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어느 날 갑자기
겉보기엔 평범하고 멀쩡한 어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특별한 주인공 없이 각자 다른 사연을 갖고 있는 여러 인물들이 경험하는 어느 이상한 하루 동안의 이야기인 이 단편영화의 원래 제목은 <푸른 계절>이었다. 적어도 내가 피드백을 부탁받고 읽은 시나리오엔 저렇게 적혀 있었다. 어딘가 괴상해 보이는 인물들이 왠지 부조리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자살하거나 자살시도를 하거나, 알고 보니 귀신이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연달아 등장해 읽는 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더니, 마치 8~90년대 공영방송 청소년 드라마의 그것처럼 개성도 없고 영혼도 없어 텅 빈 듯한 그 제목이 결국엔 꽤 짓궂고 음흉하게 느껴져 이건 좀 내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읽은 시나리오였다. 그로부터 반년 후 < 어느 날 갑자기 >로 제목을 바꿔 달고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땐 내가 예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가 맞는지 아리송한 느낌을 받았는데, 비유하자면, 문구멍을 통해 뭔가 흥미진진한 사건을 본 것 같은데 그게 마치 깨진 거울 조각처럼 파편적인 상황들뿐이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상상할 때의 그런 초조한 아리송함과 비슷했다. 그런데 원래 이런 영화의 재미는 그런 아리송함의 정도와 비례하는 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극장을 나서면서 “이게 도대체 뭔 이야기야?” 라고 같이 본 친구에게 따져 물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진짜 재미의 시작이거든. 단지, 그런 질문이 딱히 대답이나 설명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내뱉는 짜증스런 추임새일 경우가 더 많다는 게 아쉬울 뿐.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열심히 주절대려는 말들은 이 영화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며 어떠한 재미의 화살을 과녁에 겨누려 했는지에 대한, 초고 시나리오를 읽어본 사람으로서 내릴 수 있는 근거 있는 짐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추리가 영화를 못 본 사람들로 하여금 굳이 이 영화를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진짜 목표나 이유 따위가 될 것이다. ‘여고생 호진은 진지하게 사귀던 같은 학교 선생 영호에게 갑작스럽게 이별 통보를 받는다. 호진은 영호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거짓말까지 하지만 영호는 문자 한 통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인터넷에서 긁어온 이 시놉시스는 앞에서 말한 그런 이유로 교활하다. 영화상에서 그나마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의 이야기를 극적인 태도로 포장하여 밑밥으로 던져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선생과 연애하는 발칙한 여고생 호진이긴 하다. 여러모로 조숙한 척하는 이 여학생과 왠지 띨빵해 보이는 수학선생은 정말로 진지한 연인 사이인 것 같다. 생리를 안 한다고 고백하는 제자에게 선생이란 이 남자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고함을 치고 있으니까... 꽤 심각한 커플이지. 그리고 그런 호진을 좋아서 쫓아다니는 남학생 용진이 있다. 그렇다면 이건 삼각관계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런 용진을 좋아서 쫓아다니는 남학생 지수까지 있다는 것이다. 그럼 사각관계. 여기에 또, 약자(언더독)를 향한 격려/동기부여 강박관념을 가진 체육선생이 있는데, 그녀는 몸치인 호진을 붙들고 무용 개인교습을 시키며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파이팅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가 지쳤는지 결국 자살하고 만다), 그리고 이성복의 시를 일인극 무대 배우의 독백이자 주술사의 주문처럼 읊고 다니는 문학선생이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오광록 )가 연기한 이 인물은 체육선생의 반대편에서 호진에게 자살을 부추기는 저승사자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이 영화의 문을 닫는 최후의 등장인물이다.) 줄거리와 인물 정리를 최대한 간소하게 풀어 써보았는데 영화를 못 본 사람은 도대체 이게 어떤 이야기로 꿰여 있는지 짐작하기 힘들고 한편 짜증스럽기도 할 것이다. 이 인물들이 서로 자연스러운 관계를 나누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도 않고, ‘인기척 좀 하고 다녀라!’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음흉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도 왠지 신경 쓰인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의도를 가진 연출자의 계획에 따라 특별하게 세팅이 된 세계와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을 짐작하는 데 필요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단서는 호진에게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야!” 