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트
- 감독
- Rudy Durand
- 제작년도
- 1979
- 출연
- 브룩 쉴즈, Ken Marshall, 찰스 더닝, John Crawford, Karen Lamm
(두 번째 이야기) 두 번째 상황. < 일대종사 >는 < 장군의 아들 >과 정확하게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쪽이 상승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내내 하강한다. <일대종사>는 모두가 추락하는 이야기이다. 그들 모두가 처음 시작했을 때 절정에 올라있었다.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엽문은 간단하게 말한다.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사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문파가 잘 났는지, 그런 건 떠들 거 없지, 쿵후, 그건 둘 중 하나지, 수평과 수직, 지면 눕고, 세로로 남는 자, 말할 자격이 있는 법이지, 내 말이 맞지 않나?” 모두가 수직으로 서 있었다. 그런 다음 한 명씩 가로눕는다. 물론 왕가위는 단순하게 엽문의 대결로 이어가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다른 데 있다. <일대종사>는 어떤 의미에서 < 멀홀랜드 드라이브 >, 혹은 < 열대병 >처럼 둘로 잘린 영화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중간에 중단되고 (1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뛴 다음) 그 자리에 머물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플래시백의 형식으로) 돌아본다. 물론 이 시간은 지나가 버렸고 이미 펼쳐져 버린 시간은 다시 그걸 되감싸 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수직으로 진행된 시간. 수평으로 멈춰 선 시간. 이 시간을 감히 누가 이길 수 있을까. 두 개의 힘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걸 익혔을 때 이미 때는 늦었다. 자기가 속해있던 고유한 세계의 법칙이 바뀌었고, 그 안에서 그래도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간다. 다시 한 번 하는 말. 궁가 64수 노원괘인의 필살기,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영화에서 돌아본다는 말. 플래시백. <일대종사>의 필살기. 회상. 그걸 배운 자는 궁이 뿐이다. 그래서 엽문과 궁이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대결은 궁이의 플래시백으로 펼쳐진다. 엽문과 궁이의 아버지 궁보산이 생각으로 대결했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이걸 엽문은 이번에는 그저 지리멸렬하게 받아칠 수 있을 뿐이다. 엽문은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 필살기의 뼈아픈 결점을 깨닫는다. 그는 회한에 차서 말한다. “궁이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만 졌다” 이 필살기의 결정적 약점은 누구에게도 이길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의 패배라는 점이다. 나는 두 개의 장면, 궁이와 엽문의 금루에서의 대결과, 궁이와 엽문의 플래시백의 대결 안에서의 궁이와 마삼의 대결을 뒤에 다시 다룰 것이다. 사망유희 死亡遊戱 나는 재빨리 금루(金樓)로 되돌아오고 싶다. 왕가위는 여기서 (아마도) 이소룡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 사망유희 >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우리는 금루가 얼마나 높은 건물인지, 이 건물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 한 쇼트도 금루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금루라는 건물 자체가 정말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이 장면 전체가 일종의 실내극이다. 이소룡은 <사망유희>에서 오직 단 하나의 시퀀스를 찍기 위해서 이 영화에 매달렸다. 그건 물론 사망의 탑에 오르는 이소룡과 그와 겨루기 위해서 매 층마다 기다리고 있는 무술의 달인들과의 대결이다. 이소룡의 때 이른 죽음은 <사망유희>를 미처 완성시키지 못했다. 왕가위는 이소룡의 스승 엽문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아마도 조건반사처럼 이 에피소드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내게 금루의 시퀀스 전체가 거꾸로 세운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스승이 제자에게 보내는 위로. 이소룡의 영화를 본 세대가 보내는 답례. 엽문은 남방 무술계를 대표하여 인사를 드리기 위해 금루에 있는 북방 무술계의 대가인 궁보산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래층부터 차례로 올라와야 한다. 그리고 층마다 엽문을 맞이할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 시퀀스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라는 아쉬움을 안고 있다. 여기서는 왕가위와 보여준 대로 나도 순서대로 쫓아 올라갈 생각이다. 시녀들 여기서 장면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준 사람은 벨라스케스를 읽은 푸코이다. 그는 <말과 사물>의 첫 장의 시작 첫 문장에서 화가는 자기의 캔버스로부터 조금 물러 서 있다, 라고 쓴 다음 바로 가까이 다가선다. 물론 푸코가 목표로 한 것은 단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읽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상호가시성이라는 방법을 배웠다. 내게 약간의 인용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푸코는...) 상호가시성이라는 이 가느다란 선은 불확실한 것과 교환과 전위 같은 것들로 구성된 복잡한 조직을 전체적으로 포괄한다. 화가는 우리가 우연히 그의 주제와 동일한 장소를 차지할 때에만 그저 그의 눈을 우리에게 돌릴 수 있다. 감상자인 우리는 하나의 부가적인 요소이다. (잠시 동안 이 그림을 보아주기 바란다.) 설령 우리가 화가의 시선과 마주쳤다 해도 그 시선은 우리를 그냥 지나쳐 가버릴 수도 있으며 우리에 앞서 거기에 항상 존재했던 것, 즉 모델 그 자체가 우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 그림 밖에서 그에게 직면해 있는 허공으로 향한 화가의 시선은 감상자들이 존재하는 만큼 많은 수의 모델을 용인하고 있다. 바로 이 중립적인 장소에서 응시자와 피 응시자는 끊임없는 교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푸코는 지나쳐가듯이 맞은편의 광경이라는 말을 꺼내 든다. 장 삐에르 우다르는 여기서 봉합(Suture)이라는 개념을 (라캉의 수사를 빌려) 발전시켰다. 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싶다. 이때 핵심은 시선이 아니라 광경의 내밀성이다. 우리는 개념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종종 의도를 지나쳐서 우리 자신이 느끼는 기쁨의 내밀성 안으로 다가간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거리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선 다음 무엇이 나를 멈춰 세웠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나는 맞은편의 광경을 보여주는 것 안에 있는 본 것의 발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발견이라고 쓰는 대신 의도적으로 발명이라고 썼다. 물론 이것은 매우 불안정한 설명이다. 나는 여기서 거기 있는 것 이상으로 그 무언가를 덧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의 방점, 장면의 디테일에 이끌릴 것이다. 궁보산 궁이 면의 배경. 이 장면에는 두 개의 시선이 엽문을 바라보고 있다. 한 명은 궁보산이고, 다른 한 명은 궁이이다. 혹은 이 자리는 궁이에게 엽문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처럼 보인다. 비 오는 날 궁보산은 엽문이 그에게 도전을 해온 자와 그의 무리들을 수평으로 눕히는 것을 보았다. 이미 궁보산은 엽문이 자기를 눕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물러날 때가 온 것이다. 금루에 궁이를 데려온 궁보산이 말한다. “세상사 가운덴 안 보면 사라지는 것들이 있지. 봐둬도 나쁘진 않아. 어떤 이는 등불이 어떤 이는 그림자가 되지. 다 시류에 따르는 법. 널 남방에 불러 처음과 끝을 보여주고 싶었다. 잘 봐둬라, 아비가 어떻게 물러나는지” 이제부터 시작될 금루에서의 엽문의 대결 장면 전체가 궁이의 조심스러운 클로즈업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 궁보산의 말을 듣고 궁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다음 조심스럽게, 약간 망설이는 듯한 동작으로, 하지만 마치 이끌리듯이 살짝 고개를 돌리면서 실내 창문 바깥을 내다본다. S#_1 S#_2 S#_3 S#_4 S#_5 하지만 궁이가 시선을 돌린 것은 아버지의 말에 이끌려 돌린 것이지 엽문이 거기 있어서 그곳으로 시선이 향한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궁이가 시선을 돌리자 엽문이 도착한다. 마치 궁이의 시선이 엽문을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엽문이 거기에 온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 것일까. 영화 안에서 누가 누구 앞에 있는 것일까. 이 영화가 엽문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자꾸만 궁이가 다가오면 영화의 중심은 엽문에서 궁이에게로 옮겨가는 것만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 S#_1) 금루로 들어서는 엽문. 클로즈업. 이때 엽문을 본다기보다는 반사하는 엽문을 본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거울에 비쳐 보이거나, 혹은 유리에 굴곡을 일으키며 반사하는 엽문. 이때 이것이 궁이의 시선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말하자면 시선의 일방적인 통로. 엽문은 이 시선을 아직 알지 못한다. 금루에 들어설 때 엽문은 그를 반기지 않는 북방 무술계 인사들에 둘러싸인다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시선에 포위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엽문은 반사를 지나쳐서 금루 안에 들어선다. 그런 다음 멈춰 서는 엽문의 클로즈업은 이상할 정도로 그 앞에서 본 궁보산과 대화하다가 문득 어딘가를 초점 잃은 듯이 보던 궁이의 마지막 쇼트에 대해서 마주 보는 것 같은(reverse_shot) 거리와 크기로 맞은 편의 광경을 채워 넣는다. < 일대종사 >는 여기서 빈 것을 저기서 채워 넣는 다소 이상한 방식의 보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교환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마치 쇼트 사이의 행동 프로그램이 작동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하지만 분명히 상호 가시성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걸 좀 더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것은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온 가여운 토끼를 반기기라도 하듯이 엽문을 반기면서 두 손을 모으며 “엽(葉)사부, 강호에는 인물이 많지, 오늘 두각을 나타내는 날이라 금루 사람들과 축하해주러 왔네”라고 인사하는 첫 번째 환대의 인사를 하는 쇼트에서 인물은 프레임 바깥에서, 같은 말이지만, 엽문의 시선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다. ( S#_2) 혹은 두 개의 쇼트는 비스듬히 마주한다. 환대가 없는 환대의 자리. 그때 누가 엽문을 환대하고 있는가. 엽문의 표정의 클로즈업. ( S#_3) “고맙습니다. 아저씨” 마치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맞은편의 인사. ( S#_4) “별말을, 어려워말고 들어가세” 그제 서야 엽문은 주변을 돌아본다. ( S#_5) 그때 이 시선은 올려다보지 않고 여전히 수평으로 돌아본다. 이 시퀀스는 차례로 엽문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상승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퀀스에서 왕가위는 단 한 번도 엽문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쇼트를 찍지 않았다. 종합적인 장면과 가시적인 쇼트 사이의 비대칭적 교환. 그는 다음 층으로 이동할 뿐이지 올라가지 않는다. 엽문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S#_6 S#_7 S#_8 S#_9 S#_10 S#_11 하지만 엽문의 시선은 덧없는 것이 된다. 그는 수평으로 돌아보았지만 다음 쇼트는 누군가 위에서 사선으로 계단을 걸어서 내려온다. 우리가 금루에 들어서서 처음 듣는 미메시스의 음악. ( S#_6) 수평의 시선. 사선의 동선. 위에서 아래로, 명백히 지금 막 금루에 들어선 맨 아래층의 엽문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발걸음.