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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연재]기차 밖의 타자들, 그들은 희망인가? - <설국열차>와 <부산행>, <스테이션 에이전트>까지
‘기차 영화’ < 오리엔트 특급살인 >처럼 기차를 무대로 한 영화들은 하나의 장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공간 자체가 내용을 장악한다. 출발과 도착, 한 방향으로 계속 달리는 기계, 체인으로 연결된 차량들, 사건이 벌어지고야 마는 화장실, 마지막 칸, 물러설 수 없음, 절대로 왔던 길(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 기차 영화는 대개 불온하다. 스릴, 총싸움, 살인, 범인 잡기……. 기차 밖도 마찬가지다. 나가봤자 허허벌판이다. 좁은 공간에서 무기는 효율성이 다르다. 어떤 무기가 유리할까. 분명한 것은 기차 칸에서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다. 전통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은 결국 무기전”이라고 하지만, 기차 안에서는 첨단 무기가 승부를 결정짓지 않는다. 코앞의 단도나 야구 방망이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소지품이 무기가 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기차의 가장 큰 의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데 있다. 철도와 기차는 근대 자본주의의 기본 인프라이자 근대성을 상징한다. 기차는 물자 수송과 인간의 이동,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기차 시간은 정확해야 한다. 승객은 제시간에 기차에 승차해야 한다. 10초도 늦어서는 안 된다. 숨이 차도록 기차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우리 자신도 경험했다. 비행기의 지연 출발, 착륙은 흔한 일이지만 기차는 그렇지 않다. 기차를 놓쳐본 이들은 알 것이다. 인간이 아직 하늘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지상은 장악 가능했음을 의미한다. 기차 시간의 정확성은 한 사회의 발전과 기술, 질서를 의미한다. 에릭 홉스봄이 적었듯이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가 시간에 왔다”(나중에 이 말은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되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기차로 시작된 근대 근대 전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절멸전(絶滅戰), 대량 학살인데, 이는 인간의 의지(will)가 인간성을 어디까지 변형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히틀러가 자살 직전 마지막에 한 말은 “이것이 내 의지다!”이었다. 우리의 개발 독재 시대의 슬로건 역시 “하면 된다.”였다. 지금도 “하면 된다”고 하는 이들이 없진 않지만, 인간의 의지는 질주하는 자본주의 구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안다. 인생은 해도 안 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인간의 의지, 불굴의 의지, ‘그놈의 의지’……. 나는 인간의 의지가 개인과 사회를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저, 사는 만큼만 생각하면 된다. 홀로코스트. 하나의 질서만 유일한 진리가 되는 보편성(uni/versal)의 폭력이 실제로 실현된 대량 학살이다. 프리모 레비의 시 「기차는 슬프다」는 이를 정확히 표현한다. 첫째 연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 더 슬픈 게 있을까? /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짧은 기간이지만, 인간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근대적 사고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 개념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다. 인간(백인 남성)은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하여 미래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구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적 진보(progress)의 개념이다(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와는 다르다). 단수(單數)의 시간.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적 시간관과 단수의 주체가 시간의 기준을 제시한다. 개별적 인간의 상황마다 ‘10분’의 의미가 다를 수 있는데, 백인 남성 비장애인의 시계를 중심으로 삼아 객관적 시간 개념이 설정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처럼 행복한 시간과 지루한 시간은 그 길이가 다르다. 고문당하는 10분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같겠는가. 시간은 척도가 아니라 경험이다. 농촌의 시간과 도시의 시간은 다르다. 장애인의 시간과 비장애인의 속도는 다르다. 이런 차이가 무시되고 누군가의 시간이 기계적으로 설정되고(시계), 사람들은 속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발전, 추격, 100미터 달리기, 문명과 야만, 최연소의 성취... 물론 가장 끔찍한 ‘야만’은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the spatialization of historical time). “한국은 미국의 80년대다.”라는 식으로 각 지역의 발전 차이를 문명화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서구를 기준으로 놓고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국제 사회의 위계를 만들어, 이는 인종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설국열차 근대성의 교과서, < 설국열차 > 봉준호 감독이 타고난 재능과 훈련, 지성을 모두 갖춘 예술가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 만들기를 ‘마스터’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의 첫 장편영화 < 플란다스의 개 >를 가장 좋아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무정형의 영화다. 패턴이 없다. 걸작이라는 얘기다. 영화는, 그 영화에서 화제가 되었던 ‘김뢰하처럼’ 생겼다. 이후 < 살인의 추억 >, < 괴물 >, < 마더 >, <설국열차>, 레오 카락스, 미셀 공드리와 함께 한 옴니버스 영화 < 도쿄! >(일본의 히키코모리를 다루었다)까지, 봉준호는 소위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그는 위 영화들에서 근대성의 주제들을 섬세하게 공들여 변주한다. 좌우를 초월한 남성 연대(그런 면에서 <살인의 추억>과 <설국열차>가 가장 비슷하다), 괴물적 모성, 오염 메타포,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구조적 파국. 특히 숙주(宿主)와 기생충. <괴물>의 영어 제목은 ‘The Host’였다. 2019년 <패러사이트(para/site, 영어 어원으로는 같은 장소에 있다는 의미, 우리말은 ‘기생충’)>를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니, 연작의 완성인 셈이다. 숙주와 기생충은 대립하는 생물이 아니라 공존 관계다. 앞서 말한 그의 영화들은 모두 근대성의 공식에 충실하다. 원작 탓일까. <설국열차>가 가장 노골적이다. 나는 그 영화를 어떤 ‘어른’을 모시고 봤는데, 옆자리에서 나는 다음 장면을 중계했다. 한 장면만 빼고, 다 ‘맞추었다’. 그는 내가 “천재”이거나 영화를 두 번 보았다고 주장했다. 나는 단백질 바(bar)의 원료가 바퀴벌레인 것도 알았다. 바퀴벌레는 영양이 풍부하고, 깨끗하며, 물 한 방울만으로도 몇 달 동안 생존이 가능한 강력한 생명체다. 단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에 오염의 매개체여서 사람들이 질색할 뿐이다. 내가 예상치 못한 장면은 공동체와 리더십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부정의와 연관이 있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에게 지도자의 역할이 요구되자, 그는 사양한다. 공동체를 위해 투쟁하다 장애인이 된 사람도 있는데, 온몸이 멀쩡한 자신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반대다. 이곳은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상이용사’든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든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 그들은 ‘재수 없는 피해자’이거나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다짐케 하는 반면교사이거나 ‘민주화 운동 경력을 팔아 국회의원을 노리는 이들’이다. 반민특위서부터 일상화된 한국의 부정의한 일상의 근대사다. 한국은 살아남는 것, 더 잘사는 것이 유일한 가치인 나라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생존자는 소녀, ‘흑인’ 소년, 동물(곰)이다. 이들은 근대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희망을 상징한다. 지구의 미래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구를 망치는 데 앞장선 이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미래의 희망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은, 현재를 주도하는 주체의 타자라는 얘기다. 한국의 녹색당에서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탈핵을!”이라는 구호에 대해 고등학생 당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어른’ 당원들은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등학생들은 왜 자신들을 현재의 동반자가 아니라 어른의 관점에서 ‘미래’로 정의하느냐며 항의했다.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구호는 “지금, 당장, 우리 모두를 위해 탈핵을!”이다. 자신들을 타자화하지 말라는 얘기다. <설국열차>나 녹색당의 ‘어른’들은, 타자를 정의하고 보호하는 주체는 성인 남성임을 자임한다. 그들은 재현의 주체이지, 재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10대들은 말한다. “우리는 당신의 미래가 아니야, 당신의 관점에서 우리를 정의하지 마” MB 시대의 ‘조현오’가 만들어낸 좀비, < 부산행 > 스티브 연이 출연한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걸어 다니는 시체)>는 내게 난독 증을 일으킨다.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지칭하는 말 중에, ‘리빙 데드(living dead, 살아 있는 시체)’가 있는데, 죽을 만큼 고통스러우나 죽지 못하는, 그래서 자살만이 치료인 이 병의 특성을 표현한 단어다. 우울증과 좀비 상태는 삶과 죽음의 중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좀비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의 반영이다. 괴로운 상태지만 죽지는 않는.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끔찍한 상태는 없다. ]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아름다운 좀비 영화도 많다. 나는 좀비 영화 중에서 조시 하트넷이 나오는 2007년작 <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30 Days of Night)>를 가장 좋아한다. 아메리카 최북단 도시인 알래스카의 배로우는 매년 겨울이면 30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화면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어둠과 추위 때문에 더욱 아늑해 보이는 도시, 카페들, 좀비가 나타날 때마다 흰색 눈 위에 뿌려지는 선연한 붉은 피, 눈 내리는 거리의 가로등……. 영화를 보다 보면 30일이 지나서 해가 뜰까 봐 걱정일 정도다. 그런데 대개의 좀비 영화는 신체 변형의 공포를 활용한다. 피와 근육이 질척인다. 좀비를 두 종류로 나뉜다면 무한 증식하는 좀비와 그 숫자가 그대로 유지되는 좀비다. 감염, 오염, 흡혈 따위로 증식하는 좀비 영화에서는 극소수만 남게 된다. 최근 좀비 영화를 신자유주의 체제의 생존 법칙과 연결하여 분석하는 소위 ‘좀비 사회학’이 인기인데, 인간은 모두 좀비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을 보면서 이명박 시대를 이렇게 비판할 수 있는 영화가 또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행>에서 좀비가 되는 방식은 오염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 그럴 힘도 없다 - 상대방을 나랑 같은 처지로 만드는 것이다. MB 시대의 정신을 체화한 ‘MB 캐릭터’는, 이 영화의 최고 악역( 김의성 분)이 아니다. 그는 평범한 생존자다. 문제는 그 이상(以上)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MB 시대의 대표적 모델은 전 서울 경찰청장 조현오 씨다. 그가 저지른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등은 MB가 ‘지시’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MB는, 아예 그런 문제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다. 이 사건들은 조현오 개인의 과잉 충성의 결과였다. MB 캐릭터의 특징은 최소한의 근대적 인간관을 갖추지 못한 데다, 실력은 없으면서 셀럽 욕망이나 권력욕에 미친 사람들이다. 진보 진영과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다. 무식과 뻔뻔함은, 이들이 장착한 최고의 만능 아이언맨 슈트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실력이 있으면 굳이 비윤리적이지 않아도 되는 능력주의 사회다. 이들은 실력이 없으므로 한편으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편으로는 극도로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들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은 인생의 낭비다. 이 시대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약자가 사는 방식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최고의 자살률은 수치심을 버린 자들이 휘두른 자상의 결과다. 인사불성(人事不省) 상태에서 부끄러움 없는 사람의 활기(活氣)는, 그 자체로 흉기다. 한 마디로, 지금 이곳은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다. 정의는커녕, 의리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 평범한 사람도 오염된다. 오염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한국 사회를 기차 안에 압축해 두고 모두가 나쁜 사람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는 과정이 이보다 현실적일 수 있을까. 다시 쓴다. 이 영화는 보통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과정을 그린, 몸서리쳐지는 영화다. 다른 선택은 없다. 오염의 주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주인공 공유 나 마동석 도 구원받지 못하며, 나쁜 세력의 승리에 제단에 바쳐진다. 이 영화에서도 부정의에 오염되지 않을 두 명만 남겨준다. 역시 여성( 정유미 )과 아이( 김수안 )다. 이 영화를 부성 영화로 보는 것은 넌센스다. 스테이션 에이전트 < 스테이션 에이전트 >의 ‘난쟁이’ 그는 타자인가, 진정한 친구인가 <스테이션 에이전트(The Station Agent>(2003)의 주인공 핀은 내가 꿈꾸는 삶을 산다. 동네에 버려진 기차 한 칸이 그의 집이다. 관리해야 할 물건이 없는 간소한 삶. 우리에게도 익숙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장애인(난쟁이)’ 배우, 피터 딘클리지(Peter Dinklage)와 폴 벤저민(Paul Benjamin), 퍼트리샤 클라크슨(Patricia Clarkson)이 나온다. 토머스 매카시(Thomas McCarthy) 감독의 <스테이션 에이전트(역장)>는 그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각본상(감독이 직접 썼다)과 관객상을 받았다. 조용한 마을, 평범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핀을 좋아한다. 그와 차를 함께 마시고,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가족과 싸우고 연인과 헤어지고 갈 곳 없는 이들이 간혹 그의 기차 칸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핀은 마음씨 좋은 신부님, 의지할 수 있는 마을의 상담자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다. 왠지 나는 성별과 ‘외모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역할에 강하게 동일시했다. 나는 꼭 그였다. 나도 핀과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과 ‘같지 않다’. 그는 마을의 살짝 외곽, 숲 근처에 살고 있다. 그의 존재는 궤도 밖에 있다. 마을 사람(여성)들은 그를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먼저 그를 찾지, 그가 먼저 원하는 경우는 없다. 만일 그가 먼저 사람들을 원한다면, 관계의 법칙은 깨질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무언가 결핍이 있는 존재이고,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동경해 본 적이 없다. 주변 지인들은 내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해준다’. 그러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그들과 동급이 아니다. 나 역시 어떤 부분에서 ‘장애인’이어서, 그들 인생의 경쟁 상대가 아닌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핀(역장)을 편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과 같을 수는 없는 사람들, 자기 기준에서 ‘차이(모자람)’가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외이며, 편안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타자(他者, the others)라고 부른다. 타자는 억압받기도 하지만, 유사 종교적 존재로 존중받기도 한다. 지배와 피지배, 속(俗)과 성(聖),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서 모두 후자이되, 긴장이 덜하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이 만든 타자지만, 사람들은 그를 낭만화하고 신비화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타자의 위치에서 탈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의 관계 원리는 ‘나는 너와 다르고, 그것은 내가 결정한다’이다. 장애인으로 규정당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느 정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그들의 규범에 괴로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과의 차이의 문제를 글로 쓸 수도 있다.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이니까. 감독들은 왜 다들, 그토록 주체인가 근대성이라는 기차는 처음부터 균불등 발전을 의미했다. 이제는 불균등 발전은 극단의 양극화를 넘어, 지구 자체가 망하게 생겼다. 트럼프 같은 인간도 패닉 룸(반공호)을 잃을 판이다. 기존의 근대성을 고수하면 모두가 망한다는 진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자국의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아프리카 땅을 마구 사들이는 중국, 전쟁주식회사는 의뢰인에게 돈 대신 받는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는다. 가만히 앉아서 물과 식량을 잃는 사람들, 매일 매일의 내전, 피 묻은 다이아몬드, 녹아버리는 거대한 빙하, 죽은 고래 몸 앞에 든 80킬로그램의 비닐, 바다 위에서 사라지지 않은 스티로폼 부표, 고용 없는 성장……. 이제 기차는 계속 달릴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이제까지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던 여자, 아이, 자연, 장애인들을 기차 밖에 살게 하거나 생존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은 진정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여성과 아이, 동물은 오염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 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주체의 전복과 파괴, 변형이 상상력이다. 작품마다 자신을 부수는 소설가 정찬은 그의 걸작 「슬픔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 외부 필진의 원고는 영화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영춘, ‘위반’의 코미디언
