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 Yeonhwa, 연화(속) Yeonhwa 2
정리에 관한 의문. 목록을 따라가다가 < 연화 >에 이르면 이 영화는 <연화>와 < 연화(속) > 두 편으로 나뉘어 분류되어 있다. 물론 한 편의 영화를 두 편으로 나누는 것은 신기한 일은 아니다. 클로드 란츠만의 < 쇼아 >는 전체 10시간 13분 상영시간을 각각의 토픽에 따라 네 편으로 나누었으며, 왕빙의 < 철서구 >는 9시간 11분에 각각 제목을 다시 달고 세 편으로 나누었다. 고다르는 좀 더 섬세하게 나누었다. <영화사(들)>은 4시간 24분을 네 개로 나눈 다음 다시 각 분류 안에서 장(chapitre)을 A와 B로 나누었다. 구태여 예를 떠올린다면 미조구치 겐지가 1941년에 만든 <겐로쿠 추신구라(元祿 忠信藏)>일 것이다. 4시간 1분에 이르는 이야기를 겐지는 그냥 간단하게 ‘第 一篇’과 ‘第 二篇’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이 두 편은 경우가 다르다. 분류와 달리 <蓮花>라는 제목으로 1975년 3월 8일 국제극장에서 개봉하였고, 그때 신문광고전단에 따르면 ‘邦畵史上 初有의 3時間 40分 上映!’이라고 되어있다. 그 아래 ‘第 1部 離別篇’ ‘第 2部 復讐篇’으로 친절하게 이 영화가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되어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필름에는 두 편을 나누는 그 어떤 간(間)자막(inter_title)이나 별다른 표시가 없다. 또한 두 편 사이는 16년을 건너뛰고 이야기가 진행되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第 2部 復讐篇’이 시작될 때 별다른 자막이나 소개가 없으며 앞의 이야기에 대한 간단하게 요약된 줄거리의 소개도 없다. 무엇보다 어디에도 <연화 (속)>이라는 제목을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상영시간을 고려해볼 때 그 당시 상영된 할리우드 영화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나 < 벤허 >, < 아라비아의 로렌스 >에서 볼 수 있었던 휴식시간(intermission)도 없다. 만일 <연화>가 신문 전단처럼 두 편으로 나누지 않고 상영회차를 하나의 단위로 하여 한 번에 전체를 상영했다면 임권택 의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긴 상영시간을 가진 영화일 것이다. 민태호 대감 선혜 옹주 정실 부인 연파 스님 이윤재 연화 이 두 편 혹은 한 편을 둘로 나눈 영화 < 연화 >는 1973년 9월 23일에 첫 방영을 한 다음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5월 3일에 종영한 동명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것이다. <연화>가 텔레비전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임권택 의 첫 번째 영화는 아니다. 나는 이미 방송 드라마 <불청객>을 영화로 옮긴 < 신세 좀 지자구요 >를 다루었다. 또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첫 번째 감독도 아니다. 종종 영화관객과 시청자를 사이에 놓고 영화와 텔레비전의 적대적 관계를 설명하는 미디어 경제학자들의 일반론과 달리 1970년대에 한국영화는 텔레비전과 가까이 있었다. 이 영화가 상영시간이 길긴 하지만 이야기가 복잡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로 신분을 속이거나 혹은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관계 속에 놓이기 때문에 인물 사이의 관계가 다소 장황하다. 그러니 우선 다소 어수선한 줄거리를 감상할 것. 조선시대. 권세를 차지하기 위해 정적들을 차례로 암살하던 민태호 대감은 선화옹주와 부마인 이윤재 가족을 몰살한다. 그러나 이윤재는 상처를 입고 빠져나오고 선혜옹주는 출산직전의 몸을 끌고 회암사로 흘러들어온다. 마침 민태호의 정실부인이 임신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드리던 마지막 날이었다. 주지인 연파스님은 선혜옹주에게는 출산한 딸을 숨기며 사산했다고 말한 다음 민태호의 정실부인에게는 절로 흘러들어온 여인이 아이를 낳은 다음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니 딸로 들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정실부인은 기뻐하면서 민태호 대감에게 이르니 간절히 자식을 바라던 그도 기꺼이 승낙한다. 그런 다음 연파스님은 정실부인에게 지금 양반 댁에서 막 씨받이로 아이를 낳고 빼앗기자 실망한 나머지 절을 찾아온 여인이 있으니 그녀를 젖 물리는 유모로 쓰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 다음 선혜옹주를 추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등장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선혜옹주는 자기를 죽이려던 민태호 대감댁에 양주댁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유모로 들어가 자기 딸에게 젖을 물리면서 목숨을 구한다. 다만 옹주는 그 어린 아이가 아직은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온갖 우여곡절. 그러는 중에 민태호 대감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옹주를 강제로 겁탈하려 든다. 이에 거의 자포자기한 옹주가 자결을 하려들자 연파스님은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준다. 그러는 동안 이윤재는 복수를 하기 위해 민태호 대감댁에 나타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훗날을 도모하며 떠난다. 이때 옹주는 남편인 이윤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 부 끝) 16년이 흘러 어느 덧 연화는 규수가 된다. 혼처가 사방에서 날아들고 그 중에 민태호 대감의 측근이자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원수중의 하나인 김초선 대감댁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이 사실을 알자 이윤재는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이 결혼을 저지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이윤재가 보낸 자객은 함지기가 함을 들고 가던 길에서 기다리다가 차례로 활로 쏘아 쓰러트리고 그 과정에서 민태호 대감은 양주댁이 선혜옹주이고 연화가 이윤재의 딸이며 이 모든 것이 연파 스님의 계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연화도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위기에 몰렸다고 생각한 민태호 대감은 이들을 모두 감옥에 가둔 다음 참수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이윤재와 마주선 민태호 대감 앞에서 정실부인은 모두를 살리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면서 이윤재에게 기회를 준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민태호 대감을 유배 보내고 부마 이윤재와 선혜옹주는 복권한 다음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연화는 원래 부모의 손으로 되돌아간다. (이 부 끝) 아마 줄거리만을 쫓아왔다면 < 연화 >가 당연히 출애굽기의 예언자 모세의 성장담의 변주라는 것을 알 것이다. 죽어야 할 아이.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적의 손에서 자라나 훌륭하게 크는 그 아이. 유모가 된 어머니. 그렇지만 그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을 비밀로 감추어야 한다. 아들이 딸이 되었고 기독교는 불교로 바뀌었고 이집트는 조선이 되었지만 기적을 행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의 유사성은 거기까지이다. 그런 다음 먼저 내가 두 개의 텍스트 사이에서 할 수 없는 불가능에 대한 전제. 