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치파오 의상을 입은 것으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계단 안쪽에서 찍었고 그녀는 카메라 앞을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이때 여자가 빠져나가자 아래층에 머물던 엽문은 등을 돌리고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돌아보면서 올려다본다. 거의 반사적인 신경. 자기에게 다가오는 공격적인 힘을 느끼는 제스처. 위에서 아래로, 그런 다음 아래서 위로, 동선과 시선의 교차. 이 선을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두 개의 선 사이를 마치 파고들듯이 다음 쇼트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온다. ( S#_7) 부채질을 하며 들어온 두 번째 환대의 인물. 치렁치렁 늘어진 구슬커튼 발. 나선형을 그리며 내려가고, 사선으로 아래서 위로 올려다본 다음, 수평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갈 때 금루라는 건물의 미로와도 같은 선이 거미줄처럼 이들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한다. 얼굴을 드러낸 남자는 거만하게 부채질을 하면서 말한다. ( S#_8) “우리도 기루 아가씨들을 대표해서 축하해주러 왔어요” 이 말에 엽문은 사내를 바라보는 대신 돌아보면서 올려다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엽문의 돌아보고 올려다보는(double_action) 제스처를 연속된 두 개의 쇼트로 나누었다. ( S#_9, S#_10) 물론 이건 쇼트의 낭비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리듬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여기서 시선의 분산을 느낀다. 왜 분산이 필요해진 것일까. 사방의 시선. 모두가 엽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모두를 찍는 대신 엽문의 시선을 보여주는 쪽이 반대로 경제적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쇼트의 부등가교환은 종종 간접적 장면의 구성이라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왕가위는 이 문제를 때로 우회적으로 해결한다. 이를테면 < 2046 >의 거의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시네마스코프 안의 장면들의 모델들 사이의 교환. 그렇다면 엽문은 무엇을 보기 위해서 올려다본 것일까. ( S#_11) 내려다보는 기루 아가씨들, 정확하게는 올려다보는 엽문. 아름다운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우아한 곡선. 하지만 이 시선은 엽문의 위치가 아니다. 여기서 카메라는 누구의 시선인지 다소 애매하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살짝 상승하기 때문이다. 엽문은 그 자리에 서 있고 카메라는 이동한다. 물론 그걸 시선을 올려다보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다. 엽문은 사내의 말에 대답하듯이 말한다. “기세가 대단한 걸” 하지만 이 대답은 화면 바깥에서 들린다. (voice_out_of_frame) S#_12 S#_13 S#_14 S#_15 이때 쇼트는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정체불명의 여자는 아직도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거의 무한정으로 이어진 계단. ( S#_12) 이 신발을 따라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 겉으로 보기에는 비단결처럼 보이는 이 신발은 마치 쇠로 만든 것처럼 무겁고 둔탁한 울림을 낸다. 그 계단을 따라 이어져 내려올 것 같은 그 신발이 두 걸음을 걸은 다음 갑자기 ( S#_13) 계단 위에서 뛰어내린다. 첫 번째 대결의 상대. 팔괘장의 달인 삼저. 이때 그녀의 낙하는 나선형으로 내려온다. 이 나선형의 동선을 기억할 것. 팔괘의 동작. 삼저의 액션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선형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왕가위는 액션의 인물들에게 선을 부여한 다음 그 선을 따라 다른 선과 다시 이어간다. 그 선이 신체를 이끌고 몸에 붙어있는 손과 발이 법칙에 따라 점에서 시작하여 활동을 시작하는 곡선과 직선으로 이어간다. 쇼트는 그걸 어떻게 이어 붙이고 떼어 낼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긴장. 이들은 서로 다른 법칙의 세계를 동일한 공간 안으로 끌고 들어온 다음 같은 규칙의 경기장에서 수평과 수직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때 계단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삼저를 계단 아래서 엽문의 시선으로 올려다 본 다음 ( S#_14)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며 하강하는 삼저를 바라본다. (double_action) 하강, 혹은 낙하. 엽문의 시선과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기루 아가씨들의 시선의 교차. 바닥에 착지하는 삼저의 발, 아니 신발. ( S#_15) 이 장면은 신발의 클로즈업이 아니라 신발이 내려앉는 소리의 클로즈업이다. 이미 우리는 계단에서 이 신발의 무거운 소리를 들었다. 엽문 앞에 뛰어내렸을 때 이 신발은 사뿐하게 내려앉는 대신 무언가 위협적인 소리를 낸다. 이 신발은 그녀의 무기일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녀의 경공술이 아니라 신발이 매우 무거운 것, 아니 차라리 쇠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벼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리가 아니다. 한 가지 더.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일종의 중력감이다. 중력을 본다는 문제. 비가시성의 가시성. 이 무거운 신발이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여덟팔(八)자 걸음으로 옮겨갈 때 그 보폭의 움직임이 그녀의 무술의 일부이며 이제 곧 활동하게 될 팔괘장의 기본 동작임을 알려준다. 신중하지만 자신 있는 걸음. 카메라는 그녀의 발길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뒤로 물러난다. 마치 이 모든 움직임은 발과 손, 팔과 몸의 안무에 종속된 것처럼 이끌린다. 때로 자석처럼 따라가고 있으며, 때로 마치 너무 빨라서 놓쳤다는 듯이 순식간에 손과 발, 팔과 몸이 빠져나가버리기도 한다. 왕가위의 표현을 빌리면 이 모든 것이 타이밍이다. S#_16 S#_17 S#_18 첫 번째 대결의 시작. 동선이 누구에서 시작하는가, 라는 문제. 삼저가 자세를 먼저 취하는 것을 ( S#_16) 정면으로 바라볼 때 부채를 든 사내가 말한다. 화면 바깥의 목소리. “삼저는 공연단 잡인 중 최고야” (voice_out_of_frame). 차라리 이 목소리는 해설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엽문은 지금 최고 중의 한 명과 마주해야 한다. 공격이 시작될 때는 한쪽이 다른 한쪽의 프레임의 공간 안으로 침입해야만 한다. 액션은 상대를 바라보는 장면(single_shot)과 두 사람이 대결하는 장면(two_shot)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교환 사이의 선택이다. 이때 누가 그 프레임의 주인인가. 누가 그 영역을 침범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점유할 것인가. 거기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 혹은 쫓겨나는가, 그런 다음 어떻게 다시 들어갈 것인가, 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프레임은 균질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 속에서 동선은 새로운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새로운 운동들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프레임 그 자체의 힘이 지속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액션은 시간 그 자체이자 힘의 형태이며 선의 운동이다. 우리는 이 형상을 언제나 지속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삼저의 제스처를 반복해서 보면서(double_action) 재빨리 정반대의 뒷모습을 보여줄 때 비로소 삼저와 엽문은 한 쇼트 안에(two_shot) 교집합을 이루게 된다. ( S#_17) 두 개의 다이어그램을 하나로 합쳐놓을 때 거기서 생겨나는 긴장. 그런데 엽문은 정반대로 그저 뒷짐을 지고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다시 한 번 남자의 목소리. “팔괘장을 좀 하지” 그때 목소리를 배경으로 하여 삼저의 신중하고 날렵하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엽문에게 다가가는 몸동작을 보는 우리는 “...좀 하지”라는 말이 엽문을 업신여기는 경고임을 알아차린다. 거기에 사내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형님이 한 수 알려줘” ( S#_18) 이때 사내는 왼쪽에 서서 오른쪽으로 엽문을 보고 있다. 이 장면은 앞선 장면( S#_8)의 연장이 아니라 그보다 하나 더 앞의 쇼트( S#_7)의 연장이다. 왜 이 장면은 정면으로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되면 거기서 리듬은 멈출 것이다. 멈춘다는 문제와 빠져나간다는 문제. 마치 시선의 운동은 굴곡을 만들듯이 거기서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정면으로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빠져나간다. S#_19 S#_20 S#_21 S#_22 비로소 삼저를 맞이하는 엽문. ( S#_ 19) 아래서 위로 수직으로 카메라가 살짝 올라갈 때 엽문은 45도로 서 있다. 대화의 구도. 무술의 언어. 대결의 대화. 말하자면 엽문은 이 남자를 보는 게 아니라 삼저를 보고 있는 중이다. 그때 예를 갖추는 것은 삼저만이 아니라 카메라도 함께 예를 다한다. 엽문과 같은 방법으로 카메라가 아래서 위로 올라가면 삼저는 주먹을 손바닥에 가지런히 모아 인사를 하면서 자세를 잡는다. “그럼” ( S#_20) 그러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엽문의 손의 클로즈업. ( S#_21) 그 손은 방어나 공격의 자세를 취한다기보다는 삼저의 말에 대해서 허락의 제스처를 보여준다. 당신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말하자면 대결의 예. 그런 다음 엽문의 얼굴, ( S#_22) 만면에 지은 미소. “그럼”. 사실 이건 중복 쇼트이다. < 일대종사 >에는 액션이 아니라 (그리고 물론 그럴 뿐만 아니라) 제스처의 중복 쇼트를 계속해서 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중복 쇼트가 하는 역할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중복은 방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시선을 붙들어 매 둔 다음 거기서 우리들의 시선의 경로를 동요시키려는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다. 그때 장면은 쇼트의 중복에 의해서 종종 치명적인 간극이 생길 수도 있다. 왜 다시 이것인가. 갑자기 시선은 분해당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혹은 진부하게도 강요받은 인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중복이 이미지를 영화적인 순간에로 이끈다는 사실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을 잠시 뒤로 돌려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허락의 제스처를 말의 허락과 떼어내서 그 사이에 간극을 만들어냈다. 왜 그럴 필요가 생겨난 것일까. 쇼트의 진행은 과정의 디테일이다. 이때 중복은 재현이나 서사의 과정이 아니라 지각의 과정이다. 이것은 하나의 행동을 둘로 나눈 것이 아니라 보고 다시 본 것이다. 그때 하나가 객관적인 쇼트라면 이어지는 쇼트는 객관적인 앞의 쇼트에 대한 주관적인 쇼트의 역할이라는 착시의 지각을 불러일으킨다. 왜 여기서 주관적인 쇼트가 필요해진 것일까. 엽문의 미소를 다시 바라보기 바란다. 왕가위는 이 대결에서 액션이 아니라 엽문의 인격을 찍기 원한다. 비가시적인 대상. 그가 취하는 예. 그가 대하는 태도. 다가갈 때와 물러서야 하는 순간의 결정. 이 대결의 마지막 상대가 북방 무술의 최고의 자리에 있으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대가 궁보산이며, 그와의 대결이 손과 발이 아니라 생각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소는 하나의 기호이자 동시에 신호이다. 그것이 어쩌면 배치 전체를 무너트릴 지도 모른다. 왕가위는 그걸 무릅쓰고 그걸 한다. 두 개의 예술적 결정, 그것. S#_23 S#_24 S#_25 S#_26 S#_27 삼저는 허락을 받자마자 바로 엽문의 프레임 안으로 쳐들어오면서 엽문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 S#_23) 자기의 영토를 침범당한 엽문. 삼저가 밀고 들어올 때 카메라는 삼저를 올려다보면서(low_angle)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다가 멈추고 앞으로 나서자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마치 자석처럼 따라붙는 카메라. 