 대만 뉴웨이브 의 영향으로, < 비정성시 >(허우샤오셴, 1989),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1991), < 남국재견 >(허우샤오셴, 1996) 등 작가주의적 경향이 짙고 독특한 내러티브를 지닌 작품들이 갱스터 주제의 대만 펄프 영화 중 대다수를 이뤘다. 반면 세 번째 구간이라고 할 수 있는 2000년대 이후에는, 상업적 장르영화의 형식을 갖춘 작품들을 통해 갱스터 장르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 맹갑 >(유승택, 2010)과 같은 “ 대만 뉴 갱스터 필름 ”, 즉 1970~80년대 대만 펄프 영화의 특징에 청년들 간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상업성을 띠게 된 2000년대 이후 장르영화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이다. 같은 시기에 아시아 전역에 세계화 트렌드가 나타나기도 하면서, 대만의 최신 가요와 인기 배우 등에 대한 국제적 인지도가 향상됐고, 타국 영화산업 인력과의 영화 공동 각색 및 합작 역시 활성화될 수 있었다. 대만 갱스터 영화의 지역적 전통과 세계적인 영화 트렌드가 맞물린 지점이다. <맹갑> 포스터 / 사진: IMDb < 하이자오 7번지 >(위덕성, 2008)라는 멜로드라마가 흥행하면서, 대만의 지역적 특성이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킬 잠재력을 지녔음이 재발견되고, 대만 영화산업의 십년 간의 침체가 극복되는 기회가 마련됐다. 이윽고 2010년에 개봉한 <맹갑>은 실제 야외 거리와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갱스터들을 묘사하는 등 초기(1970~80년대) 대만 갱스터 영화의 특징을 여럿 지니고 있다. 하지만 초국가적 협업 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초기의 형태와 차별화된다.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액션 연출 등의 주요 보직에 외국인 스태프를 많이 기용했다. 그리고 액션 자체도 정교하게 짜인 홍콩 스타일이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본능적 움직임이 돋보이도록 연출됐는데, < 올드보이 >(박찬욱, 2003)의 액션에서 영감을 받아 양길영 무술감독을 섭외한 후 배우들에게 액션 연기를 전수해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양길영 감독의 지도를 바탕으로 작품에는 1분 28초에 달하는 싱글 테이크 액션신이 삽입될 수 있었고, 이 장면은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신에 대한 오마주이자 동시대 대만 액션 연출의 우수 사례로서 현재까지도 언급되고 있다. <맹갑>에서 양길영 감독이 참여한 사례를 기점으로 대만의 갱스터 영화의 액션 연출은 물론 각색, 투자 등 종합적 측면에서 한국 영화인들의 기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대만의 상업영화 제작 기반이 다시금 다져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일례로, 한국영화 < 남자가 사랑할 때 >(한동욱, 2013)를 대만의 문화와 관객 취향에 맞게 리메이크해 흥행한 < 맨 인 러브 >(은진호, 2021)를 들 수 있다. 연출을 맡은 대만 출신 감독 은진호는 이전에 대만 밴드 “EggplantEgg”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해당 뮤직비디오에서 역시 청년 갱스터 문화를 반영하는 서사가 전개되며 음악과 잘 어우러져 “방랑자(Wanderer)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 그는 <남자가 사랑할 때>를 대만의 관점에서 제작된 갱스터 영화로 리메이크하기 위해, 대만의 문화적 혼종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 인구가 집중돼 있거나 일본문화도 일부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을 배경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여기에 대만의 인기 가요까지 삽입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성공적인 지역화 사례라는 평가를 받으며 본 작품으로 당해 대만 개봉작 중 최고 흥행 성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좌) 국내 원작 <남자가 사랑할 때> / (우) 대만 리메이크작 <맨 인 러브> (사진: ㈜사나이픽처스, IMDb ) 한편, <맹갑> 흥행 이후 해당 작품의 제작자는 대만의 소위 ‘지하세계’ 경험을 모티브로 또 다른 갱스터 영화 <가타오>를 제작했다. 이 작품 역시 인기를 얻자 제작자 장웨이인이 후속편을 제작하면서 시리즈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갔다. 후속편 <가타오 2: 제왕의 부상>(2018)은 대만 뉴웨이브 작품에 자주 등장한 배우 겸 감독이자 과거 조폭집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고 알려져있던 옌정궈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됐다. 가오제나 콜린 쩌우와 같은 유명 배우가 출연하기도 했으며, 한국의 홍의정 무술감독과도 협업했다. IP 활용 범위도 넓어져, 작품 관련 OTT 스트리밍과 주제가 발표, 라이브 콘서트를 기획하며 ‘가타오 유니버스’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다음 편인 <가타오: 최후의 방랑자>(2021)에서는 한국 투자사와 타이베이 영화 기금 모두로부터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다. <가타오 2: 제왕의 부상> 포스터 / 사진: IMDb 결론적으로, 한국 영화인들의 전문성과 산업 구조 도입에 힘입어 형성된 대만의 뉴 갱스터 장르 는, 상업영화의 공식을 정립하고 이를 대만이라는 지역에 특화 하면서 대만 영화산업에 내재됐던 야심을 실현하는 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은 또 다른 종류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The Pigs, the Snake and the Pigeon (2023)이라는 작품이 대만영화로는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서 대규모 흥행 성적을 거두며, 아시아 국가 간 협업을 통한 갱스터 장르의 색다른 변모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위 작품의 무술감독은 대만의 스턴트맨 출신이지만 <가타오> 시리즈에서 한국인 무술감독과 함께 작업한 이후 무술감독으로 성장했다. 또한 대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멀티플렉스를 운영하는 비쇼시네마(Vieshow Cinema)의 대주주인 와닌국제비주얼엔터프라이즈(Wanin International Visual Enterprise)는 중국의 영화 제작 및 배급 업체 알리바바픽처스(Alibaba Pictures)와 계약을 맺어, 작품의 IP를 범중국어권에 수출하려는 의도를 내비쳤고, 추후 일본과 한국, 말레이시아와의 합작 가능성도 열어 뒀으며, 리메이크 작품 제작을 맡을 한국 지사까지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차원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아시아 국가 간의 영화 합작이 대만 영화계에도 생기를 불어넣을지, 혹은 대만의 갱스터 장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어질지를 주의 깊고도 흥미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팅 우 초는 설명했다. 포스트 정동 혹은 새로운 사후세계: <마약전쟁>과 <독전>을 통해 본 홍콩 누아르의 공명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박은지) 박은지 연구원은 특정 시기에 한국을 찾아온 ‘ 홍콩영화 신드롬 ’의 특징을 바탕으로 < 마약전쟁 >(두기봉, 2012)과 이의 한국판 리메이크작 < 독전 >(이해영, 2018)을 비교하며, 한국영화 속 (포스트) 홍콩 누아르의 흔적 을 발견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관객이 홍콩영화에 열렬히 반응한 일련의 현상을 일컫는 홍콩영화 신드롬은 특유의 감성과 에너지를 국내 영화계에 각인시켰으며, ‘문화적 기억’으로 회자될 만큼 영화문화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국내 영화인들의 상상력까지 가미되어 여러 차례의 각색과 리메이크, 오마주가 나타나기도 했다. <독전>은 그러한 사례들 중에서도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평단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던 작품이다. 반면, 놀랍게도 <마약전쟁>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이 작품 본연의 정체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홍콩 반환 이후 제작된 영화들의 국내 수입량과 인지도가 크게 감소한 데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국내 수입된 홍콩영화 편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연간 50~80편이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지만 1997년부터 41편으로 급감했고, 2000년대에는 이내 한 자릿수까지 곤두박질치며 반환 이후 급속 냉각되고 있는 홍콩영화 시장의 현실을 드러냈다. 하지만 신드롬이 한창이던 시기, 한국영화는 홍콩영화 특유의 어둡고 강렬한 미학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홍콩 누아르’의 등장에 열광했다.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시리즈에 이어, < 첩혈쌍웅 >(오우삼, 1989)과 < 천장지구 >(진목승, 1990), < 지존무상 >(왕정, 향화승, 1989) 등 범죄 및 갱스터 장르의 홍콩영화가 한국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홍콩 누아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홍콩 누아르’라는 용어는 1991년에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 김홍준 원장이 처음 사용하며 이후 비평계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홍콩 누아르에 대한 국내 팬들의 열정이 거세졌고, 이전까지 이상적인 목표로 받아들여졌던 할리우드와 유럽영화로부터 벗어난 영역으로서, 한국 영화문화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되기에 이르렀다. <첩혈쌍웅>, <지존무상> 중 (사진: MUBI , IMDb ) 박은지 연구원은 홍콩의 누아르와 액션을 한국영화만의 방식으로 수용 했다는 데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환이 일어난 1997년 즈음 홍콩에 스며든 우울함을, 민주화를 열망하던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 했다는 분석이다. 홍콩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서울올림픽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계화를 경험하는 한편,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불완전한 정착에서 비롯된 감각 역시 이상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충심과 형제애 등의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분위기로서의 “ 정동적 아노미(affective anomie) ”는 홍콩 누아르의 핵심적인 감수성으로 국내 관객에게 지각됐고, 파멸적이고 어두운, 울분의 폭발과 같은 키워드가 이 장르를 추동하는 감정으로 거론됐다. 박은지 연구원은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성의 영향으로 내면에 모종의 불안이 자리하게 된 국내 관객이, 선과 영웅주의 위주의 표면적 서사 이면에 있는 이러한 누아르적 감수성에 열광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잡지 《키노(KINO)》는 오우삼과 왕가위 등을 정전화하며 해당 장르를 작가주의적 관념과 연결해서 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영화 감독들은 홍콩 누아르의 기묘한 매력에 이끌려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본 장르의 연장선상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홍콩 원작들에 대한 눈에 띄는 리메이크 시도들 역시 있었지만, 아쉽게도 많은 작품이 무산되거나 흥행에 실패했다. 반환 이후 홍콩에서 직접 제작된 누아르 영화들 자체가 국내 관객에게 소개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는데, 홍콩 누아르의 중심 인물인 두기봉 감독이 2000년대 연출한 역작 Breaking News , Election , PTU 등마저도 국내 대중에게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좌) 홍콩 원작 <마약전쟁> / 사진: IMDb (© 2013 - Variance Films) (우) 국내 리메이크작 <독전> 중 / 사진: ㈜용필름 와중에 <독전>이 흥행에 성공하며 원작 <마약전쟁>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킨 점이 흥미롭다. 