서영춘(1928~1986)은 구봉서, 김희갑 보다 다소 늦게 연예계에 등장했다. 서영춘은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다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형 서영은의 도움으로 1952년에 데뷔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쇼 무대의 사회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백금녀를 만나 코미디 콤비를 이루면서 ‘뚱순이와 갈비씨’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후 라디오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누리게 되었다. 코믹한 연기력과 뛰어난 순발력, 거침없는 언변으로 수많은 유행어를 만들어냈던 서영춘은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이었다. 서영춘은 1961년 <인생갑을병>으로 영화에 데뷔한 뒤,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스타덤에 올랐다. 1965년 6월 개봉한 <여자가 더 좋아>는 이례적으로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상영되면서 19만의 관객을 동원, 그 해 최고의 인기작이 되었고 이 영화의 인기를 바탕으로 서영춘은 명실공히 원톱 주연이 가능한 최고의 코미디 스타가 되었다. 뒤이어 각종 라디오와 영화에서 서영춘의 겹치기 출연이 이어졌다. 이 시기부터 서영춘은 라디오, 영화, TV와 각종 무대에서 존재감을 발하며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1)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포스터. 서영춘을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영화로, 여장을 한 뒤 우여곡절 끝에 성정체성을 발견하게 된 서영춘이 성전환 수술을 받는다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965년 최고의 인기작이자 서영춘의 대표작이 되었다. 한편, 서영춘은 ‘저질 코미디’ 논란에 시달리는 대표적인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일례로, 1965년 12월 27일, 중앙라디오방송의 <다이아몬드 스테이지>라는 프로그램 중 한 코너인 ‘하꼬바꼬 요리강습’에서 서영춘은 파리로 국을 끓이는 법을 소개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66년 1월에 열린 방송윤리위원회의 정례위원회는 서영춘의 출연정지 1개월을 의결했다. 저속하고 품위 없는 코미디를 했다는 이유였는데, 중앙라디오방송에서는 그것이 서영춘의 탓이 아니라 각본을 쓴 작가 최휘로의 문제였다고 변명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각본과 코미디 실연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서영춘의 출연 정지를 재가결했다. 이듬해 9월 서영춘은 또 다시 경고처분을 받았다. <다이아몬드 스테이지>에서 품위 없는 언동의 저속한 코미디를 했다는 것이었다. 1967년에도 역시 같은 방송에서 “우리말을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언어순화에 역행”하고 “청소년들에게 저속한 유행어를 전파”시키는 품위 없는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경고처분을 받았다. 이처럼 서영춘은 활동 기간 내내 라디오와 영화, 방송에 걸쳐 각종 감시와 제재에 시달렸다. 사생활에서도 서영춘은 공권력과 잦은 마찰을 빚곤 했다. 애초에 서영춘은 구봉서처럼 전형적인 ‘가부장’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거나 얌전하고 모범적인 이미지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방송 이외에도 여러 차례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1965년 10월 경찰의 날 행사를 둘러싼 소동이었다. 이 날 사회자로 섭외되었던 서영춘은 40여 분을 지각했다. 각급 경찰 간부를 비롯하여 내무부 장관까지 참석하는 행사에 서영춘이 나타나지 않자 30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긴급수배가 내려졌다. 다행히 그로부터 10분 뒤 도착하여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나자 이번에는 화가 난 종로 경찰서장이 그를 사기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서영춘은 형제까지 연루된 폭행사건 및 경찰 치사 사건 등 다양한 사건사고로 가십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이처럼 서영춘의 통제 되지 않는 성격, 금기를 깨는 막말과 눈치 보지 않는 코미디 스타일 등은 1960년대 후반 <팔도강산>의 아버지의 페르소나 그 자체가 되어버린 김희갑이나 그 자신 ‘건실한 사회인’이자 ‘가부장’으로의 이미지를 일찌감치 획득했던 구봉서의 코미디 스타일과 같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서영춘 코미디에 대한 제재가 지속되던 시기,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코미디의 저속함을 비판하고 나섰다. 먼저 1964년 방송국에서 코미디언 전속제가 시행되면서, 코미디의 수준이 점점 저하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코미디는 방송을 건전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 별로 보탬이 되지 않고 청취자의 말초신경이나 허파를 자극하는 걸로 만족해온 실정”인데, 코미디언 역시 “영화, 무대, 방송 등을 누비면서 같은 소재를 재탕삼탕 울거먹는다”는 것이었다. 1965년 5월 신아일보의 기사는 코미디언들이 때를 만나 TV, 라디오, 영화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지만 “저급한 대사가 아니라 독창성으로” 웃음을 줘야한다면서 작금의 코미디가 수준 이하의 것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66년 9월 15일 《서울신문》 기사에서는 방송의 저속화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코미디라고 단언하면서, 코미디가 청취자의 “가치판단과 생활 윤리까지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또한 “어느 프로보다도 청취자들에게 강렬한 자극과 영향력을 끼치는” 코미디 프로의 정화가 이루어져야 방송 전체의 정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가 요약하는 라디오 코미디프로그램의 특징은 “조잡한 말의 나열과 불순한 상상력의 동원”, “저속하고 무가치한 언어”의 나열, “쓴 웃음을 자아내는 애드립”, “기성(奇聲)의 연속”, “아이디어의 빈곤”, “위트 이하” 등이었다. 기사는 더 나아가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신진 코미디언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응급조치로는 “저속의 낙인이 찍힌” 코미디언을 퇴출해야하며 코미디프로 역시 정지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했다. 라디오스타 서영춘의 코미디는 이처럼 초기부터 저속논란에 시달렸다. 그러나 “저속”하고 “무가치”하며 “조잡”하다고 혹평 받는 서영춘의 코미디는 점차 팬덤을 형성했고 서영춘은 이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라디오와 악극 무대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로 진출하면서부터 대부분 비중 있는 조연이나 주연을 맡았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 서영춘은 거의 단역에 가까운 역할부터 시작했다. 그의 데뷔작이었던 <인생 갑을병>부터 서영춘은 <싸우는 사자들>(김묵, 1962), <안개낀 거리>(강범구, 1963), <어머니 울지 마세요>(전홍직, 1964), <눈물의 자장가>(최훈, 1965)에 이르기까지 20여 편에 가까운 극영화에서 엑스트라급 조연을 맡았다. 이 시기에는 코미디영화보다는 여타 장르 영화에서 단역 혹은 조연을 맡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당시 인기 코미디 배우였던 구봉서가 주연을 맡았던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와 로맨틱 코미디 <총각김치>(장일호, 1964) 정도가 서영춘이 출연했던 코미디영화였다. <여자가 더 좋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까지, 영화에서 서영춘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사진2)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 스틸.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를 리메이크한 심우섭 감독의 1983년 영화에서 서영춘은 여장남자 식모인 강태기를 짝사랑하는 노인 역으로 출연했다.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며 위반의 쾌락을 선사했던 1965년의 영화와 달리 1983년의 영화는 그야말로 ‘건전’하고 ‘상식’적인 교훈극에 가까웠다. 서영춘이 영화 스타로 거듭났던 것은 <여자가 더 좋아>의 흥행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라디오스타’로서 서영춘의 인기가 한층 성장했던 시기도 1965년이었는데, 영화에서도 서영춘은 비중 없는 단역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영화에서 늦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서영춘은 1965년을 기점으로 전성기에 접어들어 한 해에만 35편의 영화에 주, 조연으로 출연했다. 물론, 더 이상 단역이 아닌 ‘비중 있는 조연’ 혹은 당당한 주연으로서였다. 그 중에서 단연 서영춘의 주가를 올렸던 것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이 영화는 1965년 최고의 화제작이자 그해 흥행 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여장남자’ 코미디의 붐을 일으켰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서영춘의 영화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진3) <큰 사위 작은 사위>(이봉래, 1965) 포스터. 1964년까지 주로 조연을 맡았던 서영춘은 포스터에 얼굴이 실린 적이 없었다. 1965년부터 비로소 포스터에 서영춘의 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과 함께 큰 비중 없는 조연을 맡았던 서영춘의 얼굴이 포스터 한 켠에 그려져 있다. (사진4)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김화랑, 1965) 포스터. 정면을 바라보는 서영춘 고유의 코믹한 표정, 연민이 느껴지는 표정의 김희갑의 살짝 옆으로 돌려진 얼굴, 김희갑 얼굴 옆 제목의 배치 등으로 인해 조연이었던 서영춘이 주연 김희갑보다 조금 더 중심 인물로 보인다. <여자가 더 좋아>의 성공으로 서영춘은 영화계에서도 원톱 주연이 가능한 스타 배우가 되었다. 스타덤에 오른 코미디 배우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성공담을 가상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 보여주는 영화들이 제작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김희갑의 <김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 배삼룡의 <나의 인생고백>(심우섭, 1974), 이후 이주일의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등이 이런 계열의 영화들이었다. 서영춘의 경우에는 1965년에,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대부분 악극단 출신이었던 이 코미디 배우들의 성공담은 시골 출신의 코미디언들이 우연히 악극단에 들어가게 되고 갖은 고생 끝에 스타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 배우들은 자신들의 특기와 코미디 레퍼토리들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었고,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구성을 통해 한층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사진5)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화려한 악극단의 뒷모습, 시골 출신 코미디 배우의 인생 역전, 각 코미디 배우들의 장기를 한층 살린 ‘스펙터클’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 등이 이 ‘가상의 전기 영화’들이 가진 특징이었다. 서영춘의 ‘성공담’을 엮은 <출세해서 남주나> 역시 이런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렇게 성공한 코미디 배우의 대명사가 된 서영춘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6년 동안 8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서영춘은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들에 출연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외화 <007> 첩보 시리즈를 패러디한 <살사리 몰랐지>(일명 <007 폭소판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요절복통 007>(김대희, 1966), <기상천외>(김대희, 1967) 등이었다. 서영춘은 이 영화들의 주연을 맡아, 한국 코미디 첩보물을 개척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6)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 포스터 (사진7)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의 서영춘 (사진8)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의 한 장면. 탐정소설 매니아인 보석점 직원 서영춘이 우연한 기회에 007처럼 첩보원이 되어 마약밀매법 일당을 소탕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자신의 유행어인 ‘살사리 몰랐지?’를 매 에피소드마다 연발하며, 자신의 코미디 레퍼토리인 여장하기, 권투 시합 등의 장면을 통해 웃음을 이끌어냈다. 한편, <살사리 몰랐지>에서처럼, <여자가 더 좋아>의 성공 이후 서영춘이 주연인 코미디영화들에서는 서영춘의 여장이 주된 플롯의 장치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김화랑, 1966)이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가 대표적인 영화였다.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은 일종의 <시집가는 날>의 패러디로,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부잣집 바보 도령(김희갑)에게 시집가게 된 주인댁 딸을 대신해서 결혼하는 머슴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김희갑과 서영춘의 결혼생활이 유발하는 웃음의 코드는 <내 것이 더 좋아>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내 것이 더 좋아>는 가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안고 시골에서 상경한 성춘(서영춘)이 우연히 만난 봉수(구봉서)의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부부 행세를 하고 각종 소동을 벌이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세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검열 이후의 (조건부) 상영허가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개봉한 영화로, 서영춘 코미디의 ‘불온함’이 잘 드러난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사진9)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김화랑, 1966) 포스터 (사진10) <내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의 한 장면. 목욕탕에서 쫓겨난 서영춘 (사진11) <내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의 한 장면. 미용체조를 하는 서영춘.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혼자 있을 때도 풀메이크업의 여장을 하고 몸매를 가꾸기 위한 미용체조에 열중하는 등 성적 혼란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 서영춘은 주로 구봉서 주연의 코미디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영춘은 구봉서와 짝을 이루어 ‘남자 시리즈’나 ‘팔푼이 시리즈’ 등에서 조연으로 등장하여,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 과제에 서민 대중의 욕망을 투사했다. 구봉서가 항상 성공적으로 취업과 결혼이라는 임무를 완수하고 ‘정상적’인 중산층 가정의 윤리를 구현하는 ‘가부장’으로 거듭나는 인물을 연기할 때, 서영춘은 그의 곁에서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성실하고 우직한 구봉서에 비해, 한결 약삭빠르고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서영춘은 그럼에도 과히 밉지 않은, 평범하면서도 속물스러운 서민 대중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했다. <단벌신사>(김기풍, 1968)에서 친구 구봉서의 복권을 탐내는 도어맨,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에서 또 다른 가짜 미용사로 변장해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되돌리려다 결국 결혼식장에서 버림받는 세탁소 직원, <번지수가 틀렸네요>(심우섭, 1968)에서 사장 딸인 줄 알고 접근하여 결혼을 약속하게 되지만 사실은 식모였음을 알게 된 수위(물론, 사장 딸은 구봉서와 결혼하게 된다.), <요절검객 팔도검풍>(김기풍, 1969)에서 생계가 어려워 가짜 장군을 사칭하고 다니다 우여 곡절 끝에 진짜 산적을 잡게 되고 진사 댁의 식모와 맺어지는 검객(물론, 여기서도 진사 딸은 구봉서와 결혼한다.) 등 서영춘의 캐릭터들은 성공의 ‘일보직전’에서 약간의 패배와 함께 약간의 좌절을 맛보는 인물이었다. (사진12) <단벌신사>(김기풍, 1968) 포스터. 구봉서의 단벌양복과 복권을 탐내는 친구 서영춘 (사진13)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에서 가짜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그리고 진짜 앙드레 곽규석(가운데) (사진14) <번지수가 틀렸네요>(심우섭, 1968)에서 사장 딸 행세를 하는 식모에게 속아 넘어간 수위 서영춘 (사진15) <요절검객 팔도검풍>(김기풍, 1969) 포스터. 가짜 검객 구봉서와 서영춘의 억울한 민중 구하기가 펼쳐진다. 1960년대 후반 근대화의 뒷길에 놓인 서영춘의 캐릭터는 혹독한 삶의 조건 속에서, 여장이나 변장과 같은 속임수가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도시 변두리의 떠돌이들이었다. 구봉서와는 달리, 처음부터 서영춘은 지켜야 할 가족이나 도와야 할 동생이 있는 ‘가부장’의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좀 더 가벼운 몸놀림으로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불타는 생존욕구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변장을 하는 것은 그에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영춘 캐릭터의 실패는, ‘정상성’이나 ‘사회적 규범’을 포기한 데 따른 일종의 징벌과 같은 것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죄책감 없이 ‘가학’적 쾌감을 만끽하게 했다. 그런 한편, 서영춘의 거침없는 언변,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애드립, 기괴하고 과장된 표정과 슬랩스틱에 적합한 신체는, 점차 경직되어 가던 사회적 분위기와 국가의 규율 안에서 ‘해방감’을 주는 위반의 쾌락을 선사했다. 이런 점에서, 잘 짜여진 스토리와 닫힌 결말, 교훈을 주는 메시지를 선호했던 한국의 코미디영화 안에서 서영춘은 주연보다는 조연에 더 어울리는 배우였다. 코미디영화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당시에도, 서영춘은 항상 좋은 악극 무대를 기획하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악극단 시절부터 쇼와 만담, 사회 등 단편적이고 버라이어티한 구성에서 강점을 보였던 서영춘은 1960년대 말, 코미디언으로는 처음으로 시민회관에서 단독 리사이틀을 기획하여 코미디 쇼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소비되었던 ‘서영춘’이라는 캐릭터 안에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코미디로, 그 자신만이 주연인 쇼를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코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서영춘 역시 텔레비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1년 8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이 마지막 다작으로, 1972년 이후부터 1979년까지 총 8편, 1980년대에는 총 4편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서영춘은 <팔도강산>의 아류작이라 할 수 있는 국책영화 <노래 실은 관광여행>(박희준, 1973), <팔도유람>(이명식, 1974)를 비롯하여 여전히 1960년대의 향수를 안고 있는 심우섭 감독의 영화들 <마음 약해서>(심우섭, 1979), <형님먼저 아우먼저>(심우섭, 1980), <82 바보들의 청춘>(심우섭, 1982),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에 잇따라 출연했으나, 그 웃음의 질이 예전 같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의 시대가 도래하자, 단편적이고 감각적이며 속도감 있는 웃음을 추구했던 텔레비전 코미디에서 서영춘의 코미디는 더욱 빛을 발했다. 코미디영화들은 여전히 제작되었지만, 서영춘의 코미디는 이미 한껏 순화되어 텔레비전으로 넘어가고 난 뒤였다. <참고문헌> 박선영, 『코미디언 전성시대- 한국코미디영화의 역사와 정치미학』, 소명출판, 2018.