가능하면 원작 드라마의 배우들을 그대로 옮겨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방송과 영화의 차이는 연화 역할이 김창숙 에서 이효춘 으로 바뀌었으며, 연화의 아버지 이윤재 역할이 김동훈 에서 윤양하 로 바뀌었다. 나는 원작 방송 드라마를 보지 못했고, 또한 방송으로부터 영화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일부 배역의 교체의 속사정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배역에 대한 연기자의 변화 사이에서 오는 차이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이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인물의 성격에 대한 변화나 연기의 새로운 각색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게다가 텔레비전 드라마가 영화처럼 어린 연화와 선혜옹주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일 편과 시집갈 무렵이 된 성장한 연화와 그녀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 편으로 구성한 영화처럼 거의 절반의 비중으로 나누어져 있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드라마의 균형을 갖추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또한 텔레비전 연속극을 연출한 김재형에서 영화를 연출한 임권택 으로 옮겨오면서 아마도 있을(수밖에 없는) 둘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도 비교해볼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영화 <연화>에 의지해서만 말할 것이며 거기서 가끔 건드리는 연속극 드라마와의 비교는 추론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불편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영화 <연화>는 연속극 <연화>의 성공에 기대어 만들어진 영화이며, 그러므로 이미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관객으로 이행될 때 영화는 연속극의 기대의 지평 안에서만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한된 지평. 성공의 전제가 안겨준 감옥. 겉보기에 단순하게 여겨지는 이 질문은 생각보다 기괴한 역설을 담고 있다. 이미 인물들의 운명은 결정되었으며, 영화는 그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연화는 매번 물어볼 것이다. 전 어떻게 하면 되나요. 대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한 걸 그대로 반복하렴. 그런 다음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주기 바란다. <연화>는 인물들 사이의 역할 놀이이며 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술래잡기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긴장은 누가 술래인지를 알아내는 게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시작할 때 이야기 바깥에 있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 핵심은 우리만이 알고 있는 그 지식을 언제 이야기 속의 누군가가 함께 공유하느냐는 것이다. 선혜옹주는 언제 자기가 젖을 물리고 있는 어린 연화가 자기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인가. 그때 민태호 대감이 먼저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이에서 정실마님은 언제 그 지식을 얻게 될 것인가. 왜 매번 이윤재는 사태를 망쳐놓는가. 연화는 언제 자기를 낳은 엄마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인가. 민태호 대감이 연화가 자기 딸이 아니라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딸이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될 것인가. 그런 다음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먼저 알게 될 것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대상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 지식의 경주는 연파스님이 쳐놓은 덫이지만 동시에 그 또한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매번 결정의 순간을 정해야한다. 그리고 그 결정의 시간은 동시에 그 자신의 기회를 그만큼 잃어버리는 반비례의 역학을 작동시킨다. 말 그대로 누구도 예외 없는 구조의 노예들. 무엇이 앞설 것인가. 그 뒤에 따라오던 것이 만일 앞지르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여기서 영화의 곤궁.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미 모두 본 것이며 게다가 충분히 즐긴 다음이다. 취소되어버린 효과. 이미 연속극에서 했던 동작을 구조 안에서 고스란히 반복해야 할 때 시청자들이 관객이 되어 거기서 다시 한 번 보는 고통스러운 눈물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난 이미 잘 알고 있어, 지금은 저렇게 눈물을 흘리지만 곧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지면서 상황은 이렇게 잘 해결될 거야, 그러니 울지 마세요. 그때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동작은 이미 해본 것을 다시 한 번 재현하는 기계적인 일련의 숙련된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여기서 시청자(이자) 관객이라는 이 이상한 자리는 언제나 이야기를 앞서 간다. 그러면서 돌아보는 자리. 항상 돌아보는 자리. 아무리 이야기가 달려가도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돌아보는 자리. 서로 뒤집힌 위상 관계는 단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드라마를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반복하는 단순한 관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자리에서 다시 바라볼 때 모든 것은 원래의 모습에로 되돌아오는 내내 순수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진 위기. 그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며 인물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사건이 나온다기보다는 사건을 위해서 인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거기 머물기 시작한다. 이때 임권택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후렴구처럼 반복하는 말. 곤궁에 처한 영화. < 연화 >에서 영화가 밀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텔레비전 드라마가 해낸 그 나머지가 아니라 이미 해낸 것 안에서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몇 가지 외형적인 차이가 있다. (그 당시의 텔레비전 모델에 따라) 모니터 4대 3 비율의 화면을 2.35 사이즈의 시네마스코프로 찍었으며, 흑백 화면을 칼라 스크린으로 옮겼다. 하지만 난처한 약점은 칠 개월에 걸쳐 매주 방영되었던 드라마를 제 일 편은 1시간 46분, 제 이 편은 1시간 49분으로 압축시켜야 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임권택 (과 신봉승 )은 종종 영화 <연화>의 관객을 이미 드라마 <연화>를 본 시청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단지 요령 있게 압축하거나 일부를 잘라내는 대신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든 다음 어리둥절할 정도로 건너뛴다. 