두 작품은 줄거리는 같지만 스타일과 톤,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를 통해 <마약전쟁>은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작품으로 국내 관객에게 인식될 수 있었다. 영화는 두기봉 감독이 연출한 첫 홍콩-중국 본토 합작 영화로, 홍콩 마약 카르텔의 브로커 티미(Timmy)가 사형을 면하기 위해 마약 경찰 장(Zhang)과 공조한다는 설정으로 언더커버 범죄 스릴러의 흔한 관습을 따르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티미의 배신이 가져온 범죄 조직의 붕괴로 초점을 옮겨가고, 경찰 조직이 참혹하게 파괴되며 마무리된다. 치밀하게 탈출을 계획하는 티미와 마약 카르텔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장은 각자의 목표를 향한 굳은 결심을 지닌 채 극명하게 대립한다. 반면, <독전>은 경찰 원호( 조진웅 )와 락( 류준열 ) 사이의 정서적 긴장을 강조하고, 두 인물 간 경쟁 관계를 점차 심화시킨다. 그리고 자기 존립과 배신을 원동력으로 움직여 윤리적 측면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던 <마약전쟁>의 티미와 달리, 락은 마약 조직 내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로서 경찰의 수사를 도우면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인물로 상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인물 설정은 홍콩 누아르의 특징을 공유하는 한국형 범죄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며, ‘ 속죄를 통해 회복된 영웅적 행동 ’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원작 <마약전쟁>은 국가 간 합작으로 탄생한 동시대 홍콩 누아르에 그치지만, 리메이크작 <독전>에서는 남성 인물들이 차츰 동료애를 형성함과 더불어 서로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고받는 와중에, 극단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카르텔의 착취 구조를 배경으로 그에 대한 사회적 응징의 아이디어도 제시한다. 원호와 락은 마약 카르텔의 폭력에 어머니를 잃은 락의 사연, 그리고 그 카르텔에 대한 수사에 공조하려는 의지를 매개로 잠시나마 연대하고, 이로써 경찰과 범죄 조직원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이후 경찰 원호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개인의 실행을 중심으로 ‘정의’의 개념을 재구성하고, 락은 무자비한 착취를 기반으로 이익을 창출해온 브라이언의 신체를 훼손해 흔적을 남기며 사적 응징을 완수한다. 두 인물은 이윽고 서로를 총으로 겨눈 채 마지막 장면에서 마주하는데, 한때 감정적으로 결속했지만 극중 사건 이후 멀어진 둘 사이에 모호한 연대와 상호 환멸의 분위기가 감돈다. 박은지 연구원은 <독전>의 이와 같은 차별화된 서사와 감정들이, 홍콩영화 신드롬이 정착시킨 ‘농도 짙은 감정’의 범죄물을 한국 조폭영화의 관점에서 이해한 결과 라고 설명한다. 창작자의 시네필적 면모와 장르의 혼종이 작용하면서, 홍콩 누아르와 한국형 범죄영화의 특징들을 반영함과 동시에 전복하기도 하는 독창적인 리메이크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 토론 * 홍콩 침례대학교 영화과 조교수 도로시 와이 심 라우(Dorothy Wai Sim Lau)가 패널 3 발표자 4인의 연구 내용을 요약하고 아래와 같이 질문했으며, 발표자들이 답했다. Q. 김수현 교수에게 (질문1) 시대별로 한국과 중국이 처해있는 외교적 상황에 따라 합작 양상이 달라진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렇다면 <제3의 사랑> 제작 당시 한·중 간 정치·사회적 관계 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답변) <제3의 사랑>이 제직됐던 2010년부터 2015년 사이, 한국 정부는 영화산업에서의 합작에 호의적이었고 관련 절차가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본 작품의 감독과 촬영감독, 음악감독을 비롯한 여러 스태프 역시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했지만, 발표 중 이야기했듯이 중국 제작진의 개입과 지정학적 불안정성 등으로 인해 충분한 창작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다. (질문2) 중국의 제5세대 감독들에게서 나타난 작가주의적 특색과 달리, 블록버스터 < 유랑지구(The Wandering Earth) >와 같은 작품은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national authorship)과 국가적 브랜딩이 눈에 띈다고 발표 중에 말씀하셨다. 후자의 ‘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 ’이 무엇일지 보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답변) 물론 장이머우와 천카이거 감독과 같은 이들은 한국의 봉준호 와 박찬욱 감독처럼,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통해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지위를 오랜 기간 인정 받아왔다. 하지만 이들이 속한 제5세대 이후에 등장한 주선율영화(1990년대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이뤄진 후 사회주의와 애국주의 등의 중국사회 주류 이념을 교육 및 선전할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의 종류)와 같은 장르에서는 작가주의에 관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중국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비전이 관객 선전을 목적으로 하여 주입돼 있다. 따라서 감독이나 스태프 개인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작가주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국가 권력과 이념을 기반으로 ‘중국영화’라고 이름 짓는 행위 자체만이 의미를 갖게 된다 는 점에서 제5세대 감독들의 활동과는 맥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Q. 팅 우 초 교수에게 (질문) 중국과 홍콩에서 비롯된 액션 스타일과, <맹갑>에 도입된 한국식 액션 스타일의 차이점을 설명해줄 수 있는가? (답변) 홍콩의 액션은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아, 각기 다른 그룹이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연출돼 있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이와 같은 홍콩식 액션을 받아들이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응용 했는데, 카메라 앵글에 맞춘 인위적 동작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움직임을 가미 했다는 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Q. 박은지 연구원에게 (질문) 발표에서도 언급해주신 홍콩 누아르의 ‘정동’적 측면이 동아시아 국가의 리메이크작을 통해 표현 될 때 주로 어떤 특징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다. (답변) 이번 발표를 위해 진행한 <독전>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말씀드리자면, 먼저 정동적 모티프로부터 영향에 따라 범죄자와 경찰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설정 이 있다. 이는 남성들 간의 연대에 기반한, 매우 불안정하고 양가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다른 하나는 ‘ 상호반영적 페르소나(mirroring persona) ’의 발견이다. 한국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으로, 두 남성 인물이 서로를 응시하면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상대의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패널 4> 한·홍 합작의 재해석 특정 영화인이나 작품의 사례를 인용해 한국과 홍콩 간 영화 합작이 일어난 역사를 돌아보고, 눈 여겨 볼 만한 몇 가지 대목을 자세히 살펴봤다.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서 새로운 시대를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영화를 통한 두 국가의 협력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제언도 이어졌으며, 패널 발표 전반은 홍콩 침례대 케니 응 교수가 이끌었다. 호금전의 한국 산악영화에 대한 재평가 (영화사가 · 독립 연구자 스테판 테오) 1970년대 한국영화는 홍콩과 대만과의 합작을 여러 번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Destination South Korea”와 같은 현상으로 일컬을 만큼 합작 영화의 주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스테판 테오(Stephen Teo)는 그중에서도 < 사문의 승객 >(1979)과 < 산중전기 >(1979)에 집중해, 한·홍 합작의 로케이션으로 한국의 산세가 선택된 맥락과 함께 각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었다. 그는 한국의 산속에 자리한 전통적 양식의 건축물과 사찰, 주변의 절경이 두 작품의 핵심적인 미적 요소로 기능했고, 배경이 되는 전근대 중국(historical china)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줬다고 말했다. 모든 장면이 인위적인 세트나 스튜디오를 이용하지 않고 실존하는 장소에서 있는 그대로 촬영된 점도 특별하다. 스테판 테오는 ‘문화적 냉전(cultural cold war)’이 이어지던 1970년대 중·후반 중국어권과 한국의 영화 합작이 선호되는 환경이 마련됐고, 두 편의 작품 역시 그 결과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의 잔재로부터 벗어난 직후였기에 정치와 사회 전반이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무협을 비롯해 귀신, 종교, 미신 등(신이나 요괴,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중국영화의 한 장르로 ‘신괴’로도 일컬어진다)이 개입한 장르나 서사의 유통도 금지돼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영화 촬영지로서, 감독 호금전이 의도한 장르를 시도할 ‘자유’를 선사 했다고 봤다. 한국과 홍콩, 대만이 영화 제작 측면에서 ‘ 자유에 기반한 네트워크(freedom nexus) ’를 구축하며, 중국 본토에서의 정치, 사회, 문화적 제약으로 인해 수용되기 어려운 작품들이 제작되는 환경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지정학적 상황도 변화했기에 위와 같은 맥락은 작품의 가치를 뒷받침하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대신 그는 한국이 ‘문화적 중국’으로 재현됐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합작의 의의와 효과를 설명했다. 유교학자 뚜웨이밍(Tu Wei-ming)이 제안한 개념인 ‘문화적 중국’은 중국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구성된 국제적 공동체를 가리키며,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을 포함해 전 세계의 중국어권 디아스포라 지역도 해당된다. 그중에서도 홍콩은 ‘문화적 중국’의 기조로 기획된 영화를 한국과 합작했고, 호금전의 위 두 작품에서 한국이라는 배경이 ‘문화적 중국’을 재현하는 데 효과적임이 입증됐다고 그는 평가했다. 호금전이 한 인터뷰에서 답변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몇몇 자연 경관으로부터 중국과의 문화적 유사성을 발견한 경험을 계기로 두 작품을 한국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두 국가는 유교와 불교와 연관된 의식이나 생활 양식을 오랜 시간 공유해왔다. 같은 맥락에서, 홍콩의 영화 제작진들 역시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된 문화적 냉전 시기, ‘문화적 중국’을 재현할 수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한국을 택해 합작을 시도했다는 주장이다. <산중전기> 중 / 사진: IMDb( 1 , 2 ) 한편, 아시아 문화권에서 공유되어온 동양 철학의 개념이 작품 속 주제의식의 동력이 된 점도 눈에 띈다. 도가적 사상에서 비롯된 장자의 ‘소요유’는 『장자』 제1편에 등장하는 용어로,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정신적 경지를 뜻한다. 사물과 세상에 구속 받지 않고 광막한 공간에서 누리는 절대적인 자유이자 참된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호금전의 작품의 모티프로 자주 등장한다. <사문의 승객>과 <산중전기>에서도 인물들은 계속 걷는다. 단순히 땅 위를 걷는 것뿐만 아니라 적을 쫓아 뛰고, 몇몇 액션신은 공중에서 펼쳐지며 ‘하늘에서 걷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스테판 테오는 소요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감각을 포착한 호금전이, 이를 인물의 다양한 움직임들(걷기, 뛰기, 공중에서 활동하기)로 작품 속에서 실현 하고 있다면서, 배경이 된 한국의 자연경관 역시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관점에서 ‘소요유’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두 작품은 그 개념의 특성에 따라 존재와 시간의 ‘실존’을 지지하게 된다. 