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명왕성
개인적으로, 신수원 감독의 < 명왕성 >을 보며, 선댄스 영화제가 매료됐던 미국영화와 몇몇 일본영화가 연상되는 건 피할 수가 없었다. 미국의 한 평범한 고교를 무대로 마약을 둘러싸고 학생들이 벌이는 두뇌게임을 고전풍의 범죄스릴러로 그럴싸하고 세련되게 포장한 < 브릭 >이 한 갈래라면,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의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이 ‘왕따’ 문제를 둘러싼 선생과 학생들의 입장을 섬뜩하면서도 시적으로 완성한 < 고백 >은 또 다른 갈래라 할 수 있으리라. 예컨대, 교실이란 공간과 학생과 교사란 인물, 성장 혹은 절망과 같은 이 삼위일체의 ‘학교 영화’ 모티브를 지극히 장르적으로 풀거나 서스펜스나 심리 스릴러란 장르 외피를 가져다 비인간화되어 가는 학교현장과 구성원들의 현실과 심리를 제대로 파고드는 ‘사회파’ 장르영화의 두 갈래 말이다. 올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부문에서 특별언급상이란 낭보를 타전해왔던 < 명왕성 >이 반가웠던 이유는 비단 해외 영화들과 견줄만한 ‘청소년 영화’가 드디어 출현했다는 만족감만은 아니었다. <명왕성>은 분명 장르성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면서도 실제 학교 현장에서 10년 넘게 교사로 재직한 경력의 신수원 감독의 시선이 우리네 현실에 토착적으로 깊숙이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별다른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큰 점수를 주고 싶었다. 적절한 영화적 장치의 배합과 전형성과 개성 사이를 넘나드는 두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민국 서울의 공기를 불어 넣기가 어디 말처럼 쉽단 말인가. 입시 지옥, 과도한 경쟁, 이를 부추기는 시스템과 어른들, 그 틈에서 점점 더 물들어가는 학생들. 영화 속에서 언급할 만한 것들이 이 정도였다면, < 명왕성 >은 한국영화의 유구한 전통인 ‘리얼리즘’ 사조의 범주로만 남았을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신수원 감독은 ‘아이들을 괴물로 만드는 괴물 같은 학교’에 관한 드라마로 출발했지만 ‘투자’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지금과 같이 플래시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꼬인 플롯의 스릴러 형식을 취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는 의도치 않은, 하지만 시나리오 작업이 늘상 그렇듯 ‘신의 한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명문 기숙사립고에서 전학 와 상위 10등 안에 들기 위해 발버둥치는 하층계급의 ‘준’과 이를 지키기 위해 비밀클럽을 유지하는 상류층 자재들인 ‘유진’ 패거리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두 주요 캐릭터의 변화상을 축으로 둔 이 드라마에서, 오히려 전형성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은 ‘교육 제도 비판’이란 화두 그 자체였을 수도 있다. < 명왕성 >은 그러나 식상할 수 있는 이 화두를 다른 그릇에 담으면서도 주제에 해당하는 (심리적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준과 유진의 변화상을 놓치지 않는 영리함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수원 감독이 시작부터 염두에 뒀다던 ‘학교를 폭파해 버리고 싶은 아이들’의 분노를 관객들에게 흥미롭게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더욱이, ‘토끼몰이’란 소재를 두고 가해자가 결국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인 듯했던 이가 시스템의 파괴자로 파멸해가는 결말은 반전이란 영화적 장치로 치부하기엔 훨씬 더 깊고 아픈 감정을 품고 있다. 여기에 학자들로부터 태양계에서 제외된 운명의 ‘명왕성’이란 모티브와 결부돼 이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이 비단 학교에서 그칠 수 없을 너른 보편성마저 전달해 준다. 몇몇 플래시백의 혼란함과 주변 캐릭터들의 전형성이 아쉬움으로 남을 여지가 있지만, 장르적인 특성과 주제와 두 주인공 캐릭터를 결부시키는 집중력에 비한다면 극 전체의 완성도를 훼손할 만큼은 아닌 것도 안도감을 주는 대목이다. 끝으로, 이 영화를 두고 최초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내린 영상물등급위원회의 결정은 지극히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 명왕성 >은 재심사를 통해 15세 관람가로 개봉했다). 점점 더 현실을 품은 영화와 예술 속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재단하면서 ‘판타지’와 ‘비판타지’를 이상한 잣대로 혼동하는 기관과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대중성’에 말이다. 그런 점에서, 4억으로 완성했다는 이 <명왕성>이 많은 관객들이 열광하면서 좀 더 논쟁적인 영화로 거듭나기를 응원하는 바다. ‘현실을 언급하는 영화’로서는 물론이고, 이 ‘현실을 언급한 예술’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의 반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