그래서 주변의 인물들 중의 일부는 때로 사라지고 한참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나오기도 한다. 마치 벌거벗은 것과 같은 상태의 이야기. 임권택은 그 이야기를 영화의 경제학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이 기나긴 이야기는 고작해야 민태호 대감의 99칸 저택(으로 설정된 한옥 가옥) 안의 민태호 대감의 방과 선혜옹주가 유모로 머무는 방, 그리고 정원, 이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감댁 안의 감옥, 그런 다음 회암사의 불당과 그 곁에 자리한 작은 쪽방, 그리고 잠깐 등장하는 이윤재와 그 무리들이 머무는 누추하기 짝이 없는 산채(라고 설정된 외부와 간단하게 지은 세트에서 찍은 내부)가 전부이다. 물론 중간에 오가는 길이 등장하지만 숲속 길로 설정되어 있어서 별다른 엑스트라를 오가게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 설정을 무심코 지나갈지 모른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보라. 이 영화는 사극이며 아무리 적은 숫자의 보조 출연자도 조선시대의 의상을 입어야 한다. 게다가 일단 도읍 안으로 들어오면 수십 명의 등장인물이 동시에 움직여야 생활공간이 만들어진다. 영화는 그런 예술이다. 아직 디지털 기술은 등장하지 않았으며 거기 사람이 필요하면 하여튼 거기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설정은 무리한 축소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우리가 그걸 눈치 채지 못하게 항상 가옥 바깥으로 나오면 마치 두 개의 장소, 두 개의 시퀀스를 연결하기 위해서만(bridge shot) 그 쇼트가 필요하다는 듯이 스쳐지나가면서(insert shot) 정보 단위의 기능만을 부여한다.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가옥 구조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회암사 로 이동한다. 물론 여기서도 중심을 이루는 장소, 대부분의 쇼트가 진행되는 공간은 민태호 대감의 저택이다. 이야기는 이 집이 모든 인물들을 자석으로 끌어당기듯이 진행되고 그래서 마치 모두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차례로 이 집으로 모여든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연화가 아니라 이 집이다, 라고 이야기 전체를 다시 쓰고 싶을 정도이다. 이때 임권택은 민태호 대감댁 안을 이리저리 오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면서도 이야기만을 오가고 동선을 최소로 연결시키면서 두 개의 방 이외의 어떤 방도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감옥을 오갈 때에도 모든 쇼트는 감옥 내부에서만 진행되기 때문에 대감 댁의 안채에서 감옥까지 연결하는 동선의 어떤 물리적 장소의 쇼트를 더하지 않고 그냥 건너뛰어 감옥 실내로 들어온다. 물론 여기서 임권택이 한옥 가옥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고작 삼년 후에 보여주게 될 < 족보 >에서와 같은 우아한 동선은 어디에도 없다. <연화>에는 오로지 이야기 안에서 경제적인 방법으로 설계된 동선과 쇼트의 실용적인 사용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권택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화>에서 어떤 장면들은 양반 저택 가옥 구조 안에서 마치 폐쇄공간처럼 이루어진 희박한 공기들과 그 안에서 매우 제한적인 동선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를 만들어낸 < 씨받이 >의 어떤 순간들과 공명한다. 혹은 선혜옹주와 이윤재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flash_back) 두 사람이 운우지정을 나누듯이 가을 낙엽 위를 뒹굴 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춘향뎐>에서 이몽룡과 춘향의 동일한 조건의 장소에서의 동일한 제스처를 생각나게 만든다. 나는 단지 같은 장면 혹은 같은 분위기의 반복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그것이 다시 나타날 때 그 안에는 되돌아오는 같은 자리에 대해 임권택이 이미 해본 것으로부터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그런 다음 거기서 자기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재현의 요소를 (임권택의 표현을 빌리면) “의심하면서” 반복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의 사유를 확보하려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권택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매번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이야기와 표현 사이에서 어떤 거리를 확보해나간다는 인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재현의 이미지들 사이에 점점 더 일사불란한 통일성을 만들어나갔지만 동시에 때로 기괴할 정도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정투쟁을 벌였다. 여기에는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헤겔이 말하는) 불행한 의식이라고 부를만한 유령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 대신 < 연화 >는 처음부터 무언가를 포기한 것처럼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멈춰 서서 하나의 씬을 매우 긴 시간 동안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임권택 의 영화에서 마주치는 인물에 대한 탐구나 이야기 속의 삶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가끔, 아주 가끔 그 어느 순간의 디테일에서 종종 이야기 안의 이질적인 요소에로 이끌려 완전히 다른 공기의 장면이 연출되는 당혹스러운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이 디테일이 다른 전체와의 조화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연화>를 보는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 모른다. 물론 임권택이 여기서 처음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다. 이미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에서 갑자기 나타나 스키를 타고 달려 내려온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를 다룬 전멸의 마지막 시퀀스는 마치 영화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또한 ‘원숙한’ 임권택의 영화에서도 갑자기 그런 순간이 나타난다. 그걸 가장 미학적으로 활용한 시퀀스는 물론 < 달빛 길어올리기 >의 마지막 월곡 마을에서 한지를 제작하는 대목이다. 심지어 이 시퀀스는 영화 전체를 구원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연화>에서는 이런 장면들과는 다르다. 그저 인상적으로 말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다른 장면들의 디테일이 보여주는 위험할 정도의 확장은 종종 임권택이 그 무언가에 매혹되어 마치 그 힘에 기쁘게 굴복하듯이 거기에 이끌렸다는 흔적을 남기는 반면 여기서는 이야기로부터 영화를 방어하기 위해서 어느 순간을 잡아채듯이 붙잡은 다음 거기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머물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애처롭게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표현. 영화를 방어하려는 안간힘. 