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살인재능
8년 동안 다니던 회사에서 ‘명퇴’당했다. 갈 곳이 없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은 그 사실을 숨겼던 남자에게 결국 결별을 선언한다. 막막하다. 생계를 위해 낮에는 닭꼬치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뛰지만, 밀려오는 자괴감에 점점 자신감을 잃어간다. 그때, 애인의 남동생이 위험한 제안을 해 온다. 자동차 절도를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 이 남자 민수는 그 이후 자신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윤계상 , 김규리 주연의 < 풍산개 >는 순제작비 2억여 원으로 완성했다. 그리고 여름 대작들의 틈바구니에서 71만 명을 동원했다. 아마도 김기덕 감독이 각본을 쓰고, 김기덕의 ‘제자’들이 연출한 영화 중 손에 꼽을 정도의 관객 수일 것이다. < 살인재능 >은 그 <풍산개>의 전재홍 감독이 4년 만에 만든 작품이다. 어쩌면 이천희 , 차수연 주연으로 그가 31살에 찍었다는 데뷔작 < 아름답다 >와 닮았을 거라 지레짐작할 수도 있겠다. 이번 역시 김범준 , 배정화 라는 신인 배우를 내세운 저예산 영화지만 단언컨대, 전혀 다르다. 전재홍 감독이 연출은 물론, 각본과 촬영, 음악까지 참여해서가 아니다. 그 사이 거대 예산 영화의 연출 제의를 받았다가 고배를 마셔야 했던 전재홍 감독은 “세 번째 영화를 만들고 나서야 ‘현실’이 보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 현실이란 한국사회의 어떤 풍경과 그 풍경을 목도한 전재홍 감독의 체험과 맞닿아 있다. 소위 ‘청년실업’과 비견되는 민수의 실직과 심리는 3년여 동안 영화 연출과 거리를 둬야 했던 감독의 경험들과 겹쳐져 있다고 한다. 청년실업뿐 아니다. 좁은 오피스텔에 거주하며 결혼, 취업, 성공을 고민하는 < 살인재능 >의 민수는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초상이다. 그러한 현실성을 기반으로 민수라는 인물의 비루한 일상과 심리를 쫓아가던 영화는 중반 이후 과감한 전환을 시도한다. 민수가 우연히 만난 옛 직장 상사를 충동적으로 죽이게 되면서, < 살인재능 >은 사이코 심리스릴러로 탈주하기 시작한다. 낯선 타인을 죽이는 것은 내 의지인가, 본능인가. 살인의 지속은 쾌락 때문인가, 생존(돈벌이)을 위함인가. 남동생의 “형,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라는 칭찬은 자동차 절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민수는 그 말을 살인에 관한 재능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보인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민수는 멈출 수 없을 뿐이다. 재능이라기보다 중독에 가깝다.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애인과의 미래를 위해서도, 스스로의 자존감을 위해서도 살인은 계속돼야 한다. 여기서 멈추면 다시 닭 비린내에서, 새벽에 남의 차 운전대를 잡는 삶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무엇이 민수를 살인 ‘중독’으로 이끄는가. 흔한 심리스릴러를 거부하는 전재홍 감독은 민수를 살인으로 내모는 동인을 결국 사회적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결혼이라는 안정적인 조건의 상징인 애인과의 관계는 유형무형의 압박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죽이는 민수의 행위는 무한경쟁을 요구하는 이 사회의 가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민수가 흔한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피해자가 남긴 아이의 사진을 발견하고 민수의 감정이 짐짓 흔들리는 장면에서, 우리는 전재홍 감독이 민수를 특별한 살인자가 아닌 보편의 억압 받는 젊은이로 은유하고 있음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결국 그의 범행을 알게 된 동생까지 죽이고, 애인이 이 모든 사실을 눈치채게 된 후, 민수는 수감된다. 민수는 애인에게 그간 모은 돈이 든 통장을 남긴다. 그 통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애인의 뒷모습,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모를 뒷모습으로 끝나는 라스트 신은 꽤나 여운이 길다. 그 재능으로 남긴 유산이 보잘것없을 것이기에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