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낙타(들)
박기용 감독의 < 낙타(들) >은 개봉 당시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 2001년 서울 코아아트홀 단관으로 딱 2주 동안만 개봉한 데다 그나마 이창동 감독의 < 오아시스 >와 교차 상영(오아시스 사이의 사막을 건너는 쓸쓸한 낙타떼가 떠오르지 않는가!) 됐으니 물리적 한계도 있었지만 영화 자체가 대중의 관심을 붙잡기 어려운 탓도 컸다. 저예산의 흑백 디지털영화인데다 낯선 남녀 배우 두 명만이 등장하고 소재 또한 중년 남녀의 불륜이라면 한국영화가 활황인 지금이라 해도 흥행은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가 당시 보급되던 디지털카메라의 현장성과 기동성이라는 특성을 살려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었다는 점 또한 관객에게는 생경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낙타(들)>이 대중 친화적이지 않은 영화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매우 흥미로운 영화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유부남과 유부녀가 함께 바닷가로 가 밥을 먹고 섹스를 한 뒤 다음날 돌아온다.’ 쯤으로, 최대한 살을 덧붙인다 해도 ‘함께 섬에 가자고 했던 40대 유부남 만섭( 이대연 )과 30대 후반 유부녀 명희( 박명신 )가 시간 여유가 없어 바닷가인 소래 포구를 들렀다가 월곶에서 회와 술을 먹은 뒤 노래방에서 키스를 나누고 모텔로 들어가 정사를 나눈 뒤 다음날 아침밥을 먹고 돌아온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 < 낙타(들) >의 이야기는 그리 참신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들의 여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했고 내면을 꼼꼼하게 담아냈으며 끝내 소통되지 않는 관계를 그려낸다는 점 또한 그닥 신선할 게 없다. 가까이는 홍상수 감독, 멀리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들과 인척 관계를 맺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낙타(들)>을 보며 신선하다고, 흥미롭다고 느꼈던 점은 그 성긴 스토리 라인을 메우는 요소들이다. 그 첫 번째 요소란 과격한 디지털 방법론이다. 디지털영화의 본질을 ‘날 것’을 담아낼 수 있다는 점으로 파악한 박기용 감독은 영화적 공간과 일상적 공간을 넘나들며 촬영을 진행했다. 또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미비해 필름에 비해 디지털카메라의 해상도가 크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인 조명 대신 실제 공간의 조명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현실감을 담아내려 했다. 사운드 또한 실제 공간의 사운드를 있는 그대로 담아냄으로써 생생한 분위기는 더욱 증폭됐다. 이 같은 태도는 연기에 대한 전략으로도 이어졌다. 이 영화에는 큰 줄거리 외에는 대본 없었다. 그 사이를 메우는 것은 배우들의 몫이었다. 결국 배우들은 상당 기간 캐릭터로 살아가며 스스로 느끼고 생각한 바를 카메라 앞에서 표출했다. 즉 ‘연기 없는 연기’를 펼쳐내야 했다. 배우들의 대화가 극히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덕분에 < 낙타(들) >은 영화적 사건이 부재함에도 영화는 팽팽한 긴장감을 얻고 기묘한 생동감을 체득한다. 대구(對句)로 이뤄진 구조 또한 영화적 긴장과 흥분을 자아내는 요소다. 단순화하자면 영화의 전반부는 남녀의 만남에서부터 섹스까지가 벌어지는 첫날로, 이때 둘의 관계는 친밀해지며 따뜻해지고 현실적 관계를 벗어난 로맨스가 형성된다. 후반부에 해당하는 둘째 날 남녀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식어가고 로맨스에서 깨어나 현실로 추락한다. 첫날이 횟집에서 대화를 통해 가까워지고 노래방에서 입을 맞추며 뜨거워지며 모텔 방에서 섹스를 나누는 것으로 관계가 상승기류를 탄다면, 둘째 날은 어색하게 모텔 방에서 나와 약국에서 사무적인 분위기를 거친 뒤 매운탕 집에서 단절되는 하강 국면을 맞는다. 이 과정에는 쌍을 이루지만 대비 효과를 갖는 구체적인 장면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1) 첫날 모텔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남자는 여자의 손을 꼭 붙잡지만 다음날 로비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멀리하려 애쓴다. 2) 첫날 횟집에서 약국과 관계된 대화(이들은 약사인 여자의 약국에 남자가 찾아오면서 처음 알게 된 모양이다)는 로맨스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는데 둘째 날 두 사람이 찾은 월곶의 약국은 자동차에서 흠집을 발견하면서 현실로 귀환하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다. 3) 첫날 횟집에서 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남자는 “그러고 보면 우린 참 비슷한 게 많아요.”라고 맥락 없는 이야기를 하며 로맨스를 애써 증폭시키지만 둘째 날 아침상에서 여자는 “차 수리비 절반은 제가 낼 게요”라며 현실 세계를 강화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두 장면 또한 대구를 이룬다. 이 영화의 흐름상 꼭짓점에 해당하는 건 섹스 뒤 허한 속을 달래기 위해 남녀가 비빔국수를 시켜먹는 장면이다. 비빔국수를 먹던 남녀는 둘 다 예전 신촌시장을 자주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때 남자는 “만약 그때 우리 만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국수만 삼키다가 이렇게 되묻는다. “학교 다닐 때 연애 많이 하셨어요?” 이 대화는 필연적으로 남녀 모두 기혼자임을 상기시키는 결말로 향한다. 두 사람이 침묵 속에서 기혼자라는 스스로의 현실을 곱씹는 이 순간, 모텔 방을 맴돌던 현실의 그림자가 희미해진 로맨스를 완전히 삼켜버린다. 이 장면의 대구를 이루는 다음날 장면은 더욱 비참하다. 아침밥을 다 먹은 남자가 여자에게 “나중에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하고 묻자 여자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숙인다. 아침밥을 먹고 나온 남녀는 그 뒤로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고 한 번의 눈길도 마주하지 않은 채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 낙타(들) >의 방점은 상승보다 하강에, 로맨스로 가는 길보다 현실로 돌아오는 길에 찍혀 있다. 극히 어둡지만 빛과의 대비가 강렬한 화면과 고요한 밤의 사운드 속에서 그나마 숨 쉬던 로맨스는 아침이 되면서 평면적이며 단층화된 화면과 신경질적인 사운드 속에서 증발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카메라는 묵묵히 자동차에 탄 남녀의 뒷모습을 비춘다. 자동차의 깜빡이등 소리의 단속음이 머릿속을 하얗게 채우는 이 영화의 마지막 대목은 한국영화사상 가장 반(反)로맨틱한 장면일 것이다. 현대와 도시라는 사막을 아무 말 없이 건너는 이 낙타들의 모습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개봉하던 때 30대 초반이었던 나는 이제 40대 중반 아닌가. 한 장면 한 장면이 뼈를 찌르는 듯 아프다. 이 영화가 개봉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아시스 없이 퍽퍽한 걸음을 하염없이 내딛어야 하는, 때문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신기루에 매달리기도 하는, 하지만 결국 모래만 벌컥벌컥 들이키게 되는 우리의 현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탓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