임권택은 여기서 텔레비전에로 이끌리는 이야기를 어디선가에서 멈춰 세우기 위해 그 장소를 찾으려고 마치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탑골댁 이윤재 두 개의 장소 중의 첫 번째 장소. < 연화 >는 피비린내는 정적의 암살에서 영화가 시작한다. 민태호 대감이 살생부에 적힌 이름들을 붉은 색 먹으로 지우면 다음 장면은 자객들이 무자비하게 암살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라는 배경 이외에는 어떤 설명도 없는 이 도입부는 거기서 더 반복되지는 않는다. 마치 선혜옹주와 이윤재 부마의 암살이 그 최종 목표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더 이상 새로운 희생자가 나오지는 않는다. 아직 그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민태호 대감으로서는 아쉽게도 이 한 번의 실패가 그 자신의 운명을 뒤바꾸는 계기가 되고 (이미 말한 것처럼) 마치 연화는 모세처럼 민태호 대감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존재가 된다. 이때 민태호 대감은 무자비하고 교활하며 음모와 술수에 능한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도입부가 끝나고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는 마치 잠시 동안 자신의 역할을 잊은 것처럼 정실부인의 말에 귀 기울이며 (이런 표현이 몹시 어색하지만 그만큼 영화 안에서 어색하게 표현된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으로부터 후퇴해서 가정적인 인물로 축소된다. 이따금 그가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행방을 궁금하게 생각하지만 그 둘을 혈안이 되어 추적하지는 않는다. 이때 민태호 대감은 궁궐로부터 그의 저택으로 행동반경의 중심을 옮기면서 그의 관심은 권력에 관한 정치적인 영역에서 욕망이 이끄는 성적인 대상에로 옮겨간다. 물론 좀 따분해지기는 하겠지만 푸코에 의지해서 그 둘이 서로 얼마나 가까이 있으며 심지어 그 둘은 동일한 내용의 서로 다른 판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임권택 은 민태호 대감이라는 주체가 권력과 리비도 사이에서 어떻게 기호에로 옮겨가는 지를 다루지 않는다. 또한 연화가 어떻게 그 사이에서 교환관계의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가 그것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섬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혹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임권택은 그걸 하려고만 결심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임권택은 정념의 예술가이다. 때로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그건 처음부터 그러했다. 그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시대와 장르를 불문하고 일단 정념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신체가 파괴될 때까지 막다른 골목에 간다. 그것이 그렇게 임권택의 영화에서 자주 신체훼손의 장면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혹은 원작과의 약속이 그것을 가로 막는다. 만일 정말 그 안으로 들어갔다면 영화는 무시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코드들의 활동이 몹시 음란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청자 관객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이 즐긴 텔레비전 드라마의 이면 앞에서 그 기쁨의 정체를 마주보며 당황했을 것이다. 여기서 민태호 대감을 이끄는 대상은 양주댁으로 분한 다음 (자신의 딸인지 아직은 알지 못하는) 연화의 유모로 별채에 들어간 선혜옹주이다. 정실부인은 아직 얻지 못한 아들을 잉태하기 위한 백일기도를 드리기 위해 회암사에 가느라 종종 집을 비우고 그 순간은 민태호 대감의 기회이자 선혜옹주의 위기가 된다. 나는 (어쩌면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당신에게 좀 더 많은 연상 작용을 끌어내고 싶다. 유모는 배고픈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서 들여놓은 여인이다. 그녀는 아이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매번 자기의 옷고름을 풀고 여민 저고리를 풀어헤쳐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물리지 못한 채 차오르기 시작해서) 지금 젖으로 가득 찬 유방의 유두를 아이의 입에 물려야 할 것이다. 아이가 우는 것은 젖을 달라는 신호이다. 이때 이 소리를 안채에서 몸이 달아오른 민태호 대감도 들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이 신호를 받자마자 여기서 아이를 괄호 치고 양주댁의 몸을 떠올리기 시작할 것이다. 환상의 공식은 몸의 부분이 욕망의 대상이라는 자리에 등록하자마자 성적인 가장자리로부터 금방 중심을 탈환할 것이다. 이제 민태호 대감은 양주댁의 유두의 대상이 된다. 이 말을 잘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목적어를 반대로 쓴 것이 아니다. 이때 임권택은 재빨리 민태호 대감의 환상에 몰두하는 대신 그가 다가가려는 대상에 대해서 행하는 위계적 부분에 집중하면서 영화의 지위를 되찾으려고 한다. 구조는 좀 더 복잡하고 이야기는 음란해진다. 여기서 임권택은 신호의 응답을 위해 다른 장면을 더한다. 민태호 대감에게는 자식을 얻기 위한 구실로 그의 잠자리를 위한 내당마님인 둘째 부인 탑골댁이라는 젊은 여인이 있다. 그래서 잠자리가 필요할 때마다 민태호 대감은 그녀를 찾는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다소 파격적인 잠자리 장면을 포함시켜 놓았다. 그런 다음 민태호 대감은 두 번 다시 그녀와의 잠자리를 찾지 않는다. 거의 모든 설정을 예상할 수 있는 드라마의 컨벤션 안에서 진행되는 이 이야기에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순간은 탑골댁이 정실부인 흉내를 내면서 회암사에 자식을 갖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러 왔을 때 신분을 숨기고 잠시 거기에 몸을 의탁하러 온 이윤재를 보고 한 눈에 빠져드는 설정이다. 여기서 탑골댁이 이윤재를 탐하는 태도는 민태호 대감이 선혜옹주에 이끌리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판본이다. 하지만 차이는 단지 그 둘 사이의 전도된 성별만이 아니다. 하나는 여기가 지금 조선시대라는 것이며 유교를 바탕으로 세워진 신분사회라는 조건이다. 탑골댁이 이윤재에게 욕망의 시선을 던질 때 그녀는 단지 도덕적인 금기를 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민태호 대감의 자리에서 권력의 네트워크를 펼치는 것이다. 이때 선혜옹주와 이윤재가 동일한 고난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임권택(과 신봉승 )은 변주를 가미한다. 이윤재는 탑골댁이 민태호 대감의 내당마님이라는 사실을 알자 복수를 위해서 그 곁으로 다가갈 기회를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 유혹에 응답한다. 그의 목적에 따라 이윤재의 행동이 정당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수단으로 놓인 탑골댁의 자리에서 그녀는 마치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 것에 대한 벌을 받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거기에 있지 않다. 임권택은 선혜옹주와 이윤재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교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목표는 그 둘의 사연을 우리에게 모두 알려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차라리 그건 부차적인 자리에 머문다. 