몹시 가까이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짧은 초점 거리의 렌즈를 사용한 이 촬영은 삼저의 동선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카메라와의 사이의 약속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다가와도 상관없어요, 전 당신의 무술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럴 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선 이외의 배경을 모두 지워버릴 거예요, 라는 듯한 거리. 삼저는 엽문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팔괘장의 지식을 일러준다. “팔괘장은 검술을 본땄지” 그러면서 자세를 취하고 한 손을 내밀면서 “단환장은 일검”, 다시 두 손을 모아서 “쌍환장은 쌍검”이라고 말한 다음 한 바퀴 도는 자세를 취하면서 ( S#_24) 그 발이 회전을 하면서(double_action) “여덟 팔(八)자 보법에” ( S#_25) 이어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삼저를 보여주면 그녀가 자세를 취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미소 짓는 얼굴로 덧붙인다. “64개의 변화가 있고”. 이때 엽문의 쇼트는 그녀의 대사 중간을 잘라 들어간 것이다. ( S#_26) 화면 가득한 클로즈업의 미소. 난 준비가 끝났어요, 라는 대답의 표정. 어쩌면 이미 삼저의 약점을 본 것일까. 무언가 이 신비로운 미소는 우리들로 하여금 소설을 쓰고 싶은 유혹을 한다. 물론 이것은 중복 쇼트가 가져온 주관적인 효과가 지금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순간적인 미소를 본 것일까. 삼저는 한쪽 손을 올리고 다른 손을 내린 다음 웃는 얼굴이 갑자기 바뀌면서 “기습에 유리하지”라고 덧붙인 다음 엽문에게 재빨리 첫수를 내지른다. ( S#_27) 물론 기습에 유리하다고 말한 다음 하는 공격은 이미 기습이 아니다. 말하자면 기습의 예. S#_28 S#_29_A_1 S#_30 S#_31 S#_32 S#_33 S#_34_A_2 대결의 시작. 삼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프레임 인 하면서 대결이 시작된다. 엽문은 그 삼저를 맞는다. ( S#_28) 이때 삼저가 엽문의 공간, 엽문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영화의 규칙은 무협영화가 아니라 무술영화이다. 손과 발이 닿은 거리가 자기의 영토이다. 그 안으로 들어올 때 서로의 무술이 지닌 규칙들이 대결의 구도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때 대결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엽문과 삼저의 대결이지만 다른 하나는 엽문의 무술과 삼저의 무술, 영춘권과 팔괘장의 술(術)이 각자의 규칙에 따라 활동하면서 만들어내는 선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때 두 개의 선이 부딪치고 때로 엉켜들고 하나가 다른 하나는 끊으려 할 때 다른 하나는 그것을 이을 것이며 다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묶으려 할 때 그것을 풀어헤쳐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동선. 영화는 그 선을 이어가면서 따라갈 것이다. 왕가위는 승패를 따라가지 않는다. 물론 그 결과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장르의 운명을 알고 있다. 만일 여기서 엽문이 패배한다면 이야기는 어떤 수를 써도 더 이상 진행하기 힘들 것이다. 바보들이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왕가위는 그들을 버려두고 쇼트를 진행한다. 여기서 무술의 동선들은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엽문과 삼저는 그 규칙이 활동하는 선의 양태이다. 그때 쇼트는 선의 집합이자 운동의 선이다. 거기서 무엇이 중심에 놓여있는가. 몸이 바로 거기에 있다. 살과 뼈, 신경조직과 피부로 이루어진 하나의 무게. 무술은 결국 몸을 다루는 기술이다. 몸과 몸의 만남. 영화는 몸을 바라보고, 몸에 다가갔다가 떨어져 나가고, 그런 다음 몸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다이어그램과 블록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때 마치 엽문과 삼저의 대결 자체가 두 개의 다이어그램의 교환처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다음 쇼트는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수직으로 내려다본다. 두 개의 점. 나는 이 장면을 먼저 A_1 이라고 부르겠다. ( S#_29_A_1) 우리는 이 구도를 이미 < 장군의 아들 >에서도 보았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이 쇼트를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건 대역을 촬영하기 위한 속임수에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다. 하지만 대역 촬영을 위해서라면 이것 말고도 수많은 방법이 있다. 그리고 < 일대종사 >에서 이 장면은 대역이 아니다. 우선 성립이라는 문제. 이 쇼트는 누가 보는 것인가. 설명을 하려면 난간에 서 있는 기루의 아가씨들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이 대결이 끝날 때까지 기루의 아가씨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reverse-shot) 시선의 교차점.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이 쇼트는 앞의 쇼트를( S#_28) 그대로 위로 올린 다음 90도로 내려다본 것이다. 그래서 삼저가 왼쪽에 있고 엽문이 오른쪽에 있다. 그런 다음 다시 내려온 카메라는 재빨리 엽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 S#_30) 방어하는 엽문. 무엇을? 자기의 공간, 자기의 프레임. 그때 이 공간 안으로, 마치 프레임을 찢듯이, 삼저의 주먹이 왼쪽에서 들어오고 이것을 막는다. 천장에서 엽문의 곁 가까이 다가온 장면 바로 다음 순간 ( S#_31) 갑자기 상상선을 뒤집어서 엽문과 삼저를 배치했다. 그냥 간단하게 그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 왼쪽에 놓인 엽문. 오른쪽에 있는 삼저. 이때 위로 올라간 다음 카메라가 반대 방향으로 내려간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바로 앞 장면( S#_30)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장면은 점프 컷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동선이 엉켰다는 느낌도 없다. 물론 너무 짧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핵심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때 엽문은 반대로 마치 유리 사이에 비춰 보이면서 거울에 반사되어 보는 것 같다. 이게 거울인지 유리인지는 너무 순간적이어서 분명치 않다. 하지만 유리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사의 구도 바깥에 있는 삼저는 성립되지 않는다. 액션은 멈추지 않았고 동선은 상상선을 넘어서서 끊기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더 이상한 것은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원래의 상상선 반대편으로 넘어와서 ( S#_32) 삼저의 발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오른쪽에 있는 엽문을 공격한다. 말하자면 다시 한 번 뒤집은 것이다. 나는 내 감각을 믿고 싶다. 31번째 쇼트는 인서트가 아니다. 세 개의 쇼트는 정확하게 액션의 동선이 일치한다. 만일 이 쇼트가 없다 할지라도 두 개의 쇼트는 연결하는데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럴 필요가 생긴 것일까. 나는 두 개의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하나는 장소의 환기이다. 왕가위는 우리들이 단지 동선을 쫓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는가. 이 장면 전체가 하나의 실내극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장소에서 영화를 진행하는 것이 불편하기라도 한 것처럼 상상선이 문제를 일으킬 때 우리들은 문득 장소를 보게 된다. 다른 하나. 기이하게도 이 쇼트는 동선을 쫓아가다가 마치 상황을 물끄러미 쳐다보듯이 빠져나갔다는 인상을 준다. (establishing_shot) 이때 이 쇼트가 굴곡진 유리를 걸었다는 점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이 쇼트는 궁이의 시점 쇼트라고 말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대결 바깥에 있는 그녀. 비밀의 복도에서 훔쳐보는 시선, 마치 쌓아 올라간 블록 중의 하나가 갑자기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만 같은 쇼트. 돌아온 위치의 쇼트는 재빨리 삼저와 엽문의 대결을 이어받는다. ( S#_33) 같은 크기. 같은 각도. 이어지는 액션. 재빠른 데쿠파주. 순간적인 투 쇼트. 이때 이 쇼트를 받는 것은 재빨리 다시 천장에 올라간 A_2이다. ( S#_34_A_2) 천장에 올라갈 때마다 마치 정확하게 다시 상상선을 복기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왼쪽에 삼저, 오른쪽에 엽문이 있다. S#_35 S#_36_A_3 S#_37 S#_38 S#_39 S#_40 S#_41 S#_42 S#_43 하지만 왕가위가 쇼트 진행을 패턴으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섬광 같은 순간. 삼저가 뒤에 있고 엽문이 앞에 있는데 삼저의 손이 재빨리 허공을 가르고 순간적으로 엽문이 피한다. ( S#_35) 이때 왕가위는 갑자기 슬로우 모션으로 속도를 바꾼다. 이상할 정도로 이 쇼트는 인상적인데 약간의 트릭이 있다. 물론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속도를 변속한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이 쇼트만 사운드가 없다. 그래서 마치 이 장면을 단지 느리게 본 것 이상으로 찰나의 순간을 확장시켜 놓은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순간적인 괄호 치기. 물론 이 장면은 위험하다. 쇼트의 편집이라는 순서의 리듬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동선이 엉켰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두 개의 쇼트는 잘못된 각도에서 이어받은 것이다. 그때 왕가위는 재빨리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서( S#_36_A_3) 마치 상상선을 재설정이라도 하듯이(re-establishing_shot) 다시 고스란히 반복한다. 이 쇼트는 앞의 쇼트( S#_35)를 이어받는다기보다는 더 앞의 쇼트를( S#_34)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슬로우 모션으로 파고 들어간 쇼트는 마치 인서트처럼 작동한다. 엽문은 삼저의 팔을 뒤로 꺾고 이때 ( S#_37) 삼저의 얼굴로 다음 쇼트를 받는다. 팔과 손으로 연결된 프레임의 안과 바깥. 엽문은 그 팔의 연결이며 바로 곁에 있다. 카메라의 바로 앞. 이때 그건 삼저의 표정을 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표정의 쇼트.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여기서 승부는 결판이 난 것인가. 그 순간 갑자기 정면으로 찍으면서 삼저는 팔을 비틀어서 엽문의 손을 빠져나간다. ( S#_38) 약간의 현기증. 말 그대로 브레송 효과. 팔과 몸을 분리한 다음 팔의 운동에 대해서 몸이 마치 그 일부처럼, 마치 나사처럼, 회전하면서 빠져나간다. 재빠른 슬로우 모션. 마치 몸과 몸이 부딪쳐서 일으키는 듯한 사운드 효과. 그때 삼저의 팔은 엽문의 손아귀를 나사가 박혀 있다가 비틀어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삼저가 계단을 내려올 때, 그리고 계단에서 뛰어내릴 때, 그런 다음 엽문에게 다가오면서 팔자 보폭을 걸었을 때, 매번 그녀의 동선에서 나선형의 운동을 보았다. 엽문의 금나수(擒拏手), 삼저의 동일한 운동. 말하자면 두 개의 쇼트( S#_35, S#_38)는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는 것이다. 만일 앞의 쇼트가 없었다면 뒤의 쇼트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두 개의 쇼트는 놀라우리만큼 비슷하게 보인다. 물론 그것은 이 두 개의 쇼트가 모두 손의 운동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슬로우 모션의 이미지. 손의 활동. 여기서 방향을 잃으면 안 된다. 엽문과 삼저의 투 쇼트. ( S#_39) 왼쪽에 삼저. 오른쪽에 엽문, 왕가위는 갑자기 상상선을 넘지만 그러나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을 알고 있다. 왕가위가 때로 법칙 바깥에서 감각적으로 편집을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대부분 부주의한 비평가들이 편집의 맹점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로 그가 지나치게 고전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맹점의 봉합. 경계 사이의 보충. 그는 일단 선을 정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제자리로 돌아온다. 반대로 종종 바깥으로 나간 다음 완전히 새로운 선을 따라가는 것은 차이밍량이다. 나는 그가 때로 원칙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혼란스러운 극장.(< 안녕, 용문객잔 >) 건물 사이의 미로.