한편 호금전은 일종의 방랑자로서, 당시 중국사회의 제한적 환경에서 벗어나 한국이라는 대안적 공간에서 예술적 자유를 발휘해 창작한 작품으로 소요유 개념을 시각화했다고 덧붙였다. 무사, 스파이, 그리고 쿵푸 마스터: 정창화 감독과 초국가적 영화 제작자의 탄생 (홍콩 시티대학교 창의미디어학부 조교수 이상준) 이상준 교수는 그간 학술적으로 분석된 적이 드문 정창화 감독에 대한 예비적 수준의 연구로서 1960~70년대 한국과 홍콩에서 그가 지나온 연출 여정을 들여다봤다. 감독으로 데뷔한 1953년부터 1977년까지 그는 5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홍콩에서도 합작영화 제작의 주역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회고전을 계기로 그의 연출작이 지닌 영화사적 가치가 국내에서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당시 회고전에서는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와 작업한 한·홍 합작영화 9편이 상영됐다. 여러 국가를 오가며 활동하는 아시아 영화인들은 ‘내셔널 시네마’라는 프레임에 부합하지않는다는 이유로 과거 연구의 대상으로 쉽사리 선정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런 편협한 경향성이 사라지긴 했지만, 정창화 감독이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지녔거나 초국가적 작업에 참여하는 감독과 촬영감독, 배우 등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창화 감독은 활동 초기부터 여러 장르에 걸쳐 왕성화게 활동했다. 1965년부터 3년간 멜로드라마, 청춘, 무협 등의 장르영화 15편(< 황혼의 검객 > 등)을 한국에서 연출했고, 1968년에 쇼브라더스와의 협업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6.25 전쟁 이후로 중국어 문화권의 제작사 두 곳(쇼브라더스, 골든하베스트)과 공식적으로 협업하며 높은 흥행 수익을 올린 최초의 한국인 감독으로 거듭났다. (물론 그가 쇼브라더스와 초반에 합작한 다섯 편은 제목과 감독의 이름을 사실과는 다르게 명시한 ‘위장 합작(counterfeit coproduction)’에 해당한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 배우와 촬영감독, 무술감독과 같은 제작 인력이 그의 활동을 계기로 홍콩으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합작에 합류하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제작 파트너가 골든하베스트로 바뀐 뒤에는, 그는 제작사 산하에서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별도의 전속 스튜디오를 설립해 한국은 물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제작사들과도 활발히 합작하기도 했다. 다만 그가 홍콩에서 제작했지만 한국에서 공개한, 앞서 언급된 ‘위장 합작’ 작품들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터라, 홍콩에서의 그의 활동이 학술적으로 면밀히 분석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낳고 말았다. 국내의 많은 영화사 연구자들은 그 작품들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거나, ‘탈국적(denationalized)’ 활동의 결과물 또는 한국영화사의 ‘비공식적 일화’ 정도로만 평가했다. 이는 홍콩영화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 >(1972)이 ‘컬트적 고전(classic)’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역시 그를 ‘작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상준 교수는 이와 관련해 2008년에 홍콩의 영화 연구자 웡 아인 린(Won Ain-ling)과 대화하며 접한 설명을 인용했다. 웡 아인린에 따르면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영화’의 정체성 구성이 간절해진 상황에서, 홍콩을 상징하는 무협 장르의 영화에 한국과 일본 출신의 영화인들이 관계되어있다는 사실이 홍콩의 영화인들을 약간은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주자(Emigré)와 망명자(Exiled)와 같은 디아스포라 영화인들은 초국가적 영화사 형성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서 ‘내셔널 시네마’의 영역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활동이 망각돼서는 안된다고 이상준 교수는 주장한다. 영화와 사람, 문화적 움직임, 협업, 공간 등이 여러 국가에 걸쳐 조직될 수 있다는 ‘초국가적 관점’ 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창화 감독은 1960~70년대 한국과 중국어권 간의 영화적 교류를 중개한 이로 상정된다. 그는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고 정부 개입도 심각했던 당대 한국영화계에 쿵푸영화의 매력을 제시했고, 새로운 합작 파트너로서 동남아시아권의 인력을 소개하는 참신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상준 교수는 관련해 정창화 감독이 한국에서 홍콩으로 제작의 근거지를 옮기고 초반에 발생한, 쇼브라더스와의 합작 사례를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그가 < 망향 >(1958)을 통해 홍콩과의 합작을 처음으로 시도한 이후 < 조용한 이별 >(1967)과 < 비련 >(1967)을 제작했지만 홍콩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 첩보 스릴러로 손꼽히는 < 순간은 영원히 >(1966)의 흥행 성적은 비교적 준수했다. 설립자 런런쇼의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해 1968년, 쇼브라더스와 5년간의 계약을 체결하게 되기도 했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기준) 동시대적 설정을 바탕으로 ‘현대 액션 영화’를 구현할 줄 알았기에 자신이 섭외됐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이때까지 홍콩은 사극 기반의 무협 장르가 액션 영화의 중심이 되어 현대적 액션 연출 경험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쇼브라더스에서는 일본 출신 감독, 촬영감독, 작곡가, 안무가 등이 상당수 활동 중이었으며, 정창화 감독이 입성한 이후 성훈, 임지은, 남석훈 등의 한국 배우들의 합류도 앞두고 있었다. 당대 여느 제작사보다 국제적으로 조직이 구성되었던 업체라고 할 수 있다. 쇼브라더스의 국제 교류 역량에 힘입어 정창화 감독이 해당 제작사 안에서 처음으로 연출한 작품은 < 천면마녀 >(1969)로, 홍콩에서 007 시리즈가 유행하던 중 그와 같은 형식으로 제작된 여성 주연의 액션 영화다. 두 명의 조감독과 배우 한 명(성훈)은 한국인으로, 세 명의 핵심 스태프는 일본인으로 기용하며 동아시아 출신의 인력들이 어우러졌다.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적정 수준의 상업적 이익을 달성하며 유럽 영화계에 진출한 최초의 쇼브라더스 제작 작품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그 사이 호금전의 <대취협>(1966)이 홍콩 박스 오피스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아시아 전반에 무협 장르 붐을 일으키면서 쇼브라더스의 제작 기조도 무협 장르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정창화 감독 역시 시장의 수요를 의식해 한국에서 <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 등 ‘국내 무협영화’를 연출한 데 이어 쇼브라더스에서도 중국어권 출신이 아닌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사극 무협 기반의 작품들을 연출했다. 그는 쇼브라더스의 무협 액션 스타일에 반일 감수성을 결합하고, 미국의 웨스턴 장르도 일부 차용했으며, < 강호여협 >(1970)과 < 아랑곡의 혈투 >(1970)와 같은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아랑곡의 혈투>가 긴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연출된 전투 장면들로 볼 때 1960년대 만주리안 웨스턴 장르의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천면마녀>, <아랑곡의 혈투>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다만 이상준 교수에 따르면, 정창화 감독은 무협 장르의 붐에 다소 늦게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쇼브라더스와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무협 장르 연출을 시도했던 1970년대 초반은 쇼브라더스의 무협 제작 열기가 식고 홍콩영화가 ‘쿵푸’라는 물결을 마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보다 현대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노동 계급의 이야기, 그리고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맨손 쿵푸 액션은 홍콩영화의 새로운 흥행 공식으로 자리매김했고,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라는 제작사의 설립 및 운영의 주된 목표가 됐다. 정창화 감독은 이 트렌드를 재빠르게 수용해 1972년에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을 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연출한 쿵푸영화였지만 한국에서 제작했던 전작들과 유사하게 반일 감정을 모티프로 한 서사가 중심이 됐다. 다만 작품 개봉 직후에는 홍콩 내에서 흥행에 실패한 듯 보였고, 쇼브라더스의 새로운 인력과의 의견 불일치 등의 문제도 겹쳐 정창화 감독은 같은 해에 골든하베스트로 이직한다. 하지만 1973년 작품은 미국 박스 오피스 흥행 1위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1970년대 초반 홍콩영화의 국제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골든하베스트는 할리우드와 같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구조를 추구하며 유연한 제작 체계역시 갖춘 기업이었다. 정창화 감독은 이곳에서 < 흑야괴객 >(1973), < 흑무사 >(1974), < 황비 >(1974), < 심판자 >(1976)를 연출했고, 다양한 장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 골든하베스트의 방침에 따라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한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서 촬영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작품 < 충열도(파계) >(1977)가 개봉하자, 그는 갑작스럽게 홍콩을 떠났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하신 만큼 한국영화의 발전에도 기여해줬으면 한다”라는 부탁을 문화공보부로부터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즈음 국내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전두환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어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 귀국 후 정창화 감독은 스스로 제작사 화풍흥업을 설립해 1980년대 중에는 국내에서 제작자로 활동했고, 이를 계기로 영화 연출에서 은퇴한 그는 1996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상준 교수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창화 감독 회고전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한 조영정을 인용하며, “액션영화의 선구자로서 이 장르를 한국에 소개하고 발전시킨 그가 다채로운 이력에도 불구하고 심도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라는 점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발표 당시 컨퍼런스에 함께 하며 기조연설을 맡기도 했던 연구자 크리스 베리(Chriss Berry)의 말처럼,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 간의 연결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민족성(ethnicity)과 유사한 ‘국민국가(nation-state)’ 개념에 기반하지 않고, 개별적인 초국가적 프로젝트들에 의해 더욱 구체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관련된 학술적 논의가 이어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하나의 냉전에서 또 다른 냉전으로: 한·홍 합작의 과거로 미래를 살펴보기 (홍콩필름아카이브 소속 영화평론가 샘 호) 샘 호(Sam Ho)는 이틀 간의 컨퍼런스를 마무리하는 순서에 걸맞게, 한·홍 합작의 과거를 지나 그로부터 역동적으로 변화한 결과로서의 현재를 개괄하고, 이를 바탕으로 양국 간 영화 협업의 미래를 조망했다. 