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상상극장]외출
오늘도 원고를 위해 영상자료원에서 받아온 시나리오를 읽으며 악전고투를 하는 중이다. 악전고투란 말은 많이 과장됐다. 하지만 첫 문단에서 같은 인물의 이름이 오일태, 오리태, 오열태로 변주되는 글을 읽고 있다면 그 정도의 표현은 써도 되지 않을까? 이 정도면 전산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라고 볼 수 있을 텐데, 6페이지에서 오일수라는 남자가 갑자기 등장해 딱 오일태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오일태와 오일수가 동일인물이기 때문이다. 원래 각본에서는 오일수였는데 민수라는 이름의 의사가 뒤에 등장하기 때문이 보다 악당스러운 이름인 오일태로 바꾼 걸까? 그래도 이렇게 큰 덩어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포스터 이 시나리오의 제목은 < 외출 >이다. 영화는 영상자료원에 필름이 보관되어 있지 않은 이만희 의 68년 작 스릴러로, 최수원 원작, 백결 각본이다. 최수원은 ‘주간한국’의 추리소설 당선작가이고 백결은 이만희의 굵직한 대표작들에서 이만희와 함께했던 파트너다. 한동안 이만희의 67년 작으로 알려졌던 <흙바람>과 이 영화는 최근에야 동일작으로 확인되었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겨우 반세기도 안 되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고고학적인 탐정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뒤져도 <외출>에 대한 정보는 얻기 어려운데, 여러 모로 아쉽다. 굉장히 재미있는 60년대식 스릴러였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은 ‘치밀함’과 연결되는 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만희의 스릴러들을 언급할 때 ‘치밀한’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스릴러는 대부분 재미있고 인상적이지만 치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치밀한 스릴러가 되려면 치밀한 각본이 따라야 할 텐데, 그의 영화 스릴러 각본은 그냥 구멍이 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앞뒤가 안 맞고 오리무중이며 논리 따위는 가볍게 튕겨버린다. 옛날 영화라서 그렇다고 우기기도 뭣한 게, 겨우 반세기 전 영화들이라니까! 그러니 있지도 않은 ‘치밀함’을 붙잡는 대신 왜 반세기 전 한국 장르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이런 비정상성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고찰해보는 게 맞다.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내가 지금 디지털 본으로 읽고 있는 < 외출 >의 녹음 각본엔 커다랗게 ‘공갈’이라고 메모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누군지 몰라도 그 메모를 쓴 사람은 이 영화의 내용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최수원 의 원작은 말이 되었을까? 모를 일이다. 내용은 무엇인가. 앞에 언급한 오일태는 거물 밀수꾼인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TNT를 품고 자폭했다. 그에겐 한 달 전에 결혼한 혜미(또는 해미?)란 아내가 있고 6개월 전에 정신병원을 나온 여자 친구 문옥이 있다. 문옥은 건강상의 이유로 자신이 결혼을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두 여자는 경찰서에서 처음 만나고, 혜미는 문옥에게 말을 걸려 하지만 문옥은 정중하게 거절한다. 오일태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문옥은 몸이 아파 약국에 들르는데 주머니에서 정체불명의 메모를 발견한다. 문옥의 독백에 따르면 오일태는 10월 15일에 죽었는데 그 메모는 10월 22일 것이다. 그게 왜 거기 있었는지, 왜 날짜가 22일인지, 내용이 무엇인지는 각본이 끝날 때까지 안 나온다. 하여간 문옥은 그 뭔지 알 수 없는 메모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 날 아침 6시 30분 김포가도 해태탑 앞으로 가는데, 거기서 오일수란 남자가 차를 옮겨 타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일수는 그냥 오일태다. 죽은 사람을 목격한 문옥은 친구인 윤 사장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만 메모는 사라지고 그만 중간에 정신을 잃는다. 처음부터 악당처럼 보였던 윤 사장은 문옥을 정신병원에 가둔다. 여기서 박민수란 의사가 등장하는데, 문옥이 정상임을 확신한 그는 문옥이 가진 정보를 이용하면 오일태/오일수가 숨겨놓은 거액의 현금을 찾아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그는 탐정질 끝에 메모의 내용을 확인하고 (문옥은 그 메모를 일기장에 끼워놓았는데 내용이 일기장 페이지에 묻어났던 모양이다. 물론 우린 여전히 그 내용이 뭔지 모른다) ‘연구실’로 들어가 오일태가 자신의 시체로 위장한 죽은 사람의 틀니 또는 ‘잇빨이’를 확보한다. 이걸 멋대로 들고 나가 어떻게 증거로 쓰고 협박을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냥 “감독이 공인한 맥거핀이니 의심하지 말고 그냥 따르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물관계도 이후로부터는 완전히 난장판이다. 민수와 그의 아내 진숙은 이 일로 협박당하고 문옥과 진숙은 납치된다. 납치당했던 문옥은 왜인지 몰라도 다시 풀려나고 민수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문옥을 죽여야 한다는데 이미 윤 사장은 정 여인이라는 킬러를 보냈고 그걸 알아차린 오일태는 분노하고, 그러는 동안 진숙과 민수는 물건 정리하는 것처럼 살해당한다. 물론 메모에 뭐라고 적혀있는지는 여전히 안 나온다. 영화가 끝날 무렵엔 오일태가 문옥을 구출하기 위해 소동을 벌이고 그와 대결하던 윤 사장은 체포되고 자잘한 악당들은 죽고 마지막에 오일태는 자살한다. 돈은 경찰에 압수당하고. 이 소란통에 혜미와 문옥은 다시 만나는데, 알고 봤더니 오일태를 밀고한 건 혜미였다. 각본을 보면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에 어떤 의미를 두려고 하는 모양인데, 솔직히 텍스트만으론 감이 잘 안 온다. 이만희 가 이 난장판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을까? 그의 다른 영화들을 보면 그랬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 외출 >이 만든 사람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신병원에 감금된 환자의 악몽과도 같은 작품으로 나왔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그 결과물을 확인하고 싶어 죽겠는데, 아마 한동안은 어렵거나 불가능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