어쩌면 이것은 임권택의 의도 바깥으로 벗어난 그 어떤 힘이 마치 오작동을 일으키기라도 한 듯 작용하는 것이기도 한데 선혜옹주가 고난을 겪는 동안 마치 이윤재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여기서 가정을 해보고 싶어진다. 만일 선혜옹주가 이 상황을 단지 모면하기 위해서라는 알리바이를 내세우고 민태호 대감의 유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섹스를 즐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 상황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선혜옹주는 자신이 양주댁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할 것이며 민태호 대감은 섹스를 했다고 할지라도 양주댁이 선혜옹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살려둘 리가 없다. 또한 선혜옹주가 침묵을 지킨다면 이윤재는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여기엔 단지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 티켓 >에서 몸을 파는 막내가 대학생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켓을 끊고’ 손님과 하룻밤을 마지못해 보낼 때 섹스를 즐기는 장면을 알고 있다. < 창, 노는 계집 >에서 영은은 사창가에서 도망치지만 그녀를 잡으러 온 ‘사냥꾼’에게 붙잡힌 다음 섹스를 할 때 그 행위를 즐긴다. 임권택 의 여자들은 순결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의 부름에 대해서 욕망이 거절하는 행위를 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녀들에게 섹스를 하는 것과 사랑을 하는 것은 종종 별개의 행위이다. 하지만 < 연화 >에서 선혜옹주는 사실상 목숨을 걸고 거절을 한다. 이때 이 장면을 임권택은 거의 멈추듯이 세운 다음 갑자기 디테일의 주름에 집중한다. 민태호 대감은 정실부인이 집을 비우고 밤이 되자 탑골댁 자택에 가는 대신 별채에 어린 연화와 기거하는 양주댁으로 위장한 선혜옹주의 방을 찾는다. 말하자면 그는 공개적으로,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도덕적으로 허락된 간편한 잠자리를 포기하고 힘겨운 과정을 거쳐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양주댁에로 향한다. 별채에 들어서면서 민태호 대감은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은 딸 연화를 보기 위함이니 야심한 밤에 찾았다 할지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설명을 한다. 물론 그건 거짓말이며 그는 연화에게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선혜옹주에게는 이 방문을 거절할 명분이 없다. 이 집은 민태호 대감의 집이며, 이 방은 연화를 위한 방이며, 민태호 대감은 연화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얼룩은 민태호 대감이 아니라 선혜옹주이다. 상황은 탐정소설에서 말하는 밀실공간의 탈출에 관한 퍼즐 게임이다. 민태호 대감이 선혜옹주가 연화와 함께 머무는 별채에 들어서자 이제까지 둔하게 움직이던 이 영화의 기호들이 갑자기 예민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민태호 대감이 왜 이 방에 들어섰는지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목표로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이때 선혜옹주가 그 행위의 전략을 차단하고 진행을 방해한 다음 다시 그를 내보낼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찾을 지가 이 시퀀스의 구경거리이다. 구경거리? 어쩌면 이 표현이 다소 잔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임권택 이 여기서 이 작은 형태들이라고 할 디테일을 전체의 구도 안으로 가져올 방법을 찾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다.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하면 즉각적으로 관객 시청자는 예상치 않은 배신을 당할 것이며 아마도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질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자신의 곤궁 안에서 최소의 디테일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민태호 대감은 방 안에 들어선 다음 먼저 시선으로 선혜옹주의 몸을 더듬거린다. 이때 하필이면 아기 연화는 한밤중에 울면서 젖을 달라고 보챈다. 그때 민태호 대감은 연화의 신호에 슬그머니 자기의 메시지를 더하면서 빨리 젖을 물리라고 재촉한다. 선혜옹주가 젖을 물리려면 저고리를 풀고 옷소매를 헤쳐야 한다. 자발적인 탈의. 이때 민태호 대감은 선혜옹주의 몸 한끝에 자신의 몸 한끝을 접촉하기 위해 그 좁은 방에서 미처 일어서지도 못한 채 앉아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서 접근한다. 그의 자리에서 갖추는 최소의 예절. 어쩌면 당신은 여기서 크게 웃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까지 민태호 대감이 자신의 목표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무자비하며 단호한지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선혜옹주는 지금 이 방까지 (연파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계산으로” 피신해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민태호 대감이 취하는 행동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소심하며 예의바른 태도를 취한다. 당신은 즉각적으로 내게 맞받아칠 것이다. 아니 정말 모른단 말이에요, 이건 섹스에 관한 장면이라구요.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핵심은 임권택이 여기서 디테일의 긴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선택한 모델이 행위와 목적 사이에 놓인 불연속성의 통사적 종합을 이루는 정념의 위선이라는 것이다. 물론 선혜옹주는 이 위선을 이미 한 눈에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놓여있는 정념의 정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소 공허한 비대칭의 간극이 놓여있다. 민태호 대감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선혜옹주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럼으로써 선혜옹주는 민태호 대감의 접촉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섹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그녀가 지켜야하는 것은 정조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이다. 우리를 다소 따분하게 만드는 것은 이 둘 사이에 선택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정조를 포기했을 때 거기에는 단지 섹스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며 정체의 비밀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반면 정체의 비밀을 포기했을 때 선혜옹주는 생명을 잃을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곁에 있는, 하지만 아직은 미처 알지 못하는, 딸 연화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만일 여기서 민태호 대감이 자신의 양녀 연화가 바로 눈 앞에 있는 선혜옹주의 딸이라는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을 동원해서 만일 섹스를 요구했다면 시청자 관객이 겪게 되는 긴장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때 민태호 대감의 제안은 간단하다. 