(< 표정 >) 물론 그렇게 하면서 차이밍량은 완전히 새로운 선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미학적 원칙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왕가위는 동선을 끊은 다음 재빨리 다시 연결한다. 마치 일사불란한 동작처럼 삼저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손을 모은 다음 엽문에게 뻗는다. ( S#_40) 왕가위는 삼저와 엽문을 떼어내고 다시 엽문의 쇼트를 만든다. 이때 삼저가 이 쇼트 안으로 침입하듯이 들어온다. ( S#_41) 이걸 재빨리 쇼트를 나누었다. 물론 이건 하나의 장면이다. 그러나 왕가위는 하나의 장면 안에서 하나의 행동을 성립시키는 쇼트의 성격이 다르면 그건 n개의 쇼트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왕가위의 장면은 n개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도 정식화 할 수 있다. 왕가위의 쇼트 나누기의 원칙은 간단하다. 한 씬 안에서 단지 여러 개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액션을 미분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쇼트의 성격이 다르면 그건 서로 각자 공존해야 한다. 대신 그 둘은 하나로 섞이면 안 된다. 그게 같은 방향이건, 같은 사이즈이건 그건 관계하지 않는다. 왕가위는 이미지로 쇼트를 분류하지 않는다. 그걸 <화양연화>에서 우리는 보았뇩?씬 안에서의 분리. 쇼트들 사이의 칸막이. 그뇩옳碩오?여러 개의 쇼트로 나눈 것이 아니라 여러 개로 나눈 쇼트들을 하나로 구성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 일대종사 >는 동일한 원칙을 액션의 장면 안에서 시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S#_42) 여기서 엽문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다가오는 삼저를 어깨로 부딪쳐 바깥으로 내보낸다. 이때 이 구도는 엽문이 마치 프레임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쇼트 사이즈를 더 안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 S#_43) 이때 삼자가 왼쪽에 있는데도 엽문은 정면을 향해 서서 마치 어떤 생각에 잠긴 듯, 그저 영춘권의 무술이 요구하는 동작의 규칙에 따라 지금의 자세를 취한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심저를 몸으로 밀어 낸다. 그리고 이 몸에 밀려서 삼저가 다시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간다. 말하자면 프레임의 소유라는 문제. 프레임의 안과 바깥. 사방으로 열린 프레임. 통로들. 계속해서 다시 설정되는 공간. 그 중심에 선 몸. 수직과 수평. S#_44 S#_45 S#_46 S#_47 S#_48 S#_49 S#_50 S#_51 S#_52 S#_53 S#_54 S#_55 S#_56 S#_57 S#_58 S#_59 S#_60 S#_61 나는 여기서 제작의 흔적을 복기하고 싶은 유혹마저 느낀다. 동선과 카메라의 혼연일체. 이 믿기 힘들 정도의 호흡의 일치. ( S#_44) 삼저가 밀려나면서 기둥을 발로 차고 그 반동으로 다시 엽문 쪽으로 향한다. 이때 왕가위는 기둥을 발로 차면서 되돌아오는 삼저를 따라 밀려나갔다가 바로 되돌아온다. 이 짧은 순간에 펼쳐지는 후진과 전진의 운동.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지만 우리에게 이상할 정도로 그 장면을 정확하게 다시 복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사운드의 효과이다. 마치 동선을 설명하는 것만 같은 청각기호들. ( S#_45) 이어지는 쇼트는 44 쇼트의 반복이자 디테일이다. 삼저의 발걸음을 따라서, 팔괘의 팔(八 )자 보행을 따라서, 엽문으로 향하는 발길을 따라서 움직인다. 이것은 정확하게 삼저가 앞서 보여준 여덟 팔(八)자 보행의 재빠른 운동이다. 마치 바닥에 나선형을 그리는 것처럼, 그래서 여덟 팔(八)자를 신발로 쓰기라도 하듯이, 미끄러지듯, 향하는 발걸음. 말 그대로 팔괘장의 활동. 이때 엽문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삼저가 취하는 제스처는 단지 팔괘장의 기본 자세를 보여주는 이상으로 마치 하나의 안무를 보는 것만 같다. ( S#_46) 슬로우 모션. 이때 사운드 효과는 삼저가 엽문의 손아귀를 빠져나올 때의 반복이다. 온 몸을 비틀면서 하나의 나사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자세. 말하자면 나선형의 운동. 이 장면은 순간적으로 삼저의 몸 절반을 보여줄 수 있는 정도만큼 물러난 다음(medium_size) 얼굴에서 발 아래로 수직으로 내려간다. (tilt_down) 이 장면은 엽문을 공격하려 든다기보다는 이 자체로 완결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이 쇼트에서 이 제스처에 대한 삼저의 어떤 나르시시즘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뭐랄까, 이건 너무 아름다워서 공격하려는 의도보다는 마치 그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왕가위는 승부에 관심이 없다. 그는 지금 차례로 중화 무술을 전시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걸 이어받을 수 있을까. ( S#_47) 이때 왕가위는 카메라를 엽문과 삼저 사이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삼저는 손을 내밀어 엽문을 공격한다. 순식간에 파고 들어간 이 쇼트는 거의 유일한 선택이다. 마치 하나의 쇼트 안에 두 개의 장면을 접합시키기라도 하는 것만 같은 이음새. 이 쇼트를 재빨리 수평으로 잡아서 엽문이 삼저의 손을 막아내는 것으로 연결하였다. ( S#_48) 이때 엽문은 삼저의 손을 프레임 바깥까지 밀어낸다. ( S#_49) 말 그대로 손과 손. 재빠른 손의 율동들. 하나는 밀고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밀쳐낸다, 두 개의 힘. 우리는 이때 두 개의 손을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는 커녕 이 두 개의 손은 엽문과 삼저 그 자체이며 몸 전체이다. 이 두 개의 손의 속도와 리듬, 그 활동이 만들어내는 선이야말로 순간적으로 이 장면을 시각적인 운동에서 촉각적인 운동에로 옮겨놓는다. 마치 물리적 단위를 벗어난 듯한 활동. 여기서 순식간에 밀려나는 삼저. ( S#_ 50) 삼저의 당황스러운 표정. 이때 이 쇼트는 이상하게도 엽문의 등 뒤에서 삼저를 바라보고 있다. (over_the_shoulder_shot) 동시에 엽문의 등을 통해서 삼저의 표정을 볼 때 그것은 엽문의 표정이기도 하다.(reverse_shot) 말 그대로 투 쇼트. 그때 왜 엽문의 등이 필요해진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삼저의 새로운 공격은 갑자기 바닥에 누우면서 발로 엽문을 걷어차려는 것이다. ( S#_51) 계단을 무겁게 내려오던 그 신발. 위에서 아래로. (C_1) 그때 카메라가 삼저의 공격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구도는 물론 다시 한 번 카메라가 천장으로 올라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천장에서 내려다 본 세 번째 쇼트. 마치 이 공격을 위해서 준비해두었던 것만 같은 구도. 그때 내지른 삼저의 발을 엽문이 붙잡는다. 발과 손의 클로즈업. ( S#_52) 이 대결에서 엽문은 줄기차게 삼저의 공격을 붙잡으려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공격과 방어. 나선형과 포획. 두 개의 힘. 그런 다음 한 쪽의 정지. 누워서 꼼짝 못 하게 된 삼저, ( S#_53) 사실상 여기서 대결은 끝난 것이다. 정확하게 대구라도 이루듯이 엽문이 내려다본다. ( S#_54) “삼저, 가볍게 겨루는 자리인데 건물을 부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 다음 삼저의 발을 놓아준다. 손에서 빠져나간 발. 여기서부터 쇼트는 단순하게 진행된다. 별다른 기교도 없고, 다만 대사를 따라갈 뿐이다. 마치 이 진행은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제 엽문은 겨우 첫 번째 관문을 지나갔을 뿐이다. 더 힘든 상대들이 엽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S#_55) 승부는 끝났고, 패배를 인정해야 할 시간이다. 누워서 웃는 삼저. ( S#_56) 일어나면서 대답한다. ( S#_57) “하도 부숴봐서” ( S#_58) “별일 아니야” (voice_out_of_frame) 그런데 이 대사를 할 때 장면은 삼저를 소개한 부채를 든 사내의 얼굴이다. 별일이 아닌 것이 아닌 표정. 새로운 긴장. ( S#_59) 삼저 웃으면서 덧붙인다. “엽선생, 팔괘는 악랄하니 조심하시오” 엽문은 먼저 삼저를 바라보면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 다음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본다. ( S#_60) 이때 엽문을 찍은 45도의 위치는 삼저를 맞이하던 쇼트( S#_19)의 반복이자 시작에 대한 마무리이다. 하나의 마무리. 두 번째 대결을 준비하는 입구. 더 많은 대결. 이때 엽문을 내려다보는 금루 난간의 아가씨들. ( S#_61) 저 무심한 표정들.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곳에 와서 겨룬 것일까. 얼마나 많은 대가들이 걸어 들어와서 여기서 수평이 되어 누웠을까. 형의권의 고수 엽문은 다음 층에서 형의권의 고수를 만난다. 그런 다음 궁보산과 대결한다. 가장 높은 산. 이때 궁보산은 무술을 겨루는 대신 생각을 겨루자고 제안한다. 단지 대결만을 놓고 말한다면 이 장면이 끝났을 때 < 일대종사 >에서 엽문의 절정은 지나간 것이다. 궁이와의 대결이 있지만 그다음은 허접한 대결로 허송세월한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결정적인 장면을 피했다. 엽문과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악역을 맡은) 마삼의 대결. 대신 궁이와 마삼의 대결이 전부이다. 왕가위는 이 이야기를 인물들의 서사에 내맡기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 속에서, 역사 속에서, 세월 속에서, 스러져간다. 가여운 존재들. 그 존재들이 가여운 것은 < 장군의 아들 >도 다르지 않다. 김두한과 종로패들은 으스대기는 하지만 세월 속에, 역사 속에서, 일제 강점하에서, 제대로 기 한번 펴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져간다. 임권택도, 왕가위도, 그 안에서 디테일의 조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대신 각자의 대결의 각각의 장면들에 홀린 듯이 매혹된다. 영화 안의 벡터. 그것은 언제 활동을 시작하는가. 규칙들. 거기서 동선이 시작한다. 그 선이 만들어내는 힘과 개념. 나는 그 힘에서 영화의 이것임, 을 생각하게 된다. 장면 안의 형태들. 이때 이 장면들 속에서 나는 두 사람 사이의 친화성을 느낀다. 쇼트의 진행이라는 방법. 오로지 방법의 세계. 그건 단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액션 그 자체에 대한 두 사람 사이의 매혹의 공감을 발견한다. 나는 거기서 활동사진의 사유를 복구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내게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오로지 방법만을 물어보는 이유이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의 창조의 자리, 제작과정, 그 영화를 연출하는 순간을 복원시키고 싶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본 것의 느낌을 고스란히 가져오는 것이다. 장면을 눈앞에 다시 가져오기. 이번에는 다시 임권택의 장면을 가져올 차례이다. (두 번째 이야기 끝, 세 번째 이야기 계속) 장군의 아들 1990년 108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태흥영화㈜ 각색 윤삼육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박순덕 음악 신병하 박상민 김두한 신현준 하야시 이일재 김동희 방은희 화자
