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상상극장]고백
1971년 한국 사람들이 섹스와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영화 시나리오 한 편을 소개한다. 그러니까 나라 밖에서는 < 시계태엽 오렌지 > < 프렌치 커넥션 > 같은 영화들이 나오던 시절이다. 감독은 < 독짓는 늙은이 >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를 감독한 최하원 , 신성일 과 고은아 가 부부로 나왔던 모양이다. 당시엔 멀쩡한 사람들이 만든 멀쩡한 영화였을 것이다. 아, 제목은 < 고백 >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김현과 오지나라고 한다. 둘 다 가톨릭 신자이고 부부이고 주희라는 딸이 있다. 현은 ‘한성물산 에리뜨’ 사원이다. 영화는 이들이 금슬 좋고 행복한 부부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몇몇 클리셰들을 동원하는데 이건 소개할 필요가 없다. 현은 집 안의 인테리어를 손보기 위해 서강호라는 디자이너를 고용한다. 그런데 아내 지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서강호는 현 앞에서 대놓고 그거 이전에 지나와 아는 사이였음을 고백한다. “옛날엔 참 예뻤읍니다. (비정한 냉소) 남자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죠.” 이 대사에 대한 현의 반응은 이후 영화의 진행 방향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건 오늘 인용할 영화 대사 중 가장 덜 느끼한 것이다. “우리 집 사람은 내가 잘 알죠. 인형처럼 예쁜 바보였겠죠.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하하...” < 고백 > 포스터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알고 봤더니 지나와 강호는 옛날 연인 사이였고 (그러니까 71년 한국 사람들 언어로 번역하면 “순결을 빼앗겼고”) 심지어 지나는 강호의 아기까지 가졌었다. 회상 장면을 보니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딸이 한때 혈기로 반항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나는 곧 강호에게 진력이 났고 강호는 다른 여자와 저지른 불륜 때문에 간통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지나는 아기를 지우고 현과 결혼했다. 감옥에서 일찍 나온 강호는 지금 주희가 자기 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 딸 아이의 나이를 캔다. 조금만 계산해도 이게 말도 안 되는 의심이란 걸 알 텐데, 이 영화의 사람들은 깊은 생각을 못 한다. 강호는 지나를 스토킹하고 (한국어 사용자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90년대부터이니 당연히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게 스토킹이란 걸 모른다) 멋대로 집에 들어와 지나를 거의 강간하는 단계까지 간다. 이 정도만 해도 지나는 충분히 동정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데, 영화는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지나에게 이런 대사들을 준다. “난 미안하지만 당신에게 순결을 빼앗기지 않았어요. 그 순간 아무런 신비도 애정도 없었으니까요. 오직 고통 뿐이었어요. 그 순간 내게서 뺏은 건 순결이 아니라 하찮은 손을 벤 정도의 상처 뿐이었어요...” “남편은 내 생명의 전부예요. 남편 이외엔 난 돌처럼 굳은 석녀예요. 뭐든 누구든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추하고 더러워요!” 지나를 조건부 석녀로 만든 각본치곤 강호의 성폭행 시도 장면의 선정성은 현란하기 그지 없는데, 굳이 그 지문을 다 받아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의심하던 현도 사실을 알았다. 강호가 지나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현은 절규한다. “난 천사로 착각했었다. 천사, 천사. 그 썩어빠진 입으로 신앙을 얘기하고 인생이 가야할 바를 얘기하고 난 얼마나 병신처럼 네게 감동하고 감격했는지... 아! 위대해, 위대해!” “천사였었다, 천사!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순결과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현의 천사 타령 지금까지 아내를 천사라고 생각한 남자가 이런 일을 겪었으니 그의 다음 단계는 무엇이다? 이제 그는 바깥으로 싸돌아다니며 여자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억울했어. 여자라면 너 하나밖에 몰랐던 내가 더없이 초라해 보이드군. 여자를 샀지. 이 여자! 저 여자! 제각기 그맛이 다르다는 걸 경험했구! 당신것두 뭐 별게 아니였다는 것두 알았지.” 이러면서 그는 자기가 ‘산’ 여자들과의 경험을 하나씩 아내에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테스」스러운 상황은 멎을 줄을 모른다. 그는 계속 돌아다니면서 여자들을 만나는데 그 중엔 은아라는 여자 대학생도 포함되어 있다. 섹스신이 꽤 긴데, 여기서 중점이 되는 것은 역시 은아가 현에게 ‘순결을 주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아내와 섹스를 거부하는데 나중엔 아내의 옷을 벗기더니 “그놈에게 했던 것처럼 해줘!”라고 떼를 쓰다가 결국 아내를 구타하고 강간한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부부간 강간의 개념이 없었으니 이게 강간인지도 몰랐지만. 결국 현은 가출한다. 영화도 절반을 훌쩍 넘겼으니 슬슬 나는 현이 정신을 차리길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긴다. 하지만 암만 기다려도 현은 개선의 기미가 안 보인다. 억울함은 멎을 줄을 모르고 방탕함은 끝이 없다. 여기엔 또 은아의 친구인 명지를 꾀어서 자는 장면도 꽤 길게 그려져 있는데, 아마 최종 영화에서는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간 그의 여정의 절정은 세상 모든 여자들에 대해 쌍욕을 퍼부어대는 장면인데 굳이 그걸 받아적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누구 좋으라고. 그래도 어떻게 이야기가 마무리 되긴 한다. 당연히 결말은 현이 각성을 하고 지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현이 저지른 일들을 보자. 과연 이 사람이 자신과 딸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가? 나로서는 지나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로 잡고 다른 상대를 찾길 바랄 뿐이다. 아무리 70년대 한국이라고해도 현보다 나은 남자는 얼마든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