당신이 나와의 섹스를 즐겨준다면 당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당신의 딸(이자 자신의 양녀) 연화의 목숨도 살려 줄 것을 약속하겠노라. 첨언. 그 약속을 지킬 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 시청자 관객을 괴롭히는 상황은 약속을 지키면서 반복해서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시청자 관객을 가장 괴롭히는 방법은 반복해서 약속을 지키면서 선혜옹주가 조금씩 민태호 대감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만일 이 역할을 이순재에서 최무룡, 혹은 김진규로 바꾼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임권택은 이 위험한 게임의 거의 근처까지 가본 적이 있다. 나는 이미 < 티켓 > 혹은 < 씨받이 >로 이어지는 주인공과 반대의 가해자 사이에서 성립된 실패한 관계의 이면에 맴돌고 있는 정념의 예를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임권택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까지 물러난다. 그래서 민태호 대감이 마치 자기 신분의 본본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제스처가 등장한 것이다. 두 개의 장소 중의 두 번째 장소. (편의상 나눈 것처럼 보이는) < 연화 (속) >은 광고에서 소개하는 것과 달리 ‘第 2部 復讐篇’이라기보다 차라리 ‘第 2部 受難篇’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야기는 갑자기 16년을 건너 뛴 다음 여전히 민태호 대감의 집에서 진행된다. 그 긴 세월 동안 변한 것이라곤 연화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는 것 밖에 없다. 선혜옹주는 여전히 유모로 남아 연화를 키우고 있다. 구태여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한다면 이윤재가 산채를 짓고 그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과 모여 복권의 날을 준비하고 있(지만 임권택 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세월을 건너뛰어서 연화가 세상 이치를 알 나이가 되었을 때 긴장의 중심에는 이제 그녀가 언제 어떻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스스로 이 드라마 안에서 주체로 거듭날 것인가, 라는 데 있을 것이라고 나는 어림짐작했다. 왜냐하면 전편에서 갓난아기 연화는 마치 맥거핀처럼, 혹은 알리바이처럼, 때로 메시지처럼, 비유적으로 (에드가 알랜 포우의) 떠돌아다니는 편지처럼, 그렇게 네트워크 사이를 부유하는 기표처럼 보였다. 물론 이 아기는 그때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하지만 열여섯 살이 된 연화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틀렸다. 임권택은 시작하자마자 무언가를 서두르듯이 설명해나갔으며 응답은 앞질러 왔다.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 다음 고작 23분이 지났을 때 연화는 편지를 받고 모든 비밀을 다 안 다음 그 사실을 유모(이자 친모인) 양주댁(으로 위장한 선혜옹주)와 공유한다. 이제 연화가 이윤재와 선혜옹주의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민태호 대감과 그 아내 밖에 없다. 하지만 민태호 대감은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사실을 떠올린 다음 연화의 출생의 비밀뿐만 아니라 선혜옹주의 비밀까지도 알아낸다. 여기에 별다른 긴장이나 위기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다소 짜증스러울 정도로 이윤재는 사태를 점점 악화시키면서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태를 해결해나간다. 말하자면 이윤재는 사실을 알지는 못하지만 의미를 아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임권택 은 그들 사이의 비밀을 사이에 둔 게임에서 머뭇거리는 대신 이야기를 민태호 대감 댁의 감옥으로 옮겨온다. 모든 비밀을 알게 된 민태호 대감은 연화와 선혜옹주, 그리고 연파 스님을 각각 다른 옥에 가둔다. 연화는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며, 선혜옹주는 비로소 양주댁이라는 거짓된 위장을 버리고 자기의 본래 자리를 되찾은 셈이며, 연파 스님은 이제 자신이 누구의 편인지 분명하게 한다. 여기서 더 남은 게 있을까. 임권택은 갑자기 여기에 속편 이야기의 진수가 담겨있는 것처럼 감옥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작은 옥사로 무대를 옮기면 이제 더 이상 야외에서 진행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때 실내는 기후 조건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무대는 연출의 일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운영될 수 있어진다. 둘째, 감옥은 다른 공간과 달리 사람을 감금시키는 곳이기 때문에 원하는 등장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은 다음 이야기를 고정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장소의 경제학. 임권택은 여기가 단지 경제적인 이유때문만이 아니라 감정의 충돌이라는 액션을 보여주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 것 같다. 감옥 입구를 기준으로 연화를 왼쪽 윗방에 가두고 선혜옹주를 그 옆방에 가둔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옆에 있기는 하지만 볼 수가 없다. 그런 다음 연화의 맞은 편 감옥에 연파 스님을 가둔다. 이 배치가 효과적인 이유는 선혜옹주에게 다가가 창살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 (가로가 긴 테크니스코프에서) 항상 그 사람의 뒤편에 연파스님이 보이기 때문에 두 사람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종의 후광효과와 같은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감옥 효과에 대해 설명을 하는 사람은 연파스님이다. 그는 갇힌 다음 민태호 대감의 호위 무사들에게 말한다. “지금 옥에 갇힌 사람이 나인가, 자네들인가” 물론 그들웰엽?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세 사람을 가둔 다음 차례로 각자의 방법으로 다른 등장인물들이 그들 앞에 나타나는데 여기서 < 연화 >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그건 우리 생각과 달리 선혜옹주나 이윤재, 혹은 연화가 아니다. 임권택이 처음부터 그 인물을 여러 차례 등장시켰지만 거의 마지막 자리까지 진정한 임무를 미루어 두었다가 여기서 그 결정적인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넘기는 사람은 민태호 대감의 정경부인이다. 약간의 복기. 정경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해 민태호 대감의 후대를 잇지 못하자 한편으로는 첩을 두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회암사에 백일기도를 드리러 갔다가 예기치 않은 연으로 선혜옹주와 이윤재의 딸 연화를 양녀로 입양시키고 선혜옹주를 유모로 집에 들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잘 설명되지 않지만 민태호 대감은 주변의 모든 인물들에게 포악스러우며 무자비한 암살 지시도 망설인 적이 없지만 언제나 정경부인의 뜻을 존중하고 그녀에게 예의를 갖춰 대한다. 그는 다른 이에게 정경부인을 평하면서 “저 사람은 부처님 같은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감옥에서 정경부인의 등장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정경부인이 감옥에 갇힌 선혜옹주를 찾아올 때이다. 