영화를 보러 쏘다니는 것은 가끔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진다. 나는 이 말을 단지 새로운 방법으로 방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영화관에 가는 것을 비웃기 위해서 꺼내 든 것이 아니다.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경험이라는 것을 중심에 가져다 놓는 것을 허락한다면 영화들은 서로 구름처럼 뒤섞인다, 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가 저 영화와 겹치고, 저 이미지가 이 영화 안으로 들어온다. 쇼트들 사이의 칸막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 사이를 어떤 경계도 없이 자유자재로 비행할 때 거기엔 어떤 법칙도 없고 중심도 없다. 그저 감정의 바람이 있을 뿐이며, 이따금 하나로 뭉친 구름들이 만들어낸 비가 내리거나, 혹은 반짝이는 감각의 빛이 섬광처럼 스쳐 갈 것이다. 이 구름과 저 구름을 서로 구별할 수 있을까. 영화들 사이를 오가는 것은 나를 흘러가는 구름처럼 자유롭게 만든다. 그렇다.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것은 멈추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이때 나는 이 말을 공간적인 자리에 제한하고 싶지 않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모양이다. 자크 오몽은 약간 웅변조로, 게다가 어떤 예술분야에서 (전문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특수한 문화적 소양도 없는) 대중 관객이 과거와 최근 작품들을 동등하게 찾아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라고 반문한 다음 나는 같은 날 저녁에 존 포드와 힛치콕, 오우삼이나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다 함께 볼 수 있으며, 시간 여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다른 스타일 사이를 여행했다고 느낄 것임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 이라고 설명했다. (<영화와 모더니티>) 영화 관람의 새로운 일상생활을 영원한 동시대성이라는 정의 곁에 놓아둘 때 영화는 아무것도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당신에게 여기서 임권택 의 영화(들)을 읽는 시간이 바로 지금, 2013년 늦봄에서 초여름에 이르는 계절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싶다. 지금 내 곁을 흘러가는 구름. 나는 막 난니 모레티의 <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를 본 다음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를 썼다. 난니 모레티는 처음에 다소 우스꽝스럽게 시작했지만 교황청을 빠져나온 멜빌을 따라가면서 마법에 가까운 운율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한편으론 바티칸에 갇혀서 교황 발표가 날 때까지 기다리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추기경들이 편을 나눠 배구를 하는 장면들은 이상할 정도로 시적인 감흥이 감돈다. 왜 아무도 이 기적적인 순간을 함께 감탄하지 않는 것일까. 타비아니 형제의 < 시저는 죽어야 한다 >는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영화를 보면 정확하게 거기서 멈춘다. 켄 로치의 <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는 시작하고 15분은 여전히 훌륭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작되면 여전히 지루하리만큼 계몽적이다. 두 개의 여전한 사이의 불균형한 면적.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을 지나가고 있는 구름들. 스티브 맥퀸의 < 헝거 >는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 셰임 >은 안전하고 세련되었으며 그만큼 상투적이다. 필요 이상으로 안정적인 균형상태 안의 권태로운 음악들로 이루어진 장식. 런던의 아일랜드인과 뉴욕의 아일랜드인의 차이? 2013년 5월 15일 오후 7시 칸에 자리한 뤼미에르 극장에서 상영된 < 위대한 개츠비 >는 칸 영화제의 첫 번째 3D 개막작이다. 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분한 만찬. 끝. 이를테면 작년 개막작인 우디 앨런의 < 미드나잇 인 파리 >와 비교해보라. 물론 지금 (그다음 영화인) < 로마 위드 러브 >가 상영 중이다. 누군가는 두 편의 우디 앨런의 영화 중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한다. 나는 둘 사이의 차이는 그저 유럽지도 전체를 펼쳐놓은 다음 파리와 로마를 힐끗 쳐다보면서 배치의 공존을 모색하는 지리학적인 거리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낀다. 할 수만 있다면 뉴욕과 베니스와 파리를 연결한 다음(<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 바르셀로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 런던(< 스쿠프 >, < 매치 포인트 >, < 환상의 그대 >) 를 펼쳐놓고 우디 앨런의 유럽 지도를 만들어보고 싶다. 나는 의도적으로 목록을 펼쳐 들지 않고 그저 떠오르는 대로 열거하는 중이다. 아마 여기에 빠진 영화제목이 있을 것이다. 경계선 없는 도시들. 그 사이를 마치 거미가 쳐 놓은 함정처럼 이어지는 선들. 사랑의 선. 질투의 선. 의심의 선. 그때 그 선을 건드리는 것은 우연과 운명이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각자의 존재들 사이의 비평형적 균형.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 나는 그 시간에 < 안개마을 >을 다시 보고 있었다. 여전히 반짝거리는 정윤희. 때로 어떤 배우는 전혀 연기하지 않는데도 그 존재만으로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근처에서 떠도는 구름. 나는 두 편의 영화를 어떻게 해서든 여기 잠시 머물게 하고 싶다. 레오 카락스의 < 홀리 모터스 >는 종종 섬광처럼 빛나며, 때로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복화술사의 테크닉을 이용해서 영화 그 자체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우리에게 내기를 요구한다. 어떤 내기?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술래잡기. 그때 어디선가 영화의 죽음이 어른거린다. 레오 카락스는 영화를 구하기 위해 밤새 유령을 잡기 위해서 온갖 곳을 돌아다닌다. 수평과 곡선. 상승과 추락. 당신이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임무이다. 구름들 사이의 대기현상. 하늘의 구름들이 일시에 대지로 내려올 때 거기서 새로운 질서를 보게 될 것이다. 리차드 링클래이터의 < 비포 미드나잇 >은 잘 알려진 것처럼 < 비포 선라이즈 >, < 비포 선셋 >에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물론 리차드 링클래이터가 에릭 로메처럼 사랑의 도덕적 서스펜스를 전개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산만하고 상투적으로 찍혔다. 자신이 없으면 식탁에 앉히면 안 된다. 하지만 리차드 링클래이터는 일단 걷기 시작하면 설명하기 힘든 매직의 순간을 만든다. 산책의 영화. 걸어가는 영화. 선물 받은 호텔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제시와 셀린느가 걸어가면서 대화하는 기나긴 매직 아워는 마치 저물어가는 햇빛을 쫓아가는 것처럼, 때로 즉흥적인 순간에 의지하면서, 종종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연출되었다. 하루의 날씨. 대기의 이동. 제프 니콜스의 < 테이크 쉘터 >는 코엔 형제의 < 시리어스 맨 >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대답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다음 곧 자기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야기? 그렇다. 이 영화는 이미 이야기의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 자리에서 아직 구름이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구름의 그림자 아래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때 나는 <나비 품에서 울었다>를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영화들 사이에서 마치 구름들처럼 이것 때문에 저것이 안 보이는 경우란 없다. 마치 두 개의 구름이 서로 겹칠 때 번개가 일어나는 것처럼 내가 그 글을 쓸 때 그 영화들은 새로운 영감을 안겨주었다. 그럼 다음 < 울지 않으리 >를 보았다. 상황의 설명. 임권택 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처음부터 만들었다. (지금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은) 두 번째 영화 < 전쟁과 노인 >(1962년) 이후에도 < 전쟁과 여교사 >(1966년), 그리고 < 증언 >(1973년)을 연출했다. 여기에 무장공비나 간첩과 관련된 영화를 포함시키면 셈이 더 복잡해진다. <증언>과 <울지 않으리>와 1960년대 전쟁영화의 차이점은 국가 행정기관이었던 영화진흥공사의 제작으로 만들어지면서 국방부의 실제적인 군부대 지원을 받았고, 그런 까닭에 이 영화들은 당시 정부의 반공정책에 따른 홍보영화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물론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은 임권택만이 아니다. 이만희는 국방부 국군영화 제작소에서 < 고보이강의 다리 >(1970년)을 만든 다음 영화진흥공사 제작으로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년)를 찍었다. 이 목록은 한참 더 이어질 수 있다. 시나리오는 사전 검열을 거쳐 감독의 손에 도착했으며, 그런 다음 완성된 영화는 다시 한 번 검열을 거쳤고, 이렇게 개봉된 영화들은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학생 단체관람을 거친 후에 극장에서 사라졌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대부분 영화사 안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진지한 연구들도 영화들을 정책 홍보의 담론 안에서 제한적으로 설명하였다. 나는 의도적으로 어제 본 영화를 맨 앞에 붙여놓았다. 물론 이 영화가 제작된 배경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과정을 다른 영화들과 함께 간단하게 당신에게 환기시켰다. 그런 다음 즉시 여기서 제작 과정을 치워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괄호 치기이다. 대신 나는 여기서 질문의 방식을 바꿔볼 생각이다. 우선 간단한 줄거리. 재남은 아직 국민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이다. 병원원장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밀려오자 서울에 유학 중인 형과 누나가 내려온다. 할아버지는 집을 지키기 위해서 남고, 식구들은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피난길에 아버지는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지고, 어머니는 폭격에 숨을 거둔다. 폭격에 뿔뿔이 흩어진 형과 누나와 헤어진 재남은 오던 길을 되돌아서 고향으로 간다. 그러나 고향은 이미 북한군 인공치하가 되었고, 할아버지는 반동 지주로 몰려 강제부역을 하는 중이다. 재남은 동네 아이들과 힘을 합쳐서 마을을 점령한 북한군을 괴롭히고, 여기에 북한군에서 탈영한 동네 아저씨들이 돕는다. 그 사이 서울이 수복되고 북한군은 철수를 결정한다. 떠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려던 음모를 알게 되고, 북한군과 마을 주민들은 밤새 총격전을 벌인다. 아침이 밝아오자 북한군은 물러가고 군인이 된 형과 간호병이 된 누나가 돌아와 재회한다. 자, 무슨 이야기인지도 알겠고 거기서 어떤 것을 원하는지도 알겠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효과 전부라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까. < 울지 않으리 >를 건드릴 때 정책 담론의 효과를 설명하려는 방법들은 대부분 영화가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제도와 정책(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데올로기 효과)에 대해서 이미지들이 어떻게 조합되고 그런 다음 증언하는가를 따라간다. 이때 사실상 그 설명들은 영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다음 이후를 겹쳐놓고 동어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반대로, 하지만 그 안에서, 거기, 바로 거기, 그 영화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무엇이 그 안에서 홀로 말하고 있는가. 틈새들. 하지만 그 균열은 작지만 좁고 깊게 그 안으로 파고 내려가기 시작할 것이다. 임권택 은 기계적으로, 상투적으로, 자동적으로 시나리오의 서사를 따라가다가, 가끔, 아주 가끔, 갑자기 어느 장면에서, 경험의 존재론이라고 부를만한 어떤 순간의 쇼트를 지금 진행되는 영화의 규칙 바깥에서라도 온 것처럼,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진행에 변형을 가해서라도, 그것을 디테일 안의 표현이라는 방법으로 다시 그려 넣기 시작한다. 줄거리 바깥에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단지 디테일이라는 표면 위에서 활동하는 표현의 쇼트들. 그게 너무 이상해서 영화의 다른 전체와 아무 상관도 없는 증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때 이야기는 희미하게 지워지고 마치 그 위에 덧칠을 하는 것처럼 다시 표현되기 시작한다. 지금 영화를 둘러싼 제도의 증언과 그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이야기 속의 증인. 그때 경험의 표현. 좀 더 정확하게 그 시간을 경험한 존재의 증명을 어쩔 수 없이 더하는 표현. 이 쇼트들은 시나리오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야기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인물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건 전쟁을 경험한 사람의 몸에서 온 체험의 디테일이다. 내 질문은 간단하다. <울지 않으리>에 국가 정책과 반공 효과는 어떻게 배치되었고, 어디에서 작동을 시작하며, 그 안에서 어디로 연결되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지배에 대한 전략적인 비평의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헤게모니를 둘러싼 영화 안의 (지배) 질서에 대한 거절과 저항. 이때 나는 문득 돌아본 다음 질문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참, 임권택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확실성 안에서 진행되는 관계. 이야기 안의 경험이라는 문제. 그리고 그들 사이의 표현. 