[초이스]라이브하드
라이브 클럽 ‘그레이하운드’에서 내달 무대에 설 뮤지션의 오디션을 갖는 중이다.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무대 앞에 여유롭게 앉아 있고, 바텐더이자 덩치로 보이는 남자는 다소 성마른 표정으로 바 너머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휑뎅그렁한 플로어에는 몇몇 뮤지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섰다. 그러다 모던락을 연주하는 밴드가 연주를 시작한다. 그들이 떠나고 다시 무대는 조용해진다. 내공을 겨루기 전 실력을 가늠하려는 걸까, 무대 주변은 흡사 고수들이 무협을 겨루는 객잔을 방불케 한다. < 라이브 클럽 그레이하운드 >라는 제목으로 먼저 소개된, <라이브하드>의 ‘겨울 편’의 풍경은 그러하다. ‘머저리클럽’의 두 멤버와 그들의 친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으나, 영화는 오디션 무대에 선 뮤지션들의 연주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모던락에 이어 헤비메탈이 무대를 뒤흔들고, 여성 재즈 듀오가 퓨전의 아름다움을 펼치는가 하면, 흑인 블루스 연주자가 기타 연주와 노래로 흑인의 영혼을 전한다. 마침내 등장한 머저리클럽이 펑크를 연주하지만 그들의 무대는 실패의 판정을 받고 만다. 그들의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뒤늦게 나타난 플라밍고 기타 연주자가 의자에 앉는다. 그렇게, 황량했던 무대는 점차 음악의 전시장으로 변한다. 흑백의 이미지 위로 색채를 입히는 것은 음악의 색깔들이다. 어지간한 음악 프로그램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을 듣는 맛이 눈길을 끄는 영화인 셈이다. <라이브하드>의 ‘겨울 편’은 제천영화제에서 단편으로 앞서 소개된 바 있고, 황욱 감독은 앞과 뒤에 ‘늦가을 편’과 ‘봄 편’을 덧붙여 부천영화제의 장편 섹션에 초대받았다. 만들어진 시기가 다른 만큼 오리지널 단편과 새로 추가된 파트는 촬영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어두운 지하의 공간에서 주로 촬영된 겨울 편이 인물 가까이 긴밀하게 접근한다면, 늦가을 편과 봄 편의보다 넓은 앵글은 느슨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오디션과 해프닝의 기록에 가까운 겨울 편과 비교해, 인물의 배경이 추가된 장편 버전이 오밀조밀한 이야기의 구조를 갖춘 것은 물론이다. 덕규(크리스 라이온 분)는 멀리 한국에 와 블루스를 연주하려고 했으나 그에게 요구되는 건 인기 있는 힙합이다. 겉보기에 그는 흑인이기 때문이다. 머저리클럽의 베이스 주자인 철( 이재호 분)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베이스나 잘 치라는 말을 듣는다. 사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머저리클럽의 리더인 임재(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자취를 감추었고, 남은 멤버인 철과 섭(갈치 분)은 그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은정( 공민정 분)은 임재를 사랑하는데 그는 매번 다른 여자와 놀아난다. 여자들이 떠나면 그가 언제나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음악에 관한 영화였던 ‘겨울 편’은 ‘가을’과 ‘봄’ 편을 얻으면서 가난하고 쓸쓸한 청춘의 이야기로 화한다. 황욱 감독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결합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든다. 그가 그것을 의도한 것인지 앞으로도 그런 스타일을 유지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지금까지 소개한 두 편의 영화 - < 개 >(2015)와 < 라이브하드 >의 스타일은 그러하다. 한국에서 근래 발표된 음악영화들이 대부분 다큐멘터리였던 상황에서 <라이브하드>의 형식은 괜히 낯설다. 두 편의 필모를 가진 감독답지 않게 황욱은 배우들의 연기 연출에 단연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뮤지션인 사람과 뮤지션이 아닌 사람, 배우인 사람과 비전문 배우인 사람이 뒤섞여 있으면 영화가 뒤뚱거리기 마련인데, <라이브하드>는 그런 단점 따위는 없다는 양 자유롭다. 뮤지션들의 연주 부분과 이야기를 맡은 배우들의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돼 단순한 영화 너머로 일상의 한순간을 완성한다. 전작 <개>가 마치 사건 르포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듯이, <라이브하드>는 가난한 뮤지션들이 처했음 직한 상황에 세세한 마음을 쓴다. 그것으로 현실감을 득한다. 그게 전부다. 그들을 대변하겠다고 목청을 높이거나 그들을 위로하는 척하는 태도가 없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위대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라이브하드>는 차가운 현실을 차갑게 그린 영화일까. 차가운 현실을 차갑게 그린 영화는 적지 않다. 거꾸로, 차가운 현실을 따뜻하게 포장한 영화는 더 많다. <라이브하드>는 좀 이상한 영화다. 차가운 현실을 애써 포장하지 않아 뮤지션의 하루를 절감하게 하면서도 마냥 우울하지는 않다. 차가운 방에 작은 스토브를 켜놓아 온기를 나누는 느낌이랄까. 천사처럼 한 남자가 그들 곁에서 계속 춤을 추며 기운을 북돋우기 때문일까. 세 번째 이 영화를 보면서 어렴풋이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영화에서 뮤지션과 친구들은 각자 거울을 바라본다. 헤비메탈 밴드의 리더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는다. 덕규는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이 거울 앞에서 얼굴을 씻는다. 철은 현실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거울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은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는 그들 자신밖에 없다, 당연히. 그렇다면 <라이브하드>는 그들의 자화상을 그리는 영화일까?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화가들이나 할 짓이다. 뮤지션들은 자화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무대 앞의 관객을 바라보며 연주를 해야 한다. <라이브하드>에서 관객에 해당하는 사람은 클럽 ‘라이브 와이어’의 사장이다. 카메라는 문득, 기타를 들고 포크를 부르는 여자 싱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포착한다. 그는 분명 무대를 바라보고 있으나 그의 눈길은 어딘가 다른 곳을 응시한다. 홀로 객석을 지키는 남자인 그의 눈길은 현실의 슬픔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관객은 혼자 남았고, 뮤지션은 그를 보며 슬픔을 연주한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슬픔을 위로하는 존재다. 그게 작은 불씨를 만든다. 그 불씨를 간직한 사람이라면 <라이브하드>의 마지막 장면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다.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상영작: 2018.9.29.(토) 17:00 시네마테크KOFA 2관(GV)
[테마연재]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비밀은 없다>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 사회가 켠 가스등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부정당해왔다. ‘미친 여자’는 오로지 남성의 경험에 의해 판정되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미스터리였다니!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보살필 의무가 있다. 여성의 인식과 자신감을 믿자, 서로에게 가스등을 켜지 말자. - 애드리언 리치 <비밀은 없다>와 <미쓰 홍당무> 어느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다. 대개 그렇듯 아내‘만’ 바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 중이다. 기지개를 켜며 남편이 다가와 묻는다. “내 여권 못 봤어? 12시 비행긴데, 큰일이네”. 이 경우, 아내의 ‘바람직한’ 반응은 무엇일까. “(쿨하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여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격하게) 아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어젯밤에 말했어야지! (그랬으면 내가 찾아놨지……)” 남편은 화를 냈다. “너는 찾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소리부터 지르냐.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억울한 아내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남녀 불문, 자기 물건은 자기가 간수해야 하고 더구나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남자는 자기 여권 찾는 일이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아내 역시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왜 나한테?”가 아니라 “왜 이제야!”라고 안타까워한다. 결국, 모든 잘못 - 여권 안 챙김 + 그걸 아내에게 물음 - 은 남편이 했는데도, 아내는 ‘소리만 지르는’ 부부 갈등의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명절을 앞두고 내 친구가 계속 문자를 보낸다. 다급하고 불안한 말투에다 자기 분열적인 내용이다. 친구는 소위 전문직에 종사한다. 이번 연휴에 진급과 관련한 논문을 써야 하는데, 시댁에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시댁에 안 가는 대신 백만 원을 보냈단다. 시집에서는 별말이 없다. 남편의 직업은 사회운동가이지만 수입은 없다. 친구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데도, 자기 본업에 집중을 못 하고 있다. 동시에 집중을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분노가 치미니까 시집과 남편 욕을 하다가, 사회를 비난하다가, 자책하다가 결국은 매번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로 문자를 마친다. 남성 생계 부양자라면, 명절에 ‘처가집’ 방문으로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위의 사례들은 성 역할 규범(norm)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 해야 한다’.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경험한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와 주변 사람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다. 평소 나 자신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정신 차리자.”, “정신을 차리자.”, “정신 줄을 놓으면 안 돼.”, “가만, 생각을 하자.” 나는 거의 매일, 이렇게 중얼거리고 다짐을 거듭한다. 객관적으로 그럴 만한 상황인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 건가? 핵심은 그게 아니다.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당하지 않고 살려면, 혹은 당한 이유라도 알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경미 감독의 < 비밀은 없다 >에서 국회의원 출마에 나선 엘리트 정치인의 아내로 나오는 연홍(손예진 분)은, 선거 운동 와중에 딸이 실종되는 사건을 겪는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혼란과 분노……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믿을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고 “정신을 차리자”를 반복한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운다. 이 영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미쓰 홍당무(Crush And Blush) >(2008년) 가 나왔을 때, 한국 영화에서 드문 여성 캐릭터의 등장에 찬사가 쏟아졌다. <비밀은 없다(The Truth Beneath)>(2015년)의 손예진 과 <미쓰 홍당무>의 공효진 은 같은 캐릭터다. 미쓰 홍당무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니 내가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극 중 손예진의 중학생 딸의 대사처럼, 두 영화의 주인공은 남성성의 원리로 돌아가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 다만, 연홍은 나름 든든한 남편을 둔 기혼여성으로 김밥을 맛있게 만드는 전업주부이고, ‘미쓰 홍당무’는 미혼에 새벽부터 영어학원에서 다니는, 세상사에 열심인 현직 교사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남성 사회, 젠더 법칙, 출세, 인간관계 원리, 진짜 돈 버는 방법 등등 공적 영역이 작동하는 원리를 모른다. 두 여성 모두 나이브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 주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이 싫다. 한편으로는 주변을 돌보는 착한 여성들이다. 자기중심적이기도 한데, 이기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정돈과 자기 단속에 바빠서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간혹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약간의 신경증과 불안 증세가 나타난다. 어쩌면 이 여성들의 신경증 정도에 따라 영화의 장르가 달라질지 모른다. 안면 홍조증인 여자가 신경질을 내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면 코미디가 될 것이요, 중산층 가정의 미모의 불안한 여자가 남편을 의심하면 스릴러일 것이다. 이 영화들의 주인공이 남성이라면 어떨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미쓰 홍당무>는 ‘외모’를, <비밀은 없다>는 ‘모성’을 다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상은 비밀로 가득하다 <비밀은 없다>가 작품성과 대중성에 비해 흥행이 안 된 이유 중에 제목을 꼽는 이들이 꽤 있었다. 제목이 평범하다는 것이다. 사실, 평범함을 넘어 진부했다. 아니, 틀렸다. 세상에는 비밀이 많다. 제목이 인상적이지 않아도 입소문이라도 났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사람들은 이 영화의 제목처럼, 비밀은 없다고 생각한다. 입이 ‘싼’ 사람에 의해 종국에는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노! 그렇지 않다. ‘모르는 사실’과 ‘없는 사실’은 다르다. 모르는 사실은 없다. 모를 뿐이다. 세상은 비밀로 가득하다. 지와 무지의 경계는 권력이 정한다. 권력이 있는 모든 곳에는 비밀을 둘러싼 정치가 있다. 비밀, 고통, 권력이 삼각형을 이룬다. 비밀로 인해 이익을 보는 자, 억압을 당하는 자, 손해를 보는 자, 고문을 당하는 자……. 비밀(언어, 사실, 정보, 역사……)은 권력 관계의 정점이다. ‘여성’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있고, 민초들이 자각하면 안 되는 팩트가 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왜 그토록 미움을 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자들은 비밀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피억압자들에게 앎, 깨달음은 해방이기도 하고 기꺼운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일, 여성들이 밥하는 일이 여자의 ‘운명’(성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남성들은 삼시 세끼 준비 스트레스로 평생을 전전긍긍하느라 역사를 창조하지 못했으리라. 최저 임금 액수가 정규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당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이들이 있다면? 이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어딘가를 습격한다면?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비밀을 알아내고 사회를 습격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복수극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은 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연홍 같은 캐릭터가 불안해 보이는 이유는, 매 순간 이 구호를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작동하도록 뇌의 방향을 수시로 회전시켜야 한다. 믿었던 것과 알게 된 것 사이에서 약자의 경험과 지배 언어의 간극을 그린 고전으로 잉그리드 버그먼과 샤를 부아예가 주연으로 나온 1944년 작 영화 <가스등(Gaslight)>을 꼽는 데 주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어떤 인식론과 접속해도 의미 만점의 텍스트다. 원작은 패트릭 해밀턴의 2인 대사의 희곡인데, 영화는 조지프 코튼과 안젤라 랜스버리를 등장시켜 사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부인의 유산을 노리는 남편은 가스등을 조작하여 깜빡이게 하고, 아내는 자신이 본 가스등과 믿어주지 않는 남편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그녀는 남편의 의도대로 정신병자가 되어 가지만 결국 자기가 본 것을 믿는다. 가스등(Gaslight) 이 작품은 이후,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애드리언 리치를 필두로 수많은 메타포와 문학 작품, 논문을 낳았다. 거짓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장치, 인식 과정의 성별 정치학과 사회성, 자신만의 언어는 어떻게 획득 가능한가 등 수많은 쟁점을 제공한다. 미국의 심리 상담가 로빈 스턴은 이 영화를 소재로 쓴 책 「가스등 이펙트」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의 인식론적 곤경을 ‘가스등 효과’라고 명명했다. 여성들은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라고 말하며 방황한다. 남자는 개인이 아니라 세상을 대변한다. 책의 부제는 ‘보이지 않는 조종에서 살아남는 법(How to spot and survive the hidden manipulation)’이다. 그렇다. 문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성별, 계급, 인종 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다른 삶을 산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섬이다. 서로를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없다’. 어렵다. 역지사지는 상대와 다른 땅(위치)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섬에서 땅으로의 이동이 쉽겠는가. 같은 여성이라도 강간을 경험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은 젠더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란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4.3 사건, 호모포비아 억압처럼 타인이 상상하기 힘든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말하기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일단, 자신이 경험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자기도 못 믿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이야기하겠는가. 자기 검열과 정치적, 사회적 검열은 연속선을 이룬다. 그래서 평생을 특정 사건의 후유증(aftermath, 餘波)으로 보내는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자기가 경험한 것, 본 것을 믿어야 한다. 특히 가시화되기 힘든 사건들은 믿는 정도가 아니라 인식론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도 안 믿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믿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로이트적 의미의 전통적인 방어기제, 부인(否認, denial)이다. 