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고등연예관(제2대정관, 세계관)
경성고등연예관은 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흥행사 가네하라 긴조(金原金藏)가 황금정 제63통 7호에 세운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전용관으로 1910년 2월 18일 개관했다. 《국민신보》에 게재된 광고를 보면 경성고등연예관은 1909년 10월 영업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면서 다음해인 1910년 2월까지 개관이 연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고등연예관이 처음 자리한 ‘황금정 제63통 7호’는 원래 남부(南部) 조동(棗洞), 즉 대추나무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경성고등연예관은 여기 농상공부(農商工部) 건너편, 지금의 기업은행 본점 자리에 세워졌다가 1911년 9월, 맞은편인 황금정 3번지로 신축 이전했다. 현재 모 증권회사빌딩이 자리한 곳이다. 그러나 1912년 6월 황금정 도로 확장으로 건물의 일부가 헐리게 되자 영업을 중단, 개축하여 1912년 9월 16일 영업을 재개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의 설립자 가네하라 긴조는 태국에서 와타나베 토모요리(渡邊智賴)라는 사람 밑에서 활동사진업을 했는데, 조선에 건너와 경성고등연예관을 세우고 와타나베가 운영하던 ‘K다이아몬드’ 회사 배급작을 들여와 상영했다. 와타나베는 태국의 초기 영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태국에 일본식 흥행 문화가 정착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와타나베나 가네하라처럼 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눈을 돌린 배경에는, 태국에서의 흥행 경험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던 조선의 활동사진 흥행업 진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개관 직후 경성고등연예관의 프로그램은 다양한 장르의 단편영화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 사이사이 간단한 무용 등의 여흥이 곁들여졌다. 이 프로그램은 영화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프로그램의 교체 주기는 시기마다 차이가 있는데, 개관 이후 1910년 5월까지는 월 2회(매월 1일, 15일) 교체되었고 6월부터는 월 3회(매월 1일, 11일, 21일) 교체됐다. 1912년 3월 1일부터 1913년 3월 말까지는 다시 월 2회(매월 1일, 15일)가 되었으나, 경쟁 영화관들이 1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하기 시작하자 1913년 4월부터 폐관되는 9월까지는 일주일마다 프로그램을 바꿨다. [자료]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광고(《황성신문》, 1910.02.18) 앞서 언급했듯이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필름은 태국의 영화회사 K다이아몬드가 배급한 것이었다. K다이아몬드는 1910년 쭐랄롱꼰 국왕의 장례식을 기록하는 등 태국의 왕실 행사를 담은 실사영화를 여러 편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를 따라 경성고등연예관 또한 조직을 정비하고 환등 및 활동사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1년 8월 경성고등연예관의 신축 이전을 앞두고 조선에 건너온 가네하라는 활동사진 제작과 상영을 위해 가네하라상회를 신설, 산하에 연예부, 사진부, 판매부를 두었다. 연예부에서는 경성고등연예관과 활동사진순업대를 운영하고 사진부에서는 환등과 활동사진을 제작하며 판매부에서는 활동사진 필름이나 환등 기계 등 다양한 물품들을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경성고등연예관에서는 1912년 9월 16일 재개관을 맞아 촬영부를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환등과 활동사진 제작에 나선다. 더 나아가 1913년 2월에는 여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전기응용 방식을 대신할 키네오라마(キネオラマ)를 설치했다. 