나는 분석하는 대신 묘사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그 안에서 임권택이라는 인칭, 그것을 통해서만 설명되는 장면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그 이야기를 다루면 그 배경 안에서 피할 수 없게 되는 시간을 바라보아야 하는 순간의 시선. 그때 그 시선으로 이야기의 틈새 사이를 지나가야 할 때, 다소 고개 숙인 시선 아래서 차라리 더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쇼트와 마주칠 때, 바로 그 시간의 쇼트들에서 나는 이 영화에서 부정할 수 없는 임권택의 흔적을 보게 된다. 말 없는 보충. 남겨진 흔적. 무엇이 거기서 사라졌을까. 그런 다음 무엇이 남겨진 것일까. 산만하게 흩어진 자국들. 그 사이를 연결하는 선. 나는 그 선을 따라 그려나가면 거기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그림? 나는 매번 새로운 방법을 생각할 것이다. 내게 다소 유머를 허락한다면 지금은 마티스를 떠올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1904년 앙리 마티스가 그의 그림 <사치, 고요, 쾌락>을 그렸을 때 한 말. “나는 지금 내 감각을 조정하는 중이다” Henri Matisse, < Luxe, calme et volupte > < 울지 않으리 >를 다시 보면서 나는 두 장면에서 멈추었다. 비슷한 장면. 이 말의 방점, 비슷한, 이라는 반복의 바깥, 혹은 차이의 디테일. 임권택 이 의도적으로 둘로 나눈 것은 아니지만 같은 씬이 두 번 반복된다. 첫 번째 씬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두 번째 쇼트부터 시작되는 첫 번째 대목이고, 그런 다음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거의) 절반에 이르렀을 때 그 씬의 쇼트들이 다시 반복된다. 이때 이 둘은 서로 동등하지도 않고 짝이 맞지도 않는다. 그 둘이 반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오로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의 이미 본 장면들에 대한 경험의 기억에만 의존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 비대칭 안의 대비적인 구조는 <울지 않으리>에서 전쟁에 의한 순환의 중단이라는 재난 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삶의 탈선. 이때 차이는 역사라는 얼룩에 의한 어두운 바탕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차이를 운반하고 있는가. 그때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가. 그 사이를 연결하면서 머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두 개의 씬 사이에서 수없이 참혹한 전쟁 장면들을 이미 보았다. 임권택은 그런 다음 전쟁의 효과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효과? 그렇다. 이 무시무시한 말. 영화는 전쟁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당신은 맨 먼저 전쟁의 지각을 떠올릴 것이다. 임권택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경험에 대해서 느껴보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와해되고 어떻게 폐기되고 그런 다음 지워져버렸는가. 영화가 느껴보는 비극. 나는 재남이라고 쓰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 이때 쇼트는 왜 어제를 반복하지 못하는가. 대답. (역사 안의) 전쟁은 지금 영화를 부수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질문. 이때 쇼트는 어떻게 반복하는 일을 멈추는가. 우리는 반대로 질문해야 한다. 무엇이 반복을 봉쇄하는가. S#1 S#2 S#3 S#4 S#5 S#6 S#7 S#8 S#9 S#10 S#11 S#12 S#13 S#14 첫 장면. 초여름, 조용하고 화창한 대낮. 느리게 수평으로 이동하는 화면(horizontal_pan)은 마치 병풍처럼 보일 정도로 과도하게 아름답다. 이 말의 방점. 과도하게. 이 영화 전체의 얼룩. 금방이라도 지나쳐버릴 것만 같은 평온함. 이런 감흥을 이 영화에서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막 1950년 6월 25일이 지난 다음 월요일일 것이다. 혹은 아무리 늦어도 화요일일 것이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북한군은 쳐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금방 그들은 물러갈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오늘도 어제 같은 하루를 시작한다. 아버지는 병원에 출근하고, 막내 재남은 학교에 가야 한다. 사람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쇼트. 토끼장 안에 토끼들( S# 1) 그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재남, “튼실한 놈으로 열 마리만 낳으라구, 알았지” 라고 말하면서 일어서는데(hand_held_tilt_up) 어머니가 멀리서(LS) 학교 가라고 이른다.( S# 2) 재남 집의 행랑채에서 사는 성식이가 어머니에게 인사하고(pan_right) 문 저편에 보이는 재남에게(LS) “재남아, 나 먼저 학교 갈께”라고 하자 재남이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S# 3) 마루가 보이는 전경, 아버지와 재남은 각자 집을 나설 채비를 한다.( S# 4) 아버지 정원을 가로 질러( S# 5) 옆 정원을 돌보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재남 따라와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저 멀리서(LS) 어머니가 따라 나온다( S# 6) 집 대문 앞에서 자전거를 탄 아버지와 재남에게 쫓아온 어머니가 도시락을 건네준다. ( S# 7)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재남의 뒷모습.( S# 8) 어머니, 그걸 바라보다가 (BS) 손을 흔든다.( S# 9)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재남, 읍내 큰 길에 ‘영광 오토바이’가 보이고 다리를 저는 아저씨가 지나가는 아버지에게 배앓이 약 처방을 해준 것에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 S# 10)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재남, 은화상회, 中央精肉店, 德元商會가 (pan_right) 차례로 보이고 ( S# 11) 慈愛病院 입구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세우자 재남은 학교로 간다.( S# 12) 멀리서 대포소리가 들리자 아버지 불안한 표정으로(BS) 돌아본다. ( S# 13) 학교 앞에서 친구들을 만난 재남은 함께 등교하면서 정문까지 걸어간다. ( S# 14) 여기서 평화는 끝난다. 나는 다소 장황하게 두 번째 장면까지의 광경을 설명할 것이다. 당신은 줄거리를 따라오지 말고 이것이 광경의 묘사라는 걸 떠올려야 한다. 사방에서 감도는 피비린내. 그런 다음 우리는 이 영화가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찍은 영화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디테일이라는 묘사의 미시적 재현들. < 울지 않으리 >에는 자꾸만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광경의 디테일 속에 들어가 멈칫거리면서 그 안에 펼쳐지고 있는 세상이 진정 그러하다, 는 순간과 만나는 사건들이 나타난다. 경험의 밀도. 기억의 부피. 영화에서 디테일이라는 난처한 개념. 어떻게 이미지의 디테일들은 서사의 흐름을 중단시켜가면서까지 대상의 실감을 자아내는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무리 동화 같은 설정이 벌어져도 거기에 달라붙는 이상할 정도로 사실적인 재현들의 무게. 임권택 과 어린 재민이. 둘 사이에서 공유하는 시간. 학교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담임선생님은 불길한 표정으로 아침 조회를 시작한다. 그리고 미처 선생님의 말이 끝기도 전에 가까이서 들려온 포탄소리가 교실 맨 뒤에 자리 잡은 아이들의 미화게시판에 걸려있는 그림을 뒤흔들어 한쪽 끝이 떨어져 나가게 만든다. 전쟁의 신호. 그런 다음 이야기는 무자비하게 진행된다. 할아버지는 집에 남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울에서 막 내려온 형과 누나와 함께 재남을 데리고 피난을 떠난다. 마치 끊어지지 않는 줄처럼 이어진 수많은 난민들. 길에서 죽은 어머니와 울고 있는 가엾은 어린아이. 기력을 잃은 채 길에 주저앉은 할머니와 어린 손녀. 거기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날 밤 아버지는 길을 막아선 공산군으로부터 중상을 입은 중대장을 치료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당한다. 갑작스러운 폭격. 마치 세상이 화가 난 듯한 불바다. 어머니는 중상을 입고도 딸을 구하기 위해 후퇴하는 국군 트럭에 그녀만을 실어 보내고 그만 숨을 거둔다. 형은 전쟁에 휩쓸려 피난민을 따라 가족과 헤어진다. 순식간에 모두가 헤어져 버린 가족. 이제 혼자 남은 재남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거두어 착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묘를 만들고 우연히 죽은 국군의 시신에서 수류탄이 잔뜩 담긴 가방을 손에 쥔 다음 수차례의 고비를 넘긴 끝에 고향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거기까지 걸어갔으니 아마도 재남은 걸어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떠날 때는 온 가족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재남 혼자뿐이다. 게다가 재남은 이 영화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모두 본 유일한 증인이다. 재남은 이미 고향을 떠날 때의 그 소년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았고, 피 흘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손에 피를 묻혀보았고, 그런 다음 수류탄을 던져서 사람을 죽였다. S#1 S#2 S#3 S#4 S#5 S#6 S#7 S#8 S#9 S#10 S#11 S#12 S#13 S#14 S#15 S#16 S#17 두 번째 광경은 재남이 다시 돌아오게 된 자기 동네에 들어서는 장면이다. 이때 이 둘 사이에 개입한 시간의 부피는 한국 근대사를 둘로 쪼개는 단절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첫 장면. 살던 동네로 돌아온 재남, 힘없이 걸어간다. (LS)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휴지가 흩날린다.( S# 1) 걸어오는 재남, (frontal_tracking_back) 바람이 분다.( S# 2) 재남이 쳐다보는(point_of_view) 을씨년스럽게 닫힌 가게들 ( S# 3) 걸어가는 재남, 신문지가 재남의 얼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 S# 4) 재남의 시선으로(point_of_view) 德元商會, 中央精肉店이 차례로 보인다.( S# 5) 재남, 달려가기 시작한다.( S# 6) 재남, 읍내 대로변을 따라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LS) ( S# 7) 재남, 집 앞 골목을 달려온다.( S# 8) 재남, 집 대문 앞으로 뛰어 들어간다.( S# 9) 재남, 집 안 마당으로 뛰어 들어간다.( S# 10) 그리고 집을 두리번거리면서( S# 11_12, dissolve) 누가 없는지 둘러본다. 재남을 반기는 건(point_of_view) 토끼장이다.( S# 13) 바라보는 재남, 표정이(CU) 밝아진다.( S# 14) 재남, 토끼장 앞에 서서 (over_the_rabbit’s_shoulder) 새로 낳은 토끼 새끼들을 세어본다.( S# 15) 한 마리씩 세어보는 재남(voice_over/point_of_view) 앞의 토끼들.( S# 16) 재남, 토끼 한 마리를 들어 올리는데 뒤편에서 성식이 재남을 부른다. ( S# 17 ) 먼저 환기할만한 사실. 재남이 고향에 돌아오기 전에 사실상 영화는 이미 돌아온 다음이다. 이 첫 장면 앞의 씬은 고향에 남은 재남의 할아버지가 ‘노력동원’에 끌려가 무거운 통나무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장면이다. 이때 이 작업은 (첫 장면에서 본 이 마을의 녹음 짙은 풍경과 동떨어진 채) 마치 다른 지역에 끌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에서 다른 ‘반동분자’들과 함께 부역을 하는 중이다. 발은 피범벅이고, 할아버지가 등에 엎쳐 들고 나르는 건 이미 그 나이에 들 수 없는 무게의 통나무이다. 그림자 한 점 없어 쉴 곳조차 없는 벌판. 낯선 장소. 마치 병풍과도 같았던 그 숲과 같았던 나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더 이상 여기는 낙원이 아니다. 혹은 일상생활의 시간선은 이미 끊어졌고 지금은 역사 안의 함정에 떨어져 그 안에서 견뎌야 한다. 새로운 조건. 임권택은 그렇게 두 개의 씬을 연결하였다. 재남에게 어떤 희망도, 어떤 기대도, 어떤 구원도 서둘러 뺏어버리는 것. 그는 이곳에서 저곳을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지금 이곳은 다른 이곳이다. 정확하게 이 두 번째 시퀀스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B_S# 1 A_S# 10 나는 두 개의 시퀀스를 비교하기 위해서 첫 번째 시퀀스를 A라고 부르고, 재남이가 돌아온 시퀀스를 B라고 구별할 것이다. 