어떻게 선거에 출마하고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학교 교사랑 섹스를 하고, 교사는 그게 약점이 되어 자기 딸에게 시험지를 유출하고, 그로 인해 아이가 살해된 현실. 믿어지겠는가. 더구나 이 모든 사건 자체가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궤도 밖에 있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한 세계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엄마를 지켜주겠다는 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트라우마의 생존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자기 분열이다. 자신이 본 것과 인식 사이의 분열, 자신의 인식을 타인에게 말할 때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분열, 말한 다음에 가까운 사람에게마저도 추궁당하고 의심받을 때 ‘나는 제정신’이라고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분열……. 이때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말이 “정신을 차리자”이다. 이것은 방언이다. 사투리가 아니라 자기만이 알아듣는 주문(呪文)이다. 말로써 자신을 붙잡는 것이다.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난민으로 사는 것은 힘들다. 사회가 이들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나 여성의 일상은 공적 영역의 규범에서 제외된다. 페미니스트의 곤란 혹은 문제점도 이것이다. 나는 내가 만나고 도움을 ‘준’ 가정폭력, 성폭력, 성 산업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많이’ 썼다. 그런데 같은 여성주의자들조차 믿지 않는다. 고통받은 개인의 경험과 사회의 대화가 가능한 지점은 흐릿하고 아슬아슬하다. 마치 위험한 물건이 들어있다는 자루에 손에 넣는 기분이다. ‘지나치게’ 진실에 집착하면 파문(破門)당한다. 이 영화에서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는 할 일이 많을 때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본 것과 남(편)이 말하는 것 사이에서 불일치할 때 나온다. 삶에서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세계는 혼돈(dis/order)의 연속이다. 질서(order)는 ‘저들의 것’이다. 저들의 질서가 나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나만의 삶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불안이 정상이다. 불안은 몸의 외부와 자신의 몸이 불일치할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성(理性)이다. “안정되어 보인다.” 나는 이 말,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안정을 욕망하는 현실이 싫다. 안정만큼 계급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넉넉하고 아쉬움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며 사랑받고 아프지 않은 상태, 어떤 부정의에도 분노하지 않는 우아한 세계. 불일치와의 투쟁이 필요 없는 삶. 이런 인생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동시에 피억압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말이다. 악이란, ‘객관’은 원래부터 내 것이라고 믿는 ‘정신 승리자들’의 세계다. 승리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인데, 승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 한가한 사람들 때문에 현실은 왜곡된다. 극 중 연홍이 자기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에이, 그럴 리가.”, “루머겠지.”, “미쳤구만.”……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을 믿고 마법을 걸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외롭고 서러운 일이다.
[한국영화사100년]변화의 시작 1985~1989년: 대중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와 영화계 1980년대 중반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은 양가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 그리고 반미 감정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권」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레이건의 재선 선거 전략과 맞물려 ‘광신적 애국주의’로 포장된 1984년 LA 올림픽은 한국의 신군부에도 매력적인 모델이 되었다. 또한 LA 올림픽이 보여준 미국 제일주의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한국은 최고 우방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이 개최한 올림픽에서 10위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고, 전 국민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방송국을 동원한 국민 축제로 열기를 이어나갔고, 이는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연결되며 1980년대 중후반의 한국 사회 전체를 취하게 만든다. 전두환 정권이 추진한 일련의 올림픽 이벤트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통치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이 미국이라는 타자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이은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이 그것이다. 학생들은 광주민주화항쟁 5주년을 기해 학살의 책임자로 신군부를 지목하고 정권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를 지원한 미국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기회 삼아 학생운동을 국민 여론과 격리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해 부각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일반 시민들이 광주학살과 미국의 관련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간 것이다. 더 이상 반미는 운동권 대학생의 구호에만 머물지 않았다. 제5공화국의 영화 정책 설계도 미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절차적 정당성과 도덕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혹은 올림픽이라는 정권 차원의 과업 때문인지 특히 문화예술을 강조했고, 예산 지원과 규제 검열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가동했다. 1984년 영화 시책부터 반영된 영화예술 및 영화산업 활성화 방안도 당시 문화 정책의 맥락에 놓여 있을 것이다. 제5차 영화법 개정(1984. 12. 31)으로 영화제작업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었고, 전격적인 독립영화 제작 제도까지 신설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검열제도 심의제로 이름을 바꿨고, 주체 역시 반관반민 기구인 공연윤리위원회로 이관되었다. 이 같은 한국영화 육성 및 자율화 정책의 추진 배경에는, 1985년 시작된 한미영화협상이 있었다.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의 끊임없는 압력 끝에 한국영화는 전면적인 시장 개방이 예고된 상태였다. 결국 제6차 영화법 개정(1986. 12. 31)으로 1987년 7월부터 외국 영화사들이 한국에서 영업을 시작했고, 1988년 UIP의 < 위험한 정사 Fatal Attraction >(애드리안 라인, 1987)가 그 물꼬를 텄다. ‘한국의 스필버그’에서 미학적 야심가로 1953년생인 배창호 는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부터 자작 시나리오를 들고 충무로 영화사를 기웃거린 영화청년이었다. 당시 제작 명가 화천공사를 찾아가 자신을 기획실장으로 채용해주면 연간 3편 이상의 흥행작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복귀작 < 바람 불어 좋은 날 >과 < 어둠의 자식들 >(1981)의 조감독으로 현장 경험을 쌓은 후 1982년 < 꼬방동네 사람들 >로 감독 데뷔의 꿈을 이뤘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이동철의 원작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분위기가 강했지만, 영화는 문공부 검열 과정을 거치며 외견상 멜로드라마로 전향했고, 결과적으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배창호 자신도 대중적 화법에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차기작인 < 적도의 꽃 >(1983)이 15만 관객 동원으로 흥행에 성공하며 충무로의 흥행 감독으로 등극했고, < 고래사냥 >(1984)의 40만 흥행에 이어, < 깊고 푸른 밤 >은 60만이 넘는 전대미문의 흥행 성공을 거뒀다. 지금이야 1천만 관객 흥행이 큰일도 아니지만, 당시 이 정도 흥행 성적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을까. 영화는 1985년 3월 1일 명보극장 한 관에서만 개봉해 7월 31일까지 무려 다섯 달 동안 상영했다. 매일 3,000명 이상의 관객이 들면서 5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때문에 다른 개봉관인 코리아극장으로 옮겨 최소 10만을 더 동원하게 된다. 이는 < 겨울여자 >( 김호선 , 1977)가 보유한 58만 기록을 깬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한국의 스필버그’로 불렸는데, 대중적 화법의 스토리텔링에 능하다는 평가와 흥행 감독이라는 가치가 합쳐진 표현이었을 것이다. 1985년 < 고래사냥 2 > 역시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는 불현듯 ‘왜 영화를 만드는가’라는 근본적인 회의에 빠지게 된다. < 황진이 > (1986)에서 시도한 탐미적 실험이 추석 프로를 기대한 관객에게 철저하게 충격을 주고 외면받은 후, 양식미는 유지하면서 서민의 일상을 따뜻하게 묘사한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로 다시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 영화비평가 김영진의 표현처럼 배창호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이미지로 승부를 거는 작가의 길에서 주춤거렸고, 흥행 감독의 명성은 조금씩 잊혀갔다. 1990년대 이후 그는 미학적 야심을 투영한 작가주의 영화와 대중영화, 또 저예산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갔다. 전자는 < 꿈 >(1990)과 < 천국의 계단 >(1991), 후자는 < 러브 스토리 >(1996), < 정 >(1999)과 < 흑수선 > (200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관객과 평단 양쪽으로부터 골고루 지지받는 작품이라면, 1980년대의 그것은 배창호의 몫이었다. <깊고 푸른 밤>을 위시로 한 그의 1980년대 영화는 대중적 화법, 기술적 혁신 그리고 사회적 의미와 미학적 야심까지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성취는 그간의 한국영화가 기댄 멜로드라마의 상투성을 벗어난 것이었다. 황량한 풍경이 전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영화는 미국 서부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오픈카에 타고 있는 한 남자를 비추며 시작한다. 한 여성이 올라타자 차는 데스밸리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는 기이한 협곡의 구릉에 기대선 채로 관계를 가진다. 섹스가 끝난 후 남자는 돌변한다. 돈이 든 핸드백을 집어 든 그는 여자를 무자비하게 걷어차고 사막 한가운데 버려둔 채 떠난다. 이 남자는 바로 기회의 땅 미국에서 영주권을 받고 부자가 되려는 백호빈( 안성기 )이다. 임신한 애인을 한국에 남겨둔 채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영주권을 받아 그녀를 초청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LA 도심의 화려한 야경을 배경으로 ‘깊고 푸른 밤’이라는 타이틀이 보이고, 이제는 술집이다. 한 중년 여성이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성 바텐더에게 다가가 위장 결혼을 권한다. 그녀는 더 이상 싫다고 거절하지만 한국 남자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뀐다. 그녀는 주한미군을 따라 미국에 왔다가 이혼한 후, 영주권을 받으려는 남자들과 위장 결혼해 돈을 버는 제인( 장미희 )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위장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전남편 마이클이 딸 로라를 무리하게 데려간 사건이 있던 밤, 호빈과 제인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고 제인은 점차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한밤에 이민국 직원들이 들이닥쳐 둘의 관계를 추궁하지만, 제인의 도움을 받은 호빈은 결국 영주권을 받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한국의 애인을 불러올 생각에 들뜬 호빈은 제인의 집을 나서며 이혼을 요구하고, 그와 헤어지지 않으려는 그녀는 임신했다고 거짓말한다. 제인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호빈은 그녀 역시 데스밸리로 데려가 폭행한다. 임신이 거짓말이었다는 제인의 말에 안심한 호빈은 이혼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고, 차에 탄 그녀는 호빈의 애인이 보내준 테이프를 들려준다. 아이도 지우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는 목소리에 호빈은 정신을 잃고, 제인은 그의 머리를 쏜 후 자신의 머리도 쏜다. 어떤 의미에서 <깊고 푸른 밤>은 한국영화사상 가장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해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일 것이다. 데스밸리행 고속도로를 달리는 오픈카, 모래 계곡에서 벌이는 정사 등 작심한 듯 할리우드 영화의 질감으로 볼거리를 전시하던 영화는, 갑자기 여인을 무자비하게 발로 걷어차는 악마 같은 남자를 보여준다. 특히 오프닝의, 인물을 점처럼 두고 데스밸리의 전경(全景)을 잡아내는 압도적인 숏은 일품이다(촬영기사 정광석은 이 영화로 21회 시카고국제영화제 촬영상을 받았다). 영화의 엔딩 역시 데스밸리다. 호빈은 제인을 때리고 목을 조르며 모래산 밑으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다. 이때도 모래산 위의 두 남녀를 점처럼 잡아내며, 대자연에 비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신비로우면서도 황량한 모래 협곡과 사막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호빈과 제인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데스밸리로 상징되는 영화 속 미국은 이민자들의 꿈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일 뿐이다. 최인호 의 시나리오, 장미희의 호연 <깊고 푸른 밤>은 <적도의 꽃>에 이어 최인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오프닝 타이틀에 그의 소설 「깊고 푸른 밤」과 「물 위의 사막」을 원작으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시나리오는 두 소설의 주요요소와 구성을 합친 것이다. 전자에서는 한국에서 터진 대마초 사건으로 미국에 온 가수와 선배 소설가가 자동차로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요소를 취했고, 미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계약 결혼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후자에서 가져왔다. 사실 최인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극의 구성이나 인물의 성격 등 배창호의 영화 버전과는 꽤 다르다. 예를 들어, 데스밸리를 배경으로 한 사건은 시나리오의 엔딩에만 적용되고, 제인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한 여인으로, 또 그녀와 호빈도 더 깊은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는 제인을 차갑고 그늘이 있는 여성으로 묘사하는 등 둘의 관계에 거리를 만들고, LA와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야경과 데스밸리의 황량한 구도 속에 인물들을 배치해 공간과 분위기로 인물의 내면 풍경을 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 속 제인의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빚어진 것은 무엇보다 장미희의 역할이 컸다. 영화평론가 신은실의 평가처럼 전작 <적도의 꽃>이 배우로서의 안성기가 장악한 영화였다면 <깊고 푸른 밤>은 장미희의 아우라가 지배한 영화였다. 1980년 9월부터 방송출연금지 연예인으로 묶여 있던 장미희는 스크린 작업만 이어가다 1983년 9월부터는 거의 잠적에 가깝게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배창호의 끈질긴 설득으로 출연을 결심한 그녀의 요구 조건이, 미국 올로케이션과 동시녹음 등 기술적 투자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영화로 장미희는 <겨울여자>의 로리타 캐릭터를 넘어선 성숙한 매력의 여인으로 변신하며, 연기적 성장을 맞게 된다. 한국 대중영화의 주목할 만한 성취 당시 기사(「동아일보」 1985.10.14)는 <깊고 푸른 밤>이 관객의 주목을 받은 이유로, 소재의 참신성과 서구영화 같은 스타일을 든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국 이민 사회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영화 매체의 강력한 영향력, 특히 현재 1천만 영화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가 당시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관객들에게 외국영화 보는 기분을 맛보게 한 점”도 큰 매력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통상 제작비의 2~3배인 2억 5,000만 원가량의 제작비를 투입했고, 한국 배우는 4명만 출연시키며 미국 현지 올로케이션으로 진행됐다. 배창호의 감각적인 연출과 속도감 있는 전개도 매력적이었지만, 테크닉 면에서도 발군이었다. 기존의 한국영화와 달리 영화 전체를 동시녹음으로 진행했고, 배창호의 스타일적 인장으로 꼽히는 360도 촬영 등 인물들의 감정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도 돋보였으며, 마치 재즈처럼 이미지와 조우하는 정성조의 세련된 영화음악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관객에게 서구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을 부여했다는 점은, 최신 렌즈의 카메라로 미국의 풍광을 담아낸 것이 이유였지만 할리우드 영화를 환기시키는 장면이나 분위기를 차용한 것이 주효했다. 여러 평론가가 언급하듯, < 차이나타운 Chinatown >(로만 폴란스키, 1974)의 필름 누아르적 분위기를 취한 것부터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마틴 스코세이지, 1976) 속 로버트 드 니로가 걷는 장면을 모방한 것도 그렇다. 하지만 당시 배창호의 언급처럼 미국영화에 대한 콤플렉스 차원이 아닌, 미국 현지에서 완성도 있는 대중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1980년대 중반의 시도 자체가 평가의 방점으로 찍혀야 할 것이다. 새로운 변화의 예고 1980년대 후반의 제작 자유화 물결과 정치적 유화 국면을 타고 한국영화는 또 하나의 새로운 물결을 맞았다. 이장호와 배창호의 후예들이자 영화운동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장선우 , 박광수 , 이명세 , 정지영 등이 등장해,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사회비판적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국내외 영화학자들은 그들의 작품 경향을 묶어 ‘코리안 뉴웨이브’로 명명했다. 특히 장선우는 한국식 자본주의를 우화적 표현으로 풀어낸 < 성공시대 >(1988)를 내놓으며, 1990년대를 휘저을 파격적인 행보를 예고하고 있었다.