그는 동시대 사회가 유례 없는 새로운 질서 를 마주함과 동시에, 그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국제사회의 냉전 상황 역시 목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컨퍼런스의 목표가 더욱 뜻깊은데, 두 국가로부터 비롯된 영화적 움직임들이 갈라지면서도 합쳐지는 대목들을 다루고 있어, 모순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는 오늘날의 역사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0년의 역사만 보더라도, 아시아는 외부의 오랜 침략과 억압으로 인해 깊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고통으로부터 교훈과 깨달음을 얻어 현재와 미래를 가꾸려는 의지가 돋보인다고 샘 호는 말했다. 따라서 아시아는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는 와중에 지정학적 권력의 중심으로 피할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동시대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그 권력의 중심지를 조정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려면 마주하게 되는 사건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짚어야 하는데, 개인이 모든 맥락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러 연구자가 관점을 공유하는 이번 컨퍼런스와 같은 자리가 자주 마련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그가 한·홍 합작 역사를 읽는 방법으로 추천한 바는 이렇다.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을 기점으로 합작이 시작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를 그는 홍콩영화의 제1 황금기라고 보는데, 좌익(left-wing)과 우익(right-wing) 진영의 제작사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홍콩영화의 두 진영은 당시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샘 호에 따르면 오히려 긴밀히 연결된 채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냉전 체제에도 불구하고 다극적인(multi-polar) 영화산업을 구축해나갔다. 여러 작품에 걸쳐 홍콩과 합작한 한국인 정창화 감독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관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홍콩국제영화제에서 2000년대 초반의 독창적인 한국영화들을 관람하고 완전히 매료된 그는 해당 작품들 이전의 한국영화사가 궁금했고,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지원으로 한국에 방문해 한국고전영화를 연구하는 기회를 얻은 바 있다. 정창화 감독을 비롯해 홍콩과 합작한 여러 한국영화인들의 활동 역시 이러한 연구의 의지를 다지도록 해줬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과 홍콩의 합작이, 동아시아의 문화와 가치를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양국이 공유하게 된 경험 이고, 결과적으로 두 국가의 영화적 전형에서 벗어난 새로운 무언가가 창작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여정을 홍콩영화사와 연결 지어 돌아봤다. 홍콩은 자국 내 영화산업도 활성화된 상태였지만 영화 미학의 측면에서도 기여한 바가 큰 반면, 타국에 비해 필름아카이브를 상당히 늦게 설립했다(1990년대). 그래서 소장자료의 규모 역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인데, 그럼에도 아카이브로서 사업을 개척하고 학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샘 호는 그 비결이 영화 연구에 미치는 지정학적 영향력을 수용하면서도 아카이브 고유의 임무에 충실한 연구를 병행 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영화 연구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은 아직까지 상당 부분 서구 문화권의 기준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연구 주제는 여전히 “저명한 지면”, 즉 서구의 주도 아래 발행되는 지면을 통해 공개되기 어렵다. 샘 호는 이를 비판하기보다, 지정학적 영향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 불가피한 현실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는 필름아카이브의 연구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영화학계의 여론을 지배하는 서구 문화권의 가치관에 근접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필름아카이브만이 파고들고 매진할 수 있는 주제로 연구하는 이들을 지원 하기도 한다. 아시아 영화인 1인의 필모그래피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저서를 집필하는 등, 주류 학계의 틈새를 메우는 이들의 유의미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샘 호는, 자신을 포함해 과거와 현재를 면밀하고 꾸준하게 연구하려는 의지를 지닌 아카이브의 일원들이 있기에, 홍콩영화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 토론 * 패널 3과 4의 발표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청중이 질문을 던지거나, 발표자들이 서로의 주제와 관련해 궁금했던 점을 문의하고 답변했다. Q. (청중) 이상준 교수에게 (질문) 정창화 감독은 홍콩에서 영화를 제작할 당시,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에 더욱 영향을 받았는지 , 혹은 홍콩 영화산업과 연출 방식에 동화된 상태였을지가 알고 싶다. (답변) 그의 자기 정체성 인식이 작품을 통해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처음 쇼브라더스를 통해 홍콩에 진출했을 당시, 그는 제작사와의 계약에 의해 섭외된 여러 외국인 감독 중 하나였다. 따라서 각본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작품 자체를 통제할 권한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연출 방식(액션 동작과 인물 설정, 반일 감정에 관한 요소 등)만큼은 당대 쇼브라더스에서 제작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골든하베스트 에서의 필모그래피는 달랐다. 이곳에서는 그가 창작에 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더욱 확대 됐고, 한국 출신 인력을 도입할 여건도 형성되어 쇼브라더스에 비해 훨씬 많은 ‘합작’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가 골든하베스트에서 작업할 당시 연출한 작품들을 선호한다. 물론 작품의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한 것은 전혀 아니며,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말씀드렸다는 점 참고 부탁드린다. Q. 샘 호 평론가 (질문) 일레인 정이 발표한 ‘부드러운 남성성’은, 중국의 유교적 가치관으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유래된 유교 사상에 입각해, 중국에서는 학문에 정진하는 ‘학자’로서의 태도 가 남성의 이상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건이 된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유교적 남성상은 점차 변화를 겪어 ‘신체적 강인함’을 수련하려는 태도도 강조 된 바 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학문 수양을 중심으로 한 전자의 ‘부드러운 남성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답변: 김수현 교수) 대부분의 각본을 남성이 집필하는 한국‘영화’ 의 경우, 신체적으로 강인하고 마초적인 남성성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반면 한국‘드라마’ 작품들은(특히 멜로드라마 장르가) 여성 작가에 의해 주로 집필되곤 한다. 그리고 이들이 그린 남성 인물의 이미지는 작가의 주관이 반영된, 이상적이면서도 무척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집합함으로써 탄생하기에, 한국드라마가 설정한 남성 이미지는 현실 사회에서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리하면, 한국 영상 콘텐츠를 통해 남성성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영화와 드라마에 각기 다른 양태로 형성되어있는 젠더 및 섹슈얼리티 구분 현상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 전편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은 돌아가서 인터뷰를 먼저 읽기 바란다. < 몽녀 >에 관한 글은 전편과 후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글은 후편에 해당한다. 나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다음 이어서) 1968년 임권택 은 입체영화 <몽녀>를 찍었다. 나는 만들었다거나, 연출했다거나, 라고 말하는 대신 찍었다, 라고 썼다. 물론 이 말 사이에 어떤 위계 질서를 세우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무언가 기술적인 측면에 방점을 찍고 싶다. 무엇보다 먼저 영화를 보기 전에 관객의 절차를 차례로 밟아 볼 생각이다. 먼저 신문광고를 보았다. 그때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는 첫 번째 순서는 신문 하단에 실려 있는 개봉 광고를 보는 것이었다. 거기 영화제목 <夢女>만큼 큰 글자로 ‘立體映畵’라는 카피가 자리 잡고 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몽녀>의 마케팅 포인트가 ‘입체 영상’이 아니라 ‘입체 음향’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 아래 ‘한국 최초로 시도되는 4본 츄럭 입체음향’ (물론 ‘츄럭’은 ‘트랙’의 당시 표기이다)이라고 ‘기술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문구는 영화광고 지면의 맨 위에도 다른 서체로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이재웅 녹음기사의 이름으로 “관객에게 피로를 주지 않는 선명한 영상에 완벽한 입체화면, 입체 음향. 등골이 오싹하는 장면들이 많은 본격적인 입체음향, 4본 튜럭을 겸한 완전 입체영화이오니 임신부나 심약한 분은 동반하시길...” 이라고 충고하는 카피를 덧붙였다. (아래는 ‘츄럭’이라고 쓰고 바로 위에는 ‘튜럭’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두 가지 이상한 점. 이재웅 녹음기사는 지금이나 그때나 영화 현장에 있는 스텝들 이외에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다. 하긴 그건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 설국열차 > 혹은 < 올드 보이 >, < 밀양 >, < 피에타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의 녹음 기사 이름을 들어는 보았는가. 그런데도 <몽녀>는 주연 배우나 감독의 이름 대신 녹음 기사를 내세워서 광고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말 그대로 ‘前無後無’한 일이다. 두 번째, 만일 카피에 내건 이름이 무언가를 보증하는 것이라면 이 문구에는 연출(과 촬영)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냥 녹음 기사의 이름으로 “오싹하는 장면들과 선명한 영상”을 보증하고 있다. 카피의 목표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에게 어떤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카피를 전적으로 믿는다면 <몽녀>는 사운드로 연출된 영화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우리는 지금 <몽녀>를 ‘4본 츄럭 (혹은 튜럭)’으로 감상할 수 없다. 현재 보존하고 있는 네가의 손실에 사운드트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판스코프와 장석준 촬영감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두 번째 ‘입체영화’를 찍은 임권택 에게 돌아오고 싶다. 1968년에 임권택은 네 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그런 다음 이듬해에는 6편을, 그리고 70년에는 8편을, 71년에는 7편을 찍었다. 그 자신은 “완성한 영화들이 개봉이 밀려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4년간 25편을 찍은 건 사실이다. 임권택은 창작에 대한 아이디어와 열정에 넘쳐나서 (그의 전 작품 중에)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영화를 이 시기에 찍은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피로에 지친 상태였다. 