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감점기 극장
용산지역에는 상설극장이 아닌 가설 형태로 극장이 처음 들어섰다. 가장 먼저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용산무동연희장(龍山舞童演戱場)인데, 용산의 넓은 빈터에 천막을 두른 가설 형태의 연희장이었다. 이 같은 가설 형태의 연희장은 극장이 존재하지 않던 조선에 근대식 상설 연희장이 설립되는 데까지 중간적인 위치를 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료] 용산좌 신년 광고(《조선신문》, 1913.01.01) 용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상설극장은 용산좌다. 1906년 말 용산 영정(榮町)에서 개관했다. 현재 용산 원동교회 근처에 있었으며, 개관 당시 좌주는 사사베 모쿠자에몬(笹部杢左衛門)이었다. 1911년 5월에는 다케모토(竹本水朝) 일좌(一座)가 조루리의 일종인 오사카 여성 기타유(大阪娘義太夫)를 공연했고, 1912년 2월에는 나카무라 카시쿠(中村かしく) 일좌가 나니와부시를 연극(芝居)으로 상연했다. 1913년 신년 광고를 보면, 당시의 흥행주는 아시자와 쓰야(蘆澤つや)라고 한다. 일본의 전통 연희를 주로 상연하던 용산좌는 1917년 개성좌(開盛座)로 개칭되었다. 개성좌의 흥행주는 계약에 따라 자주 바뀐 듯하다. 예컨대 1924년 1월 5일자 《조선신문》에 게재된 개성좌의 광고를 보면 “용산 영정 개성좌 하타다흥업부(畑田興業部)”라고 기록된바, 당시 개성좌는 하타다 흥업부가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성좌는 소규모 흥행 회사들이 일정 기간 대관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성좌와 같은 작은 극장은 공연에 대한 기록보다는 사건 사고로 신문 지면에 존재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인용해 보자. 7日 午前 한 時頃에 市內 元町 3丁目 開盛座 2層에서 불이 이러나 一時 騷動을 하얏스나 卽時 鎭火되얏다는데 原因은 화로불에서 불이 붓흔 것이라 하며 損害는 약 6圓假量이라더라. 1 11월 7일 오전 1시경에 개성좌 2층에서 화롯불에서 옮겨 붙어 화재가 발생하여 일시 소동이 일어났으나 금방 진화되었다는 기사이다. 또 다른 기사는 배우가 되고자 개성좌에 들어간 한 여인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그 어머니가 용산경찰서에 신고한 사건을 보도한다. 이것도 인용해 보자. 시내 죽첨뎡 이뎡목 이십륙번디(市內 竹添町 二六) 최성녀(崔姓女)의 둘째딸 박뎡옥(朴貞玉)은 금년 열여섯 살 되는 어엽분 소녀인바 배우 되기가 소원이여서 자긔 어머니의 승락으로 구룡산에 잇는 개성좌(開城座) 2 라는 연극단에 드럿든바 다닌 지 몃칠 되지도 안어서 지난 이일부터는 집에도 도라오지 안코 전긔 연극단에도 나오지 안음으로 그의 어머니는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을 해 본 결과 연극을 가릿킨 하고 시고가티 부터단이든 전긔 개성좌의 남자 배우 백운옥(白雲玉)(23)이란 자가 유인하여 가지고 시내 주교뎡 모처(市內 舟橋町 某處)에 은거하였다는 말을 듯고 지난 삽아일에 룡산경찰서(龍山警察署)에 호출하여 동 서에서는 그날로 백운옥이란 자를 인치한바 백운옥은 사실을 자백하엿다 하며 엄중히 설유한 후에 내여 보내리라더라. 