[테마연재]탈식민주의 시대의 친일 논란 - 청연, 군함도, 미스터 션샤인을 지지하며
“귀하의 나라에 백정은 살 수 있습니까, 노비는 살 수 있습니까?” 류승완 감독은 < 군함도 > 개봉 초기, ‘친일영화’라는 여론에 부딪혔을 때 이렇게 말했다. “대중의 반일 감정에 기대지 않겠다.” 나는 살짝 감동받았다. 대규모 자본과 스타들... ‘천만 관객’까지 생각했을 시스템에서 일하는 영화감독이, 이런 소신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워낙 그의 팬이었으나(< 짝패 >!) 그를 다시 ‘봤다’. 그러다가 최근 김은숙 작가의 24부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군함도>의 기시감이 되살아났다. 정확하게는 대중의 반응에 대한 기시감이다. 방영 초기, <미스터 션샤인>이 “역사를 왜곡했다”며 28,481명이 한 달 동안 청와대에 이 드라마를 막아 달라는 청원을 낸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청와대나 문화체육관광부가 TV 드라마의 스토리를 바꿀 수 있는가? 나는 창작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위 기관들은 그럴 권한이 없다. 지면 등 사회적 문제 제기를 통한 ‘역사 왜곡’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드라마에 대한 불만을 청와대에 호소하다니... 발상이 놀라울 뿐이다. 청원인들의 주장은 이렇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피해국과 가해국 입장이 묘하게 전복되어 있습니다. 극에서 연출된 악역들의 대부분이 조선인이며, 자기 장인(도공)의 제자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등장하고, 조선의 문화가 ‘미개’하다는 연출이 계속해서 보입니다. 극을 끌고 나가는 주축, 주·조연들이 여주인공 고애신을 제외하면 일본인들이며 그들 개개인에게 부여된 서사 역시 ‘조선’이라는 나라를 피해국이 아닌 그것을 ‘자초한 쪽’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서구로부터 시작된 근대와 자본주의는 ‘원인이 없다.’. ‘자본의 운동’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갔고, 한반도의 고통스러운 현대사는 그들의 대리전, 후폭풍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지금 우리는 ‘한류’를 무기로 삼아 아류 제국주의를 꿈꾸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미스터 션샤인>도 그 ‘무기’ 중의 하나로 기획되었다. 식민 지배에, “우리의 자초”나 “저들의 의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의미한 얘기다. 약육강식론도 한탄일 뿐, 원인이 아니다. 서구가 비서구를 점령했을 때, ‘우리’ 입장에서는 침략이지만 ‘그들’은 야만인에 대한 문명화 사명에 고뇌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를 젠더 혹은 계급으로 비유해보자. 남성 중에서 부자 중에서, 자신이 여성과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오히려 “역차별”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는 <미스터 션샤인>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조선 명문가를 대표하는 고사홍( 이호재 )은, 미국인 유진 초이( 이병헌 )가 “조선은 귀댁을 보호하지 못하니, 원하신다면 저희가 보호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다음과 같이 위엄을 내세운다. “양이(서양 오랑캐)의 보호를 받느니, 차라리 조선이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그 뜻을 헤아리겠노라.” 물론, 유진 초이의 목적은 고사홍 집안의 손녀인 고애신( 김태리 )을 친일파 낭인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사적인 마음’의 발로였다. “조선이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그 뜻을 헤아리겠다.” 이 말에, 나는 표현력을 잃었다. 연인 사이의 대사로 바꿔보자. “사랑하는 그대가 나를 죽이더라도 그 뜻을 헤아리겠다?” 이 무슨 노예근성 혹은 피학증인가.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 주인이 바뀌었을 뿐 고사홍 대감이 미군의 보호를 거절한 이유는 조선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그 자신이 조선 왕조 500년의 기득권자이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인격적인 양반이나 근대적 낭만으로 “불꽃으로 살고 싶은 자”(고애신) 혹은 ‘사명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간직한 자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러나 사리사욕이 앞선 자, 원래 핍박받았던 자들은 공동체의 운명에 관심이 없다.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조선이든 대한민국이든 국가를 비롯해서 어느 공동체나 그 구성원들은 평등하지 않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 역시 신분 사회지만, 조선은 아예 그것이 법으로 규정된 사회였다. 노비의 입장에서, 백정의 입장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인이 바뀔 뿐이다. 군 ‘위안부’ 동원도 그녀들의 아버지, 한국인 업자 등 한국 남성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피해 경험을 들어보면, 일본군을 상대하는 일보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족과 남편에게 구타당한 것이 더 억울하고 몸을 상했다는 증언이 꽤 나온다. 국가 내부에서 모든 사람이 국민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국민이기보다는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지방 사람이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봉합될 뿐이다. 이 봉합은 일상적으로 찢어지고 다시 꿰매지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터져서 혁명이 일어날 수도 주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 비록 서구와 달리, 나라의 사정은 근대와 식민 지배와 함께 찾아온 자신도 모를 운명의 비극을 맞았지만, 구한말 개인들의 사정은 모두 달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가 성립될 가능성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노비 유진 초이와 백정( 유연석 ), 이양자( 김민정 )의 신분은 바뀌었다. 낮은 계층의 여성들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집 밖으로 나와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원래 국가 내부의 차이가 국가 내외부와의 차이보다 큰 법이고 격동기에는 더욱 그렇다. 드라마에서 이 문제는 경어체 여부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대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고도의 한국적 맥락이 필요하다. “외국인에게는 어렵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다. 김은숙 작가의 대사와 스토리 전개 방식은 이제까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듯하다(예를 들어, “통성명, 악수, 포옹 그다음은 그리움이더이다” 이 말, 정말 맞다). 이 드라마의 설정상, 반말과 존대어가 뒤섞어 어떨 때는 정신이 없다. ‘원래 신분’과 외국(미국과 일본)에 다녀와서 바뀐 신분, 장 포수와 고애신처럼 반상과 사제 관계가 겹친 경우, 나이, 성별 등에 따라 서로 주고받는 말투가 다 다르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구한말을 총체적으로 본다. 유관순 누나? 민족의 대표가 여성일 때 윤종찬 감독의 < 청연 (靑燕, Blue Swallow)>(2005)은 그의 걸작인 < 소름 > 이후 나를 실망시키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역시 친일 문제로 고난을 겪었다.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박경원을 다룬 <청연>의 첫 장면은 남루한 옷을 입은 조선의 소녀들이 들판에서 뛰쳐나오는 데서 시작한다. 내게 이 장면은 영화의 주제처럼 보였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소녀들의 힘찬 달리기. 그들의 꿈을 재현한 듯 한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영화는 조선인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민족주의’ 영화다. 다만, 민족의 대표가 기존과 달리 남성이 아니라 여성일 뿐이다. 그 한 가지 이유로, 이 영화는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 사회에서 늘 재연되는 장면. 맹목적 대중 심리가 배타적 국가주의와 만나 ‘생각 정지’ 상태에 이르고, ‘일본 앞에 우리는 공동 운명’이라는 퇴행적 민족주의가 저항적 민족주의로 둔갑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 사이의 차이(이 경우는 성차별)는 은폐되고, 시선은 모두 ‘외부의 적’을 향하게 된다. 여성이 자아실현을 하는 데 일본인의 도움을 받으면 ‘친일 행적’이고 ‘친일 영화’인가? <청연>은 여성에게 ‘친일’과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여성은 민족의 주체가 아니라 민족을 재현하는 대상일 때만 유용하다. 유관순은 종종 ‘열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윤봉근 열사’에 비해서는 그 경우가 훨씬 적다. 그것도 “유관순 누나”다. (나는 “유관순 언니”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남성이 “레즈비언이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대표 친일파’로 기억하는 이광수나 김활란에게 ‘반민족행위자’라고 하면, 두 사람 모두 억울해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강하게 정체화했으며, 친일을 함으로써(‘근대를 지향함으로써’)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민족을 살리는 길’은 사람마다 이렇게 다양하다. 창씨개명이나 단발령 등 일제의 정책을 거부한 이들 중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교 규범을 수호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친일이 불가피했다거나, 사소하다거나, 모든 민족주의는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친일 청산은 절대 선, 당위적인 진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언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친일파닷!” 이 한마디가 경합해야 할 담론장의 다른 목소리를 모두 내쫓는다는 데 있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 결혼하면 국적을 잃는데 여성에게 국가가 어디 있나. 아직까지도 남자가 ‘출세’하면 여자가 따르고 남자들은 그에게 아부하지만, 여자가 ‘성공’하면 남자는 떠나고 여자들은 그녀를 시기한다. <청연>은 기존의 이성애 법칙에 도전한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김주혁 )이 박경원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녀가 ‘똑똑하고 야망에 불타며 고집이 센’ 데다가, 특히 “너를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연>에서 남성은 여성을 통해 공적 영역에 진출하며, 여성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주인공 박경원( 장진영 )과 비슷한 시대를 산 퀴리 부인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도, 남편 연구실에서 더부살이했고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핵분열을 발견하여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첫 여성회원이 된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연구소에 여성이 출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남성들 때문에 정문을 사용하지 못하고 청소부용 반지하 뒷문으로 다녀야 했다. 우리는 < 히든 피겨스 >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았다. 당시는 무려 1960년대.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히든 피겨스 박경원은 어땠을까? 일제 강점기 너무 가난했던 한 소녀가 현모양처 + 독립운동가 + 훌륭한 비행사… 이것이 가능했을까? 아니면, 관객의 바람 대로 위 모든 것을 다해 내거나 ‘독립운동가의 아내로만’ 헌신해야만 했을까. 개인의 삶도 복잡한데, 국제 정세가 얽힌 나라를 되찾는 일은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탈식민주의 이론의 시원(始原)인 프란츠 파농은 말했다. “민족해방투쟁(독립운동)은, 빼앗기기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탈식민주의, 즉 포스트콜로니얼(post colonial, 후기식민주의)은 형식상의 주권은 되찾았지만 여전히 이전의 식민 국가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문화적, 사회적으로 가해국에 대한 피해의식, 동일시 욕망, 경쟁심, 원한 등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 가장 ‘웃긴’ 사례가 영연방 경기 대회(英聯邦 競技大會, Commonwealth Games)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예전에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이 무슨 정체성인가? 같은 주인을 모신 나라들의 운동 경기? 사족 - 우연일까, <청연>의 두 주인공 장진영과 김주혁은 지금 우리 곁에 없다.
