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9)은 비교적 덜 고전이다. 이점이 신경 쓰이지 않은 건 아니다. 가까운 시대의 작품으로 아직 친화성을 갖고 관객의 뇌리에 남아 있다면 구태여 다시 힘주어 여기서 거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차례 생각해봐도 결국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커서 이 작품에 관해 말하게 됐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데뷔작 중 하나로 기록될 <달마..>은 2006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영화 100편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걸작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불운한 일이다. 배용균 은 < 달마.. >과 <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1995) 두 편을 만든 뒤 홀연히 영화계를 떠났고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글쎄요 미국에서 명상 수련을 하고 계시다는 얘기까지는 들었는데..지금은 저도..제가 근황을 모르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지요”. 언젠가 배용균 감독에 관해 물었을 때 그의 절친한 제자이자 지난 시절 조감독이었던 김동현 감독이 들려준 소식이다. 오랜 작업 기간을 요하는 완벽주의(<달마..>을 완성하는 데는 4년이 걸렸다). 제작, 감독, 촬영, 각본, 미술, 편집 등을 혼자 다 하는 괴력의 1인 제작 방식. 그리고 귀족적 풍모와 은둔적 기질. 배용균에 관한 이런 전설적인 일화가 여전히 뜨거운 기억 속에서 종종 회자되고 있지만 그의 영화적 지평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은 어딘지 화석화된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오해와 진실 나 역시 이 영화를 너무 오랫동안 다시 보지 않고 있었으며, 이번에 보니 그동안 내가 몇 가지 잘못된 인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그게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다. < 달마.. >은 사실 소름끼칠 만큼 정교한 영화는 아니다. 배용균 의 완벽주의에 대한 풍문이 영화에 관한 그런 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보다 이 영화는 거칠다. 그런데 거친 것이 흠이기 보다 어떤 강인한 정신성의 반영처럼 보이는 이유는 웰 메이드 강박증에 빠지지 않고 자기가 선택한 테마를 감싸 안으려는 필사적인 태도로 영화를 찍어 냈기 때문이다. 한편 배용균의 영화는 곧 롱테이크의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의 기억력이 얼마나 잘못된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지를 알고 당신은 또 당황하게 될 것이다. <달마..>은 곧 예술영화, 예술영화는 곧 롱테이크, 라는 관습적인 추론은 이 영화에 맞지 않다. 오히려 이 영화는 예상외로 빠르고 느린 호흡의 이중무를 춘다. < 달마.. >이 담백한 수묵화 내지는 자연주의적 필치만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 영화에서 강력한 매력으로 새삼 눈에 들어오는 건 주인공이 번뇌할 때 그를 둘러싼 자연이 위협과 보호라는 이중의 자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사바세계의 낡은 기억과 갈등이 용맹정진하려는 불자를 괴롭힐 때, 여기에 어떤 번뇌의 음산함이 스며든다. 그걸 배용균 은 구도자의 안간힘과 그들의 주변에 출몰하는 초현실적 환영과의 마주침으로 그려낸다. 그러니 산천은 풍요로운 정물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귀기가 흐르는 정령의 산신들로 순식간에 바뀌어 보이곤 한다. 정확히 배용균은 다음 작품 <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에서 후자의 이미지를 더 밀고 나간 것이다. 배용균 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어린 동자승 해진, 속세를 등지고 출가한 젊은 스님 기봉, 해탈의 경지에 이른 노스님 혜곡을 오가며 비춘다. 무슨 곡절이야 있을 리 없다. 동자승은 외로워 친구로 삼으려다 실수로 새 한 마리를 살생한 뒤 괴로워하고, 기봉은 속세에 두고 온 앞 못 보는 어머니와 가난한 누이 생각에 번뇌한다. 노스님 혜곡은 그들에게 늘 강직하고 지혜로운 깨달음과 화두를 던져주지만 기봉이 화두를 풀기 전에 입적하여 산천에 뿌려진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 라기 보다는 이 세 사람의 수행의 일지라고 이 영화는 불려야 할 것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유독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기봉이 노동을 잠시 멈추고 속세를 생각할 때 뒤따르는 몇 개의 풍경 인서트와 아버지의 초상화 클로즈업은 기이할 뿐 아니라 역사적인 느낌까지 준다. 동자승 해진이 살생에 괴로워하다 문득 소를 만나 뒤따라가게 되는 장면은 분명 잘 알려진 <십우도>의 이야기지만 그걸 보여주는 리듬이 괴이하다. 혹은 산에서 인물들을 보여줄 때와 도시에서의 인물들을 보여줄 때 배용균 은 다른 방법을 쓴다. 배용균의 네오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장면인데, 시장터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 법복을 입은 배우 기봉을 던져 놓고 카메라는 어딘가 숨은 채 본다. 그 화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진짜이며 그들 사이에서 기봉 역할의 배우만 연기한다. 엑스트라를 모으기 힘들어 이런 방식이 구상됐을 수 있지만 실재와 영화의 한 장면이 섞이는 당시로는 비범하고 낯선 경험이다. 단단한 상징과 비유의 영화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상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많은 장면들이 있다. 그걸 영화적으로 고민했고 인정받아 마땅한 성과를 올렸다. 또는 서사적으로 전혀 설명될 수도 없고 진전될 수도 없는 인물들의 마음 속 번뇌를 다룰 때 더 이 영화의 가치가 빛난다. 어떻게 영화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저 중생의 안간힘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고심하고 또 한다. 그 때문에 카메라는 종종 인물이 하는 말이나 행동에 상관없이 마치 마음이 부유하는 것처럼 스스로 정신의 반영이 되어 움직이고 또 편집되어 간다. 그걸 영화적 순간으로 끌어내려는 이토록 강렬한 추구가 한국영화사에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 이후로 배용균 의 영화작업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더라면, 우리는 단단한 상징과 비유의 영화 그리고 기묘한 멘탈 시네마(정신의 영화)라는 희귀한 한국영화의 길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걸 못 봐 안타깝다. 그는, 왜, 떠났을까? 사람들은 배용균 이 어쩌면 돌아올지 모른다고 자주 말하는데 개인적으로도 그의 귀환을 소망한다. 그리고 < 달마.. >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그걸 소망해도 된다는 강력한 믿음의 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