3 16세 처녀를 배우 시켜준다며 유인하여 가출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개성좌의 남자 배우가 조선인인 것을 보면 이 즈음에는 조선인 극단이 개성좌를 대관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개성좌에서 흥행하던 흥행사가 천연두에 걸려 극장을 비롯해 그 일대를 소독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개성좌에서 흥행하던 흥행사와 시내의 도박꾼들이 미생정(弥生町) 유곽에서 도박을 하다 일망타진당한 사건도 기록이 있다. 구용산에 자리했던 개성좌는 사건 사고로 먼저 기억되는 공간으로 1940년대 초반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 사쿠라좌의 1916년 신년광고(《경성일보》, 1916.01.05) 구용산에 용산좌와 그 후신인 개성좌가 있었다면, 용산역 정면의 신용산에도 극장이 있었다.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가 이끄는 일본의 신극 단체인 예술좌(藝術座)가 1915년 11월 공연했던 장소가 용산의 사쿠라좌였다. 한자로는 ‘櫻座’ 혹은 ‘佐久良座’라고 표기한다. 사쿠라좌는 1910년 5월 건물을 낙성하고 8월부터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던 시기로, 개관 당시의 좌주는 야마네 효스케(山根兵助)였다. 아래의 기사는 사쿠라좌에서 흥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리는 내용이다. 龍山 新市街 山下町 에 建築 中 이던 大劇場 櫻座 ᄂᆞᆫ 內部 의 設備 ᄀᆞ 旣 히 完成 되얏슴으로써 來月 上旬 부터 日本 大阪 一等 俳優 ᄅᆞᆯ 招聘 하야 演劇 을 開始 하기로 目下 交涉 中 인 同座 ᄂᆞᆫ 前 朝鮮日之出新聞社 記者 ᄅᆞᆯ 聘 하야 顧問 으로 定 하고 諸般 의 改善 을 謨 한다더ᄅᆞ 4 조선 내 일본어 신문인 조선일지출신문사(朝鮮日之出新聞社)에 근무했던 기자를 고문으로 하여 문을 연 사쿠라좌는 연극 등 무대 공연을 주로 흥행했으나, 1915년 무렵 용광관(龍光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전문적으로 상영하게 된다. 용광관은 1917년 1월 현재 닛다연예부(新田演藝部)와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닛다연예부에서는 용관관 관리를 위해 다카하시 류타로(高橋立太郞)를 출장원으로 파견했다. 용광관은 훗날 이름을 용산극장으로 바뀌었다. 용산에서 경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룡관(京龍館)은 경성 외곽의 극장 중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영화관이었다. 1920년 12월,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를 비롯해 이시즈카 가네키치(石塚謙吉), 다니구치 가메타로(谷口龜太郞) 등 경성의 일본인 유지들이 경성과 용산 사이 과거 연병장 자리에 활동사진관 설립을 출원, 주식을 발행하고 자금을 모집하여 자본금 20만원에 불입금 5만원 규모의 주식회사 경룡관을 조직했다. 그리고 1921년 7월 19일 활동사진관 경룡관을 개관했다. 경성부 한강통 3번지 14에 자리한 경룡관은 활동사진, 기타 흥업에 관계된 일체의 사업 및 부대사업을 목적으로 했다. 주식회사 경룡관의 주요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대표 이시하라 이소지로와 이사 이시즈카 가네키치, 다니구치 가메타로 외에도 다테야마 가쓰요시(立山勝喜), 우에다 헤이자부로(上田兵三郞), 마에카와 도요지로(前川豊次郞), 진나이 시게키치(陳內茂吉) 등 이사진과 감사 도이 가즈요시(土井一義), 가네코 도요조(兼古禮藏) 등이 있었다. 5 주식회사 경룡관은 1923년 주식회사 성남연예(城南演藝)로 이름을 바꾸었다. 개관 직후 경룡관은 닛카쓰 연맹에 가맹하고 닛카쓰의 영화들을 주로 상영했다. 