삼오장 저고리, 금관조복(金冠朝服)으로 시대를 빚어낸 ‘짱구’, 의상 이해윤
“어떻게 보면 가짜 인생이지요. 스크린 의상은 모조품이니까요. 진짜 옛날 장군복을 배우가 입으면 무거워서 움직이지도 못해요.” (의상 이해윤) 1) ‘진짜’가 아닌 ‘가짜’를 관객이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매체인 영화. 영화에서 의상은 의복으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등장인물의 나이, 직업, 성별을 드러내주는 이미지 기호이다. 더 나아가 영화 의상은 등장인물의 심리와 내면을 시각화하고 장면마다의 분위기, 즉 사랑, 환희, 갈등, 절망을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영화 의상은 이렇게 미학적 기능을 하는 동시에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경제적인 효과의 확산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1920년대 할리우드 영화가 산업화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영화 의상도 전문적인 부서로 독립했다. 인기 있는 배우를 만들어 내고, 스타가 된 배우를 관객이 지속적으로 보러 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 줄 아름다운 의상을 입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영화에서 배우 스스로가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 입던 영화 의상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인력이 생겨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가짜 인생’을 위한 ‘모조품’이라고 자조하지만 삼오장 저고리와 금관조복으로 스크린에 조선 시대를 그럴싸하게 펼쳐놓은 이는, 충무로에서 ‘짱구’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이해윤(1925~ )이었다. 그녀가 일을 시작한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사극 영화나 시대물에서 이해윤의 의상을 가져다 쓰지 않은 영화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는 400여 편의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에 맞게 대본을 쪼개어 의상을 구상하는 것은 물론, 대규모 몹신(mob scene)을 위해 삼백 명, 사백 명 의상을 준비하는 일도 도맡았다. 50여 년 동안 배우에게 옷을 해 입힌 이해윤은 남성들이 주로 활동하는 충무로에서 몇 안 되는 여성영화인이었다. (사진1) <춘향전>(이규환, 1955)의 포스터. 이해윤은 동대문 성터에서 촬영하는 변 사또 부임행차에 기생 역할로 영화배우(?) 데뷔를 했다. (사진2) <자유전선>(김홍, 1955) 광고. 김홍의 조감독 백호빈과 알게 되어 <자유전선>에서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활약했다. 이때 배우 임운학을 알게 되어 이후 영화 의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해윤은 어릴 때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웠는데 남달리 여기에 손재주가 있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군 병참군 사령부에 취직해서 군복 수리하는 일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빨랫감을 받아 세탁소를 차린 적도, 편물점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영화계에서 일하던 친구를 통해 이규환의 조감독이던 유현목, 김홍의 조감독이던 백호빈과 알게 되었다. 2) 동대문 성터에서 몹신을 촬영하던 <춘향전>(1955, 이규환) 구경을 갔다가 변 사또 행렬에 동원된 기생 역할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자유전선>(김홍, 1955)에서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배우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역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보다는 바느질에 재주와 관심이 있던 터, 그녀는 <단종애사>(1956, 전창근)부터 영화 의상을 담당하게 되면서 평생을 재봉틀 앞에서 실, 바늘과 함께 했다. (사진3) <단종애사>(전창근, 1956)에서 어린 단종을 연기한 배우 황해남 (사진4) <단종애사>(전창근, 1956)에서 단종비를 맡은 엄앵란. 황해남과 엄앵란은 이 영화를 통해 데뷔했다. 당시 영화에서 의상이란 배우가 자신의 출연료의 일부를 할애하여 옷감을 끊어다가 역할에 맞도록 바느질집이나 의상실에서 직접 맞추어 입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해당되는 것이었고, <단종애사> 같은 사극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이광수 원작의 작품을 유치진이 각본화하고, 전창근 연출, 한형모 촬영의 <단종애사>는 가히 초호화 캐스트를 동원했던 당시 사극영화 상 최대 규모로 이루어진 대작이었다. 바느질 솜씨만 좋았던 이해윤은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던 배우 임운학과 김일해의 지도와 도움으로 잿물에 머리카락을 삶아 직접 망건을 뜨고 수염을 만들었으며, 또 배우들을 머리 빗기고 분장하는 일까지 직접 도맡아 해냈다. 제작부장의 소개로 운현궁 나인 출신을 만나 실물 크기의 도복과 관복, 당의 등을 얻어 확실한 고중을 거쳐 궁중 의복을 재현해냈다. 이 작품을 위해 이해윤은 제작사였던 삼일영화사에서 꼬박 1년을 살았다. 1950년대 후반 한국전쟁 이후 안정을 찾은 영화계는 이규환의 <춘향전>이 흥행에 성공한 후현대극(물론 <자유부인>(한형모, 1956)이 있었지만)보다 사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56년부터는 명승고적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야외 촬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정교하고 거대한 세트에서 화려한 의상으로 스크린을 수놓아 관객을 사로잡는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기획들이 나타났다. 조선시대는 물론 상고시대까지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가히 사극 전성시대였다. <단종애사>를 시작으로 이 해에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마의태자>(전창근), <논개>(윤봉춘), <사도세자>(안종화)에 이르기까지 노장과 중진들이 총동원되면서, 사극 영화는 오락성과 대중성을 장착해 관객의 눈과 귀를 충족시켰다. 비록 16미리이긴 했지만, 1958년 안종화가 국내의 기술과 시설로 <춘향전>을 컬러영화로 제작하면서부터 사극 영화는 점점 더 의상과 소품에도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사진5) <춘향전>(안종화, 1958) 포스터. 사극이 컬러영화를 시도하면서 점점 더 의상에 세심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이해윤이 의상을 처음 담당한 <춘향전>이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사극은 기본적으로 해당 시대의 민속, 언어, 음악은 물론 의상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것이었고, 여기에 의지한 작품이라야 예술성도 살릴 수 있는 법이었다. 이해윤이 그 시작부터 사극 의상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의상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영화의 예술성과 ‘역사적 고증’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익숙한 서사와 화려한 볼거리로 관객들이 구름같이 모이는 “사극이 과연 한국영화예술의 어떠한 위치에서 우리들의 현실에 무엇을 제시해 주고 무슨 예술적인 감명을 줄 수 있느냐”는 비평적 문제 제기 속에서, 종종 고증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영화 의상은 해당 작품의 예술적 결점으로 치부되었다. 3) 오늘날까지도 사극 영화 제작에 있어서의 완벽한 ‘역사적 고증’은 고질적인 딜레마로 남아 있다. 박물관과 도서관의 고서적을 파헤치고 궁중 나인의 도움을 어렵게 받더라도, 이해윤에게 그나마 조선시대는 고증을 통해 제작하기 수월(?)했다. 별 자료 없이 벽화를 들여다보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야하는 상고시대의 의상들은 특히 그녀를 힘들게 했고, 종종 각각 감독들의 까다로운 미학적/경제적 요구와 좀 더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자하는 배우들의 욕망 어딘가에서 ‘역사적 고증’과 절충해야만 하는 이해윤의 난제는 단 한 번도 속 시원히 해결된 적이 없었다. (사진6)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이해윤이 이 영화의 의상을 담당했지만, 주인공 춘향의 의상은 최은희가 직접 지어 입었다. (사진7,8) <춘향전>(홍성기, 1961) 이 영화에서는 춘향 역의 김지미 의상을 비롯, 모든 등장인물의 의상을 이해윤이 담당했다. 홍성기 감독은 이후 이 영화에서 제작한 의상을 모두 이해윤에게 주었다. 1961년은 홍성기와 신상옥의 ‘춘향전 경작’이 단연 화제였다.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되는 이 두 영화의 춘향,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최은희와 떠오르는 스타 김지미를 두고 ‘어떤 춘향이 연기를 더 잘할 것인가, 어떤 옷을 입고 나올 것이냐’에 관심이 쏠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작품의 의상을 모두 이해윤이 담당했다는 것이다! 최은희는 직접 옷을 지어 입어 신상옥의 <성춘향>에서 이해윤은 엑스트라의 옷만을 담당했지만 홍성기의 <춘향전>에서 김지미의 의상을 비롯해 모든 출연자의 의상을 담당했다. 이 경작에서 신상옥이 성공적인 흥행결과를 얻었지만, 이해윤은 의상만큼은 김지미의 것이 아름답고 정교했다고 자부한다. 이렇듯 혼신의 힘을 들여 의상을 제작했지만, 홍성기의 <춘향전>이 실패하는 통에 그녀가 손에 쥔 것은 무더기의 한복뿐이었다. (사진9,10,11) <연산군(장한사모편)>(신상옥, 1961) 이해윤이 신필름에 입사해 금관조복을 제작해 촬영한 장면들. (사진12,13,14) <폭군 연산(복수, 쾌거편)>(신상옥, 1962) 이 영화에서도 역시 수려한 의상 덕분에 꽉 짜인 화면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평을 받았다. ‘춘향전 경작’ 이후 다시 활기를 띤 사극영화의 황금시대에 그녀는 역사적 고증이 확실히 된 의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가 홍성기 감독이 건네 준 의상을 손에 쥐고, 본격적으로 영화 의상에 매진하리라 다짐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춘향>이 끝난 후, 신상옥은 이해윤에게 신필름 의상부 소속으로 함께 일하기를 제안했다. 그렇게 신필름에 들어가 처음 촬영한 작품이 <연산군>(1961)과 <폭군 연산>(1962)이었다. 두 영화는 실물에 가까운 세트에서 당시의 풍속, 기예, 생활을 고증을 통해 잘 살렸고, 특히 소도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역사적 사실을 과감하게 재현하고 수려한 의상으로 인해 꽉 짜인 화면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사진15) <왕자호동>(한형모, 1962)에서 사열해 있는 고구려 병사들의 장면 (사진16) <인목대비>(안현철, 1962)의 한 장면. <왕자호동> 병사들의 옷에 단을 대어, 다음날 <인목대비>의 조선 병사들이 입고 찍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해윤이 의상을 담당했다고 하면 주요 등장인물들 것만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사극의 경우 조연을 비롯한 엑스트라까지 포함하여 기본 200벌(많으면 500벌) 정도의 다양한 의상을 손수 만들어야했다. 한해에 영화 의상을 열 편 이상 담당하는 그녀에게 ‘의상 바꿔치기’(그리고 세탁)는 시간과 공간을 고려해 머리를 써야하는 고난도 기술이었다. 1962년 한해를 예로 들면, 그녀는 <왕자호동>(한형모), <인목대비>(안현철), <폭군 연산(복수, 쾌거편)>(신상옥)의 의상을 동시에 맡았다. <왕자호동>은 삼국시대, 나머지는 두 영화는 조선이 배경이었다. 수백 벌의 의상을 영화마다 각각 제작할 비용도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한 영화에 쓰인 의상을 조금 다듬어 다른 영화에서 촬영하고, 다시 가져와서는 고쳐서 또 다른 영화에 빌려주는 식이었다. 조선시대 의상은 바지나 저고리, 두루마기에 단을 대는 게 특징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단이 없었다. <폭군 연산>을 위해서는 손바느질로 단을 대고, 같은 의상으로 <왕자 호동>을 찍을 때는 부지런히 그 단을 떼야했다. 그리고 다시 촬영 일정에 따라 <인목대비>를 찍는 수원성에서는 단을 붙인 채로 찍고, 밤새워 단을 없애 다음날에는 남한산성의 <왕자 호동> 현장으로 의상을 날라야 했다. (사진17, 18) <칠공주>(정창화, 1962)의 포스터와 스틸 사진. 통일신라의 일곱 공주가 등장하는 이 영화의 의상을 각각 다르게 개성을 살려 만드는 일이란, 의상 담당자 이해윤에게 녹녹치 않은 일이었다.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표준이 되자 관객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사극 배우의 의상은 특히나 중요해졌다. 신라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의 희비극인 정창화의 <칠공주>(1962)는 무려 일곱 공주(문정숙, 이빈화, 전계현, 방성자, 차유미, 김명희, 엄앵란)가 주인공이라 의상이 까다로울 수밖에는 없었다. 조선이 시대적 배경이었다면 치마저고리 일곱 벌의 색깔만 달리해 공주 각각에게 입혔겠지만, 신라가 배경인 컬러 시네마스코프였기 때문에 색감은 물론 옷깃이나 장식 모양을 조금씩 달리해 각 공주들의 성격을 반영하면서 복식을 재현해야 내야했다. (사진19, 20)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의 군인 복장. 이만희 감독과의 논의 끝에 인민군 의상을 근사하게 만들었던 이해윤 역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군사영화에서도 오랫동안 군복을 수선하던 이력의 소유자 이해윤의 바느질 솜씨가 필요했다. 반공법 위반으로 신문지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만희의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1965)>은 감독 뿐 아니라 의상 담당이던 이해윤까지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남한 출신 여자 포로들을 호송하는 인민군 장교의 인간적인 면을 묘사한 이 영화에서 이해윤이 인민군 의상을 근사하게 지었기 때문이었다. 기세등등한 공산당과 인민군을 표현하기 위해 하얀 망이 아닌 새 망으로 탱크 위장망을 치고, 장교 군복을 멋지게 지어 세무(suede) 반장화까지 신겼던 것이 문제였다. 중앙정보부는 이해윤의 의상 창고도 샅샅이 조사하고, 인민군과 중공군 의상에 대한 교육을 한 달이나 받게 해 향후 의상 제작에 있어 반영하도록 했다. (사진21) <하얀전쟁>(정지영, 1992)의 베트남 현지 로케이션 장면. 급히 필요한 미군 작업복을 현지 인력을 직접 고용해 만들어 촬영을 했다. 그 후에도 <8240 K.L.O>(정진우, 1966), <증언>(임권택, 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아벤고 공수군단>(임권택, 1982)을 비롯한 수십 편의 군사영화에서 이해윤은 국군과 인민군, 미군과 중공군의 옷을 지었다. 베트남에서 촬영했던 정지영의 <하얀 전쟁>(1992)에서는 예순이 훌쩍 넘은 이해윤은 홀로 로케이션 현장에서 의상을 챙겼다. 필요한 장면에 따라 연기자들의 의상을 모두 제작해 갔지만 막상 현지에서 미군 작업복이 필요했고, 무작정 사이공 시장으로 내달린 그녀는 말도 통하지 않는 현지 여성들을 고용하여 의상을 만들어 촬영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진22,23) <난중일기>(장일호, 1977) 이해윤이 쇠미늘을 오리고 두드려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무명실로 꿰매 만든 갑옷을 볼 수 있다. 장일호의 <난중일기>(1977)는 그녀로 하여금 영화 의상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사극과 군사영화를 전문으로 20여 년간 의상을 담당했다지만 이 영화에서 이순신의 갑옷을 제작하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갑옷을 입고 호령하는 모습을 통해 당당한 영웅의 면모를 표현하고 올곧은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 연구의 연구를 거듭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우선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뜯어보며 흉내는 내봤지만 어쩐지 입체감이 영 살지 않았다. 생각 끝에 프레스 공장을 찾아가 갑옷에 달 쇠미늘(鐵札)을 오리고 두드린 다음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무명실로 엮어 철갑 두 벌을 만들었다. 한 커트를 찍고 나면 날카로운 쇠미늘에 무명실이 끊어져, 이순신 역의 김진규가 한 벌을 입고 찍고 있는 동안 이해윤은 촬영장 한편에 앉아 나머지 한 벌의 쇠미늘을 다시 꿰매야 했다. 이때의 연구와 노력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새겨져 관객 앞에 펼쳐진 그 순간, 그녀는 영화 의상 담당으로서 새삼 긍지를 갖게 되었다. (사진24)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정창화, 1968) 포스터 (사진25) <소림사의 결투>(채양명, 최현민, 1975) 포스터 (사진26) <무림악인전>(김정용, 1980) 포스터 합작이 시작되고 중국, 홍콩영화가 들어오면서 ‘참바라(ちゃんばら)’ 또는 ‘으악새’로 불리던 검술영화가 많아지면서, 이해윤은 영화 의상에서 ‘고증’은 유명무실해졌다고 토로했다. 4) 공보부에서는 사극이나 시대극영화에서 사학을 전공한 인력을 고증 담당 스태프로 참여시켜 근거 없는 언어, 의상, 풍습을 시정하라고 지시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상영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아보기도 했지만 지켜질 리 만무했다. 5) 궁중을 배경으로 했던 이전의 정사극과 달리 시대적인 배경만을 빌린 야사나 서민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이들 영화에서는 화려한 액션과 오락성이 더 강조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이시기 보편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옷감 나일론(nylon)은 빨아도 구겨지지도 않고 색깔도 선명했다. 