몸의 피로. 시간의 피로. 지쳐버린 이미지. 무시무시한 속도. 아이디어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도. 막다른 골목. 이어지는 현장. 임권택은 지나간 것에서 나와야했지만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건 그저 그때 그의 영화를 보고 하는 말이다. 그 안에 있으면서 임권택은 영화가 무언가에 침범당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테크놀로지들. 영화는 테크놀로지가 변하면 문법이 바뀐다. 한국영화는 새로운 스펙터클을 찾고 있었다. 기술의 진보. 기존의 기계를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 영화는 미래주의의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이동. 그 와중에 놓인 해. 1968년에 만든 영화들 사이에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단 한 가지. 그건 그 이전과 다른 것을 만드는 것이다. < 요화 장희빈 >은 이미 임권택이 만들어온 사극이지만 이 영화는 그의 첫 번째 칼라영화이다. 물론 그 새로운 이것임, 이 기술에만 놓여있던 것은 아니다. < 바람 같은 사나이 >는 반공영화지만 희미하게 구원이라는 테마가 종교의 말씀에 이끌리고 있다. < 돌아온 왼손잡이 >는 임권택의 세 번째 ‘다찌마와리’영화지만 여기서 그의 영화 전체를 뒤덮다시피 하는 신체훼손의 테마가 불려 나온다. 만일 이 또 다른 새로운 이것임, 에 대한 새로운 짝이 없었다면 < 잡초 >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위험한 가설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 안에서 느껴지는 영화 자체의 감각에 대한 불안이다. 새로운 시스템. 잘 작동되지 않기 시작하는 영화의 지각 장치들. 그 사이를 에워싼 다음 무언가 닫혀버린 듯한 장치들. 자기 앞에 놓인 영화의 구역이 자기에게 친숙함 속에서 낯설어지는 경험. 임권택은 그것을 익혀야만 했다. 무언가 그가 여기서 새로운 것을 해냈다기보다는 어쩐지 이 영화들에는 배움의 태도가 느껴진다. 그리고 3D 영화 < 몽녀 >가 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나는 아직도 3D 영화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 아바타 >에 대해서 일제히 흥분했을 때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단지 영화가 너무 시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이 영화가 보여준 3D에서 어떤 영화적 흥분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공격처럼 느껴질 것이다. 천만의 말씀. 나는 논쟁을 하기 위해 지금 이 말을 꺼내든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반문하고 싶다. 3D는 영화에 무엇을 부여하였는가? 생명? 글쎄. 상상? 천만에. 거기엔 정반대의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그건 당신도 알고 있다. 사유? 어쩌면. 그렇다면 어떤 사유? 여기엔 다시 어떤 관념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무엇인가를 말하는 대신 무언가를 보여주려들 때 나타나는 그저 물리적 운동들, 드러난 흔적선, 거기서 나는 단지 프레임의 변주를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대신 어디에선가 쇼트가 중단되었음을 느꼈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이 너무 섣부른 것이라면 적어도 영화라는 시간의 멈춤, 거기서 비롯된 모종의 고통, (그렇다) 무언가 멈춰버린 답답한 쇼트 안에서 다소의 피로를 경험하였다. 나는 여전히 3D를 볼 때마다 두리번거린다. 좌표체계들의 질서로 다시 배치된 프레임. 새로운 조건, 이때 내가 여기서 보는 질서는 동시에 (재난이라는 의미에서의) 카오스이다. 새로운 질서에서 나는 매번 새로운 창조를 보는 대신 무언가 떠오르다가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는 어떤 실패를 본다. 나는 아직 이 실패를 설명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때 무엇이 어른거리는가. 새로운 이미지? 아, 이미지. 그런데 어떤 이미지? 공간의 새로운 경험. 그렇게 다시 경험이라는 말이 영화에서 우리들의 중심에 들어섰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기술의 경험이라는 문제는 영화에서 까다로운 질문이다. 만일 누군가 3D 효과의 가장 훌륭한 예를 요구한다면 (3D기술로 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힛치콕의 < 현기증 >에서의 줌 인 트랙 아웃을 선택할 것이다. 역사적 전환기에서 현재의 생산조건이 예술에서 실현가능한 발전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종종 미학적 가치의 기준과 시장의 교환가치 사이에서 모호한 협상을 벌이기도 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가능성의 잠재성. 어쩌면 내게 당신은 그 잠재성과의 거리에서 가능성의 상상이라는 능력을 다시 조절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 몽녀 >를 말하기 위해서 나는 다소 우회하고 싶다. 잠시 멈춰 세운 1968년. 모두가 물어보았다. 21세기 영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D는 오래 전에 시작되었지만 < 아바타 > ‘이후’ 만큼 전세계적인 (자본과 그에 얽혀든 노골적인) 구경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점점 더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를테면 2013년, 할리우드로부터 (겉으로는) 영화 예술을 방어하기위해 예술가들을 위한 파티처럼 ‘골치 아픈 작가’들의 영화를 모아놓는 칸 영화제가 3D 영화 < 위대한 개츠비 >를 개막작으로 초대하였고, 경쟁하듯이 이어지는 베니스영화제가 역시 3D 영화 < 그래비티 >를 마찬가지로 개막작으로 발표하였다. 3D영화에는 한 가지 신화가 있는데 그건 지금 막 발표한 ‘아무도 보지 못한’ 새 영화가 이제까지의 어떤 3D 영화도 기술적인 이유로 구현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미지를 경험하게 해줄 것이라는 소문이다. 물론 그건 빈 상자이다. 마치 진짜 선물을 감춰놓은 최후의 상자처럼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열고 또 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같은 행동을 반복할 것이다. 차라리 이미지의 경험이라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면 나는 IMAX에 대해서 아주 관심이 많다. 그건 시네마스코프만큼 생각해볼만한 영화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연설명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당신은 내게 냉소적으로 반문할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IMAX를 볼 수 있는 스크린이 없잖아요. 나도 알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당신의 지적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 화면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자리에서 IMAX 스크린으로 고정시킨 것이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영화 전체를 IMAX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IMAX 체험이라는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영화적 체험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의 물신적 체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는 다소 짓궂은 담론의 교란이 음산하게 떠돈다. 잘못 잡아당긴 재앙의 실. 그때 테크놀로지는 비판적 거리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한 가치와 이윤율의 회전 사이 안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예술에서 기능이라는 문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영화에서 우리를 새로운 환경, 낯선 속도, 무언가 시선이 얽히고설킨 가운데로 데려다 놓는 것처럼 보일 때 거의 동시에 어떤 영화적 능력이 마비되고 있음을 동시에 느껴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기능이 속도를 갖기 시작하면 다른 능력은 감속하기 시작한다. 나쁜 경우는 그 능력이 제로가 될 것이다. 문제는 21세기 영화에서 오로지 산업적인 이유로 두 가지 테크놀로지가 배급 구조에 따른 (제한된 자본 순환구조 안에서 일반적 이윤율의 하락을 상쇄하는 새로운 제 요소 중의 하나로 강제적으로 결합시키려는) 극장 라인의 요구에 따라 기형적으로 결합하면서 오히려 영화의 모든 잠재성은 하나의 감각으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는 자본의 운동. 3D 영화는 초과잉여가치의 발생인가, 아니면 (관객의 자리를 일시적으로 제한된 시간 동안 제공하는 자리를 바탕으로 한) 임대업의 상승인가. 그 자리를 차지한 시각적 스펙터클. 말하자면 영화의 입장에서 IMAX 3D는 일종의 스펙터클한 괴물이다. 나는 이것을 벤야민의 말을 빌려 와해된 시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와해된 시장에서는 오락만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뿐이다. 기 드보르는 여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덧붙인다. 스펙터클이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되어버린 자본이다. 자본은 미학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마틴 스콜세지의 < 휴고 >를 보았다. 멜리에스의 환상적인 타블로 안에서 재현된 3D. 베르너 헤어초크의 < 잊혀진 꿈의 동굴 >을 보았다. 프랑스 남부 아르데스 협곡 안에 자리 잡은 쇼베 동굴 안에 자리 잡은 3만 2천 년 전의 동굴 벽화들. 그 사이를 외롭게 떠도는 3D 카메라(들). 빔 벤더스의 < 피나 >를 보았다. 피나 바우쉬의 제자들의 기억과 재현. 종종 무용수들은 2차원을 벗어나듯이 도약한 다음 중력이 잡아당기는 무게에 따라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갔다. 픽사의 < 토이 스토리 3 >를 보았다. 나는 단지 효과라는 점만 고려한다면 3D는 애니메이션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새로운 차원에 대해서 금방 호기심을 잃어버렸다. 3D 영화는 실재의 감각을 가져야만 한다는 명제를 여기서 확인한다. 프란시스 포드 콧폴라의 <트윅스트>를 보았다. 이 야심적인 뱀파이어 영화는 다만 부분적으로만 3D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명백히 이 영화는 장 엡스탱의 < 어셔가의 몰락 >을 다시 끌어들이고 있다. 엡스탱의 포토제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 그 속에서 창조된 시간. 영화와 물리학은 정말 만날 수 있을까. 이미지의 부피와 표면, 길이와 지속. 그러나 콧폴라는 그렇게 멀리 가는 대신 몇몇 시퀀스에서 꿈을 바라보며 멈추었다. 스필버그의 <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 >을 보았다. 무언가 스필버그는 이 새로운 효과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 쥬라기 공원 >의 3D 트랜스퍼 버전을 보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3D 효과에 심취한 팀 버튼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와 흑백 3D < 프랑켄위니 >. 하지만 나는 팀 버튼이 여기서 정확하게 무얼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다. 리안의 < 라이프 오브 파이 >를 보았다. 아, 리안. 영리한 리안. 매번 시퀀스마다 새롭게 다시 정의되는 3D의 (프레임 속의) 이미지들. 그는 극장을 마치 갤러리처럼 활용하였다. 연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큐레이팅이라고 부르고 싶은 배치들. 나는 의자에 앉아있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배회를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떠도는 배에 실려 함께 부유하는 스크린의 프레임들. 리안은 거의 영화를 멈추기 직전까지 끌고 간 다음 관(람)객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순간 재빨리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걸 영화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수상쩍게 쳐다보고 있다. 서극의 < 용문비갑 >을 보았다. 이미지 속의 (이미지 속의 (이미지 속의)) 유희들. 과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동들. 과도할 정도로 배치된 특수한 순간들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선. 비검(飛劍)의 선. 능공허보(凌空虛步)의 선. 