소리치는 띨빵한 그 선생이 실은 ‘귀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죽었던 사람이기에, 영화 속에서는 (자기와 사귀었던 여학생) 호진의 플래시백 형태로만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상단의 스틸 사진에서처럼) 창고에서 저런 괴상한 포즈로 만나는데, 저긴 아마도 선생 영호가 자살한 곳 같다. 또, 그가 죽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현재의 타임라인과 교묘히 섞어 놓은 데다 그가 목을 매 자살하는 장면을 편집에서 뺐거나 아예 찍지 않았기 때문에 첫 번째 감상으론 눈치채기 힘든 단서이다. 즉, 영화의 시작부터 ‘...가 없는 학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 억지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는 일기장 나레이션을 하는 이 조숙한 여학생은 영화 내내 죽은 선생의 유령과 대화하며 (그렇게 해서) 내가 그를 자살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자신 또한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성복의 시집을 빌려주면서 ‘죽을 수 있을 때 죽어야지 안 그러면 타이밍 놓쳐서 못 죽는다’는 괴상한 조언을 해주는 문학선생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저승사자일 것이고.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학교의 선생들과 학생들이지만, 이들 모두 전염병에 걸린 것 마냥 죽음을 생각하고 자살의 유혹에 시달리다 누군가는 시도를 하고 누군가는 성공한다. 서로가 죽음의 원인과 동기를 제공하고, 문학선생은 죽음의 사신처럼 이들의 관계를 관조한다. 이 학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들 강박적으로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다들 간신히 무언가를 붙들고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사소한 계기로 툭 끊어졌을 때 이들은 유령이 되거나 창고에서 목맨 시체로 발견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호진과 용진, 지수, 세 아이들이 기름 웅덩이 앞에 서서 호진의 일기장을 불태우고 돌아서는 그 장면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를 닫는 엔딩으로써 연출자가 의도한 만큼의 시적 쾌감을 준다거나, 영화적인 해소로 이어진다거나,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지 속 시원한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거나... 등등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들은 선생들처럼 창고에서 목을 매 끔찍하게 죽을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다행스러웠다. 나의 그런 예측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는 단서는 시나리오상에서 저승사자 문학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발견된다. #29. 비 개인 거리 / 김밥천국 / 초저녁 학교 앞에 위치한 김밥천국 안. 비를 맞았는지 흠뻑 젖어 미역처럼 내려온 머리에 김 서린 안경을 쓴 문학선생, 지갑을 들고 우동 포장을 기다리고 있다. 쇼윈도 앞으로 푸른색 노트를 든 지수가 가방을 매고 혼자 걸어간다. 그때 가게 안에서 우동포장을 기다리고 있는 문학선생을 발견하는 지수. 멈춰서 쇼윈도 밖에서 문학선생을 바라본다. 잠시 후 문학선생이 쇼윈도 밖의 지수를 발견한다. 손을 흔들어 환하게 웃는 문학선생.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모든 등장인물이 강박적으로 죽음의 사이클을 돌리는, 이 괴상한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자 심장은 어쩌면 이 문학선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인물들이 서로를 쫓아다니며 붙들고 징징대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애네들은 하루 종일 왜 이러는 걸까 싶다가도 결국 이 문학선생이 김밥천국에서 우동 포장을 기다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밀린 체증이 확 풀리는 것 같더라니까. 영화에서는 그가 동네 책방에서 이성복의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을 꺼내 드는 장면으로 바뀌었던데, 또 다른 수수께끼를 남기는 것 같은 이런 두루뭉술한 결정은 사실상 패착이라고 본다. 인물들이 웃는 것도 이상하고 우는 것도 안 어울리는 이 애매모호한 분위기의 영화에서 저승사자인 줄 알았던 죽음의 천사 문학선생이 김밥천국의 우동을 먹으려고 추레한 몰골로 포장을 기다리고 있는 그 장면이 품고 있는 아이러니야말로 정확하고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바뀐 결말이 좀 아쉬웠다. 정리하자면, 틈이 맞지 않는 깨진 거울 파편들을 모아서 그럴듯해 보이게 붙여놓은 듯한 지금의 영화도 나름 재미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원래 되려고 했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더 훔쳐보았던 사람으로서 < 어느 날 갑자기 >는 이런 식으로 쓸데없이 긴 잡담을 늘어놓게 만드는 음흉하고 비밀스런 재미가 숨어있는 영화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