그녀는 먼저 연화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선혜옹주 앞에 섰을 때 갑자기 큰 절을 드리면서 마치 민태호 대감의 잘못을 자신이 사과하기라도 하듯이 최대한 예를 갖춘다. 이 장면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정경부인이 지금 자신이 가진 모든 우월한 자리를 포기한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을 그녀의 아랫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정경부인은 지금 감옥 바깥에 있으며, 언제든지 남편을 움직여서 선혜옹주를 제거한 다음 연화의 유일한 모친이 될 수도 있으며, 어쩌면 이제까지 자신을 속인 과정에 대해서 분노를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경부인은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기괴할 정도로 여기서 인간적인 모든 반응을 버리고 오로지 제도의 오작동에 대해 사과한 다음 그것이 원래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선혜옹주 앞에서 미리 항복을 선언한다. 그것은 누구도 그녀에게 그것을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 자신의 믿음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환도 없다. 단지 이것은 정경부인의 호의에 따른 행동이다. 이때 내가 보는 것은 이 드라마의 다소 무시무시할 정도로 흠결을 지워나가는 보수주의적인 태도이며, 그런 다음 거기서 어떤 감흥을 끌어내는 임권택 의 완전한 동의이다. 원래대로, 라는 이 무시무시한 말. 두 번째 정경부인의 방문은 임금의 행차를 위장하고 민태호 대감댁에 이윤재와 그의 동료들이 쳐들어와 감옥에서 민태호 대감과 서로 겨룰 때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이윤재가 민태호 대감을 인질로 붙잡고 그의 목에 칼을 대고 모두를 풀어주라고 외칠 때 민태호 대감의 호위 무사들은 연화와 선혜옹주, 연파스님의 목에 칼을 대고 서로 버티는 중이다. 이때 민태호 대감은 자신의 안위에 신경 쓰지 말고 그들을 모두 참하라고 명한다. 말하자면 파국 일보직전. 모두가 행동을 멈추어선 순간. 여기에 갑자기 정경부인이 나타난다. 그런 다음 “제가 한 가지 스님께 따질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연파스님 앞에 다가간다. 연파스님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오랏줄에 묶인 채로 그녀를 맞이한다. 민태호 대감은 맞은편에서 이윤재의 칼에 목이 겨냥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자기 부인이 이 살풍경한 순간에 왜 나타났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이제까지 당당한 모습과 달리, 적어도 이 시퀀스에서는 처음으로 불안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여기 동일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있다. 하나는 민태호 대감의 시선이다. 그는 자기 아내가 연파 스님에게 다가가 칼을 꺼내들 때 그를 해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말린다. 다른 하나는 연파 스님의 시선이다. 그는 정경부인이 칼을 꺼내들어 자신의 오랏줄을 끊어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기다리다가 정말 그것을 행하자마자 곁의 무사로부터 (자신의 무기인) 죽장을 재빨리 빼앗아 든 다음 그들을 모두 물리친다. 주관적인 두 개의 시선의 교차. 이때 나는 질문의 방향을 정경부인이 올바른 행동을 한 것인가, 라고 물어보는 대신 반대로 그 두 사람에게 돌려놓고 싶다.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각자의 주관적인 착각. 이때 연파스님은 정경부인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이 오로지 자기를 중심에 놓고 그녀의 행동을 시스템의 신념 안에서만 판단한다. 그때 정경부인에게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어진다. 반대로 민태호 대감은 자신이 위기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경부인의 행동을 말리려고 할 때 그것은 자기를 지키기 위한 미끼가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아내가 자신과 달리 손에 피를 묻혀서는 안 된다는 보호에서 온 호소이다. 이때 정경부인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다. 하나는 이미 본 것처럼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고 정의라는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선택하면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다른 하나는 민태호 대감의 호소에 따라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상황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치 앞을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 중단에 대해서 누구도 정경부인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녀는 자신을 속이고 그로 인해 남편을 현재의 상황으로 몰고 갔을 뿐만 아니라 양녀인 연화를 원래의 부모에게로 다시 빼앗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연파 스님의 계획적인 속임수에 대해서 최소한 용서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계산은 그녀가 이 행동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파스님에게 그의 마지막 계산을 좌절시킴으로써 빚을 갚는 방법이 있다. 물론 당신은 하나가 더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것은 민태호 대감의 걱정대로 정경부인이 연파스님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두 번째 선택과 별 차이가 없다. 마찬가지로 다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계속될 뿐이다. 다만 정경부인과 민태호 대감을 분명하게 한 편으로 묶어낼 뿐이다. 그러나 정경부인이 민태호 대감의 편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세 번째의 선택은 셈에 포함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를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순간은 정경부인의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에 대해서 민태호 대감은 지켜본 다음 조금도 노여워하거나 혹은 정경부인의 행동을 꾸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정경부인의 행위에 대해서 침묵으로 대답한다. 말하자면 민태호 대감은 그 행동을 추호도 자신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심지어 민태호 대감은 연파스님이나 이윤재, 혹은 선혜옹주보다 더 정경부인의 행위를 잘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짧은 순간은 임권택 이 < 연화 >의 이야기 전체를 조롱하는 결단이다. 연파스님과 이윤재, 선혜옹주, (그리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연화는 자신들이 정의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면서 원래의 시스템에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기뻐하겠지만 진정으로 이 장면에서 부부의 사랑을 확인하는 정념의 몫은 민태호 대감과 정경부인의 믿음이다. 정경부인은 그런 다음 민태호 대감 앞에 가서 큰 절을 올린다. 민태호 대감은 그 순간 정경부인의 행위가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를 위한 결단이라는 것을 본다. 