마치 공장에 들어온 것 같은 톱니바퀴들의 향연. 하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D 영화들이 만들어지면 (그 원래의 의도에 따라) 2D로 볼 수 있는 기회가 함께 제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D로 ‘하여튼’ 본다. 물론 그건 그 영화에 대한 전적인 내 예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즐기기 위해서 극장에 간다. 물론이다. 거기서 무엇을 즐길 것인가. 흥미로운 것들. 영화 안에 있는 영화적인 것들. 우리는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질문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투명하지 않았다. 3D 효과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덧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당신은 영화의 이야기 진행에서 사실상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렇다고 맞받아치고 싶을 것이다. 물론 미메시스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 영화에는 이상하게도 미메시스로부터 독립적인 그 무엇이 거기에 머물기 시작한다. 거기서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미지들의 수수께끼. 바로크적인 재현들.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종종 재현의 디테일과 만날 때 새로운 경로들과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이 때로 영화의 매너리즘을 재촉할 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논의를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3D 영화를 볼 때 이 효과가 영화의 일부라기보다는 이상하게 3D 라는 효과가 영화에 침입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에는 단지 이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영화 안에 강제적으로 이 효과를 삽입하면서 벌어지는 기계적인 외설적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차례차례로 만나게 된 3D 영화들. 새로운 효과들, 기발한 상황들. 낯선 미장센. 그 안에서 물건들의 이상한 이동. 때로는 동선. 기괴한 카메라의 위치. 이 질문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D 효과는 영화에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효과는 이차원의 착시를 이용한 이제까지의 영화 문법에 대해서 외설적일 뿐만 아니라 난폭한 부름에 우리를 지속적으로 깨어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종종 장르적인 외피 때문에 3D 효과가 환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효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단지 이것은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을 방해하는 외부적인 공간 감각의 재현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이미지가 우리들에게 감각의 방어선을 찢고 외상적 실재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3D 영화를 볼 때 보는 자세를 조금만 흐트러트리면 곧장 쓰고 있는 안경과 스크린의 이미지 사이의 시차적 초점이 맞지 않아 화면이 이중으로 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3D 영화를 볼 때 (감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당신은 꼼짝도 하면 안 된다. 고정된 시선만이 당신의 감각을 입체적인 화면 안에 집어던져 넣을 것이다. 그때 당신이 견뎌야하는 자세와 맞바꾸는 것은 < 아바타 >의 제이크 설리처럼 마음껏 화면을 뛰어다닐 수 있는 환상적인 착시의 자유가 아니라 반대로 화면 사이에서 부딪칠지도 모르는 미장센들 사이의 모서리와 추락할 지도 모르는 가장자리들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시뮬레이션의 감각들이다. 점점 더 영화와 나 사이의 동일화는 단지 상상적 자아에 호소하기보다 실재적 감각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싶다. 작품과 나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때 우리는 작품으로부터 심미적인 감흥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이 고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낙천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영화와 당신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 하려고 동분서주하였다. 내가 망연자실해진 것은 올해 여름이다. 지금 무심코 지나가고 있지만 2013년은 어떤 표지판을 갖게 될 것이다. 미학적 논쟁은 프랑스 남쪽 니스 근처의 해안가 칸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LA의 영화제작자들은 그런데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거의 눈부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3D 영화들. 무엇보다도 두 편의 영화. JJ 에이브럼스의 < 스타 트렉 다크니스 >와 길레르모 델 토로의 < 퍼시픽 림 >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 그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켰다. 이전까지 그저 공간의 깊이와 대상의 근접이라는 문제에 머물렀던 영화들에서 이 영화들은 쇼트의 기형화와 리듬의 왜곡이라는 새로운 영역 안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이 영화들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클리셰들이 머물고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엔 < 맨 오브 스틸 >처럼 끔찍하리만큼 유치한 영화도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두 편의 실패작을 말할 차례이다. < 7광구 >와 (한국영화 사상 첫 번째 풀 3D라는) < 미스터 고 >는 영화로서 뿐만 아니라 3D 효과라는 면에서도 재난에 가깝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망설여진다. 영화와 영화의 효과. 그 둘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물론 그들은 기술적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하이테크한 기술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효과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왜 그들은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한 것일까. 누군가는 마케팅 전략에 책임을 떠넘길 것이다. 물론 그럴 지도 모른다. 지난 봄부터 바보 같은 영화들이 차례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므로 <미스터 고>는 실패할 이유가 없을 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나는 박스오피스에 관심이 없다. 내가 말하는 실패는 그 효과가 왜 대중들의 구경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냐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왜 그 효과들이 영화 화면의 좌표 안에서 선별된 변수들 바깥으로 빠져나와 종종 물리적이거나 단지 역학적인 기능 이외에 달리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영화는 프레임의 집합 안에 머물지 않으면 곧장 영화 자체를 부수기 시작한다. 제임스 캐머론은 < 아바타 >에서 (종종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시각적 영역을 서사의 범주 안에 종속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지닌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서 일종의 방어선 같은 것이 되었다. 물론 종종 바보 같은 영화들이 그걸 뛰어넘어서 화면 바깥 어딘가에서 어른거리고 싶어 했다. 혹은 손에 잡힐듯 한 그 무언가를 신기루처럼 허공에 멈춰 세웠다. 허공에 떠 있는 건 자막만으로 충분하다. 3D 영화들은 프레임으로부터 이미지의 일부를 바깥으로 내 보내는 대신 어디서 멈춰 세워야 할지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영화에서 새로운 영토이자 구역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new Zone’이라고 다시 정의하였다. 새로운 개념의 발명. 이때 핵심은 3D 영화는 스스로에게 어떤 한계를 설정할 것인가, 라는 그 경계의 설정이 미학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악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내가 던진 돌이 거기서 멈출 것입니다, 라는 태도. 혹은 당신을 향해서 던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는 결정. 처음 3D 영화가 나왔을 때 모두들 결국 이 테크놀로지는 스포츠 중계와 포르노로 귀결될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적어도 아직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당신은 3D 모니터가 대중화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경고가 담겨있다. 모두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두 장르가 둘 다 3D 영화를 이끌지 않은 것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방어선처럼 놓여 있는 둘 사이의 간극을 넘어서는 순간 대중들의 상상은 중단되고 신기루와 같은 효과를 채우는 그 기능이 마비되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D 효과도 사실상 시각적 착시 효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만일 이 착시를 보충하는 상상을 포기하게 되면 반대로 감각은 그것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영화에서 결국 터치(touch)라는 문제가 불려나오게 되었다. 이제 3D 영화는 바로 그 거리를 어떻게 미학적으로 다시 결정하느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Etant donnes : 1. la chute d’eau, 2. le gaz d’eclairage Two Home Homes [Top: ‘Two Home Homes’ - split-level entrances, 1966; Bottom: ‘Two Home Homes’ ground-level entrances, 1966] 단지 질문만을 붙들고 늘어진다면 우리들의 논의는 왠지 영화와 미술 사이의 친밀성에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이제 제법 많은 목록을 갖게 되었다. 만일 3D IMAX를 떠받치고 있는 자본의 토대를 무시하고 그저 순진하게 말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나는 이 테크놀로지가 오히려 인스톨레이션에서 훨씬 더 창조적인 역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 예. 마르셀 뒤샹이 20년 동안 남몰래 제작해 온 <주어진; 1 폭포, 2 점등된 가스등>에서 마치 핍 쇼 공간처럼 옮겨놓은 광경은 우리들에게 뚫린 구멍 너머의 (시각의) 원뿔을 제시하고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와도 같은 자리에 불려간 관객. 문 너머의 스펙터클. 그 안에서 뒤샹은 르네상스 원근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구멍 너머에 있는 광경 안의 대상을 우리에게 던져놓은 다음 다시 한 번 시선이라는 원근법의 기하학을 미술관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이때 나의 관심은 새롭게 정의 내려진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개념이다. 차라리 우리는 이 작품을 3D 로 보는 편이 더 뒤샹의 시선 안에 손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두 번째 예. 1966년 댄 그레이엄의 사진 작업 중 <미국을 위한 집; 스콜릿 레벨과 그라운드 레벨, 두 개의 집이 있는 집>을 보고 있으면 이 두 장의 사진은 (뉴저지에서 레디 메이드한 미니멀리즘의 코드를 드러내려는 의도와 상관없이) 얼핏 유사해 보이는 둘 사이에서 서로 겹쳐지지 않는 차이를 통해 단지 건축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상호간의 매우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지표 사이의 상호작용을 읽어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여기서 두 개의 사진을 3D 화면으로 올려놓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든 것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세 번째 예. 