그러나 1922년 5월 곳카쓰(國活) 직영으로 바뀌었고, 1923년 5월부터는 각종 연희물을 상연하며 경룡좌(京龍座)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1924년 1월에는 중앙관(中央館)과 공영 형태로 마키노키네마(マキノキネマ) 직영관이 되어 마키노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1941년 10월 3일, 경룡좌는 극장을 새롭게 정비하고 이름을 성남극장이라 바꾸었다. 1943년 당시 성남극장은 홍계 계통의 극장으로 객석은 총 750석 규모였으며, 흥행주는 우에다 도모요시(上田友義)였다. 해방 후에도 존속하던 성남극장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서면서 영화 관람 문화가 크게 변하던 2003년 폐관하게 된다. *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 “개성좌에 소화(開盛座에 小火)”, 《매일신보》, 1928.11.08. 2) 원문의 "개성좌(開城座)"는 개성좌(開盛座)의 오기로 추정된다. 3) "여우 견습 유인(女優見習誘引)", 《중외일보》, 1930.01.15. 4) “사쿠라좌의 무대 개시(櫻座의 舞臺開始)”, 《국민신보》, 1910.08.19. 5) 『朝鮮銀行會社要錄』, 中村資良, 東亞經濟時報社, 1921년판, 232쪽. * [사진] 1921년 개관한 경룡관 외관(《경성일보》, 1921.07.20) [자료] " 小野 小林 兩 判事 龍山 方面 에 出動, 룡산극장에 생긴 사건 殺人 事件 檢證次 로", 《동아일보》, 1930.11.09 금 八 일 경성지방법원 형사합의부 소야 ( 小野 ), 소림 ( 小林 ) 량 판사는 동부 서긔 통역을 대동하고 목하 공판 진행 중의 피고 매원진웅 ( 梅原辰雄 ) 에 대한 상해치사 ( 傷害致死 ) 사건의 검증 ( 檢證 ) 을 하기 위하야 시내 룡산 ( 龍山 ) 방면에 출장하얏는데 사건은 금년 봄 룡산극장 ( 龍山劇場 ) 에서 대소롭지 안흔 일로 피고 조선 사람과 말다틈을 하다가 그를 ᄯᅡ려 죽게 한 것이라는 바 검증 여하에 ᄯᅡᆯ하서는 피고의 범죄 소위가 살인죄로 될는지도 모르리라 하야 매우 주목된다고 한다 . [자료] " 京城 에 天然痘 發生, 龍山 開盛座 에서 興行師 가 發病 ", 《매일신보》, 1938.03.29. 선만 각지를 순회 중에 잇든 『 만사이 』 사 림정웅 ( 萬歲師 林靜雄 )(44) 일행 八 명은 지난 十二 일 입성하야 부내 영정 ( 榮町 ) 개성좌 ( 開盛座 ) 에서 흥행 중이엇섯는데 지난 卄一 일 밤 림정웅은 별안간 몸에 열이 올라 시름 へ 알코 잇섯슴으로 무슨 병인지를 몰르고 잇든 중 卄八 일 오후 령시 三十 분경 부 위생과 ( 府衛生課 ) 의사가 출장 진단한 결과 의외에도 진성 천연두 ( 眞性 天然痘 ) 로 판명되어 동 좌 일대는 잠시 동안 대소동을 이르키엇는데 부 위생과에서는 즉시 룡산서 ( 龍山署 ) 와 협력하여 가지고 동 환자를 순화병원 ( 順化病院 ) 으로 옴기고 좌원 ( 座員 ) 八 명의 다니든 곳과 개성좌 원정 ( 元町 ) 一 정목 영정 ( 榮町 ) 일대와 그 부근 전부를 대소독하는 한편 이튼날 卄九 일 오전 十 시부터는 영정 ( 榮町 ) 원정 ( 元町 ) 一 정목 경정 ( 京町 ) 대도정 ( 大島町 ) 일부의 거주자 약 三 천여명을 원정 소학교 강당 ( 小學校 講堂 ) 으로 소집하여 가지고 임시 종두를 행하기로 되였다 . 그리고 림정웅은 황군위문 ( 皇軍慰問 ) 차로 룡산 육군병원 ( 陸軍病院 ) 에서 출연한 일이 잇섰고 그 외 연병정 ( 練兵町 ) 에서도 二 , 三 일간 유숙한 일이 잇섯슴으로 이곳까지도 전부 대소독을 하여 예방에 노력을 하고 잇는데 아직ᄭᅡ지 발병자는 림정웅밧게 업다고 한다 .
한상언
2019-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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