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상상극장]범인은 너다
이종기 는 감독으로 데뷔한 1963년에 무려 다섯 편의 영화를 찍었다. 덕혜옹주 전기영화인 < 백년한 >,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는 < 광야의 왕자 대 징기스칸 >과 < 율곡과 그 어머니 >, 멜로드라마인 < 대전발 영시오십분 > 그리고 추리물인 < 범인은 너다 >. 요새 기준으로 보면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성취지만 당시 영화 제작 속도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정도는 아니다. 이들 중 필름이 남아 있는 작품이 단 한 편도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지만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다. (KMDb에 따르면 이종기의 감독작 중 지금 필름이 남아 있는 것은 단 한 편, 1969년에 찍은 < 이별의 모정 >뿐이다.) 나는 종종 단 한 편의 영화도 필름으로 남기지 못한 수많은 60년대 감독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 대다수는 어차피 필름이 있어도 잊혔겠지만. 이야기는 점점 애잔해진다. 이제부터 그가 각본까지 쓴 추리물 < 범인은 너다 >를 소개할 텐데 솔직히 시나리오를 읽어도 이 작품을 굳이 영화로 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은 대부분 멸종한 과거 이야기꾼 습관들이 신기할 정도로 많이 남아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포스터 포스터를 보고 내용을 추리해보자. 영화가 다루는 건 소녀유괴사건이고 주인공은 은퇴를 앞둔 노형사인 모양이다. < 범인은 너다 >라는 제목을 쓴다면 이건 추리물이고 그 ‘범인’은 영화 내내 범인이 아닌 척 굴면서 주변을 맴돌며 음모를 꾸미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야 형사가 악당을 가리키며 “범인은 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으니까. 신기하게도 감독 이종기 는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옛날 한국 장르 영화가 현대 관객들에게 종종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는 대부분 당연함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인물은 금성전업이라는 회사에 다닌다는 신시우라는 청년이다. 그는 지나가는 차를 세우고 교통사고를 당한 윤옥이라는 병원으로 데려간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주인공인 노형사 신철호 주임의 아들이고 금성전업 사장의 딸인 수미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칼럼을 쓰느라 옛날 영화 시나리오를 뒤지면서 눈치챈 것이 하나 있는데, 60년대 영화에는 유달리 자기보다 높은 계급의 여자와 결혼을 앞둔 남자들이 많이 나온다. 거의 요새 연속극의 신데렐라 수준이다. 단지 여기서 연애 과정은 수상쩍을 정도로 제거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들은 이미 약혼한 상태이다. 두 사람이 만난 이유도 여자의 아빠인 보스가 남자주인공을 좋게 보았기 때문인 경우가 많고, 데릴사위 이야기도 은근히 많이 나온다. 이런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에게 결혼은 로맨스의 결과가 아니라 신분상승의 과정이다. 60년대에 주인공이었던 이들이 세월이 흐르면 연속극 악당이 되는데, 나에겐 이게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보인다. 이종기 는 신철호 주임의 집안 장면을 통해 신철호의 직업이 경찰이고 자식들에게 엄격한 아버지라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넣는다. 영숙: 아유 기분 나뻐! 나 오늘 아버지 땜에 학교에서 애들하구 싸웠어! 철호: 공부는 안하구 미친년처럼 뭣하러 싸워! 영숙: 아버지의 그 날카로운 눈초리 때문이죠, 뭐! 김부인: 너도 내년이면 대학에 갈 애가 뭔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철호: 고등학교 이상은 안돼! 부엌일이나 하다가 시집이나 가! 영숙: 가래두 안가요. 쨔브의 딸이 대학에 가서 뭘해요? 철호: 뭐 쨔브? 영숙아 너 그 말 어디서 배웠니? 영숙: 학교애들이 쨔브의 딸이라고 놀리니까 배웠죠! 가족의 화목한 대화는 집에 걸려온 전화로 중단된다. 철호는 르발 다방 사건으로 불리는 유괴사건을 수사 중인데 그만 유괴된 아이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수사본부의 형사들은 호들갑 떤 언론을 비난하지만 그래도 주인공인 철호는 최종책임이 경찰에게 있다는 걸 안다. 경찰서에서 철호는 막 접수된 ‘악질운전수’ 사건의 증인이 그의 아들 시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어지는 경찰서 장면과 회사 장면에서 시우가 얼마나 반듯하고 잘 났고 운도 좋은 청년인지 알려주는 대사들을 끝도 없이 들어야 한다. 두 번째 유괴사건이 일어난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이번에 유괴된 사람은 곧 철호의 사돈이 될 윤 사장의 딸 수영이다. 그러니까 시우의 약혼녀 수미의 동생인 것이다. 유괴범의 협박편지가 날아들고(“돈이 필요해서 댁의 수영이는 내가 맡아 있오. 경찰에 알리면 수영이가 어떻게 된다는 건 알아서 처리하시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진 조용하게 기다리시요.”) 