빌 비올라의 비디오 프로젝션은 영화를 빌려온 다음 고스란히 영화에 수 없이 많은 영감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1996년 작품인 <교차>. (나는 의도적으로 백남준의 예를 들지 않았다) 비올라의 작품에 대해서는 수많은 다른 이론을 전개할 수도 있다. 명백히 마샬 맥루한의 이론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다음 비올라는 빛과 프로젝션 사이에서 보는 자리를 다시 배치하였다. 물론 비올라는 자신의 작업이 매체에 지나치게 다가가는 것을 경계했다. 여기서 미술 비평가들이 끌어낸 개념은 외상적 숭고란 칸트적 개념이었다. 숭고.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이미 라캉이 물 자체라고 정의 내렸던 그 경험 안으로 지각이 방문할 때 3D 스크린은 우리를 환상과 실재 사이에서 게임을 제안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Bill Viola - the Crossing 너무 멀리 온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 몽녀 >를 바라볼 생각이다. 3D 효과의 가능성이라는 질문. 아직 질문이 잠재적인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었을 때 임권택 의 선택. 산업 안에서의 선택. 장르 속에서의 선택. 판스코프 촬영으로 찍은 첫 번째 입체영화 < 천하장사 임꺽정 >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두 영화 사이에서 입체 기술의 효과가 보여주는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혹은 거기서 얼마나 더 나아갔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걸 보지 못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임권택도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입체영화는 특수(라고 해야 장난감 안경 수준에 양쪽에 서로 다른 레드와 블루 셀룰로이드를 프레임에 붙인) 안경을 착용해야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만일 개봉당시에 보지 못했다면 관람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3D 영화에 대한 별다른 경험을 갖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3D 영화의 전문가들은 3D 효과는 기술적인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험에 대한 데이터의 문제라고 조언한다. 아마도 임권택이 <몽녀>를 만들었을 때 장석준 의 조언은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때 장석준은 임권택에게 영화에서 이미지의 입체라는 효과에 대해서 무슨 조언을 했을까. 내 질문은 단순하다. 그 말에 따라 임권택이 가정한 효과의 연출이라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 가짜 박인호 인숙 (이하의 글은 스포일러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지금 리뷰를 쓰는 것이 아니다) < 몽녀 >는 광고 문구에서 자기 장르를 ‘推理 怪奇 映畵’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다소 장황한 줄거리. 자수성가한 재계의 거물 정 사장은 카바레 라스베가스의 사장이자 밀파간첩인 리나에게 가짜 유언을 녹음하도록 협박을 당한 후 살해당한다. 목소리만 남은 아버지. 그런데 그 목소리에 담긴 가짜 증언.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장례식 날 정 사장이 평소에 아끼던 박민호가 일본에서 급히 귀국하지만 중간에 속임수에 빠져 호텔로 유인당한 후 가짜 박민호에게 역시 살해당한다. 가짜 상속자. 결혼을 위임받은 가짜 사위. 하지만 이 두 개의 씬은 연달아 붙어있고, 어떤 인과관계로 엮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무언가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영화를 본 다음 가장 이상한 것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 말고 정 사장은 더 이상 영화에 어떤 존재로서 뿐만 아니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이 영화가 추리일 뿐만 아니라 괴기영화라는 것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아버지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름으로서도(name-of-the father) 사라졌을 때 유령의 존재는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몽녀>는 <햄릿>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을 때 억압은 어디서 귀환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유령은 어디서 출현해야 하는 것일까. 실망스럽겠지만 이 영화는 초자연적 현상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때 3D(와 입체음향) 효과는 어디에 개입할 수 있을까. 그 효과들은 영화 안에서 어떻게 시청각적 기호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임권택 과 장석준 은 귀신을 버린 대신 무엇을 얻은 것일까, 혹은 얻으려는 것일까. 악당들의 목표이자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는 정 사장의 금괴. 가짜 박민호는 장례식에 참석한 후 가짜 유언에 따라 사업을 물려받고 정 사장의 딸 인숙과 결혼을 준비한다. 가짜 박민호는 인숙의 호의를 사면서 집에 입주하마자마 한편으로 매일 밤 (정 사장이) 금괴를 숨겨놓은 지하실을 뒤진다. 아, 지하실. 언제나 지하실. < 사이코 > 이후에 언제나 비밀은 그곳에 있다.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경계선으로서의 계단. 이때 이 거대한 저택에서 지하실은 이상하게도 마치 오랫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장소처럼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 차 있고 종종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이 상황은 장르적인 약속이다. 박찬욱의 < 스토커 >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넓은 일층. 그 자체로 완전하리만큼 충족된 장소.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지나치게 좁고 작은 인디아 스토커의 방에 도착한다. 상자들로 가득 찬 그녀만의 세계. 그리고 마치 다른 집에 온 것만 같은 온통 먼지에 가득 찬 채 전깃불도 제한적으로 들어오는 이상한 지하실. 영화에서 지하실이라는 공간의 역사. 가짜 박민호는 지하실에 금괴를 숨겨놓았다고 확신하고 매일 밤 지하실로 내려간다. 물론 우리도 같이 내려가야 한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현재의 (탈색현상으로 이미지의 정보 손실이 크고, 사운드 코팅이 벗겨져 심지어 대사조차 불분명하며, 일부 쇼트가 사라졌고, 권수가 뒤바뀐) 프린트 판본으로는 지하실의 미장센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지하실에 내려갔을 때 가짜 박민호가 마주치는 장르의 두 가지 컨벤션은 말해야겠다. 하나는 고양이이고, 다른 한 명은 이 저택의 식모이다. 아마도 도둑고양이. 인숙은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그 집 주인이 기르지 않는 동물을 누가 그 저택에서 기를 수 있을까. 마치 금괴를 지키기 위해 지하실에 머무는 듯한 고양이. 거의 말이 없는 여주댁. 그녀는 밤늦은 시간 불도 켜지지 않는 지하실에 왜 내려온 것일까. 가짜 박민호는 이 집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야만 했다. 지금 이 게임은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다. 겉보기에는 가짜 박민호와 리나가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들은 금괴라는 유혹에 이끌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볼 수 없는’ 이상한 집에 끌려 들어온 것이다. 잉여지식으로서의 지하실. 그때 우리는 원근법을 잃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원근법. 새롭게 세워져야 할 타블로. 임권택 (과 장석준 )이 3D 효과를 전시하기 위해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지하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때 임권택(과 장석준)은 지하실 세트를 설계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지하실이 과도하리만큼 직선으로 이어진 수직선의 공간이며 이 선을 따라 카메라는 트랙 위에 올려져서 안정적으로 후진하거나 전진한다. 이동이라는 깊이. 인물은 그 선을 따라 동선을 연결하고, 카메라의 렌즈는 인물과 소실점 사이에서 이동할 것이다. 이 직선을 따라서 여러 개의 방이 양쪽 좌우로 늘어서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지하실은 불가능하다. 이때 이 설계가 소실점을 가정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점과 선으로 이어진 공간. 이 공간을 찢고 등장하는 고양이의 무규칙한 동선과 지하실로 내려오는 계단이 놓인 문이 몇 개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여주댁의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의 출몰. 누가 누구를 홀리는 중일까. 임권택의 쇼트는 여기서 이상하리만큼 길어지고 있다. 아니, 감각적으로 늘어지고 있다. 나는 이 늘어짐, 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마치 카메라의 이동이 요청하는 것에 대한 응답이라도 하듯이 늘어지고 있는 중이다. \ 성우와 인숙 물론 이야기가 계속 지하실에서 진행될 수는 없다. 가짜 박민호가 지하실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밤사이에 잠깐 뿐이다. 인숙은 자꾸만 지하실로 내려가는 가짜 박민호을 의심한다. 물론 이 의심의 외설적 판본은 명백하다. 왜 당신은 이렇게 예쁜 나를 내버려두고 밤마다 지하실에 내려가는 것인가요? < 몽녀 >에서 임무와 욕망 사이의 교차는 이상하게 서로 뒤엉키고 있다. 가짜 박민호는 리나가 인숙을 없애버리자고 제안할 때 망설이면서 두 번이나 전혀 예상치 않은 답변을 한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지, 불쌍하더군, 그 애만은...” 임권택 은 이 감정을 더 발전시키지 않지만 그 감정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인숙은 처음부터 가짜 박민호에게 호의를 갖지 않았으며, 계속 의심하고, 그런 다음 집에 들어오자 아버지의 비서였던 성우의 품에 안기면서 “무서워요, 절 좀 지켜주세요, 그 사람을 집안에 끌어들인 것도 실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기 위해서였어요. 성우씨”라고 간절하게 고백한다. 이때 이상할 정도로 3D 효과는 완전히 작동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임권택(과 장석준 )은 3D 효과가 감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물론 이건 지금도 3D 영화들의 고민이다. 이야기의 진행 때문에 할 수 없이 3D 효과를 멈춰야하는 순간과 마주칠 때 3D 영화들은 단지 이미지뿐만 아니라 리듬 자체의 변주를 경험하게 된다. 베르너 헤어조크와 빔 벤더스는 소재의 힘을 빌려 이 순간을 피하고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영화를 불균형하게 만들었다. < 위대한 갯츠비 >는 그런 의미에서 거의 효과의 재난에 가깝다. < 몽녀 >가 기괴해지는 것은 그 다음부터이다.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상한 법칙들의 적용. 한쪽이 기울기 시작한 진행. 균형을 잃을 때 보게 되뇩오鵑贊?위치의 시선. 낯선 반응. 영화는 환상에 이끌리는 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정신을 잃는다. 그 다음의 진행. 인숙이 의심을 품자 가짜 박민호와 리나는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면서 한편으로 정신병을 유발하는 약을 먹여 최면 상태에 빠져서 금괴를 숨겨놓은 곳을 자백하도록 유도한다. 그때 리나는 정 사장의 목소리를 가짜랜옇링榕底?인숙에게 전화한다. 전화로 정 사장은 인숙에게 “나다, 아버지야, 애비 소릴 몰라, 감춰둔 금괴 말이다, 나쁜 놈들이 그걸 노리구 있어, 그걸 빼앗기면 안 된다, 아무래도 그 장소는 마음에 걸리거든, 장소를 옮겨서 다른 곳에 숨겨두라구, 알았지” 라고 말한다.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뒤집힌 햄릿의 버전. 죽은 아버지가 돌아와서 인숙에게 말해준다. 나쁜 놈들이 금괴를 노리고 있으며, 그들이 네 곁에 있다는 사실. 가짜 박민호와 리나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상 아버지의 진짜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중이다. 인숙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인숙을 속이기 위해서 사용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경유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알려주고 더 나아가 목표마저 고백하고 있는 중이다. 