키네오라마는 일출(日出), 석립(夕立, 소나기), 석효(夕燒, 저녁노을), 명월(明月) 등의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치였다. 1913년 전후로 대정관을 위시하여 우미관, 황금관 등 세 곳의 활동사진 상설관이 등장하자 경성고등연예관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에 1913년 4월 1일을 기해 경성고등연예관은 대대적인 혁신을 선언한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구(新舊) 일본극을 더하여 매주 프로그램을 바꾼다. 둘째, 입장료를 저렴하게 개정한다. 셋째, 도쿄에서 변사 후지모토 류코(藤本龍光)를 초빙하여 다나카 아사히유(田中旭湯)와 함께 활동사진 설명을 맡겨 변사 진용을 강화한다. 다섯째, 관객의 대우를 한층 새롭게 한다. 이러한 조치는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을 모두 유인하려던 기존의 전략을 포기, 일본인 전용관으로 바꾸겠다는 뜻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전용관으로 전환하며 대대적인 혁신을 시도했음에도 경성고등연예관은 치열한 상설관 사이의 경쟁에서 도태되었고, 결국 1913년 9월 1일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을 선언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의 건물과 흥행권은 대정관을 운영하던 닛타 고이치(新田耕市)에게 매각되었으며, 이후 경성고등연예관은 제2대정관이라 이름이 바뀌어 1913년 10월 31일부터 운영을 재개했다. 제2대정관 개관 광고에는 주임 변사 이마이 요시카(今井芳香), 차석 변사 와타나베 마쓰카제(渡邊松風)라 기록되었다. [자료] 제2대정관 개관 광고(≪조선신문≫, 1913.10.30) 제2대정관이 개관하면서 경성의 일본인 상설관은 제1대정관(대정관), 제2대정관, 황금관 세 곳이 된 반면 아직 조선인 상설관은 우미관 한 곳뿐이었다. 닛타 고이치는 대정관, 제2대정관, 황금관 3개관이 6~7만 명에 불과한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을 나누는 것보다는, 하야가와연예부의 필름을 제공받아 20만 명의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던 우미관을 견제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제2대정관을 조선인상설관으로 전환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1914년 6월, 제2대정관의 유일한 조선인 변사였던 김덕경(金悳經)을 변사장에 임명하고, 설명 주임 이병조(李丙祚), 차석 최병룡(崔炳龍) 등의 변사진을 꾸려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한다. 당시 제2대정관에서는 일본인 상설관에서 상영하던 방식대로 여러 명의 변사들이 출연하여 마치 오늘날의 성우와 같이 각자 주어진 배역을 맡아 스크린 속 배우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뿐 아니라 여변사 강경옥(康鏡玉)과 소년변사 이병호(李丙浩)를 두어 여자 배역과 아이역의 연기를 담당하게 했다. 이처럼 영화 속 어떤 배역의 목소리를 도맡아 연기하는 변사를 연극변사 혹은 성색(聲色)변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조선인 상설관은 활동사진의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타이틀을 읽어주는 역할의 소위 설명변사가 독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2대정관의 연극변사 제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듯 보인다. 제2대정관을 조선인 상설관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려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닛타연예부는 대정관의 경쟁 상대인 황금관을 견제하기로 전략을 바꾼다.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필름을 제공받던 우미관을 공략하여 하야가와연예부 대신 제2대정관의 필름을 함께 사용하는 동시에 제2대정관을 일본인 전용관으로 되돌리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1915년 4월 제2대정관은 조선인 상설관에서 다시 일본인 상설관으로 전환되어 세계관(世界館)이라고 이름까지 바꾼다. 