재남이가 동네에 들어서는 첫 장면은( B_S# 1)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장소를 이동한 다음 원래의 장소로 돌아올 때 마을 전체의 풍경을 보여주는 편이(establishing_master_shot) 쇼트의 진행에서 경제적이며 재빨리 다음 씬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을 통해서 공간적인 지각을 할 수 있게 지형적이며 지표적인 지도를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권택 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게 안에 들어가서 동네로 돌아오는 재남을 보여주고 있다. 텅 빈 동네. 아마도 동네 사람들은 모두 ‘노력동원’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쇼트의 바로 전 씬. 그러므로 가게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왜 가게 안에 들어가서 재남을 바라보는 것일까. 그렇게 되면 이미지의 면적은 매우 제한적인 풍경만을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때 이상하리만큼 스산한 바람이 불어 휴지들이 흩날린다. 우리에게 읽기를 요구하는 것만 같은 우연한 대기현상의 기호. 이 바람은 물론 만든 것이다. 휘날리는 바람은 동네에 재남이 들어서는 것을 방해라도 하듯이, 혹은 반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제부터 벌어질 나쁜 사건들에 대해서 불길한 예언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재남을 마주 보고 맞은편에서 불어오고 있다. 이 쇼트는 재남이 아버지와 함께 학교 가던 첫 번째 씬에서 집 앞 골목을 막 벗어난 다음 마을 읍내에 들어서던 첫 번째 쇼트와 같은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 A_S# 10) 그러나 여기서 두 개의 쇼트 사이의 관계가 개념적으로는 동일하지만 형식적으로 마치 오른손과 왼손처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첫 번째, 배치라는 문제. 두 개의 쇼트 모두 마을 읍내로 들어가는 것을 안내하는 첫 번째 쇼트이다. 이것을 만일 풍경으로 찍었다면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놓쳤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두 쇼트의 풍경은 정반대로 찍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하나는 평화롭고 행복한 ‘전쟁 이전’ 시간의 풍경이고, 다른 하나는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전쟁 이후’의 풍경이다. 나는 반복해서 이전과 이후라는 말을 꺼내 들 것이다. 임권택은 둘 사이에서 여전히 거기 머물면서 변하지 않는 읍내 가게 공간을 프레임으로 하여 재남이가 읍내로 들어가는 장면의 풍경 입구(introducing_master_shot)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쇼트는 가게 안에서 재남을 찍으면서 동일한 프레임을 보여주지만 동일한 가게에서 찍은 것이 아니다. 동일한 구도. 두 개의 쇼트 모두 왼쪽 길에 자리 잡은 가게 안에서 찍었다. 다른 가게. 그 둘은 같은 가게에서 찍으면 안 된다. 첫 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저 멀리 ‘영광 오토바이’가 보이지만 재남이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그 가게가 보이는 그 자리가 아니다. 안 되는 이유. 재남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첫 번째 장면은 집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이 둘을 동일한 가게에서 찍으면 재남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의 연속적인 쇼트를 집에서 나오는 장면의 역순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이 문제를 기능상의 문제로 단순하게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재남이 같은 길을 되돌아옴과 그 길의 다름은 동일한 과정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제 더이상 동일한 시간의 길이 아닌 것이다. 임권택은 두 개의 쇼트 사이의 거리와 차이 사이에서 그 동일성을 때려 부순 전쟁이라는 효과를 보여주는 중이다. 두 번째, 분배라는 문제. 이야기 안에서 기계적인 운동은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진행될 때 주거나 배분받은 인물이 누구인가 만큼이나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재남이가 아버지와 학교에 갈 때 그들의 자전거 선을 가로막고 나선 사람은 다리를 저는 동네 아저씨이다. 이 영화에서 그가 다리를 저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처방해주신 약 덕분에 배앓이가 모두 나았다고 길게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까다로운 문제. 재남이와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이 장소를 지나가기 때문에 순식간에 지나쳐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저씨의 장광설은 이 쇼트를 오랫동안 붙잡아 놓는다. 게다가 이 아저씨는 다리를 절기 때문에 더 속도가 느려진다. 나는 이 동선을 반대로 설명하고 싶다. 이 쇼트를 기억하지 못하면 재남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마을 읍내의 첫 쇼트를 여기서 시작하기 난처해진다.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기 때문에 쇼트의 프레임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가버릴 것이다. 만일 여기서 쇼트를 나누기 시작하면 동선이 끊어져 버릴 것이다. 하나의 동선. 하나의 운동. 이 곡선을 나누면 안 된다. 다리 저는 아저씨는 여기서 가게 안의 프레임 쇼트를 멈춰 세우는 고정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때 자전거가 프레임을 빠져나간 다음 그 동선은 카메라의 기계적인 운동으로 이어진다. 임권택 은 쇼트를 나누는 대신 여기서 거의 곡예에 가까운 운동으로 줌과 팬을 이용해서 다리 저는 아저씨에게 머문다. 그러나 전쟁 ‘이후’ 다리 저는 아저씨는 ‘지주’인 할아버지를 고발하고 당원이 된다. (그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말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재남이의 씬에 있었던 아저씨는 재남이 마을 읍내로 돌아올 때 할아버지를 감시하는 자리에서 강제부역이 진행되는 전 씬에 자리하고 있다. 만일 이 아저씨가 당원이 되지 않았다면 있어야 할 자리는 전 씬의 강제부역이 진행되는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마을 읍내 큰길가에서였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그가 강제부역 공사장에 있어야 할 자리가 달리 어디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읍내 길가에 서 있다면 반대로 재남의 동선을 다시 가로막고 나섰을 것이다. 하나의 선. 멈추지 않는 선. 끊어지지 않는 선. 우리는 영화에서 동선이라는 문제가 동시에 각자의 자기 자리의 자기 원인의 운동이자 실존의 곡률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B_S# 3 B_S# 4 B_S# 5 B_S# 6 A_S# 11 두 번째 쇼트. 재남은 이 낯선 풍경 앞에서 마을 읍내로 들어선다. 물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영화는 재남을 바라보면서 뒤로(tracking_back) 물러난다. 재남의 표정. 그는 다른 풍경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이때 재남을 가로 막아나서는 것은 바람이다. 그의 얼굴을 때리고 지나가는 바람결. 나는 첫 장면에서 이상하리만큼 바람 한 점 없었던 여름날 화창한 기후를 기억한다. 여기서 이 바람은 이상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 바람은 비를 불러오기 위한 신호가 아니다. 바람결의 매치 컷. 재남을 맞이하는 것만 같은 바람. 단지 그것이 만들어진 바람이라서가 아니라 왠지 그 장소에 불어오는 바람이 그 쇼트 바깥에서 불어오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바깥의 어디? 이제까지 진행된 전쟁 장면들의 쇼트들 사이의 잔인함과 무심한 순간들의 이미지가 서로 부딪치면서 만들어낸 충돌의 몽타주 효과. 그것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서 불어 올 수 있겠는가. 여기에 더해 A씬에서 단 한 번도 자전거의 속도로 카메라가 이동한 적이 없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다. 더도 덜도 아닌 풍경(속의 재남)을 바라보기. 그렇다면 여기서는 왜 재남의 발걸음이라는 속도가 필요해진 것일까. 당신을 환기시키고 싶은 사실.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이야기. 이제부터 우리는 한국전쟁의 이상한 나라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재남이 만들어내는 주관적인 이야기의 세계. 만일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재남의 ‘전쟁’은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 더이상 이 모험의 선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위기. 새로운 속도. 이때 이 바람을 재남이 고향의 낯선 공기 안에서 느껴보는 감정의 터치라고 말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더이상 마을 읍내의 가게들은 정겨워 보이지 않고( B_S# 3) 지나쳐가는 바람결에 날리는 신문지가 재남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B_S# 4) 마치 그에게 마을 읍내의 풍경을 돌아보기를 요구라도 하는 듯한 일깨움.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면서 보았던 가게의 간판들이 (역순으로) 차례로 보인다.( B_S# 5) 德元商會, 그리고 中央精肉店. 이때 이 쇼트를 전쟁 ‘이전’의 쇼트 맞은편에 세워놓을 필요가 있다. 전쟁 ‘이전’의 쇼트( A_S# 11)에서 재남은 아버지의 자전거에 실려 이 가게들 앞을 기분 좋게 달려간다. 조금 더 앞부터 시작된 자전거의 운동은 은화상회를 거친 다음, 德元商會, 그리고 中央精肉店을 지나서 간판이 없는 가게 앞을 지나간 다음에도 마치 그 기분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자전거가 빠져나간 다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잠시 그 자리에 머문다. 그 순간이 매우 짧은 데도 불구하고 임권택 은 인물이 빠져나갈 때 거기 공백을 남겨놓지 않기 때문에 이 쇼트의 여분의 지속이 이상할 정도로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쇼트는 하나로 찍은 쇼트를 찢어놓았다.( B_S# 4_5_6) 이 쇼트의 분리는 반대로 마을 읍내의 풍경과 아버지와 재남을 연결하는 자전거의 동선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유기적인 관계를 구성하지 않으면 하나의 쇼트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만 같다. A_S# 7 A_S# 8 A_S# 9 A_S# 11 B_S# 7 B_S# 8 두 개의 씬, 전쟁 ‘이전’과 ‘이후’에서 한 장소를 반복해서 오가면서 임권택 은 같은 쇼트와 다른 쇼트를 마치 붙였다 떼어놓기 혹은 하나를 다른 하나 위에 겹쳐놓는 것처럼 보인다. 재남이 집을 향해서 달려갈 때 마을 읍내를 수평으로 달려가는 장면( B_S# 7)은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같은 길을 지나가던 장면( A_S# 11)을 같은 자리에서 단지 자전거와 재남의 동선을 반대로 하여 다시 한 번 찍은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의 진행에는 단 하나의 어떤 다른 장소의 쇼트도 개입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되풀이. 그 둘은 형태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마치 이 길은 집으로 가는 다른 길을 알지 못한다는 듯이 그렇게 하나의 선을 따라간다. 그래서 읍내의 이 길을 벗어나자 다음 장소는 바로 집 앞의 골목으로 이어진다. 골목과 집 앞 대문을 하나의 이미지로 찍은 쇼트는 없지만 이 길은 분명히 집 앞 대문에서 이어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 ‘이전’의 씬에서( A_S# 7_8_9) 집 앞 대문까지 따라 나온 어머니가 재남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고( #7) 골목 앞을 자전거를 타고 빠져나가는 아버지와 재남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8) 손을 흔들 때 ( #9) 그 세 개의 쇼트 사이에서 문 앞에 서 있는 어머니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손을 흔들기 위해서는 시선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 개의 쇼트로 진행되는 이 씬을 처음 보았을 때 운동의 연속성을 지연시킬지라도 골목을 빠져나가는 아버지와 재남을 마을 읍내로 보내기 위해서 어머니의 손짓이 둘 사이를 면과 면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서(invisible_cut)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집합의 다리(transitional_shot)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문제를 기능적으로만 바라보면서 ‘엄마의 클로즈업’이라는 정감이 가져다주는 씬 전체 안에 놓인 관계의 도약을 놓쳤다. 