죽음에 머물지 않고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 딸이 염려되어서 돌아온 아버지. 그때 음모를 진행하던 리나는 이상한 대사를 한다. “프로이드 정신분석이 없었다면 이런 약을 만들 생각조차 못했을 거야” 나는 거기서 멈춰 섰다. 물론 나도 안다. 이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진지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인숙에게 사용된 것은 일종의 최면술이다. 프로이드는 장 마르탱 샤르코의 최면술에서 영감을 받긴 했지만 곧 버리고 자유연상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가짜 박민호는 이때 인숙에게 착각을 심어주기 위해서 정 사장이 살아생전 아끼던 꽃병이 놓인 책상 다리를 미리 자른 다음 인숙이 지나가자마자 쓰러져 깨지게 만들고 인삼차를 타려는 그녀보다 앞서 부엌에 들어가서 설탕과 소금을 바꿔친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는 인삼차에 소금을 탄 다음 자기의 실수를 발견하자 흐느끼면서 “이러다 미친 여자가 되고 말 거예요, 광인이 돼버릴 거란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마치 리나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인숙은 자신의 증세를 스스로 진단을 내린 다음 그 증세 안으로 자기를 밀어 넣기 시작한다. 텔레파시와도 같은 조응. 여기서 이상하게도 나는 임권택 이 영화에서 3D 효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건 단지 눈속임이 아니다. 이미지의 새로운 유형.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임권택은 그걸 영화의 정신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이미지의 알리바이. 하지만 임권택은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입체영화, 혹은 3D 영화를 찍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가정을 더 밀고 나갈 수 없다. \ 만일 < 몽녀 >가 복원된다면 나는 오로지 그 다음 장면, 그러니까 인숙이 대낮에 마치 홀린 듯이 길거리로 나간 다음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걸어가는 시퀀스 때문에 (불편한 입체 안경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다.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시적으로 찍혔다. 한산한 초여름의 서울 시내. 넋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인숙. 초점 없는 산책. 육교 위를 수평으로 걸어갈 때 다소 기울어진 수직으로 보이는 차선. 수평의 동선과 수직의 운동. 인숙이 걸어가는 방향과 반대방향에서 다가와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동선들. 서로 다른 속도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공존할 때 만들어지는 화음. 그녀가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뒤쫓아 오던 리나가 그녀 곁에 차를 대고 “아니, 인숙씨 아니세요, 타세요, 어디까지 가시는지 모셔다 드릴께요” 라고 호의를 베푼다. 서울 외곽으로 이어지는 풍경들. 1968년 서울의 3D 풍경. 리나는 인숙에게 친절한 척 가장하며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신경쇠약이라고 들었는데 하루 속히 고쳐야죠, 잘못하면 정신이상이 될 수도 있어요, 무서운 병이죠” 인숙은 그저 앞만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고치지 않겠어요. 고칠 수가 없어요” 리나는 인숙을 끌고 부평 기찻길까지 데려간 다음 인숙에게 말한다. “기적소리를 들으면 이상한 충동을 느끼곤 하죠. 가령 기차를 향해 뛰어들고 싶다든가” 그러자 인숙이 터널을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그렇군요,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함께 기찻길을 따라서 걸어가던 리니는 갑자기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기차에 인숙을 밀어 넣는다. 인숙의 죽음. 이때 인숙은 두 번 몽녀가 된다. 한번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할 수 없는 아버지의 유령에 시달리면서 빠져들 때이고 (꿈꾸는 여자), 두 번째는 그녀 자신이 죽은 다음 가짜 박민호 앞에 잠옷을 입고 나타날 때이다. (꿈으로서의 여자) 인숙이 죽은 다음 유령이 되어 다시 찾아올 때 그녀를 보는 것은 그녀를 살해한 리나가 아니라 그녀를 “죽일 필요까진 없다”고 설득하던 가짜 박민호이다. 심지어 고양이가 달려들 때 가짜 박민호는 해골을 본다. 만일 < 몽녀 >에서 의학적으로 정신이상에 빠진 인물이 있다면 그건 가짜 박민호이다. 이 이상한 증후의 인과관계. 물론 죽은 (흉내를 내고 있는) 인숙은 리나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리나 송, 내 목을, 내 목을, 리나 송, 내 목을”이라고 반복해서 읊조린다. 두려움에 질린 리나는 가짜 박민호에게 말한다. “우린 신경쇠약에 걸렸나 봐” 리나는 인숙에게 뒤집어씌우려던 증세가 자신들을 덮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자 가짜 박민호는 이상하게 대답한다. “일 년 육 개월의 남반부 생활이 그렇게 만든 거야” 가짜 박민호는 신경쇠약이라는 진단을 재빨리 인정한 다음 그 원인을 남반부 생활에 돌린다. 나는 약간 웃음을 참아가며 이 대사를 따져들고 싶다. 그들의 신경쇠약은 자신들이 살해한 정 사장이나 혹은 그의 딸 인숙때문이 아니다. 또는 제한된 일정 안에 찾아서 북에서 온 공작원에게 넘겨야 했던 금괴 때문이 아니다. 같은 말이지만 그들의 임무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의 신분을 숨겨야하는 긴장에서 온 것도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까지 그들의 정체를 간첩과 연결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대공수사본부의 감시와 평행 편집될 뿐이다) 그들은 북한에서는 (적어도 신경질환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들을 억압하는 건 ‘남반부의 생활’이다. 휴전선 이남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들 신경증 환자이다. 그러므로 환자들의 일상 안에서 사는 건 가짜 박민호와 리나에게는 그들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령을 마주하게 할 만큼 고통스러운 삶이다. 아, 가련한 남반부의 삶이여. 물론 그 다음은 예정된 수순을 따라간다. 리나를 인숙의 유령으로 착각한 가짜 박민호는 그녀를 살해한 다음 혼자 빠져나와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과 접선한다. 하지만 이미 대공수사본부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고 가짜 박민호는 급히 차를 몰고 달아나다 그만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죽는다. 간단한 에필로그. 인숙과 성우는 정보계장을 만난다. 두 사람에게 정보계장이 그들의 공고를 치하하자 성우는 “모든 것이 인숙씨의 기지로 성공 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정보계장은 인숙에게 “아닌 게 아니라 어제 밤 유령노릇 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라고 덧붙인다. 인숙은 “반납하겠어요, 이십세기 유령”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보계장에게 청첩장을 주고 함께 떠난다. 끝. 임권택 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은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교훈? 물론 임권택이 영화에서 새로운 기술적 환경에 대해 적대적이 된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5년 뒤에 < 증언 >에서는 한강 철교 폭파를 일본 스텝진의 도움으로 미니어처 촬영을 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특수촬영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 춘향뎐 >과 < 취화선 >에서 사용된 CG 효과. 끝내 미루기는 했지만 101번째 영화 < 달빛 길어 올리기 >를 디지털로 촬영했다. 영화에서 테크놀로지는 까다로운 문제이다. 새로운 기술들은 가까스로 만들어진 미학적 규칙 안에서 어떤 훼손들 사이의 긴장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종종 진화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때로 미학적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임권택은 여기서 3D 효과라는 것이 영화 안의 형식적 용법들을 거의 중단시킬 뿐만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인물들이 효과의 감옥에 갇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나는 현장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 몽녀 >를 보고 있으면 어떤 순간에는 필요 이상으로 효과 앞에서 연출의 방법이 평면화되거나 때로 제한적으로 멈추는 것을 보게 된다. 영화에서 지나치게 테크놀로지가 압도하게 될 때 이상하게도 이미지에서 아방가르드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나는 이미 장 엡스탱의 포토제니를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이미지의 영혼을 거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이미지라는 반대 방향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때 이미지는 테크놀로지로 영혼을 물화시키고 더 나아가 종종 우스꽝스러운 형식의 기형으로 말미암아 영화의 감각 전체가 마비되기 시작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임권택은 거기서 잠재적인 가능성 대신 위기를 본 것 같다. 혹은 무언가를 판단하기에 1968년은 너무 이른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몽녀>는 자문자답하고 있다. 영화에서 새로운 기술적 진화는 무엇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가. 임권택의 대답. (어떤 영화적) 효과가 멈추었을 때 (이미지의 어떤) 효과가 시작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영화를 기능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차라리 이런 표현을 쓰고 싶다. 영화는 이미지의 도구가 된다. 그때 영화의 윤곽이 부서질 지 새로운 구성이 시작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새로운 문턱을 넘어섰고 대부분의 영화들은 절망적으로 부서져버렸다. 그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영화에서 3D 효과에 대한 질문이 올바른지에 대해서 의심한다. 과도할 정도로 많은 질문들이 3D 효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던져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3D 효과가 무엇을 하는 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몽녀>는 거기서 멈추었다. 좀 더 공평하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몽녀>에서 더 나아간 것은 촬영감독이었던 장석준 이 직접 연출하고 김상희 가 촬영한 < 지지하루의 태양 >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현재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몽녀>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다시 3D 영화가 진행 중인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할 필요를 느낀다. 아마도 알폰소 쿠아론의 < 그래비티 > 이후의 3D 영화들은 이제까지의 많은 논의들에 대해서 다시 수정을 요구할 것이다. 게다가 <아바타 2>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현재진행중인 질문을 그냥 여기서 잠시 멈춘 다음 그대로 남겨 놓을 것이다. 그 대신 예상치 않은 소식을 들었다. 고다르가 첫 번째 3D 영화 <아듀, 언어에게 작별인사>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 보지 못한 이 영화에 대해서 나는 예고편 으로 대신할 생각이다. 이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계속 질문할 것이다. (계속) 1968년 85분 컬러 3D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제일영화사 각본 신봉승 촬영 장석준 , 유영길 조명 김진도 편집 김희수 음악 전정근 사운드(입체 특수음향) 이재웅 남정임 인숙 박노식 (가짜)박민호 김지미 리나 이순재 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