특약에 따라 제2대정관을 운영하던 닛다연예부는 우미관으로부터 매달 2백원의 보상금을 받기로 했으며, 우미관은 세계관과 같은 필름을 매월 5백 원의 싼 가격으로 공급받아 사용하기로 했다. 이로써 닛다연예부에서 운영하던 세계관은 경성 서쪽의 일본인들을 주요한 관객으로 삼을 수 있었고, 닛다연예부의 필름을 공급받는 우미관은 경성의 20만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조선인 상설관이라는 지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 전용관으로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관은 폐관한다. 1915년 9월 20일 본정 한복판에 유락관(有樂館)이 들어서면서 활동사진 흥행 권리를 유락관에 넘기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경성고등연예관을 시작으로 제2대정관, 세계관으로 이어진 영화관의 역사가 사라지고 그 권리만 유락관으로 옮겨갔다. 경성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은 훗날 영화관과 상관없는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더 이상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99~134쪽. [사진](상단). 경성고등연예관 외관(《국민신보(國民新報)》, 1909년 10월 5일자.) [자료] 《황성신문》, 1910.02.20. 世界 苐一 活動冩真 開館 ● 本舘新築落成 에 就 야 二月 十八日(陰曆 正月 九日) 로 開館 ● 二月 二十日(陰曆 正月 十一日 午后 六時 브터 年中無休 로 一般 顧客 의 觀覽 에 供 ● 本館 의 寫眞 은 佛國 파데 會社 의 最新 器機 를 使用 고 每週 輸入 世界 各國 의 最 히 壯觀 에 極 山水 의 風景、人事 의 現象 은 勿論、滑稽、奇術 及 世界 有名 의 諸般 珍事 를 映寫 야 一般 活動寫眞界 에셔 斷 히 企及 키 能 치 못 것을 明言 ● 本館 은 寫眞 의 外 에 日本 美人 의 花 와 如 電氣踊 을 間間 히 行 고 且 韓國 妓生 의 舞踏 를 加 야 錦上添花 의 觀覽 이 有 ● 本舘 의 建築 宏壯 은 內部 의 完全、 장 篩 의 美麗、待遇 의 懇篤、衛生 設備 의 整然 이 模範的 演藝舘 이 될 것을 一般 에게 誇張 ● 本館 의 擔任 技師 靑森縣人 中村初太郞 이니 活動寫眞業 의 本邦 創業 以來 로 吉澤商店 及 파데 會社 에 技師 兼 敎授 의 任 에 在 야 精巧 老鍊 의 技術 이 有 야 斯界 의 錚錚 의 評 이 有 바 其 映寫 의 巧妙 本館 의 壯談 바요 ● 高尙 고 優美 活動寫眞 은 敎育 又 家庭 의 一時 娛樂 이 此 에 優 것이 無 니 開舘 後 陸續 御來覽 심을 深 히 希望 入場料 四等 金拾錢 三等 金貳拾錢 二等 金參拾錢 一等 金伍拾錢 特等 金一圓 每日 午後 六時 開舘 但 五人 以上 組合 觀覽者 에게 一割引 十人 은 二割引 京城黃金町(農商工部通) (南部東洞) 京城高等演藝舘 [자료] 《황성신문》, 1910.04.10. ● 銀甁 下賜 大皇帝 陛下 게 셔 去七日 에 高等演藝館 에 活動寫眞 을 招入 御覽 심은 已報 어니와 該 館主 日本人 宮田伊助 에게 銀製 花甁 一個 를 下賜 셧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1.08.11. ● 金原商會 의 新設 目下 黃金町 三番地 에 新築 落成 은 九月頃 인 故 로 卽時 開業 다 向者 에 館主 金原 氏 가 來鮮 야 營業 의 方針 을 變更 고 京城高等演藝館 은 仝會 의 演藝部 가 되야 今後 에 大改良 을 加 고 昔年 東京 에셔 郵便局長 으로 勤務 던 成淸 氏 를 招 야 演藝部 로 敎育的 活動寫眞 으로써 全道 에 巡業 케 며 又 寫眞部長 에 工山 氏 招聘 며 又 東京 三越吳服店 의 寫眞部 에 在 야 技術 이 卓越 大庭 氏 超 야 一般 寫眞 의 撮形 은 勿論 고 活動畵 及 幻灯 도 製作 케 며 販賣部 活動寫眞畵 及 幻燈器械 外 에 日鮮人 의 實用品 도 薄利 로써 販賣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4.06.03. ● 第二大正館 新面目 ▲ 구리 뎨이대졍관에셔 ▲ ▲ 슌젼 죠션인을 위 활동 ▲ 이왕 , 구리개 고등연예관을 , 뎨일대졍관에셔 사드린 후 , 일홈을 뎨이대졍관 ( 第二大正館 ) 으로 곳치고 , 활동사진을 영샤 즁이더니 , 시셰의 요구를 응 여 , 오 날 지 , 디인의 경영으로 , 디인 변 ( 辯士 ) 지 두고 , 뎐업 던 것을 , 일톄 페지 고 , 죠션사 으로 야곰 , 사진 셜명을 계 야 , 죠션인 젼문 ( 專門 ) 으로 뎡 고 , 참신 긔발 , 셰게 인졍 풍속 등 , 여러 가지 사진을 가져다가 , 오 밤부터 , 시작 다 오 밤부터 흘 동안은 , 입장료 ( 入場料 ) 를 특별히 감 야 , 웃층은 평균 십젼으로 , 아 층은 , 평균 오젼으로 다 며 , 젼덕경 ( 全德經 ) 최병룡 ( 崔炳龍 ) 두 변 의 류챵 쾌활 설명이 , 잇슬 터이라더라 .