면이나 비단처럼 툭하면 찢어지고 구김이 심해 관리가 힘들었던 기존의 의상과 달리 나일론으로 제작한 의상은 공중을 날아 차고 칼을 휘둘러야하는 액션 연기자들이 활동하기에는 적격인 소재였다. 이해윤 역시 ‘중국 건지, 한국 건지, 현대 건지’도 모르게 의상을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나일론 같은 소재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연기자들이 연기하기 편한 의상을 만들고자 했다. (사진27,28) <토지>(김수용, 1974) 이 영화에서 이해윤은 주인공 서희의 나이에 따른,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의상을 준비하고, 역사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일본군, 농민, 양반 옷 할 것 없이 다양한 의상을 지었다. 특정한 장르 영화 제작에서 의상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영화계 내에서 그런 수고를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여러 영화제에서 공로상과 의상 부문의 수상 트로피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중 그녀가 자랑스럽게 꼽는 의상상은 <토지>(김수용, 1974)로 받은 파나마국제영화제 의상상이다.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경남 하동의 만석지기 가문을 지켜가는 서희의 일생을 그린 이 영화에서 주인공 김지미는 어린 서희에서 나이든 서희까지 연기해야 했다. 주인공 서희의 나이에 따른,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의상을 준비해야 했고, 역사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일본군, 농민, 양반 옷 할 것 없이 다양한 의상을 공들여 지어야만 했다. (사진29,30) <어우동>(이장호, 1985) 이해윤은 이 영화에서의 의상에 화려하면서도 작은 변주를 주어 개성을 가미하려 시도했다. (사진31)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 한 서린 송화의 내면을 드러내 주는 팥색 저고리 그녀에게 <어우동>(이장호, 1985)의 의상은 화려하면서도 작은 변주들을 주어 신선한 개성을 가미하려고 애썼던 것이라,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 한 서린 송화의 붉은 팥색 저고리는 두루마기를 뜯어 방망이로 종일 다듬어 반질반질한 비단의 느낌을 살려서 만든 것이라 소중하다. 한 겨울 장면이라 엑스트라들 안에 입는 옷들까지 모두 누벼 주어야 해 너무나 고생스러웠던 작품 <개벽>(임권택, 1991), 그리고 연일 40도를 웃도는 멕시코에서 재봉틀을 돌려 의상을 수선했던 작품 <애니깽>(김호선, 1996) 역시 이해윤에게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사진32,33,34) <개벽>(임권택, 1991) 이해윤이 빛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영화라고 소회하는 <개벽>은 겨울 장면이 많고 엑스트라가 다수 등장해 특히 공들여 의상을 지었다. (사진35,36) <애니깽>(김호선, 1996)은 1900년대 초 멕시코로 이주 노동을 해온 조선인들의 생활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해윤은 현지에서 재봉틀을 돌려 의상을 수선해 가며 촬영에 임했다. 이해윤처럼 많은 영화에서 꼭 필요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의 뒤에 또 영화사의 뒤안길에만 존재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현장에서 이들은 ‘뒷 스태프’(편집, 미술, 특수효과, 소품, 녹음, 의상 등)라고 불렸는데 오랫동안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연출, 촬영, 연기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만큼 대우받지 못했고, 정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과 작가 위주의 연구 경향으로 인해 영화사적으로도 거의 주목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뒷 스태프’에 대한 문헌자료도 충분치 않은 것은 물론 그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다. 2004년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은 ‘원로영화인 구술사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가려져있던 많은 ‘뒷 스태프’의 역사가 발굴, 기록되고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이해윤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영상 뒤에 숨은 여성마술사들, 의상전문가 이해윤 씨’, 《경향신문》 1986년 1월 29일 7면. 2) 「이해윤 : 바늘 하나로 영화를 아름답게, 40여 년간 충무로를 지켜온 영화의상 디자이너」, 『이야기 여성사: 한국여성의 삶과 역사2』, 여성신문사, 2000, 263~264쪽. 3) ‘신영화 : 사적 고증이 결여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한국일보》 1956년 6월 14일 4면. 4) <이해윤 은막의 스타, 그 날개를 달다>(나윤희, 부동산 TV, 2001).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한 이해윤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www.koreafilm.co.kr에서 볼 수 있다. 5) ‘[연예계스냅] 사극 고증 철저히’, 《경향신문》 1967년 12월 23일 4면.
[테마연재]개인의 시대와 매체의 윤리: 소셜포비아
8월부터 12월까지 10회에 거쳐,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씨의 영화 리뷰를 정기적으로 연재합니다. 영화비평과 서평 분야에서도 활발한 글쓰기를 해 온 필자는 기존의 젠더(gender) 개념을 확장, 메타 젠더적 시각에서 새로운 영화 읽기를 시도하고자 합니다. 장르와 주제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영화를 대상으로 우리 시대 주요 이슈에 대한 필자의 '다른 목소리'를 기대합니다. <소셜네트워크> 너머, < 소셜포비아 > <소셜포비아>는 인터넷 세계를 다룬다. 이 시대에, 인터넷을 ‘진짜’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virtual reality) 혹은 ‘가짜’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가상현실, 즉 ‘그럴듯한, 사실상의, 현실과 다름없는, 실질적으로, 잠재적인 현실’의 의미를 최대한 확장시키고 있다. 이제 가상현실은 ‘假像, 假想, 假相’이라고 해도 모두 말이 된다. 특히, 이 영화처럼 온라인에서 싸웠던 사람들이 실제 오프라인의 상대방을 찾아갔다가 벌어지는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물론, 온라인 베틀과 달리, 여성 한 명 vs 무리의 젊은 남성들의 만남은 온/오프의 평등성을 무너뜨리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이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현피', '키워', '안구 정화' 등의, 모르는 단어/험악한 표현/줄임말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나 인터넷 유저가 아닌 사람에게는 ‘어려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각본을 쓴 홍석재 감독도 인터넷을 따로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체 사용 여부가 곧 매체의 특성을 인식할 수 있는 전제는 아니다. 문제는 찬반 논쟁, 유저인가 아닌가, 인터넷에 우호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도구(매체)는 인간의 조건을 바꾼다.”는 사실,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공유하는 실천이다. 인터넷 환경은 기술적, 담론적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 소셜포비아 > 제작 당시였던 2014년의 용어는 벌써 공용어가 되었고(‘현피’는 국어사전에 등재되었다), '흉자', '태일해', '세월호 어묵'까지 매일 새로운/끔찍한/기발한 용어와 이벤트가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은 접근하기 두려운 고통스러운 언어들이다. 이 영화가 불편한 관객층은 인터넷 용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기성세대가 아니라 인터넷 헤비 유저(heavy users)들일 것이다. 아이디(ID)를 몇 개씩 가지고 있으며, 거의 하루 종일 키워드 노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모르거나 볼 가능성이 작다. 이 영화가 불편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이들은, 서구를 추격해야 한다는 식민성에 기반한 발전주의자(progressives)이되 어느 정도의 공공성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진보 진영(progressives)일지도 모른다(물론,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 영화는 제작하는 인간(호모 파베르),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의 특성, 인류의 제작성(자기 몸의 확장성)을 직면하는 작품이다. 때문에 ‘환경 영화’이기도 하다. 체르노빌부터 후쿠시마가 남의 일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 7월 말, 대한민국 서울의 기온은 40도에 육박하고 있다. 무엇인가가 도래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같다. <소셜포비아>는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이 외면하거나 무지한 분야인 매체의 정치경제학과 문화 권력에 관한 뛰어난 작품이다. 아마 바우만이나 프랑코 베라르디,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같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들이 묘사한 한국 사회를 다시 썼으리라. 그들은 “이 시대의 금융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악마는 이케아와 페이스북”이라고 했는데, 한국 사회 버전은 '다이소, 몰카, SNS' 쯤 되지 않을까. 영화적 완성도도 뛰어나다. 스토리텔링의 짜임새, 화면의 윤리성, 연기, 연출 모두 좋다. 2억 원의 제작비와 102분의 상영 시간으로 신자유주의, 매체 경제학, 변화하는 윤리와 자아, 개인의 개념, 젠더, 대중까지 근대성의 거의 모든 키워드를 연결(arrangement)한다. 그 연결도 매우 흥미롭다. 현피는 ‘현실’의 앞글자인 ‘현’과 ‘Player Kill’의 앞글자인 ‘P’의 합성어로, 웹(web)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 오프라인에서 실제 살인이나 싸움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어떤 10대 학부모가 내게 한 말인데, 그들은 현피가 정기적으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피 덕분에 학교도 안 가고 친구도 없고 방안에만 처박혀 나오지 않던 아들이, 드디어 집 밖으로 나가 온라인 동료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갔다는 것이다(이 부모는 “아이가 강원도까지 갔다”며 흥분했다). ‘키워’는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의 줄임말로 컴퓨터 자판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戰士)를 말한다. 이들은 강력한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듣는 사람(오프라인)의 무시’라는 더 큰 ‘권력’ 앞에서는 무기력한 존재다. 그들의 노동은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 '찌라시' 뿐일 수도 있다. 온라인의 물리력이 오프라인에서의 권력으로 계량할 수 있는 인식론이나 방법론은 ‘영원히’ 불가능하므로 온라인의 영향력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1인 매체와 인간의 조건 일본의 젊은 연구자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삼인, 2007)를 썼다. 원제 그대로 『不安型ナショナリズムの時代―日韓中のネット世代が憎みあう本當の理由』, 이 책의 주제는 젊은이들이 자신에게 닥친 실업 문제를 인터넷을 통해 어떻게 자체 해결(도피)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불안형 내셔널리즘 시대’라고 명명한다. 인터넷 한․중․일전(戰). 내 기억이 맞는다면, 세 나라 남성들이 ‘3국 여성 미모 콘테스트’를 열어 인터넷 투표도 진행했다(당시 한국 남성들은 배우 김희선 씨를 국가대표 미인으로 선정했다). 다카하라 모토아키는 한․중․일 청년들이 각국의 본격적인 글로벌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저항 대신, 자신들을 해고 시킨 바로 그 기술(인터넷)을 사랑한다고 지적한다. 이 도구로 내셔널리즘만 한 것은 없을 것이고, 효과는 막강했다. 결국 자기 사회의 경제적 현실을 은폐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키보드 노동에는 시간과 열정이 필요하다. 그럴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들의 문화다. 게임 중독이나 혐오 발화는 “인간성 타락” 아니라 실업 문제다. 많은 이들이 SNS의 장점이자 단점을 속도와 순간적 영향력이라고 말한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극복하자? 하지만 매체, 미디어는 그 자체가 매시지 즉 정치다. 소위 ‘바람직한 방향’ 혹은 자신과 입장이 비슷할 경우에는 장점을 극대화하고(촛불 시위나 페미니즘의 확산...), 반사회적 현상(몰카, 혐오..)에 대해서는 법적 제재나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대책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누구도 타인의 도구 사용을 원천적으로 금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더구나 완전히 대중화, 개인 소지품이 된 컴퓨터를?) 또한, 그 어떤 도구도 장단점이 있다. 발명전부터 나쁜 동기를 가진 매체는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좋은 뜻이었거나 그런 의도였다고 강변한다(황우석 씨 사태가 좋은 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은 사람들의 고된 노동에 대한 안타까움이 동기였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의 핵심은, 핵이든 콘돔이든 다이너마이트든 SNS이든 이 모든 ‘오브제’들이 인간의 삶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나는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발명품을 꼽으라면 인쇄술, 콘돔, 인터넷이라고 생각한다. 콘돔은 인구 조절과 인류의 반 이상인 여성을 평생 동안의 임신과 육아에서 해방시켰으며, 인쇄술과 인터넷은 인간의 언어와 그에 따른 총체적인 구조 변동(국가의 출현 등)을 가능케 했다. SNS는 혁신적인 매체다. 그만큼 중요하다. 은행 건물도 없는 아프리카의 내전 국가에서 스마트 폰을 가진 몇몇 부자들은 인터넷으로 국제 금융 시장에서 주식 투자를 하고 돈을 번다. 포스트스페이스, 포스트휴먼의 시대다. SNS의 평등주의? 몇 년 전 나는 SNS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느 ‘명망 있는 남성 지식인’이 내 글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혹평을 했고, 그의 페이스북에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른 사건이 있었다. 지인이,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의 명단을 내게 보내주었는데, 내 친구까지 있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요지는 “당신(나)은 신문 지면을 갖고 있으므로 매체가 있는 기득권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SNS가 지면이므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이기적”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SNS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1인 매체의 등장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업이 SNS에 글을 쓰는 사람의 ‘인생고(capacity)’와 어느 정도 ‘평가받은’ 단행본을 10권 정도를 낸 사람의 삶은 같지 않다. 그러나 SNS 문화는 후자를 기득권자이자 '골고루 평등'을 위해, 더 이상 글을 쓰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간주한다. SNS가 필요한 사람들은 또 있다. SNS에서 자기선전 후 오프라인에서 픽업되어야 하기 ‘때문에’ SNS가 필수적인 사람들이다. 이미 신문 등 기존 매체들은 소위 오피리언 리더들의 페이스북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페이스북을 기사화한다. 