게다가 그것이 목숨을 건 행위라는 것을 거의 즉각적으로 안다.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이 설명이 어리둥절하다면 정경부인의 세 번째 방문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무리할 정도로 긴 이 영화에서 정경부인이 감옥에 갇힌 민태호 대감을 찾아오는 이 장면은 < 연화 >에서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씬이다. 이윤재와 선혜옹주는 복권을 하고 연화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간다. 임권택 은 이 장면에 별 관심이 없다. 단지 이야기가 요구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런 다음 다시 감옥으로 되돌아간다. 그때 감옥은 민태호 대감이 외로이 갇혀 있으며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주변에 아무도 없다. 감옥으로 되돌아 올 때(master_shot), 그러니까 정경부인이 민태호 대감을 면회하기 위해 이 옥사에 들어설 때, 그녀의 방문을 연파 스님이 갇혔던 감옥 안에서 보여주기 때문에, 두 개의 프레임이 만들어지면서(frame_in_frame) 이중 삼중으로 감옥 안의 감옥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다음 정경부인과 민태호 대감을 서로 번갈아(shot_reverse shot) 보여준다. 이때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바라보면서 찍었기 때문에(over_shoulder_shot) 모든 쇼트는 어느 쪽에 있건 창살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정경부인은 민테호 대감 앞에 예의를 다해 앉으며 “대감, 용서하십시오, 소인이 평생 처음으로 대감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라고 말한다. ( S#_1) 민태호 대감은 그녀를 가엾게 바라보면서 “내 죄가 많소, 날 용서해주시오” 라고 대답한다. ( S#_2) 정경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옵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대감에게 돌을 던진다 하더라도 소인만은 대감의 뒤를 따를 것이옵니다” 라고 하자( S#_3) 민태호 대감은 “대역 죄인은 삼족을 멸하는 법이니 부인 또한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소이다”라고 말한다. ( S#_4) 그런 다음 갑자기 더 가까이 들어가서 민태호 대감을 찍는다. ( S#_5) 이때 단지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이 요점이 아니다. 이 가까운 거리는 앞의 쇼트와 완전히 다른 장면을 만든다. 민태호 대감과 카메라 사이에 감옥의 철창이 사라진 것이다. 민태호 대감은 그런 다음 덧붙인다. “부디 정경부인의 체통을 잃지 말기 바라오” 이때의 맞은 편 정경부인을 보여줄 때는 여전히 감옥의 창살이 민태호 대감의 시선을 가로 막고 있다. ( S#_6) 정경부인은 크게 흐느끼며 “명심하오리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을 민태호 대감의 감옥 안쪽에서 좀 더 뒤로 물러나서 함께(full_two_shot) 보여준다. ( S#_7) 그리고 다시 한 번 앞서 보여준 장면의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를 반복하면서 철창 없이 민태호 대감을 보여준다. ( S#_8) 민태호 대감은 탄식하듯이 덧붙인다. “고맙소, 부인” 그러자 정경부인은 작별을 아쉬워하듯이 철창 사이로 민태호 대감의 손을 보듬듯이 잡는다. ( S#_9) 그런 다음 떠나가는 정경부인을 바라보는 민태호 대감을 창살 너머에서 바라본다. ( S#_10) 여기서 두 개의 쇼트, 철창 안에서, 그러니까 철창 없이, 찍은 장면은 정경부인이 바라보는(point_of_view) 쇼트가 아니라는 뜻이다. 좀 더 용기를 내서 말한다면 임권택의 방점이다. 잃지 말아야 할 체통.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든 행위보다도 더 소중한 한 마디, 명심에 대해서 민태호 대감은 고맙소, 라는 말로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 이 두 개의 쇼트가 중요해진 것일까. 임권택 은 < 연화 >의 이야기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드라마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조선시대뿐이다. 조선이라는 기이한 공동체. 임권택은 여기서 조선 사대부 가문의 무시무시한 체통과 법도를 보려고 한다. 거기서 그가 선인지 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선이라고 그것을 반드시 지키는 것이 아니며 악이라고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닌 세계의 질서. 이때 민태호 대감의 정경부인에 대한 이해의 바탕에는 그 무거운 사대부 양반 가문의 전통이 그 위에 내려앉는다. 여기에는 조선이라는 전근대 사회의 윤리가 한편으로는 그들이 마주해야하는 실재를 회피하게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둘러싼다. 그때 그들은 언제든지 운명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것이 그들의 의도와 아무 상관없이 정의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이끈다. <연화>에서 가장 수상쩍은 대목은 사실상 이윤재와 선혜옹주가 그들의 정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제대로 한 일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진정으로 작동한 것은 우리들의 시대와 절대적으로 좁혀지지 않는 조선이라는 시간과의 간극 사이에 머물고 있는 윤리의 기호들이다. 여기에 빠진 것은 무엇일까. 그것으로 무엇을 승화시킬 것인가, 라는 대답이다. <연화>는 그 간극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처음 볼 때는 이 영화가 임권택 영화에서 지니고 있는 난처한 의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것이 아직은 난처했던 것일까. 임권택은 여기서 참조해야 할 틀을 아직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참조가 잘못되면 순식간에 이 모든 기호들이 잘못된 주인의 윤리 아래서 길들여질 지도 모른다. 그것은 위험한 내기이다. 하지만 <연화>가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임권택은 여기서 자신만의 안티고네를 찾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 자신만의 안티고네가 어떤 실천을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그 앞에 놓여있게 되었다. 이때 윤리의 기호들은 그의 주인공들을 길들이는 도구가 될 것인지, 혹은 공동체 안에서의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항복할 것인지, 그도 아니면 마침내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을 익히는 방법이 될 것인지, 라는 자리에서 질문이 되었다. 물론 임권택은 손쉽게 종료하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임권택을 곁에서 바라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임권택에게 유일한 방어의 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의심의 윤리학에 관한 체계를 설명하는 것이 내 임무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하지만 어떻게? (계속) 1974년 106분/109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일영화주식회사 각본 한유림 / 신봉승 촬영 손현채 조명 박태수 편집 김희수 음악 한상기 고은아 이순재 박병호 강부자 이효춘 >> <연화> 고화질 VOD 보러가기 << >> <연화(속)> 고화질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