당연히 가족은 경찰에 알린다. 아이의 안전보다 철호를 개입시킨다는 스토리의 논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형사가 사돈 집안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이니 좀 맥이 풀리긴 해도 이 뒤의 수사 묘사는 군더더기 없고 진행도 빠른 편이다. 윤 사장이 김남규라는 직원을 최근에 해고했고 르발 다방 사건의 협박 편지와 이번 편지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한 경찰은 르발 다방 주인에게 김남규의 사진을 보여주고 그의 본명이 김영일이며 자주 온 단골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하지만 체포하고 보니 그는 알리바이가 있고 그의 죄라고는 위조증권을 팔려 했다는 것밖에 없다. 이때 철호에게 협박전화가 걸려온다. “당신이 명수사관이라고는 하지만 이번 유괴사건의 수사는 중단하시오. 당신의 아들도 하나의 범죄자요. 이상 더 수사를 계속하면 나는 당신의 아들의 죄상을 폭로하겠오!” 여기서 나는 협박범을 연기하며 “당신의 아들도 하나의 범죄자요” 같은 대사를 읊어야 했던 당시 성우의 고충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시우에게 뭔가 있기는 하다. 유괴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는 교통사고 이야기로 영화를 시작한 것도 그렇고, 그 뒤에도 교통사고 피해자 윤옥 주변을 얼쩡거리는 걸 보면. 철호는 아들에게 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수사는 진행된다. 전화추적을 통해 공중전화로 윤 사장에게 협박을 한 서대문 꽃제비 용이라는 남자가 잡힌다. 그는 자기가 심부름만 했을 뿐이고 주범은 박영기라는 남자라고 자백한다. 하지만 영기는 아이와 함께 사라졌고 이번엔 시우에게 아버지의 수사를 중단시키라는 쪽지가 날아든다. 여기까지가 현대 관객들이 일반적인 유괴사건 영화의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기가 < 범인은 너다 >를 쓰면서 진짜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건 다음에 나온다. 알고 봤더니, 뺑소니를 치고 달아난 ‘악질운전수’는 시우 자신이었다. 협박 편지에 겁먹고 죄의식에 시달린 시우는 수미와 일단 파혼을 하고 사고로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윤옥과 결혼하려 한다. 윤옥에겐 이미 김군이라는 약혼자가 있는데도! 철호는 자수하라고 권유하지만 시우의 대답은 대충 이런 것들이다. “아버지는 위선자예요. 자기 독단의 정의감 때문에 우리들의 행복을 이렇게 짓밟아도 괜찮아요?” “아버지는 자식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비겁할 정도로 자기만 정당한 위치에 서실려구 해요. 순간의 앗차 실수로 한 평생을 한 여성에게 바치겠다는 눈물의 호소는 들리지도 않으세요?” 그럼 자기가 차로 당신을 치어서 미안하니 결혼해달라고 우기는 남자를 보는 윤옥의 입장은 생각이나 해봤니? 여러분은 여기서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천만에. 갈등은 여기서 끝이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이미 시우는 아빠에게 떠밀려 자수를 했고 아빠는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과장에 따르면 사표는 상부에서 ‘보이코트’당했고, 철호에 따르면 자백을 들은 윤옥과 윤옥의 오빠 윤식은 다 용서했단다. (“자식놈을 감옥에 보내면 자기들 두 남매가 당국에 호소하겠다나요.”) 감동한 과장은 철호에게 말한다. “그게 다 신주임이 착한 탓이오. 이번 신주임 부자지간의 아름다운 얘기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고 나는 자부하고 싶소.” 아무래도 이 양반은 ‘아름다운’이라는 단어를 나와 다른 의미로 쓰나 보다. 자백한 뒤에도 시우는 윤옥과 결혼하겠다는 망상을 버리지 못한다. 약혼자가 있다고 분명 밝혔는데도 심지어 이제 사랑하게 되었다고 애걸복걸한다. 이 정도면 스토커 수준이고 수미 입장에선 결혼 전에 약혼자가 이런 남자인 걸 알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 하겠는데, 이 영화의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심지어 꽃까지 들고 윤옥의 병실에 찾아와 “두 분의 애정이 진실하다면 저도 후원을 애끼지 않겠어요” 따위의 소리나 하고 있다. 동생이 살인범에게 유괴되어 목숨이 위태롭다는 건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지? 하여간 윤옥이 계속 거절하자 이 모든 소동은 없었던 일이 되고 모든 게 마무리된다. 아, 참. 유괴사건. 알고 봤더니 박영기는 시우의 중학교 동창이었고 우연히 교통사고를 목격해서 협박용으로 쓴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클라이맥스여야 할 텐데 각본상에서는 영 허술하다. 약속장소에 나온 영기는 수미에게서 10만 원 받고 수영을 돌려준다. 하지만 이미 경찰이 포위하고 있어서 그는 곧 체포된다. 자신의 협박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 그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나 보다. 물론 작가 이종기는 시우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범인을 체포하고 아이를 구출하는 건 그냥 형식적인 결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겠지. 인물 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