취재가 필요 없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페이스북에 쓴 글을 책으로 묶어내는 일도 심심찮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이러한 현상의 바람직 여부가 아니라 자아실현, 자기 PR 도구로서 SNS의 절대적 유용성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몇 년 이상의 노력과 노동, 비용을 기울인 저작에 대해 '최악', '저질', '친일' 등의 댓글 테러로 그 텍스트들이 평가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그런 힘이 있다면, 디스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형태의 ‘자아실현’이 만연한 사회라면 공동체는 무너질 것이다. 이전 시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종이 신문이 인터넷으로, TV보다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에 개인(the person)의 노력과 능력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사회 정의로서 평등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individuals)인 인간은 모두 같다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평등(sameness)’, 즉 전체주의다. 평등은 지구상 70억 명 인구가 모두가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등은 구조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것이지 개인들의 개별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평등. 이것이 역설적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가 허용되는 이유다. 성별, 인종, 나이에 따른 차별이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차별을 인식하고 사회를 바꾸는 대신 차이가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혐’이나 ‘여혐’이나 다 똑같고, 억울하면 너도 혐오 발화를 하라는 식이다.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이나 이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이나 모두 같은 페미니즘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페미니즘‘들’이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온라인에서 ‘차이’ 혹은 위계를 결정하는 요소는 단, 한 가지다. 강한 멘탈. 사회성과 타인, 인간관계를 무시하는 정신 승리,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강심장, 거침없는 뻔뻔함, 누가 더 ‘기’가 세고 거짓말을 잘하는가이다. 혐오 발화의 능력도 바로 이 무신경함에 달려 있다.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민감한 사람은 ‘루저’가 된다. ‘홍어’나 ‘오뎅’ 같은 슬프리만치 끔찍한 비인간적 발화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찬양하는 극한의 비윤리성에서만 가능하다. < 소셜포비아 >의 채팅 장면과 배우 류준열 의 명연이 돋보이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에 대한 감독의 비판 정신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의 시대 SNS가 ‘논쟁’, ‘민주주의’의 장이라고 거짓말하거나 믿거나 착각하는 사람은 마크 주커버그 말고도 많을 것이다. 내 경험(주로, '미투'와 성폭력, 젠더 관련 사안)에서 보면, SNS에서의 대화는 만나서 이야기하면 해결될 문제를 관중을 모셔놓고 마치 검투사처럼 논쟁(?)을 벌임으로써 공연을 하는 듯하다. 대화를 통해 ‘진실’을 밝히기보다 여론전에 주력하는 것이다. 이때 승패는 키보드 속도와 상대방에게 효과적으로 모욕을 줄 수 있는 능력, 꼬투리 잡기, 열 받게 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SNS의 특징은 속도가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1인 미디어라는 데 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인터넷 셀럽’이 때론 국영 방송사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트위터의 경우 어느 유명 지식인의 팔로워가 100만 명에 육박했는데, ‘6대 종합일간지’의 중 모 신문사의 팔로워는 60만 명선이었다. 노조원 만 명이 넘지만 (두 개의 노조가 있어서) 민주노조의 트위터 팔로워는 400명인데, 매스컴 플레이에 익숙한 ‘노조 활동도 하지 않는 스타 노동자’의 팔로워 수는 5만 명이었다. 문제는 이 노동자가 노조의 합의된 공식적 입장을 자신의 SNS 파워를 이용, 사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거짓 선전을 반복했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개인의 힘이 극대화된 시대가 존재했던가. 어느 누가 이 무한한 자기 만능 감을 선사하는 이 매체를 포기하겠는가. 스마트폰은 이미 우리 몸이다. 맥루한의 명언, 미디어는 우리 몸의 확장이다(extention of men). 게다가 별다른 규제도 없다. 근거 없는 비난, 혐오 표현, 신상털기 모두 완벽하게 가능하다.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무시해라, 집착 마라”, “탐라(타임 라인)일 뿐이다”, “SNS에 들어가지 말라” 등의 ‘위로’ 혹은 피해자 비난을 들을 뿐이다. SNS의 ‘부작용에 대한 무시’는 해결이 아니다. 홍석재 감독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이들을 괴물로만 보지 말아 달라”고 말했지만, 이들은 이미 ‘괴물’이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끔찍했던 이가 오프라인에서 지극히 평범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인 사건들을 알고 있다. 문제는 나를 포함, 인간은 모두 그럴 가능성이 있다. 사실 나는 온라인의 피해자도 피해자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용자(가해자)’가 SNS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 소셜포비아 >는 근대 초기 신분 사회로부터 해방된 자유주의적 개인이 이후 100년이 지나자마자, 신자유주의적 각자도생의 개인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통치자로서 개인의 힘은 막강해졌지만, 사회적 자아는 모두 자본에 종속되었다. 각자도생 시대의 개인의 자유는 통치 원리인 ‘힘센(비윤리적인) 개인’의 등장이며, 결국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파괴한다. < 소셜포비아 >의 착목 지점, 글쓰기 1인 매체의 시대. 매체만으로는 완전히 평등하고, 나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고, 어떠한 노력도 필요 없는 시대. 누구나 판관, 감별사, 평론가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런데, 이들이 오프라인으로 나올 때 혹은 두 세계를 병행할 때, < 소셜포비아 >의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등장한다. 감독의 영리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대사 그대로,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에고는 강한데, 그에 걸맞은 알맹이는 없는 사람. 타인을 비난하는 데 익숙하지만, 자신은 절대 견딜 수 없는 욕먹음(커멘트)”. 그녀는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 강의를 듣는 학생, 작가 지망생이다. 글쓰기의 정의는 이견이 없다. 글은 ‘자기’ ‘생각’을 ‘표현(재현)’하는 ‘노동’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법이고, 생각하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다. 글쓰기는 중노동이다. 글쓰기는 두렵고, 어렵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SNS에서의 글쓰기는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도 손쉽고 이익이 막대한 돈줄이자 중우(衆愚) 정치다. 키보드 사용자의 노동과 시간은 고스란히 ‘구글’이나 ‘삼성’이 가져가지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바친다. 그 대가는? SNS에서의 글쓰기는 매체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자기 홍보, 자기주장, 자기도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기 조작을 넘어 자기 망상으로 진화하는 경우도 숱하다. 나중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우며,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어느 축구 감독의 말대로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SNS 헤비 유저라면 ‘지식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SNS에서는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요구받지도 않는다. SNS에서의 자아와 현실에서의 자아는 다르다. 일상적 공간에서도 다른데(예를 들어, 혼자 있을 때와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 관음증과 노출증을 전제로 하는 공간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는 불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여자 주인공이 타인의 커멘트를 극도로 기피하는 것은 조금도, 부분적으로도(타인에 비친) 자신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욕망은 포기하지 못해서 온라인으로 도피한다. 만일, 그녀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한 곳에서만 글쓰기에만 매달렸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는 대사를 보자. “한국에 간첩이 몇 명인지 알아? 오만이야. 오만. 그렇게 많은데, 왜 안 잡히는 줄 알아? 자기들끼리 서로 상대가 간첩이라며, 간첩을 잡으러 다니거든.” 이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이 각자 누구인 줄 모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라운드 제로에서 서로를 외면한 채 똑같은 제복을 입고 뫼비우스 띠의 선상(線上)을 헤매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우리는 자신이 ‘간첩’인 줄 모르는 간첩들이다. 모두 개성을 주장하는 개성 있는 다름(distiction)을 주장하는 개인들이되, 개별적으로 자본에 포섭되어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모두가 모두의 아바타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쇄물(책)을 소환할 때다. 아, 책도 온라인에서 파는군. 지금으로서는 잠시 SNS을 중단하고 오프라인에서 글쓰기가 유일한 저항처럼 보인다. 너 자신을 알라. 생각을 하라. 죽도록 연습하고 표현하라.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백미는 글쓰기 수업 파트다. 소셜 네크워크의 본질을 꿰뚫는 감독의 통찰력과 영화를 만드는 뛰어난 ‘작전 구사력’이 돋보인다.
[한국영화걸작선] 살인마: 8월의 영화Ⅰ
표현주의적인 세트에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강렬하다. 주인공 이시목( 이예춘 )은 전시회를 찾았으나 작품은 하나도 없고 휑하다. 그런 가운데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곳에 유일하게 걸려 있는 사별한 아내 애자( 도금 봉 )의 초상화에서 소리가 난 것이다.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그림의 얼굴은 마치 얼음 녹듯 녹아내린다(여기서 첫 번째 충격!). 이윽고 한 남자가 그를 차에 태워 어딘가로 데려간다. 바깥에는 마치 좀비처럼 몰려다니는 귀신들이 쫙 깔려 있어 달아날 수도 없다(여기서 두 번째 충격!). 그렇게 도착하자, 또 다른 낯선 남자가 등장해서는 “잘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그러다 초상화의 주인공인 여자가 나타나고 두 번째 낯선 남자의 등에 칼을 꽂고 유유히 떠나간다. 시목은 그걸 침대 아래에 숨어 뛰어오르는 여자의 발만 본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모든 동작이 이상하다. 그리고 고양이의 실루엣이 은은하게 비친다(여기서 세 번째 충격!). 맞다, 그녀는 고양이다. 고양이 귀신이다. 한국 장르 영화 팬들에게 이용민 감독의 < 살인 마 >(1965)는 단연 ‘발견’의 영화다. 이미 발견된 지가 오래되어 이런 표현을 덧붙이는 게 다소 민망하긴 하지만, 어쨌건 < 살인마 >는 많은 평자들이 ‘동양과 서양의 괴담이 뒤섞인 한국 공포영화의 초기 대표작’으로 수없이 얘기해왔다. 앞서 얘기한 도입부는 10분 동안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공간 또한 쉴 새 없이 바뀌며 군더더기 없이 꽉 짜여 진행된다. 낯선 남자의 차에 엉겁결에 올라탄 주인공의 두려움에 이입되어 그야말로 정신없이 휩쓸려간다. 그 속도감과 박력이 어마어마하다. 이후 시목은 화가로부터 애자의 초상화를 받게 되는데, 그 초상화를 집에 가져온 이후부터 집에 괴이한 일이 연달아 발생한다. 오래전 죽은 애자가 나타나 아이들을 잡아가고, 어머니 허 씨( 정애란 )에게는 고양이의 혼이 씌어 이상한 행동을 한다. 심지어 재혼한 아내 혜숙( 이빈화 )은 애자의 혼령에게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다. 초상화가 이 모든 사건의 화근이라고 생각하고 없애버리려고 할 때쯤, 화가의 일기를 통해 아내와 애자와 자신의 가족에게 벌어진 비극의 전모를 알게 된다. 한국영화감독협회가 기획하고 영화평론가 김종원 이 대표 필자로 참여하여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영화감독사전』에서 이용민 감독은 “일본대학 예술과 영화부를 졸업한, 촬영감독 출신의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를 대표하는 공포영화 감독”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 스타일에 대해서는 “토속적 소재를 바탕으로 해서 정통적 공포영화를 연출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제주도의 풍물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 제주도 풍토기 >(1946)로 영화 작업을 시작했고 최은희 , 김승호 , 김진규 , 구봉서 , 김희갑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총출동한 코미디영화 < 맹진사댁 경사 >(1962)로 큰 흥행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공포영화였다. 액션 영화 하면 정창화 감독을 떠올리듯 공포영화 하면 이용민 감독이었다. 사람의 피를 마시는 악의 꽃을 이용해 한을 푼다는 < 악의 꽃 >(1961)을 비롯해 시네마스코프의 미장센이 돋보이는 < 지옥문 >(1962), 무려 결혼 첫날 밤 아내의 기이한 행동에 남편이 심장마비에 걸려 죽는 < 무덤에서 나온 신랑 >(1963), 이예춘 과 도금봉 이 다시 만난 < 목 없는 미녀 >(1966) 등 제목만으로도 그 필모그래피는 으스스하다. 일본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았던 촬영의 대가 이용민 감독은 바로 이 공포영화 장르에서 다양한 카메라 워크와 특수촬영 등 발군의 실력을 과시했다. 무엇보다 영화 내적으로도 < 살인마 >는 소복을 입은 전통적 ‘여귀’가 등장하는 가운데 ‘흡혈’과 같은 외래적인 요소를 녹여낸 하이브리드한 솜씨가 눈에 띈다. 제작된 시대를 감안하면, 억지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세련되게 느껴진다. 드라큘라가 십자가를 무서워하듯 염주를 무서워하여 불교에 의해 퇴치된다는 설정도 독특하다. 또한 시어머니에게 고양이가 ‘빙의’하여 손자들의 얼굴을 혀로 핥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게다가 거기에는 고부 갈등과 처첩 갈등이 한데 엮여 있고,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를 떠올리게 하는 부르주아 가정 내부의 뒤틀린 욕망까지 숨어 있다. 『근대성의 유령들-판타스틱 한국영화』를 쓴 김소영 교수에 따르면, 1960년대 공포영화의 주 관객층이 ‘시어머니의 인가를 받아 외출을 시도한 동네 아주머니 부대’였다는 사실에 입각해, < 살인마 >의 경우 압도적으로 여성 관객이 많았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월하의 여곡성-여귀로 읽는 한국 공포영화사』에서 백문임 교수는 “희생자인 며느리가 생전에는 조신하고 얌전했다가, 원귀가 된 이후에는 가공할만한 욕망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괴물이 된다”며 “< 살인마 >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주인인 ‘(본)처’라는 존재를 더 이상 순응적인 존재로 그리지 않음으로써 가족에 대한 기존 관념을 와해시킨다”고 쓰고 있다. 더불어 “가장 충격적인 설정은 바로 40대의 시어머니가 자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감히’ 발현할 뿐만 아니라, 외간 남자와의 애정 행각을 은폐하기 위해 며느리를 살해한다는 점”이라고도 덧붙인다. 어쩌면 장르를 초월해 당대 가장 도발적인 영화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복해서 볼 때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처럼 < 살인마 >는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한국 장르영화사(史)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