이 자리가 분명해지는 순간은 재남이 전쟁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사라진 쇼트 안에 있다. 구멍 뚫린 씬. 그 쇼트는 거기 있지 않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거리를 두고 자기의 존재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서술의 목소리. 나는 그 바깥의 체험을 사라진 쇼트 안에서 느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남이 집에 가기 위해서 집 앞 골목으로 뛰어오는 장면은 ( B_S# 8) 재남이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빠져나가던 그 장면 ( A_S# 8)과 같은 프레임이다. 다만 둘의 차이는 온다, 와 간다, 는 반대 운동방향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어머니의 손짓 장면을 반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가지 가능성은 가까스로 남아있다. 그건 재남이 환상을 동원해서 어머니의 손짓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동원하면 재남은 어쩔 수 없이 환상이 요구하는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다. 결과는 지금보다 더 가련해진다. 재남은 전쟁 ‘이전’과 ‘이후’를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남은 이제 자기만의 전쟁을 시작할 명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임권택은 그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하였다. 재남은 어머니를 자기 손으로 아버지 곁에 묻고 지금 여기에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는 더이상 재남이 (환상 안에서) 진행해야 할 행위의 줄거리는 남아있지 않다. 매장이라는 문제. 나는 따분하게 여기서 억압의 귀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A_S# 7 B_S# 9 B_S# 17 이때 내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사라진 쇼트가 아니다.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 두 개의 씬, 그러니까 전쟁 ‘이전’과 ‘이후’의 씬은 사라진 쇼트와 비슷한 쇼트 사이, 이 둘 사이에서 서로 다른 짝을 찾아가고 있다. 이 둘 사이에서 공명을 느껴보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둘 사이의 진동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놓여있는 전쟁이 없다면 반대로 그 둘은 아무런 진동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이 둘 사이의 플래시백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임권택 은 여기서 어떤 사건, 어떤 줄거리, 어떤 설명을 하는 대신 그냥 간단하게 성립이라는 질문을 던져본 다음 동일한 쇼트의 재현이라는 요구의 불가능을 마주하게 만든다. 재남이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나는 쇼트( A_S# 7)는 재남이 집에 도착하는 장면( B_S# 9) 과 동일한 장소지만 동일한 프레임이 아니다. 왜 두 개의 쇼트는 동일한 쇼트 대신 비슷한 쇼트라는 방법으로 짝을 이루는 것일까. 이 세 개의 쇼트와 두 개의 쇼트는 그 둘을 비교할 때 동선의 방향이라는 질문 앞에서 갑자기 부서진다. 우리는 영화가 물리적인 예술이며, 장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안에서 뇌 위에 펼쳐지는 상상적인 지도를 만든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반복된 설명(을 통한 문제제기). 재남과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나는 골목과 재남이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은 같은 골목이며 같은 방향에서 (거의 같은 자리에서) 찍었다. 그런 다음 어머니의 손짓과 눈길로 이 골목과 집 대문의 선에 대해서 이미 설명했다. 전쟁 ‘이전’의 쇼트만으로 이 선을 따라가면 이 골목은 집 대문을 정면으로 해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길이다. 그러나 재남은 이 골목을 따라 어떤 우회도 없이 일직선으로 수직으로 집 대문을 향해 뛰어간다. 동선으로만 설명하면 이 두 개의 골목은 서로 다른 골목이다. 첫 번째, 오로지 기능적인 설명. < 울지 않으리 >는 시네마스코프로 찍었고, 자전거에 재남을 태운 다음 아버지가 끄는 자전거로 이 프레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수평의 구도가 필요해졌다. 이렇게 설명하면 재남이가 돌아오는 쇼트는 완전하게 잘못 찍힌 동선이다. 자동적인 설명. 그렇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두 개의 쇼트는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재남의 동선을 연결하기 위하여 곡선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혹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둘 사이에 직선을 그은 다음 180도를 기준으로 하여 연결시킨(match_cut)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이걸 경로적 공간으로 재 정의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전쟁 ‘이전’과 ‘이후’의 두 개의 시퀀스가 진행되는 과정이 단순히 역순을 밟아나가는 대신 사라진 쇼트와 비슷한 쇼트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했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왜 두 개의 씬은 함께 가능하지 않을까. 하나의 세계에서 가능했던 쇼트가 다른 세계에서는 불가능해질 때 우리는 그 둘 사이에 놓인 칸막이로서의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이 장면들은 지금 공간적인 특징을 따라오는 대신 재남이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세상의 풍경이다. 그렇지 않다면 재남이가 이 동네로 들어올 때 부는 바람은 달리 설명될 수가 없다. 마치 재남의 마음으로부터 불어온 듯한 바람. 게다가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은 마을 읍내. 어른들은 부역에 모두 끌려 나갔다고 반문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강제부역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여자도 보지 못했다. 재남의 할머니가 없기 때문에 여자들의 부역장을 찍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재남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갔는가? 그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았다고 주장하려면, 혹은 그 시간에 모두 학교에 있었다고 가정하려면, 그와 동시에 재남이 집에 들어선 다음 토끼장 앞에 섰을 때 행랑채에 살던 성식이는 왜 그 시간에 집에 있었는지를( B_S# 17)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둘 중 어느 쪽이 재남의 주관적인 풍경이라고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임권택은 양쪽 모두 부분적으로 풍경 안에 주관적인 디테일의 삽입이라는 방식으로 외상의 얼룩을 더해놓았다. 이를테면 전쟁 ‘이전’의 과잉할 정도로 평화로운 낙원에 가까운 풍경. 반대로 전쟁 ‘이후’의 인공적으로 삭제시킨 낙원의 디테일들. 그 안에서 종종 비정상적인 운동이 그 내부의 배치 사이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B_S# 10 B_S# 11 B_S# 12 B_S# 13 B_S# 14 B_S# 15 집을 나서는 장면과 돌아온 장면의 차이. 재남이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나는 장면이 집에 돌아오는 장면에서 반복될 수 없는 것은 두 쇼트 사이의 크기가 불러일으키는 같은 장소의 다른 조건이다. 그저 힐끗 보는 것만으로 느껴보는 두 쇼트 사이의 차이는 마치 전쟁 ‘이전’의 쇼트를 ‘이후’의 쇼트는 확대시켜 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두 쇼트는 카메라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확대하여 촬영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두 가지 모두를 건드려볼 필요가 있다. 전쟁 ‘이전’의 쇼트는 가벼운 이동 사이에서 집 대문을 열어 놓고 어머니를 왼쪽에 세운 다음 아버지와 재남의 자전거를 오른쪽에 세웠다. 물론 세웠다는 표현은 정확한 묘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막 병원(과 학교)로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 세 사람을 뒤로하고 집 대문은 활짝 열려있다. 이제 막 시작하는 하루. 누구라도 환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문. 물론 이 장면을 보는 사람들의 관심은 누구라도 이 세 사람의 가족에게 모여 있기 때문에 그 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 ‘이후’의 장면은 여기서 재남의 집 대문과 지붕이 담길 만큼 뒤로 물러서서(long_shot) 찍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집 대문을 중심으로 한 전체의 모습. 이건 지금 이 집의 흉한 몰골을 보라는 이미지이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고 있을 것만 같은 집. 이때 초여름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이 집의 행랑채 창문은 닫혀있고, 오른쪽에 자리한 쪽문도 단단히 닫혀 있다. 그런데 왜 대문은 열려있는 것일까. 그 말은 이 집을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재민이가 피난을 떠날 때 그대로의 집.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는 집. 연신 땀을 닦고 있는 재민의 제스처. 그렇게 힘들게 재민이 먼 길을 돌아 돌아왔는데도 누구도 반기는 사람이 없는 집. 대문이 반쯤 열려있지만 마치 집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문 안의 벽은 우리가 전쟁 ‘이전’의 쇼트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을씨년스러운 풍경. 마치 모두가 어디로 가버린 것만 같은 집. 집에 들어선 재남은 텅 비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 B_S# 10_11_12) 그런 다음 고개를 돌려 토끼장을 바라본다. ( B_S# 13_14_15) 이 쇼트는 물론 영화의 맨 첫 장면으로 되돌아온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다시 시작한다. 이중의 용례. 나는 위험한 자리에 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모두들 들어서기를 두려워한 시작. 임권택 의 영화를 다룰 때 < 증언 >에서 시작하는 일련의 국책영화에 대해서 할 수만 있으면 그 자리를 피한다. 종종 임권택의 60년대 영화들, 이를테면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로 이어지는 다찌마와리들, 그리고 < 황야의 독수리 >와 함께 하는 만주 웨스턴들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하던 관대한 대중영화의 친구들마저 1970년대 정책영화들 앞에서는 침묵을 지킨다. 심지어 임권택 자신도 이 영화들에 대한 대답을 미루거나 혹은 종종 피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마주 볼 생각이다, 그리고 마주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생각이다. 모델? 그렇다. 나는 지금 이브 알랭-브아를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프리모 레비의 증언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서 살아남는 것, 그런 다음 연좌제의 그늘 아래서 1970년대 반공국가의 독재를 통과해온 삶. 이 둘이 서로 비스듬하게 겹칠 때, 결국 이 모든 것은 다시 삶의 문제이다. 나는 이 질문을 외상적 증후의 과도한 도식으로 만드는 것에 맹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희생이라는 방법으로 살아가기. 그 안의 임권택. 영화를 저들의 것에서 다시 나의 것으로 되돌리는 순간, 바로 예외적 순간만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가능하게 열어줄 것이다. 영화 안에서 예외적 지위에 놓여있는 쇼트들. 굴복하지 않는 쇼트. 나는 지금 1970년대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계속) 1974년 115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영화진흥공사 각본 신봉승 윤삼육 나한봉 촬영 박승배 조명 박태수 편집 김창순 음악 한상기 이승현 재남 황해 할아버지 김진규 아버지 문정숙 어머니 박지훈 재석 김영숙 지은 이일웅 칠용 추석양 다리 저는 동네 아저씨 독고성 공산당 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